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충고

 

(아마도 사람마다 느끼는 것이 다르겠지만) 대체로 선배들의 충고란 별 가치가 없을 경우가 많다. 물론 충고도 충고 나름이어서, 실제적인 방법들 - 예를 들어 부장이 시킨 무가치한 일과 과장이 시킨 가치있어 보이는 일 중 어떠한 것을 먼저 해야하는가 - 같은 것은 꽤나 도움이 되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술자리에서는 시간이 지나면 실제적인 충고들은 점점 몸 안의 수분 농도처럼 옅어지고, 뜬구름잡는 이야기들, 두루뭉술한 인생의 비결들은 가득 쌓인 담배 연기만큼 짙어지고 만다. 물론 우리가 잘 알고 있듯이 100만명의 인생에는 100만개의 개똥철학이 있고, 다른 사람의 개똥(철학)을 내 인생에 발라 약으로 만들기란 상당히 어려운 법이다.

 

반면 후배들의 충고는 대체로 가치가 있다. 물론 후배들의 충고란 평소에는 거의 듣기 힘들다. 그들에게 충고를 듣기 위해서는 밥을 사준다고 꼬셔서 싼 술집으로 데려간 다음, 그들에게 각종 폭탄주 레시피를 1번에서 마지막 번호까지 차례로 실험해보아야만 한다. 그러다 보면 어느 틈엔가 그들에게 이런 충고가 튀어 나온다. "형은 왜 그렇게 살아?!" (물론 이 말은 절대 이렇게 들리지는 않는다. 이 말은 대체로 제대로 돌아가지 않는 본인의 혀에 대한 타박처럼도 들린다. "혀는 왜에 구러케 솨라?!") 그리고 그런 충고를 듣고 나면 정중히, 그러나 꽤나 난폭하게 후배를 화장실 변기와 타일을 구별할 수 있을만한 위치에 던져둔 다음, 곰곰히 생각해 보게 된다. 아, 뭔가 문제가 있긴 있구나. 확실히 뭔가 문제가 있기는 있어. 그리고 그 '문제'라는 녀석을 곰곰이 생각해보게 된다. (그러므로 그 충고가 어찌 가치가 없다고 말할 수 있으랴.)

 

2. 다크나이트 라이즈

 

그 문제 중에 하나는 물론 게으름에 관계된 것이다. 예를 들어 영화를 본 후 바로 기록을 남기지 않고 미적거리다가, 결국 쓸 수 없는 글들에 대한 것도 그렇다. 그러므로 매일 일기를 쓰는 사람들을 보면 사실 약간 경외감이 든다. 자신에 대한 것도 아니고, 눈 뒤에 숨어 자신이 본 것에 대한 기록을 남기는 것도 이렇게 미적거리게 되는데, 매일 자신을 돌아보고 자신을 글 속에 새겨 남겨놓다니. 아무튼 늘 메모들은 키워드들로만 남아 있고, 그 키워드들은 상당한 시간이 지난 후에는 도대체 그 처음의 형태들을 복구해낼 수가 없다.

 

복구해낼 수가 없는 메모 중의 하나는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것이다. (뭐 사실 모든 게 다 그렇지만)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메모에는 재미있는 이야기거리와 그다지 재미없는 이야기거리가 혼재되어 있다. 예를 들어 좀 재미있어 보이는 이야기거리에는 베인과 조커의 공통점 같은 것들이 있다.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악의 중심인 베인과 <다크나이트>의 악의 중심인 조커는 악당들이란 점 이외에도 한 가지 눈에 띄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그 두 사람이 모두 망가진 입의 소유자라는 것인데, 조커는 잘 알려져있듯이 웃는 얼굴이 극도로 강조된, 양 옆으로 길게 찢어진 입의 소유자이고, 베인의 입은 영화 내내 마스크에 의해 가려져 있다. 하여튼 간에 두 사람 모두 불구의 입, 뭔가 비정상적인 입의 소유자이다. 물론 이는 별 것 아닌 공통점일 수 있다. 그러나 그들의 숙적인 '다크나이트' 배트맨과 연결지으면 조금은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왜냐하면 배트맨의 신체에서 우리가 유일하게 직접 마주하게 되는 부위는 그의 입이기 때문이다. 즉 배트맨의 모든 신체는 최신의 슈트로 가려져 있는 반면에 거의 유일하게 그 입만 공기 중에 노출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다크나이트 시리즈를 어쩌면 이렇게도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입을 가진 자와 입을 가지지 못한 자의 대결.

 

이야기가 막 나가는 김에 조금 더 생각을 연장해 본다면 아마 이 입과 연관지어 두 가지 정도를 더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입이라는 것은 우리의 얼굴에서 무엇을 담당하는가,라는 부분이다. 신체상으로 볼 때는 입은 물론 먹는 일을 담당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그것은 밀접하게 표정이라는 것과 연관되어 있다. 예를 들어 우리가 아주 간단하게 사람의 웃는 얼굴을 표현하고 싶다면 어떻게 하면 되는가? 이렇게 하면 된다. :-) 반면, 그 사람의 화난 모습을 표현하고 싶다면 이렇게 한다. :-( 즉 입은 그의 겉으로 드러난 표정을 읽게 하는 지표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조커나 베인을 보며 공포를 느끼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 그들이 표정이 없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베인은 실제의 마스크를, 그리고 조커는 웃는 얼굴이라는(그러나 사실은 웃지 않는- 이 부분과 관련지어서 조커가 자신이 웃는 표정을 가지게 된 이유를 술회하는 믿을 수 없는 진술을 떠올려보라) 마스크를 쓰고 있다. (물론 도둑이나 강도들도 대체로 입을 가린 마스크를 쓴다. 그리고 우리는 그들에게 공포를 느낀다.) 그러나 입 그리고 표정의 문제는 여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다.

 

이는 이 영화 <다크나이트 라이즈>의 어떤 묘한 부분들과 연관이 되는데, 그것은 이 영화에 떠돌고 있는 무산혁명의 이미지이다. 가지지 못한 자들이 벌이는 공포스러운 혁명의 모습들, 즉석에서 이루어지는 재판과 사형과 추방, 미친 혁명가의 선동, 그리고 그 선동에 호응을 보내는 사람들. 무산자들이 혁명을 일으키는 것은 먹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즉 입이 있었으나 그들에게는 그 입이 아무런 쓸모가 없었다. 그들은 아무 것도 먹을 수가 없었고, 아무 것도 말할 수도 없었고, 동시에 그들에게는 어떠한 표정도 필요가 없었다. 그리고 입을 가지지 못했던 그들은 결국 입을 드러낸 어둠의 기사, 배트맨과 복구된 경찰력에 의해 퇴치되고, 고담 시에는 평화가, 그러나 어쩌면 그들만의 평화가 찾아온다. 물론 당연하게도 이겨야하는 것은 다크나이트고, 미치광이에 의한 혁명은 일어나지 않는 것이 마땅하다. 그러나 이상하게도 나는 베인의 망가진 입을 보면서, 그리고 마지막 장면 꽤나 비싸보이는 찻집에서 커피를 입에 가져가는 고담 시의 수호자이자, (한때) 억만장자 기업인 브루스 웨인을 보며 약간 입맛이 썼다.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이 어둠의 기사의 마스크는 입은 드러내 보이되, 반대로 그 눈을 가리기 때문이다. 입은 웃고 있되, 눈은 웃고 있지 않은 자들, 이 현실을 수호(한다고 말)하는 자들도 그런 자들이다.)

 

3. 상상

 

아무래도 여기서 조금 더 길어지면 <다크나이트 라이즈>에 대한 리뷰가 될 것 같고, 이 글은 그저 잠이 안와서 쓰는 글일 뿐이니 이쯤에서 끊어야 할 것 같다. 아무튼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다크나이트>와 다른 부분에서 흥미롭게 느껴졌던 것은 이 이야기는 전작과 다르게 어딘지모르게 헐거운 부분이 있기 때문이다. 즉 모든 곳이 꽉 짜여져 있어 거의 물샐틈 없는 공간처럼 느껴졌던 그 전작과 달리 이 이야기 속에는 어떤 빈 공간이 있고, 그 빈 공간을 우리의 어떤 상상으로 채워넣어야만 완전한 이야기가 되는 것처럼 느껴졌기 때문이다.

 

채워넣어야 한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이런 것들이다. 지난 연휴에 하릴없이 채널을 돌리다가 '넝굴당' 재방송을 보게 되었는데 그 장면 중에 시어머니인 윤여정이 예전 아들을 잃어버렸을 때 주위의 반응을 회상하며 울부짖으면서 억울해 하는 장면이 있다. 이 장면이 흥미롭고 윤여정의 연기가 돋보이는 이유는 이 장면에서 어떠한 실제의 회상씬도 등장하지 않기 때문이다. 즉 그녀의 가슴을 쥐어 뜯는 연기를 보는 우리들은 그녀가 받았을 예전의 상처의 정도를 상상하고, 그 크기를 짐작해보게 된다. 그러니까 그 크기는 그 답답한 흑백의 회상씬에 갇혀 있지 않다. 그 크기는 우리가 상상도 못할 정도로 보는 이들의 머리 속에서 부풀어 올라, 각자의 머리 속에서 커다란 흑백의 회상씬들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그 상상만으로 우리는 그녀의 과거에 있었던 일들을 보게 되며, 그 억울함에 공감하고, 그 상처의 크기를 되레 짐작하게 된다. 아니면 이런 것은 어떨까. 예전에 왕가위의 <타락천사> DVD에 실려있는 정성일의 코멘터리 중에 그가 지나가며 언급하는 대목이 있다. 자신을 찍지 말라고 화내는 아버지 자신을 찍은 화면을 보고 있는 아버지를 금성무가 보고 있는 장면에 흐르는 금성무의 독백. 이 독백이 마음을 건드리는 이유는 우리는 그 장면에서 이 독백이 아버지가 이미 세상에 없는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야 가능하다는 것을 상상하게 되기 때문이다. 즉 그 아버지를 보는 자신의 모습을 후일의 어떤 시점에서 회상하는 것, 그것은 아버지에 대한 그의 사랑과 그에 동반되는 그리움의 크기를 역설적으로 상상하게 만든다.  

 

그러므로 다른 여러가지 알 수 없는 것 속에서도 하나 유일하게 확실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이 있다면, 당신에게 아무 것도 상상하지 못하게 만드는 영화(혹은 다른 어떤 것이라도)는 (적어도 당신에게 있어서는) 고급의 쓰레기일 뿐이라는 것. 그것에 자신을 내맡기는 것은 쓰레기더미 속에 자신을 방치해두는 것과 동일한 행위라는 것.

 

4. 위험

 

가끔 뭔가를 끄적거리다 보면 저절로 무엇인가를 쓰고 있다고 여겨지는 때가 있다. 줄줄이 손 끝에서 튀어나오는 문장들, 어느 틈에 정신을 차려보면 이미 쓰여져 있는 긴 문단, 이미 내려져 있는 스크롤바. 솔직히 그런 때가 항상 오기를 바라지만, 곰곰이 생각해 보면 아마도 그런 때가 가장 위험한 때가 아닌가 싶다. 하고 싶은 이야기는 손 끝에 있지 않으니까. 손 끝에서 끄집어내는 이야기들은 다른 이야기를(그러니까 예전의 그 '문제'라는 녀석같은 것) 튀어나오지 못하게 하니까.

 

그런데, 그런데 인간의 신체라는 것은 참으로 웃긴 것이어서 그 문제를 생각해보려고 할 때마다 달콤한 무엇인가를 내보내 잠을 자라고 한다. 졸립다. 잠이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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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03 0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3 18: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05 02: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0-04 15: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우. 제가 좋아하는(또는 기다리는?) 맥거핀님의 잠이 안와 쓰는 글, 새 페이퍼군요(그렇다면 저는 맥거핀님의 불면을 좋아하는.. 기다리는?_-). 충고, 에 대한 이야기 저도 비슷한 글을 쓰고 있는 중이었어요. 대체 왜 사람들은 남의 인생에 훈수를 두는가 하는 이야기_-(명절의 여파인가봐요)

날씨가 좋군요, 자전거 타고 달려야할 날씨에요. 명절은 어떻게 보내셨나요? :)

맥거핀 2012-10-05 02:22   좋아요 0 | URL
명절은 사실 전혀 특별한 게 없었어요. 누군가에게 그렇게 (충고를 가장한) 앞담화를 듣지도 않았구요. 평온하고, 조용하게 지냈습니다. 그런데 확실히 그렇게 몸이 편해지니까 정신이 확 이완이 되어서 책들도 눈에 잘 안들어오더라구요. 예전에는 연휴 때 이것도 하고, 저것도 하고 그래야지..하고 계획을 세우기도 했는데, 아주 무계획적으로 보냈습니다.

예전에 다운 받아 놓고 못 본 영화들도 몇 개를 봤어요. 옛날 일본영화들 몇 개를 봤는데 좋았어요.

그래서 자전거는 좀 타셨는지...
 
[가족 기담]을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가족 기담 - 고전이 감춰둔 은밀하고 오싹한 가족의 진실
유광수 지음 / 웅진지식하우스 / 2012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이야기(소설)의 묘미, 혹은 쾌락은 대체로 전복에서 나온다. 현실을 뒤집는 것, 현실에서 일어날 수 없다고 생각했던 일이 일어나는 것을 보는 것 말이다. 예를 들어 이 책 <가족 기담>에서도 '기담' 중의 하나로 소개된 <홍길동전>의 이야기가 읽는 이에게 일종의 즐거움을 주며 널리 읽혔던 것은 그것이 결국 현실에서는 일어날 수 없는, 서자인 홍길동이 적서차별의 굴레를 넘어 한 나라의 왕이 되는 이야기였기 때문이다. 그것은 한편으로 상당수 이야기의 원천이었던, 그리고 앞으로도 원천일 것이 분명한 복수극이 만연하는 것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소개된 <장화홍련전> 같은 것. 그것은 현실에서는 그러한 복수가 결코 쉽지 않음을 반증하는 것이기도 하다. 복수가 그렇게나 쉽고, 현실에서 자주 일어나는 것이라면 누가 복수극 따위를 읽겠는가. <장화홍련전>에서 귀신이라는 비현실적인 요소를 전부 배제하고 생각한다고 해도, 조선시대와 같은 가부장적인 사회에서 죽은 전처의 딸들이 가부장의 위세를 등에 업은 계모에게 복수를 하기란 거의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었을 것이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듣는 자와 말하는 자 모두에게 쾌감을 주었을 것이다.

 

그러므로 결국 이러한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향유하는 사람들은 꿈을 이루지 못한 사람들, 혹은 밀려난 사람들인 경우가 많다. 역사는 승리자의 기록이고, 이야기(소설)는 패배자의 기록이라는 단적인 말을 굳이 가지고 오지 않더라도, 이야기를 읽는 사람들은 무엇인가 이루어지지 못한 것이 이야기 속에서나마 이루어지기를 바라면서 이야기를 읽는다. (그래서 어쨌거나 저쨌거나 새드 엔딩은 해피 엔딩보다 사랑받지 못할 운명에 있다.) 하물며 조선시대와 같이 엄격한 신분질서가 짜여진 폐쇄적인 사회, 가부장적 질서가 사회의 기초에서부터 뿌리내리고 있는 사회에서는 더 말할 것이 있으랴. 평생 종의 신분을 벗어날 수 없었던 사람들,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집안에서만 갇혀 지내야 했던 수많은 여인들, 벼슬길이 애초에 막혀있던 (서자와 얼자를 포함한) 수많은 양반들이 그나마 합법적으로 기를 펼 수 있었던 것은 이야기 뿐이었다. (물론 그 이야기마저도 완전히 합법적인 것은 아니었다. 모여서 무엇인가를 쑥덕쑥덕 이야기하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권장되는 행위는 아니었다. 책에 보면 실상 비참한 이야기를 모여서 웃으면서 즐기는 부분을 부정적으로 보는 부분이 있는데, 사실 그것은 자조적인 웃음에 가까웠을 것이다. 물론 자조적인 웃음이 좋은 것은 아니다.)

 

그러므로 조선 시대와 같이 신분차별이 공고한 사회에서 이야기는 대체로 두 가지 것을 담는다. 하나는 이루지 못한 것에 대한 동경, 꿈이다. 그러니까 "그리하여 오래오래 행복하게 살았습니다."와 같은 결말 말이다. 그러나 동시에 이 결말에는 수상쩍은 무엇인가가 남는다. 그것은 그 결말이란 너무도 간단하고 덧없기 때문이다. 이 간단한 결말에는 "그들이 그래서 정말 오래도록 행복하게 살았을까?"와 같은 질문이 개입할 여지가 없다. 그러므로 이러한 이야기들은 대체로 두 번째 것, 그러니까 결국에는 한계가 있는 승리, 결국에는 이루어질 수 없는 무엇인가를 담는다. 위에서 예로 든 <홍길동전>을 다시 가져와 본다면 홍길동은 결국 가상의 나라, 율도국의 왕이 된다. 조선이라는 거대한 신분제적 봉건 체제는 여전히 건재하며, 홍길동 역시 새로운 곳에서 새로운 체제를 건설해 그 우두머리가 될 뿐이다. <구운몽>이나 <옥루몽> 같은 것은 더 말할 것도 없다. 그것은 제목에서부터 이미 말해주듯 한낱의 꿈일 뿐, 그것은 실현될 수 없는 것이다. 아마도 여기에는 두 가지 정도가 개입될 것 같다. 그 하나는 조선과 같이 공고한 봉건 신분제의 사회에서는 이야기를 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이나 몸조심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사실이다. 기록으로 남기는 방각본이나 필사 형식의 이야기는 물론이거니와 단지 구술로서 이루어지는 이야기일지라도 이야기에는 적절한 안전장치가 필요했다. 다른 하나는 결국 이 이야기들은 창작자의 내면을 반영할 수밖에 없다는 점이다. 이야기를 만들어내는 사람들은 벗어나고 싶어하나 당대의 현실을 결코 벗어날 수 없었고, 그들이 만들어낼 수 있는 이야기의 결말은 결국 어느정도 현실을 반영할 수밖에 없었다. 또 그것은 묘한 시기와 질시를 안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소설의 창작자들, 그리고 독자들은 소설 속 인물들이 무엇인가를 이루어내기를 바라면서도, 그 완전한 성공의 모습을 보는 것을 불편해하며, 그가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었을 때만이 가까스로 안도한다. 왜냐하면 그로 인해 그것을 보는 현재 자신의 처지를 은연중에 의식할 수 밖에 없기 때문이다.

 

이 책 <가족기담>에서 드러내보이고 있는 것은 결국 이 두 번째이다. 그들이 이루어낸 무엇인가가 아니라, 결국 이루어내지 못한 무엇인가를 볼 것. 그것은 그러므로 이야기의 판타지를 모두 걷어내고, 그 이야기 내면에 담긴 당대의 현실을 끄집어내는 것이다. 무엇이 이야기 속 그들, 그리고 그 이야기를 지어내고 듣는 모든 이들을 어떤 한계에 가로막히게 하는가? 저자 유광수는 옷고름을 들춰내고 이야기의 속살을 드러내보이기 시작한다. 그러나 이 저자는 꽤 집요하다. 저자는 단지 뽀얀 속살, 보이고 싶지 않은 치부를 드러내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는다. 저자는 집요하게 살과 핏줄을 발라내고 그 뼈 속까지 들여다본다. 그러므로 이는 결국 기담이 된다. 단지 뼈가 드러나서 기담이 아니라, 우리는 그 뼈 속에 사무친 무엇인가를 보게 되기 때문이다. 그것은 인과 예를 중시하는 조선의 유교 이데올로기와 모순되어 보이지만, 실상 그 이데올로기가 뒷받침해주고 있는 가부장적 사회의 기담들이다. 부모에게 희생당하는 아이, 반대로 아이에게 희생당하는 부모, 정절과 포르노그래피를 동시에 꿈꾸는 남자들, 무능한 가장들이 벌이는 타자화, 근친상간, 집안의 명예를 더럽혔다고 죽기를 바라는 열녀 만들기 등등.

 

뭐 그러므로 사실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는 아니다. 위에서도 말했지만, 모든 텍스트는 그 이면을 가지고 있고, (그 이야기에서 겉으로 드러난 교훈과 하등 상관이 없이) 텍스트들은 자발적, 그리고 비자발적으로 당시의 세계관을 담기 때문에 그 이야기에는 무의식적으로 함축되어 있는 것들이 있다. 또한 그것을 드러내고자 하는 시도는 (특히 유교 이데올로기에 대한 것은) 여러 번 행해지기도 했고, 우리에게 어느 정도 알려져 있기도 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이야기를 다시 새롭게 읽어내는 작업이 쉬운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아이와 부모의 상호희생 강요, 정절과 포르노그래피의 이상공존, 타자화 같은 것은 우리에게도 낯선 키워드가 아니기 때문이다. 아니 낯설다기 보다는 우리는 이제 그것을 이야기에서가 아니라 현실의 뉴스에서 본다. (그리고 동시에 현재에 만들어지는 수많은 텍스트들도 이 키워드들의 상당 부분을 공유하고 있다. 아마도 먼 훗날 후세인이 우리시대의 텍스트들을 본다면 그 기괴함에 분명 혀를 내두를 것이다.) 그러므로 이 텍스트들을 곱씹는 것은 단지 유교 이데올로기를 욕보이기 위해서만은 아니다. 그것은 현실의 무엇인가를 바로잡기 위함이다. 즉 '공자가 죽어야 나라가 산다'의 새로운 버전이라고나 할까.

 

그러나 책 <가족 기담>은 그만 이 부분에서 주춤하고 만다. 책 전반에 주로 흐르고 있는 약간은 과감한 성 담론들을 보고 내가 필요 이상으로 기대했나 보다. (물론 예전 고려가요나 향가의 후렴구들을 성행위의 열락의 언어들로 보는 해석들에 탐닉했던 내 전력으로 비추어 볼 때 저자 탓만은 아니라고 본다.) 책 전체 내내 각종 다양한 가족에 대한 기담들을 보여주던 이 책은 결말부에 이르러 다시 가족주의로 돌아온다. 이는 예를 들어 극 내내 잔인한 복수극의 전말을 보여주던 영화가 결말부에 이르러 "사실 복수는 나쁜거야. 그러니까 복수 같은 것은 생각도 하지말고 용서를 하렴."이라고 말하는 격이랄까. 상처에서 고름을 짜내고, 그 빈공간을 보게 해주었으면, 이제 약을 발라아먄 한다. 그 공간에 그 고름을 소독해 다시 집어넣으면 다시 곧 곪을 뿐이다. 예를 들어 프롤로그와 에필로그에서 저자는 베트남 공항에서의 경험을 예로 들며 새롭게 만들어지는 가족들을 이야기하며 가족에 대한 사랑이 그들에게서 피어나기를 기대한다. 전혀 다른 문화를 가진 사람들이 새롭게 가족을 이루기 위해서는 물론 그들 자신의 사랑으로 만들어지는 가족주의적인 각성의 힘이 어느 정도 필요할 것이다. 그러나 필요한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동시에 필요한 것은 그들을 가족으로 만들어(붙들어) 줄 시스템이다. 즉 유교 이데올로기를 걷어냈으면 무엇인가 다른 시스템이 필요한 것 아닌가. (그러나 저자는 여기에서 입을 다문다. 그러므로 이 책은 "그 후로도 행복하게 살았습니다."라며 얼버무리는 책 속 이야기들과 비슷해진다.) 뭐 꼭 저자에게 묻는 질문만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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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26 07: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대상이라니까 생각난 건데 학교다닐 때 문예비평론이란 과목이 있었거든요. 우리가 블로그에 쓰는 글은 거의(맥거핀님은 제 이웃 중 유일하게 벗어나시는 것 같지만) 인상비평이잖아요. 좋게 말하면 감상문(느낌글) 나쁘게 말하면 잡글. 무언가를 보고 쓸 때 격식을 갖추면 절대 하면 안되는 것이기도한데, 이 책이 <홍길동전>이나 <구운몽> 같은 걸 시대상으로 풀어 가족을 얘기하는 것에서 뭔가가 (저 스스로에게) 환기됩니다..

토론시간에는 제일 먼저 분석하는 게 작가도 아니고 내용도 아니고 소설이 씌어진 시대상이나 말하고자 하는 주제거든요. 저 요즘 글도 침체기..(쓸 욕망이 생기질 않..) 댓글은 쓰고나서 돌아서면 허무해져요ㅠ.ㅠ

뭘 보고 읽는데 도무지 느껴지는 것도, 지적욕망을 채우고픈 마음도 잃어버린 가을의 시작!

일어나요, 맥거핀님!!! (여기서 또..)

2012-09-27 00: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9-28 02: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The XX - 2집 Coexist
The XX(더 엑스엑스) 노래 / 강앤뮤직 (Kang & Music)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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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기다리던 2집 발매. 덜어내고 또 덜어내야만 완성되는 그들의 음악. 가벼워져야만 공존(coexist)할 수 있다. 1집보다 2% 더 덜어낸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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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에타, 김기덕, 2012

 

 

(전체적으로 영화의 줄거리와 결말부가 들어있습니다.)

 

  

 

화제의 중심에 올라있는 김기덕의 <피에타>를 보았다. 사실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거의 보지 않았던 사람이라면 모를까, 김기덕의 예전작들을 보아온 관객이라면 무엇인가 약간은 낯설다라는 느낌을 받을 수도 있는데, 그것은 어떤 가시적인 부분에서라기보다는 비가시적인 어떤 '느낌'이라고 말하는 것이 더 정확할 것 같다. 이야기의 측면으로 봐서는 여러 평자들이 지적했듯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그림자를 언뜻언뜻 보게 되는데, 예를 들어 이 <피에타>의 이야기를, <마더>의 어머니가 <친절한 금자씨>의 공간으로 들어와 금자씨가 된다면, 혹은 <복수는 나의 것>의 공간으로 들어와 동진이 된다면 벌어질 일들을 김기덕 식으로 풀어낸 영화라고 할 수도 있다. 즉 김기덕의 이 이상한, 그러나 아주 낯설지만은 않은 이야기에서 우리는 언뜻 봉준호의 냄새나 박찬욱의 향취를 느끼게 되는데, 그것은 김기덕 고유의 분위기와 어우러져 독특한 분위기를 만들어낸다. 예를 들어 박찬욱이나 봉준호의 영화에서는 우리는 종종 영화 바깥에 머물러 있다. 즉, 영화를 보는 우리들은 그 고통을 내부에서 견디는 것이 아니라, 때로 바깥으로 빠져나오게 되며, 그 증거 중의 하나로 우리는 그 영화의 위계와 구조를 분석하고 싶은 충동에 빠지게 된다는 점을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예전) 김기덕의 영화는 관객을 가장 가까이에 데려다놓고 이야기를 시작했으며(물론 관객이 원할 경우에 한해서), 일단 한번 들어가면 빠져나갈 틈을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의 영화는 때로 '불가해' 그 자체, 끔찍스러운 이물의 어떤 것으로 남았다(우리는 고래의 뱃속을 빠져나가야만 비로서 그곳이 고래의 뱃속임을 알게 된다). 그런데 이번 영화에서는 그런 것이 뒤섞여 있다. 처음 관객을 압도하면서 시작했던 이 영화는 중간 부분에 이르러 그 전체의 구도를 보여주는 듯 하다가, 다시 관객을 몰아붙이며 끝낸다.

 

영화는 제목에서부터 그 종교성을 드러내는데, 성모가 죽은 아들(예수)을 안고 있는 '피에타'라는 이 제목과 (그리고 포스터는) 어떤 종교적인 심상 몇 가지를 떠올리게 한다. 예를 들어 이 전체 이야기를 단테의 <신곡>에 느슨하게 빗대어 볼 수도 있는데, 처음 강도(이정진)의 악행은 <신곡>의 '지옥편'이다. <신곡>의 9층으로 이루어진 지옥, 그리고 청계천의 나뉘어진 수많은 지옥들. 이 지옥들에는 죄를 지은 자들, 그러니까 이 사회에서 '죄'라고 명명되는 '돈을 빌리고 갚지 못한 자들, 혹은 갚을 마음이 없는 자들'이 각각의 공간에 숨어 있다. 그리고 이 곳을 단테, 아니 강도가 차례로 방문한다. 그러나 물론 강도는 단테가 아니다. 강도의 악행은 그 이름대로 차라리 '강도'짓을 하는 게 더 나아보일 정도인데, 그는 이 지옥의 마지막에서 엄마(조민수)를 만나고 '연옥'으로 들어선다. 속죄자들이 자신의 죄를 돌아보고 정화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던 단테의 <신곡> '연옥편'처럼 강도는 거부하던 엄마를 일단 받아들인 후에는 이상스러울 정도로 급속한 변화를 보여주는데, 갑자기 존대말을 쓰는 것은 기본이고, 급기야는 돈을 받아내는 일을 포기하는 정도에까지 이른다. 그럼 단테에게 베아트리체가 천국을 인도했던 것처럼, 강도에게 엄마가 속죄와 천국의 길을 인도할 것인가. 그러나 이야기는 새로운 측면으로 나아가고, 그는 연옥에서 다시 지옥으로 돌아가는 것처럼 보인다. 처음 지옥과 비슷하지만 다른 공간, 이번에는 누구나 그를 증오하는 지옥. 불에 타 죽어버려라, 제발, 이 인간백정아.

 

물론 성모마리아와 아들 예수를 표현한 '피에타'가 그렇듯이 <피에타>는 엄마와 아들의 이야기이기도 하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아버지는 없었다. 아니 종종 있기도 했지만, 그건 아버지라기보다는 아버지의 탈을 뒤집어쓴 괴물에 가까웠고, 그 아버지들은 종종 아들에게 잡혀먹혔다. 그래서 늘 어머니와 아들만 남았다. 이번 영화에서도 하나 특이한 점은 이 세계 역시 아버지들은 이미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린 세계라는 점이다. (아니 유일하게 직접적인 부자 관계가 나오기는 한다. 연필을 손에 든 소년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 소년은 불구 아버지를 견뎌내지 못할 것이다. 그 아버지는 괴물을 만들어내고 있었으니까.) 강도와 엄마, 엄마와 그녀의 죽은 아들, 그리고 또다른 늙은 엄마와 불구가 된 아들. 그럼 아버지들은 어디 갔을까. 극 중 한 아버지는 '보험금을 받는 게 복잡해진다'는 만류에도 옥상으로 올라가고(이렇게 표현하는 게 온당할까 싶다. 올라가는 아버지와 내려가는 강도를 잡는 이 씬은 인상적이다), 다른 아버지는 아버지가 되자마자 아들을 위해 두 손을 기꺼이 잘라서 먹이려 한다. 그러므로 옥상으로, 혹은 프레스기계 밑으로 아버지를 밀어넣은 강도는 동정심 따위는 가지지 않는다. 그곳으로 아버지 세대를 밀어넣는 것은 자신이 아니니까. 주의 영광, 할레루야 따위의 구호가 붙어 있는 이 청계천 공간 어디에도 주의 영광 같은 것은 없다. 아니 없는 것은 그것만이 아니다. 그 어디에도 이들을 죽음으로 몰아넣는 누군가가 없다. 예를 들어 이곳에서 새건물을 지으려고, 이들에게 건물을 비워주고 나갈 것을 요구하는 누군가, 그 누군가는 도대체 어디에 있는가? 싸움이 어려워지는 것은, 그 적이 거대해지거나 더 무서워지기 때문이 아니다. 도대체 그 적이 누구인지 점점 알 수가 없게 되어가기 때문이다. 적이 아무데서도 보이지 않는데 도대체 누구와 싸워야한다는 말인가? 일주일만에 10배를 받아내려 하는 사채업자, 200원에 물건을 만들어내라는 전화 속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 10배라는 것을 암묵적으로 허가해주는 그 누군가, 아니면 200원에 만들어낸 부속물들을 사가서 그것으로 더 반질반질한 무엇인가를 만들어내는 누군가, 그들이 적인가? 아니면 그들을 이렇게 만드는 소위 '시스템'이 적인가? 알 수가 없어진 세상.

 

 

그리고 영화의 마지막이 온다. 다시 단테의 <신곡>. <신곡>에서 단테는 베아트리체에 이끌려 마지막 천국을 본다. 그는 그 곳에서 '사랑'이라는 것을 다시 새롭게 배운다. 즉 이 '사랑을 배운다'라는 것. 영화 <피에타>에서 강도는 뒤늦게 나타난 엄마에게 무엇인가, 그러니까 뭐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무엇인가를 배운다. 영화 속에서 엄마가 강도의 악행에 대해 변명하듯이 반복하는 말들이 있다. 그건 얘의 잘못이 아니예요. 내가 없었기 때문에, 내가 일찍 이 아이를 버렸기 때문에 일어난 일들입니다. 즉, 강도의 악행은 어떤 근원적인 무엇인가가 아니라, 무엇인가를 배우지 못했기 때문에 벌어지는 것이라는 것이 이 엄마의, 그리고 이 영화의 논리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어린아이들이나 좋아할 법한 풍선을 가지고 노는 강도의 천진난만함이나, 보다 더 근원적으로 마치 문명 자체를 배우지 못한 늑대소년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한다. (거칠게 거의 생식에 가까운 육식을 하고, 닭을 직접 잡는 그의 모습. 왜 그는 손질된 닭을 사지 않는 것일까. 손질된 닭이라는 것을 판다는 것을 모르는 것은 아닐까. 농담이다.) 혹은, 엄마에게 "내가 뭐 잘못한 것 있어?"라고 되묻는 모습일 수도 있다. 아무튼 간에 그래서 이 엄마는 마지막 순간에 이르러 강도가 불쌍하다. 왜냐하면 무엇이 어찌되었건 간에, 이 강도에게는 (무엇인가를 가르쳐 줄) 그 누군가가 없었음이 사실이기 때문이다.

 

이번에는 다시 어머니 성모와 아들 예수의 '피에타'. 그렇다면 우리는 강도를 죄를 대속하고 떠난 예수로 볼 수도 있을까. 예수와 강도의 하나의 공통점이 있다면, 그것은 그들이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어떤 것, 오로지 그것만을 알고 있던 존재였다는 점이다. 악마의 기원은 너무 많이 알고 있는 자들이다. 아무 것도 모르는 아담과 이브에게 선악과를 따먹으라고 가르쳐준 자들. 그래서 선과 악이라는 것을 알게 해준 자들. 그러나 예수는 이의 반대편에서 하나만 아는 사람들이 하는 이해되지 않는 말들, 예를 들어 오른뺨을 때리면 왼뺨도 내밀라는 식의 말을 한다. 그것은 너무 많이 아는 자들에게는 바보 같은 말일 뿐이다. 내 오른뺨을 1대 때리면 네 왼뺨을 10대 때리라고, 그것이 악마의 논리이다. (그러고보면 이 인물의 이름 '강도'도 심상치 않음이 사실이다. 예수 대신 풀렸던 자도 강도이고, 예수와 같이 못박혔던 자들도 강도였다.) 그래서 (물론 기독교식으로 볼 때) 유일하게 아는 사랑으로 전 인류의 죄를 대속하고 십자가에 못박힌 예수와 같이, 아무것도 배우지 못한 강도가 유일하게 엄마에게 배운 것, 혹 사랑이라고 부를 수도 있는 바로 그것이 강도를 속죄의 길로 이끌었다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아마도 그 마지막의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줄일 것이다. 그것은 강도의 피가 아니니까. (예수의 마지막에 기적이 있었던 것처럼, 이 마지막에도 기적이 있다. 고속도로에 끝없이 이어지는 붉은 피의 선은 기적의 현장이다.) 그것은 아마도 강도에게 빼앗겼던 모든 사람의 피, 아니 보이지 않는 적과 계속 싸워야만 했던 사람들의 피니까. 김기덕이 늘 원했던 것은 그런 것이었다. 그 참혹함을 기억해달라, 그 피를 기억해달라는 것. 그 피는 실제의 피니까. 실제의 청계천이 그렇게 만들어졌으니까.

 

아직 나는 마지막 질문에 답하지 않았다. 그것을 속죄로 볼 수 있을까. 솔직히 정말 잘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전면에 내세우는 것은 늘 육체의 고통이었지만, 그 이면에는 늘 정신적인 고통이 더 크게 도사리고 있었다. 그래서 그들은 늘 자해를 하거나, 스스로에게 혹은 타인에게 육체의 고통을 가하곤 했다. 그것이 정신의 고통을 누그러뜨리는 방법이라는 것을 아니까. 이 마지막도 사실 그런 비슷한 것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다. 복수가 완성되려면 이 마지막이 이렇게 되어서는 안되었다. 그는 아무 것도 몰라야 했고, 살아 있는 채로 더 고통스러워해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여자의 차 밑으로 들어갔고, 우리는 그녀가 이 어려운 상황을 맞닥뜨리고 나면, 집에 돌아와서는 더 큰 고통에 맞닥뜨리게 될 것임을 안다. (남자가 숨긴 것.) 영화 속에는 불길한 이미지들이 떠돌지만, 영화 속에서 가장 인상깊게 남아있는 것은 그 공간들이다. 강도가 텅빈 눈으로 들여다보는 흐릿한 창 안쪽의 공간들. 강도가 올까봐 공포에 떠는 사람들이 숨어 있는 그 이상한 작은 지옥들, 그리고 그 작은 지옥이 합쳐진 거대한 지옥 청계천이 있다. 강도가 사라졌어도 그 수많은 지옥과 지옥에서 만들어지는 증오들은 여전히 건재하고(그것은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죄많은 인간들의 죄를 모두 다 떠안고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힌지 2000년 가까이 되었지만, 세상은 여전히 수많은 증오들로 가득하니까.) 김기덕은 기억하는 것 외에 다른 방법은 가르쳐주지 않았다. 그러니까 우리가 기억해야 했던 것은 예수의 부활과 샤방샤방한 천국이 아니라, 예수가 한걸음 한걸음 내딛을 때마다 흘리던 그 피였다. 그 피를 기억하라.

 

 

덧.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덧붙이고 싶다. 김기덕의 영화에서 봉준호나 박찬욱의 그림자를 보게 되는 것은 사실 그리 유쾌하지만은 않다. 단적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김기덕이 봉준호나 박찬욱 식이 된다면 김기덕은 어디에 있지? 위에서도 이야기했지만, 그간 김기덕 영화를 둘러싸고 있던 불가해한 '무언가'가 이 영화에서는 한결 약해진 느낌이고, 그것은 어떤 장점을 드러내는 것처럼도 보이지만, 동시에 그 '불가해함'에 가려져 있던 김기덕 영화의 단점들을 도드라지게 하는 경향이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서라면 거친 감정선 같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을 것이다. 강도는 너무 빨리 엄마와 가까워지고, 너무 빠르게 변하는 것처럼도 보인다. 박찬욱이나 봉준호 식이 된다는 것은 필연적으로 비교의 도마 위에 스스로 오르게 된다는 의미도 된다.) 즉 이를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두 가지의 영화가 있다. 보는 이를 버티게 하는 영화와 버티게 하지 못하게 하는 영화. 김기덕의 예전 영화들과 <피에타>가 다른 점은 텐션을 끌어올리기는 하지만, 이 <피에타>는 결정적인 순간에 숨쉴 공간을 남겨놓는다는 점이다. 그러나 어쩌면 우리는 그 숨쉴 수 없는 한계점에 도달하려고 그간 김기덕의 영화를 보았던 것은 아닐까.

 

그리고 그것이 결국 김기덕 영화의 매력이었으니까. 인간은 불가해한 것에 대해서는 무서워하거나, 경외하지만, 이해할 수 있게 되면 곧 관심을 잃어버리게 마련이니까. 다음 영화를 기다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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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9-13 23: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 누나가 피에타를 보시고 무슨 감상을 이야기하실지 기다리고 있음.

넙치 2012-09-14 13: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맥거핀님! 글 좋네요^^

맥거핀 2012-09-15 13:17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넙치님 피에타 글도 잘 읽었습니다.^^

카스피 2012-09-14 2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넘 멋진 영화 리뷰시네요^^

맥거핀 2012-09-15 13:18   좋아요 0 | URL
좋게 읽어주셔서 감사드려용.^^

프레이야 2012-09-15 08: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리뷰, 역시 맥거핀님^^ 다시 많은 걸 생각나게하네요.

맥거핀 2012-09-15 13:19   좋아요 0 | URL
요새 많은 영화가 그렇지만,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하는 것은 틀림이 없는 영화인듯 싶습니다. 고맙습니다.^^

꽃도둑 2012-09-15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그닥 좋아하지도 많이 보지도 않지만 피에타 예고편 보고는 막 설레었어요.꼭 봐야지 하고 있었는데 맥거핀님의 리뷰라니...너무 근사해요,,^^

맥거핀 2012-09-17 23:40   좋아요 0 | URL
아직 안 보셨으면 챙겨보세요. 김기덕 영화를 좋아했던 관객이라도, 그리고 싫어했던 관객이라도 충분히 볼만한 영화라고 생각합니다.^^

2012-09-16 0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나 잘 쓰셨다는..ㅋ 한 번 보고 이런 글이 써져요?! 여튼 영화 이해에 많은 도움이 되었어요.^^

맥거핀 2012-09-17 23:43   좋아요 0 | URL
좋게 읽으셨다면 저야 기쁘구요. 좋은 영화는 늘 많은 이야기거리를 만들 수 있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Shining 2012-09-16 2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방금 인터넷 기사를 읽었는데, 피에타가 현재 관객수 30만명을 넘긴 것도, 손익분기점이 25만명이라는 것도 놀랍군요.

저도 마지막 말씀에 공감합니다. 급작스러운 변화가 의아했고 봉준호/박찬욱의 느낌이 들었어요. 딱 꼬집어 어디라고 말하긴 어렵지만 옅은 기시감이... 단테의 <신곡>에 비유하는 부분이 정말 흥미롭군요.

...못됐어요, 이렇게 글을 잘 쓰면 다른 사람은 어쩌라는 겁니까!!
제가 피에타 리뷰 안 쓰는 건 맥거핀님 때문이에요(저도 배웠어요, 떠넘기는 게 진리ㅋㅋ)_-

맥거핀 2012-09-17 23:51   좋아요 0 | URL
관객수 얼마나 예상하세요? 언론에서는 <나쁜 남자>의 기록을 깰 수도 있다고 하던데. 나쁜 남자가 70만인가..라고 그러던데요, 저는 개봉관 사정이 좀 받춰준다면, 그 이상도 갈 수 있으리라고 봐요. (근데 '광해'가 개봉을 앞당기면서... 좀 양아치 짓을 하긴 했더군요. 솔직히 말해서 저도 보고 오긴 했습니다만, 영화 자체로서는 그렇게 나쁘지는 않아서 꽤 관객이 들겠다 싶기는 하더군요.)

근데 아무튼 김기덕은 봉준호나 박찬욱이 될 수는 없어요. 김기덕을 폄하해서 하는 발언도 아니고, 봉준호나 박찬욱을 낮게 보는 것도 아니구요. 김기덕은 봉준호나 박찬욱이 가질 수 없는 장점들이 있어요. 그걸 더 극대화시켰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근데 이미 좋은 리뷰를 쓰셨던데요.^^

Shining 2012-09-18 12:15   좋아요 0 | URL
전 이 영화의 손익분기점이 25만명이라는데 사실 좀 놀랐거든요; 근데 보니까 제작비는 1억 5천, 7억 여원이 마케팅비라고 하네요(역시나). 지금 분위기 타서.. 잘만 하면 70만명은 넘을것 같군요, 다만 일시적 관심일 가능성이 높아서 슬리퍼 무비가 되기엔 약간 무리가 있을 것 같아요..

광해 보셨군요. 이병헌도 광해군도 팩션도 관심이 없는데 이상하게 이 영화는 보고 싶더군요. 이야기는 뻔한데 독특한 아우라 같은게 있더군요.

그럼요, 김기덕이 봉준호나 박찬욱이 되서는 안 되죠. 저도 폄하의 의사는 없구요ㅎㅎ 반대로 봉준호나 박찬욱이 김기덕이 되는 것도 반대입니다.

하하하하. 무슨 말씀을. 맥거핀님 덕분에 알라딘에 더 이상 피에타 리뷰가 안 올라오는 거 아시죠?(근거없이 음해하는 중....)

덧) 그런데 <나쁜 남자> 관객수가 70만이에요? 이것도 쇼킹한데요_-

맥거핀 2012-09-19 00:57   좋아요 0 | URL
음..근데 사실 지금 돌아가는 분위기를 보니 광해 외에는 그리 막강하다고 할만한 영화가 없어서 피에타로서는 나쁘지 않은 분위기 같습니다. 저도 아무튼 피에타에 관객이 꽤 들었으면 좋겠어요. 그래야 김기덕 감독이 의욕이 생겨서 계속 영화를 찍을 것 같으니..

광해는 뭐 볼만해요. 괜찮아요. 아무튼 이병헌 씨가 연기를 잘해요.

허허허. 서평단 책 리뷰도 써야하고, CINDI 기록 2도 써야하고, 몇 개 글감도 있는데, 다 귀찮아서 이러고 있네요. 그러니 음해 마세요. 허허허.^^
 

 

무인지대 (No Man's Zone), 후지와라 토시, 2011
동경공원 (Tokyo Koen), 아오야마 신지, 2011

 

 



영화는 거의 완전히 형체를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후쿠시마의 해변을 길고 느리게 패닝하며 시작한다. 거기에 애초에 무엇이 있었는지 알 수 없을 정도로 파괴된 시설물들, 그것은 거의 복구의 엄두가 나지 않을 정도다. 부러진 목재들과 콘크리트들, 여러가지 잡동사니들, 자동차들, 부러진 잔해들, 그리고...그 밑의 어딘가에 아직 있을지도 모를 시체들. 그리고 영화는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런데 이것은 좀 흥미로운 구조다. 화면은 재앙이 일어난 후 거의 텅빈 후쿠시마를 비추고 있지만, 화면의 현장음은 거의 배제되어 있고, 두 가지의 다른 음성이 깔린다. 하나는 감독의 생각을 그대로 드러내는 영어 나레이션이다. 이 영화 <무인지대>의 감독 후지와라 토시는 할 말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인다. (그는 심지어 이례적으로 영화 시작전 발언을 자청해 관객에게 이 영화를 '이런이런 식으로 봐달라'고 '호소'했다.) 나레이션은 매우 직접적이고, 좀 많은 편이며, 더구나 중언부언하는 경향마저 있다. 다른 하나는 이 화면을 보는 어떤 사람들의 목소리이다. 처음에는 이들이 누구인지 모르지만, 보다보면 이 목소리는 감독이 찍은 이 영상을 뒤늦게 (대피소 같은 곳에서) 보고 있는 후쿠시마 주민들의 것임을 알게 된다. 왜냐하면 이들의 발언은 "아..저기는 이게 있었는데..", "저것은 누구의 집이 있던 자리였는데.." 등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영화 중간에 (감독의 목소리를 대변하는) 나레이션과 맞물려 어떤 효과를 낸다. 나레이션은 말한다. 이것을 어떤 '스펙터클', '파괴의 현장'으로 보지 말 것. 그보다는 그 파괴 전에 있었던 '무엇인가'를 생각하며 볼 것. 즉 우리는 재난을 대부분 어떤 거대한 파괴, 가공할만한 힘, 거대한 비극의 현장으로만 받아들인다. 아마도 후쿠시마의 해변을 패닝하는 첫 장면을 대부분의 관객이 그렇게 생각했을 것이다. 참 쓰나미란 무서운 거구나, 저런 엄청난 파괴를 불러 일으키는 자연의 힘이란 게 정말 가공할 만한 것이구나. 그런데 흥미롭게도 후쿠시마의 무인지대의 공간들에 주민들의 목소리를 오버랩해서 보여주던 감독은 다시 영화의 중반부, 그러니까 굳이 나누자면 1부가 끝나가는 시점에 다시 처음의 그 패닝 장면을 붙인다. 이것을 보는 관객들의 시선은 처음과 달라질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그 중간에 우리는 주민들의 목소리를 들었기 때문이다. 그들은 그 완벽한 파괴의 공간, 깡그리 사라져버린 듯한 무의 공간에서도 필사적으로 무엇인가를 찾아내고 있었다. 저긴 뭐가 있던 자리인데, 누군가가 살던 공간인데. 그러므로 우리는 그 짧은 패닝의 과정에서, 그 엄청난 잔해의 스펙터클 속에서도 무엇인가를 찾아내게, 상상하게 된다. 저 자리는 뭐가 있었던 자리 같은데, 라고 말이다. 그리고 영화는 2부로(영화 상에서 명확하게 1, 2부를 구분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넘어가 이타야 같은 후쿠시마 주변지역, 다시 말해서 소거 명령이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에, 그리고 사실 어디에도 갈만한 곳이 없으며, 갑자기 자신의 생활터전을 버릴 수 없기 때문에 그곳에 아직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를 시작한다.

이것에 담겨 있는 질문은 사실 그렇게 간단하지만은 않다. 아직 이 근처에 살고 있는 사람들을 자신의 목숨이 아까운 줄도 모르는 멍청한 사람들,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무대책한 주장에 속아넘어간 사람들이라고 비난할 수도 있지만, 사실 이곳에서 만난 상당수의 사람들은 일본 정부의 안전하다는 식의 주장이 아무 근거가 없음을 잘 알고 있다. 예를 들어 그곳에서 만난 한 어민은 그런 주장들이 대부분 말도 안되는 것임을 간단하게 설명한다. 정부는 자신이 살고 있는 곳에서는 조업을 금지했으나, 그 곳에서 불과 몇 백미터도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는 물고기를 잡아도 된다고 허가했고, 이는 그의 입장에서 보면(당연히 우리의 입장에서도)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바닷물에 어떤 구획선이 그어져 있지 않음은 당연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마찬가지의 주장을 인간의 경우에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즉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제한되었고, 근방 몇 킬로미터의 주민들에게 모두 소거 명령이 내려졌는데, 그 곳에서 불과 몇 킬로미터도 떨어져 있지 않은 이타야 같은 곳에서는 살아도 된다? 이것은 산 자에게 물을 수도 있지만, 죽은 자에게 물을 수도 있는 질문이다. 왜냐하면 후쿠시마는 사고 직후 출입이 통제되어 75일 만에 구조와 복구 활동이 시작되었기 때문이다. 즉 혹시라도 운이 좋게 살아 있었을 어떤 사람들은 무려 75일 간이나 죽음을 기다리고 있어야만 했다. 

아마 두 가지 정도를 더 이야기할 수 있을 것 같다. 하나는 인간이라는 동물은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물건을 만들어낸다는 것. 후쿠시마가 무서운 것은 그것이 우리 자신의 능력에서 어쩔 수 없는 거대한 자연재해와 같은 것에서 전적으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애초에 전혀 콘트롤할 수 없는 일을 시작했기 때문이다. 사고 직후 일본 정부의 대응은 거의 무대책에 가까웠고, 그것은 일본 정부가 유달리 무능해서가 아니라, 애초에 그 사고에 대한 대응 자체가 인간이 통제할 수 있는 일의 범위 안에 들어가 있지 않았으며, 사고 이후에 이어질 일들도 '통제 가능한' 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즉 우리 인간이 정말 무서운 점은 그것에 문제가 생겼을 경우 자신이 통제할 수 없음을 알고 있음에도, 어떤 일을 시작해버린다, 만들어버린다는 점이 아닐까 싶다. 다른 하나는 영화(필름)의 임무 중의 하나는 기록한다는 것, 그래서 그것이 있었던 일이라는 점을 후세의 누군가에게 기억하게 하는 것이라는 점이다. 나레이션에도 나오지만, 거의 후쿠시마와 비견될 정도의 참혹한 재해들은 예전에도 있었으나 그것은 거의 기록되지 않았으며, 그로 인해서 사람들의 기억에서 대부분 사라져버리고 말았다. 즉 기록되지 않은 것은 기억에서 사라지며 때로는 조작된다. 예를 들어 어쩌면 광주민주화운동이 실재했었다고 우리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에는 몇 개의 희미한 기록필름이 큰 역할을 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기록은 두 가지의 임무를 가진다. 하나는 그 기록된 것을 보는 사람에게 그 기록되지 않은 나머지, 혹은 기록의 이면에 있는 것을 상상하게 할 것, 그리고 다른 하나는 일어나지 않아야 할 일을 되풀이되지 않게 할 것. 그것을 어떻게든 기록함으로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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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으로 본 영화는 기다렸던 아오야마 신지의 <동경공원>. 사실 솔직히 말해서 생각했던 것보다는 조금은 평범하다는 인상이 짙었지만, 사실 아오야마 신지에 대해서 가지는 인상은 그의 <헬프리스>, <유레카>, <새드 배케이션>의 이른바 '가족 3부작'을 보고 가지게 된 것이 전부이고 그의 그 가족 3부작이 워낙 수작들이기 때문에 그러한 생각을 가지게 된 것이 아닌가 싶다. 영화는 흔한 일본식 청춘물의 외피를 두르고, 그 안의 과육을 보여줄듯 말듯 하다가 결국 안보여주고 끝나는 듯한 느낌인데 전체적으로는 느린 호흡으로 차분히 관조할 수 있게 만드는 영화였다. 

영화의 중심을 차지하고 있는 것은 제목에도 있는 '공원'이라는 공간이다. 사실 현대사회에서 공원이라는 공간은 조금은 특이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고 보여지는데, 왜냐하면 공원이란 사실 현대의 도시 공간에서 거의 유일하게 출입자격을 묻지 않는 곳이기 때문이다. (물론 이는 출입료를 받는 어떤 빌어먹을 공원들에 해당되는 이야기는 아니다.) 현대 사회의 거의 모든 공간들은 사실 제각각의 출입의 자격과 지위를 규정하고 있고, 때로는 물리적으로, 때로는 묵시적으로 해당되지 않은 사람들의 출입을 제한하고 있다. 그러나 공원은 거의 유일하게 누구나 드나들 수 있는 공간이며, 따라서 누구나 쉽게 모일 수 있는 공간이기도 하다. (무료한 할아버지들이 주로 드나드는 탑골공원이나, 실직자들이 공원에 가는 당연한 클리세를 떠올려보라.)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공원이 무질서의 공간이나, 아무런 규칙도 없는 곳은 아니다. 모든 공원에는 암묵적으로 따라야할 규정들이 있으며, 그것은 그곳에 있는 사람들에게 충분히 자유롭긴 하나 어느정도 제한된 자유만을 허한다.

아마도 이러한 공원과 같은 것이 하나의 비유로서 등장하는 이유가 있는 것 같다. 영화 중간에 한 남자의 대사를 통해 직접적으로 나타나기도 하지만, 마치 이 공원과 같은 사회가 되는 것이 아오야마 신지가 믿는 현대 사회가 지향할 지점이 아닌가 싶다. 그것은 전작 <새드 배케이션>에 그려졌던 '마미야 월드'의 명맥을 잇는 것으로, 여러 다양한 스펙트럼의 사람들을 모두 포용하는 공간, 최소한도의 규칙만 지키면 서로를 보호하며 터치하지 않는 공간으로서의 공원이자 사회의 모습이다. 즉 딱딱한 건물 안에만 있다가 넓은 공원에 가면 모두들 약간은 정신이 말랑말랑해지는 것처럼, 사회는 조금 더 말랑말랑한 정신을 가진 사람들이 필요하고, 공원은 아니 사회는 그런 다양한 인물을 감싸 안아야만 한다. 영화 <동경공원>은 그런만큼 다양한 인간군상을 그려내는데, 여기에는 아내를 의심하는 의처증환자이자 치과의사, 바를 운영하는 게이, 모든 것을 영화로 비유하는 영화광, 서로를 좋아하지만 자신들의 한계를 알고 있는 의붓남매, 심지어는 죽었는데도 이승에 머물고 있는 유령마저 포함된다. 이들은 때로는 자신을 인정하지 못해 괴로워하고, 상대방을 의심하고, 자신에 대한 확신을 얻지 못해 힘들어하지만, 감독이 결국 이들 손에 쥐어주는 것은 작은 카메라 뿐이다.

즉 이렇게 다양한 스펙트럼의 인간들, 이들을 넓은 공원에서 맨눈으로 넓게 보면 좋겠지만, 그렇게 도저히 할 수 없으면 작은 카메라를 손에 들고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로 이들을 볼 것. 왜냐하면 우리는 적어도 자신이 가진 그 작은 사각의 창안에 담긴 피사체에는 애정을 가지게 되기 때문이다. 어차피 이 드넓은 공원 속에서 모든 인물을 우리는 우리의 맨눈으로 모두 담아낼 수는 없다. (인간에게는 그럴만한 능력이 없다.) 그렇다면 적어도 자신의 가까이에 있는 인물들부터 따스한 눈으로 바라보며 관계를 쌓으려고 노력할 것. 작은 카메라는 먼 곳을 찍으라고 발명된 물건이 아니다. 먼 곳에 초점을 맞추면 가까운 데는 흐려지게 마련. 그렇게 우리는 가까운 곳에서부터 먼 곳으로 나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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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09-11 2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도쿄공원]을 전에 봤는데요. 유령 너무 귀여웠어요. [유레카]를 만든 감독이란 건 몰랐고 여배우를 좋아해서 그냥 보기 시작했는데, 계속 공원에 있는 여자를 감시(?)하는 남자애가 지루해져서 중간에 끈 것 같은데, 저 감독이라면 이런 얘기를 할 수도 있겠구나 하는 생각이 들고.

[무인지대]라는 영화는 일본이 만들 수 있는 다큐영화를 짐작케하는 정점처럼 느껴지네요, 이 나라는(제가 일본영화광은 아니지만) 늘 무언가의 가해자 입장이 훨씬 강하다보니까 어떤 기록영화를 만들어도 타국의 관객 입장에선 공감을 불러일으키기 힘들 듯한데, 저만 그런가요.. 일본문화를 좋아하는 어떤 지점의 이야기가 분명히 있는데 완전히 받아들이기가 쉽지는 않아요. 왜 일본 것만 두개예요, 기록 2탄도 있는 거겠죠? :)

맥거핀 2012-09-13 00:32   좋아요 0 | URL
전 사실 <도쿄공원>은 너무 부드럽게 끝나버려서 약간 어리둥절했어요. 뭔가 좀 더 센 얘기를 기대했었던 모양. 여배우는 그 영화광으로 나온 배우 말인가요, 아님 그 남주 누나? 그 남주 누나로 나온 배우는 예전에 '춤추는 대수사선'보고 기억하고 있었는데, 오랜만에 얼굴봐서 반가웠어요.; 암튼 일본 영화는 뭔가 약간 손발이 오그라드는 특유의 무언가가 있어요. 그것은 아마도 제가 한국인이니 느끼는 거겠죠.

뭐 근데 아무튼 거대한 재난이 일본에서 일어난 것은 사실이고, 그것은 분명히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었죠. 이 영화는 우리가 피해자다, 도와달라는 식이 아니라, 이 일을 기록해둔다, 하나의 본보기로 해둔다는 느낌이 강해요. 근데 우리나라에서 요새 원전을 둘러싼 이야기들을 보면, 이렇게 큰 경고가 있는데도 재앙에 대해선 아무 생각이 없는 모양. 위에도 썼지만, 재앙이 일어나면 이는 '대책' 따위로는 해결할 수가 없는 일인데도요.

2탄도 조만간 써야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