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답게 살아갈 용기 - 말 못 할 콤플렉스와 우울로 인생이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자존감의 심리학
크리스토프 앙드레 지음, 이세진 옮김, 뮈조 그림 / 더퀘스트 / 2014년 5월
평점 :
절판



  부제 - 말 못 할 콤플렉스와 우울로 인생이 괴로운 사람들을 위한 자존감의 심리학

  원제 - Je Depasse Mes complexes et mes deprimes, 2010

  저자 - 크리스토프 앙드레

  그림 - 뮈조

 

 

 

 

 

 

  드라마를 보면 간혹 이런 장면이 있다. 여자가 화를 내고 자리를 박차고 나가자, 남자가 뒤따라간다. 그리고 그는 그녀를 붙잡으며 꼭 이런 대사를 내뱉는다. “너 답지 않게 왜 이래?” 그러면 거의 100% 여자가 소리친다. “나다운 게 뭔데?”

 

  가끔 이런 상황에 처할 때가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다 나를 슬쩍 보고 지나가는 느낌이 드는 것이다. ‘눈썹이 비뚤어졌나? 땀 때문에 화장이 얼룩졌나? 이 상의랑 바지가 안 어울리나? 입술색이 너무 튀나? 옷이 너무 꽉 끼어서 뚱뚱해 보이나?’ 한참동안 뭐가 문제인지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게 된다.

 

  첫 번째 장면을 보면 이런 생각이 든다. 왜 저 남자는 여자를 자신의 기준에 맞춰서 판단하는 걸까? 이런 모습도 저 여자고 저런 모습도 저 여자이건만, 자기가 알지 못하는 모습을 보인다고 저 난리인거야? 그러면 저 여자는 그동안 저 남자 앞에서 자기가 보여주고 싶은 모습만 보여줬다는 걸까? 왜 저 여자는 자신의 정체성을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 듣고 싶어 하는 거지?

 

  두 번째 예 같은 상황에서는 한참 고민을 하지만 이미 집을 나온 이상, 더 이상 어떻게 손을 쓸 수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포기한다. 이렇게 된 거 어쩌겠어? 나중에 화장이나 고쳐야지. 물론 이런 얘기를 애인님에게 하면 ‘자기야가 너무 예뻐서 사람들이 쳐다보는 거니까 너무 신경 쓰지 마요.’라는 대답이 돌아온다. 애인님한테만 예뻐 보인다는 건 나도 잘 알고 있지만, 기분은 좋다.

 

  위의 두 예를 곰곰이 생각해보면, 사람들은 은근히 타인의 시선을 신경 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사실 사람들은 나를 보는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본다고 해도, 나를 판단하거나 감정하기 위한 게 아니라 그냥 시선이 닿은 것일 수도 있다. 내가 두리번거리면서 길을 걷다가 다른 사람들이 눈에 들어오는 것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런 생각을 하면서도, 혹시 남이 보기에 나에게 뭔가 잘못된 점이 있는 것인지 안절부절못하게 된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고 바라보는지 알고 싶어 하고, 그들이 이상적으로 여기는 모습에 맞춰가려고 애쓰기도 한다. 좋게 말하면 타인이 불편해하지 않도록 배려하는 것이고, 나쁘게 말하면 줏대 없이 남들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이기도 하다.

 



 

  그런데 그런 것이 너무 심하면, 가끔은 자기 자신이 누구인지 헷갈릴 때가 있다. 또한 그렇게 쌓은 인간관계가 틀어지기라도 하면 내가 지금까지 뭘 위해 살았는지 허탈해하기도 한다. 그래서 첫 번째 장면의 여자처럼 자신의 본모습이 뭐냐고 물어보게 되는 걸지도 모르겠다. 저런 상황에 처하면, 슬퍼하고 고민에 고민을 거듭하고 급기야는 우울증에 빠질 수도 있다.

 

  이 책은 타인의 시선을 의식하고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해 여러 가지 조언을 하고 있다. 자존심과 자신감이 부족한 사람들, 지나치게 건강을 염려하는 사람들, 외모 콤플렉스에 빠진 사람들, 그리고 우울증에 빠진 사람들이 겪기 쉬운 상황과 그것에서 헤어 나오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만화와 설명이 잘 어우러져 있다.

 

  읽으면서 뜨끔하는 대목도 있고, ‘난 아직까지 이 정도는 아니라 다행이다’라고 안심하는 부분도 있었다. 다른 사람과의 교류를 통해 살아가는 삶이기에, 직접적이건 간접적이건 다른 사람의 영향을 받지 않을 수는 없다. 조언이나 충고를 가장한 오지랖이라든지 차별적인 발언을 여러 번 듣게 되면, 없던 콤플렉스가 생기고 있던 자존감마저 사라질 것이다. 그것을 어느 정도까지 수용하느냐가 관건인 것 같다.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려버리는 것도 좋겠다.

 

  표지 아랫부분에 이런 문장이 적혀있다. ‘누구의 마음에도 들지 않을 용기, 당신에겐 있는가?’

 

  난 아직은 없다. 이런 용기 없는 인간 같으니라고!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희진처럼 읽기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정희진 지음 / 교양인 / 2014년 10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

    저자 - 정희진

 

 

 

 



 

 

  처음 책을 접했을 때는, 유명 비평가가 쓴 리뷰의 모음이구나 싶었다. 그런데 저자의 약력을 보니 으음? 여성학 연구자? 순간 여기저기서 들은 몇몇 한국형 페미니스트에 대한 이미지가 떠올랐다. 그래서 잠시 책을 들었다 놨다 했다. 하지만 내가 들은 그런 류의 사람이라면 마음에 안 드는 부분을 조목조목 짚으면 될 것이고, 그렇지 않은 경우라면 모르던 부분을 알 수 있는 기회라는 생각을 했다.

 

  책의 인상은, 한마디로 말하자면 강렬했다.

 

  첫 장을 넘기면서부터 뭔가 심상치 않다는 생각을 했지만, 뒤로 가면 갈수록 짜릿짜릿한 것이 번개를 맞은 것 같기도 하고 누군가가 송곳으로 쿡쿡 찌르는 느낌이 들었다. 아, 어떻게 이 작품을 접하면서 이런 방향으로 발상의 전환을 할 수 있을까? 아니, 여기서 어떻게 그런 생각과 결론을 내릴 수 있을까?

 

  이 책은, 나에게는 거의 낯선 세계와 같았다. 내가 몰랐던, 아니 어쩌면 있는 건 알고 있었지만, 실상에 대해 알고 싶지 않아서 별로 관심도 주지 않았던, 그런 세상에 대해 얘기하고 있었다. 겉으로는 책이나 영화의 리뷰였지만, 그것을 통해 저자가 말하고 싶었던 사회의 모순적인 부분에 대해 날카롭게 보여주고 있었다. 그건 피상적으로 작품을 겉핥기식으로 접했을 때는 말할 수 없는 것들이었다. 또한 자신을 둘러싼 사회에 대해 관찰하고 생각하지 않으면 접합시킬 수 없는 얘기들이었다.

 

  그래서 왜 부제를 ‘내 몸이 한 권의 책을 통과할 때’라고 했는지 조금이나마 알 수 있었다. 책을 읽은 후 사고방식이나 인생관이 변화하는 책이 있기 때문이라고 저자를 말한다.

 

  저자가 접한 작품들은 위에서도 말했지만, 내가 거의 읽지 않은 것들이 많았다. 세상은 넓고 책도 다양하다지만, 내가 들어보지도 못한 책들이 이렇게 많다니……. 뉴턴이 바닷가에서 노는 어린아이 얘기를 한 이유를 알 것 같았다. 그건 단지 책의 권수에 해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어떻게 독서를 해왔는지에 대한 자각이었다. 어쩌면 난 쉬운 책들만 읽으면서, 이만큼 읽었다고 자랑하는 재미로 서평을 써왔던 건 아닐까? 책을 읽고 나서 단지 ‘이건 재미있어, 저건 재미없어.’라는 이분법적 기준으로 평가하는 것에 의의를 두고 있던 건 아닐까?

 

  책을 읽다가도 마지막 장을 덮은 다음에도 한참동안 생각에 잠기기도 하고 멍하니 바깥만 바라보기도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책에서 손을 놓을 수는 없었다. 다음 장에서는 또 어떤 놀라움과 다른 시각을 보여줄까 기대하는 마음이 더 이상의 충격은 거부한다는 마음을 이겼다고 할 수 있다.

 

  저자가 이 책에서 말한 작품들을 내가 읽을 확률은 그리 높지 않다. 내가 알고 싶어 하지 않는 분야에 대한 것들이 많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언젠가 한번쯤은 읽어보고 싶다.

 

  책을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였던 몇몇 문장들을 적어보겠다.

 

  우리를 다른 세계로 인도하는 책은 피사체를 내가 모르는 위치에서 찍은 것이다. 하늘 위에서가 아니라 건물 옆에서, 지하에서, 건물 뒤에서, 아주 멀리서, 혹은 나와 완전히 다른 배역에 있는 사람이 찍은 것이다. 건물 안에서는 건물을 볼 수 없다. 즉 피사체, 문제 대상(사회)을 자신과 동일시하거나 그 안에 있으면 자신을 알 수 없다. -.p.23

 

  남성들에게 집은 쉼터지만 여성에게는 노동의 공간이다. -p.142

 

  이해는 난이의 문제가 아니라 의지의 영역이다. (중략) 이해는 사랑과 지식을 아우른다. 사랑은 수용이다. 상대를 수용할 때 이해는 따라온다. -p.283

 

 

 


댓글(0) 먼댓글(0) 좋아요(8)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스토리텔링 진화론 - 창작의 원리에서 도구까지 위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이인화 지음 / 해냄 / 2014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창작의 원리에서 도구까지 위대한 이야기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저자 - 이인화

 

 






 


  원래 저자나 책 소개를 미리 접하지 않고, 제목과 부제로 내용을 추측하면서 읽기를 좋아한다. 예상대로라면 ‘역시 난 천재!’라고 좋아하지만, 그렇지 않으면 '역시 세상은 넓어‘라면서 감탄을 하곤 한다. 그런데 이 책은 읽으면서 무척이나 혼란스러웠다.

 


  1장을 볼 때까지는 책을 쓰려는 사람이나 그것에 대해 비평하려는 사람들이 읽으면 도움이 될 내용으로 이루어져있었다. 서사 창작의 구도라든지 표상 발전 방법론, 205가지나 되는 모티프의 설명과 작품 예시 등등, 창작에 필요한 여러 가지 이론들이 간략하게나마 다루어지고 있었다. 그래서 처음에는 문학 입문서인가하는 생각으로 읽어나갔다. 물론 중간에 뭔가 이해하기 어려운 도표가 간혹 나왔지만, 전공자들은 이런 걸 배우는 가보다라며 넘어갔다.

 


  그러다 2장에서 약간 고개를 갸웃거렸다. 디지털 스토리텔링이라고 하여, 컴퓨터로 창작을 하는 프로그램을 만들기까지의 역사가 서술되어 있었다. 음, 1장에 이해하기 어려웠던 도표는 바로 그런 프로그램과 관련이 있는 것들이었다.

 


  마지막 3장에서는 외국과 한국의 스토리텔링 프로그램에 대한 개발 현황과 사용 빈도, 그리고 한국형 디지털 스토리텔링 창작 도구인 ‘스토리 헬퍼’의 사용법 등을 설명하고 있었다.

 


  우선 창작을 하려는 사람은 프로그램에서 시키는 대로, 만들고 싶은 영화의 장르와 영화 타깃, 인물의 성격과 배경, 그리고 대응 유형, 영화가 전반적으로 말하고자하는 전략적 드라이빙 모티프를 입력한다. 그러면 그가 원하는 작품과 유사성이 있는 다른 소설이나 영화 등등이 추천된다. 이때 창작자는 그것을 약간만 변형을 주어 재사용할 수도 있고, 완전히 다르게 바꿀 수도 있다. 저자는 여기서 영화 ‘늑대와의 춤을’과 ‘아바타’의 유사성에 대해 언급했지만, 난 두 작품 다 접하지 않았기에 더 이상은 말하지 않겠다.

 


  활용을 어떻게 하느냐에 따라 유용하고 실용적인 도구가 될 수도 있겠지만, 달리 보면 최악의 프로그램이 되지 않을까하는 우려도 들었다. 창작하고픈 욕망과 의지가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프로그램을 이용해 이야기를 만들 수 있다는 건 좋은 쪽으로 여길 수도 있다. 하지만 교묘하게 표절을 비껴가는 도구로 악용되지 않을까하는 생각도 든다. 기본 모티프와 서사 구성은 비슷하지만, 다른 요소들이 다르다고 항변할 수 있기 때문이다.

 


  물론 성선설적 인간들로만 이루어진 세상이라면, 그런 유사성이 높은 작품들이 나오면 그걸 피해가면서 새로 만들지도 모른다. 하지만 불행히도 지금은 그런 세상이 아니다. 성악설적인 인간들도 득실대고 있다. 그러니 여러 작품들을 짜깁기해서 창작이라고 만들어낼 수도 있다. ‘셰익스피어 이후로 진정한 창작은 없다’는 말을 내뱉으면서 말이다.

 


  게다가 과연 그런 프로그램에 의존해서 만들어낸 작품이 어떤 감동을 줄 수 있을까하는 의구심도 든다. 그런 프로그램을 창작의 보조 수단으로 사용한다면 모르겠지만, 전적으로 의존해서 작품을 만든다면? 그러니까 인물의 갈등이나 감정으로 인해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 입력한 내용대로 프로그램에서 출력한 사건에 개연성을 주기 위해 창작자가 인물의 심리나 갈등을 써야하는 경우도 있을 것이다. 그런 일이 생기게 된다면, 그렇게 만들어진 창작물들이 우리가 명작을 보면서 느꼈던 인간의 고뇌나 삶에 대한 고찰을 줄 수 있을까?

 


  앞으로 20년 내에 사라질 직업군에 전문 작가가 들어있는 표를 본 적이 있다. 처음에는 ‘이게 뭐야’라면서 비웃었지만, 이 책을 보니 어쩌면 진짜로 그런 일이 일어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과연 미래의 후손들은 어떤 느낌으로 창작물을 만들거나 접하고, 거기에서 어떤 교훈을 얻을지 궁금해진다. 어쩌면 창작이라는 말은 사전에서나 찾아볼 수 있는 단어가 되는 건 아닐까?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 이기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실천윤리
피터 싱어 지음, 노승영 옮김 / 시대의창 / 2014년 1월
평점 :
구판절판



  원제 - How Are We to Live?, 1993

  부제 - 이기적인 사회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을 위한 희망의 실천윤리

  저자 - 피터 싱어

 







 

 

  ‘이렇게 살아가도 괜찮은가.’ 라는 제목을 보는 순간, 어디선가 들어본 다른 책이 생각났다. ‘어떻게 살 것인가.’였다. 그리고 문득 이런 의문이 들었다. 내가 어떻게 살고 있는지 두 저자는 알기나 하고 저런 질문을 던지는 걸까? 그리고 다른 궁금증이 줄줄이 들었다. 저자가 생각하는 ‘이렇게 살면 괜찮지 않을 삶’은 과연 어떤 걸까? 또한 저자가 ‘괜찮게 사는 거라고 생각하는 삶’은 어떤 걸까? 이 책이 처음 나온 지 20년이 지났는데, 다시 나오는 이유는 무얼까? 그 때나 지금이나 사람들의 사고방식이나 생활은 전혀 변하지 않았다는 걸까? 그래서 여전히 이렇게 살면 괜찮지 않다고 저자가 다시 한 번 사람들에게 경각심을 불러일으켜야겠다고 생각한 걸까? 저자가 보기에 그 때와 변함이 없을까 아니면 더 나빠졌을까?


 

  한편으로는 이런 생각도 들었다. 저자가 괜찮다고 하는 삶이 진짜 괜찮은 걸까? 그러니까 선진국들이 자기들은 개발을 다 해놓고 개발도상국들에게 환경 오염문제가 심각하니까 너희들은 개발을 자제하라고 압력을 넣는 것처럼, 그런 의도로 만들어진 책은 아닐까? 내가 제일 싫어하는 게 그런 논리를 펼치는 사람이나 책이다. 현대 사회는 물질을 추구한다. 그런데 간혹 물질을 추구하지 말고, 없으면 없는 대로 있는 사람을 부러워하지 말고 자기 손 안에 있는 것에 만족하고 살아가라 말하는 사람이 있다. 더 이상의 것을 추구하지 말라는 것이다. 흔히 배고픈 소크라테스가 되어 사는 것이 좋다고 말을 하지만, 글쎄? 난 아직까지는 배부른 돼지가 더 끌린다. 꼭 내가 돼지띠라서 그런 건 아니다.

 


  이 책도 약간 그런 방향으로 흐를 뻔했다. 그래서 처음에는 ‘이런!’하고 살짝 인상을 찌푸렸다. 하지만 다행스럽게도 이 책은 거기에 몇 가지를 더 첨부했다. 그래서 이 책을 끝까지 읽을 수 있었고, 어딘지 모르게 마음 한구석이 차분해지면서 고개를 끄덕일 수 있었다.

 


  바로 윤리와 도덕 그리고 이웃과의 관계에 대해서 다루는 부분이었다. 저자는 지나친 개인주의가 어떻게 변질되면서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지 보여주었다. 이를 위해 각 종교와 철학의 인식 변화까지 다룬다. 그리고 도덕과 윤리란 무엇인지, 도덕적인 삶이라는 게 뭔지, 윤리를 지켜야하는 이유에 대해서도 역시 철학과 역사적 예를 들면서 설명한다.

 


  그러면서 과거의 철학자들이 주장했던 이론을 얘기하면서 각각의 장단점을 들어 보이며, 지나치게 강조되면 어떤 부작용이 생기는지도 말한다. 특히 칸트의 정언 명령에 대한 부작용은 상당히 놀라웠다. 하긴 인간의 창의력과 응용력이 상상을 초월하는 경우가 많기는 하다. 전혀 연관도 없이 기승전병으로 이루어진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그러니 철학자들의 이론이 악용되는 일이 없으면 더 이상했을지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이 책은 현대 철학이 어떻게 나아가야하는지 방향을 제시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현대의 교육이 어떤 입장을 취해야하는지 조금이나마 알려주고 있었다. 하지만 과연 그것이 받아들여질지는 의문이다. 현대 한국의 교육은 친구를 밟고 넘어서야하는 것을 알려주니 말이다. 그렇지만 적어도 저자의 말대로라면, 아이들에게 로또 1등이 삶의 목표가 될 수는 없고, 대기업에 입사하거나 명문대학에 들어가는 것이 인생의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깨닫게 할 수는 있을 것이다.

 


  이 책에서 말하는 ‘양심에 따라 윤리적으로 산다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다. 나 혼자 교통 규칙을 지키고 잘 다닌다고 해도 어느 순간 음주운전을 하는 사람이 뛰어들지도 모르는 게 바로 삶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렇다고 나도 마구 규칙을 어기면서 다닐 수는 없다. 모두가 다 마음대로가 아닌, 최소한의 규칙은 지키기 때문에 통행이 이루어지는 것이다. 저자가 생각하는 괜찮은 삶이란, 그런 게 아닐까 싶다. 모두가 다 최소한의 규칙을 지키면서 사는 세상. 그런데 그 최소한의 규칙에서 우리는 꽤나 멀리 떨어져있는 것 같다. 어쩌면 그게 뭐였는지 잊은 지 오래일지도 모른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이런 책을 읽고 나면 꼭 존 레논의 노래 ‘imagine’이 떠오른다. 오늘밤에도 들으면서 자야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7)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저주받으리라, 너희 법률가들이여!
프레드 로델 지음, 이승훈 옮김 / 후마니타스 / 2014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제 - Woe Unto You, Lawyers!, 1939

  저자 - 프레드 로델

 

 

 




 


  이 책의 초판 발행일은 1939년도이다. 헐, 어머니와 나이가 똑같다.

 


  지금까지 어머니의 삶은 많이 바뀌었다. 일제 강점기 후반에 태어나서 유년기 때는 6.25 전쟁을 겪으셨고, 이후 이승만 정권 때 학창 시절을 보내고 박정희 정권 때 아버지를 만나 결혼을 하셨다. 그러니까 제국주의와 전쟁, 독재 정치 그리고 민주주의까지 두루 겪으신 것이다. 외형도 많이 변하셨고, 여러 가지 외적인 상황도 많이 바뀌었다. 아가에서 소녀, 아가씨, 새댁 그리고 누구 엄마를 거쳐 누구 할머니까지 많은 이름을 가지셨다. 하지만 겉은 변했을지라도, 내적인 면은 그리 많이 변하지 않은 것 같다. 내가 어릴 적에 본 어머니와 지금 나이가 들어서 보는 어머니는 별로 다르지 않으니까.

 


  그러면 어머니와 동갑인 이 책은 어떠할까? 이 책에서 다루고 있는 1930년대의 법과 2014년의 법은 어떻게 달라졌을까? 결론부터 말하자면, 그리 많이 바뀌지 않았다. 적어도 이 책에서 다룬 내용을 보자면, 그때나 지금이나 법과 그것을 다루는 법률가의 본질은 많이 달라지지 않은 것 같다. 물론 시대 변화에 맞춰서 조항이 추가되고 이름이 바뀐 것은 있을 것이다.

 


  이렇게 보면, 법과 사람은 비슷한 것 같다. 그 본질적인 면은 잘 변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말이다. 하긴 그건 당연한 것 같다. 사람도 이리저리 우왕좌왕 줏대 없이 굴면 간사하고 박쥐같은 인간이라고 배척을 받는다. 법도 마찬가지로 어떤 달은 모두가 다 징역형을 받고, 다른 달에는 똑같은 사안인데 벌금형을 받는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확고한 중심을 가져야하는 건 당연한 일이다. 그래야 모든 사람들이 그 법을 믿고 따르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책의 저자는 ‘과연 법이 그러한가?’하는 의문을 던진다. 법이 진짜로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되고 누구나 다 공감하며 믿을 만한 것인지, 법률가들은 명확하고 명쾌하게 판단하고 있는 것인지, 저자는 여러 가지 사례를 들어서 얘기하고 있다.

 


  책을 읽다보면 곳곳에 법률가들과 법에 대한 회의가 가득하다. 특히 1장을 펼치자마자 나온 문장은 인상적이다.

 


  부족 시대에는 주술사가 있었다. 중세에는 성직자가 있었다. 그리고 오늘날에는 법률가가 있다. -p.21


  헌법 어구의 부정확한 해석, 관할권과 관련된 공허한 일반 원칙에의 호소, 모순된 현실에 아랑곳없는 조세 명칭에 대한 집착, 논점과 한참 멀리 떨어진 내용을 다루었던 오래전 사건의 흐리멍덩한 언어가, 법률가의 멍청한 허장성세와 함께, 연방 대법원이 한 덩어리의 헌법률을 구축하는 기초로 봉사했다. - p.148.


  그러므로 ‘정의’라는 개념을 법적 문제의 해결에 적용하고자 하는 법률가나 법관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 p.210

 


  가끔 뉴스를 보면, 왜 재판관들은 현실과 동떨어진 판결을 하는 것일까 하는 의문을 가질 때가 있다. 과연 자기들 가족이 비슷한 일을 당해도 저런 판결을 내릴까하는 분노를 느낄 때도 있다. 세상은 빨리 변하는데, 법은 그것을 따라오지 못한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저자는 왜 그런 일이 생기는지 설명을 해주었다. 법의 일관성과 확실성을 유지하기 위해서, 다양한 사례에 오랫동안 적용될 수 있는 일반적이고 추상적인 원칙에 근거해야한다고 얘기한다. 그러니까 오랫동안 사람이 살아오면서 여러 가지 일을 겪지만 본성은 변하지 않는 것처럼, 법도 기본적인 것은 유지돼야 한다는 말인가 보다.

 


  하지만 그 부분을 읽으면서, 뭔지 모르지만 마음에 들지 않았다. 기본적인 것은 당연히 바뀌면 안 된다. 하지만 그걸 조금 융통성 있고 시대에 맞춰 적용시키는 방법을 생각할 수는 없을까? 꼭 그렇게 꽉 막힌 방식을 고집해야하는 걸까? 이건 어쩌면 내가 법에 대해서는 무지하기 때문에 그럴지도 모르겠다. 아, 그래서 이 책의 서문에서 한 판사가 법이 너무 난해하고 어려운 용어로 되어있다고, 그래서 일부 아는 사람들만 알 수 있고, 그들이 해석하기 나름이라고 비난을 했던 건지도 모르겠다. 저자 역시 법률가들을 현대의 주술가라고 표현했고 말이다.

 


  모르는 게 약이라고 하지만, 이런 문제에 관해서는 아는 것이 힘이라고 말하고 싶다. 눈뜨고 코 베어가는 세상이니 말이다. 세상은 점점 더 복잡해지면서 그에 따른 법규도 많아지고, 클릭 한 번 잘못하면 뭔가 불이익이 우수수 쏟아지기도 한다. 그래서 알아야 당하지 않을 것이다. 아, 그래서 법률용어가 어려운 거구나. 공부하기도 어렵고 말이다. 누구나 다 이해하고 적용하기 쉽다면 법률가들이 필요가 없어질 테니 말이다. 그래서 저자는 그런 문제에 대해서 정면으로 다루고 있는 것이었고 말이다.

 


  아, 그렇게 보면 70년 전의 세상이나 지금이나 별로 달라진 게 없다. 단지 과학 기술만이 발전했을 뿐이지, 다른 부분은 퇴보했거나 머물러있는 것 같다. 인간이란 과연 어떤 존재인지 궁금하기만 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공유하기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