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늦은 시간
클레어 키건 지음, 허진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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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편의 짧은 단편이 실려 있던 클레어 키건의 소설~!
책 내용이 궁금해서 미리 다른분들이 쓴 리뷰를 보다보니 <남극> 파트 대한 이야기가 많길래 더욱 궁금해졌다. 그래서 일단 앞의 2개 파트를 가볍게 넘기고, <남극>파트부터 시작했다. (궁금한건 못 참아!)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세 편의 단편으로 구성된 아주 짧고도 긴 여운을 남기는 소설집이다. 각기 다른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며, 삶의 결심, 욕망, 상실, 그리고 후회와 감정을 응축해낸다.
키건 특유의 절제된 문장과 섬세한 묘사는 인물의 심리를 겉으로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독자의 감각 깊숙이 파고든다.

3편 「남극 (Antarctica)」
이 단편은 세 편 중에서도 가장 짜릿하고 날카로운 이야기라 생각했다.
겉보기엔 한 여성의 일탈 이야기처럼 보이지만, 그 내면엔 억눌린 욕망과 감정의 해방이 응축되어 있다.
이 짧은 이야기에 숨겨져 있는 메시지가 얼마나 많은지 다 언급하기도 힘들지경이었다.

행복한 결혼 생활을 하던 한 여자가 있다.
그러나 문득 그녀는 생각한다. “다른 남자와 자면 어떤 기분일까?”
이 물음은 윤리보다 앞선 감정의 근원에서 솟아난 것이다.
그녀는 “너무 늙기 전에” 그 궁금증을 해소해보고 싶다는 일종의 다짐 상태가 되어 도시로 향한다.
마치 일탈의 성지처럼 그녀가 도착한 호텔은, 아이러니하게도 예전 성직자들의 숙소 근처다.
그 장소 배치 자체가 이미 도덕과 욕망 사이의 긴장을 상징하는 듯하다.

그녀는 평상시와 다름없이 아이들과 남편을 위한 크리스마스 선물을 고른다.
그 행위는 마치 자신이 하려는 일에 대한 일종의 정서적 ‘무마’를 위한 제스처처럼 보였다.
적절한 단어를 찾자면, “스스로에 대한 죄책감을 가리려는 보상 심리”가 아닐까.

저녁이 되자 그녀는 한껏 꾸미고 술집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 남자가 다가온다.
아직 이름도 모르는 그는 그녀에게 놀랍도록 빠르게 자신의 삶을 털어놓는다.
언젠가 누군가가 이런 말을 한 적이 있다. “자신의 이야기를 너무 쉽게 나누는 사람을 경계하라”는 말.
도시로 가는 기차 안에서 읽었던 책에 이런 내용이 있었다면, 그 내용을 읽었다면 그녀의 행동이 바뀌었을까? 오히려 그녀는 자신에게 먼저 말을 걸어준 그의 접근이 반가웠으리라.
애초에 이번 여행 자체가 누군가의 접근을 기다리기 위해서 시작된 것이 아니었나.

그녀는 대화 도중에 자신이 결혼했음을 밝혔다.
하지만 남자는 그녀가 기혼임을 알게 됐음에도 거리낌이 없다.
포켓볼을 치자는 제안은 가볍고도 노골적인 접근이었다.
여자는 점차 경계심을 내려놓는다. 그러다 둘은 함께 그의 집으로 향한다.

사실 나의 ‘이상한 느낌’이 더 강력하게 시작된건,
둘이 시장에 있을 때 시장 장면을 묘사할 때부터였다.
남자가 시장을 데리러 왔을 때, 얼음 위에서 죽은 눈을 하고 있는 갓 잡은 물고기와
살아 있는 듯한 송어를 골라서 송어 머리를 자르고 포일로 싸서 가져온 물고기에서
기분 나쁜 묘한 느낌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그렇게 도착한 남자가 살고 있는 공간은 너무도 비어 있는 느낌이었다.

무늬 하나 없는 벽, 창틀의 먼지, 얼룩이 남은 머그잔, 눅눅한 냄새, 장식 하나 없는 거실, 크리스마스 흔적조차 없는 그 집은 마치 ‘사람의 온기’가 오랫동안 지워진 장소처럼 느껴진다.

말하자면 그 공간은 일종의 ‘죽은 집’이다. 나로서는 이 지점부터 불길한 직감을 품게 된다.

이쯤부터 주인공 여자에게 말을 하고 싶어진다.

“뭔가 느낌이 안 좋아. 그냥 이 공간을 빠져나가는게 어때?!! 당장말이야!”라고 말이다.

하지만 그녀는 오히려 이 남자가 “지금까지 알았던 남자들 중 가장 위협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

어째서였을까?

아마도 이 남자의 일상적인 자연스런 태도와 비폭력적인 매너 때문이었을까.

남자는 “당신에게 뭐가 필요한지 알아요. 보상핌이요. 이 세상에 보살핌이 필요 없는 여자는 없죠.”라고 말했다. 그는 그녀를 욕조에서 편안하게 목욕하게 하고, 물을 닦아주고 수건으로 감싸며, 머리칼을 빗어준다. 그 행동 하나하나가 너무나 자연스럽고 부드럽게 묘사되어, 긴장되어 있던 경계심을 잠시 풀게 만들기도 했다. 하지만 동시에 기묘한 느낌은 사라지지 않고 여전히 의심으로 남은 상태가 되었다.

그녀는 “당신은 아메리카 대륙 같아요”라고 말했다.

그말에 남자는 “내가 콜럼버스가 될게요”라고 답한다.

이 대화는 은유로 포장된 정사를 동의한다는 장면이 아니었나 싶다.

이 장면에서 둘은 마침내 욕망의 중심으로 밀고 들어간다.

관계 이후, 담배를 피우는 둘. 그러는 사이에 여자는 집 안에서 산탄총 탄약통을 발견한다.

남자는 그것이 선물용이라고 말하지만, 나는 여기서 다시 긴장할 수 밖에 없었다.

이 남자의 정체는 도대체 뭘까?


둘이 저녁으로 샐러드와 숭어를 먹으면서 우연히 나누게 된 대화 주제는 ‘지옥’이었다.

그녀는 어릴 적 수녀님에게 들은 말을 꺼낸다. 지옥이란 사람마다 다르고, 각자가 상상하는 최악의 장소라고. 그녀에게 지옥은 “반쯤 얼어 있지만 의식을 잃지 않고 아무것도 느끼지 못하는 곳.”

즉, 냉기와 고립, 감각이 마비된 채 살아 있는 감옥 같은 공간이었다.

그녀는 이어 말한다. “차라리 태양 아래 악마가 지켜보는 편이 낫다. 아무것도 없다는 것이 더 끔찍하다.”

그 순간, 그녀는 와인을 들이켜며 그 냉기를 떨치려 한다.

마치 그 이야기가 자신에게 너무도 실감나는, 혹은 어쩌면 그녀가 이미 겪고 있는 일인 것처럼 느껴진다.

남자는 자신의 지옥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폐한 곳”이라고 말한다.

악마도, 친구도, 말 걸 이도 없는 완전한 고립.

그에게 지옥이란 타인과의 연결이 완전히 끊어진 공간이다.

서로 다른 언어로 묘사된 두 사람의 지옥은, 놀랍게도 서로를 비추는 거울 같았다.

그녀는 자신이 수녀님에게 배운 지옥의 정의를 다시 끄집어낸다.

“지구상의 모든 모래가 다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면,

지옥이란 그것이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다.”

끝나지 않는 시간, 그리고 고립.

이건 마치 그녀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이다.

나는 이 대화가 그저 지나가는 대사가 아니라고 느꼈다.

이 장면은 소설 전체에 흐르는 감정을 가장 잘 설명해주는 핵심 장면처럼 느껴졌다.

그녀가 말한 ‘지옥’의 이미지 안에, 이 이야기 속 인물들의 외로움과 불안,

그리고 말하지 못한 감정들이 담겨 있다고 생각했다.

그녀는 마지막에 농담처럼 말한다.

“예배당에 있던 수녀님이 지금의 나를 보면 얼마나 웃을까?”

웃음 섞인 말이지만, 그 말 안엔 자조와 슬픔, 그리고 어떤 예감이 담겨 있었다.

이 대화는 그녀가 상상한 지옥의 풍경—의식을 잃지 않고 냉기에 갇힌 채 살아 있는 감옥—은

그녀의 현재 삶, 어쩌면 결혼 생활 그 자체를 은유하고 있다.

표면상 ‘행복한 결혼’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정작 그녀 자신은 감정을 느끼지 못한 채 살아가고 있었던 건 아닐까?

남자의 지옥 또한 ‘사람이 아무도 없는 황폐한 곳’이다.

그는 말한다. “악마도 없고, 친구들도 다 그곳에 있을 테니까.”

이 대사는 그의 냉소를 드러내면서도 사실은 관계에 대한 절망과 무력감을 상징한다.

두 사람은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고립에 대해 말하고 있다.

결국 『남극』은 정서적 고립에 놓인 사람들이 그 고립을 깨뜨리려는 시도조차도

어쩌면 또 다른 고립으로 이어지는 과정을 보여주는 듯하다.

지옥이란 불이 타오르는 곳이 아니라 누구도 말 걸어주지 않는 차가운 공간이라는 걸

이 단편은 차분하고도 정확하게 말하고 있다.

3편을 순식간에 보고 난 후, 1편과 2편의 글을 읽었다.

3편을 보고 읽었더니 오히려 잔잔한 느낌처럼 느껴지는 이야기였다.

해당 파트의 내용을 요약해보자면 아래와 같다.

1편 「너무 늦은 시간 (So Late in the Day)」

한 남자가 조용한 금요일 오후, 집에 돌아와 신문을 읽고 맥주를 마시며 과거를 회상한다.

그는 프랑스 여성과의 약혼을 스스로 깨뜨렸다.

사랑하는 이를 믿지 못하고, 자신의 질서를 우선시한 그 결단은 결국 평생 지워지지 않을 후회를 남긴다. 내용은 단조롭지만 그 뒤에 숨겨진 ‘말하지 않은 감정’이 울림처럼 번진다.

가장 잃기 쉬운 건 다름 아닌 바로 곁에 있는 것들이라는 걸 조용히 상기시켜주는 이야기다.

2편 「기념일 (The Long and Painful Death)」

한 여성 작가가 독일의 괴테가 죽은 집에 머문다.

문학적 상징이 가득한 공간에서 그녀는 자신이 처한 상황, 작품을 대하는 태도, 그리고 여성 작가로서의 정체성과 싸운다. 그녀의 내면은 조용한 항변으로 가득 차 있으며, 괴테의 유령처럼 배회하는 남성 중심 문학 세계에 대한 은근한 반항이 느껴진다. 글을 쓴다는 것, 존재를 증명한다는 것에 대한 본질적 질문을 던진다.

특히 「남극」은 인간 내면의 호기심, 일탈, 그리고 그 대가에 대한 이야기였다.

우리는 흔히 윤리와 도덕의 테두리 안에서 안전하게 살지만, 한 번쯤은 다른 삶의 가능성을 상상해본다.

이 내용은 그 상상이 현실이 되었을 때 벌어지는 감정의 파장을 매우 섬세하게 보여준다.

클레어 키건의 『너무 늦은 시간』은 세 편의 단편을 통해 말보다 더 큰 침묵의 힘,

그리고 행동보다 더 깊은 비행동의 여운을 보여주는 작품이다.

이 책에서 클레어 키건은 격렬한 사건 없이도 사람의 내면을 흔드는 데에 성공한다.

그녀가 조용히 들여다보는 것은 우리가 무심코 넘긴 선택의 순간들이다.

말하지 않은 한마디, 하지 않은 행동, 놓쳐버린 눈빛 하나가 시간이 흐른 뒤

얼마나 무겁게 마음을 짓누를 수 있는지를 세밀하게 포착한다.

키건은 후회를 드러내지만, 그 후회를 비난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이란 본디 그렇게 서툴고, 때로는 너무 늦게야 진실을 깨닫는 존재임을 인정한다.

그렇기에 이 책은 다정하면서도 날카롭다.

그녀는 독자에게 단 하나의 질문을 남긴다.

지금 당신은 어떤 선택을 하고 있는가. 그 선택이 혹시, 나중에 너무 늦은 시간이 되어 마음속을 떠돌게 되지는 않을까. 아직 늦지 않았다면, 지금 당신의 침묵과 망설임을 마주할 용기가 있는가.

그렇게 이 책은 아주 조용하지만 분명한 울림으로 남는다.

클레이 키건의 특유의 여백이 남는 글을 이곳에서도 엿볼 수 있는 책이다.


p.s : 너무 3편에 몰입한 리뷰 내용 같아서. 괜히 뻘쭘하지만,

3편 내용이 개인적으로 너무 몰입이 된 내용이었기에..

다음에 재독을 하게 되면 1,2편 내용도 조금 더 구체적으로 파헤쳐 보기로 한다. 하핫 ^^;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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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학교 다닐 때 수녀님이 지옥은 영원하다고 했어요." 그녀가 송어 껍질을 떼어내며 말했다. "우리가 영원이 얼마나 긴 시간이냐고 물었더니 수녀님이 말했죠. ‘지구상의 모든 모래를 생각해 봐. 모든 해변과 모래 채석장, 해저, 사막을 말이야. 그 모래가 전부 모래시계에 들어 있다고 상상해 보렴. 거대한 요리용 타이머 같은 데 말이야. 일 년에 모래가 한 알씩 떨어진다고 했을 때 영원은 세상의 모든 모래가 모래시계 속에서 다 떨어질 때까지 걸리는 시간이야.’ 생각해 봐요! 우린 모두 겁에 질렸죠. 아주 어렸거든요."

"아직도 지옥을 믿는 건 아니죠?" 그가 말했다.

"네, 보면 몰라요? 에마누엘 수녀님이 지금 생판 모르는 사람이랑 몸을 섞는 나를 보면 얼마나 웃길까요." 그녀가 송어 살점을 떼어내 손가락으로 먹었다. - P9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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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월의 보름
R. C. 셰리프 지음, 백지민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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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가족의 일상 속에서 가장 소중한 감정을 건져 올리는 이야기!”

1930년대, 대공황이라는 거대한 격랑 속에서도 어떤 이야기는 조용히,

그러나 묵직하게 다가온다. R. C. 셰리프의 『구월의 보름』이 바로 그런 책이다.

배경은 영국 남해안의 작은 휴양지, 보그너 레지스.

한 가족이 매년 9월, 보름간의 여름휴가를 떠나는 이야기다.

극적인 사건이나 반전은 없지만, 그 대신 이 소설은 “아무 일 없는 날들” 속에 숨겨진 감정의 움직임을 예리하게 포착한다.

스티븐슨 가족의 보름은 반복적인 연례행사로 자리 잡은 지 오래다.

딸 메리는 스무 살, 아들 딕은 열일곱, 막내 어니는 열 살.

세 아이는 매년 조금씩 자라고, 그들이 머무는 ‘시뷰(Seaview)’라는 이름의 낡은 객실도 함께 나이를 먹는다. 딕이 어렸을 때 식탁보에 남긴 잉크 자국, 메리가 붙인 조가비 장식, 박제된 돌잉어 ‘리처즈 씨’ 등은

그들의 시간이 남긴 자국들이다. 그 익숙한 낡음과 사소한 흔적들이야말로 이 가족만의 여름을 증명하는 진짜 풍경이 된다.

책의 전체적인 내용 중에 개인적으로, 아들 딕이 어느 날 처음으로 스스로 산책을 나서는 장면이 인상 깊었다. 늘 가족의 품 안에서 움직이던 열일곱 살의 딕은 그날 처음으로 혼자만의 걸음을 시작한다.

그리고 그 길 위에서 딕은 ‘자신이 누구인지’, ‘앞으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가만히 사유하기 시작한다. 자신이 곧 성인이 되어가고 있다는 것, 부모님의 인생을 자신이 대신 살아야 할 필요는 없다는 것,

그리고 자신만의 방식으로 삶을 선택하고 싶다는 욕망이 그 사유 속에서 조심스럽게 움튼다.

그 장면은 단순한 산책이 아니었다.

그는 ‘아이’의 자리에서 처음으로 ‘자기 자신’을 외부 세계에 투영해 본 것이었다.

나는 그 장면에서, 말없이 커져가고 있는 한 청년의 내면을 아주 조용히 응원하게 되었다.

이 가족의 하루는 늘 정해진 루틴을 따른다.

아침이면 해변을 거닐고, 오후엔 바닷가 데크 체어에 앉아 책을 읽거나 그저 멍하니 바다를 바라본다.

저녁이면 크리켓 경기나 마을의 작은 행사에 들르고, 밤이면 나란히 앉아 붉은 노을을 본다.

아무 일도 없는 듯하지만, 그 안에서 인물들은 은밀하게 변화하고 있다.

아버지는 매끼 식사 후 조용히 혼자 산책을 나서고, 어머니는 가족을 위한 역할에서 벗어나 처음으로 ‘자기 자신’과 마주 앉는다.

어니의 키가 어느덧 자신을 훌쩍 넘어섰다는 사실에 놀라고,

아버지는 멀어지는 수평선을 보며 세월의 깊이를 실감한다.

이들은 말로 하지 않지만, 각자의 내면에서는 아주 중요한 감정의 변주가 일어나고 있다.

그리고 이 소설에서 가장 아름답고 조용한 장면.

해변의 벤치에 가족이 나란히 앉아 말없이 노을을 바라보는 장면은,

이야기 전체의 감정이 절정에 이르는 순간이다.

누구도 무슨 말을 하진 않지만, 모두가 알고 있다.

‘내년에도 우리가 이곳에 다시 올 수 있을까?’라는 조용한 물음이 그들의 마음에 잠겨 있다.

마지막 날, 짐을 싸고 시트를 다시 깔고 창문을 열며 맞이하는 아침.

그 바다는 여전히 눈부시지만, 어쩐지 색이 달라 보인다.

셰리프는 이 이야기를 단순한 상상에서 시작했다고 한다.

보그너 해변에 앉아 사람들을 관찰하다가, 한 가족의 여름을 따라가고 싶다는 충동이 들었다고.

그 충동이 고요하고 단단한 한 권의 소설이 되었다.

이 책의 번역가 박지민은 이 소설을 “유리병 속 색색의 유리알”이라고 표현한다.

지금은 별것 아닌 듯 보이지만, 훗날 꺼내보면

햇살 아래서 반짝일 듯한 추억의 조각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삶이 힘들 때마다 그 유리알들을 한 알 한 알 꺼내 보며

거기서 받는 따스한 빛에 위안을 얻는 것과 같은 책.”

그 말처럼, 『구월의 보름』은 우리 삶에 분명히 존재했지만 자주 잊히는 “그저 그런 하루”들을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조용한 삶의 풍경 속에 감춰진 감정의 파동.

그것이야말로 진짜 우리의 인생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책 속엔 이런 구절이 있다.

“인생의 황금 같은 시간은 기억이 꼭 붙들 수 있는 예리한 윤곽을 남기지 않는다.

읊조린 말들도, 작은 몸짓이며 생각도 남지 않으니,

깊은 감사함만이 시간에 흔들리지 않고 계속해서 머무른다.” (p.341~342)

또 이런 장면도 있다.

“일 년에 딱 한 번, 그들은 이렇게 앉았다.

서로를 마주하고, 가까이 말이다.

다른 때는 이런 일이 벌어지는 법이 전혀 없었다.” (p.104)

사건도 없고 갈등도 없지만, 이 소설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 마음을 오래 붙잡는다.

『구월의 보름』은 우리가 지나온 평범한 하루들을 다시 바라보게 해준다.

그 보름이, 우리 인생에도 분명 있었다는 것을.

그리고 책장을 덮고 나면 이렇게 말하게 된다.

“그때는 몰랐지만, 참 고맙고 따뜻한 날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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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보다 근사한 부분은 휴가가 시작되기도 전에 그가 휴가를 즐기고 있었다는 점이었다! - P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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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소년을 위한 불교 공부 - 마음을 알고 세상을 이해하는 지혜 여행, 교양으로 읽는 불교 이야기
노채숙 지음 / 지노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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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교는 인간의 역사와 늘 함께해왔다. 인류가 지구에 출현한 그 순간부터, 설명할 수 없는 두려움과 불안을 달래기 위한 방식으로 종교는 시작되었고, 지금까지도 형태를 바꾸며 우리 곁에 남아 있다. 불이나 태양을 숭배하고, 동물이나 자연에 신의 존재를 부여하던 시절. 그 막연한 경외감 속에서, 인간은 점차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야 하는가”를 묻기 시작했고, 그 물음에 대한 깊은 답을 찾으려 했던 이가 바로 고타마 싯다르타, 즉 ‘부처님’이었다.

노채숙 작가의 『청소년을 위한 불교 공부』는 그렇게 시작된 불교가 어떻게 사람들의 마음과 함께 자라났는지,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어떤 의미로 남아 있는지를 조심스럽고도 친절하게 이야기해주는 책이다. 책의 시작은 단순한 불교사 입문서 같지만, 읽다 보면 그 이상의 것을 건넨다. 종교를 이해하는 공부를 넘어, 내 삶을 돌아보게 만드는 질문들이 자연스럽게 따라붙기 때문이다.

책은 ‘다인’이라는 손녀와 ‘할머니’의 대화를 중심으로 구성된다. 막 중학교에 입학한 다인이가 불교에 대한 과제를 하며 품게 된 수많은 질문들, 예를 들어 “부처님은 왜 인생을 고해의 바다라고 했을까?”, “무상하다는 건 허무하다는 뜻일까?”, “욕심을 버리라는 말은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같은 물음에 할머니가 아주 현실적이고 따뜻한 말로 답해주는 방식이다. 이 구성 덕분에 책은 종교를 이야기하면서도 전혀 무겁지 않고, 오히려 누군가 옆에서 조용히 삶의 방향을 알려주는 느낌이다.

내가 특히 인상 깊게 읽은 부분은 3부, “부처님이 돌아가신 후 불교는 어떻게 되었어요?”였다. 이 장에서는 불교가 단지 역사 속에 남아 있는 가르침이 아니라,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삶에 깊이 스며 있는 철학이자 태도라는 걸 보여준다. 예를 들면 이런 장면이 있다.

할머니는 몽골의 나무 심기와 한국의 미세먼지 이야기를 꺼낸다. 겉으로 보면 아무 상관 없어 보이는 두 사건이 사실은 깊은 관계를 맺고 있다는 설명을 통해, 모든 현상이 인과관계로 얽혀 있다는 ‘연기법’을 풀어낸다. 문제를 해결하려면 그 원인을 먼저 이해해야 하고, 그것이 바로 지혜라는 이야기. 이 가르침은 불교의 핵심인 동시에, 우리가 일상에서 자주 잊고 사는 태도를 다시 떠올리게 만든다.

이어지는 ‘무상’의 가르침도 인상 깊다.

“인생이 무상하다”는 말은 흔히 ‘덧없고 허무하다’는 뜻으로 받아들여지곤 하지만, 이 책에서는 그 의미를 조금 다르게 바라본다. 무상이란, 모든 것이 고정되지 않고 끊임없이 변한다는 진리다. 이어폰이 고장 나듯, 게임기의 배터리가 닳듯, 마음도 관계도 모든 것은 계속 변한다. 중요한 건, 그 변화를 허무함으로 받아들이지 않고, 자연스러운 흐름으로 받아들이는 자세다.

할머니는 말한다. “지금 생긴 기쁨도, 지금 사라진 아쉬움도 모두 무상한 거야. 그렇기 때문에 자만하지도, 절망하지도 말아야 해.” 그 말이 그렇게 단단하게 다가올 줄 몰랐다.

그리고 결국, 인생은 왜 괴로운가?

책 속에서 다인이가 이렇게 묻는다. “사는 게 고해의 바다라면, 도대체 무슨 희망으로 살아?”

그 물음에 할머니는 단순히 ‘참아라’고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이렇게 말한다. 삶은 분명 힘들지만, 그 힘듦이 계속되지는 않는다고. 세상이 무상하듯 괴로움도 언젠가는 지나가며, 우리가 그것에 어떻게 대응하느냐에 따라 삶의 방향은 바뀐다고. 놓아야 할 것을 놓고, 변화를 받아들이며, 마음을 다스리는 연습을 하라는 말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정말 배워야 할 불교는, 경전을 외우는 게 아니라 그런 ‘마음 쓰는 법’을 익히는 것이 아닐까.

책을 다 읽고 나니, 불교가 그렇게 먼 이야기가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특정 신에게 기대는 믿음이라기보다는, 내 삶을 주체적으로 바라보는 눈을 길러주는 가르침. 괴로움의 원인을 들여다보고, 그 원인이 사라지면 괴로움도 사라질 수 있다는 희망. 어쩌면 불교는 ‘참는 법’을 알려주는 게 아니라 ‘흐름을 이해하고 살아가는 법’을 알려주는 것이 아닐까 싶다.

『청소년을 위한 불교 공부』라는 제목 때문에 처음엔 주저했지만, 이 책은 나처럼 어른이 되어도 여전히 마음이 자주 흔들리고, 삶의 의미를 놓치곤 하는 이들에게도 꼭 필요한 책이었다.

불교가 멀게만 느껴졌던 사람, 삶이 자꾸 복잡해지는 사람, 그리고 무엇보다 스스로를 좀 더 다정하게 바라보고 싶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결국 이 책이 전하고자 했던 말은 하나였다.

“삶은 늘 흐르고, 변하며, 그 안에서 우리는 언제든 다시 시작할 수 있다.”


'지노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다인 : 도대체 괴로움은 왜 생기는 거야?
할머니 : 괴로움을 인도말로 둑카라고 해. 괴로움이 왜 생기냐고? 내 생각대로, 내 뜻대로 안 되기 때문이야. 맞지?
사람은 태어나서 영원히 살고 싶은데 병들다가 언젠가는 죽기 때문에 괴롭고, 갖고 싶은 게 있는데 쉽게 가질 수 없어 괴롭고, 미운 사람이 있는데 자꾸 마주치니 괴롭고, 사랑하는 가족이나 친구가 내 곁을 떠나가니 괴롭고, 무언가를 보면 자꾸 욕심이 나서 괴롭지.
세상의 모든 것은 원인이 있어 생겨났다가, 원인이 사라지면 생겨난 것도 사라진다고 했어. 언제 변할지 모르니까 무상하다고 했잖아? 그런데도 사람들은 생겨난 물건도 사랑도 친구도 돈도 모두 내 것이라고 생각해. 그것들이 변하지 않고 영원히 내 곁에 있을 거라고 착각하고 있어.
마음에 들어서 가지고 싶은데 쉽게 살 수 없고, 설사 가졌다 해도 시간이 지나면 사라져버리는데, 여전히 미련이 남아 있다면 이제 얼마나 괴로운 일이겠어? 그래서 인생은 고해의 바다라고 했어. - P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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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녹음 중 - 노래와 웃음이 함께하는 티키타카 부부의 일상
인생 녹음 중 지음 / 김영사 / 202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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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은 추억을 남기기 위해 사진을 찍고 영상을 촬영한다.

하지만 이 책의 부부는 조금 다른 방식으로 삶을 기록해나간다. 그들은 일상을 ‘녹음’한다.

오롯이 둘의 목소리만 담은 영상에서 오히려 더 진짜 같은 자기 자신을 발견하게 된다.

『인생 녹음 중』은 이 부부가 함께 살아가는 일상을 소리로 기록해온 과정을 담은 책이다.

유튜브 ‘일상 아카이빙’ 채널을 통해 따뜻한 공감을 이끌어낸 그들만의 소박한 삶,

그 속에 담긴 감정들이 책 속에도 고스란히 녹아 있다.

책의 프롤로그는 왜 이들이 ‘녹음’을 시작하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하는 데서 출발한다.

특별한 계기가 있었던 건 아니다. 그저 소소한 순간들을 기록으로 남기고 싶었을 뿐이다.

그런데 오히려 그 기록이 사진이나 영상보다 더 깊이 있는 자신들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주었다고 한다.

꾸미지 않은 목소리, 웃음소리, 하루 끝에 나눈 대화들 속에서

그들은 서로를 더 이해하게 되었고,

삶의 진짜 온기를 느끼게 되었다.

그렇게 일상의 파편들을 하나하나 녹음해 저장해 가던 어느 날,

그들은 문득 알게 된다.

행복은 어쩌면, 지금 여기 우리 곁에 이미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을.

책 속에는 그런 그들의 진심 어린 에피소드들이 곳곳에 스며 있다.

특히 마음을 깊이 울렸던 장면은 남편이 아내에게 프로포즈하던 순간과,

며칠 뒤 함께 식사를 하던 중 아내가 조심스럽게 던진 한마디였다.

“돈은 얼마나 모았어?”

결혼을 앞둔 이들에게 피해갈 수 없는 현실적인 질문이었다.

그 순간 남편은 자신이 지난 날 얼마나 무책임하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된다.

아무 계획 없이 시간을 흘려보내던 나날,

YOLO를 외치며 소비에만 집중했던 지난 날들을 후회했다.

며칠간 어색한 침묵이 흐른 뒤, 아내가 먼저 만나자고 했다.

이별을 고할 줄 알았던 그 순간, 아내는 이렇게 말했다.

“결혼하기 전에 2천만 원만 모아봐. 내년까지.”

그는 퇴근 후 아르바이트를 병행하고, 생활비를 아껴가며 1년간 돈을 모았다.

그리고 1년 뒤, 통장에 찍힌 숫자를 봤을 때 그 감동은 지금도 잊지 못한다고 했다.

생애 처음으로 스스로의 힘으로 모은 돈이었다.

그 순간만큼은 처음으로 자신이 대견하게 느껴졌다고 했다.

그 2천만 원은 단순한 금액이 아니라, 책임과 진심, 그리고 서로를 향한 믿음의 증표였다.

이 책은 그런 작고 소박한 일상의 순간들을 우리에게 전해준다.

평소 이 부부의 영상을 자주 보던 팬이었기에 책을 읽는 동안 자꾸 그들의 목소리가 들리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때로는 따뜻하고, 때로는 서툴지만 진심 어린 위로를 건네는 듯했고, 또 때로는 “나도 그래” 하고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공감을 불러일으켰다.

두 사람이 함께 만든 유튜브 채널과 그 영상에 달린 댓글들을 보면

이 책이 왜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았는지 알 수 있다.

“영상을 보고 나니 덩달아 행복해졌어요.”

“배우자와 더 가까워진 느낌이에요.”

“우리 커플도 덕분에 듀엣곡 연습을 시작했어요.”

찬란한 사건이 없더라도 괜찮다.

특별한 일이 없어도, 평범한 일상이 지속되어도 충분히 아름답다.

그저 하루하루를 무사히 살아가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가치 있는 삶이라는 것을 이 책은 말해준다.

『인생 녹음 중』은 말하자면, 삶을 기록하는 또 하나의 방법을 보여주는 책이다.

꾸미지 않은 목소리, 있는 그대로의 말투, 특별할 것 없는 하루의 흐름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그래서일까. 이 책은 그 어떤 드라마보다도 더 진솔하고 깊이 있게 다가온다.

다정함은 일부러 연출하는 것이 아니라, 함께 살아가며 자연스럽게 쌓여가는 것이다.

사랑은 커다란 이벤트보다 매일 반복되는 사소한 순간들 속에 더 많이 숨어 있다는 걸

이 책을 통해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인생 녹음 중』은 마음으로 읽는 책이다.

삶을 살아가는 모든 이에게, 지금 이 순간이 얼마나 충분하고 귀한지를 조용히 일깨워주는 따뜻한 안내서이기도 하다.

영상으로 봤을 때도 참 귀엽고 다정한 커플이다 싶었는데 책으로 접하니 그 마음이 더 깊게 다가온다.

글과 그림, 문장 하나하나 속에 서로에 대한 배려와 편안함,

그리고 특유의 위트까지 고스란히 담겨 있는 책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 @chae_seongmo'를 통해

'김영사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여태껏 살면서 보아온 훌륭한 분들은 막 내려앉은 눈송이처럼 가볍고 유쾌했다. 체면치레나 근엄 같은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장난기 가득한 유머로 분위기를 들었나 놨다 하다가도, 상대방의 어려움에 공감하는 면도 지니고 있었다. 권위적이거나 냉소적인 모습보다 천진난만한 아이 같은 모습이 오히려 진정한 고수 같다는 진한 인상을 남겼다. 모든 정신 단계의 최종 지점은 어린아이 같은 모습이라고 어느 위대한 철학자가 말하지 않았던가. - P1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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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들의 도시
김주혜 지음, 김보람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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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김주혜 작가의 『밤새들의 도시』를 읽었다.

수많은 장르의 책들 속에서도 유난히 소설이 잘 읽히지 않다 보니, 처음 집중하는 데 생각보다 시간이 좀 더 걸렸다. 하지만 한 번 물결을 타기 시작하니, 머릿속에 장면들이 자연스럽게 피어오르기 시작하면서 결국 밤새며 읽었다. 이 소설은 그들이 있던 장소와 주인공의 모습들, 그들의 성격까지도 섬세하게 그려내고 있더라.


발레는 가까이에서 자주 접했던 익숙한 장르는 아니었지만,

이 소설이 선택한 발레라는 소재는 장르를 넘어선 감정의 서사가 있었다.

단순히 발레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한 사람의 내면을 따라가는 여정으로

우리가 살아가는 삶 속에서 느낄 수 있는 다양한 감정과 이야기를 들려준다.


나탈리아 레오노바.

세계적인 발레리나로 모두가 ‘나타샤’라고 부르는 그녀는

한때 파리 무대에서 키트리 점프를 완벽하게 성공시키며 박수갈채를 받았던 인물이다.

그러나 ‘지젤’ 무대에서의 부상은 그녀를 무대 밖으로 끌어냈다.

이후 거의 2년 가까이, 나타샤는 공허하고 생기 없는 껍데기 같은 삶을 살았다.

살아는 있지만, 살아 있는 것 같지 않은 나날들.


소설은 과거와 현재를 교차하는 방식으로 이야기를 전개한다.

현재, 부상 이후 무대에서 내려온 나타샤는,

자신이 발레를 처음 시작했던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돌아온다.

그곳에서 머무는 동안, 그녀는 수많은 기억들과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 스베타 이모의 권유로 발레학교 오디션을 봤던 날,

엄마가 직접 수작업으로 만든 발레복을 입고 긴장 속에 무대에 섰던 장면,

그 오디션에서 나탈리아가 보였던 놀라운 집중력과 몰입,

자신을 무시하던 심사위원조차 침묵하게 만들었던 순간이 떠오른다.

발레학교에 입학한 후, 함께 혹독한 훈련을 견뎌낸 친구 니나와 세료자,

그리고 이들과의 우정과 경쟁, 때로는 애매한 감정이 뒤섞인 관계들도

지금의 고요한 방 안에서 생생하게 되살아난다.

또한, 무대 위에서 성공적인 공연을 끝내고 쏟아지는 박수를 받던 날들의 열기,

지젤 무대에서의 부상 순간과 함께 느껴졌던 무력감,

그 후 찾아온 공허함과 방황—

이 모든 장면들이 과거의 광채와 현재의 침묵을 대조적으로 보여주며,

주인공의 심리적 변화와 내면의 흔들림을 더욱 입체적으로 그려낸다.


다양한 장면 중에서 나타샤가 발레 슬리퍼를 신어 보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발레 슬리퍼를 신자 발에 생생함과 기민함이 돌아오며 바닥과 연결되고,

무릎뼈가 들리며, 골반이 열린다. 어깻죽지가 편편히 펴지고 당겨져 내려가며 목은 길고 곧게 선다.

엄청난 안도감이 온몸을 타고 흐른다. 촛불이 어느 바람 한 줄에 확 커졌다

다시 초점을 맞추는 것처럼 나도 순간 나란 존재를 다시 알아본다.”

이 문장은 단순한 동작의 묘사를 넘어,

몸이 기억을 깨우고, 마음이 스스로를 마주하는 순간을 보여준다.

나타샤는 그 순간, 자신이 누구였는지, 무엇을 해왔는지를 되찾는다.

바로 자기 존재가 다시 살아나기 시작하는 순간이다.


무대에서 멀어진 이유는 단순히 부상 때문만은 아니었다.

드미트리가 던진 한마디가 모든 걸 드러낸다.

“네 부상 말이야.”

“내가 보기엔 거의, 아니면 전부, 네 머릿속에 있다고.”

이 말은, 몸은 회복되었지만 마음의 상처가 여전히 그녀를 가두고 있다는 의미였다.

결국 나타샤를 무너뜨린 건, 자기 의심과 트라우마였던 것이다.


그리고 특히 엄마와의 대화 장면은 유독 속상하고 화도 나고 슬펐다.

“프리마 발레리나는 10년에 한 번 태어난단다.”

이 말은 “넌 그 중 하나가 될 수 없다”는 뜻을 담고 있는 것만 같았다.

엄마는 딸이 겪을지 모를 고생을 막고 싶었다고 했지만,

그 말 속엔 믿음의 부재가 고스란히 담겨 있었다.

가장 가까운 사람에게조차 신뢰받지 못한다는 생각은

무대 위에서 넘어지는 것보다 훨씬 더 깊은 상처로 남는다.

나타샤는 자신을 “고양이, 빗, 주전자” 같은

하찮고 평범한 존재처럼 느끼며, 세상의 무심함을 마주하게 된다.

어린 시절에 받은 그런 말들은 공허함과 외로움으로 그녀의 마음에 오래도록 남는다.

엄마 역시 사랑을 충분히 받지 못하고 자란 사람이기에

사랑을 표현하는 방법을 몰랐을 거란 생각에 더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던 장면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감정 이입하며 봤던 장면 중 하나다.


친구 니나와의 장면도 강하게 남았다.

어린 시절 함께했던 니나는 성인이 되어 결혼을 하게 되고,

나타샤는 그녀의 결혼식에 참석한다.

그리고 그 자리에서, 두 사람 사이의 감정이 폭발한다.

처음에는 말다툼 정도로 시작되었지만,

사실은 서로를 향해 억눌러왔던 감정의 고백이었다.

니나는 참아왔던 말들을 한꺼번에 쏟아냈고,

나타샤의 무심한 말은 그 감정에 불을 붙였다.

이 장면은 단순한 갈등이 아니라 두 사람이 살아온 방식과 상처,

오해가 부딪힌 지점이어서 개인적으로 가장 긴장되었던 장면이었다.


니나와의 다툼 이후 집에 돌아온 나타샤는 뒤늦게 도착한 세료자에게 “할 말이 있다”고 고백한다.

짧은 말이지만 그 장면에서 섬세한 긴장감이 맴돌았다.

두 사람의 관계가 앞으로 어떻게 흘러갈지 한 페이지를 넘기기도 전에 수십 가지 상상을 하게 만든다.


이 책은 밤의 도시에 날아오르는 새들처럼,

눈에 잘 보이지 않아도, 느리게 날더라도

자신의 방향을 찾아가는 모든 존재들의 이야기다.

『밤새들의 도시』라는 제목은 바로 그런 의미를 품고 있는 듯하다.

어둠 속에서 스스로를 회복하고 자신만의 빛을 찾아가는 이야기다.

무너지고, 의심하고, 다시 길을 찾는 그 여정이 결코 낯설지 않다.

발레를 모르는 사람도, 예술가가 아닌 사람도 이 이야기 속에서 자신의 조각 하나쯤은 발견할 수 있으리라 믿는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뒤에도, 

밤의 어둠 속 어딘가에서 조용히 날개를 펼치고 있을 나타샤가 떠올랐다.

“혼자서 길을 찾아 나서는 존재”라는 메타포는 내 안에도 조용히 숨 쉬던 무언가를 흔들어 놓았다.

이 책은 말없이 등을 토닥이며 “괜찮다. 지금 이 밤 속을 걷는 너도 분명 빛날 수 있어” 라고 말해주는 이야기다. 발레리나가 아닌 우리 모두에게, 삶 앞에서 다시 견딜 수 있는 힘을 주는 조용하지만 강렬한 위로를 전해주는 소설이다.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태형이 곁무대로 돌아오자 다른 무용수들이 그의 옆으로 몰려들었다. 다들 이미 세계적인 스타의 반열에 오른 주역 무용수들이었지만, 우르르 몰려가는 모습이 흥분한 코르 드 발레 단원들 같았다. 태형은 그들과 인내심 있게 차례대로 사진을 찍고 대화를 나누었다. 물론, 젊은 남자 무용수들에게 있어서 겸손함과 천부적 재능은 으레 상반된 관계다. 그의 겸손함은 춤에서도 여실히 드러났다. 진정한 예술가가 무대에 올랐을 때 사람들의 마음을 빼앗는 것은 그의 춤이 아니라 그의 영혼이다. - P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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