계간지 <창작과비평>을 전자구독으로 보고 있다. 마침 좋은 기회가 생겨 그것도 무료로 말이다. 이번 2015년 봄호의 주제는 ''자본주의 이후'를 상상하기'이다. 자본주의 체제의 세계질서 속에서 자본주의와 사회주의의 아슬아슬한 동거를 실험하고 있는 중국 '사회주의'를 조망하는 이남주의 글이 있고, 과연 '자본주의 위기'란 무엇인가,라고 묻는, 그래서 '자본주의의 위기'와 '자본주의가 초래한 위기'를 나누어서 볼 것을 이야기하는 백승욱의 글이 있다. 또 자본주의에 대한 여러 담론을 끊임없이 이야기하고 있는 유명한 사회학자 이매뉴얼 월러스틴과의 대담도 있다. 나는 이 주제와 관련된 글들은 다 읽고 실린 소설들을 읽고 있는 참인데, 김미월, 김사과, 이승우, 정지돈 작가의 소설 중에서 특히 이승우 작가의 소설 <신의 말을 듣다>가 인상적이다. 예를 들어 이 소설에 현재 세상의 여러 문제들, 그러니까 세월호 문제라든가, 권력비리 문제라든가 하는 것들을 연결지어 생각해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아무튼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 내용에 대한 것은 아니고 그 형식에 대한 것이다. 전자책으로 계간지를 본다는 것 말이다. 사실 전자책을 본다는 것은 이제 그렇게 더이상 낯설지는 않다. 처음 스마트폰으로 전자책을 읽을 때만 해도, 자주 페이지를 넘겨야 하니 적응하지 못하는 부분도 있었는데, 재작년에 태블릿을 구입한 이후에는 그런 불편함도 없어져, 독서생활에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상당히 높아졌다. 굳이 비율을 따지자면 이제 전자책이 차지하는 비중이 거의 30-40% 정도 된달까. 특히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대여하여 보는 것은 상당히 편리하다. 도서관에 일부러 들를 필요도 없으며, 언제든 생각나면 책을 대여할 수 있고, 언제든 터치 한번으로 반납할 수도 있다. 다만, 이번처럼 전자책으로 잡지를 구독하는 것은 처음인데, 생각해보면 잡지만큼 전자책에 잘 어울리는 범주도 없다. 어떤 특정 시기에 읽는 것이 중요한 잡지의 특성상, 빠르게 대응할 수 있는 전자책이라는 매체는 효과적이며, 또 글과 사진을 복합적으로 활용하는 형식적인 특성은 전자책에서 자유롭게 변형되어 구현될 수 있다(<씨네21>에서 한 때 발행했던 전자잡지에서 배우와의 실제 인터뷰 영상을 삽입하는 등의 다양한 형식을 시도했던 것처럼 말이다). 다만 단행본이든 잡지이든 가장 아쉬운 것은 아직까지는 전자책으로 볼 수 있는 책들이 종이책만큼 다양하지 않다는 것인데, 그것은 시간이 해결할 문제이니 크게 신경쓰지는 않는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종이책이 전자책에 결국 완전히 자리를 내주게 될 것인가의 문제는 조금 다르게 접근할 수밖에 없는데, 그것을 여러가지로 이야기할 수 있겠지만, 나는 결국 그것은 종이라는 것의 물질성(반대로 이야기하면 전자책이라는 것의 휘발성)과 관련이 있다고 생각한다. 즉 눈앞에 종이라는 실물의 물질이 존재하지 않는 것에 대한 어떤 허망함 말이다. 예를 들어 전자책을 광고하는 쪽은 하나의 기계에 수만권의 책을 담을 수 있다는 것을 장점으로 내세우지만, 그것은 어떤 사람들에게는 도리어 단점으로 작용할 수 있다. 즉 누군가는 그 수만권의 책을 내가 소유하고 있다는 것을 눈앞에서 실물로서 보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여러 권의 책이 아니라 한 권의 책에서도 마찬가지인데, 종이책을 읽을 때, 그 실제의 종이의 무게나 두께가 가진 묵직함이 주는 의미가 있다. 예를 들어 어떤 종이책의 페이지를 읽을 때, 남은 페이지의 무게와 두께가 주는 기분좋은(또는 부담스러운) 압박감이 있으며, 지나간 페이지의 무게와 두께가 주는 어떤 모종의 성취감이 있다. 독서에서 그 무게와 두께의 압박감은 결코 가벼운 것이라 할 수 없는데, 그것은 때로 어떤 책을 끝까지 읽게 하거나, 혹은 중도에 포기하게 만들기 때문이다. 그런데 전자책은 조금 다르다. 전자책에서도 물론 내가 책의 어느 위치에 있는지를 확인할 수 있지만 그 숫자는 어떤 압박감의 문제라기 보다는 단지 일종의 표시 기호에 지나지 않는다. 내가 두꺼운 책을 선택했든, 아니면 매우 얇은 책을 선택했든 전자책에서의 무게는 동일하다(아니 물리적으로 정확하게 말하면 다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인지할 수 있는 무게에서는 말이다). 그러나 종이책에서는 그것은 결코 같지가 않다.

 

(그러니 종이책과 전자책의 관계는 영화에서의 필름과 디지털의 관계와는 조금은 다르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실물로서 존재하는 필름과 단지 파일로서 존재하는 디지털은 언뜻 보기에는 종이책과 전자책의 관계와 비슷해 보이지만, 그것을 받아들이는 관객의 입장에서는 사실 두 가지 모두 휘발성의 의미로 다가오기 때문이다.)

 

어떤 극단적인 경우를 이야기할 수도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멕시코 국경에서 캐나다 국경에 이르는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PCT) 4286km를 걷기로 결심했던 셰릴 스트레이드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장 마크 발레 감독의 영화 <와일드>와 같은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을 짊어진, 자신보다 더 커보이는 셰릴(리즈 위더스푼)의 가방 속에는 세 권의 책이 들어 있었다. 월리엄 포크너의 소설 <내가 죽어 누워 있었을 때>, 에이드리언 리치의 시집 <공통된 언어의 꿈>, 그리고 PCT를 안내하는 지침서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 영화의 중반부 트레일을 시작한 셰릴에게 전문가는 조언한다. 짐을 줄여야 한다고. 그리고 <퍼시픽 크레스트 트레일 제1권>을 들어 앞부분을 찢어내 버린다(나머지 두 권도 책 좀 안 읽는다고 나치가 되는 것은 아니다, 라며 버리려 하지만 셰릴이 말린다). 이미 지나온 길이니 이 부분은 필요가 없다고 말이다. 이미 지나온 것의 무게. 그것을 담아갈 필요가 없다는 것을, 그 찢어내버린 책의 무게는 말해준다. 지나온 것은 버려야 한다는 것, 지나온 그것들을 고통스럽게 앞으로도 짊어갈 이유는 없다는 것(마찬가지로 셰릴이 나머지 두 권을 그대로 담아간다는 것은 앞으로도 매순간 그것의 무게를 절감한다는 것이 될 것이다. 그것은 그녀가 짊어갈 삶의 무게의 일부분이자, 아니면 삶의 지침이 될지도 모른다). 그러니 셰릴과 마찬가지로 우리도 이것을 스스로에게 물을 수 있다. 당신의 가방 속에 담겨진 두꺼운 취업 수험서가 당신의 어깨를 내리누를 때 그 불편한 무게감, 혹은 재미있지만 두꺼운 책을 꺼내들고 읽을 때의 전해오는 저릿저릿한 기분좋은 무게감은 같은가, 다른가. 전자책은 그 같고, 다름을 우리에게 인식시킬 수 있을 것인가.

 

물론 전자책을 읽을 때와 종이책을 읽을 때 변하지 않는 것도 있다. 내 경우에는 책을 읽는 습관이 그렇다고 할 수 있는데, 예를 들어 어떤 책이라도 중간부터 보는 경우가 거의 없는 습관같은 것들(심지어 잡지라도 말이다)이 그러하다. 그러니 전자책에서 필요한 부분을 찾아서 읽게 하는 여러 기능 같은 것(예를 들어 <창작과비평> 전자책에서 제공하는 것과 같은 목차를 클릭하면 그 부분으로 이동하게 하는 것)은 나에게는 별 의미가 없다. 혹은 책에 여러 가필을 할 수 있는 기능 같은 것도 마찬가지다. 이 <창작과비평> 전자책(을 보는 어플)은 여러 가필을 할 수 있는 기능을 제공하고 있는데, 책에 줄을 긋거나, 형광펜으로 표시를 하는 것은 기본이고, 특정 부분에 주석을 달거나, 자유롭게 필기를 하거나, 아니면 취소선으로 특정 부분을 지워버릴 수 있는 등의 다양한 기능을 보유하고 있다. 그런데 나에게는 그것이 별 의미가 없는 것이, 종이책이라도 그렇게 가필을 하는 경우는(수험 공부를 할 때 외에는) 거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전자도서관에서 빌린 책도 마찬가지인데, 전자도서관에서 책을 빌릴 수 있는 전자책 어플들도 읽는 이의 편의를 위해 여러 다양한 가필 기능을 제공하고 있다. 그런데 그것은 나에게는 조금 이상해보인다. 다시 누군가에게 돌아갈 책에 밑줄을 긋는다는 것 말이다. 비록 그것이 전자적 신호로 된 것이어서, 다시 반납되었을 때는 바로 없어진다고 해도, 그것은 도서관에서 빌린 책에 밑줄이 그어진 것을 보았을 때의 의아함과 마찬가지다.

 

책에 아무 흔적도 남기지를 원하지 않는 것. 어쩌면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는) 시간의 무게를 어떻게든 피하려 애쓰는 것일지도 모른다. 빛바랜 책에 남겨진 오래전 가필의 흔적을 보는 것은 나에게 그 가필이 이루어졌던 시간, 그리고 빛바랜 책과 현재의 나 사이에 놓여져 있는 시간의 무게를 다시 인식시키기 때문이다. 나는 그 무게가 주는 중압감을 애써 피하고 싶은 나약한 어린아이일지도 모른다. 그런데 전자책은 그런 시간의 무게를 인식시켜 줄 수 있을까? 수만년이 지나도 전자적 신호로 그대로 복원될 수 있는 전자책의 맨들맨들한 페이지는 종이책의 찢어질 것 같은 빛바랜 페이지보다 나을까. 혹은 전자책에서 얼마든지 교체할 수 있는 매끄러운 폰트들은 오래된 책의 이제 사용되지 않는 낡은 폰트들보다 나을까. 나는 화면을 주간모드에서 야간모드로, 혹은 페이지 색깔을 흰색에서 아이보리색으로, 혹은 폰트를 나눔고딕에서 윤명조체로 바꾸면서 생각한다. 클릭클릭, 터치터치. 그 터치들은 너무 가벼워서 이제 곧 날아갈 것만 같다. 날아가지 않도록 잊지 않고 '저장' 버튼을 누른다. 가벼운 터치로.

 

 

 

덧.

<창작과비평>의 경우 장점이 하나 있는데, 그것은 1년이라도 전자구독을 하면 구독기간 중에는 지나간 모든 호를 볼 수 있다는 점이다. 1966년 겨울에 발간된 이호철, 김승옥, 싸르트르, 밀즈, 백낙청, 유종호 등의 글이 실린 <創作과批評> 창간호라도 말이다. 내 경우에는 무료로 보고 있지만, 2만원이라는 1년 전자구독권이 그렇게 비싸다고는 할 수 없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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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선 2015-04-20 02: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목 보고 떠오른 말은 ‘내 마음은 나비처럼 가벼웠네’예요 그런데 찾아보니 조금 다르더군요 본래 제목은 <나의 사랑은 나비처럼 가벼웠다>예요 전자책 저는 아직 한번도 못 봤어요 이것도 보다보면 익숙해질지도 모르죠 책 잘 안 보는 사람한테 도움이 되지 않을까 싶은 생각도 듭니다 책을 가지고 다니기 싫어해서 읽지 않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지만, 이건 어디에서나 쉽게 볼 수 있잖아요 아니 책도 그렇군요 저는 어디에서나 안 봐서(못 보는 거군요), 이런 생각을 했습니다 없으면 아예 안 볼 테지만, 있으면 아주 조금이라도 보겠죠 그런 점이 좋다고 봅니다 잡지는 한달에 한번 나오는 것도 있으니 전자 잡지는 괜찮기도 하겠습니다

그래도 책은 종이로 된 게 좋죠 자연을 생각하면 걱정스럽기도 한데... 이건 다시 살려 쓰기를 잘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기도 합니다 그것 때문에 환경이 나빠질 수 있을까요 이런 말까지 하다니...

영화에서 다른 사람이 책을 찢는군요 자신이 지나온 길을 버려야 할까 싶기도 하네요 그것은 자신을 만들어온 것이기도 하니 버릴 수 없는 건데... 책으로 그런 것을 보여주다니, 그런 모습을 봤다 해도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 못했을 것 같습니다 새롭게 시작한다 해도 모든 걸 버려야 하는 건 아니겠죠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겠습니다 책도 그렇겠군요 그게 누군가한테 도움이 된다면 좋겠지만, 쓰레기가 된다면 좀 슬프겠습니다 그전에 정리를 하면 괜찮겠군요


희선

맥거핀 2015-04-20 16:39   좋아요 0 | URL
전자책의 장점은 아무래도 가지고 다니면서 편하게 볼 수 있다는 거겠죠. 가방이 무거워서 책을 여러권 담지 못할 때 그래도 태블릿 같은 거 하나 담아놓으면 안심이 되기는 합니다. 그런데 위에도 썼지만 아무래도 아직까지는 콘텐츠가 너무 부족해요. 특히 전자도서관의 책들은 소설 쪽은 그래도 나쁘지 않은데 다른 분야는 상당히 빈약한 편입니다.

개인적으로는 저는 전자책은 가격을 더 확 낮춰야 한다고 봐요. 구간은 그래도 차이가 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만, 신간의 경우에는 아직도 가격적인 매력이 별로 없죠. 이 가격의 적절한 균형점을 찾으면 저는 결국 독서시장의 대세는 전자책이 되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물론 위에 썼듯이 그렇다고 종이책이 사라진다고 보기는 어렵겠지만요.

영화에서 셰릴의 그런 것도 어떤 상징적인 부분의 하나이겠지요. 물론 말씀하신대로 버린다는 행동을 해도 실제로 버려지는 것은 아니겠습니다만, 무엇인가를 버린다는 행동을 본인에게 각인시키는 의미도 되겠지요.

사람은 가도 물건은 남는다...생각해보니 나중에 저 쌓여있는 제 책들은 어떻게 해야할까 생각해보게 됩니다. 누군가에게 물려줄 수 있을지..아니면 어느 헌책방에 팔아넘겨야 하는 신세가 될지..아니면 그도 아니라면 어딘가에 다 버려야하는 것인지..버리는 것보다 누군가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다면 주는 게 좋겠지요. 과연 가지고 싶은 사람이 있을까 싶습니다만..

아이리시스 2015-04-21 14: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버릴거면 저한테 버려요(애절). 아.. 근데 많지 않은 책인데도 저책들을 다 어쩌나 하긴 합니다. 결혼할 때.. 터전 옮길 때..저는 깔끔하게 소장할것만 하고 살고 싶거든요. 일단은 프로젝터로 영화볼 수 있는 방을 만들거라서 서재로 쓸 방이 있을지는 의문이지만 책도 집에 있긴 있어야 하니, 근데 소설을 주루룩 꽂아두는 건 좀 지양하고 싶고.. 예전에 말한 적 있잖아요, 책을 안 읽는 것처럼 보이면서 다 읽는 사람이고 싶고, 집에 책을 최정예로 소수만 소장하면서도 세상 책 다 읽는 사람이고 싶다는 말을 한 적이 있던 것 같은데..(긁적긁적) 음악도 영화도 마찬가지입니다..

전자책으로 계간지도 볼 수 있구나..(큰 깨달음) 그러나 저는 태블릿 없습니다.. 안살거야(단호). 요샌 책이 풍년이라, 그거 읽을 시간도 부족해서, ebook을 펼쳐본 게 한참 전이에요. 빨강머리앤 세트랑 매그레 시리즈 세트랑 객주 뭐 그런것들 읽고 있는데. 저도 전자책/종이책 소장 분야가 각기 따로 있는데, 전자책 선택폭이 좁은 게 최대 단점이고, 당연히 가격도 매리트가 없어요. 이번주에 캠핑 가는데 물론 들고갈 그릴 요리/캔맥주/와인/치즈도 잔뜩 쟁여놨지만, 그냥 틈틈이 전자책 볼까 도서관 가서 제일 읽고 싶은 신간을 빌려갈까, 집에 있는 세계문학전집 한 권을 들고갈까 이번주에는 내내 고민 됩니다...(대체 이런 걸 왜 고민하나요?)

그거 알아요? 맥거핀님 신간평가단 적중률 100%............... :)

맥거핀 2015-04-21 23:20   좋아요 0 | URL
으하하 그래요. 이번달에는 두 권 다 맞췄어요. 사실 저 위에 리뷰 쓴 우리 동네 아이들 읽기가 싫어서 질질 끌다가 지쳤어요. 왜 그렇게 진도가 안 나가는지...미안한 말이지만 솔직히 너무 재미가 없어요.

근데 제 책 아이리시스님한테 다 버리면 아이리시스님 처치 곤란일텐데? 막 쓰잘데기 없고, 아무도 안 읽을 것 같은 책만 골라서 버려야겠다(사악). 저도 책들 볼 때마다 늘 의문이 들어요. 아니 읽지도 않을 걸 맨날 왜 가지고 있지 그러면서요. 이사가고 할 때마다 참 이거 곤란할때가 많은데, 그 양은 점점 늘어만 가니 그것 참 문제입니다. 책이 최고의 인테리어라고는 하지만, 그것도 잘 정리 되어있을 때 이야기죠. 제 책장은 늘 지저분..합니다. 근데 그거 알아요? 프로젝터로 영화볼 수 있는 방 만들려면 돈 되게 많이 드는거.

그런 방 만드시기로 결심한 분이 태블릿은 어째 안사시는지요? (단호한 물음) 안 보게 될 것 같아도 사면 또 보게 되요. 그러니 사세요, 두 번 사세요(태블릿 업자 아님). 그거 참 책 좋아하는 사람들은 늘 공감하는 부분이지요. 여행짐 꾸릴 때 가장 고민하게 만드는 부분은 이 여행에서 실패하지 않을 책이 어떤 책인지를 선정하는 일이이라는 거. 그렇다고 여러권 담자니 손이 무겁고, 이걸 빼자니 이런저런 이유로 걸리고...그런데 여행갔다 오고나면 전혀 읽지 않은 채로 그대로 들고 오니 그것도 참 미스테리합니다. 여행갈 때는 그냥 재미 없는 책이 제일입니다. 왜냐하면 너무 재미있는 책을 들고가면 여행을 즐기는 대신, 책만 보다 오니까요.

2015-04-21 23: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이리시스 2015-04-22 00:25   좋아요 0 | URL
아.. 사악하네요(😥) 그러니까 그게.. 실용성이 없을 것 같고 또, 프로젝터는 지금 꾸밀게 아니고 불분명한 미래의 일이고 또,, 그냥 막 던진겁니다ㅠㅠ 일단 그방이 커야 되는데 그게 불가능해요. 돈없고 좁아서 그냥 프로젝터만 벽에 쏘는거 아닌가 모르겠어요ㅎㅎ

진짜 큰맘먹고 외출할때 책 들고가도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멍때릴때가 많아요 저는. 여행가면 백발백중 고대로 다시 들고올텐데ㅎㅎㅎㅎㅎㅎ 이걸 알면서 저걸 왜 고민하는지 참 한심해요
ㅠㅠ

맥거핀 2015-04-25 15:39   좋아요 0 | URL
크크크 아이리시스님 한심해요, 한심해. (예전에 저 멍청하다고 놀린 것 복수..)

아이리시스 2015-04-25 15:42   좋아요 0 | URL
그렇다고 한심이한테 한심이라고 그리 금방 인정하면 듣는 한심이 반발하지말입니다..(쬐려봄)

아이리시스 2015-04-21 2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근데 우리동네아이들은 재미가 없게 생겼지만 재미가 있었으면 하고 기대했었는데 맥거핀님이 재미가 없다고하니 재미없어보여 힝ㅠㅠ 중고서점에서 유일하게 아쉬웠던게 예전판 우리동네아이들이었는데 그건 글자크기와 글꼴 등 편집이 너무 별로여서 빌려서도 못 읽겠다고 생각했었거든요. :) 우리동네 아이들에게 대체 뭔일이 있길래 지루한지 모르지만 저는 리뷰를 기대할게요^^

2015-04-22 00: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5-04-25 15:36   좋아요 0 | URL
일단 말투가 너무 옛날식이라 약간 진도가 좀 안나가요. 중간에 번역이 약간 튀는 듯한 느낌도 있고..맥락이 잘 안 맞는듯한 느낌도 있구요. 그리고 민음사는 일단 판형 크기부터가 저는 영 익숙치가 않아서..그래도 `55세부터 헬로라이프`가 생각보다는 읽을만해서 좋았습니다.

아이리시스 2015-04-25 15:44   좋아요 0 | URL
어쨌거나 민음사 두권을 평가단으로 읽는건 부담이 될것같아요. 저라면 포기했;; 수고했어요 토닥 궁금했던 책이니까. 류는 이제야 좋다는 평가를 받네요 신기 :)

맥거핀 2015-04-25 15:49   좋아요 0 | URL
아이리시스님 쬐려보다가 토닥하니까 왠지 무섭다...이번에 인문서평단 보니까 막 700쪽짜리 롤랑 바르트 책 읽던데, 이 정도는 참고 읽어야겠죠. 그래도 저도 2권 짜리는 부담되서 싫어요.^^;

아이리시스 2015-04-23 15: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기기는 태블릿인거죠? 제가 태블릿을 본적이..아..예전은 그렇다쳐도 바로 얼마전에 친구가 보여줬었는데 내꺼아닌건 대충보기때문에ㅠㅠ 첨엔 맥거핀님 전자책보는기기(아 요새 이름 잘 기억안나요)도 샀구나 했는데,

맥거핀 2015-04-25 15:38   좋아요 0 | URL
태블릿인데 싸구려입니다. 그래도 저는 태블릿 가지고 뭐를 많이 하는 것 아니니까 인터넷 쓸 수 있고, 동영상 좀 보고, 이북 쓸 수 있으면 그것으로 만족합니다. 요새 그렇게 비싸지 않은 태블릿들이 많아요. 해외구매를 하면 더 싸질 수도 있고..제 생각에는 전자책 전용 기기보다 이런 쪽이 나은 것 같습니다.

아이리시스 2015-04-25 15:45   좋아요 0 | URL
아 그러면 사고싶지말입니다..지를땐 과감하게ㅎㅎ 근데 말투이상 ;;

맥거핀 2015-04-25 15:50   좋아요 0 | URL
어느 부대에서 나오셨는지 궁금한데 말입니다. 지를 때는 질러요~
 

 

 

 

 

이미테이션 게임, 모튼 틸덤, 2015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튜링 테스트(Turing test)는 앨런 튜링의 모방 게임(imitation game)이라는 아이디어에서 비롯된 것으로 일반적으로 기계와 인간이 채팅을 하는 것으로 이루어진다(그러니까 사실 튜링 테스트와 모방 게임이 정확히 같은 것이라 할 수는 없다). 인간이 어떤 대상과 5분간 채팅을 하여 그 대상이 인간인지 기계인지를 판별하는 것이다. 영화 <이미테이션 게임>은 전체 영화의 구조를 이 튜링 테스트와 비슷하게 만들어 놓고 있다. 영화의 시작부에서 우리는 앨런 튜링(베네딕트 컴버배치)의 목소리를 듣는다. 그는 동성애 혐의로 경찰서에 소환되었으며, 형사에게 일종의 튜링 게임을 제안하는 중이다. 내가 하는 이야기를 주의깊게 들을 것, 그리고 다 들을 때까지 어떤 판단도 내리지 말 것. 그리고 그는 영화의 말미에서 형사에게 묻는다. 내가 기계인가, 인간인가. 혹은, 내가 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

 

이렇게 앨런 튜링의 삶(전쟁영웅인가, 범죄자인가)과 그의 이론(기계인가, 인간인가)을 등치시키는 것처럼 영화는 전체적으로 앨런 튜링과 그의 이론을 교묘하게 등치시킨다. 예를 들어 사람들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대화의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 앨런 튜링(물론 그가 농담에 가장 취약한 것은 농담에서는 표면적인 발화 내용보다 그 안에 담겨진 숨은 뜻이 훨씬 중요하기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튜링이 군과 관계를 맺게 되는 것도 이와 묘하게 연결된다고 할 수 있는데, 군에서의 대화란 그 반대로 대부분 표면에서 이루어진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처럼, 독일의 암호해독기 이니그마에 대항하기 위해 만들어진 튜링의 크리스토퍼(영화 속에서는 튜링이 그가 사랑했던 친구의 이름을 따서 만든 것처럼 나오지만, 본래는 다른 이름이었다고 한다)는 이니그마가 암호를 생성해내는 키를 파악하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리고 튜링이 그 돌파구를 친구 크리스토퍼에 대한 사랑에서 찾는 것처럼, 이 이니그마의 해독에 대한 실마리가 열리는 것은 한 독일군의 여자친구에 대한 사랑에서 비롯된다(영화 속 설정을 따른다면 말이다). 그것은 영화의 중후반부에서 다시 비슷한 등치의 형태로 반복되는데, 이는 일종의 진화 양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즉 독일 이니그마의 암호를 깬 영국 측에서 그 암호를 깼다는 사실을 숨기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면, 튜링은 위험에서 조안(키이라 나이틀리)을 보호하기 위해 거짓말을 한다. 그리고 그 거짓말은 튜링의 입장에서는 일종의 진화이다. 튜링은 예전에도 친구 크리스토퍼를 모른다고 거짓말을 한 적이 있지만, 그 거짓말은 누가 보더라도 거짓말이었다. 그러나 적어도 이번의 거짓말에서는 조안의 스매싱을 끌어내는 데에는 성공한다. 다시 말해서 이 등치는 튜링의 진화를 보여주기도 하지만, 동시에 튜링이라는 유사기계의 진화를 말해주기도 한다. 거짓말을 하는 기계, 그럼으로써 마치 인간인 것처럼 믿게하는 기계. 그것이 튜링 테스트의 본질이 아니던가. 

 

  

그런데 물론 여기에는 두 가지의 문제가 남아 있다. 하나는 그것이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 것인가의 문제. 즉 기계의 사고는 거의 인간과 유사한 수준까지 올라설 수 있는가의 문제. 실제로 작년 유진 구스트만(Eugene Goostman)이라는 인공지능이 최초로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다고 떠들썩했지만, 그것이 실제로 통과한 것인지, 더 나아가 튜링 테스트를 인간과 기계의 구분을 시험하는 리트머스로 쓸 수 있는지에 대해서까지 의문이 제기되고 있다(튜링 테스트의 대안들도 나오고 있다). 다시 영화로 돌아온다면, 영화에서 이 문제를 정확하게 다루고 있지는 않지만, 말미에서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다루는 것을 통해 어떤 짐작을 할 수는 있다. 영화의 말미는 쓸쓸하다. 그것은 앨런 튜링의 남은 삶을 묘사하는 방식으로도 그렇고, 영화 마지막에 붙은 에필로그로도 그렇다(그들이 남은 모든 자료를 불태우는 것). 아니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그래서 앨런 튜링은 형사와의 튜링 테스트를 통과했는가? 그것은 결국 실패에 가깝다고 말할 수 있는데, 형사가 그것을 자신이 판별할 수 없다고 이야기하는 것은, 불길한 징조이다. 왜냐하면 튜링은 그 앞에서 인간으로서 마주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의 튜링은 삶에서도 결국 인간들 사이에 섞이는 것을 실패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의 문제이다. 영화 속에서 어린 시절의 튜링은 친구들에게 괴롭힘을 당한다. 아니 괴롭힘을 넘어서서 일종의 혐오의 형태라고 볼 수도 있을 것이다. 튜링은 그것을 그가 다른 사람들보다 똑똑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하지만, 크리스토퍼는 그에게 말해준다. 그것은 그가 다른 사람들과 다르기 때문이라고. 즉 인간은 많은 부분에서 '다른 것'을 혐오한다. 동성을 좋아하는 것, 말을 더듬는 것, 지나치게 탐욕스러운 것, 뛰어나게 똑똑하거나, 눈에 띄게 어리석은 것, 키가 너무 큰 것, 키가 너무 작은 것, 너무 뚱뚱한 것, 너무 마른 것 등등...셀 수도 없는 수많은 '정상분포에서 벗어난 것'들을 혐오한다. 그것은 어쩌면 우리가 인간이라는 같은 종이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예를 들어 '돼지'에게 너무 뚱뚱하다고 욕할 사람은 없을 테니 말이다). 그런데 그것은 그 역을 의미하기도 하지 않을까. 즉 '기계'라는 다른 종의 문제에서는 이것이 흥미롭게도 반대로 작용한다. 다시 말해서 기계가 너무 인간과 비슷해지면 어느 순간 우리는 혐오감을 가지게 된다는 것이다. 그것을 굳이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로봇이 사람과 비슷해지면 질수록 인간의 혐오감이 증가하다가 그것이 어느 순간 변곡점을 넘으면 다시 급격하게 그 혐오감이 줄어든다는 이론)와 같은 이론으로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우리는 그간 수많은 영화에서 이 언캐니 밸리의 골짜기에 빠져든 사람들의 이야기를 봐왔기 때문에 그것이 그렇게 낯설지는 않다(다만 이것이 '골짜기'의 형태라고 확신할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아직까지 이렇게 인간과 거의 유사한 형태로까지 로봇의 진화가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 혐오감을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이것은 다시 적어도 다른 두 가지를 나에게 생각하게 만드는데, 먼저 하나는 영화라는 매체에서 작용하는 언캐니이다.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일종의 이미테이션 게임, 혹은 튜링 테스트이다. 즉 영화는 현실을 모방하여 모든 환영을 작동시킨다. 환영은 그들이 실재한다고 계속 거짓말을 하며, 관객은 그 거짓말에 속아넘어간다. 아니 기꺼이 속아넘어감으로써 그 거짓말을 즐긴다. 즉 이 때 흥미로운 것은 관객은 이 거짓말에 동참하기는 하지만, 이것이 거짓말이라는 사실을 충분히 인식하고 있다는 것이다. 튜링 테스트로 비유하자면 네가 기계인 것은 알지만, 그 채팅이 즐겁기 때문에 네가 인간이라고 믿어준다랄까. 그런데 지금까지 영화는 그 반대되는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던 것 또한 사실이다. 무성에서 유성에서, 흑백에서 칼라로, 2D에서 3D로 혹은 더 나아가 4D로. 영화는 어떻게 든 현실이 되려고, 아니 기계는 어떻게든 인간이 되려고 애써왔다. 그렇다면 그것이 자꾸 현실이 되려고 발버둥칠 때 그 혐오감은 어떻게 극복할 것인가. 다시 시간의 방향을 되돌리는 것, 혹은 기술적인 발전을 애써 무시하는 것이 그 해답이 될까.

 

다른 하나는 현실에 존재하는 혐오와 같은 것이다. 영화 속에서 형사는 튜링에게 묻는다. 기계도 생각을 합니까? 여기에 튜링의 대답이 흥미로운데, 그는 그것이 어리석은 질문이라고 형사에게 답한다. 기계는 인간처럼 생각할 수 없다, 왜냐하면 기계는 인간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는 되묻는다. "그런데 어떤 것이 당신과 다르게 생각한다고 해서, 그것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요? 그것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겁니다." 이는 기계와 인간의 경우지만, 그것은 영화에서 암시하듯이 인간들 사이의 혐오를 생각하게 하기도 한다. 예를 들어 우리 사회에 만연한 혐오 같은 것들. 어쩌면 우리의 만연한 혐오는 쉽고 달콤한 유혹에 굴복했기 때문이 아닐까. 사이코패스, 일베, 혹은 종북과 같은 것으로 낙인찍고 싶은 유혹들, 그것이 달콤한 이유는 그것은 너무나도 간편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는다, 그저 제정신이 아닐 뿐이다,라는 낙인은 너무나도 간편하며 동시에 우리의 혐오의 욕구를 만족시켜 준다. 우리는 동일하게 여기에 튜링처럼 되물을 필요가 있다. 그들이 다르게 말하고 다르게 행동한다고 해서, 그들이 생각하지 않는다고 봐야할까. 그들은 단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더욱 시급한 것은 그들에 대한 혐오나 빠른 격리보다도, 그 다른 생각이 무엇인지를 찾아내려는 노력이 아닐까. 왜냐하면 혐오와 격리는 번질 수밖에 없는 속성이 있으며, 우리는 다른 모든 사람을 혐오하거나 다른 모든 사람을 격리할 수는 없기 때문이다.

 

오늘, 만연한 수많은 혐오스러운 말들을 보며, 그 속에 존재하는 나의 혐오와 당신의 혐오, 이중의 장벽을 뚫고 그 안에 존재하는 것들에 대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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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5-04-16 17: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르다고 낙인 찍는 것은 정말 간편하지요, 이해하거나 자기 주장을 굽히고 타협하지 않고 자신이 위에 있다고 고집하면 되니까요..

저도 곧 이 영화 보려구여
vod 가격이 아직 마넌인지라 ^^

맥거핀 2015-04-17 14:48   좋아요 0 | URL
네..정말 그렇죠. 근데 요즘에는 심해도 너무 심해요. 그저 당신은 종북, 당신은 일베, 그걸로 끝이죠. 최소한도의 토론도 점점 이루어지기 어렵게 되어가고 있습니다. 모두들 각자의 프레임 안에 갇혀살죠. 물론 저라고 그렇게 다르지 않구요.

좋은 영화고, 뭐 다 떠나서 일단 재미있습니다.^^ 아직 극장 개봉중이라서 그럴거예요. 곧 내려갈 것 같기는 합니다.

2015-04-16 23: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17 14: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4-18 00: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 이야기를 거의 라디오 방송에서 듣기도 합니다 지금 나오는 영화를 말할 때가 많고 가끔 예전 영화를 말하기도 합니다 왜 이런 말을 했느냐 하면, 이 영화 이야기를 들어서죠 제가 듣는 건 두곳인데 하나는 영화음악이고 하나는 책과 영화군요 영화음악인데 음악보다 영화 이야기를 더 귀 기울여 듣는 것 같습니다 이야기 많이 해주는 것도 아닌데... 전에도 말한 적 있지만, 방송을 잘 들을 때도 있고 그냥 흘려들을 때도 있습니다

사람은 다르게 보이는데 거기에 보통이라는 게 있다니, 비슷비슷한 사람이 더 많기에 거기에서 아주 다르게 보이면 따돌리기도 할지도... 그런데 자신이 정말 보통이라고 할 수 있을지 하는 생각이 지금 듭니다 두드러져 보이려고 애쓰는 사람도 있지만, 눈에 띄지 않으려고 하는 사람도 있잖아요 다른 걸 틀리다고 말하지 않아야 할 텐데... 저도 그럴 때가 없는 건 아닐지도 모르겠습니다 달라도 서로 알려고 하면 조금은 알 수도 있겠죠 좀 어려운 일이지만... 알 수 없다 해도 그렇구나 하고 있는 그대로 받아들여도 괜찮겠죠

시대를 잘 타고 나는 사람이 있는가 하면, 시대를 잘못 타고 나는 사람도 있죠 튜링은 시대를 잘못 타고 났죠 하지만 지금은 다시 보게 돼서 다행이네요 생각하는 것도 남들보다 많이 앞섰더군요

한주가 가고 있습니다 또 주말이라니... 주말 잘 보내세요


희선

맥거핀 2015-04-20 16:28   좋아요 0 | URL
그래도 어떻게 생각해보면 튜링이 시대를 잘못 태어난 덕분에 후대의 연구에 큰 기여를 했다고 볼 수도 있을 것 같아요. 아무튼 말씀하신대로 튜링의 생각은 당시에 획기적이었죠. 영화에서는 튜링의 개인적인 특성이 그의 연구와 관련이 깊은 것처럼 나오는데, 실제로 어땠는지는 잘 모르겠습니다.

저도 영화음악 방송은 종종 들어요. 최근에는 팟캐스트로 이주연의 영화음악 들을 때가 있어요. 그런데 팟캐스트로 방송을 들으면 음악이 다 제대로 나오지를 않아서 그게 조금 단점이기는 합니다만, 영화이야기 듣는 것이 재미있어서 가끔 듣습니다. 예전에 김혜리 기자가 라디오 게스트로 출연할 때도 가끔 들었구요. 그런데 이야기로 듣는 것과 실제로 보는 것은 느낌이 다를때가 많죠. 아무래도 영화는 눈으로 보는 것이니까요.
 
소설 주목 신간 작성 후 본 글에 먼댓글 남겨 주세요.

 

 

신간 추천 글을 써야할 때마다 깜짝 놀란다. 벌써 한달이 지나갔단 말인가. 다들 한달을 나름의 방식으로 카운트하겠지만, 내 경우에는 신간평가단을 할 때는 이것으로 카운트를 한다. 그러니까 추천글을 쓰는 것이 한달의 시작이며, 책을 받을 때에는 중순이고, 리뷰를 써야한다는 압박에 시달릴 때는 월말이 가까워온다는 얘기다. 아무튼 시간은 그렇게 가고 있는 것 같다. 겨울은 이제 더 안 오겠지 싶으면, 눈치 없이 계속 말을 거는 끌리지 않는 소개팅 상대의 메시지같고, 봄이라는 것은 앞모습이 어떻게 생겼는지 자세히 보기위해 고개를 들라치면, 어느덧 곁을 휙 스치고 지나가 뒷모습 밖에 보여주지 않는 길거리미녀 같기만 하다. 집 앞에 나갈 때마다 가끔 만나는 얼룩고양이 은주씨(앙칼진 눈빛이 첫사랑 은주씨를 닮았기에 그렇게 이름을 붙였다...는 농담이고, 처음 만났을 때 전신주 뒤에 숨어서 나를 지켜보고 있기에 숨을 은(隱)자에 기둥 주(柱)자를 붙였다)가 이제 좀 따듯한지 햇볕을 받으며 뒹굴거리는 희귀한 광경도 어제 보았으니 시간이 가고 그래도 조금씩 날이 따듯해져 가고 있기는 하나 보다.

 

지난 달에는 사실 마땅히 추천할만한 책이 별로 없어 난감했다면, 이번달에는 괜찮아보이는 책이 너무 많아서 난감하다(물론 그렇게 '보이는' 것일 뿐이지, 실제로 책을 읽고나서는 전혀 다른 판단을 갖게 되는 경우가 많지만). 아무튼 어떻게 난감하든지 간에 5권의 책을 골라내야 하는 것은 사실이고, 어쩔 수 없이 이럴 때에는 평소에 사용하던 것보다 조금 더 세심한 취향의 잣대를 들이대야만 한다. 그런데 골라놓고 보니 왠지 다 어두운 이야기 같은 것이, 어두운 이야기가 많이 나와서 할 수 없이 그런건지, 아니면 나의 일반적인 취향에 가려져 있던 취향의 밑바닥에는 어두운 요소가 더 많은 것인지 알 수가 없다(하기는 어떨 때는 한없이 밝고 평화로운 이야기에 끌리고, 또 어떨 때에는 야하고 변태적인 이야기에 끌리며, 또 다른 때에는 어둡고 우울한 이야기에 끌리니 그저 종잡을 수 없는 취향이다. 리모노프의 말을 빌리자면 "개떡같은 취향이지, 한마디로.")

 

개떡같은 취향이 개떡같이 골라낸 이번 달의 다섯 권.

 

 

 

그것이 나만은 아니기를, 구병모, 문학과지성사

 

제목이 의미심장하다. 뉴스를 보며 우리는 하루에도 얼마나 수없이 속으로 이말을 되뇌이는가. 예고없이 찾아오는 만연한 재앙을 피하는 것이 삶의 목표가 되어버린 가난한 시대. 구병모가 날카롭게 잘라낸 현실의 조각들은 이 가난한 시대에서, 이 말들을 부적삼아 되뇌일 수밖에 없는 가난한 마음들을 한걸음 물러서서 들여다보게 해줄까. 

 

 

고통의 해석, 이창복, 김영사

 

물론 재앙과 고통이 예고없이 찾아왔던 것은 오늘날의 시대만은 아니다. 그리고 훌륭한 작가들은 삶 속에서 동반될 수밖에 없는 고통의 양상을 세밀하게 추적해 그의 근원을 늘 밝히고자 하였다. 괴테, 카프카, 브레히트, 하이너 뮐러 등 독일문학의 중추를 이루는 작가들의 작품을 해석하는 작업을 통해 그 근원에 있는 것을 살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익사, 오에 겐자부로, 문학동네

 

작가의 자전적인 내용이 들어간 소설에는 아무래도 더 관심이 간다. 그의 문학에 담겨져 있는 창작의 원천을 조금이라도 엿볼 수 있을까 기대하게 되기 때문이다. 오에 겐자부로,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아버지의 이야기. 읽는 것을 주저할 이유가 없는 책이다.  

 

 

방랑기, 하야시 후미꼬, 창비

 

위의 책과 같이 자전적 내용의 소설이다. 가난한 여자 혼자 세상을 사는 것이 녹록한 일이 아닌 것은 요즘에도 그러한데, 1920년대 일본 사회에서는 어땠을까('방랑기'라는 제목만 보아도 말이다). 나루세 미키오의 동명의 영화(특히 주인공 역을 맡은 다카미네 히데코의 연기는 명연이다)를 아주 좋게 보았는데, 반가운 마음에 집어들게 되는 책이다.

 

 

별을 먹는 사람들, 로맹 가리, 마음산책

 

여러 복잡다단한 이유 속에서 선택된 마지막 책. 로맹 가리라는 이름도 이름이지만, 그보다는 내용이 더 흥미로워 보인다.  여기서 말하는 ‘별’은 마스탈라라는 가상의 지역 특산물인데, 코카열매보다 강력한 효과를 자랑하는 마약의 한 종류이다. 그러니까 별을 먹어야만 버텨낼 수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 제정신으로 견딜 수 없는 세상의 모든 비참함에 대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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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5-04-02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추천 글을 써야하는 심정, 이해합니다. 그 덕분에 저는 따로 신간평가단 공식 블로그에 접속하지 않아도 이웃님이 추천하는 다양한 분야의 신간 도서를 확인할 수 있어서 좋습니다. ^^;;

맥거핀 2015-04-03 23:40   좋아요 0 | URL
cyrus님이야 워낙 다방면에 관심이 많은 분이시니..cyrus님도 해보신 경험이 많으셔서 잘 아시겠지만, 신간추천이라는 게 즐거우면서도 참 여러가지로 고민되는 일이기는 하죠.

아이리시스 2015-04-02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구병모,로맹가리는 가능성이 있지 않나요? 진짜 재밌는 책 읽으며 밤새고싶은 밤이네요. 비가..바람이..ㅎㄷㄷ

맥거핀 2015-04-03 23:42   좋아요 0 | URL
<익사>가 꽤 추천이 많아서 될 것 같기도 하네요. 이번에는 2권 모두 제가 추천한 책 중에서 되었으면 좋겠다는 소박한 바람을 가져 봅니다.^^

아이리시스아님 2015-04-05 02:06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거 완전 대다난 바람인 것 같아요. 잉여놀이를 꽤 했는데도 시간이 아직 2시네요. 내일은 일요일인데 꽤 피곤한 하루일 것 같은 예감이 들어요. 좋은 주말 밤~^^

맥거핀아님 2015-04-09 15:41   좋아요 0 | 수정 | 삭제 | URL
그래도 저는 맥거핀님이 원하시는 책이 되었으면 좋겠군요. ㅋ 그러나저러나 맥거핀님 서재에 글도 잘 안 쓰시고 어디서 뭐 하시는지..

희선 2015-04-03 01: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루하루는 그렇게 빨리 간다는 생각이 들지 않지만, 한주 가는 건 빠르고 한달 가는 건 더 빠릅니다 어느새 올해 사월이 왔으니까요 늘 내일로 미루는 건 여전합니다 시간으로 보면 내일도 아닌데... 버릇은 고치기 어려운 거군요 어떻게 해야겠다 생각하는 내일은 결코 오지 않을지도 모르겠군요 하지만 앞으로도 내일부터, 할 것 같습니다 모르는 것보다 알면서 그러는 건 더 안 좋을 텐데... 오늘부터, 하는 날이 오기를...

전봇대 뒤에서 엿보는 얼룩냥이, 이름으로 하기에는 좀 길까요 은주라는 이름 설명을 보니... 말 그대로군요 햇볕 받고 뒹굴거리는 모습 귀엽겠네요 저는 그런 것보다 차 밑으로 들어가는 모습을 가끔 봤네요 제가 다니는 때는 고양이가 잘 안 다니는 때인지도...

구병모, 책은 아주 조금 읽어봤는데 예전에 남자 작가인지 알았습니다 책을 읽었다 해도 그렇게 잘 읽지 못했네요 로맹 가리 책에 나오는 별이라는 거 어디선가 본 것 같기도 합니다 정말 본 것인지, 처음 본 건데 예전에 본 것 같은 건지 저도 잘 모르겠습니다 가끔 처음 본 건데도 언젠가 본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죠 여기저기 떠돌아다니는 것은 우연이었지만, 그게 자신의 숙명처럼 된 건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책소개를 조금 보니, 자유라는 말이 있더군요

아직 책 안 읽었는데, 그 책에 ‘19세 이상’이라는 말이 있더군요 예전에 나온 것하고 다른 데서 나온 것은 아닌데... 전에 그것을 보고는 나중에 책 읽고 말해볼까 하다가 어제 말했습니다 고객센터에, 그랬더니 그게 없어졌더군요 별거 아니지만... 이상한 게 있으면 말해봐도 괜찮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하나마나 할 때도 있지만...


희선

맥거핀 2015-04-03 23:52   좋아요 0 | URL
구병모 작가는 그런 얘기 수도 없이 많이 들었을 것 같아요. 저도 작가의 이름을 처음 들었을 때 당연히 남자작가이겠거니 하고 생각했었죠. 글쎄요. 그렇게 생각해서 그런지 모르겠지만, 글도 약간 남성적인 느낌이 있기도 해요.

예전에 그런 얘기 한 것 같은데, 우리 동네에는 고양이가 많이 다녀요. 얼룩고양이도 있고 검은 고양이도 있고, 못생긴 고양이, 잘생긴 고양이 다양한 고양이가 있습니다. 그 중에 제가 이름을 붙여준 것은 그녀석 하나 뿐이예요. 우리 아파트 동 근처가 녀석의 나와바리인지 주로 이 근처를 어슬렁 거립니다. 길냥이들이 대체로 조심성들이 있는 편인데 녀석은 꽤 대담해요. 처음에는 전신주 뒤에 숨어 있더니 요새는 뭐 별로 해가 되지 않을 인간이군, 싶었는지 그저 막 앞에서 왔다갔다 합니다.

그렇죠. 하루의 시간은 참 왜이리 안가나 싶을 때도 있는데, 한달, 일년의 시간은 너무나도 빨리 가는 것 같습니다. 올해도 벌써 4분의 1이나 지나갔잖아요. 저도 언젠가부터 오늘 할 일을 내일로 미루자, 이런 버릇이 생겨서 해야할 일을 금새 미뤄버리고는 해요. 아니 내일 정도가 아니라 마음 편하게 며칠 뒤, 이럴 때도 많구요. 저도 조금 그런 버릇을 버려야 하는데...

다른 것도 그렇지만 영화나 책 같은 것도 생각했을 때 봐야하는데 자꾸 미뤄버리고는 해요. 책은 조금 미뤄도 볼 수 있지만, 영화는 시일이 지나면 영화관에서 상영을 하지 않게 되니 제 때 보는 게 좋기는 한데 말이죠. 물론 그 이후에 집에서 볼 수도 있습니다만, 영화는 아무래도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달라도 너무 달라요. 같은 영화를 집에서와 영화관에서 볼 때, 전혀 다른 무엇인가로 느껴지는 경우가 많습니다.

희선 2015-04-04 01:43   좋아요 0 | URL
시간이 가서 어느 때가 오면 좋겠다 하면 참 안 가요 별 생각없이 지내거나 무엇인가 집중하면 그때는 잘 가고... 집중해서 하는 거 별로 없지만... 책도 집중해서 못 읽고, 마음처럼 잘 안 되는군요 그것보다 요새는 집중해서 읽어야지 하는 생각을 덜하는 것 같기도 합니다 다른 때보다 새벽에 시간이 더 잘 가는군요 별로 하는 것도 없는데...

나중에 이름 말한 걸 생각하니, 이름에 그게 무엇인지 나타내지 않아도 되겠더군요 뭐든 이름만 붙이지 그게 무엇인지 나타내지 않잖아요 바로 생각났으면 고쳤을 텐데, 자려고 할 때 생각나는 거예요 저도 참... 그런 게 생각나는지, 그럴 때 가끔 있는데 하루 지나면 그냥 두자 합니다

그 고양이가 맥거핀 님을 자주 보다보니 얼굴을 익혔나봅니다 그러니 이제는 피하지 않고 앞에 나타나고 편하게 뒹굴거리기도 하죠 만화를 보니 길고양이는 쉽게 배를 내놓으면 안 된다고 하더군요 이건 당연하겠습니다 다른 고양이가 공격할 수도 있으니까요 어떤 책에서는 길고양이가 싸우기도 하더군요 동물은 자기 영역 같은 걸 가지고 있군요 산에서 사는 동물도... 지금은 산에 동물이 별로 없을 테지만... 우리나라에 호랑이가 많이 있었는데, 이제는 없잖아요 그런 게 나오는 책을 봐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호랑이뿐 아니라 다른 동물도 거의 없어졌군요

저는 책 도서관에서 빌려볼 때 그래요 가끔 어떤 책 읽어야지 하고 적어두기도 하는데, 지금은 적어둔 책 거의 못 봐요 예전에는 한권씩 읽었는데... 지금은 시간이 가면 다른 책이 눈에 들어와서 그렇습니다 빨리 못 읽어서 그렇기도 하군요 영화는 영화관에서 보는 것과 집에서 보는 거 아주 다르겠네요 어떤 영화만 쭉 보여주는 그런 영화관도 있으면 좋을 텐데... 빨리빨리 돌아가는 이 세상에 그런 곳은 없겠군요 아니 그런 곳 하나쯤 있을지도 모르죠 어디에 있는지 모르는 것이고... 부산엔가는 예술영화만 보여주는 곳이 있다고 하더군요

힘든 사람한테 위로가 되지 못한다 해도 책, 영화, 음악은 있는 게 좋겠죠(예술은 다) 시간이 흐르면 그런 게 눈에 마음에 들어올 때가 있을 테니까요

시간이 흘러서 주말입니다 주말 즐겁게 보내세요


희선

B.B 2015-04-20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루세 미키오의 <부운>에서도 다카미네 히데코가 나왔었죠. <방랑기>는 아직 못봤는데 책도 출간되었으니 먼저 읽머보고싶네요. 책소개글 보러 가끔 북플들어와봐요. 티스토리에서도 가끔 뵙지만요 :) 좋은 오후 되시길요~

맥거핀 2015-04-20 16:43   좋아요 0 | URL
아..여기서 뵈니까 반갑네요. 북플은 저는 스마트폰에 깔아놓기만 하고 별로 실질적인 활용을 못하고 있습니다.^^

다카미네 히데코가 나루세 미키오의 영화에 여럿 나왔죠. 방랑기에서 뭔가 살짝 비어보이면서도, 살고자 하는 의지가 충만한 그 모습이 아직까지 기억에 남네요. 영화가 참 매력이 있어요.

건강 조심하시고, 즐겁게 지내시길요.^^
 

 

 

(<위플래쉬>, <꿈보다해몽>의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3월이 지나가기 전에 3월에 본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남겨놓고 싶다. 3월에 본 영화라고는 하지만, 사실 3월 중순 이전에 본 영화들이라, 기억에 남아있는 것들이 많지 않다. 영화를 본 직후에 무엇인가를 쓰는 것과 영화를 보고나서 일정 시간이 지난 후 무엇인가를 쓰는 것은 나름의 장단점이 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보고 나서 한참 있다가 무엇인가 기록에 남기는 것은 희미해지기는 하지만, 그것이 아직 남아있다는 것은 그만큼 (나에게) 중요하게 받아들여졌다는 의미도 되겠지. 그것은 무엇일까.  

 

 

먼저 <위플래쉬>. 이 영화는 음악을 보여주는 영화이지만, 나는 보는 내내 이 영화가 일종의 스포츠 영화를 연상시킨다고 생각했다. 특히 그 중에서도 신체를 이용하여 정확한 동작을 해내는 것이 중요한, 그래서 예술과 스포츠의 경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는 체조나 피겨스케이팅 같은 스포츠, 혹은 신체언어를 이용한 예술인 무용이나 발레와 같은 것 말이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기는 하지만, 음악을 영화에서 나타내는 방법이 예술가의 고뇌나 개인적인 일화, 혹은 그 '음악' 자체를 들려주는 것만이 아님을 보여주었다. 다시 말해서 음악도 일종의 신체 예술이라는 것. 예를 들어 체조에서 정확한 동작을 정확한 타이밍에 실수 없이 해내는 것이 중요한 것처럼, 드럼 연주에서도 정확한 위치를 정확한 타이밍에 정확한 강도로 타격하는 것이 중요하다(사실 드럼이 아니라 다른 악기라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그렇게 하기 위해서는 양쪽 모두 그것을 지속시킬 체력과 근력, 즉 신체의 지탱이 필요하다. 

 

그래서 <위플래쉬>의 촬영은 이런 신체를 이용하는 스포츠나 예술을 다루는 영화의 그것을 연상시킨다. 예를 들어 이 영화가 대런 아로노프스키의 <블랙 스완> 같은 영화를 연상시킨다면, 그것은 내용상의 측면(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자)에서도 그러하지만, 한편으로는 촬영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고 할 수 있다. 다양한 클로즈업의 활용을 통해, 신체 그 자체의 움직임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점점 분열되어가는 니나(나탈리 포트만)에게 주목하게 만들었던 이런 타이트한 촬영은 이 영화 <위플래쉬>에서도 비슷하게 보여진다. <블랙 스완>에서 발끝이 지면과 충돌하면서 토슈즈에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하는 것이 관객에게 고통(이자 쾌감)을 전이시켰다면, <위플래쉬>에서는 손에 아무렇게나 칭칭감은 붕대에서 배어나오는 피를 클로즈업으로 보여주는 것은 그의 고통(이자 쾌감)을 관객에게 전달한다. 즉 이 영화는 음악을 다루는 영화이지만, 이상하게도 음악을 자꾸 신체언어로 바꾸려드는 것 같다. 그것을 상징적으로 말하는 것과 같은 장면이 영화에는 있는데, 앤드류(마일즈 텔러)가 중요한 공연에서 결국 연주할 수 없게 되는 것은 어떤 연습의 부족이나, 정신적인 문제, 심한 긴장과 같은 문제가 아니라 말 그대로 그의 육체가 고장이 나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는, 음악은 결국 몸으로 하는 것이라는 문제, 혹은 음악에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결국 몸이라고 이상한 역설을 시도하는 것처럼 보인다(<씨네21> '김중혁의 바디무비'에서 왜 아직 이 영화를 다루지 않는지 모르겠다). 그것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조금 이상하게 느껴졌는데, 왜냐하면 음악을 다루기는 하지만, 그것은 지속적으로 음악에 대한 몰입을 방해했기 때문이다. 약간 비유를 섞어서 말하자면 음악이라는 눈에 보이지 않는 파동이 자꾸 눈에 보이는 땀, 피 혹은 악보의 음표로 치환되어 지속적인 피로감을 준달까. 다시 말해서 음악을 즐기러 갔는데, 고통을 체험하게 된달까.

 

그것은 이 영화가 한계를 넘으려는 자의 이면을 그리기 때문이기도 할 것이다. 물론 그것은 다시 스포츠 영화의 화법이라고 말할 수도 있는데, 그간 많은 스포츠 영화들은 한계를 넘어서려는 자들을 즐겨 묘사하여 왔기 때문이다. 즉 우리가 일반적인 스포츠 경기를 보며 한계를 이미 넘어선 사람들의 전면에 있는 그 성취만을 주목했다면, 스포츠 영화들은 그 이면에 있는 한계를 넘기까지의 그들의 고통을 즐겨 그려오곤 했다.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섰는가, 아닌가의 문제는 말많은 사람들의 몫으로 남겨놓는다고 해도, 결국 이 영화는 앤드류가 그런 한계를 넘어서고자 하는 여정의 어느 단면을 보여주고 있다고 말할 수는 있는데, 물론 그것에서 교육에 대한 어떤 문제들을 생각해 보는 것은 그리 어렵지 않다. 사실 나처럼 교육학을 전공한 사람들의 상당수는 이 영화를 그다지 좋아할 수만은 없을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이 영화는 수월성교육의 끝판왕이며, 수월성교육이라는 것을 평소에 찬성했던 교육학자들도 이와 같은 극단적인 수월성교육에는 그리 찬성표를 던지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앤드류가 한계를 넘어서 버드, 즉 찰리 파커와 같은 뮤지션이 된다고 해도, 그 와중에 희생양이 되었던 다른 학생들의 인생, 즉 플렛처(J.K.시몬스)가 죽음에 이르게 했던 다른 제자의 삶과 같은 것은 돌아오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사실 그러므로 어떤 의미에서는 이를 '교육'이라는 것과 전혀 무관하다고도 말할 수 있는데, 왜냐하면 플렛처는 실질적으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기' 때문이다. 즉 영화 속에서 사실 플렛처가 유일하게 강조하는 것은 그저 '마이 템포'이다. 그리고 그는 학생이 그 템포에 맞출 때까지 계속 같은 것을 반복시킬 뿐이다. 학생은 그 템포가 어느 정도인지도 정확하게 모르고, 그것을 맞출 방법이 어떠한 것이 있는지도 정확하게 알지 못한채, 그저 공포 속에서 같은 행위를 반복할 뿐이다. 소통의 단절 상태에서 이루어지는 반복, 이를 가르침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앤드류는 영화의 마지막에서 이를 플렛처에게 그대로 되돌려준다. 즉 지금까지 내가 당신의 템포에 맞추었으니, 이제 당신이 나의 템포에 맞추라는 것. 그런데 흥미로운 것은 이 지점에서 둘은 은밀한 공명에 도달하기 때문이다. 나에게 있어서 적어도 그 공명은 음악에 대한 공명이 아닌, 어떤 방법론의 공명처럼 보인다. 일방적인 마이 템포로의 방법론. 다시 말해서 앤드류가 나중에 누군가에게 음악을 가르치는 입장이 된다면 그는 플렛처 교수와 아주 비슷한 방법론을 활용할 가능성이 높다. 아니 어쩌면 그는 플렛처에게 음악보다는 그런 방법론을 사실 배우고 있던 것인지도 모른다. 영화의 초반부에서 앤드류는 자신이 싫어하는 과자도 타인을 위해 팝콘 속에 담아오는 것 정도는 아는 사람이었다. 그런데 그가 후에 여자친구를 대하는 방식을 보면 그는 생활마저도 '마이 템포'로 하려든다. 그것이 교육학 석사를 다 마치지 못하고 때려친 나라도, 이 영화를 마음으로 좋아할 수 없었던 이유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서 있는 것과 같은 영화도 있다. 이광국의 <꿈보다 해몽>. 이 영화가 서 있는 것은 플렛처가 그토록 싫어했던 '굿잡'의 위치이며, <위플래쉬>에서 앤드류의 아버지의 방법론이다. 좌절하려고 하는 사람들, 혹은 힘들어하는 사람들에 보내는 따듯한 격려. '꿈'이라는 말에는 양가적인 속성이 있다.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 허망한 것, 결국 닿을 수 없는 것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희망, 도달하고자 하는 목표점, 혹은 희망을 가지려는 자세 그 자체를 말하기도 한다. <꿈보다 해몽>에서의 꿈은 전자보다는 후자에 훨씬 가까우며, 그것은 제목 그 자체가 한편으로 말하는 것이기도 하다. 즉 꿈의 무게는 현실보다 가벼울 수도, 무거울 수도 있다. 그러나 꿈은 그것이 현실보다 가볍다고 해서 무조건 들고 있을 수도, 혹은 현실보다 무겁다고 해서 무조건 내려놓을 수도 없는 것이다. 중요한 것은 그 꿈을 받아들이는 자세, 즉 다른 말로는 해몽이다. 즉 누구나 현실과 꿈의 무게를 재지 않고, 그 꿈을 꿀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 꿈을 받아들일 수 있는 자유, 동시에 또 내려놓을 수 있는 자유가 있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광국의 이야기 직조 방식과도 연관된다고 말할 수 있는데, 이광국은 전작 <로맨스조>에서와 마찬가지로 이 영화에서도 이야기의 얼개를 이리저리 연결하는 방식, 이야기가 이야기를 불러오고, 현실과 꿈이 뒤섞이고, 처음의 실마리가 끝과 만나다가 다시 사라져버리곤 하는 기이한 연결방식을 사용하고 있다. 즉 일반적인 영화에서 관객은 어떤 이야기의 선을 잡고 영화를 보기 시작한다. 그런데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그 선은 사라졌다가 종종 다시 나타나며, 그때마다 관객은 꿈에서 현실, 다시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든 듯한 기이한 체험을 하게 된다. 즉 처음에는 꿈과 현실, 혹은 이야기와 현실의 경계가 명확해보였지만, 그 경계는 점점 사라지고 나중에는 이것이 꿈인지 현실인지 알 수 없는 경지에 이른다. 이 영화를 독해하는 방식은 그 얼킨 실타래를 어떻게든 찾아내 감독이 어딘가에 남겨둔 꿈과 현실의 경계를 찾아내는 것일까. 나는 그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보다 좋은 방식은 꿈과 현실을 굳이 나누려 들지 말고, 그 얼킨 실타래를 스스로 잘라붙여 이어보는 것이다. 우리가 이상한 꿈을 꾸고 난 후, 그 끊어진 꿈의 조각들을 스스로 이어붙여보는 것처럼 말이다. 즉 영화를 통해 꿈을 꾸었으니, 그 해몽은 스스로 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어쩌면 삶이란 이 영화에서처럼 늘 얼개가 들어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것이 때로는 종종 더 나은 결과를 이끌어내기 때문이다(혹은 좋은 결과를 말해주지 않아도 어쩔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을 말해주는 것과 같은 장면이 이 영화에는 있는데, 꿈을 해몽해주는 형사(유준상)와 그의 누나(서영화)의 이야기 같은 것이 그것이다. 뇌출혈 같은 것으로 쓰러졌다가 회복해가는 누나를 형사는 돌보고 있는데, 누나는 쓰러지기 전에 달력에 동그라미 쳐둔 날짜가 무슨 날을 의미하는 것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고 말한다. 형사는 누나가 여행가려고 정해둔 날이었나 보다는 식으로 눙치지만, 그 날은 사실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어느 날이었다. 그러니 삶의 얼개가 더 잘 들어맞았더라면, 즉 누나가 뇌출혈로 쓰러지는 일 같은 것이 일어나지 않았더라면, 어쩌면 더 나쁜 일이 벌어졌을지도 모른다(물론 더 좋은 일이 벌어졌을 수도 있다. 그러나 아무튼 중요한 것은 그 얼개가 아니다). 다시 말해서 우리의 삶을 한바탕 꿈이라고 한다면, 중요한 것은 그 꿈의 전개보다는 그 꿈을 어떻게 받아들이는가의 문제, 즉 해몽이다.

 

이광국의 영화에서는 이처럼 종종 마음을 건드리는 장면들이 있다. 예를 들어 위에서 말한 형사가 사실 그날이 누나가 죽으려고 정해둔 날이었음을 몰래 알게 되는 장면, 혹은 전작 <로맨스조>에서 초희(이채은)가 우연히 촬영장에서 자신의 이야기가 적힌 대본을 보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영화 속의 인물들은 힘든 상황에 처해 있지만, 이야기를 통해 그들에게 따듯한 위로를 건네는 것과 같은 마법같은 장면들. 여러 사람들이 지적하였듯이 이광국의 영화에는 홍상수 영화의 인장들이 여럿 새겨져 있다. 꿈과 현실을 뒤섞는 것, 영화에 떠도는 죽음의 그림자, 인물의 이동을 물끄러미 바라보는 카메라(카메라는 좀처럼 인물을 따라가는 법이 없다. 한걸음 곁에서 묵묵히 지켜볼 뿐이다.), 그리고 빈번하게 등장하는 줌인과 줌아웃. 그러나 홍상수의 영화와 이광국의 영화는 약간 결이 다르다. 예를 들어 홍상수의 줌인이 주변의 인물을 프레임 밖으로 내보내는 것이라면, 이광국의 줌인은 보고자하는 인물을 더 가까이 끌어당기는 것이다. 홍상수는 카메라를 현실에 놓고 명계의 세계를 들여다보지만, 이광국은 카메라를 명계에 놓고, 현실의 세계를 들여다본다. 홍상수의 여인들은 겉으로는 연약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강하고, 이광국의 여인들은 겉은 강해보이지만, 속은 누구보다도 여리다. 즉 이광국 영화의 그 결은 적어도 나에게 있어서는 훨씬 따듯하게 느껴진다. 

 

<씨네21>의 김지미 평론가는 994호에 실린 비평에서 이 영화가 전작의 동어반복이며, 너무 나이브한, 동화같은 순진한 이야기라고 평했다. 동화같은 순진함. 대체로 우리가 분노보다 위무에 더 박한 평가를 주는 것을 감안하더라도, 이 평은 조금 가혹해보인다. 김지미는 이 글의 부제를 '<꿈보다 해몽> 속 순진한 어른들이 도달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달았다. 그 현실은 <위플래쉬>와 같은 현실일 것이다. 오로지 최고만이 살아남는 세계. 그 최고가 되기 위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들이 넘쳐나는 세계. 그것은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적어도 <꿈보다 해몽>보다 <위플래시>가 더 각광 받고 있는 그 현실(적어도 관객수라는 측면에서라면 말이다). 그런데 거꾸로 생각해보자. 어쩌면 이러한 현실에서 더욱 말할 수 없는 이야기는 최고가 아니라면 꿈은 의미가 없다는 이야기보다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아도 어떻게든 꿈을 가지려 노력하자는 이야기가 아닐까. 현실에 더 잘 맞춰주고 있는 것은 <꿈보다 해몽>보다는 <위플래쉬>인데, 그것을 나이브한 동화라고만 말해야만 할까. <위플래시>의 마무리는 개운치않은데, 그것은 내용보다도 그 싹둑 잘라버리는 영리한 쿨함이 보여주는 씁쓸한 뒷맛이다. 나는 그보다는 구질구질하고 시시콜콜한 그 <꿈보다 해몽>의 마무리에 더 손을 들어주고 싶다. 구질구질하지만, 그것이 나에게는 더 맛보고 싶은 맛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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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5-03-30 13: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토욜인가, 시내 도서관에서 병원으로, 병원에서 집으로 또 데이트. 무한 전력 질주를 했는데 예매한 <뷰티풀 라이>는 결국 취소하고 말았어요. 차로 날아가도 시간을 놓칠 것 같아서 장봐서 음식 만들고 보쌈 사와서 먹고 그냥 놀았어요. <꿈보다 해몽>이 뭐지..하고 보니까 우리동네 예술관이랑 영화의 전당에서 상영하고 있는데, 그제 간만에 해운대에 진입했더니 거긴 뭐, 갈때마다 외국도시로 변모하고 있는 것 같아요. 아찔한 빌딩, 각 잡힌 네온사인, 조깅하는 외국인들, 점점 더 발전하는 바다. 공연장, 미술관, 백화점, 극장, 바다까지 모여있으나 주말에 마비 상태가 되는 이 동네는 내가 진입할 곳이 아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영화 더 봐요, 맥거핀님. 그리고 글 써 줘요! ^________________^

2015-03-30 18: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0 22: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2: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3-31 13:2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4: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AgalmA 2015-03-30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플래쉬 보고 싶었는데 맥커핀님 리뷰 보니 엌;
그런 거 같아요. 요즘의 분위기를 반영하는 것 아닌가 하고요. 오디션과 멘토 문화, 각종 자기계발서에 기댄 성공심리. 예전엔 뛰어난 뮤지션들 다 독학해서 자수성가한 경우잖아요.
아래 우리가 연결해나가야 할 꿈으로 마무리지으셔서 좋았어요 :)

맥거핀 2015-03-31 12:4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Agalma님. 위플래쉬는 잘짜여진 영화이긴한데, 좋아할 수 없었고, 꿈보다해몽은 전작에 비해 밀도는 적었지만, 좋았어요. 아마도 위플래쉬 같은 영화가 요즘의 세태에 더 맞는다고 해야겠지요. 그래서 더 흥행하는 것일수도 있고..그렇다고해도 이 영화에 대한 열광이 조금 의아해보이기는 해요.

아이리시스 2015-03-31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알람이 오니까 좋네요 :) 점심 먹어야죠, 배고파요ㅠㅠ

맥거핀 2015-04-01 13:59   좋아요 0 | URL
나는 알람 다 꺼놨어요. 뭐 사실 북플이 나에게는 없는 것과 마찬가지임..^^;;

아이리시스 2015-04-01 15:52   좋아요 0 | URL
어디 마땅히 기록이 불가능하니까 북플을 쓰는 거죠. 올해는 다이어리를 안 샀거든요. 넘 바빠서 다이어리를 날마다 들여다볼 시간도 없;; 날짜가 왜 한번 펼칠때마다 2-3일씩 훅훅 가있는지.. 3일 이상 지나면 뭐했는지 기억도 잘 안납니다.. 맨날 노니까요ㅠㅠ 맘같아서는 완전히 비공개해놓고 혼자만 기록하고 그저 노트같은 걸로 사용하고 싶은데. 사실 그래서 저 계정 하나 더 있어요! 가끔 메일주소와 비번이 나도 헷갈리는 다른 계정!! 알람은 댓글알람만 초기부터 해놨는데 소수정예댓글이라 알람이 많이 안 와서(!) 좋은 것 같아요, 물론 다수정예댓글이라도 좋겠죠. ^^;;

맥거핀 2015-04-01 15:56   좋아요 0 | URL
흐흐. 아이리시스님 이중생활하는 거 고백했따~. 저는 사실 알라딘 주로 지하철에서 많이 보거든요.(지금은 PC 앞이지만) 북플로도 보고, 알라딘 앱으로도 보고 그러는데, 북플은 이상하게 데이터도 많이 먹고 정이 안가요. 그래서 주로 알라딘 앱으로 봅니다. 알라딘 앱으로 서재도 보고 책도 검색하고 그래도 나한테는 충분해요. 그래서 북플을 잘 안쓰게 되는데..그래서 북플에 다른 사람들이 막 이 기능 좋다, 저 기능 좋다 하셔도 그게 뭐가 좋은 건지 잘 모르겠어요. 저는 그냥 단순하게 댓글 달릴 때만 좋습니다.

아..그래도 아이리시스님이 요새 무슨 책 보는지는 북플로 꾸준히 체크하고 있어요. ㅋㅋ(이걸 왜 체크하고 있는지..)

아이리시스 2015-04-01 16:04   좋아요 0 | URL
응, 그거 좋아요, 그런 자세. 체크해야죠. 저도 친애하는 이웃님 몇 분 체크함. 아..이분들은 요즘 책 안 읽나.. 글도 좀 쓰지..

나 뭐 읽는지 체크당하라고 북플이 있잖아요.. 혼자 읽지마.. 뭐 읽는지 맥거핀님에게 알려.. 댓글 달리면 알려줄게.. 답글도 좀 달고.. 독서는 혼자 하는 게 아니라고.. 다 같이 읽는 거라고.. 대신 데이터는 좀 많이 빼앗아갈게.. 나도 살아야 하니까.. 대신 표지 화질 좋지.. 책 좀 사라고..책 사라고..책 사라고.. (결국 못 이기는 사람이 책삼) 근데 그게 이런 순서대로 가나요? :)

저는 마지막으로 책 샀던 게 도서정가제 이전이었던 것 같아요.

맥거핀 2015-04-01 16:07   좋아요 0 | URL
아..말씀을 듣고 보니 이웃님 독서생활 체크하기라는 아주 중요한 기능이 북플에 있었군요. 나는 계속 북플을 안함으로써 아이리시스님이 내가 무슨 책을 보는지 궁금하게 하겠음..

나도 요새 거의 새책은 안사고 중고서점에서만 좀 샀어요. 그런데 이번에 적립금 들어와서 그냥 새책 몇 권 질러봤음...역시 그래도 책은 중고책보다는 새책 지를 때가 쾌감이 더 높아요.

아이리시스 2015-04-01 16:23   좋아요 0 | URL
그럼요, 책욕심은 버린 척 하는 거지 버려지는 게 아니란 걸 날마다 더 깊게 깨달아요. 중고보다 새 책이 좋고, 신간이 좋고 컬렉션을 완성시키는 게 좋죠. 이 마음을 알라딘 서재에서는 이해받으니까 참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

2015-04-01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5:5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1 16:08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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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16:13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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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5-04-01 16: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5-04-02 1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희선 2015-04-02 0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음악 영화에서 자주 보여주는 건 감동인데, <위플래쉬>는 그것과는 좀 먼 듯하네요 음악이 나오지만 교육이 보이는군요 가끔 음악도 안 좋게 가르치는 사람이 있더군요 그냥 놔두면 자기 감성대로 피아노를 잘 칠 텐데, 뭔가에 잘 맞게 치기를 바라고 그것대로 하지 않으면 피아노 치는 사람을 힘들게 하더군요 그런 식으로 가르치면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도 싫어하게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결국 음악을 그만둘지도...

한계를 넘으려고 할 때 여기저기 다치고 그러는군요 이 말을 보니 그런 거 자주 본 듯합니다 운동 경기가 아니더라도... 자기 한계를 뛰어넘기 위해서는 꼭 그렇게 다치고 피 흘려야 할까요 진짜 그렇게까지 되지 않는다 해도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는 건 그만큼 어렵다는 것을 보여주는 거군요 그것도 자신이 하고 싶어야 하는 거지 억지로 시키면 하고 싶지 않을 듯합니다 그것을 잘 따라하는 사람도 있겠죠

본래 뜻과 다르게 좋게 보는 것도 괜찮겠죠(그런데 누나가 나은 다음 다시 그런 마음을 먹는다면... 누나가 죽으려고 한 것을 알았으니 이야기를 해볼지도 모르겠군요 그것보다 시간이 지나서 마음이 바뀔 수도 있겠네요) 꿈은 크지 않아도 좋다고 봅니다 작은 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도 즐거우니까요


희선

맥거핀 2015-04-02 13:02   좋아요 0 | URL
네..영화에서도 그래서 음악을 그만두게 되는 사람들이 나오지요. 하나의 찰리 파커를 만들기 위해서 수많은 포기자들을 만들어내도 좋은 것일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제 경우에는 그 마지막 음악이 뭔가 울림을 주지 못했어요. 뭐 사실 음악은 음악이고, 내용은 그 별개로 볼 수도 있겠습니다만, 저같은 사람은 자꾸 이야기와 음악을 연결짓게 되는군요.

위에도 그런 얘기를 했지만, 사실 교육의 이야기라고 볼 수는 없는 측면이 있습니다. 교수도 실질적으로 무엇인가를 가르치는 것은 없지만, 사실 앤드류도 무엇을 배운다고 말할 수가 없어요. 즉 그가 그렇게 열심히하는 것에는 단순히 배움 이상의 무엇인가가 작동하고 있는 것 같습니다.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욕망 이상의 어떤 것들 말이죠. 그것이 그에게 좋은 방향으로 작용할지 안할지는 사실 영화의 마무리를 봐서는 알 수가 없습니다. 그것이 어쩌면 이 영화의 또 하나 위험한 점이겠지요.

네..저도 그렇게 생각해요. 작은 것을 이루면서 사는 것도 즐겁습니다. 꿈이 크지 않아도요. 적어도 꿈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사는 것보다는 낫겠지요. 그런 의미에서 저도 제 꿈이 무엇인지 조금 알았으면 좋겠는데..^^;
 
[선셋 리미티드]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선셋 리미티드
코맥 매카시 지음, 정영목 옮김 / 문학동네 / 201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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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라딘 공식 신간평가단의 투표를 통해 선정된 우수 도서를 출판사로부터 제공 받아 읽고 쓴 리뷰입니다.

   

    

 

<선셋 리미티드>는 코맥 매카시의 몇몇 전작들을 떠올리게 만든다. 예를 들어 <카운슬러> 같은 것. 희곡이라는 이 책의 형식도 그러하지만(물론 <카운슬러>는 '시나리오' 형식이기 때문에 차이는 있지만), 그 내용상에서도 통하는 점이 있다.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는 처음부터 끝까지 흑이 백에게 하는 일종의 카운슬링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리고 <카운슬러>의 모든 카운슬링과 마찬가지로 이 카운슬링은 결국 실패한다. 물론 이 이야기에 가장 가까이 있는 것은 책소개에 있는 설명대로 작품 <로드>이다. 그 설명을 그대로 가져온다면, 이 작품들은 '서사가 아닌 등장인물들의 대화가 이야기의 중심축이 되는' 작품들이면서, 동시에 '인간의 운명이라는 원초적인 질문에 대한 심오하고 진지한 이야기를 담아'낸 작품들이라는 점에서 비슷하다. 물론 이 설명으로는 조금 어렴풋한 감이 있다. 무엇인 '인간의 운명'인가? 조금 더 쉽게 이야기하기 위해서 이 <선셋 리미티드>에 나온 질문을 <로드>의 이야기로 치환해보자. <로드>의 세계. 모든 것이 이미 끝장나버린 세계의 어느 끝자락, 인간이 인간을 잡아먹는 곳, 살육과 약탈과 폭력이 있는 곳. 그곳을 남자와 소년이 걷는다. 아버지와 아들이라고 할 수도 있다. 그들은 길, 그러니까 '로드'를 걷지만, 그 '로드'의 끝에 희망이 있는지 알 수 없다. 아니 지금까지의 상황으로 봤을 때 그 길의 끝에는 아무 것도 없을 가능성이 매우 높다. 그러므로 그들은 묻는다. 왜 이 '로드'를 걸어야만 하지. 왜 불을 운반해야만 하지. 그러니까 그 '불'을 왜 걸음으로써 지속시켜야만 하지. 이토록 고통스럽고, 이토록 괴로운데. 모든 것이 끝장나 있음을 우리는 알고 있는데. 그 질문.

 

그 질문은 백의 질문이다. 그는 끝났음을 안다. 아무 것도 남지 않았음을 안다. 이 길의 끝에는 죽음이 있음을 안다. "사람들 마음에서 죽음의 공포를 몰아내주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하루도 더 살지 않을 겁니다. 다음 악몽에 대한 공포가 아니라면 누가 이 악몽을 원하겠어요? 모든 기쁨 위에는 도끼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습니다. 모든 길은 죽음으로 끝나요. 아니면 더 나쁜 것으로. 모든 우정도 모든 사랑도. 고문, 배반, 상실, 고난, 고통, 노화, 모욕, 무시무시하게 집요한 병. 이 모든 것이 단 하나의 결말에 이릅니다. (p.133)" 그러므로 그가 택한 것, 즉 뉴욕에서 로스엔젤레스까지 달리는 급행열차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것은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단 하나의 결말을 조금 더 빨리 당기는 것에 불과하며, 필연적이다. 그리고 그 반대편에 흑이 있다.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은 사람. 그는 백의 죽음을 어떻게든 막으려 한다. 왜냐하면 하느님이 그를 죽게 내버려두지 말라고 하셨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그는 백과 대화함으로써 어떻게든 이 죽음을 막으려고, 혹은 가능할 때까지 지연시키려고 애쓴다.

 

이것은 명확하게 대비되는 것처럼 보인다. 삶과 죽음, 죽으려고 하는 자와 살리려고 하는 자.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위와 같은 삶과 죽음의 문제에 있어서는 대부분의 독자는 심정적으로는 살리고자 하는 쪽에 서려고 할 테지만, 그 처해있는 위치는 흑보다는 백의 위치에 더 가깝다는 사실이다. 즉 일부를 제외하고는 적어도 이 책을 집어드는 독자라면 흑보다는 백에 아마도 조금 더 가까울 가능성이 높다. 물론 그것은 '선셋 리미티드'에 몸을 던지려 하는 사람들이 더 많다는 의미는 아니다. 다만, 이 책을 읽는 사람들이 삶의 조건이나 삶의 형태라는 측면에서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라는 말이다. 대다수의 사람들은 흑과 같은 경험이 없다. 그처럼 누군가를 죽인 후 교도소에 들어가 다시 또 누군가를 죽일 뻔하다가 하느님의 목소리를 듣게 되는 경험은 없다. 그보다는 우리 대다수는 지루하고 반복되는 일상을 반복하며, 가끔 통근열차안의 다른 사람들에게 속으로 욕을 퍼붓는 백의 입장에 더 가까울 것이다.

 

아니, 우리라고 하지 말자. 적어도 나는 그랬다. 나는 그래서 처음에는 백에 조금 더 무게를 두면서 책을 읽었다. 왜냐하면 책이든 영화든 어떠한 이야기든 적어도 의지할 곳은 필요하니까 말이다. 완전히 균형을 이룬 것처럼 보이는 이야기에서도 우리는 대체로 어느 한 쪽에 필연적으로 기울어져 있기 마련이니까. 다만, 그것은 글을 읽는 위치에서 그렇다는 것이고, 이야기의 내용상으로 보면 처음에는 흑이 우위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어떤 배경적인 측면, 즉 흑이 백의 목숨을 살려주었으며, 이야기를 하는 이곳이 흑의 집이라는 측면에서도 그렇고, 흑이 백을 대하는 어떤 어투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다. 흑이 대화하는 방식을 보면 약간 익살을 섞어서, 혹은 약간 장난을 섞어서 말하는 듯한, 즉 심리적인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는데, 그것은 단지 어떤 흑의 개인적인 특성 때문이라고 말할 수만은 없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대화에서 흑이 어떤 결정적인 무기를 가지고 있(다고 믿)기 때문이기도 할 것인데, 그것은 인간은 어떠한 상황에서도 결국에는 살고자 할 것이라는 오랜 믿음에서 연유한 것이다. 즉 그가 아무리 죽는다고 할 지라도, 그것은 결국 일시적인 것이고, 어쩌면 위악의 변형된 형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다. 그런데 이러한 생각, 혹은 믿음은 마지막에 이르러 산산이 부서진다. 백의 죽고자 하는 의지는 적어도 그에게 있어서는 앞에서 말한 것처럼 필연적이고 당연한 것이기 때문이다(흑은 백이 이렇게 말하는 와중에서도 이를 '농담 따먹기'라고 생각한다). 그리고 흑은 백이 결국 거리로 다시 뛰쳐나간 후에도 자신의 그러한 믿음을 버리지 못한다("저 사람 말은 진심이 아니었어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아요. 당신도 그게 진심이 아니란 걸 아시잖습니까." -p.138).

 

다시 말해서 코맥 매카시는 등장인물 그 누구에게도 기울어지는 것을 허락하지 않는다. 읽는 이를 카운슬링을 받는 위치에 놓고 카운슬링에 조금씩 동조해나가는 것처럼 보이지만(적어도 나는 백이 커피를 마시고, 음식을 먹는 것을 그 신호로 봤다), 그 카운슬링이 산산이 실패하는 것을 보여줌으로써 읽는 이를 그 어디에도 마음을 주지 못하게 만든다. 우리는, 아니 적어도 나는 쇠사슬을 풀고 다시 죽으러 나간 백의 입장에 설 수도 없지만, 그것이 단지 그의 진심이 아닐 거라며 하느님을 향해 울부짖는 흑의 입장에 설 수도 없다. 그 사이 어딘가에서 길을 잃고 우두커니 서 있다.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면서.

 

그런데 어쩌면 그것은 나의 착각이 아니었을까. 양쪽 어느 입장 중의 하나에 동조해야 한다고 믿는 것, 그것이 코맥 매카시가 직관적인 구조로 파놓은 덫이 아닐까. 돌이켜보면 비슷한 얘기를 코맥 매카시는 <카운슬러>에서도 했다. 카운슬링들이 계속 실패하는 그 이야기에서 주인공 '카운슬러'가 살려고, 혹은 그의 여자친구를 살리려고 발버둥 칠 때, 코맥 매카시는 잔혹하게도 어떠한 희망을 보여주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모든 시도는 혹은 모든 카운슬링은 번번히 수포로 돌아간다. 그런데 아이러니하게도 마침내 카운슬러가 될 대로 되라는 심정으로 죽음으로 가까이 가고자 할 때, 코맥 매카시는 그를 아주 조심스럽게 삶의 편으로 돌려놓는다. 아니 그것은 '죽고자 하면 살고, 살고자 하면 죽을 것'이라는 이순신 장군스러운 이야기와 아무런 상관이 없다. 적어도 그 이야기에서는 살아남는다는 사실이 '카운슬러'에게는 더욱 잔혹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이야기 그 자체로서도 그렇고, 한 마디 집약된 대사로서도 그렇다. "아니, 죽는 것은 너무 쉽지." 코맥 매카시는 늘 그런 것을 그려왔다. 어쩌면 죽는 것이 더 나은 것처럼 보이는 세계.

 

다시 말해서, 흑은 백과 대척점에 서 있는 것처럼 보이지만('흑'과 '백'이라는 이 구분법도 한편으로는 이 대척점을 더욱 강조하기 위함일 것이다. 즉 그것은 '흑인'과 '백인'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어떤 극단으로서 '흑'과 '백'을 상징하는 것처럼 보인다), 대척점에 있는 것들이 사실은 그렇듯 공유하는 지점이 있다. 그들은 사실 스스로의 힘으로는 버티기 어려운 것처럼 보인다. 백이 죽음의 목소리에 투항하려고 한다면, 흑은 하느님의 목소리, 즉 종교에 투항함으로서 버텨낸다. 그들은 고통없는 삶을 원한다. 흑이 하느님의 목소리를 따르며,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면, 백은 고통을 주는 그 자체, 즉 자신의 삶을 끝장냄으로서 고통을 없애고자 한다(백이 하필이면 '선셋 리미티드'를 자살도구로 택한 것도 그와 관련이 있을 것이다. 그는 '선셋 리미티드'가 통증 없이 눈깜짝할 사이에 삶을 끝내주기 때문에 그것을 택했다고 말한다). 

 

그런데 코맥 매카시가 지금까지 이야기해온 것들은 그 반대편에 있는 것들이었다. 고통 없이 사는 것이 아니라, 끊임없는 고통 속에서 지속시켜야 하는 삶. 그것은 통증 없는 죽음을 선택해 끝내는 것도 아니고, 하느님의 목소리를 들으며 행복하다고 믿으면서 사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예를 들어 차라리 죽는 것이 더 낫다고 생각하는 카운슬러의 삶이며,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 자체가 용감한 일이라고 믿는 삶이다. 그리고 내가 읽은 이 이야기도 사실은 그렇게 다르지 않다. 행복 속에서 사는 것도 아니고, 쉽게 끝내야만 하는 것도 아닌, 고통 속에서 지속해야 하는 삶. 그것에 가치가 있을까. 답할 수 없는 질문에 답을 하려고 애쓰지 말자. 다만 나는 그것을 이름붙여본다. 그것은 회색의 삶이라고. 그냥 가는, 가야만 하는 회색의 삶.  

 

 

아빠는 정말로 용감해요?

중간 정도.

지금까지 해본 가장 용감한 일이 뭐예요?

남자는 피가 섞인 가래를 뱉어냈다. 오늘 아침에 잠자리에서 일어난 거.

정말요?

아니. 귀담아 듣지 마라. 자, 가자. - <로드> p.3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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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5-03-25 12: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메일을 드리기는 했지만, 늦어서 죄송합니다.ㅠㅠ

희선 2015-03-27 0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장 용감한 일이었다고 하다니... 그 소설 속에서는 정말 그럴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듭니다 그것을 읽어본 건 아니고 대충 어떤지만 알고 있어요 그렇게 살아가는 거 대단한 듯합니다 지금 우리가 사는 곳은 그곳과 좀 다르게 보일지 몰라도, 아주 다를까 하는 생각도 듭니다

희망은 하나도 보이지 않는 곳에서 살아가는 사람 모습을 보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죠 그래도 그게 희망을 주기도 합니다 나는 저런 데서 살지 않아서 다행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건 아니예요 어떤 형편에 놓이든 살아가는 모습 자체를 보는 게 좋은 건지도 모르겠습니다 자신도 살아야겠구나 할지도... 어떤 소설을 보고 이 사람들은 대체 어떻게 될까 생각한 적도 있어요 잘되는 게 하나도 없어서... 그래도 그 사람들 살아가더군요

잠자리에서 일어나는 일이 가장 용감한 것은 사는 걸 그만두지 않는다는 것이기 때문이군요 살아가는 데는 괴로움이 따르기 마련입니다 그것을 피하고 살 수 있다면 좋겠지만, 그건 어려운 일이겠죠 좋은 일이든 안 좋은 일이든 일어날 수 있는데... 괴로움과 함께 살아야겠네요 하지만 그게 아주 무거운 사람도 있겠군요 그런 사람한테는 뭐라고 하면 좋을지...


희선

맥거핀 2015-03-30 18:37   좋아요 0 | URL
어떤 작가든 읽는 사람이 괴로워하면서만 읽기를 바라는 사람은 없을 겁니다. 괴롭고 힘든 이야기일지라도 그 이야기에서 무엇인가 인간이 얻는 것이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그런 이야기를 쓰겠죠.

뭐 그런 식으로 자기위안을 한다고 해도 사실 코맥 매카시 소설들은 읽기에 그렇게 녹록하지만은 않아요. 특히 <로드>같은 소설은 말이죠. 영화도 있던데, 저는 영화는 보지 못했습니다. 아니 보지 않았다는 말이 더 맞겠군요. 언젠가부터 보고나서 힘들 것 같은 영화는 슬슬 피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습니다. 예전에는 그래도 억지로라도 보고는 했었는데..

말씀하신대로 삶이 더 힘든 사람들 앞에서는 이런 것이 아무런 소용이 없을지도 모르죠, 영화를 힘들 것 같아서 피했다고 하면 배부른 소리일 겁니다. 저도 잘 모르겠어요. 정말로 삶이 힘든 사람들에게 무슨 소리를 할 수 있을지..소설이나 영화가 그 사람들에게 무엇이 될 수 있을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