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제 - The Snowy
Road
작가 - 이청준
그림 - 최재은
표지에 그려진 할머니의 얼굴이 너무도 슬퍼 보인다. 금방이라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눈과
뭔가 할 말이 있지만 차마 입을 열지 못하고 망설이는 것처럼 보이지만 말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보이는 꾹 다문 입 그리고 볕에 탄 주름진 얼굴.
분명히 손도 거칠거칠할 것이다. 그리고 눈이 하얗게 머리에 내려앉았지만, 모자나 귀마개 하나 쓰지 못했다. 분명히 그리 넉넉한 살림은
아닐 것이다. 왜 이 할머니는 온 세상이 하얗게 눈으로 덮이는 날씨에, 어째서 이런 슬픈 얼굴을 하고 있을까?
이야기는 한 남자의 입을 통해 전개된다. 알코올 중독으로 가산을 탕진하고 조카들만 남기고 죽은 형
때문에 학창 시절부터 집안을 떠맡아야했던 주인공. 그가 입버릇처럼 생각하는 말이 있다. 어머니와 자기 사이에는 빚이 없다는 것이다. 그런
생각으로 그는 자기가 해야 하는 정도의 일만 어머니에게 하고, 그 이상은 해줄 마음이 없었다. 그에게 어머니나 형이 남긴 조카들, 형수는 그리
살가운 상대가 아니었다.
어머니 역시 작은 아들에게 변변하게 해준 것이 없다는 미안함으로 가능하면 부탁 같은 걸 하지
않고, 그냥 그렇게 살아가고 있었다. 하지만 마을에 새마을 운동 바람이 불면서, 어머니는 아들에게 난생처음 부탁 비슷한 것을 말한다. 바로 집을
고쳤으면 하는 바람을 내비친 것이다. 당신님이 돌아가시면 장례를 치러야 하는데 지금 방한 칸밖에 없는 초가집은 그럴 수가 없으니, 증개축을
했으면 하는 소원을 조심스레 말한다.
주인공은 그에 뿔이 나서 시골집에 온 지 하루 만에 돌아가겠다고 한다. 이에 상심한 노모를 달랜
것은 주인공의 부인이었다. 그녀는 모자 사이의 앙금을 해소하기 위해, 어머니에게 과거의 이야기를 해달라고 한다. 며느리와의 대화에서 노모는
그동안 말하지 못했던 아들에 대한 사랑과 미안함 같은 여러 가지 감정을 하나둘씩 내비치는데…….
마지막 장까지 읽으면, 표지에 그려진 할머니가 왜 저런 표정을 짓고 있는지 이해할 수 있다.
큰아들 때문에 모든 것을 잃고 길에 나앉았지만 타향에서 공부하는 작은 아들에게 따뜻한 밥 한 끼 지어주고 뜨끈한 방에서 하룻밤 재우고 싶었던,
도시로 돌아가는 어린 아들 밤길에 혼자 가면 위험할까 그 먼 눈길을 같이 왔다가 혼자 돌아가야 하는 먹먹함, 조금이나마 자식과 같이 있고
싶었던, 먼 곳에서나마 아들의 안전을 염려하고 기원하는, 아들에게서 따뜻한 말 한마디라도 들으면 힘이 나겠지만 어린 자식에게 그런 짐을 지울 수
없기에 혼자 참아내야 했던, 자식의 앞길을 막지 않겠다는 단호함과 그리움이 범벅이 된 얼굴이었다.
어쩌면 우리가 '어머니'라는 존재를 떠올리면 연상되는, 희생의 대명사로 대변되는 그런 이미지였다.
하지만 그러면 뭐하는가? 자식은 그런 어머니의 마음을 하나도 알지 못하는데…….
책을 읽으면서 안쓰러웠다. 아들도 그렇고 어머니도 그렇고. 그래도 다행인 건, 이 어머니가 자식
복은 없지만 며느리 복은 있는 것 같았다. 큰아들은 재산을 탕진하고 일찍 죽었고, 작은 아들은 어머니가 해준 게 뭐가 있냐며 냉담하게 군다.
하지만 큰며느리는 시골에서 시어머니를 모시고 아이들을 키우고, 작은 며느리는 남편과 달리 사근사근하니 시어머니의 마음을 헤아리고 남편과
화해시키려고 한다. 아들보다 훨씬 나았다.
모자가 화해했는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다. 하지만 뭔가 변화는 생길 것 같다. 주인공이 아주 냉정한
사람이 아니라, 단지 보지 않으려고 했었기 때문이다. 이후 제대로 보려고 했으면, 아마 조금은 서로에게 다가서지 않았을까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책의 구성이 그런 감동 느끼는데 여러 번 방해했다. 이 책이 한국 단편을 영어로
번역해서 내놓은 시리즈 중의 하나인데, 편집이 좀 아쉬웠다. 한 쪽은 한글로, 다른 쪽은 영어로 구성해놓았는데, 두 언어의 문장 길이가 다르기
때문에 연달아 영어로 된 페이지가 나온다거나, 그림과 글 내용이 살짝 어긋나기도 했다. 그래서 감동이 반감된다거나 중간에 툭 끊어졌다. 차라리
앞은 한글, 뒤는 영어로 나누었으면 더 좋지 않았을까하는 생각도 들었다.
할머니의 표정이 살아있었고, 심경을 나타내는 배경 그림이 마음에 들었다. 다만 편집이…….
아쉽기만 하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