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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자의 기억법
김영하 지음 / 문학동네 / 2013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작가 - 김영하
2013년도에 나온, 영화 ‘살인자의 기억법 MEMOIR OF A MURDERER, 2016’의 원작 소설이다. 영화만 봤었는데, 소설은 결말이나 진행이 좀 다르다고 해서 읽어보기로 했다.
‘나’는 26년 전까지는 연쇄 살인마였다. 하지만 마지막 살인을 하고 돌아오다가 교통사고를 당했다. 그 때 당한 뇌손상 때문인지, 살인이 주는 매력을 느끼지 못해 그만 두었다. 마지막 희생자 부부의 딸인 ‘은희’를 입양하고, 수의사로 일하던 중 나는 알츠하이머 진단을 받았다. 그 병을 빼고는 별다른 문제가 없던 삶에, 한 남자가 눈에 들어왔다. 전직 살인마의 감으로 확신하건대, ‘박주태’ 그 놈은 연쇄 살인마다. 그런데 놈이 은희의 남자친구란다. 딸을 보호해야 한다. 나는 그를 죽이기 위해, 다시 살인을 저지르기로 하는데…….
모호하게 마무리 지었던 극장판 영화와 달리, 소설은 확실한 결말을 보여줬다. 그리고 몇 가지 설정 부분에서 영화와 달랐다. 우선 딸인 은희의 설정, 주인공의 배경과 나이, 박주태의 직업 그리고 영화에서 친분이 있던 경찰과의 관계 등이 달랐다. 또한 영화에서 부각되었던 누나의 존재가 사라지고, 대신 개가 그 자리를 채웠다.
영화가 막판에 휘몰아치듯이 쏟아 부었다면, 소설은 주인공을 조금씩 야금야금 무너뜨리고 있었다. 앞부분과 미묘하게 달라진, 하지만 무심히 지나갈 법한 문장이나 대사에서 주인공의 병이 얼마나 심각해졌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그걸 확실히 보여주는 것이 바로 ‘개’였다. 개에 대한 두 번째 언급이 나오는 부분에서, ‘어?’하는 의문과 함께, ‘헐!’하는 놀라움이 들었다.
1인칭 시점이건 3인칭 시점이건, 소설을 읽을 때 서술자가 거의 진실을 얘기한다고 믿는 것이 일반적이다. 그걸 깨버린 애거서 크리스티같은 사람도 있지만, 그래도 아직은 서술자를 믿고 읽는 편이다. 그런데 이 책은, 서술자부터가 자신이 보고 듣는 것에 확신이 없었다. 책의 모든 것이 그의 기록에 의존했기에, 그가 착각했거나 혼란스러워하는 일들이 그대로 적혀있었다. 아까 그가 한 말과 들었던 얘기, 그리고 그가 생각했던 일이 지금 그가 하는 말과 듣는 얘기 그리고 생각하는 일과 미묘하게 달랐다. 그 전까지는 그냥 ‘저런, 알츠하이머가 무섭네’라는 안이한 자세로 읽었는데, 그걸 느낀 순간 책 읽는 자세가 달라졌다. 그 전까지 무심히 넘긴 대사나 문장 하나하나를 다시 확인하게 되었다. 그 때문에 이번 달에 읽었던 ‘폐허 The Ruins, 2006’나 ‘걸 온 더 트레인 The Girl on the Train, 2015’ 같은 책과 비교하면 반 정도밖에 되지 않는 두께였는데, 어쩐지 시간은 비슷하게 걸렸다.
내가 생각하는 이 책의 장점은, 소소한 즐거움이 곳곳에 숨어있었다는 점이다. 두 연쇄 살인마의 대결을 그리고 있지만, 중간에 숨을 고를 시간을 충분히 주고 있다. 몇 십 년 동안 살인을 저질러왔지만 의심조차 받지 않았기에, 자신은 남들보다 뛰어나다며 우쭐해있는 주인공의 심리가 책 여기저기에 흩어져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다른 사람들과의 대화에서 약간의 뒤틀림을 보여주며, 읽는 재미를 주었다. 특히 은희와 주인공의 이 대화 장면이 개인적으로는 제일 웃겼다. 한참 진지하게 읽고 있다가 여기서 그만 빵 터졌다. 예상치도 못한 기습을 당해버렸다.
“그놈은 푸른 수염이다.”
“무슨 수염? 그 사람 수염 안 길러.”
은희는 교양이 부족하다. -p.100
정말로 은희가 이렇게 대답했는지는 의심스럽다. 왜냐면 그의 정신세계는 기억과 환상과 망각과 현실의 경계가 뒤섞여있기 때문이다. 진짜로 저런 대화가 오갔을 수도 있고, 그의 망상이 빚어낸 의외의 결과물일 수도 있다. 문득 주인공이 은희에 대해 어떻게 기억하는지에 대한 힌트가 아닐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아직 푸른 수염에 대한 이야기를 모르는 어린 시절의 은희와 남자친구와 결혼 이야기가 오가는 성인이 된 은희가 뒤섞여있는 그런 상태?
내 생각으로는, 극장판보다는 소설이 훨씬 더 괜찮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