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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지
크레이그 맥닐 감독, 크리스틴 스튜어트 외 출연 / 비디오여행 / 2019년 8월
평점 :
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원제 - Lizzie, 2018
감독 - 크레이그 윌리엄 맥닐
출연 - 크리스틴 스튜어트, 클로에 세비니, 제이미 쉐리던, 데니스 오헤어
‘리지’는 간질이라는 지병이 있는, 보든 가의 둘째 딸이다. 보든 가는 동네 유지로 꽤 부유한 집안이었다. 하지만 아버지인 ‘앤드류’는 리지가 극장에 가거나 비둘기를 기르는 것을 못마땅해한다. 게다가 정체불명의 사람에게서 협박편지까지 받자 위기감을 느낀 앤드류는, 자신이 죽은 뒤에 딸들을 돌볼 후견인을 찾기 시작한다. 새엄마와 삼촌에게 모든 것을 빼앗기고 쫓겨날 것이라 불안해하는 리지. 그러던 중, ‘브리짓’이라는 하녀가 새로 들어오고, 리즈와 그녀는 신분을 뛰어넘는 친구가 된다. 하지만 앤드류는 젊고 어여쁜 브리짓을 강간하고, 이 사실을 알아차린 리지는 분노한다. 거기다 앤드류가 리지를 다른 곳으로 보내려 하자, 그녀의 분노는 극에 달하는데…….
이 영화는 1892년 미국에서 실제로 일어났던 ‘리지 보든 살인사건’을 바탕으로 하고 있다. 보든 가의 둘째 딸인 리지가 도끼로 아버지와 새어머니를 살해한 사건이다. 재판에서는 교양있는 명문가 출신이자 간질이라는 병이 있는 리지가 살해했을 리 없다는 무죄 판결을 받았지만, 사람들은 리지가 부모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영화 역시, 리지가 부모를 죽였다고 얘기한다. 이 사건은 그 당시 사람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고, 후대 사람들에게는 창작의 영감을 주었다.
이 작품은, 리지가 부모를 살해한 그 사건에 집중했다기보다는 왜 그런 선택을 내렸는지 동기와 과정을 천천히 느린 호흡으로 보여준다. 물론 다큐멘터리가 아닌 영화이기에, 많은 부분에서는 작가의 상상력이 개입되었다는 것을 잊으면 안 된다.
영화는 가부장제에서 벌어지는, 불합리하고 음울한 사실에 관해 얘기하고 있다. 언젠가 제인 오스틴의 소설 ‘오만과 편견 Pride and Prejudice, 1813’에서도 언급했지만, 딸들은 부모의 상속을 받을 수 없었던 시절이 있었다. 그 때문에 리지는 자신과 언니가 아버지의 재산을 상속받지 못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화를 내고 좌절했다.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새어머니와 비열한 짓을 일삼는 삼촌에게 다 빼앗기다니! 게다가 아버지는 리지의 유일한 친구라 할 수 있는 브리짓을 거의 매일 밤 강간했다. 그 사실은 가족들이 다 알고 있었지만, 입 밖으로 내놓을 수 없는 암묵적인 비밀이었다. 집안의 모든 권한을 가진 사람은 가장인 앤드류였고, 그가 하고자 하는 일을 막는다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기 때문이다.
리지와 브리짓은 처음에는 서로를 이해하지 못했지만, 점차 가까워지면서 서로를 구원으로 여겼다. 브리짓에게 리지는 글을 알려주는 선생님이었고, 리지에게 브리짓은 자신의 속마음을 털어놓을 수 있는 친구였다. 영화는 두 사람이 가까워지는 과정을 천천히 보여주었다. 사실 그 호흡이 무척이나 느려서, 이 작품이 포털에 적힌 대로 스릴러인가 아니면 로맨스를 가미한 성장물인가 착각할 정도였다. 그 정도로 둘의 감정 변화를 차근차근 보여주었다. 그 때문에 리지가 옷을 갈아입는 장면에서, 단추를 채워주는 브리짓의 손끝이나 그런 그녀를 바라보는 리지의 눈길은 노출이나 별다른 신체 접촉이 없어도 충분히 에로틱했다. 아마 두 사람의 감정이 단계를 밟아 차오르고 있는 도중이기 때문에 가능한 표현인 것 같다.
리지가 부모를 살해하는 장면은 잔인했다. 그런데 그와 동시에 차분했다. 어쩌면 그동안 모든 감정을 억누르고 살았던 리지의 조용한 분노를 보여주는 것 같았다. 살인을 미화하는 건 별로 좋아하지 않는데, 그럴 수밖에 없었던 리지의 절규와 그런 그녀를 말릴 수 없이 보고 있어야만 했던 브리짓의 아픔이 느껴지는 것 같았다. 뭐, 앤드류가 브리짓을 강간하지 않고 리지를 딸이라고 마음대로 휘두르려고 하지만 않았으면 그런 일은 없었겠지만. 사실 리지가 도끼를 휘두르며 피가 튀기는 그런 영화를 기대했는데, 뜻밖에도 심리극을 보게 되었다.
리지 역을 맡은 ‘클로이 세비니’의, 감정을 억누르면서 동시에 속으로는 분노가 활활 타오르는 것 같은 연기가 인상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