라면의 황제
김희선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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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김희선

 

 

 


 

 

  아, 어떻게 이런 책이! 지금까지 자음과 모음에서 읽은 책 중에 ‘눈알 수집가 Der Augensammler, 2010’나 ‘눈알 사냥꾼 Der Augenjager, 2011’같은 이야기만 마음에 들었고, 그 외에는 그냥 그랬었다. 그런데 이 책, 진짜 마음에 들었다. 표지부터 묘한 인상을 주더니만, 책장을 넘기면서 ‘캬~’하는 감탄사와 킥킥대는 웃음 그리고 마음 한구석이 서늘해지는 느낌이 계속 들었다.

 

  표지는 메마른 어느 별에 눈이 큰 초록색 외계인들이 한 줄로 서있었고, 그들 앞에는 커다란 그릇에 잘 익은 달걀 반쪽이 얹어진 붉은 음식이 들어있다. 제목과 연관 지어 생각해보면 매운 라면인 것 같다.

 

  모두 아홉 개의 이야기가 들어있는데, 각각 따로 떨어진 내용이 아니라 몇몇은 등장인물이나 공간적 배경이 이어져있기도 하다. 그리고 안 그러는 것 같으면서 은근히 또는 대놓고 인간들의 이기심이나 욕망을 보여주면서 비꼬고 있었다. 그런 부분을 읽으면서, ‘맞아, 맞아!’를 연발하기도 했다.

 

 

 

  『페르시아양탄자 흥망사』는 세탁소 구석에서 발견된 오래된 양탄자가 어떻게 그곳에 있게 되었는지 조사하는 과정에서 이란과 한국, 두 나라가 걸어왔던 역사적 사건들과 시대의 변화를 보여주고 있다. 대놓고 이게 그 사건이었고 그 사람이 바로 이 사람이라고 밝히지는 않지만, 그 시대를 알고 있는 사람은 척 보면 알 수 있다. 먼지를 뒤집어쓴 양탄자 하나로 두 나라의 현대사를 풀어내는 작가의 구성에 감탄을 했다.

 

 

 

  『교육의 탄생』을 읽다보면 유명한 사진이 하나 떠오른다. 색동옷을 입고 어려운 수학 문제를 푸는 어린 꼬마의 흑백 사진이다. 이 이야기는 그런 능력을 가진 소년이 주인공이다. 뛰어난 계산력 때문에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한국인으로는 최초로 NASA에 갈 기회를 가진 어린 소년. 하지만 그곳에서 단순 계산기의 노릇만 하던 소년 앞에 한 러시아 과학자가 나타나면서 이야기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간다.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는 심리학자로, 인간의 무의식에 영향을 주는 소리의 파동에 관한 공식을 소년에게 알려준다. 그리고 소년은 집에 돌아와서 정부 기관원에게 그가 배운 것을 그대로 보고했다. 시간이 흘러 고국으로 돌아온 소년은 자신이 관여했던 인간의 무의식을 지배해서 뇌에 비가역적이고 영구적인 변화를 일으킬 수 있는, 일종의 주문과도 같은 헌장이 모든 교과서의 첫머리에 인쇄되었고 모든 사람들이 그것을 암송하는 것을 발견한다.

 

  아, 그래서 그 시대에 대한 맹목적인 충성과 향수를 가진 사람들이 그렇게 많은 건가……. 이 이야기를 읽으면서 ‘오늘부터 이 작가님의 빠순이가 되겠어!’라는 생각을 아주 잠깐 했었다. 그 정도로 기발한 발상이었고, 이야기는 걸리는 부분 하나 없이 매끄럽게 흘러갔다.

 

 

 

  『라면의 황제』는 관점의 차이가 어떻게 모든 것을 바꾸어 놓는지에 대해 말하고 있다. 20세기 후반쯤부터 라면의 유해성이 대두되더니, 결국 라면은 존재하지 않게 되었다. 그런데 그 유해성 보도라는 것이 참 우습기도 하고 황당했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경제전문가들은 “일인당 라면 소비량이 많은 지역일수록 거주자의 월평균 소득이 감소한다.”며 빈곤의 기저에 라면이 있다고 지적하고, 교육관계자들은 “어린 시절 라면 소비량과 명문대 진학률은 반비례한다,”고 얘기하며, 어느 가난한 나라의 십대들이 구식 소총을 멘 채, 쓰러져가는 담벼락에 기대 라면을 먹는 영상을 보여주며 테러리스트와 라면이 모종의 관계가 있다고 주장한다. 그래서 라면을 먹는 사람들은 잠재적 범죄자이고 빈곤층이라는 인식이 퍼져, 결국 라면은 세상에서 사라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언론이나 여론이 말을 어떤 식으로 교묘하게 바꾸어서 사람들을 농락하는지 제대로 확실히 보여주고 있다. 돈이 없어서 라면을 먹는 것인데, 순서를 바꿔서 라면을 먹어서 가난해진다고 말하는 그 교묘함이란! 엄지손가락뿐만 아니라 열 손가락을 들어 올리고 싶을 정도였다.

 

 

 

  『2098 스페이스 오디세이』는 불사의 비법을 발견한 한 과학자덕분에 미래의 지구가 어떻게 변화되었는지 말하고 있다. 그런데 이것 역시 언론이 사람 하나를 어떻게 신격화 시키고 조작할 수 있는지 보여주고 있다. 물론 그와 동시에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어머니에 대한 한 남자의 그리움도 곁들여 말하고 있다. 과연 그는 실험의 끝에서 행복했을까? 아니면 지구가 그렇게 된 것에 대해 일말의 죄책감이라도 느꼈을까?

 

 

 

  『지상최대의 쇼』에서는 한국의 강원도에 있는 W시가 배경이다. 어느 날, 그곳에 거대한 비행접시가 나타난다. 전 세계의 이목이 집중되고 사람들은 긴장하지만, 아무런 일도 일어나지 않는다. 색종이를 일주일 내내 뿌리거나 시끄러운 음악을 트는 것이 전부였다. 결국 사람들의 관심은 사그라지고, 하늘에 비행접시가 떠있는 것은 그냥 생활의 일부가 되었다. 그 와중에 여러 가지 유언비어가 돌면서 결국은 외계인은 자기 별로 돌아가라는 시위까지 일어난다. 비행접시가 사라진 이후, 사람들은 진짜로 그런 일이 있었는지 의심한다. 왜냐하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 이야기는 비극적이거나 엽기적인 사건이 아니면 사람들이 관심조차 주지 않는 세태를 반영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결국에는 그 자극에 무뎌져서, 강도가 더 세지지 않으면 비극이나 엽기로 여기지도 않는다. 작가는 그것을 비행접시라는 존재를 통해 말하고 있었다.

 

 

 

  『경이로운 도시』도 W시가 배경이긴 한데, 앞선 이야기와 조금 다르다. 여기서는 외계인이 떠나지 않았고, 지구에서 머무르기로 한다. 말하자면 외계인 난민이었다. 처음에는 호의적으로 대했지만, 사람들은 인간의 규칙을 지키지 않고 급속히 늘어나는 외계인들을 짐으로 여긴다. 그리고 급기야 식물과 별로 다를 바 없이 엽록체를 가지고 있고 광합성을 하는 그들을 외계 식물로 부르며, 식용으로 사용하기로 한다.

 

  뭐라고 해야 할까. 찰턴 헤스턴이 주연으로 나왔던 영화 ‘최후의 수호자 Soylent Green , 1973’가 연상되었다. 인간이 자기 선 밖으로 내몬 존재들에 대해서는 얼마나 잔인하고 비정해질 수 있는지 작가는 말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리고 언론과 사람들이 얼마나 허구적인 영웅의 생애에 열광하는지도 보여주고 있다.

 

 

 

  『이제는 우리가 헤어져야 할 시간』 역시 W시가 배경이다. 그런데 이 이야기는 어딘지 모르게 싸한 느낌을 주었다. 어쩌면 이 부분을 읽을 때, 언론의 허구성과 무책임이 빚어낸 한 남자의 사기극을 다룬 팟캐스트를 들은 뒤였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사건 뒤에 숨은 진실을 밝혀내는 과정에서 그것이 얼마나 왜곡되는지, 진실이란 어쩌면 그 누구도 알고 싶어 하지 않는 것일 수도 있는지 이야기는 말하고 있다. 결국 사람들은 자기들이 보고 싶은 것만 보고, 말하고 싶은 것만 말하며, 듣고 싶은 것만 걸러 듣고 있었다. 진실은 중요한 게 아니었다. 입으로는 그렇다고 말하지만 말이다.

 

 

 

  『개들의 사생활』은 자신이 위대한 실험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인류를 프리온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라 믿는 한 남자의 이야기이다. 그는 개가 인간을 지배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것을 밝혀내고자 개를 잡아다가 해부를 했지만, 별다른 성과가 없었다. 마침내 그는 개의 뇌에서 아무것도 밝혀낼 수 없다면, 다른 방법을 찾아야겠다고 결심한다.

 

 

 

  『어느 멋진 날』에는 레오니드 몰로디노프 박사가 스치듯이 지나간다. 비록 출연 분량은 적었지만, 꽤나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그가 연구했던, 파동을 이용한 뇌의 지배와 무의식 조종 수법이 이 이야기에서 일어난 사건의 주축을 이루고 있었다. 그와 동시에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 사이에서 일어나고 있는 전쟁이 어떤 참혹한 일들을 만들어냈는지 보여주고 있었다.

 

 

 

  책에 수록된 단편들은 단순히 허황된 상상력을 바탕으로 한, 그냥 흥미를 유발하는 그렇고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다. 현실을 명확히 꿰뚫어보고 적절히 비틀어 풍자도 하고, 비꼬고 있었다. 그래서 읽다보면 처음에는 'ㅋㅋㅋㅋㅋ'하고 웃다가 나중에는 'ㄷㄷㄷ‘하고 떨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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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mmar Insights
박우상 지음 / YesEnglish(예스잉글리시)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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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저자 - 박우상

 

 

 

 


 

  해도 해도 모르겠는 영어 공부. 그만큼 했으면 손에서 놓을 수 있으면 좋겠지만, 죽을 때까지 하는 게 공부라는 걸 입증이라도 하듯이 매번 배울 것이 새로 생겨난다.

 

  이 책은 실제 미국에서 사용되는 어법과 한국에서 배우는 어법의 차이를 짚어주면서, 미묘한 어감의 차이를 알려주고 있다. 영화 대사라든지 소설, 신문, 연설문, 기고문 등등에서 사용된 문장이나 대화를 예문으로 하여, 우리가 배운 문법이 그쪽에서는 어떻게 변형되고 어떤 어감의 차이가 있는지 얘기하고 있다.



 

  학교 다닐 적에 기본적으로 배운 어법들이나 구문이 다르게 사용되는 것을 보면서 ‘음, 이렇게도 쓰이는군.’하면서 고개를 끄덕이기도 하고, ‘헐, 이렇게 사용할 수 있다고?’하고 놀라기도 했다.

 

  제일 당황한 부분은 ‘should have + 과거분사’의 경우였다. 우리가 지금까지 학교에서 배운 것은 ‘……했어야 했다. 그러나 그렇게 되지 않았다.’라는 의미였다. 하지만 저자는 그것 말고 ‘……했어야 했다. 그리고 실제로 그렇게 되었다.’라는 의미도 가진다고 말하는 것이다. 이걸 어떻게 구별하라고! 읽으면서 속으로 징징거렸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단순히 문장 하나로 해석을 하는 것이 아니라, 전체적인 문단을 보면서 의미를 파악하면 되는 것이었다. 그러니까 저자는 한국 문법에서 가르치는 한 가지 뜻으로 해석하면 이야기가 이상해질 수 있으니, 다른 의미도 같이 알아두라는 의도였던 것이다. 단어나 구문 해석 하나를 잘못하면 전반적인 내용이 어긋나면, 의도치 않은 손해를 볼 수 있다. 예전에 다른 나라와의 계약에서 그런 경우가 있었다는 뉴스를 본 기억이 난다.



 

  하긴 우리나라도 ‘잘한다.’라는 말이 어떤 분위기에서 말하느냐에 따라 칭찬의 의미일수도 있고, 비아냥거리는 말이 될 수도 있다. 상황에 따라서 어조가 바뀌고, 그에 따라 의미가 달라지는 것이다. 그러니까 이 책에서 말하고 있는 어법들도 어떤 상황에서 사용되느냐에 따라 다양한 의미로 해석될 수 있을 것이다. 음, 우선은 상황 파악을 잘 하는 눈치 있는 사람이 되어야겠군!

 

  영문법을 처음 공부하는 사람들에게는 권하지 않는다. 아무 것도 잘 모르는 사람에게 이것저것 다양한 용법을 알려주면, 헷갈리기만 할 것 같다. 하지만 어느 정도 기본이 된 사람들은 흥미를 가지고 볼 수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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빌리 배트 4
우라사와 나오키 글.그림, 나가사키 다카시 스토리 / 학산문화사(만화)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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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원제 - BILLY BAT

  작가 - 우라사와 나오키, 나가사키 다카시

 

 

 

 

  으아! 이 작가는 어디까지 이야기를 확장시킬 건지 예측할 수 없다!

 

  이제 이야기는 시간을 뛰어넘어 1960년대가 배경이다. 케빈이 그리다 만 만화 ‘빌리 배트’는 다른 사람이 이어 그리면서 엄청난 히트를 치게 된다. 그 덕분에 빌리 랜드까지 만들어져 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고 있다. 한편 미국에 온 케빈은 자신만의 ‘빌리 배트’를 그리는데, 역시나 그런 그를 뒤쫓는 무리가 있다. 1권에서부터 계속 찰리와 케빈을 쫓던 특수 검열관 휘니를 비롯해, 스미스라는 요원이 등장한다. 케빈은 이제 미국 대통령을 죽이려는 음모자들에 대해 그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의 이목을 집중시키기 위해 미끼를 내세우고, 자기들을 압박하는 대통령을 죽이려는 석유업계, 군수산업 그리고 정부기관들. 케빈은 스미스 요원과 함께 대통령 암살을 막기 위해 길을 떠난다. 과연 케빈과 스미스는 미래를 막을 수 있을 것인가?

 

  한편 하비 오스왈드는 자신을 영웅으로 만들어주겠다는 사람들의 제의에 넘어가, 러시아로 망명했다가 다시 미국으로 돌아온다. 그리고 그들이 시키는 대로 댈러스로 향한다.

 

  줄거리만 봐도 그들이 죽이려는 미국 대통령이 누군지 감이 온다. 바로 존 F. 케네디이다. 1권에서 케빈을 함정에 빠뜨렸던 남자는 이제 케네디 대통령을 죽이려고 음모를 짠다. 도대체 그 남자의 정체가 뭔지 모르겠다.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에 얽힌 많은 얘기가 있다. 하비 오스왈드는 미끼였고, 진짜로 대통령을 암살한 일당은 따로 있다는 것이다. 음모론이라고 하지만, 그걸 믿는 사람들은 꽤 있다. 이 만화 역시 그런 음모론적인 이야기를 바탕으로 하고 있다. 거기에 박쥐의 예지를 들은 케빈을 등장시켜, 진짜 배후가 누구인지 헷갈리게 하고 있다.

 

  설마 박쥐가 모든 사건의 배후인거 아니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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디 마이너스
손아람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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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손아람

 

 

 

 

 

  이 책은 1990년대 후반, 이른바 군사 독재 정권이 물러나고 문민정부가 시작된 이후, 특히 해방 이후 처음으로 야당이 집권한 이후를 다루고 있다.

 

  그 당시 기억을 더듬어 보면, 학생 운동이나 시위가 예전처럼 호응을 얻지 못했었던 것 같다. 적어도 내가 받은 인상으로는 그랬다. 아마 공공의 적이었던 군사 정권이 이미 물러났는데 또 뭐 할 것이 있겠냐는 분위기가 흘렀던 것 같다. 거기에 IMF 위기가 닥치면서, 나라가 당장 망할 것 같은데 무슨 시위냐는 생각들을 했던 것 같다. 시위를 위한 시위를 한다는 얘기도 들은 기억이 난다. 독재 정권이 사라졌으니 우리의 적은 북한이고, 그들이 따르는 사상을 따르는 것 같은 학생들의 구호는 허황되고 불온한 것으로 여겨졌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은 대학 내에서 운동권이라 불리는 학생들이다. 아마 그들이 지금의 정의당이나 민노당 내지는 얼마 전에 헌재 판결로 해체된 통합진보당을 구성하는 사람들로 성장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는, 과거 열정적으로 이상을 좇던 사람들이 시간이 흐르면서 어떻게 변화하는지를 단편적인 사건들의 나열로 보여주고 있다.

 

  여성 평등을 주장하고 농활에서 남자들에게 요리를 시키던 미쥬는 외국인 남편을 위해 인도 요리를 배우는 경제학자가 되었다. 시위에 앞장서다 경찰에 잡혀갔던 대석은 검사가 되었다. 생방송 발언을 새치기하고 술값을 미루던 윤구는 국회의원 경선표를 조작하는 정치인이 되었다.

 

  그들은 왜 그렇게 변해버렸을까? 그 대답은 뜻밖에도 시위 학생들을 잡아 취조하던 경찰의 입에서 나온다.

 

  “세상을 바꾸려고 젊음을 다 쏟아 부었는데, 뒤늦게 세상이 바뀌지 않는 곳이라는 사실을 깨닫게 되면?……차라리 세상이 되어버리는 거야. 아주 철저하게 세상이 되어 낭비한 젊음을 보상받는 거지,” -p.407

 

  아……. 그렇구나. 그래서 과거 학생 운동에 앞장섰던 사람이 그 누구보다 집권당의 입에 맞는 소리를 해대고 있고, 자신을 잡아 죽이려고 했던 정권에 빌붙어 의원직을 하고 있는 거구나. 그들은 지금 잃어버린 10년이 아니라, 잃어버린 청춘을 보상받으려는 것이구나.

 

  사실 이야기에 나오는 인물들이 무슨 확고한 신념이 있어서 시위를 한 것은 아니었다.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어서, 또는 자기가 마음에 들어 하는 이성이 그 모임에 들어가 있어서였다. 그래서 그들은 그렇게 변했는지 모르겠다. 여자에게 잘 보이고 싶었던 남학생들은, 그 여학생과 틀어지면 결국은 조직을 떠나버렸으니 말이다. 그건 여학생들도 비슷한 상황이었다.

 

  문득 그건 그들이 돌아갈 곳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서울대생이었다. 대학 간판만으로도 웬만한 기업에 취업을 할 수 있는 학생들이었다. 게다가 어떤 학생은 아버지가 고위 공무원이었고, 또 다른 학생은 미국 시민권자였다. 사실 주인공도 그리 좋은 학점을 받지 않았고 시위 경력도 있지만, 대기업에 입사할 수 있었다. 그들이 서울대생이 아니었다면, 소위 말하는 지잡대 출신이라면 상상도 못할 일이다.

 

  그들은 그냥 호기심에 기웃거렸을 수도 있었다. 어쩌면 정치나 사회에 대해 잘 모르는 사람들을 개화시키겠다는, 일종의 우월감으로 발을 디뎠을 수도 있다. 그런 점을 느낀 것은, 농활에서 일어난 성희롱 발언 사건이다. 20년이 지난 지금도 모 유력 일간지에 과거 노인네들이 꼬꼬마들에게 ‘고추 좀 보자!’라고 말하던 시절이 그립다는 칼럼이 버젓이 실리는데……. 그러다가 문 경사의 말대로, 자신들이 아무리 해도 안 된다는 것을 깨닫고는 포기하는 것이다.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이다. 세상에 동화되어 과거 자신들의 모습을 흑역사로 파묻고 다른 모습으로 살아가는 것이다.

 

  그러니 자신들이 그렇게 혐오하던 권력자들의 행태를 고스란히 따라할 수 있는 것이다. 난 왜 예전 학생운동을 하던 사람들이 요즘 그런 모습을 보이는지 이해할 수 없었는데, 이 책을 읽으면서 아주 조금은 깨우칠 수 있었다. 결론은 보상이다.

 

  그런 면에서 그들이 바랐던 이상을 지키고 있는 진우는 특이한 존재라고 할 수 있다. 그는 모임에 가입한 계기부터 달랐다. 여자를 따라 온 것이라기보다는, 자기가 스스로 생각해서 들어왔다. 그래서 그는 안전한 곳으로 돌아가는 것을 거부하고, 자신의 신념에 따라 행동할 수 있었나보다. 그곳에서 남의 이름을 팔아 자신의 안전을 보장받기 거부한 사람은 진우뿐이었으니 말이다.

 

  대우 자동차 시위 이후, 태의는 진우를, 대석은 태의를, 전학협 간부는 대석을, 이런 식으로 위로 거슬러 올라가며 모두가 다 다른 사람을 경찰 손아귀에 밀어 넣고 자기들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했다. 모두 다 그랬으니 죄책감을 가질 필요가 없었다. 그 고리를 끊은 것은 진우였다. 그 때문에 그는 징역형을 살아야했다.

 

  그러니까 이 책은, 남들이 잘 가지 않는 길을 가려는 사람은 확고한 신념을 가져야 한다고 말하는 것 같다. 어영부영 남들 하는 대로 따라하다가는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칠 수 있다고 말하는 것 같다. 그리고 인간이란 자기가 믿는 사람이나 자기를 믿어주는 사람에게 얼마나 무례하고 잔인할 수 있는지 잘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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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아 드립니다 신나는 새싹 7
프쉐맥 베흐테로비치 글, 에밀리아 지우박 그림, 길상효 옮김 / 씨드북(주) / 2014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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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작가 - 프쉐멕 베흐테로비치

  그림 - 에밀리아 지우박

 

 

 

 

 

  우리 삼남매와 엄마아빠는 어릴 적부터 안아주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안아주는 건 고사하고 팔짱을 끼거나 손을 잡고 다닌 기억이 거의 없다. 그런데 이상하게 조카들은 ‘꼬옥’하고 안아주는 걸 너무 좋아했다. 특히 막내 조카가 그렇게 하는 걸 좋아하는데, 열두 살이 된 지금도 우리 집에서 자기네 집으로 갈 때 할머니나 고모인 나를 꼬옥 안아주고 간다. 심지어 백허그를 하고 갈 때도 있다.

 

  조카들이랑 꼬옥하는 건 무척이나 기분이 좋다. 아가들 특유의 비누 냄새도 좋고 말랑말랑한 볼이 닿는 느낌도 좋다. 하지만 무엇보다 좋은 건, 감정이 진정된다는 점에 있다. 혼을 내고나서 시간이 조금 지난 다음에 안아주면, 조카도 그렇고 나도 어느 정도 기분이 평온해지는 것 같다. 그 뿐 아니라, 별다른 이유 없이 그냥 안기만 해도 마음은 따뜻해진다. 또는 칭찬할 일이 있을 때 꼬옥 안아주면서 엉덩이를 팡팡 두드려주기도 한다. 물론 그러다가 헤드락을 걸고 장난을 칠 때도 있지만…….



 

  어떻게 하면 하루를 즐겁게 보낼 수 있는지 알려주겠다며 아들 곰과 함께 다른 동물들을 찾아 나선 아빠 곰. 아빠 곰은 누군가를 안아주면 기분이 좋아지는 것뿐만 아니라, 아주 많은 게 좋아진다고 말한다. 곰 부자의 안아주기를 받은 동물들은 처음에는 당황하지만, 곧 기분이 좋아진다. 족제비 아가씨는 마음이 따뜻해지는 걸 느끼고, 비버 아저씨는 괜찮은 이웃을 가졌다고 생각하게 된다. 토끼와 늑대는 행복해했다. 그리고 큰사슴 할아버지는 얼마 남지 않은 인생에 즐거운 일이 생겼다고 좋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마치 조카를 안아줬을 때와 비슷한 기분을 느꼈다. 꼬옥 안고 있는 곰의 얼굴과 영문을 모르겠는 비버의 표정 대비가 좀 웃겼지만, 대부분의 동물들은 미소를 짓고 있었다. 내가 생각하기에, 동물들도 누군가를 안아줄 때 알 수 있는 감정을 느끼고 있었다.

 

  바로 ‘편안함’이다.

  ‘따뜻함’이다.

  이 세상엔 나 혼자가 아니라는, 누군가 옆에 있다는 ‘안도감’이다.

 

  내가 아닌 다른 누군가의 체온을 느끼면서 위로를 받기도 하고, 용기를 얻기도 한다. 마음이 안정되는 것은 기본이고 말이다. 아! 그래서 프리 허그가 유행인건가? 하지만 난 그 정도로 활발한 성격이 아니라서……. 아무래도 주말에 막내 조카가 오길 기다려야겠다. 오면 ‘꼬옥’하고 안아줘야지. ‘일주일 동안 학원 다니느라 고생 했어.’라고 말해주면서 말이다.



 

  음, 그런데 어린 친구들이 읽기에는 글자가 좀 많았고 크기도 작았다. 누군가 옆에서 읽어줘야 할 것 같다.

 

 

 

 * 사진은 출판사에서 인터넷 사이트에 제공한 것을 사용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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