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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평점 :

3편의 짧은 단편이 실려 있던 클레어 키건의 소설~!
책 내용이 궁금해서 미리 다른분들이 쓴 리뷰를 보다보니 <남극> 파트 대한 이야기가 많길래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일단 앞의 2개 파트를 가볍게 넘기고, <남극>파트부터 시작했다. (궁금한건 못 참아!)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아주 짧고도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집이다.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삶의 결심, 욕망, 상실, 그리고 후회와 감정을 응축해낸다.
키건 특유의 절제된 문장과 섬세한 묘사는 인물의 심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감각 깊숙이 파고든다.
3편 「남극 (Antarctica)」
이 단편은 세 편 중에서도 가장 짜릿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라 생각했다.
겉보기엔 한 여성의 일탈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엔 억눌린 욕망과 감정의 해방이 응축되어 있다.
이 짧은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지 다 언급하기도 힘들지경이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여자가 있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생각한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이 물음은 윤리보다 앞선 감정의 근원에서 솟아난 것이다.
그녀는 “너무 늙기 전에” 그 궁금증을 해소해보고 싶다는 일종의 다짐 상태가 되어 도시로 향한다.
마치 일탈의 성지처럼 그녀가 도착한 호텔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전 성직자들의 숙소 근처다.
그 장소 배치 자체가 이미 도덕과 욕망 사이의 긴장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른다.
그 행위는 마치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일종의 정서적 ‘무마’를 위한 제스처처럼 보였다.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가리려는 보상 심리”가 아닐까.
저녁이 되자 그녀는 한껏 꾸미고 술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는 그녀에게 놀랍도록 빠르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언젠가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나누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말.
도시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읽었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면, 그 내용을 읽었다면 그녀의 행동이 바뀌었을까? 오히려 그녀는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그의 접근이 반가웠으리라.
애초에 이번 여행 자체가 누군가의 접근을 기다리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그녀는 대화 도중에 자신이 결혼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가 기혼임을 알게 됐음에도 거리낌이 없다.
포켓볼을 치자는 제안은 가볍고도 노골적인 접근이었다.
여자는 점차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그러다 둘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사실 나의 ‘이상한 느낌’이 더 강력하게 시작된건,
둘이 시장에 있을 때 시장 장면을 묘사할 때부터였다.
남자가 시장을 데리러 왔을 때, 얼음 위에서 죽은 눈을 하고 있는 갓 잡은 물고기와
살아 있는 듯한 송어를 골라서 송어 머리를 자르고 포일로 싸서 가져온 물고기에서
기분 나쁜 묘한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남자가 살고 있는 공간은 너무도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무늬 하나 없는 벽, 창틀의 먼지, 얼룩이 남은 머그잔, 눅눅한 냄새, 장식 하나 없는 거실, 크리스마스 흔적조차 없는 그 집은 마치 ‘사람의 온기’가 오랫동안 지워진 장소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그 공간은 일종의 ‘죽은 집’이다. 나로서는 이 지점부터 불길한 직감을 품게 된다.
이쯤부터 주인공 여자에게 말을 하고 싶어진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그냥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게 어때?!! 당장말이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 남자가 “지금까지 알았던 남자들 중 가장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였을까?
아마도 이 남자의 일상적인 자연스런 태도와 비폭력적인 매너 때문이었을까.
남자는 “당신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보상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욕조에서 편안하게 목욕하게 하고, 물을 닦아주고 수건으로 감싸며, 머리칼을 빗어준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묘사되어, 긴장되어 있던 경계심을 잠시 풀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의심으로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당신은 아메리카 대륙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말에 남자는 “내가 콜럼버스가 될게요”라고 답한다.
이 대화는 은유로 포장된 정사를 동의한다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장면에서 둘은 마침내 욕망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간다.
관계 이후, 담배를 피우는 둘. 그러는 사이에 여자는 집 안에서 산탄총 탄약통을 발견한다.
남자는 그것이 선물용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둘이 저녁으로 샐러드와 숭어를 먹으면서 우연히 나누게 된 대화 주제는 ‘지옥’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수녀님에게 들은 말을 꺼낸다. 지옥이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가 상상하는 최악의 장소라고. 그녀에게 지옥은 “반쯤 얼어 있지만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곳.”
즉, 냉기와 고립,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 있는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어 말한다. “차라리 태양 아래 악마가 지켜보는 편이 낫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더 끔찍하다.”
그 순간, 그녀는 와인을 들이켜며 그 냉기를 떨치려 한다.
마치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너무도 실감나는, 혹은 어쩌면 그녀가 이미 겪고 있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자신의 지옥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폐한 곳”이라고 말한다.
악마도, 친구도, 말 걸 이도 없는 완전한 고립.
그에게 지옥이란 타인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공간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묘사된 두 사람의 지옥은, 놀랍게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수녀님에게 배운 지옥의 정의를 다시 끄집어낸다.
“지구상의 모든 모래가 다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면,
지옥이란 그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 그리고 고립.
이건 마치 그녀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이다.
나는 이 대화가 그저 지나가는 대사가 아니라고 느꼈다.
이 장면은 소설 전체에 흐르는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핵심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말한 ‘지옥’의 이미지 안에,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의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에 농담처럼 말한다.
“예배당에 있던 수녀님이 지금의 나를 보면 얼마나 웃을까?”
웃음 섞인 말이지만, 그 말 안엔 자조와 슬픔, 그리고 어떤 예감이 담겨 있었다.
이 대화는 그녀가 상상한 지옥의 풍경—의식을 잃지 않고 냉기에 갇힌 채 살아 있는 감옥—은
그녀의 현재 삶, 어쩌면 결혼 생활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
표면상 ‘행복한 결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정작 그녀 자신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남자의 지옥 또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폐한 곳’이다.
그는 말한다. “악마도 없고, 친구들도 다 그곳에 있을 테니까.”
이 대사는 그의 냉소를 드러내면서도 사실은 관계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을 상징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국 『남극』은 정서적 고립에 놓인 사람들이 그 고립을 깨뜨리려는 시도조차도
어쩌면 또 다른 고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옥이란 불이 타오르는 곳이 아니라 누구도 말 걸어주지 않는 차가운 공간이라는 걸
이 단편은 차분하고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3편을 순식간에 보고 난 후, 1편과 2편의 글을 읽었다.
3편을 보고 읽었더니 오히려 잔잔한 느낌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해당 파트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1편 「너무 늦은 시간 (So Late in the Day)」
한 남자가 조용한 금요일 오후, 집에 돌아와 신문을 읽고 맥주를 마시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프랑스 여성과의 약혼을 스스로 깨뜨렸다.
사랑하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질서를 우선시한 그 결단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을 후회를 남긴다. 내용은 단조롭지만 그 뒤에 숨겨진 ‘말하지 않은 감정’이 울림처럼 번진다.
가장 잃기 쉬운 건 다름 아닌 바로 곁에 있는 것들이라는 걸 조용히 상기시켜주는 이야기다.
2편 「기념일 (The Long and Painful Death)」
한 여성 작가가 독일의 괴테가 죽은 집에 머문다.
문학적 상징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작품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싸운다. 그녀의 내면은 조용한 항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괴테의 유령처럼 배회하는 남성 중심 문학 세계에 대한 은근한 반항이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남극」은 인간 내면의 호기심, 일탈, 그리고 그 대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흔히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한 번쯤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이 내용은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감정의 파장을 매우 섬세하게 보여준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세 편의 단편을 통해 말보다 더 큰 침묵의 힘,
그리고 행동보다 더 깊은 비행동의 여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클레어 키건은 격렬한 사건 없이도 사람의 내면을 흔드는 데에 성공한다.
그녀가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가 무심코 넘긴 선택의 순간들이다.
말하지 않은 한마디, 하지 않은 행동, 놓쳐버린 눈빛 하나가 시간이 흐른 뒤
얼마나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키건은 후회를 드러내지만, 그 후회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서툴고, 때로는 너무 늦게야 진실을 깨닫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다정하면서도 날카롭다.
그녀는 독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지금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 선택이 혹시, 나중에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마음속을 떠돌게 되지는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의 침묵과 망설임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그렇게 이 책은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남는다.
클레이 키건의 특유의 여백이 남는 글을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p.s : 너무 3편에 몰입한 리뷰 내용 같아서. 괜히 뻘쭘하지만,
3편 내용이 개인적으로 너무 몰입이 된 내용이었기에..
다음에 재독을 하게 되면 1,2편 내용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헤쳐 보기로 한다. 하핫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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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지옥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그녀가 송어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고 물었더니 수녀님이 말했죠. ‘지구상의 모든 모래를 생각해 봐. 모든 해변과 모래 채석장, 해저, 사막을 말이야. 그 모래가 전부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렴. 거대한 요리용 타이머 같은 데 말이야. 일 년에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고 했을 때 영원은 세상의 모든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생각해 봐요! 우린 모두 겁에 질렸죠. 아주 어렸거든요."
"아직도 지옥을 믿는 건 아니죠?" 그가 말했다.
"네, 보면 몰라요? 에마누엘 수녀님이 지금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몸을 섞는 나를 보면 얼마나 웃길까요." 그녀가 송어 살점을 떼어내 손가락으로 먹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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