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치가 떠난 자리
김만권 지음 / 그린비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저자 - 김만권



  이 책은 특이하게 에필로그로 시작해서 프롤로그로 끝을 맺는다. 저자가 하고 싶은 이야기를 다 읽은 사람들이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새로운 시민 사회로 발을 내딛길 기대하며, 프롤로그로 마무리를 한 것 같다.


  1부에서는 지난 대선 이후뿐만 아니라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잃어버린 다섯 가지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민주주의의 상실, 자유주의의 상실, 진보의 상실, 소통의 상실 그리고 유토피아의 상실이다.


  대한민국은 민주주의 사회인데 그것을 상실했다니, 다소 황당할 수 있다. 하지만 저자는 대의 민주제로 인해 참여 민주주의가 훼손되었고, 구경꾼들의 민주주의내지는 도망자 민주주의로 변질되었다고 지적한다. 또한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진보의 용어가 혼동이 되면서, 그 본질적인 의미를 잃어버리고 흔들리고 있다고 말한다. 특히 남북한의 대치라는 특수 상황에 대해 약간 언급하고 있다.


  그리고 세대 간, 계층 간, 신념 간의 갈등으로 인해 소통이 되지 않는 사회를 안타까워하고 있다. 유토피아의 상실은 고개를 갸웃거리게 만드는 부분이었다. 아직도 이해가 잘 가지 않는 대목이기도 하다.


  2부는 앞에서 언급한 다섯 개를 어떻게 하면 되찾을 수 있는지에 대한 대안을 내놓고 있다. 특히 저자는 시민의 참여와 활동을 중요시하고 있다.


  여기서 그는 다수 의견을 중시하는 민주주의를 호모포비아적이라 규정하고, 그에 반하여 다양하고 많은 의견을 중시하는 시민 게릴라적인 활동을 높이 사고 있다. 그는 이것을 헤테로토피아적이라고 지칭한다. 그 일례로 작년에 돌풍을 일으킨 ‘나는 꼼수다’와 ‘희망버스’를 든다.


  책은 차분한 어조로 조목조목 이유와 예를 들어서, 저자가 하고 싶은 말을 전달하고 있다. 하지만 읽기는 힘들었다. 이건 아마 내 독서 습관 때문일 것이다. 단문 위주의 글을 좋아하기 때문에, 한 문장이 몇 줄씩 이어지며 긴 호흡이 필요한 이 책은 상당한 부담이었다.


  그리고 어딘지 모르게 빙 돌려 말한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건 통합진보당 사건을 언급한 ‘진보의 상실’ 부분에서 확실히 느껴졌다. 저자는 거기서 관련된 사람들의 실명을 밝혔다. 그게 나쁘다는 것은 아니다. 신문을 읽어도 다 나오는 이름들이니까.


  그렇지만 ‘자유주의의 상실’이나 ‘민주주의 상실’ 같은 부분에서는 모호하게 ‘~세력’ 내지는 ‘~집단’이라고 대상을 언급했던 것에 비하면 이상한 일이었다. 그런 이름들은 신문에 실명이 나오지 않아서 그런 걸까? 왜 진보 계열 인사들의 이름만 실명으로 콕 집어 언급했는지 잘 모르겠다. 만만하기 때문일까?


  뭔가 말하고 싶은 것은 있는데, 그건 꼭꼭 숨긴 채 고상하고 평이하게 포장한다는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뭐 그럴 수도 있겠다는 생각을 했다. 이 리뷰를 쓰는 나도 그러고 있으니까. 처음에는 직설적이고 비속어나 난무했지만, 퇴고를 하면서 용어를 엄청 순화시켰다.


  책을 읽으면서 갑자기 화가 났다. ‘왜 또 시민들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려는 거지?’라는 위문이 들었다.


  지금까지 이 나라의 역사를 보면, 정치가들이 병신 짓을 해서 엉망으로 만들어버린 상황을 시민들이 피흘려가면서 바로잡아놓았고, 그러면 정치가들이 자기들이 마무리를 하겠다고 하면서 삽질과 병신 짓을 했고, 다시 국민들이 몸 바쳐 제자리로 돌려놓기의 반복이었다. 거슬러 올라가면 임진왜란 때도 양반들은 도망갔지만 평민들이 의병을 일으켜 싸웠고, 일본 침략기에도 그랬으며, 4.19때도 그랬고, 6월 민주 항쟁 때도 똑같았다.


  그런데 이 책에서도 역시 깨어있는 시민의식 어쩌고 하면서 급기야 시민 게릴라라는 이름을 붙여가며, 대안으로 시민의 정치 참여를 권유하고 있다. 그러니까 시민이 정치에 관심을 갖지 않게 된 이유가, 시민들이 공부를 하지 않고 깨어있지 않았으며 참여를 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래서 뭘 어쩌라는 걸까? 병신삽질만 해대는 정치가들을 몰아내고 국민이 직접 참여하는 민주제라도 만들라는 걸까? 아니면 기존의 정치가들을 다 낙선시키고 시민들이 입후보해서 새로운 판을 짜라는 걸까? 그것도 아니면 또다시 시민이 나서서 판을 뒤엎고 자기들에게 넘겨달라는 걸까?


  시민들이 정치에 무관심하고 방관자로 남게 된 이유? 그 이유는 간단하다. 나라를 위해 일하라고 했더니 자기들 배만 불리기 바쁜 새누리당, 자기들 살겠다고 자기 당에서 배출한 대통령에게 모든 책임을 떠넘기고 죽으라고 등떠민 민주당, 그리고 채 영글기도 전에 못된 것만 배워갖고 김칫국물 마신 진보당이 자폭하는 동안 시민들은 먹고 사는 일에 열중해야했기 때문이다. 정치를 제대로 하라고, 경제를 살리라고 했더니 자기네 통장 잔고만 늘린 자들 때문에, 생존하기 위해 다른 곳엔 눈 돌릴 여력이 없기 때문이다.


  그런데 또 다시 그런 시민들에게 피 흘리기를 요구하는 건가? 왜 이 나라는 언제나 시민에게 모든 것을 떠넘기는가? 왜 정치를 하거나 정치에 한 발을 담근 사람들은 자기들이 활동할 생각은 하지 않고, 남이 갖다 바치길 바라는 걸까?


  물론 깊이 생각하고 공부하는 시민이 나쁘다는 건 아니다. 사람은 죽을 때까지 사색하고 관찰하고 반성해야한다. 하지만 그걸 이용할 생각은 안 했으면 좋겠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구본준의 마음을 품은 집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 건축 이야기
구본준 지음 / 서해문집 / 2013년 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부제 - 그 집이 내게 들려준 희로애락喜怒哀樂 건축 이야기

  저자 - 구본준



  마음을 품은 집. 제목을 읽고 생각에 잠겼다. 집이 마음을 품을 리는 없고, 누구의 마음을 품은 것일까? 책을 읽으면서 그것을 찾는 것에 집중했다. 이 책은 희로애락이라는 소제목에 맞춰서, 각각 4개씩 모두 16개의 건축물을 얘기하고 있다. 한국의 건물도 있고, 외국의 것도 있다.


  희喜에는 ‘이진아기념도서관’, ‘대한성공회 서울대성당’, ‘어린이대공원 꿈마루’, ‘기적의 도서관’을 소개하고 있다.


  슬픔도 기쁨으로 승화시키거나 아무도 몰랐던 선배의 작품을 찾아낸 기쁨 내지는 새로운 도전을 하여 그것을 이루어냈을 때의 기쁨 또는 건물을 이용하는 사람들에게 즐거움을 줄 수 있는 건축물에 대해 얘기하고 있다.


  딸을 잃은 슬픔을 다른 아이들을 위한 도서관을 지음으로 기쁨으로 승화시킨 ‘이진아기념도서관’ 편에서는 마음이 짠했다. 특히 ‘우리 동네에 도서관이 생겨 너무 좋지만 그래도 진아 양이 살고 도서관이 없는 것이 더 좋았을 것’이라는 메모를 읽고는 눈물이 핑 돌았다.


  로怒에서는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 ‘도동서원’, ‘시드니 오페라하우스’, ‘옛 부여박물관’을 보여준다.


  건물의 설립 과정에서 사람들의 분노를 자아내거나, 건물의 존재 자체가 분노를 자아내는 작품들에 이야기하고 있다.


  음,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도 있으니 설명을 하자면 건물의 존재 자체가 분노를 자아내는 것은 서울 성산동에 있는 ‘전쟁과 여성인권박물관’이다. 그 건물에 전시되어있는 할머니들의 사진이나 작품들은, 우리 역사에서 가장 암울하고 화나는 일 중의 하나이다. 그래서 무능했던 그 당시 조상들과 그런 끔찍한 일을 저지른 일본에 대해 화가 난다. 또한 지금도 그 할머니들을 욕보이는 일부 사람들에게도 분노를 느끼고 말이다.


  애哀에서는 ‘봉하마을 묘역’, ‘시기리야 요새’, ‘프루이트 아이고와 세운상가’, ‘아그라포트’가 소개된다.


  너무도 슬프고 가슴을 찡하게 울리는, 건물에 얽힌 이야기가 들어있다. 무책임한 정치가 빚어낸 수많은 사람들의 슬픔이 느껴지는 것 같은 ‘프루이트 아이고와 세운상가’ 이야기는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한다. 무조건 없애지 말고, 남겨두어서 국가 내지는 도시 행정을 맡으려는 사람들에게 본보기로 보여주면 어떨까?


  락樂은 ‘창덕궁 정자’, ‘선교장’, ‘충재’, ‘문훈발전소’에 대해 다루고 있다.


  한국 정자 건축의 모든 것을 담고 있는 창덕궁의 여러 정자들에 대한 이야기를 읽으면서, 봄에는 꼭 구경을 가리라 마음을 먹었다. 전에는 멋도 모르고 안내원을 쫄래쫄래 따라가기만 했는데, 이번에는 그러지 않으리라.


  조선의 뛰어난 건축가는 학자들이라는 ‘충재’ 부분에서는 ‘헐!’ 하다가 ‘아, 그렇구나.’라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건축은 자신의 미적 감각을 표현할 수 있는 방법의 하나일 테니 말이다. 그리고 사람의 미적 감각은 어떤 생각을 하고 있냐에 달라질 것이고, 그것은 그가 배운 학문이나 가치관에 바탕을 두고 있을 테니까. 어쩌면 조선 시대의 학자들은 자신이 생각하는 자연과 인간의 조화를 건축을 통해 표현했을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마지막 장을 덮으면서, 처음 품었던 의문 ‘누구의 마음을 품은 집인가?’의 답을 찾았다. 그 건물을 설계한 사람 그리고 그것을 만들 계기를 마련한 사람의 마음을 품고 있었다. 그래서 그 건축물을 보고 있는 다른 사람들에게 이야기하고 있다.


  ‘이 집에는 말이야, 숨겨진 이야기가 있어. 궁금해? 그러면 내 이야기를 들어볼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다이하드 2 SE - 서플 한글자막 없음
레니 할린 감독, 브루스 윌리스 외 출연 / 20세기폭스 / 2007년 5월
평점 :
품절


 원제 - Die Hard 2, 1990

  감독 - 레니 할린

  출연 - 브루스 윌리스, 보니 베델리아, 윌리엄 아서톤, 윌리엄 새들러



  크리스마스 오는 걸 두려워할 부부의 이야기 두 번째. 역시 이번에도 부인을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가 테러리스트들과 한 판 싸우게 되는 주인공이다.


 어쩌면 이 영화의 부부에 대해서도, 일본 만화 '소년 탐정 김전일'과 '명탐정 코난'의 두 주인공처럼 그들이 가는 곳에 살인이 일어나느냐, 아니면 사건이 있는 곳에 그들이 가게 된 것이냐는 것과 비슷한 논란이 있을 것 같다. 그러니까 부부가 명절 때 만날 약속을 했기에 그 자리에 테러리스트가 온 것이냐 아니면 테러리스트가 있는 곳에 그들이 온 것이냐의 문제 말이다. 전자가 맞는다면, 그들은 가능하면 떨어져 살지 않거나 명절 때 만나면 안 될 것 같다.


  그런 심정은 부인의 마지막 대사에서도 잘 드러난다. "왜 우리는 매번 이러죠?" 문제가 있다는 걸 알았으니, 3편에서는 해결책을 세웠겠지. 아니, 문제 해결을 했으면 시리즈가 이어지지 않으려나?


  1편도 그렇지만 2편의 감독 이름도 낯익다. 한때 액션 블록버스터 영화를 만들기로 유명한 사람이다. 지금은 예전보다는 덜 이슈가 되고 있지만, 예전에는 저 감독 영화가 개봉하면 믿고 보는 분위기였다. 엄청난 스케일을 자랑하는 추격 장면이나 폭파 장면이 압권이었다. 그런 화면을 보면, 어쩐지 속이 펑 뚫리는 기분이었다.


  공항을 점거한 무리들. 그렇다고 공항을 무력으로 점령하여 탑승대기자들이나 배웅내지는 마중을 하러 온 사람들을 인질로 삼은 건 아니었다. 공항의 항공 제어 시스템을 장악하여 공중에 떠있는 비행기들의 안전을 볼모로 하였다. 무서운 놈들. 지상의 사람들이라면 어떻게 도망갈 곳이라도 있지, 하늘에 떠있는 비행기에 탄 승객들은 피할 곳도 없다.


  놈들이 공항의 전원을 내리는 바람에 착륙이 불가능해진 비행기들은 다른 공항으로 가거나 하늘에서 빙빙 돌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그 중에 부인이 탄 비행기도 끼어있었고,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존 맥클레인은 달리기 시작했다.


  대개 범죄가 얽힌 영화에서는 믿었던 사람이 배신을 한다거나 안 그럴 것 같은 사람이 막판에 도와주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래서 내가 CSI 뉴욕을 처음 보았을 때, 적응이 되지 않았다. 바로 맥 반장님 때문에.


  이번 작품에서도 진정한 뒤통수 때리기가 어떤 건지 확실히 보여줬다. 하긴 그렇게 주인공의 말을 쉽게 믿어준다는 것에 의심을 했어야 한다. 비록 그가 몇 년 전 있었던 나카토미 빌딩 사건의 영웅이라 불린다고 해도 말이다. 차라리 너무 의심하고 몰아세우는 사람이 낫다. 오해라는 게 밝혀지면 깨끗하게 인정하고 도와주니까.


  전편에서 부인에게 주먹을 맞았던 기자는 또 등장해서 사태를 더 키운다. 그런데 1편에서는 그래도 진실을 알린다는 사명의식 같은 것과 출세하겠다는 마음이 공존하는 기자의 이미지가 조금은 있었는데, 이번에는 사람들의 말을 들어보면 완전 천덕꾸러기 신세 같은 느낌이 들었다. 기사를 팔아먹기 위해 없는 사실을 만들어 내거나 다른 사람들을 배려하지 않은, 모두에게 미움을 받는 사람으로 표현되었다. 첫 단추부터 잘못 끼웠으니 그러려니 하겠지만, 좀 아쉬웠다. 경찰과 기자와 노숙인이 화합하여 사건을 해결하는 아름다운 모습을 보나 했는데, 그렇지가 못해서.


  중간에 살짝 늘어지는 느낌도 들었지만, 펑펑 터지고 죽을 놈 죽고, 총싸움 신나고 화끈하게 하고, 우울할 때 보면 신날 영화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부머랭 살인사건 애거서 크리스티 미스터리 Agatha Christie Mystery 27
애거서 크리스티 지음, 신용태 옮김 / 해문출판사 / 1986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원제 - Why Didn't They Ask Evans?, 1934

  작가 - 아가사 크리스티




  전에도 어디선가 말했겠지만, 어렸을 때 아버지가 청소년용 추리소설 전집을 사 오신 적이 있다. 아버지는 그 외에도 어린이용 SF 소설 전집이나, 고전 명작에는 포함되지 않는 판타지 명작 소설 전집 같은 것들도 많이 사오셨다. 이 때 읽었던 것 중에 지금도 기억나는 것은 '코난 더 바바리안'이라든지 '우주 전쟁', '화성의 존 카터', '아더 왕과 양키', 뤼팽, 홈즈, 엘러리 퀸 등등이다. 특히 '코난 더 바바리안'은 삽화도 무척이나 멋졌다.


  아마 지금의 내 독서 취향, 그러니까 SF 호러 스릴러 추리를 좋아하는 성향은 그 때 자리 잡은 것 같다. 그러고 보니 오라버니도 나와 독서 취향이 좀 비슷하다. 아마 같은 책을 읽고 자랐기 때문일 것이다. 반면에 책보다는 나가서 놀기 좋아하던 동생은 취향이 좀 다르다. 걔는 판타지나 무협을 좋아한다. 추리나 호러는 싫어한다. 왜 그걸 싫어하니, 동생아! 얼마나 재미있는데!


  그 때 이 책도 읽은 기억이 난다. 그 당시 제목은 ‘왜 에반스에게 부탁하지 않았지?’였다. 내용은 잘 생각이 안 난다. 그냥 두 주인공이 악당들에게 잡혀있을 때, 손에 땀을 쥐고 빨리 도망치라고 조바심을 냈던 것만 기억한다. 그게 제일 인상깊었나보다.


  절벽에서 떨어진 한 남자. 그는 ‘왜 에반스에게 부탁하지 않았을까?’라는 말을 남기고 사망한다. 그 남자의 마지막을 지켰던 바비는 남자의 품에서 아름다운 한 여인의 사진을 본다. 가족이나 애인이라 생각하고 말았는데, 나중에 신문에 발표된 사진과 자신이 본 것이 다르다는 점에 의심을 품는다. 그리고 누군가 그를 죽이려고 한 사건이 일어난다. 누가? 왜? 그는 어릴 적 친구인 백작의 딸 프랭키와 본격적으로 사건에 뛰어든다. 죽은 남자는 누구일까? 에반스는 누구일까? 무엇을 부탁하지 않았다는 것일까? 사건의 진상에 다가갈수록 그들의 신변에도 위협이 가해지는데…….


  책을 다 읽고 나서 등잔 밑이 어둡다는 속담이 생각났다. 딱 그런 상황이었다. 그들이 찾던 에반스가 바로……. 아! 여기까지. 역시 옛 조상님의 말씀은 하나도 틀린 게 없다. 삶의 지혜가 녹아든 그 말씀들을 그냥 구닥다리 옛 것이라 치부하지 말고, 피가 되고 살이 되는 얘기라고 생각하고 명심해야겠다.


  이번 이야기에서 바비와 프랭키가 사람의 외모에 혹해서 함정에 빠지는 장면이 나온다. 포와로나 미스 마플이 아닌, 그냥 평범한 남녀가 짝을 이뤄 사건을 해결하는 이야기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설정이다. 하긴 포와로 같은 경우에는, 헤이스팅즈에게 대놓고 경고하기도 한다. 예쁘다고 넘어가지 말라고. 그리고 미스 마플은 그냥 '난 다 알고 있지만 안 알랴쥼'이라는 태도를 보이고. 하여간 그 두 사람을 제외한 소설에서는 왜 그런 상황이 반복되는 걸까 생각을 해봤다.


  아마 크리스티는 사람들에게 이런 말을 해주고 싶었던 게 아닐까 싶다. 외적인 면에 넘어가지 말라. Beauty is but skin deep. 겉이 예쁘다고 속까지 착한 건 아니다. 이런 경고를 해주고 싶었나보다. 보통 사람들이 제일 속아 넘어가기 쉬운 것 중의 하나이니까 말이다.


  이 소설은 겉으로는 누구보다 잘생기고 예쁘지만, 속은 시커먼 인간들이 나온다. 자기들의 욕심을 위해서는 그 누구라도 이용하고 죽일 수 있는, 그런 심성의 소유자들이다. 무서운 세상이다. 외적으로 안 예쁘지만 착하고 선량한 사람들만 죽어나가니 말이다.


  다시 한 번 조상님의 혜안을 깨달으면서, 내적인 면을 볼 수 있는 인간이 되자고 다짐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윤리적 폭력 비판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주디스 버틀러 지음, 양효실 옮김 / 인간사랑 / 2013년 8월
평점 :
품절


 부제 - 자기 자신을 설명하기

  원서 - Giving an Account of Oneself: A Critique of Ethical Violence (2005년)

  저자 - 주디스 버틀러




  결론을 얘기하자면, 이 책은 어려웠다. 나 같은 초보자가 호기심에 덤빌 책이 아니었다. 예전에 읽었던 ‘폭력은 나쁘다고 말하지만’같이 약간은 말랑말랑한 내용일 것이라 추측한 것이 오산이었다.


  저자는 ‘나’라는 존재에 대해 어떻게 정의를 내려야하는지 현대 철학자들의 예를 들면서 얘기하고 있다. 제일 많이 언급된 것은 푸코, 아도르노 그리고 레비나스이다. 사실 학교에서 배운 철학가는 20세기 초반까지가 다였기에, 그 이후에 나온 사람들에 대해서는 기본 지식이 거의 없었다. 그래서 그런 사람들이 대거 등장하여 그들이 주장한 내용이 인용되면서, 거기에 근거한 저자의 주장이 펼쳐지는 내내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책을 읽다가 컴퓨터를 켜서 검색을 해본 건, 이번이 처음이었다.


  현대 철학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나’라는 것은 얼마 전에 읽은 ‘처음 시작하는 철학’에서 익혔기에, 그 부분은 어느 정도 따라가나 싶었다. 나와 남을 구별해야, 나라는 존재가 무엇인지 확실히 설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자면 나라는 개념의 정의를 어디까지 봐야하는지 문제가 생긴다. 저자도 그런 부분에 대해서 말하고 있었다.


  그 부분은 공감했다. 사람마다 자기만의 선이 있는데, 어떤 사람은 그 범위가 넓을 수도 있고 좁을 수도 있다. 그래서 사람마다 다른 선을 이해하지 못해 서로 오해가 생기고 다툼이 일어나는 것이라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내가 공감한다고 해서, 독서의 길이 쉬운 건 아니었다. 저자의 얘기하는 속도는 내가 따라가지 못할 정도로 빨랐고, 다루는 내용은 너무 광범위했다. 마치 ‘니가?’라고 저자가 말하는 것 같았다. 엉엉엉, 너무해요.


  ‘1장 자기자신에 대한 설명’ 초반에 약간 헤매다가 겨우 끈을 잡고‘ 2장 윤리적 폭력에 대항해서’로 넘어갔다. 그런데 여기서 맥락을 놓쳤다. 저자는 2장에서 ‘나’는 ‘너’가 없다면 아무 것도 아니고, 타자와의 관계 밖에서는 자신을 가리키는 일도 시작할 수 없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이건 즉, 나와 너는 분리할 수 없는 관계라는 것인지, 소위 말하는 ‘우리가 남인가?’라는 의미로 봐도 된다는 것인지 의문이 생겼다. 남에게 폭력적인 행위를 하면 그것은 곧 나 자신에게도 폭력적인 짓을 한다는 말인지 혼란이 왔다.


  그 덕분에 ‘3장 책임감’ 부분은 도대체 무슨 얘길 하려는 건지 잘 알 수가 없었다. 문단별로는 ‘아, 그렇구나. 이 말 멋지네.’하고 넘어가겠는데, 전반적으로 보면 무슨 말을 하려는 것인지 파악하기 힘들었다.


  책을 다 읽고, 문득 내가 애거서 크리스티의 단편집 ‘화요일 클럽의 살인’에 나오는 제인 헬리어가 된 기분이 들었다. 거기서 그녀는 이해력이 딸리는 여배우로 나오는데, 사건 해결 이야기를 다 듣고도 맥락을 파악하지 못해 엉뚱한 소리를 하곤 한다. 그 부분을 읽으면서 멍청하다고 그녀를 비웃었는데, 내가 그 상황이 되니 그녀의 심정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러니까 나 자신을 파악해야 하고, 너 없는 나는 의미가 없다는 것까지는 알겠는데 그게 책임감과 무슨 상관이라는 걸까? 한동안 고민할 거리가 생겼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