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스트 워킷 (Just walkit)
박송이 지음 / 세종마루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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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송이의 ‘저스트 워킷‘은 시와 에세이를 경계 없이 넘나드는 독특한 형식의 작품이다.
삶의 무게를 담담히 풀어낸 시집이랄까?

이 책은 일상 속에서 느끼는 상실, 죽음, 성장, 관계에 대한 이야기를 따뜻하면서도 깊이 있는 시선으로 그려낸다. 시인은 자신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여 독자들에게 자기 자신과 세상을 바라보는 새로운 관점을 제시한다.

시인은 삶과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이를 가볍게 흘려보내지 않는다. 단순히 슬픔에 잠식되기보다 죽음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닫고 배울 수 있는 시각으로 느껴졌다.

삶이 퍽퍽하고 고달픈 순간이 많다.
눈물이 터져 나올 것 같으면서도 제대로 우는 법을 알지 못해 삼키는 순간들이 얼마나 많았던가?
저자는 이때 한마디를 건넨다.
매미처럼 잘 우는 사람으로 컸으면 좋겠다는 말.
아이에게 전하는 말이었지만 나는 이 말이 현재의 성인들이 들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우는 법을 모르는 사람이 울고 있는 사람을 이해하기란 쉽지 않은 법이다.

울음을 배우지 못했다면 7월, 매미들로부터 우는 법을 수강하기를 바란다.
창문을 열면 매미의 울음소리는 언제나 무료다.
힘들거나 아프다면 매미처럼 화통하게 울어도 좋다.
매미의 울음을 통해 제대로 우는 법을 배워보자.

이 시집은 자신의 삶을 되돌아보게 만들고 죽음을 받아들이는 태도, 상실을 대하는 방법, 그리고 현재의 나를 만드는 과거의 흔적을 존중하는 자세 등이 새롭게 다가온다.
박송이의 저스트 워킷은 삶의 모든 장면을 정성스럽게 그려낸 작품이다.
치유와 깨달음을 선사한다.
삶이라는 여정을 멈추지 않고 “저스트 워킷(Just Walk It)” 하라는 메시지가 강렬히 다가온다.


'글씨앗X세종마루 @glseedbook_sjmarubooks'님을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인스타 #하놀 @hagonolza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오래전, 어머니가 외할머니를 떠나보냈듯이 9년 전 나는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7월이 오면 유독, 이 두 분이 그리운 이유는 바로 매미 울음 때문이다. 나는 ‘우는 법‘을 잘 아는 매미가 참 좋다. 도통 모습을 드러내지 않지만 울음으로 그들이 거기 있다는 걸 안다. 이면우 시인의 말대로 어쩌면 ‘"사람들이 울지 않으니까 / 분하고 억울해도 문 닫고 에어컨 켜 놓고 TV 보며 / 울어도 소리 없이 우니까" (매미들) 우리를 대신하여 매미들이 울어주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 P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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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 - 플라톤의 대화편 마리 교양 1
플라톤 지음, 오유석 옮김 / 마리북스 / 2023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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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음을 코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어쩌면 이렇게 처연할 수 있을까?
감옥에서 죽음을 기다리고 있는 소크라테스의 태도다.
누구나 죽음을 앞두고 있는 상황이라면 두려움, 공포, 불안감, 절망감으로 뒤덮일 것이 당연한데, 소크라테스에게서 그런 모습을 찾아 보기 힘들다. 오히려 태연하고 평온하게 죽음을 기다리는 사람 같아 보인다. 사형 집행일을 바로 앞에 두고 있는 상황에서 친구인 크리톤이 방문 했다는 사실 조차도 까마득하게 모르고 낮잠을 자고 있었다. 평온한 낮잠을 즐기고 있는 친구를 방해하기 싫어서 그가 깰 때까지 기다려주는 크리톤의 마음도 참 예쁘다.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일이 코 앞으로 다가온 순간에 탈옥을 권유하러 급한 마음으로 방문 했을 그였을텐데 친구의 평화로운 시간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그가 깰 때까지 기다려 준 것은 감동적이기까지 했다. 어쩌면 그 시간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소크라테스가 잠에서 깨고 난 뒤 크리톤은 그에게 탈옥을 권유한다. 그러나 소크라테스는 탈옥 대신 죽음을 택하게 된 경위를 들려준다. 그의 논리와 반박을 한번 들어보도록 하자.

이 책은 책 제목처럼 ‘소크라테스의 변론’ 과 ’크리톤‘ 내용을 모두 담았다.
해당 책이 담고 있는 전반적인 내용을 요약하고 읽어보면 좋을 것 같단 생각이다.


<역사적 배경>
기원전 5세기경 펠로폰네소스전쟁이 끝나고 승리한 스파르타는 과두파를 지원해서 아네나이의 민주정을 무너뜨리고 30인 과두정을 세운다. 과두파는 8개월 동안 통치하면서 대략 1500명의 시민을 처형하고 수천 명을 추방한다. 숙청을 모면한 민주파는 페이라이에우스로 피신해서 아테나이의 장군 트라쉬불로스를 중심으로 과두정에 저항한다. 기원전 403년 과두파가 민주파의 본거지를 공격했으나 민주파의 강력한 저항에 부딪혔고, 이때 크리티아스(플라톤의 당숙)를 비롯한 몇몇 과두파 지도자들이 살해된다.

소크라테스의 변론
소크라테스가 70세의 나이로 사형당한 기원전 399년 봄에 일어난 사건, 그리고 소크라테스의 법정 변론을 극화한 대화편이다. 오늘날의 학자들은 대체로 두 대화편이 플라톤의 초기 대화편이라고 간주한다.
특히 <소크라테스의 변론>은 중간에 고소인 멜레토스와 나눈 짤막한 문답을 제외하면 거의 대부분 소크라테스의 독백 형식으로 구성되어 있다. 법정에 피고로 선 소크라테스는 자신의 언행뿐 아니라 철학 자체에 대해서도 변론하고 있다.

크리톤
소크라테스와 크리톤의 대화로 구성되어 있는데, 대화편의 주요 등장인물 크리톤은 <소크라테스의 변론>에 두 번 언급된다. 크리토불로스의 아버지로 언급되는데, 소크라테스와 동년배이고 죽마고우인 사람으로 기술된다. 또 크리톤은 소크라테스를 대신해서 30므나를 지불하고자 하는 네 사람 가운데 하나로 언급된다. 크세노폰의 <소크라테스의 회상> 2.9에서 크리톤은 부유한 인물로 묘사된다. <에우튀데모스>에서는 자신이 소유한 농장에서 소득을 거두고 있는 사람으로 나온다.
한편 <파이돈>에서는 소크라테스의 친구들이 도착할 때 소크라테스의 아내와 아이들을 감옥 밖으로 데리고 나온 인물이 크리스톤이다. 그리고 사형 집행 직전 소크라테스가 목욕할 때 홀로 소크라테스가 사망하기 직전에 마지막 유언을 남긴 사람도 크리톤이다. 이처럼 크리톤이 소크라테스의 충실한 친구이자 동료였는데도 오늘날 많은 주석가들은 그가 소크라테스의 철학적 논변에는 별로 관심이 없었다고 평가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인스타 #하놀 @hagonolza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사람들을 죽여 여러분이 바르게 살고 있지 않음을 누군가가 비난하지 못하도록 막을 수 있으리라 생각하신다면, 이는 잘한 생각이 아니니까요. 이런 임시 방편적 모면은 강력하지도 않고 훌륭하지도 않습니다. 가장 훌륭하고 쉬운길은 다른 사람들을 억압하는 대신 스스로 가장 좋은 사람이 되도록 준비하는 것입니다. - P9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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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 - 플라톤의 대화편 마리 교양 3
플라톤 지음, 오유석 옮김 / 마리북스 / 202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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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연이라는 책을 읽게 되면서 가장 놀라웠던 점은 정말 다양한 주제로 이야기를 펼친다는 점이었다. 그 중에서도 개인적으로 충격적이면서도 흥미로웠던 부분은 동성애에 대한 언급이었던 것 같다. 고대 그리스 시절(기원전 8세기경)에 동성애에 대한 옹호적인 입장을 펼치는 것을 보고 많이 놀랐던 것 같다.

플라톤의 대화편 3권의 세트 중에서도 향연이 다양한 주제에 대해 토론을 나누고, 생각지도 못한 주제를 다루고 있었기에 제일 재미있게 읽었던 것 같다.


이 책을 제대로 정독하기 전에 ‘향연’의 의미가 무엇인지, 모임에 참여한 인물에 대한 정보를 알고 가면 좋을 것 같다. 책 첫 부분에 등장인물에 대한 자세한 소개가 있고, 뒤편에는 <작품해제>라고 하여 저자가 책 내용을 이해하기 쉽게 자세히 풀어 쓴 부분이 있는데 해당 내용들을 명확하게 읽고 책을 읽으면 좋을 것 같다. 그렇게 읽게 되면 책 내용이 좀 더 정리가 잘 되는 느낌을 받을 수 있다.


책의 본문 발췌 내용을 보기 전에 ‘향연’에 대한 전반적인 내용을 살펴 보면 좋을 것 같아 ‘향연’과 관련된 내용들을 검색하여 관련 내용을 재정리했다.


향연(饗宴)의 뜻

- 특별히 융숭하게 손님을 대접하는 잔치.

- 소크라테스를 비롯하여 그리스의 일류 문화인들이 한곳에 모여 사랑을 여러 가지 관점에서 이야기한 대화편이다.

《향연(饗宴)》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파이돈》에 이어 써졌다고 추측된다.

이 글은 말하자면 플라톤의 '연애론'이라 해도 좋을 것이다.


기원전 416년 아테네의 비극 작가인 아가톤이 비극 콘테스트에서 우승했는데, 축하연이 그의 저택에서 개최된다. 축하연의 참석자는 아래와 같다.

1. 아리스토데모스(소크라테스를 열렬히 추종하는 인물, 아가톤의 축하연에 초대받지 않고 참석했다)

2. 파이드로스(부유한 가문 출신, 수사술에 관심이 많은 20대 중후반의 청년)

3. 파우사니아스(아가톤과 연인 관계/소크라테스는 파우사니아스의 지나친 동성애 옹호를 비판했다)

4. 에뤽시마코스(의사/의사 아쿠메노스의 아들)

5. 아리스토파네스(당대 아테나이 최고의 희극작가/등장인물의 우스꽝스러운 분장과 정치적 풍자로 유명)

6. 아가톤(비극 작가, 파우사니아스의 연인)

7. 디오티마(유일한 여성 화자/실존 인물이 아니라 플라톤이 만들어낸 가상의 인물일 것이라고 추측)

8. 알키비아데스(부유하고 미남형, 사치스럽고 무도하며 무절제한 인물)

9. 소크라테스


연회에서 각자가 에로스(사랑) 찬미의 연설을 하게 된다.

소크라테스는 옛날 현녀(賢女) 디오티마에게서 배웠던 일을 그녀와의 대화 형식으로 연설한다. 그에 의하면 인간은 정신적으로나 육체적으로나 임신을 하고 있어 낳기를 바란다. 그 뜻은 사람은 어느 누구도 육체적 또는 정신적으로도 죽기 싫어하는 욕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그런데 출산의 대상은 추(醜) 속이 아니라 미(美) 속인 것이다. 이 미에의 생산욕, 이것이 에로스(사랑)이다. 사랑의 첫 단계는 육체의 미 속에 낳는 것이고 그것은 육체에서의 불사(不死)를 구하는 일이며, 아기라고 하는 형태로 실현된다. 그 다음에 정신의 미 속에 낳는 것을 추구하게 되며 또 추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이 단계에 이르면 육체의 미 따위는 근소한 가치밖에 없다는 사실을 사람들은 알게 된다. 그리하여 사람은 정신의 미라고 하는 대양(大洋)을 향하며, 아름답고 장대한 언론이나 사상을 낳고 결국에는 인간에게 있어서 가장 행복한 영역, 영원히 존재하여 생성 소멸하지도 않고 어떤 면에서는 아름답지만 다른 면에서는 추악스러운 일도 없이, 때로는 아름답고 때로는 추하다는 것도 아닌, 항상 불변하여 단일한 에이도스(姿)를 갖는 미 자체를 알 수 있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미 자체를 보면서 그와 더불어 있으며 거기에서 사람은 참다운 덕을 낳고 불멸하면서도 행복하게 된다는 것이다. 즉 에로스는 처음에는 육체의 미, 다음에는 정신의 미, 그리고 최후에는 미 자체의 세계로 사람들을 높여 불사(不死)하는 보물을 얻게 하는 조력자였다. 그러한 에로스를 찬미한다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다고 소크라테스는 말하는 것이다. 여기에서 플라톤의 이데아 사상이 에이도스라든가 미 자체라는 언어로 표현된다. 최후로 알키비아데스가 애지(愛知)에 살고 있는 소크라테스야말로 정신의 미 속에서 생산하고 미 자체를 직감하는 진정한 사랑의 구현자라고 소크라테스를 찬미한다. 여기서 찬미하는 알키비아데스는 플라톤 자신이라고도 할 수 있을것이다. 결국 플라톤의 에로스는 이데아의 사랑에 있어서 완성된다. 이것이 참된 플라토닉 러브일 것이다.

- 출처. 위키백과


<향연>

향연 풍습(함께 모여 술을 마시며 유흥을 즐김)은 기원전 8세기 무렵 시작되어 로마 시대까지 이어졌다. 향연은 철저히 남성들의 전유물이었으며, 이념과 이해관계를 공유하는 귀족들의 사적 모임이었다. 아테나이 남성들은 향연에 자기 아내나 여성 친척을 데려오지 않았다. 그러나 외국 여성이나 하층 여인들이 참석하는 경우는 있었다. 가령 피리 부는 소녀나 무용수들이 향연 참석자의 여흥을 돋우려고 함께하기도 했으며, 헤타이라이(조선시대 기생과 유사하다. 대부분은 외국 여성이었고 아테나이 여성과는 달리 교육을 받았다.)가 참석하기도 했다.

 향연에 참석한 사람(대체로 7~11명이 모였으며, 최소 3명에서 최대 15명까지 모이기도 했다. 그리고 한 침상에는 대개 2명이 함께 앉았다.)은 안드론(andron, 남성들의 방, 한옥의 사랑방과 유사)이라는 방에 모여 침상(한방에는 대체로 7개의 침상이 놓여 있었는데, 최소 5개에서 최대 11개까지 놓이기도 했다.)에 기대고 누워서 상반신을 왼쪽으로 돌리고 왼쪽 팔꿈치를 쿠션에 기댄체 오른손으로 침상 왼쪽 테이블의 음식과 음료를 먹었다.

보통 한 침상에 두 명이 함께 앉았는데, 아가톤의 침상은 세 명이 앉기에 충분할 정도로 컸다. 관습적으로 지위가 가장 높은 사람이 문 오른쪽에 자리했고, 시계 반대 방향으로 앉았다. 또 여흥을 주도하기 위해 향연 주관자(symposiarchos)를 선발하기도 했다. 플라톤의 <향연>에서는 전반부에 에뤽시마코스와 파이드로스가 모임을 이끌어가다가, 후반부에 술 취한 알키비아데스가 등장해서 향연 주관자 역할을 자처한다.

고대 그리스의 향연은 일종의 교육적 기능, 입문식의 역할(소년을 성년 시민으로 받아들임)을 담당했는데, 그리스 사람들은 식사를 마친 후 먼저 디오뉘소스 혹은 제우스에게 헌주를 했다. 또 집주인이나 선출된 향연 주관자가 술을 얼마나 어떻게 마실지, 무슨 이야기를 할지 결정했다. 술을 마실 때는 물이 담긴 항아리에 포도주를 넣고 희석해서 주전자에 담아 술잔에 따라 마셨다.

 그리스 사람들은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취하지 않도록 주의했지만 때로는 만취하기도 했다. 만취해서 길거리에서 흥청거리는 취객 무리를 코모스Komos라고 불렀는데, 대화편 후반부에 등장하는 알키비아데스도 그중 하나였던 듯하다.

 아가톤의 축하연의 경우, 소크라테스가 도착할 때까지 파이드로스가 처음 자리에 앉고 아가톤이 마지막으로 앉는다. 그리고 도착한 소크라테스는 마지막으로 착석한다.

 향연에 참석한 이들은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연설하기로 한다. 즉, 파이드로스에서 시작해서 소크라테스가 마지막에 연설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파네스 옆 침상에 앉은 에뤽시마코스는 아리스토파네스 다음에 연설하기로 되어 있었다.


<에로스>

<향연>은 아폴로도로스가 무명의 친구에게서 아가톤의 향연에서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려달라고 요청받는 장면에서 시작한다. 아폴로도로스는 자신은 그날 아가톤의 축하연에 참석하지 않았지만, 아리스토데모스(실제로 향연에 참석했던)에게 들은 이야기를 전해주겠다고 말한다.

 아가톤은 기원전 416년 레나이아 제전의 비극 경연에서 우승했는데(당시 소크라테스는 50대 초반이었고, <향연>의 등장인물은 대부분 30대였다. 알키비아데스는 그다음 해에 쉬라쿠사이 원정의 사령관 중 하나로 선출되었다.), 이를 축하하기 위해 이틀간 축하연이 벌어진다.(향연의 저술 시기는 기원전 385~379년경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이 대화편은 30~40년 전의 에피소드를 회상하고 있다.) 아가톤을 비슷해서 모임에 참석한 이들은 축하연 첫날 술을 엄청나게 마셨고 대부분 다음 날까지 숙취에 시달리고 있다.

 소크라테스와 아리스토데모스는 축하연 둘째 날에 참석했고, 저녁 식사를 마치고 일행은 단순히 여흥을 위해 밤새도록 술을 마시고 즐기는 대신, 에로스(그동안 도외시되었던 신)를 찬미하는 연설을 하기로 한다. 연사들은 차례로 에로스와 사랑에 관한 자신의 견해를 밝힌다. 이들의 이야기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사랑과 성에 관한 견해를 생생히 보여준다.

 고유명사 에로스는 주로 날개 달린 젊은 신으로 묘사되었지만, 일반명사 에로스는 ‘사랑’을 뜻한다. 호메로스도 에로스를 먹고 마실 것에 대한 욕망을 가리키는 단어로 썼고, 일반적으로 ‘사랑(특정한 개인을 성적 파트너로 강렬히 원함)’이라는 의미로 사용했다. 하지만 에로스는 부모와 자식, 형제자매, 주인과 종, 통치자와 피지배자의 관계를 가리키는 단어는 ‘필리아philia’다. 이 용어는 ’국가 간에 교전이 없는 상태’ ‘동료에게 느끼는 애정’을 가리키기도 했고, ‘부모나 자식에게 느끼는 사랑’을 가리키기도 했으며, ’친구나 애인에게 느끼는 사랑‘을 뜻하기도 했다.

 필리아는 대체로 상호적 관계를 나타낸다. 따라서 Philoi(친구들)는 사랑하는 자이자 사랑받는 자다. 반면 erao라는 동사는 주로 성적인 사랑을 가리키는 단어였으나 성과 무관한 대상에게 느끼는 강렬한 욕망(이를테면 호메로스는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에로스를 언급한다.)을 의미하기도 한다. 하지만 이 욕망은 종종 우리에게서 올바른 판단 능력을 앗아가며, 정상적인 상황이라면 행하지 않았을 법한 일을 저지르게 한다. 이를테면 투키디데스는 시칠리아 원정을 준비할 때 모험에 거는 강렬한 에로스가 아테나이 시민들을 사로 잡았다고 말한다.

 비극에도 에로스의 파괴적 성격이 드러나는데, 가령 헤라클레스는 아름다운 소녀에게 이끌리는 욕망 때문에 그녀의 나라를 함락시켰고, 헤라클레스의 아내는 신들까지 포함해서 모두가 에로스의 능력 앞에서 무능함을 인정한다. 물론 에로스는 인류의 존속에 기여하며 큰 쾌락을 가져다주지만, 그 파괴적 능력은 조심해야 한다.


<동성애>

<향연>에는 이성애보다 동성애에 관한 논의가 더 많이 등장하는데 이는 당시 문화와도 같은 맥락이다. 기원전 6세기 무렵 그리스인들은 예쁜 소녀보다 아름다운 소년이 성인 남성에게 성적 욕망을 더 많이 불러일으킨다고 여겼다.(물론 그렇다고 해서 동성애가 이성애나 결혼과 양립할 수 없다고 여긴 것은 아니다.)

당시 아테나이 사회는 성이 분리되어 있어 동성애를 부추겼다. 노예가 충분히 있는 가정에서는 여성을 집 밖에서 활동하거나 일하도록 허용하지 않았으므로, 젊은 남성이 이웃집 딸과 사귀기 어려웠다. 물론 돈이 넉넉하면 이방 여인이나 노예와 매음할 수 있었다. 하지만 자유로운 신분의 젊은 남성을 구애하고 유혹하는 일은 간음에 따르는 위험을 감수하지 않으면서도 성적 만족과 동료들의 인정(정복자로 부러움과 존경을 받게 됨)을 얻을 수 있는 일로 여겨졌다.

그런데 그리스 사람들은 동성애를 같은 또래의 두 남성 사이에 일어나는 욕망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오히려 나이 많은 남성(사랑하는자)이 아름다운 소년(사랑받는 자)에게 구애해서 소년이 나이 많은 남성의 구애에 굴복하면 호의와 감사, 애정을 표하는 식이었다. 하지만 아테나이 법률은 성인 남성이 18세 이하의 미성년자와 귐나시온이나 성적 접촉을 할 수 있는 곳에서 만나는 것을 허용하지 않았다. 또한 18세 이하 소년은 향연장에 참석해서 침상에 기대어 누울 수 없었고, 보호자(특히 아버지)의 동반하에 서 있거나 앉아 있을 수 있었다. 

 그런데도 동성애는 고대 그리스와 아테나이 문화에서 폭넓게 확산되었고, 나이 많은 남성이 어린 소년을 유혹하는 경우도 종종 있었다. 고대 그리스의 도자기 그림에는 사랑하는 자가 소년에게 수탉이나 토끼, 뤼라 같은 작은 선물을 주면서 호의를 사는 장면이 등장한다. 소크라테슨즌 <카르미데스> 155c에서 카르미데스의 외투 안쪽을 들여다보고 마치 여인의 가슴을 훔쳐본 것처럼 흥분했노라고 고백한다. <뤼시스> 206a에서도 뤼시스와 사랑에 빠진 히포탈레스에게 잘생긴 소년은 칭찬할수록 자만해진다고 조언한다.

 이처럼 동성애에는 역기능이 존재했지만, 그리스 사회에서 성인 남성과 어린 소년의 관계는 남녀 사이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교육적 의미도 있었다. 왜냐하면 소년은 연인을 롤 모델로 여기고 흉내 낼 수 있었기 때문이다.

 소크라테스가 당대 사람들처럼 동성애에 강렬한 욕구를 느꼈는지는 명확하지 않다. 하지만 기원전 4세기 후반 아리스토크세노스는 소크라테스에게 이성애적 욕구를 매우 컸다고 전한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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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혼 안에 있는 아름다움이 몸 안에 있는 아름다움 보다 더 값지다고 여겨야 합니다. 그래서 누군가가 신체적 매력은 부족해도 그 영혼이 훌륭하다면 충분하다고 여기고 그를 사랑하고 아끼며 젊은이들을 더 나은 사람으로 만들어줄 대화를 나누어야 합니다. 이를 통해 관습과 법률 안에 있는 아름다움을 관조해서 모든 아름다움이 그것과 동류라는 것을 알게 될 수 밖에 없게끔 말입니다. 그래서 신체와 관련된 아름다움은 상대적으로 사소하게 여기도록 말입니다. - P1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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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 - 플라톤의 대화편 마리 교양 2
플라톤 지음, 오유석 옮김 / 마리북스 / 2024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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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돈》을 읽기 전, 책에 대한 전반적인 정보를 알고 나서 읽는 것이 책의 흐름이나 내용을 제대로 인식할 수 있고 이해도 쉬울 것 같다는 생각이다. 그래서 《파이돈》에 관한 내용을 검색하여 관련 내용을 최대한 정리하고자 노력했다. 아래 내용을 우선적으로 읽고 해당 책을 읽어 보시길 권한다.

개인적으로 나는 해당 책을 읽기 전에 전반적인 내용을 보지 않고 읽게 되었는데 책에 실린 내용 중 다소 어려운 내용 부분을 이해하기 위해 약간은 급급한 모습으로 쫓아 갔던 것 같다. 앞으로 이 책을 읽어 보려는 분들은 나와 같은 과정을 겪지 말고 전반적인 내용을 훑고 들어가면 이해가 더 쉬울 것 같단 생각이다.

물론 원치 않는다면 책을 다 읽고 해당 내용을 보셔도 좋다.

해당 책 내용이 새롭게 다가오는 느낌을 받으실 수 있으실 것 같다.

아래 내용은 찾아본 내용을 재구성하여 쓴 글임을 밝혀둔다.




《파이돈》은 플라톤의 중기 대화편 중 하나로서 그의 대표작으로 꼽힌다. 스승인 소크라테스의 사상으로부터 구별되는 소위 플라톤의 이데아론이 나오게 되는 것이 이 작품부터라고 하며 이는 영혼의 불사론(不死論)이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사형을 당하기 직전에 파이돈을 비롯한 젊은이들과 나눈 대화를 담고 있다.


《파이돈》은 고대 그리스의 엘리스 출신이다. 그가 어렸을 때 도시가 멸망 당했고, 때문에 노예 신세로 전락했다. 그는 엄청난 미남이었다고 하는데 그래서인지 아테나이에 사창가로 팔려왔다. 다행히도 소크라테스가 그를 구해줘서 풀려났다고 한다. 은인인 소크라테스를 열렬하게 따르는 헌신적인 제자가 된다. 동시대에 그에 대해 언급한 자료들에 따르면 소크라테스의 사후에도 그의 사상에 가장 본래에 가깝게 충실했다고 한다. 후에 그의 고향 엘리스가 복구되면서 고향으로 돌아가 엘리스 학파를 창설했다. 하지만 그의 저작은 모두 소실되어서 그의 구체적인 사상은 전혀 전해지지 않는다.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 법정에서 소크라테스가 사형선고를 받고 사형이 집행되기까지는 한 달가량이 걸렸다. 아테나이 사람들은 영웅 테세우스가 크레타의 반인반수 미노타우로스에게서 14인의 남녀를 구한 일을 기념해 매년 델로스에 사절단을 파견했다. 그 기간 동안은 사형 집행을 금했기 때문에 소크라테스의 사형 집행도 늦어졌다. 델로스에 사절단으로 파견된 배가 그리스에 도착하고 소크라테스는 다음 날 사형을 당한다.

파이돈은 소크라테스의 임종을 지켜보고 고향으로 돌아가는 길에 펠로폰네소스반도의 플레이우스에 들른다. 그때 에케크라테스의 요청으로 소크라테스가 독배를 마시고 죽을 때 무슨 말이 오갔고, 이를 지켜보던 동료들의 심경이 어땠는지를 상세히 들려준다. 이 책은 액자식 구성으로 파이돈과 에케크라테스가 대화를 나누고 도중에 소크라테스와 심미아스, 케베스가 끼어드는 형태다.


소크라테스는 해질 무렵인 사형집행 때까지 주로 시미아스와 케베스라는 두 사람의 피타고라스 학도와 대화를 나누었는데, 태연자약하여 평소와 조금도 다른 바가 없었다. 한편 그 대화를 듣는 편이었던 제자들은 "방금 웃으며 떠드는가 하면 곧 눈물을 흘린다"라는 식이었다. 소크라테스는 죽음이란 영혼이 육체로부터 분리되는 것이라고 말한다.

영혼은 육체라는 침침한 유리를 통하여 보는 것이므로 진리를 좀처럼 정확하게 포착할 수 없다. 그러므로 참다운 지(知)를 사랑하는 자(철학자)는 살아 있을 때부터 육체를 정화하여 영혼의 감옥이라 할 만한 육체에서 해방될 수 있도록, 즉 살면서 죽음을 행하도록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 그런데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었을 때 육체는 없어지지만 영혼은 어떻게 되는가. 여기에서 플라톤은 영혼의 불사(不死)를 증명하기 위하여 이데아의 생각을 끌어낸다. 이데아는 우리가 현실의 개체를 현실의 개체로 인정할 수 있는 원인이 되는 것이었다. 이 이데아의 원인설이 영혼 불사론의 제1전제가 된다. 그런데 눈(雪)은 눈으로서 눈의 이데아가 현실적인 눈의 원인인 동시에 눈의 이데아는 그것과 본질적인 관계에 있는 냉(冷)의 이데아도 받아들여 그것과 반대 관계인 열(熱)의 이데아를 배척한다. 뜨거운 눈이라는 것은 없기 때문이다. 이것이 제2전제이다.

그런데 혼은 생명을 부여하는 것이다. 더욱이 현실의 생명은 생명의 이데아가 원인이다. 그렇다면 영혼은 생명의 이데아와 본질적인 관계가 있다고 하겠다. 이리하여 눈이 냉(冷)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열(熱)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처럼 영혼은 생명의 이데아와 반대되는 죽음의 이데아를 받아들이지 않는다. 따라서 영혼은 죽음을 받아들이지 않는 까닭에 불사인 것이다. 이것이 이데아 원인설에 의한 불사의 증명이었다. 소크라테스는 무엇을 의지하고 무엇을 근거로 하여 태연하게 독배를 마셨는가. 거기에는 절대로 동요하지 않는 정의에의 확신이 있지 않으면 안 된다. 이 점에서 플라톤은 윤리적 근거로서 이데아를 안출하여 《파이돈》에서 스승 소크라테스의 태연한 죽음의 근거를 부여하였던 것이다.

- 출처. 위키백과


플라톤은 '플라톤의 대화편'이라고 일컬어지는 25편의 저작을 남겼다.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이 초기 작품이라면, 『파이돈』은 중기 작품에 속한다고 할 수 있다. 위대한 철학자 플라톤이 정리한 소크라테스 철학의 정수를 보여주는 저작들인 것이다. 그중 『소크라테스의 변론·크리톤』과 『파이돈』은 소크라테스가 재판정에 서고 이후 죽음에 이르기까지의 이야기를 각각 다른 화자가 생생하게 전한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 출처. 교수신문




p17-18

크리톤의 집안사람 몇이 가슴을 치며 소리내어 슬피 우는 크산티페를 데리고 나갔습니다. 그 사이 소크라테스는 침상에 올라 앉아 다리를 접고서 손으로 세게 문질렀습니다. 그러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오, 사람들이여! 쾌락이라는 것은 참으로 기이해 보입니다. 쾌락과 반대된다고 생각되는 것. 즉 고통과 놀라우리만큼 연관되어 있으니까요. 쾌락과 고통은 한 사람에게 동시에 생겨나길 원치 않는 듯 합니다. 하지만 누군가 둘 중 하나를 좇아 그것을 취하면, 거의 모든 경우에 다른 하나도 얻게 됩니다. 마치 둘이 하나의 머링데 결합된 것처럼 말이지요.

 그래서 제가 생각하기에 아이소포스가 이를 숙고했더라면 다음과 같은 우화를 지었을 것 같습니다. 즉, 서로 싸우던 쾌락과 고통은 신께서 화해시키려고 했으나 그게 불가능 했다. 그러자 그것들의 머리를 한데 묶어 버렸고, 이런 이유로 둘 중 하나가 누군가에게 생겨나면 나머지 하나도 잠시 후 뒤따른다는 이야기로 말입니다. 이런일이 저에게도 일어나는 것 같습니다. 족쇄 때문에 다리에 고통이 있었기에 뒤따라 쾌락이 생겨나는 것처럼 보이니까요.”


p43-45

그때 케베스가 끼어들었습니다. “오, 소크라테스여! 다른 것들은 훌륭하게 논의하셨다고 생각했지만, 영혼에 관한 말씀은 사람들에게 많은 의심을 불러 일으킵니다. 일단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면 더 이상 아무곳에도 존재하지 않으며, 사람이 사망하는 그날 파괴되고 소멸하지나 않을까 걱정할 테니까요. 즉, 영혼이 육체에서 분리되자마자 마치 숨결이나 연기처럼 사방으로 날아가서 흩어져버리고 아무곳에도 존재하지 않게 되는게 아닌가 하고 말입니다. 만약 영혼이 어딘가에 그 자첼초 홀로 존재하고, 지금 말씀하신 악들로부터 분리되어 한데 모이게 된다면, 오, 소크라테스여! 당신의 말씀이 참되다는 크고 아름다운 희망이 있을겁니다. 하지만 사람이 죽은 후에도 영혼이 존재하고 모종의 능력과 현명함을 가진다는 이야기에는 적잖은 설득과 확신이 필요합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오, 케베스여! 당신 말씀이 맞습니다. 그렇다면 이제 어떻게 해야 할까요? 이 말이 그럴듯한지 아닌지 알기 위해서 더 친절하게 논의하기를 원하시나요?“

케베스가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이 문제에 대해 당신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꺼이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저로서는 이 문제에 관해 당신께서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기꺼이 듣고 싶습니다.“

소크라테스가 말했습니다. ”누군가 - 설령 그가 희극자까라고 하더라도 -가 우리 이야기를 듣는다면, 지금 제가 하품이나 떨면서 상관도 없는 것들을 주절거린다고 생각하지는 않을겁니다. 따라서 당신이 좋다면 이 문제를 면밀히 따져보는게 좋겠습니다. 다음과 같이 생각해봅시다. 죽은 사람의 영혼이 저 세상에 존재하는지 아닌지 말입니다. 옛이야기 중에 죽은 사람의 영혼이 이승에서 저승으로 갔다가 다시 이승으로 돌아와 망자에게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산사람이 죽은 사람에게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기억납니다. 산사람이 죽은사람에게서 다시 태어난다는 이야기가 사실이라면 우리 영혼이 저승에 존재하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영혼이 어딘가에 존재하지 않는다면 다시 태어날 수 없을테니까요. 그러니까 산 사람이 죽은 사람 말고 다른데서 태어날 수 없다는게 사실이라면 이는 영혼이 어딘가에 존재한다는 충분한 증거가 됩니다. 하지만 그렇지 않다면 다른 논증이 필요합니다.


p62

“우리가 이런 지식을 획득하고 잊어버리지 않는다면, 항상 이것들을 아는 상태로 일생 동안 알겁니다. 왜냐하면 안다는 것은 어떤 지식을 획득한 후 이를 잃지 않고 유지하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오! 심리아즈여! 우리는 지식을 잃는 것을 망각이라고 부르지 않나요?

”물론입니다. 오, 소크라테스여!“


p73

영혼이 홀로 탐구할 때는 순수하고 항상 존재하며 불사하고 한결 같은 대상을 향합니다. 영혼을 이런 대상과 동류이기 때문에 홀로 있을 때 방해 받지 않으면 이런 대상과 늘 함께 합니다. 이런 대상을 붙들고 있을 때 영혼도 방황을 멈추며 항상 동일하고 불편합니다. 자신과 유사한 대상과 연합하니까요. 영혼의 이런 상태를 “현명함”이라고 하지요?”


p78

(중략) 더구나 이런 영혼은 자신을 따라다니는 것, 즉 물질적인 것을 추구하는 욕망으로 인해 떠돌면서 다시 육체에 갇힐 때까지 방황합니다. 아마도 이들은 사는 동안 가졌던 습성에 다시 묶일 겁니다.

무슨 습성을 말씀하시는 건가요? 오, 소크라테스여!

이를 테면 탐식이나 방탕, 폭음에 탐닉하면서 삼가지 않았던 자들은 당나귀 같은 짐승의 몸을 입게 될 것입니다.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십니까?

아주 합당한 말씀입니다.

그렇습니다. 또 불의와 독재, 강탈을 좋아하던 자들은 늑대나 매, 솔개의 몸속에 들어갈 겁니다. 그런 영혼이 다른 어떤 몸에 들어간다고 말하겠습니까?

의심의 여지없이 그런 몸으로 들어가겠지요.

다른 영혼들도 자신이 행한대로 다른 어딘가로 가게 되겠지요?


p80-81

배움을 사랑하는 자들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그의 영혼을 사로 잡을 때, 자신의 영혼이 육체에 단단히 결박된 채 갇혀 있어 마치 감옥 쇠창살을 통해 그리하듯 육체를 통해 존재하는 대상들을 탐구해야 하며, 영혼 자신을 통해 탐구할 수 없으므로 완전히 무지에 빠져 있다는 것을 깨닫습니다.

또 배움에 대한 사랑은 감옥의 무서운 점이 욕망을 통해 작동한다는 것을, 무엇보다 결박당한 사람 자신이 결박의 공모자라는 것을 간파합니다.

그러니까 제 말은 사랑하는 자들은 배움에 대한 사랑이 이런 상태의 영혼을 사로잡아 부드럽게 설득하고 해방시키려함을 안다는 겁니다. 눈을 통한 탐구는 기만으로 가득하며 귀나 다른 감각을 통한 탐구 또한 기만적이라는 것을 보이면서, 꼭 필요한 경우가 아니라면 이런 감각을 멀리하도록 영혼을 설득하지요. 또 영혼을 독려해서 자기 자신에게 결집하고 몰두하게 하며, 존재하는 것들 가운데 무언가를 영혼이 그 자체로 사고할 때는 자신 이외의 것들은 신뢰하지 않도록 합니다. 또한 배움을 사랑하는 자들은 지혜에 대한 사랑이 위와 다른 방식으로 탐구하고 상황에 따라 달라진다면 참된 것으로 간주하지 않습니다. 이런 대상은 감각적이고 가시적인 반면 영혼 자체가 파악하는 대상은 지성적이고 비가시적인 대상이라고, 생각하도록 영혼을 독려합니다.


p86

백조는 평상시에는 노래하지만 죽어야 할 때를 자각하면 지금까지보다 훨씬 더 길고 아름답게 노래합니다. 자신들이 섬기는 신들 곁으로 떠나는 걸 기뻐하는 것이지요.


p99

적절한 지식없이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사람이 완전히 진실하고 온전하며 믿을만하다고 여기지요.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인스타 #하놀 @hagonolza
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적절한 지식없이 누군가를 전적으로 신뢰하면서 그 사람이 완전히 진실하고 온전하며 믿을만하다고 여기지요. - P9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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트렌드 읽는 습관 - 모든 사업의 시작 좋은 습관 시리즈 46
김선주.안현정 지음 / 좋은습관연구소 / 2024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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많은 사람들이 트렌드를 숫자나 데이터의 분석으로만 접근한다.
하지만 이 책은 트렌드를 단순한 통계가 아니라 사람들의 마음과 행동 속에서 읽어내야 한다고 강조한다.
저자들은 트렌드는 결국 사람들의 욕망과 불안, 희망을 반영한 거울이라고 한다. 우리가 매일 접하는 뉴스, 광고, SNS 속에는 단순한 정보가 아니라 시대를 움직이는 감정의 흐름이 숨어 있다. 이를 읽어내는 능력이야말로 트렌드를 이해하는 첫걸음이다.

책에서 흥미로웠던 부분은 트렌드를 읽는 관찰력을 키우는 방법이다. 저자들은 단순히 무엇이 유행하는지 보는 것을 넘어 왜 그런 현상이 생겨났는지를 파악하라고 한다. 예를 들어, 소확행이라는 키워드가 떠오르는 이유를 단순히 경제적 상황으로 설명할 수도 있겠지만, 그 안에는 개인의 행복과 여유를 찾으려는 심리적 변화가 담겨 있다는 것이다.

트렌드 분석에서 스토리텔링의 중요성을 강조한 부분도 인상 깊었다. 단순히 좋은 제품이나 서비스를 제공하는 것만으로는 사람들의 관심을 끌 수 없다. 이제는 그 제품이 어떤 이야기를 담고 있는지, 사람들의 마음을 어떻게 움직이는지가 핵심이다.

이 책에서는 환경친화적 소비를 예로 들어 이를 설명한다. 소비자들은 단순히 친환경 제품을 사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환경 보호의 주체가 되는 경험을 원한다. 그들이 제품을 선택할 때는 단순히 기능을 넘어, 그 선택이 어떤 ‘선한 영향력’을 가질지에 더 주목한다. 브랜드가 소비자와 함께 이야기를 만들어가는 구조를 구축해야 한다고 했다.

트렌드를 읽는 능력은 타고나는 것이 아니라 훈련과 반복을 통해 길러진다. 저자들은 뉴스, SNS, 대중문화 등 우리가 매일 접하는 모든 콘텐츠를 분석 대상으로 삼으라고 한다. 그리고 하나의 현상을 다양한 관점에서 해석하며 연관된 키워드를 찾아보는 연습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특히 기억에 남는 문장이 있다. “트렌드는 멀리서 오는 거대한 파도가 아니라, 가까운 곳에서 시작되는 잔물결이다.” 이는 대중적이고 눈에 띄는 현상만 좇지 말고, 그 시작점을 읽어내는 섬세한 관찰력이 필요하다는 뜻이다.
독자가 직접 트렌드를 분석해볼 수 있는 실습과 질문들을 제공하며, 일상 속 사례를 통해 개념을 쉽게 이해하도록 돕는다. 단순히 읽고 끝나는 책이 아니라, 행동을 촉구하고 사고를 확장시키는 책이다.

『트렌드 읽는 습관』은 변화가 두려운 사람들에게 필요한 책이다. 변화는 피할 수 없는 것이고, 트렌드는 그 변화의 맥락을 읽는 도구다. 트렌드를 읽는 사람은 유행을 좇지 않고, 오히려 자신만의 길을 만들어간다. 이 책은 트렌드를 읽는 기술을 넘어 변화에 대한 열린 자세와 삶을 보는 새로운 관점을 선사한다. 결국 트렌드는 우리의 현재를 비추는 거울이다. 이를 제대로 읽어내는 사람은 불확실한 미래 속에서도 자신의 방향을 잃지 않는다. 『트렌드 읽는 습관』은 그 방향을 찾기 위한 훌륭한 나침반이다.


'채성모의 손에 잡히는 독서(채손독)'를 통해 도서 협찬을 받아서 주관적으로 작성한 리뷰입니다.

[작성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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블로그 https://blog.naver.com/hagonolza84


"생각이 바뀌면 행동이 바뀌고, 행동이 바뀌면 습관이 바뀌고, 습관이 바뀌면 행동이 바뀐다" - P26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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