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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
와카마쓰 에이스케 지음, 김순희.안민희 옮김 / 북플랫 / 2025년 3월
평점 :

책장을 넘기자마자 눈에 들어오는 따뜻한 노란색 속지.
해 질 무렵의 노을 같이 부드럽고 따뜻한 색이다.
와카마쓰 에이스케의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는 겉모습부터 위로를 건네는 책이다. 이 책은 시집도 아니고, 전통적인 에세이도 아니다. 하지만 시처럼 절제된 언어, 에세이처럼 깊은 통찰이 공존한다. 그래서일까? 책의 크기도 시집과 에세이 사이를 유지하고 있는 것 같은 느낌이다.
총 26편의 짧은 글이 담긴 이 책은, 삶과 죽음, 상실과 회복의 경계에서 건져 올린 단상들로 이루어져 있다.
저자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일본 문단에서 가장 활발히 활동하는 평론가이자 에세이스트 중 한 명이다. 그는 종교, 문학, 철학, 역사 등 다양한 분야를 넘나드는 글쓰기로 잘 알려져 있고, 특유의 조용하고 깊이 있는 문체로 많은 독자들의 신뢰를 받고 있다. 1968년 도쿄 출생으로, 일본의 저명한 평론가이자 작가, 그리고 영성(靈性)을 탐구하는 사상가이다. 도쿄대학 대학원에서 종교학 및 문학을 전공했고, 가톨릭적 세계관을 바탕으로 한 인간의 내면과 고통, 구원, 관계에 대한 깊은 성찰을 지속적으로 글로 써왔다. 또한, 그는 여러 문예지에서 정기적으로 비평을 연재하며, 현대 일본 문단에서 ‘조용한 영혼의 글을 쓰는 사람’으로 평가받고 있다.
저자는 수년간 ‘애도’와 ‘상실’이라는 주제를 글로 다루며 수많은 장례식, 이별, 죽음을 가까이에서 관찰해왔다. 직접 호스피스 병동을 찾기도 하고, 가족과의 이별을 겪은 사람들과 오랜 시간 대화를 나누며 그들의 말과 침묵을 글로 옮겨왔다. 특히 이 책을 쓰게 된 계기는 다음과 같은 질문에서 출발했다.
“도무지 말이 되지 않는 고통, 형언할 수 없는 상실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말은 무엇일까?”
그는 위로를 강요하지 않으면서도, 슬픔의 자리를 견디는 말의 온도를 찾아내고 싶어 했다.
그래서 이 책은 실제 장례식에서 낭독한 메시지, 그가 죽음을 앞둔 사람에게 건넸던 말들, 슬픔을 안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고백을 바탕으로 엮은 책이다. 철저히 경청의 자세로 쓰인 글들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그는 이렇게 말하기도 했다.
“슬픔은 그 자체로 완성된 감정이 아니라, 우리가 무엇을 사랑했고, 어떻게 살아왔는지를 되돌아보게 하는 거울이다.” 이러한 생각은 그의 전작들과도 일관되며, 와카마쓰가 단순히 ‘애도’를 감정의 문제로 보지 않고, 인간의 존재론적 깊이로 이해하고자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이 책의 가장 큰 미덕은 조급하지 않다는 것이다. 우리는 흔히 슬픔을 극복해야 할 감정으로 여기며, 빠르게 이전의 일상으로 돌아가야 한다고 믿는다. 하지만 저자는슬픔은 억지로 이겨내야 할 것이 아니라, 머물러야 할 감정이라고 말한다. 누군가를 잃은 고통 앞에서 너무 빨리 괜찮아지기를 요구하지 말고, 충분히 아파하고 울 수 있어야 한다는 메시지는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다.
그렇다고 이 책이 감상에만 머무르는 건 아니다. 저자는 슬픔의 자리에 오래 머물다 보면 그 감정이 결국 우리 안의 ‘문’을 하나씩 열어간다고 말한다. 사랑했던 이와의 추억, 미처 표현하지 못했던 말, 함께했던 시간의 소중함이 그 슬픔의 여백 속에서 다시 떠오른다. 슬픔은 무너짐의 과정인 동시에, 되돌아보게 하고, 살아가는 방식까지 다시 질문하게 만드는 전환점인 것이다.
26편의 글들은 각각 독립적인 주제를 다루지만, 전체적으로는 ‘상실 이후의 삶’이라는 하나의 흐름으로 연결되어 있다. 어떤 글에서는 슬픔을 아직 정리되지 않은 사랑이라 부르고, 또 다른 글에서는 아픔 속에서도 끝끝내 피어나는 희망을 말한다. 특히 마음에 남는 대목은, 슬픔이 있는 자리에도 햇빛은 스며든다는 문장이다. 감정을 밀어내지 않고 받아들일 때 우리는 생각보다 더 많은 것을 견디고, 더 깊이 사랑할 수 있게 된다는 믿음이 이 책에 깔려 있다.
그리고 이 책은 슬픔을 겪는 당사자뿐 아니라 그 곁에 있는 사람들을 위한 책이기도 하다. 누군가의 아픔 앞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가장 큰 위로는 때로 말이 아니라 곁에 머무는 일이다.
저자는 “슬픔에 말을 얹으려 하지 말고, 그냥 있어 주어라.” 그 한 문장이야말로 우리가 서로를 위로하는 가장 인간적인 방식이 아닐까.
종교적 색채가 없진 않지만, 이 책은 특정 신앙을 전제로 하지 않는다. 오히려 인간 본연의 감정에 더 집중하며, 누구나 겪을 수밖에 없는 슬픔의 보편성을 말한다. 문장은 차분하고 간결하며 자극 없이 독자의 마음에 잔잔히 스며든다. 과장도, 과속도 없는 글이랄까.
『슬픔을 겪어야만 열리는 문이 있다』는 인생의 어느 골목에서 갑작스레 맞닥뜨린 상실의 그림자를, 두려워하지 말고 바라보라고 권한다. 그 안에 숨겨진 빛의 조각을 하나하나 찾아가는 과정이야말로 우리가 삶을 더 깊이 이해하고, 더 단단하게 살아갈 수 있는 길임을 조용히 일러준다. 슬픔은 끝이 아니라, 우리가 다시 열어야 할 또 다른 문일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문은, 반드시 누군가의 따뜻한 동행 속에서 열릴 수 있다.
[책에 없는 내용]
호스피스 사역자
주로 임종을 앞둔 환자와 그 가족을 정서적, 영적, 신체적으로 돕는 사람을 말한다.
특히 종교적인 배경을 가진 경우, 신앙적인 위로나 기도로 마지막 시간을 함께하는 역할도 하기도 한다.
‘호스피스(hospice)’는 원래 말기 환자들이 고통 없이 평안하게 마지막 시간을 보낼 수 있도록 돕는 돌봄 서비스를 뜻하는데, 여기에서 ‘사역자’란 사명감을 가지고 봉사하거나 섬기는 사람이라는 의미다.
그래서 호스피스 사역자는 단순한 간병인이 아니라 삶의 마지막 여정을 함께 걸으며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라고 보면 된다.
와카마쓰 에이스케는 이 역할을 목회자이자 상담자, 친구 같은 존재로 수행하며 수많은 죽음과 슬픔의 자리를 가까이에서 지켜본 사람이다. 그래서 그의 글에는 죽음을 막연한 공포가 아니라, 한 인간의 이야기가 끝나는 방식으로 이해하고자 하는 따뜻한 시선이 깃들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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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클립1 @bookclip1'님을 통해 '북플랫 출판사' 도서를 협찬 받아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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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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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여기에 있고 저기에도 있다 눈앞에 있는 평범한 사람이어야말로 알려지지 않은 용자(勇者)임을 나는 살아 있기에 깨달았습니다. — 이와사키 와타루, 《용기》 - P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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