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물두 번째 레인
카롤리네 발 지음, 전은경 옮김 / 다산책방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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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롤리네 발의 『스물두 번째 레인』은 물속 깊이 가라앉아 있던 감정들을 하나씩 조용히 건져 올리는 소설이다. 사랑과 책임, 상처와 용서 사이에서 중심을 잡으려 애쓰는 한 소녀의 이야기이자, 자매라는 이름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버텨낸 두 사람의 이야기다.

주인공 틸다는 하루도 빠짐없이 수영장을 찾는다. 스물두 번째 레인을 따라 묵묵히 물살을 가르며 하루를 견딘다. 어쩌면 수영은 그녀가 숨을 쉴 수 있는 유일한 공간이었는지도 모른다.

이 소설의 중심에는 세 여성이 있다. 언니 틸다, 동생 이다, 그리고 알코올 중독자인 엄마다. 엄마는 상처 입은 사람이다. 누군가를 사랑하는 법보다 스스로를 망가뜨리는 방식에 더 익숙한 사람. 자식들과 가까워지고 싶어 하면서도 어느 순간엔 그것을 스스로 망쳐버린다. 다시 잘해보려는 마음은 있지만, 그 의욕은 금세 무너지고 만다. 아마 우울증과 알코올 중독이라는 병이 그녀를 다시 끌어당긴다.

틸다는 그런 엄마를 향해 분노하면서도, 완전히 미워하지는 못한다. 연민과 혐오가 뒤섞인, 복잡한 감정이 그녀 안에 겹겹이 쌓여 있다. 동생 이다가 엄마에게 맞은 뒤의 모습을 보았을 때, 틸다 안의 분노는 한계에 다다른다. 결국 그녀는 차가운 얼음물 양동이를 엄마의 머리 위에 쏟는다. 책에서 엄마를 ‘괴물’이라 칭하는 장면은 감정의 극한을 드러내는 말이자 틸다의 절박한 외침이기도 하다. 그런데도 엄마는 화를 내지 않고, 오히려 수긍한다. 그 말 속에는 자신의 잘못을 알고 있다는 자각이 들어 있다. 감정을 제어하지 못한 채 무너지는 엄마의 모습을 보면 분노보다도 깊은 연민이 차오른다. 그저 미워할 수만은 없는 불쌍한 어른의 초상이 거기 있다.

이다는 나이에 비해 많은 것을 느끼고 이해하는 아이이다. 눈치가 빠르고 감정의 결을 섬세하게 읽어낸다. 언니 틸다가 누구에게 마음이 있는지를 가장 먼저 알아채고, 조심스레 그 감정을 건드리기도 한다. 마치 언니를 살짝 밀어주는 것처럼. 그런 이다는 틸다에게 삶의 이유이자 중심이었다. 책을 읽는 내내 이 자매의 관계가 무척 부러웠다. 누군가를 그렇게 온 힘을 다해 지키고, 또 그 존재만으로 마음의 버팀목이 되는 관계가 있다는 것. 그 사실만으로도 충분히 단단한 위로가 되지 않을까 싶다.

틸다는 타인과 감정적 거리를 두는 데 익숙하다. 누구에게도 쉽게 마음을 열지 않는다. 상처받지 않기 위해, 사람을 들이지 않는 방식으로 자신을 보호해왔다. 그런 그녀 앞에 빅토르가 나타난다. 처음엔 경계하며 거리를 두지만, 조금씩 그의 존재에 익숙해진다. 눈에 띄는 고백도, 화려한 감정 표현도 없다. 대신 아주 작고 조용한 변화들이 틸다 안에서 일어난다. 그리고 마침내, 그녀는 자신의 감정을 인정하게 된다. 빅토르는 틸다에게 아무것도 요구하지 않고, 다그치지도 않는다. 그저 곁을 지켜주는 방식으로 다가온다. 틸다는 그런 그를 통해 처음으로, 자신이 ‘사랑받아도 되는 사람’이라는 감정을 받아들이기 시작한다.

『스물두 번째 레인』은 단지 가족의 붕괴를 그리는 소설이 아니다. 오히려 그 속에서도 사랑이 자라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는 이야기다. 그 사랑은 조용히 손을 잡아주는 것, 다친 마음 앞에 오래 머물러주는 것, 함께 침묵해주는 것에서 시작된다. 그런 감정들이 이 책에는 고요하게, 하지만 깊게 흐르고 있다.

책을 읽으며 틸다와 동생 이다의 관계가 내내 마음에 남았다. 자매의 사랑을 엿볼 수 있었고, 빅토르와의 관계를 통해 조금씩 달라지는 틸다의 감정선도 따라가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혼란 속에서도 물속을 헤엄치듯 묵묵히 앞으로 나아가려 했던 틸다의 모습은, 대견하고 애틋했다. 나도 모르게 그녀를 응원하게 된다.

이 책은 고통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에게 상처를 품고도 다시 나아가려는 모든 이에게 조용한 위로를 건넨다.

“괜찮아. 지금도 충분히 잘하고 있어.” 그렇게 말해주는 듯하다.

'이키다 @ekida_library'님을 통해 '다산책방(다산북스) 출판사'로부터

도서와 소정의 제작비를 지원받고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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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나 : 아버지가 뭐라고 하셨는데?
긴 침묵이 이어진다. 내 질문에 대답을 얻지 못하겠구나 생각하는데 그가 입을 뗀다.
빅토르 : "이런 외부인의 관점을 너희의 강점으로 인식하렴. 너희는 저 아래에 사는 사람들과는 달리 제대로 된 멋진 집이 없지만, 그럴수록 여기서 얻는 기회를 더 많이 이용하고 너희 자리를 찾아야 한다." 뭐 그런 종류의 말이었지. - P2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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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 행복 사전
김은아 지음, 하선정 그림 / 담다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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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은아의 『앤의 행복 사전』은 ‘빨간 머리 앤’을 향한 오래된 애정과 깊어진 시선을 담아낸 책이다. 작가는 이 책을 통해, 앤의 세계를 이루는 가장 따뜻한 조각들—‘단어’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들여다본다. 이 책은 그녀가 앤에 대해 써온 세 번째 이야기다. 첫 책 『앤과 함께 프린스에드워드섬을 걷다』에서는 앤 이야기의 주요 무대인 섬의 풍경과 공간을 따라 걸었고, 두 번째 책 『친애하는 나의 앤, 우리의 계절에게』에서는 여덟 권의 앤 시리즈 속 문장을 통해 계절의 감정을 들여다보았다. 그리고 이번 책 『앤의 행복 사전』에서는 앤이 사랑했던 ‘단어’들을 글감 삼아, 그 단어들 속에 깃든 감정과 삶의 태도를 따라가 본다.


작가는 처음엔 그저 앤과 루시 모드 몽고메리를 좋아하는 독자였다. 그러나 오래도록 그들을 좋아해온 마음은 이제 글이 되었고, 그 이야기를 책으로 엮는 사람이 되었다. 앤에 관해서라면 어떤 이야기든 다 해보고 싶다는 그의 고백처럼, 이번 책에는 그동안 쌓여온 애정과 탐색의 시간이 고스란히 녹아 있다. 특히 ‘행복’, ‘설렘’, ‘용기’, ‘고요’, ‘그리움’처럼 앤의 삶을 관통하는 단어들을 모아, 사전적 정의가 아니라 ‘앤의 언어’로 재해석해 소개하고 있다는 점에서 이 책은 단순한 해석서가 아니라 감성적인 문학 산책이자 사유의 여정이기도 하다.


책을 읽다 보면, 앤이 삶의 순간마다 얼마나 섬세하게 감정을 표현하고, 그 모든 순간에 이름을 붙여나갔는지를 새삼 깨닫게 된다. 어떤 일에 설렘을 느끼고, 실패 앞에서도 배움을 얻고, 일상의 기쁨을 발견하며 살아가는 앤의 모습은 단어 그 자체로 빛난다. 작가는 그런 앤의 삶에서 반복해서 등장하는 단어들을 수집해 풀어내며, 그 단어들이 결국 앤의 인생을 단단하게 만든 힘이자, 독자들 각자의 삶을 환히 비춰주는 등불이 되어주기를 바란다.


앤이 사랑한 단어들은 단지 말의 조각이 아니라, 관계를 따뜻하게 만드는 표현이었고, 세상을 바라보는 태도였으며, 자아를 찾아가는 여정이었다. 저자는 그런 단어들을 하나하나 다시 들여다보며, “행복은 어디에서 오는 거니?”라는 앤의 질문에 조용히 귀 기울인다. 그리고 우리도 언젠가 자신만의 ‘행복 사전’을 써내려갈 수 있을 것이라고, 삶의 어느 페이지쯤에서 그 문장을 발견하게 될 것이라고 말한다.


『앤의 행복 사전』은 앤의 시선으로, 앤이 사랑했던 방식으로, 우리 일상 속 단어들을 새롭게 바라보게 해준다. 그 단어들 사이에는 계절의 흐름이 있고, 삶의 속도가 있고, 사랑과 우정의 온기가 있다. 결국 이 책은, 잊고 있던 일상의 즐거움과 관계의 따스함을 다시 떠올리게 해주는 조용한 사전이며, ‘자신’이라는 우주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게 하는 감성의 지도다.


지금 이 순간에도, 누군가의 마음속에서 저마다의 ‘행복 사전’이 탄생하기를. 그리고 그 사전이 앤의 단어처럼 누군가의 삶을 비춰주는 말이 되기를, 작가는 조용히 기대하고 있다.


글 오른쪽에는 ‘은유 표현 글쓰기’라고 하여 글의 내용을 필사해볼 수 있는 페이지를 마련했다.

글을 따라 써보면서 앤이 삶을 사랑했던 방식을 마음껏 느껴볼 수 있는 시간이 되면 좋겠다.

마지막에는 엄청 예쁜 컬러링북이 있어서 시간이 될 때 한번씩 해보면 좋을 것 같다.

개인적으로는 그림이 너무 예뻐서 다이어리 꾸미기를 할 때나 책상 한켠 어딘가에 세워 놓고 싶은 느낌이었다. 컬러링북에 있는 그림을 직접 한번 만나보시길 바란다.




'담다 2기 서포터즈' 활동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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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크리는 것들은 다 귀여워 - 웅크림의 시간을 건너며 알게 된 행복의 비밀
이덕화 지음 / 북멘토(도서출판)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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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리랜서 그림책 작가로 일하며 겪는 불안, 그리고 사랑하는 사람과의 이별. 감정의 바닥까지 내려앉았던 작년 봄, 이덕화 작가는 밭을 만났다. 얼어붙은 흙, 마른 가지, 아직 봄이 오지 않은 공기 속에서 그녀는 뜻밖의 생명력과 마주한다. 멀리서 보면 죽은 듯한 나뭇가지에서도 작고 단단한 생명의 망울이 맺혀 있었다. 마치 “참을 만큼 참았어”라고 말하듯. 그때 밭이 가르쳐 주었다. 웅크림은 끝이 아니라 시작이라는 걸. 지금 보이지 않아도, 숨은 에너지는 어느 날 반드시 피어나게 된다는 걸.


그 봄, 작가는 그렇게 ‘웅크리는 것들’이 얼마나 생에 대해 깊이 말하고 있는지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그리고 그 이후로, 자신의 일상을 조심스레 꺼내어 그림과 짧은 문장으로 기록해 나가기 시작했다. 그 결과물이 바로 이 책, 『웅크리는 것들은 다 귀여워』다.


이 책은 삶의 거대한 고비나 극적인 순간들을 다루지 않는다. 오히려 아주 작고 사소한 하루들—밥을 먹고, 고양이를 안고, 주식 잔고를 확인하며 한숨 쉬고, 혼자 멍하니 앉아있는 시간들—속에서 마음이 흔들리고, 회복하고, 다시 조금씩 움직이는 과정을 담아낸다.


이덕화 작가는 프리랜서로 산다는 것이 얼마나 불규칙하고 외로운 일인지 숨기지 않는다. 정해진 출근도 없고, 수입도 일정치 않다. 세상과 연결되는 끈이 느슨한 그 삶 안에서 그녀는 때때로 꿈에서조차 위로를 받는다. 맛있는 음식을 먹는 꿈, 이상한 상황에 웃음이 터지는 꿈, 그리고 어쩌면 마음속 어딘가에서 그리워하고 있는 사람과 다시 마주치는 꿈. 현실이 버거울 때, 그런 꿈들이 감정의 균형을 잡아주는 무의식의 순간이 되어 준다.


책에는 고양시 작은 집에서의 나날들이 등장한다. 고양이와 강아지와 함께하고, 스스로 가꾸는 밭과 텃밭이 그 하루의 중심이 된다. 사람들과 북적이는 삶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 고요한 삶 속에서 작가는 ‘지금 여기에 있는 나’를 있는 그대로 마주한다.


“가슴에서 하얀 종이배를 꺼내어 물에 동동 띄워 보낸다.

지금은 선명하게 살아 있는 모습이지만, 언젠가는 물에 스미어 사라질 수 있을 거야.”

(p21)


꿈속에서라도 떠나보낼 수밖에 없는 감정들, 기억들. 작가는 그 슬픔을 부드럽게 수면 위에 띄운다. 그것이 아프지 않다는 뜻은 아니다. 오히려 그 감정들이 얼마나 생생한지, 그림 한 컷, 짧은 한 문장으로 오롯이 전해진다.


가장 인상 깊은 장면은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다.

“지금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다행이야.”

(p41)


이 말은 단지 과거의 자신을 위로하는 말이 아니다. 이 책을 읽고 있는 우리 모두에게도 건네는 말이다. 혼자라 느껴질 때조차, 사실은 그렇게 혼자만의 시간이 아니었는지도 모른다고. 그 시간들이 지금의 나를 만들었고, 누군가에게는 그 고백이 위로가 된다는 것을.


그리고 중심에는 ‘웅크림’이 있다.

“살아 있는 모든 것들은 웅크린다. 생존을 위해, 발현을 위해, 도약을 위해.”

(p53)


이 문장을 읽고 나면, 웅크리고 있는 내 자세마저도 부끄럽지 않다.

움츠리는 것이 아니라, 다음을 위한 준비라는 작가의 시선은 말 그대로 따뜻하고 다정하다. 

그렇게 책은 말한다.

웅크린 것들은 조용하고, 둥글고, 깊어지고, 그래서 사랑스럽다.


『웅크리는 것들은 다 귀여워』는 말없이 곁에 있어주는 친구 같은 책이다. 오늘 하루 조금 웅크렸더라도 괜찮다고, 그건 멈춘 게 아니라 다음을 위한 준비라고 조용히 속삭여 준다. 작가의 하루하루가 우리에게 따뜻한 숨 한 번 놓을 틈을 만들어 준다.


어디론가 가야만 할 것 같은 마음이 들 때, 그저 잠시 멈춰 이 책을 펼치면 된다.

그리고 조용히, 나에게도 이렇게 말해보는 거다.

“지금 이 모습도 괜찮아. 나, 참 잘 버티고 있어.”



'북멘토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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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30대의 이덕화.

교통사고 같은 일을 당하고 얼마나 놀라고 힘들었니.
작가로서도 오븐에 넣은 것 같은 시간이었지.
네가 잘 버텨 준 덕에 지금의 나는 조금 안정을 찾았어.
그 시간을 잘 견뎌 줘서 정말 고마워.
지금의 내가 너와 함께 있으니 너는 혼자가 아니었던 거야.
그래서 다행이야. - P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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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서든 너답게 빛날 거야
바리수 지음 / 부크럼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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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를 아끼고 지키며, 내 속도대로 빛나는 삶을 선택하는 이야기!”


『어디서든 너답게 빛날 거야』는 바리수가 쓰고 그린 만화 에세이다. 

일상의 마음을 담은 글과 함께 장면마다 따뜻하게 녹아든 그림들이 함께 어우러져 있다. 만화 같지만 가볍지만은 않고, 에세이 같지만 부담스럽지 않다. 그래서 이 책을 읽다 보면 마치 누군가의 일기를 엿보는 듯한 기분이 든다. 조용하지만 솔직하고 따뜻하게 풀어낸 일상의 이야기들을 만나볼 수 있는 책이다.


이 책을 읽다 보면 ‘엇! 이런 경험과 생각은 나도 해봤던 건데..”하는 순간들이 보인다. 예를 들어 저자는 자신이 금방 싫증을 내는 사람이라고 말한다. 그동안 자신의 성격을 단점이라고만 생각해왔는데, 지금은 그 덕분에 무엇을 좋아하고 무엇을 싫어하는지 더 정확히 알게 됐다고 한다. 나 역시 종종 시작만 요란하고 금세 흥미를 잃는 것들이 있었는데 어쩌면 그게 단순히 끈기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말 나와 안 맞기 때문에 그랬던 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책은 계속해서 묻는다. 겉보다 속이 더 중요한 걸까? 아니면 속보다 겉이 더 중요할까? 저자는 한때 외면만 가꾸던 시절을 떠올리며 그 시절이 가장 예뻤지만 가장 공허했다고 고백한다. 그 뒤로는 겉모습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마음을 다잡았지만, 나중에는 내면만 가꾸는 것도 외면을 소홀히 하는 게 스스로를 아끼는 일은 아니라는 걸 알게 된다. 결국, 겉과 속이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마음도 평온해진다고 말한다.


그리고 이 책이 특별하게 느껴졌던 건, 허무하고 무기력한 순간들을 외면하지 않고 꼭 끌어안는 방식 때문이었다. “밍기적도 기적이다.” 정말 별것 아닌 말처럼 들리지만, 무언가를 하기 싫은 날에도 이 말을 떠올리면 그저 조금 움직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하다는 위로가 된다. 의욕이 넘치지 않아도, 힘이 없더라도, 조금씩 기어가는 그 자체가 기적이라고. 이 말은 매일 뭔가를 해내야 한다는 압박에 시달리는 우리에게 꼭 필요한 말이었다.


또 하나 인상 깊었던 장면은 ‘뜸’에 관한 이야기였다. 뭐든 바로 해치우고 싶은 성격 탓에 자주 조급해진다. 그런데 저자는 글을 써놓고 곧장 발행하지 않고, 시간을 두고 다시 읽는다고 한다. 그렇게 하면 설익은 부분들이 보이고, 글이 더 단단해진다고 한다. 인생도 비슷한 것 같다. 서두르지 않고 조금 뜸을 들일 줄 아는 사람이 결국 더 나은 길을 걷는다는 걸 새삼 깨닫는다.


책 마지막에는 ‘해거리’라고 불리는 귤나무 이야기가 나온다. 어떤 해에는 열심히 열매를 맺고, 그 다음 해에는 지력을 회복하느라 과실을 적게 맺는다는 이야기다. 이 귤나무처럼 바쁘게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해거리’의 리듬이 필요하지 않을까. 불타오르는 시기 뒤에는 반드시 쉼이 따라야 하고, 그렇게 쉬었다면 다시 채우는 시간이 있어야 한다. 그것은 게으름이 아니라, 지극히 자연스러운 회복의 과정이다.


나 역시 한때 극심한 불안을 겪은 적이 있다. 매일이 시간에 쫓기는 것 같았고, 뭐든 해야 한다는 강박 속에서 숨이 턱턱 막히곤 했다. 끊임없이 무언가를 시도하고 있음에도 불안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돌이켜보면 그 시기에 ‘해거리’처럼 삶의 리듬을 조절하며 살 수 있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싶다. 오히려 바쁠수록, 압박감이 클수록 나 자신의 상태를 조금 떨어져서 바라보는 시간이 꼭 필요하다는 걸 이제는 제대로 안다.


마지막으로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귀한 마음은 받을 가치가 있는 이들에게만 전하면 된다.”는 구절이다. 저자처럼 나도 그동안 모든 사람에게 무던히 잘하려 애썼고, 상처를 주는 사람조차 이해하려고 애쓴 적이 많았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살아도 괜찮을 것 같다. 내 친절과 따뜻한 마음이 결코 당연한 것이 아님을 알아주는 사람, 그 소중함을 진심으로 헤아릴 줄 아는 사람에게만 마음을 나누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 문장을 읽는 순간, 정말 뼈저리게 공감했고, 나 또한 그 마음을 오래도록 되새기게 되었다.


『어디서든 너답게 빛날 거야』는 거창한 인생 조언을 늘어놓는 에세이가 아니다. 오히려 너무 평범해서 쉽게 지나쳐 버릴 수 있는 감정과 순간들을 조용히 붙잡아 곱게 들여다본다. 책 속에는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는 한 사람이 있고, 그 사람은 아주 다정한 태도로 자신을 아끼고 사랑하는 방법을 이야기해 준다. 그래서인지 책장을 넘길수록 내 마음도 조금 더 아껴주고 싶어졌다. 모든 것이 언제나 순조롭진 않겠지만 언젠가는 나답게 빛나는 순간이 찾아올 거라는 믿음을 다시 품어 본다. 무엇보다 이 책은 어렵지 않고 편안하게 읽힌다. 글과 그림이 함께 어우러져 있어 어느 연령대든 부담 없이 읽을 수 있고, 마음이 지친 누군가에게 선물하기에도 좋은 책이다. 읽는 내내 조용히 위로받는 기분이 들었다.



'부크럼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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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꽂힌 말은 ‘LET IT BE’, 그대로 두는 것. 그렇다고 모든 것을 그대로 두는 것이 아니라, 내가 할 수 있는 노력은 다하고 그 외에 일어나는 일들은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이니 그대로 두자는 의미다.

그동안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까지 어떻게든 막으려 애쓰며 괴로워했는데, 생각을 바꾸니 삶이 더 이상 혼란스럽지 않고 오히려 평화로워졌다. 그리고 이렇게 할 때 많은 것들이 순조롭게 흘러갔다. 일어날 일은 일어날 테고, 떠날 사람은 떠날 테고, 올 사람은 반드시 온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니 한결 편해졌다. 모든 것이. - P1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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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카피 누가 쓴 거예요?
이태호 지음 / 알에이치코리아(RHK) / 202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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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피는 공감을 겨냥해 쏘는 전략형 메시지다.”


『이 카피 누가 쓴 거예요?』는 광고 문구에 대한 책이지만, 단순히 멋진 문장을 쓰는 법을 알려주지 않는다. 이 책은 어떤 말을 왜 써야 하고, 어떻게 써야 사람 마음에 제대로 닿을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이 있게 풀어낸다. 우리가 흔히 쓰는 ‘말’의 구조를 하나하나 분해하고, 다시 효과적으로 조립하는 법을 알려주는 책이다.


이태호 저자는 책 전반에 걸쳐 하나의 가상 기업, ‘편하게사자’를 설정해 독자에게 친근하게 다가간다.

이 기업은 햇반, 생수, 라면 같은 생활 필수품을 “진짜 편하게” 배송해주는 커머스 스타트업으로 업계 3위에서 1위를 노리는 중이다. 소비자는 이 회사를 ‘편사’라 부르고, 기업 캐릭터는 이름처럼 사자다.

책의 모든 카피 실습과 전략은 이 편하게사자를 둘러싼 마케터들의 고민을 바탕으로 전개된다. 이 설정이 재미있는 이유는, 독자가 이 기업의 마케터가 된 것처럼 카피를 고민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책은 크게 두 축으로 구성된다.

첫 번째는 ‘무엇을 말할 것인가(What to Say)’,

두 번째는 ‘어떻게 말할 것인가(How to Say)’다.

저자는 이를 ‘왓투세이’와 ‘하우투세이’라는 가상의 사투리처럼 소개하며, 실제 광고 현장에서 쓰이는 전략 언어로 풀어낸다.


왓투세이는 ‘내용’에 관한 것이다.

즉, 카피가 전달하고자 하는 핵심 메시지다. 여기엔 다섯 가지 전략이 있다.

1. 팩트 – 숫자나 사실로 말하기

2. 선 긋기 – 우리와 저들의 차이 만들기

3. 선도성 – 최초, 원조의 자부심

4. 대세감 – 요즘 다들 하고 있어, 지금 이게 유행이야

5. 위협 도구 – 놓치면 손해라는 심리 자극


예를 들어 “1분에 1대씩 팔리는 스마트 모니터(삼성)”는 팩트를, “요즘 음악 만져봤어?(현대카드)”는 대세감을, “입맛이 없는 게 아니라 피로한 거예요(아로나민골드)”는 위협 도구를 활용한 예시다. 이런 카피들은 결국 ‘무엇을’ 말하느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하지만 좋은 소재만 있다고 좋은 카피가 되진 않는다.

그래서 필요한 것이 하우투세이, 즉 ‘어떻게’ 말하느냐다. 이 역시 다섯 가지 기술로 나뉜다.

1. 반복 – 세 번 말하면 기억된다

2. 말장난 – 언어 유희로 재미와 기억력을 높인다

3. 격차 – 기대와 현실의 차이에서 놀라움을 만든다

4. 반전 – 예상과 다른 방향으로 꺾기

5. 베네핏 – 소비자에게 직접 이득을 주는 말


“쏘리 질러, 포리 질러(피자헛)”는 반복, “꽃게 싸게 줄게”는 말장난, “돈 보낼 일은 늘 톡에서 시작되니까(카카오페이)”는 베네핏 전략을 활용한 사례다.


책이 특히 흥미로운 점은, 카피라이팅을 T형과 F형 사고로 나누어 설명한다는 것이다. T(Thinking)는 논리와 구조를 중시하고, F(Feeling)는 감정과 감각을 우선한다. 숫자, 근거, 명확한 설명이 강점인 T형은 ‘배달비 0원’, ‘1+1 행사’ 같은 팩트 중심의 카피를 잘 쓴다. 반면, 감정을 자극하는 말에 능한 F형은 ‘혼자라도 괜찮아, 삼각김밥 있으니까’처럼 공감과 위로를 건넬 수 있다. 중요한 건 두 가지 성향을 모두 ‘연기’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때론 T인 척, 때론 F인 척.


이 책의 또 하나의 관통하는 개념은 ‘명분’이다. 흔히 카피를 쓸 때는 ‘의도’를 먼저 생각한다. 하지만 의도는 쓰는 사람 중심의 기준이다. 반면 명분은 ‘보는 사람’이 납득할 수 있는 이유다. “왜 이 말을 해야 하는가?”, “이 카피가 소비자에게 어떤 의미가 있는가?”를 물으며, 제작자의 감상에 갇히지 않도록 자기 검열하는 것. 결국 좋은 카피는 라이터의 창의성보다 소비자의 고개 끄덕임에서 완성된다.


책은 끝까지 현실적인 사례로 꽉 차 있다. “이번에 내실 배달비는 빵원입니다”처럼 상황(TPO)을 고려한 문장 설계, “모양이 땡그래서, 육즙이 땡땡해서, 맛까지 땡큐라서 배민이지 동그랑땡” 같은 말맛 가득한 카피는 반복이 얼마나 강력한 도구인지 보여준다. 단순히 웃기거나 예쁜 문장이 아니라, 보는 이의 마음을 흔드는 한 줄. 그걸 만드는 게 카피의 본질이라는 걸 저자는 매 장마다 되짚는다.


이 책은 “좋은 카피는 기발해서가 아니라, 명확해서 살아남는다.” 숫자처럼 눈에 띄는 팩트를 기반으로, 브랜드만의 어조를 입히고, 소비자 입장에서 왜 이 말을 듣고 싶을지를 설득해야 한다.

멋진 한 줄을 만들기 전에 우리는 늘 물어야 한다. 지금 이 말이 왜 필요할까?


이 책이 전하는 핵심은 이것이다.

좋은 카피는 감에 의존해 쓰는 문장이 아니다. 아무 말이나 센스 있게 던진다고 통하지 않는다. 카피에는 말해야 하는 이유(목적), 어떻게 전달할지에 대한 생각(전략), 사람들이 고개를 끄덕일 수 있는 이유(명분)가 꼭 필요하다.

결국 말은 감각이 아니라 태도의 문제다. 문장은 멋있게 보이기보다 듣는 사람의 마음에 정확히 닿아야 한다. 좋은 카피는 사람의 입장에서 생각하고, 그들이 왜 이 말을 듣고 싶어 하는지를 먼저 이해하려는 태도에서 시작된다.



'알에이치코리아 출판사'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하놀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하놀 인스타 @hagonolza

카피의 목적은 결국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고 지갑을 움직여야 하는 것. 멋진 말로 사람을 홀리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래서 카피를 읽은 사람에게 ‘이 광고가 내게 하고 싶은 말은 이거구나!‘ 깨닫게 하는 것이 바로 왓투세이입니다. - P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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