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제 - Demonic , 2015

  감독 - 윌 캐넌

  출연 - 마리아 벨로, 프랭크 그릴로, 코디 혼, 더스틴 밀리건

 

 

 

 

  오래된 농가에 살던 마사 리빙스턴이라는 한 여인이 의식을 치르다가 살인극을 벌였다. 바로 친구 4명을 무참히 죽인 것이다. 살아남은 사람은 단 한 명뿐. 그리고 25년이 지난 후, 아무도 살지 않은 폐허가 된 그 집에 6명의 젊은이들이 몰래 숨어든다. 흉가를 소재로 한 다큐멘터리를 찍기 위해서이다. 이상한 소리가 난다는 신고를 받고 경찰이 출동했을 때는 모든 것이 엉망이 되어 있었다.

 

  영화는 유일하게 발견된 존이 경찰에게 얘기하는 과거 회상과 현재 경찰의 수사를 번갈아가면서 보여준다. 특히 젊은이들이 찍은 영상을 복원한 분량과 경찰의 수사 진행 그리고 발견된 존의 이야기가 서로 맞물려가면서 긴장감을 주고 있다. 마사 리빙스턴은 왜 친구들을 그렇게 잔혹하게 죽여야 했을까? 그리고 누가 왜 25년이 지난 지금, 그 때와 비슷한 방법으로 젊은이들을 죽인 걸까? 갇힌 집에서 그들이 본 것은 무엇일까? 과연 그 집에는 미친 살인마가 있는 걸까 아니면 정체를 알 수 없는 존재가 그들에게 깃든 것일까? 거기에 25년의 생존자와 존의 관련성이 밝혀지면서 상황은 복잡해진다.

 

  구성은 상당히 복잡하게 잘 짜여 있었다. 하지만 세 장소, 그러니까 복원된 영상, 경찰 그리고 취조실을 번갈아보여주니까 어떻게 보면 좀 산만할 수도 있었다. 옆자리 애인이나 팝콘 따위에 정신 팔지 말고 집중하라는 제작진의 의도였을지도 모르겠다.

 

  마지막 장면을 보자마자 딱 떠오르는 유명한 말이 있었다. ‘XXXX가 범인이다!’ 딱 그런 격이었다. 그래서 어쩐지 김이 빠지는 느낌이었다. 하긴 하늘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니까. 처음 등장할 때는 파릇파릇 상큼했던 아이들이 점차 피에 물들어가는 과정은 좀 무시무시했다. 그렇게 처참한 모습이라니…….

 

  이번 영화에 나오는 악마는 꽤나 교묘하고 용의주도했다. 어쩌면 2편이 나올지도 모르겠다. 그러면 데미안 시리즈처럼 되는 걸까? 하지만 데미안은 성격에 적힌 적그리스도라서 그 운명이 정해져있지만, 이 영화의 악마는 그렇지 않으니까 파급력이라든지 활동 범위가 더 자유로울지도 모르겠다.

 

  요즘 공포 영화에는 대개 이런 단어들이 따라붙는다. ‘제임스 완, 에나벨, 컨저링.’ 이건 뭐 로맨틱, 성공적도 아니고. 처음에는 그 단어들에 혹해 ‘오~’하면서 봤지만 이제는 좀 식상해졌다. 뭐랄까, 그 말들이 붙은 작품들은 거의 다 비슷한 스타일이라는 느낌이 딱 든다. ‘집, 초자연적 존재.’ 거의 다 이 두 가지 키워드로 요약이 가능한 내용들이다. 그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는다는 말이다.

 

  어쩐지 ‘제임스 완’이라는 이름이 ‘마이클 베이’와 비슷하게 사용되는 것 같아서 안타깝기만 하다. 제작에 참여해도 마이클 베이, 감독을 해도 마이클 베이, 기획만 해도 마이클 베이. 그가 발만 살짝 담가도 마이클 베이라는 이름이 대문짝만하게 적히고, 그의 액션 최후 대작이 왔다는 식으로 광고를 한다. 여기서 마이클 베이를 제임스 완이라고 바꾸고, 액션 최후 대작을 호러의 절정판이라고 교체해도 전혀 위화감이 없다.

 

  이번 영화도 감독은 전혀 다른 사람이지만, 마치 제임스 완이 모든 것을 다한 것처럼 광고를 한다. 덕분에 올 여름에는 ‘제임스 완’이나 ‘컨저링 The Conjuring, 2013’의 이름을 파는 영화가 3편이나 된다. 너무 그의 이미지를 소비하는 게 아닐까하는 우려까지 든다. 나중에는 지뢰작을 피하는 방법의 하나로 그의 이름이 통용되면 곤란할 텐데 말이다. 이 세상에서 제일 할 일 없는 게 연예인 걱정이라는데, 이건 그의 재능을 오래오래 보고 싶은 호러 영화 팬의 아쉬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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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한시 - 사랑의 예외적 순간을 붙잡다
이우성 지음, 원주용 옮김, 미우 그림 / arte(아르테) / 2015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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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사랑의 예외적 순간을 붙잡다

  저자 - 이우성

  그림 - 미우

 

 

 

 

  한글은 참 신기하다. 어떻게 띄어쓰기를 하느냐에 따라 의미가 달라진다. 이 시집의 제목 역시 그렇다. '로맨틱 한시'라고 적혀있지만, 로맨틱한 시라고 잘못 읽어버리면 조금은 다른 시집이 되어버린다. 로맨틱한 시를 모아놓은 것은 맞지만, 여기에 수록된 시들은 모두 한국 고전 한시들이다.

 

  지금까지 조상들은 거의 임금이나 부모 또는 자신의 이상향에 대한 시만 지었고, 가끔 여류 문인들만이 남녀 간의 사랑을 썼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헐? 여기에 실린 시들을 보니 내가 잘못 알고 있었다. 비록 한자를 잘 몰라서 한글로 해석된 것을 봐야했지만, 그것만으로도 마음을 간질이는 시들이 많았다. 읽으면서 '어쩌면 이렇게 귀엽고 달달한 내용이 다 있지?' 라는 의문이 들기도 하고, 마음이 절절하고 아픈 내용도 있었다.

 

  책은 사람과 사람이 만나 사랑을 하고 헤어지는 일곱 단계에 맞춰서 분류가 되어 있었다.



 

  우선 『첫사랑 初戀之情』에서는 처음 만난 상대에 대한 설레임과 숨길 수 없는 두근거림을 담은 시들이 실렸다. 밝은 달밤에 임을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잠을 이룰 수 없는, 혼자 몰래 상대의 이름을 써보면서 두근거리는 마음이 담겨있었다.


  뒤이은 『사랑의 기쁨 歡喜之愛』에서는 드디어 서로의 마음을 확인한 연인의 마음이 드러나 있다. 서로의 민낯을 보아도 행복하고, 사랑이 오래가길 바라는 마음이 나타나있다. 특히 '그대의 뺨에 나의 향기 남아'를 읽는 순간, 저절로 미소가 지어졌다. 너무 귀여운 소녀의 마음이 잘 드러나 있었다. 물론 일상생활 불가능한 나는 '도대체 얘들이 밤에 뭘 했기에?'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지만…….



 

  그리고 『변심 歡喜之愛』은 상대의 사랑이 식어가는 것을 느낀 불안감과 지푸라기라도 잡아보고 싶은 마음을 보여주고 있다. 그 기세를 몰아 『그대를 원하고 원망해요 願恁怨恁』에서는 자신의 마음을 몰라주는 상대에 대한 원망이 듬뿍 담겨 있는 시들로만 엮였다. 하지만 원망해도 욕은 하지 않았다. 조상님들, 고상하시다. 나 같으면 온갖 욕에 저주를 퍼부었을 텐데……. 기껏 한다는 저주가 다음 생에 당신과 내가 바뀌어 태어나 지금 내가 겪는 아픔을 느끼게 해보고 싶다 정도였다. 아, 너무 우아하잖아.

 

  그 우아함은 『이별 후에도 사랑은 끝나지 않아 離別後愛』를 지나 『사랑의 슬픔 悲哀之戀』과 『사랑을 추억하다 追憶之愛』를 거치면서 완성이 되었다. 처음에는 떠나버린 임이 돌아오길 바라는 마음이었지만, 그 사람은 오지 않았다. 남겨진 사람은 이별의 슬픔을 승화시켜 자신이 살아갈 양분으로 만들었다. 우아하고 고상한 이별 과정을 보는 기분이었다.

 



  한시 한 편이 소개된 다음에, 그 시를 쓴 저자나 시를 쓰게 된 배경에 대한 설명, 이 시집을 기획한 시인의 개인적인 감상과 추억, 그리고 한시의 분위기와 적절하게 어울리는 그림까지 곁들여져서 깊은 인상을 남겼다. 한자와 별로 친하지 않아서 나중에 시는 제대로 기억하지 못해도, 그 분위기는 남을 것 같았다.

 

  그런데 가끔 배경에 그려진 삽화와 글자색이 맞지 않아서 시를 읽기가 어려운 부분이 있었다. 좀 아쉬웠다. 검은색과 노란색이 보색관계라고 하지만, 여기서는 전혀 그런 효과가 나타나지 않았다. 글자가 너무 작아서가 아니었을까? 다 좋았는데 그런 부분들이 좀 아쉬웠다.

 

  아! 제일 어이없는 시를 고르자면, '사랑의 기쁨'에 실린 임제의 것을 뽑겠다. 불륜을 하고도 시 하나 잘 써서 살아남았다니……. 불륜이라기보다는 원나잇인 것 같은데, 그것도 사랑의 기쁨이라고 할 수 있을까? 육체의 기쁨이 더 어울릴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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데블
존 에릭 도들 감독, 로건 마셜 그린 외 출연 / 유니버설픽쳐스 / 2011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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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Devil, 2010

  감독 - 존 에릭 도들

  출연 - 크리스 메시나, 조프리 아렌드, 보자나 노바코빅, 로건 마샬 그린

 

 

 

 

  어느 고층 건물의 한 엘리베이터가 갑자기 고장이 나면서, 다섯 명이 갇힌다. 어찌된 영문인지 관리실에서는 그들의 모습이 모니터에 잡히긴 하지만, 목소리를 들을 수가 없다. 게다가 아무리 고장 원인을 찾아봐도 별다른 원인을 찾을 수가 없다. 안에 갇힌 다섯 사람들은 처음에는 금방 풀려날 것이라 믿었지만, 시간이 계속 흘러가자 불안함을 감추지 못한다. 게다가 전등이 꺼졌다가 켜지면서 그들 사이에 이상한 일이 일어나 서로 경계하고 의심한다. 급기야 하나둘씩 사람이 처참하게 죽어나가자, 그들의 공포는 극에 달한다. 살아남은 사람들은 서로를 믿지 못하고 상대방이 살인범이라 확신하게 된다.

 

  한편 경비원 중의 한 사람은 엘리베이터 모니터에서 이상한 형체를 보게 되고 이 모든 것이 악마의 소행이라 믿는다. 건물에서 일어난 추락사건을 조사하러 온 경찰은 처음에는 엘리베이터 안의 누군가 원한을 품고 사람들을 죽인다고 믿었다. 하지만 그의 눈앞에서 믿을 수 없는 광경이 벌어지자 경비의 말에 관심을 보인다.

 

  그러면 살인마, 혹은 악마는 도대체 누구일까? 왜 그곳에 나타난 걸까?

 

  주요 무대는 엘리베이터 안과 경비실이다. 폐쇄된 공간에서 벌어지는 사건을 그린 작품들은 자칫 잘못 만들면 지루하게 되기 쉬운데, 이 영화는 긴장감을 놓치지 않았다. 누가 죽을까? 악마는 누구일까? 경찰은 제대로 악마를 찾아낼 수 있을까? 악마가 과연 경찰에 잡힐까? 이런 의문들이 계속해서 들었고, 특히 엘리베이터를 고치기 위해 노력하는 사람들, 예를 들면 건물 수리공이나 경비, 119 구조대원들이 잘못되지 않을까 조마조마하기도 했다. 그들이 엘리베이터에 다가갈수록 악마의 공격은 거세졌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대놓고 악마가 나오는 것이 아니라, 전선이 떨어진다거나 쇠를 자르던 칼날이 부러지면서 튕기는 식으로 표현되었다. 거기에 악마의 존재를 믿는 경비의 내레이션은 그런 불안감을 가중시키는 역할을 더 했다.

 

  영화는 교묘하게 갇힌 사람들과 보는 사람의 연결 고리를 만들어, 조금씩 풀어낸다. 모두가 다 거짓말을 하고 있었고, 숨기고 있는 범죄 하나둘씩은 갖고 있었다. 그리고 그들 중 몇 명은 직접적으로 만나지 않았지만, 다른 사람을 통해 관련이 있었고 말이다. 이런 식으로 밝혀지는 사실들을 보여주면서, 영화는 몰입감을 더했다. 특히 불이 꺼지면 우당탕 소리가 들리고, 다시 불이 들어오면 사람이 죽은 채로 발견되는 부분은 으아…….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궁금하기도 하고, 또 누군가 죽는다는 긴장감도 절로 생겨났다.

 

  하지만 후반부에 가서는 좀 실망했다. 뜬금없는 종교 영화가 되어버린 느낌이 들었다. 감독은 죄를 고백하고 진정한 반성을 하면 용서를 받는다는 걸 말하고 있었다. 아마 그 반성에 진정성을 부여하기 위해서 악마를 등장시킨 모양이다. 악마가 사람을 죽이는 기준이 바로 마음으로부터 우러나온 반성을 하고 있는 지였으니 말이다. 용서를 받기 위해 악마의 판단에 따라야 한다니, 좀 이상했다. 천사와 악마가 동업이라도 하는 건가? 하여간 영화의 마지막 부분에서 이런 대사가 나온다. “악마가 있으면 하나님도 존재하는 것이다.” 맞는 말이다. 그러니까 악마가 사람들을 괴롭히는 내용의 작품들은 다 일종의 선교 영화라고 볼 수 있을까?

 

  웃긴 장면도 하나 나온다. 악령이 있으면 일이 다 잘 풀리지 않는다면서 경비원이 잼 바른 토스트를 공중에서 던지는 부분이 있다. 원래 토스트는 잼을 바르지 않은 쪽이 바닥으로 떨어지는데, 악마 때문에 잼 바른 쪽이 떨어진다니……. 그게 증거가 되나? 집에서 실험해보고 싶었는데 빵 사러 나가기가 귀찮아서 패스했다. 나중에 식빵 사오면 해봐야겠다. 먹는 걸로 장난친다고 어머니가 뭐라고 하시려나? 안 계실 때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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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
칼 힐티 지음, 송영택 옮김 / 문예출판사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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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Fur schlaflose Nachte, 1901

  저자 - 칼 힐티

 

 

 

 

  제대로 읽어보지는 않았지만, 제목은 많이 들어본 책이 있다. ‘삼국지’라든지 ‘성경’이라든지 ‘논어’, ‘명심보감’ 그리고 ‘수학의 정석’ 등이 그 예일 것이다. 이 책도 그렇다. 제목은 여러 번 들어봤지만 표지라도 거들떠본 적은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다가 이번에 책을 손에 집어들 기회가 생겼다.

 

  음, 어디 보자. 저자가 스위스 사상가? 헐, 독일인이라고 생각했는데……. 책은 소문대로 1년 365일, 날짜별로 짧게 읽으면서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구성으로 되어있었다. 매일 하루에 하나씩, 어떤 날은 몇 줄 정도의 분량이고 또 어떤 날은 한 장이 될 때도 있다. 하루하루 정해진 분량대로 읽으려면, 매일매일 잠을 못 이루어야 하는 걸까라는 얼토당토않은 생각이 아주 잠깐 스치고 지나갔다.

 

  저자가 독실한 종교인이라서 그런지, 이야기의 소재나 결론이 기독교인으로 갖추어야 할 삶에 관한 것이 많았다. 거의 모든 것이 하나님에 대한 귀의로 돌아가는 것이 마음에 안 들 사람도 있겠지만, 어느 정도 필터를 가지고 읽으면 꽤 괜찮은 삶의 자세를 가질 수 있지 않을까하는 생각이 들었다. 어찌되었건 결론은 욕심을 버리고 현재에 충실하게, 선하게 살아야 한다는 의미니까 말이다.

 

  왜 ‘잠 못 이루는 밤을 위하여’라는 제목을 붙였는지, 한참 읽다가 깨달았다. 잠 못 이루는 밤. 쓸데없는 망상을 한다거나 웹서핑으로 시간 허비 하지 말고 억지로 오지 않는 잠을 오게 하려고 애쓰지 말고, 평소에 바쁜 일상을 보내느라 비어버린 머리와 마음을 채우라는 의미인 것 같았다. 보통 때라면 잘 하지 않을 인생이라든지 앞으로의 삶에 대해 생각해보는 건 어떠냐고 저자가 말하는 것 같다. 배는 이미 부르니, 머리와 마음을 채워보라고 얘기하는 것 같았다.

 

  그리고 아무 준비 없이 생각하면 망상이라든지 허황된 상상으로 흘러갈 수 있을 테니, 주제를 하나씩 던져준 것이다. 저자의 글을 읽고 그것을 더 확장시켜본다거나 그에 대한 반론이라도 생각해보면서, 생각의 폭을 넓힐 기회를 가져보라는 것이다. 그러다보면 막연하게 느껴졌던 인생이라든지, 삶을 바라보는 시각, 나와 다른 사람의 관계에 대한 관점 등등에 변화가 생길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어쩌면 지금과는 다른 사람이 될 계기가 만들어지지 않을까라고 저자는 생각한 모양이다. 과연 저자가 100년이라는 시간을 뛰어넘어서도 자신의 글이 도움이 될 것이라 예상했을지는 의문이지만. 하지만 명작이라는 것은 시간이 아무리 많이 흘러도 피와 살이 되는 부분이 조금이라도 있는 법이다. 읽으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뜨끔하기도 했다.

 

  예를 들면 ‘사람들의 생애에서 볼 수 있는 증오의 대부분은 질투나 거절당한 사랑 때문이다.’ 라든지 ‘책을 너무 많이 읽는 것은, 이른바 양서나 종교적인 책이라 하더라도 주관이 바르게 서지 못한 사람에게는 나쁠 수 있다.’, 또는 ‘많은 사람들이, 때로는 재능 있는 사람들조차도 그들이 경험하는 모든 것에 관하여 즉시 판단을 내려야 한다고 생각한다. (중략)그렇기 때문에 그들은 곧잘 그릇된 판단을 하게 되고 (중략) 끝까지 자신의 견해를 고집하여 자신의 품성을 해치고, 심지어 다른 사람에게도 상처를 입힌다.’ 같은 무척이나 와 닿는 글들이 많았다.

 

  잠 못 이루는 밤에 읽어도 좋지만, 한가한 시간대에 읽어도 좋을 것 같다. 매일 잠 못 이룰 리는 없으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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찌질한 위인전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함현식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15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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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제 - 위인전에 속은 어른들을 위한

  저자 - 함현식

 

 

 

 

 

  부제인 '위인전에 속은 어른'이라는 말에 격하게 공감한다. 어린 시절 읽었던 위인전과 나이가 들어 알게 된 그 위인의 또 다른 면모에 당황한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위인만 그런 게 아니다. 역사도, 사회도, 정치도, 문화도 다 양면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어린아이들에게는 좋은 점만 부각해서 알려주고 그 외의 사항은 알려주지 않기 때문에, 어린 마음에 위인전에 나오는 사람들은 흠 하나 없는 완전무결하다고 생각하기 쉬웠다. 그러다가 질풍노도의 사춘기 시절에 이런저런 책을 읽게 되고, 어린 시절 마음에 품었던 위인들의 전혀 다른 면모를 발견하면서 놀라움과 실망 그리고 분노마저 느끼게 되었다. '이건 아이들을 입맛대로 세뇌시키려는 어른들의 음모야!' 이런 생각마저 하기도 했다.

 

  이 책은, 어린 시절 마음에 품고 있던 사람에 대한 환상을 깨부술 위험이 있다. 어린이용 위인전에서는 절대 다루지 않을, 어떻게 사람이 이럴 수가 있을까라고 혀를 차거나 분노할만한 사항을 다루고 있다. 예를 들면 자유를 외쳤던 시인의 가정 폭력이라든지 모성을 갈구하기만 하고 대책 없이 의존적이었던 천재 화가라든지 버림받을까 두려워 양다리 걸치다가 이혼을 거듭하고 허세를 부렸던 작가, 그리고 자기애성 인격 장애를 가진 IT회사 사장 등등. 읽으면서 '헐…….'하고 고개를 저을만한 내용이 적혀있었다.

 

  사람이 무조건 다 선일수도 없고, 100% 악일 수도 없다. 좋은 점이 있으면 안 좋은 점도 있기 마련이다. 그렇기에 좋은 점이 있다는 이유로 나쁜 부분을 묻어서도 안 되고, 그가 저지른 나쁜 일 때문에 좋은 일마저 안했다고 여기면 옳지 않다. 좋은 부분은 좋은 부분이고, 나쁜 부분은 나쁜 부분 그대로 봐야한다고 생각한다.

 

  꼬꼬마 어린 시절에는 그런 판단을 내리기엔 좀 힘들 수도 있다. 아, 그래서 어린이용 위인전에는 그렇게 좋은 점만 줄줄이 적어놓은 것이구나! 하지만 나이가 들어서 위인전을 다시 읽지 않으면, 출판사의 의도대로 환상을 품고 살아갈 수도 있을 것이다. 음, 어른이 되어서도 다양한 장르의 책을 읽어야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다시 책 이야기로 돌아와서, 저자는 어린이용 위인전에서 다루지 않는 부정적인 면을 '찌질함'이라 불렀다. 가정 폭력이나 인격 장애 같은 부분까지 '찌질'이라는 범위 안에 넣을 수가 있는 걸까라는 의문이 생겼다. 하지만 그렇다고 다른 범주로 분류하면 다른 사람들과의 형평성에 문제가 있으니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자신의 찌질함을 알거나 모르는 상태에서 그냥 그대로 살아갔다면, 그 사람은 그냥 동네 찌질이 그 이상은 되지 못했을 것이다. 하지만 이 책에 나온 사람들은, 자신의 그런 찌질함을 뛰어넘었다. 자신의 비참한 상태를 파악하고 극복하기 위해 노력하기도 하고, 심지어 예술로 승화시키기도 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위인이라 불릴 수 있다고 저자는 말하고 있다. 단순히 '이것 봐, 위인이라고 존경받는 이 사람 사실 이런 짓도 했었어. 그런데도 숭배할래?'라고 말하려고 이 책을 만든 것이 아니었다. 뒤표지에 적혀있는 것처럼, 저자는 '찌질함은 위대함의 일부였다!'라는 주장을 하고 있다.

 

  자신의 핸디캡이나 시련을 극복한 사람을 위인이라고 부른다면, 그들은 위인이라 불릴 이유가 충분한 사람들이었다. 물론 그들에게 직접적으로 피해를 입은 사람들에게는 그렇지가 않겠지만…….

 

  위인은 어린 시절부터 남달랐고 생각하는 것이나 행동하는 것이 다른 평범한 사람과는 차이가 있다고 생각하는, 그래서 '난 안 될 거야. 싹수가 노랗잖아.'라고 섣불리 판단한 주위 사람에게 보여주고 싶다. 가정 폭력범도, 친구 등쳐먹었던 사람도, 바람둥이도, 애정결핍자도, 히틀러 빠돌이……아, 아니 이 사람은 제외하고 하여간 결점이 있는 사람도 충분히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고 말해주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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