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차, 변영주, 2012

 

 

 

(글에 영화의 내용 및 결말과 관련된 부분이 들어 있습니다.)

 

 

뒤늦게 본 영화 <화차>는 예상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를 그려내고 있는 영화였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대강의 스토리와 결말을 알고 영화를 봤음에도, 영화는 생각했던 것보다 막다른 세계를 그려내고 있었다. (그러므로 이 글은 철저히 영화에 기반한 글이다. 소설과의 비교를 원하시는 분들은 다른 글을 읽으시길.) 아마도 이는 변영주 감독의 선택일 것이다. 처음 변영주 감독이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 <화차>를 영화화한다고 했을 때, 약간 고개를 갸웃했는데, 이 소설의 어떤 부분이 감독의 흥미를 끌었을지 대략 상상이 간다. 소설을 읽지는 않았지만, 리뷰들을 보면 소설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로서 말그대로 추리적인, 미스터리와 관련된 지점에 상당부분 초점이 맞춰져 있는 것 같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미스터리적인 부분이 상당히 걷어내어져 있고, 그 나머지 부분들을 어떤 정서적인 부분이 메우고 있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의외로 상당히 잉여적인 씬들이 많이 보인다. 즉 영화의 흐름상 전체 구도와 크게 관계가 없는 부분인데도, 짚고 넘어가는 부분들이 있다. 만약 이것이 추리물을 지향하고 있다면, 이 부분들이야말로 눈을 크게 뜨고 보아야 할 것이다. 대체로 추리물들에서 단서들은 이런 부분에 숨겨져 있었으니까. (반면 최근에는 이를 역이용하여 도리어 이 부분에 맥거핀을 심어놓는 경우들이 더 많다.) 그러나 이 영화의 잉여적인 부분들은 대체로 정서와 관련되어 있다. 예를 들어 남자주인공 문호(이선균)가 동물들을 진료하고 수술하는 모습이나, 문호의 사촌형이자 차경선(김민희)의 뒤를 쫓는 종근(조성하)과 관련된 부분들은 걷어낸다 해도 전체 흐름과 크게 관계가 없으며, 그게 단서나 맥거핀의 기능을 하지도 않는다. (예외적으로 한 장면이 있다.) 그것은 도리어 이 영화의 정서적인 부분을 이끌어가는데 기능을 발휘하는 것처럼 보이는데, 그로 인해 이 영화를 미스터리 혹은 스릴러물로 보게 되면 리듬이 자꾸 끊어지는 것처럼 보인다. (더구나 이를 추리물로 보면 필요할 때마다 알아서 단서가 주어지는, 말 그대로 관객의 '추리'가 필요하지 않은 기이한 추리극이다.)

 

그렇다면 왜 이 영화는 그 잘짜여진 미스터리나 스릴러를 버리고, 어떤 정서적인 세태극으로 가려는 것일까. 변영주 감독을 위해 한가지 변명을 해주자면, 원작 소설 <화차>는 지금으로부터 거의 20여년 전에 출간된 소설이라는 점이다. 20년 전의 일본과 사회적 배경과 사회적 정서도 많이 달라졌을 뿐더러, 단순히 스토리만 놓고 보았을 때, 그것은 이미 읽을 사람은 어느 정도 읽은, 사건도 범인도 어느정도는 예상가능한 이야기라는 점이다. 즉 이것이 소설과 동일하게 미스터리로 갔을 경우에는 원작의 팬들은 그 재현을 환영할지 몰라도, 지금에 이르러서는 뭔가 뻔한 예상치를 벗어나지 않는 영화가 되어버리고 만다. 그래서 아마도 감독은 이 소설을 가지고 지금의 우리의 이야기를 해보자는 식으로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어떤 의미에서 모든 원작의 활용, 혹은 리메이크는 과거 그 원작이 탄생한 시점이 아니라, 보다 중요해지는 것은 현재라는 시간, 현재에 재현되는 그 원작의 의미이다. 즉 왜 하필이면 지금 2012년에 이 <화차>의 이야기가 필요한가, 라는 질문. 현재에 근거하지 않는 과거의 단순 재현은 그저 회고적 취미일 뿐이다.) 그렇다면 중요하게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이 영화로 이야기하고 싶은 현재적 시간들일 것이다.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 사회는 어떤 곳인가. 그것은 이미 얘기한대로, 예상한 것보다 훨씬 막막한 세계이다.

 

원작이 있는 영화들의 경우 그 영어제목이 보다 직접적으로 그 영화의 주제를 설명하는 경우가 종종 있다. 예를 들어 '완득이'나 '은교' 같은 경우는 원작의 제목을 그대로 따온 경우이면서, 그 고유명사인 제목들은 영화의 배경을 전혀 모르는 사람에게 아무런 추측도 제공하지 못하지만, 그 영어제목인 'Punch'나 'Muse'같은 경우에는 그 내용이나 주제에 보다 직접적으로 가깝게 다가가 있다. 이 영화는 조금 케이스는 다르지만, 영화의 내용을 보면 '화차'라는 제목보다 그 영어제목인 'Helpless'가 조금 더 가까이 가있지 않나 싶다. 즉 신용사회의 이면에 있는 숨겨진 낭떠러지로 어떠한 제어도 없이 달리는 '화차', 그 욕망이 촉발한 작은 불씨의 무서움과 관련된 제목인 '화차'와 달리 이 영화 <화차>에서 그려내고 있는 세계는 그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속수무책인 세계, 예를 들어 아오야마 신지가 동명의 영화 에서 그려냈던 것처럼 어떠한 도움도 가능하지 않은, 오로지 자신의 힘으로 기어나올 수밖에 없는 세계, 그야말로 'help'가 'less'되어 있는 세계다.  

 

 

마지막에 문호는 경선을 다시 만나지만, 그녀를 다시 보내준다. 아니 고쳐서 말하면 그녀를 보내준다기 보다는 그녀를 감당할 재간도 의지도 없다고 말하는 것이 정확할 것이다. 이것은 비겁해보이기도 하지만, 이 과정을 보는 관객은 아마도 문호를 어느정도는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왜냐하면 우리는 이미 전남편과의 관계에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를 이미 보았기 때문이다. 즉 과정은 조금 다를지 몰라도, 문호는 경선의 전남편과 동일한 선택을 했고, 그것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인 것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영화 속에서 그녀는 일종의 시한폭탄과 같은 존재가 되어버렸기 때문이다. 그녀는 본인이 지옥으로 달리는 불수레이자, 그 옆에 있는 사람까지 같이 태워 달리는 시한폭탄이다. 즉 그러므로 이러한 문호의 행위는 일종의 폭탄돌리기가 된다. 그러니 문호가 자신을 사랑하기는 했었냐고 묻고, 경선이 아니라고 답하자 그녀를 놔주는 것은 일종의 거짓된, 비겁한 퍼포먼스(이나 이해할 수는 있는 것)이다. 아마도 문호의 죄책감은 그런 것에서 비롯된 것일 것이다. 적어도 자신의 눈앞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으니까. 그가 그녀를 그곳에서 조금이라도 포용하려는 태도를 보였더라면, 그녀의 (적어도) 그곳에서의 죽음은 막을 수 있었다. (이 마지막 뒤에 문호의 품에 있는 경선의 모습을 돌려 보여주는 것은 아마도 그런 부분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대신 문호는 묻는다. "니가 사람이야?" 여러 리뷰들에서 보면 이 우문이 여러 사람들의 실소를 터뜨리게 했던 것 같은데, 나는 그다지 웃기지는 않았다. 왜냐하면 이 질문이 결국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의 조건을 묻는 것처럼 보였기 때문이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인간이 될 수 있는 조건, 그것 중의 하나는 물론 파산하지 않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강현이 다큐멘터리 <파산의 기술>에서 잘 보여준 것처럼, 우리 사회에서 파산한 자는 일종의 범죄자와 같은 취급을 받는다. 그들에게 하는 협박과 폭력은 상당수 정당화되며(이 영화에서도 사채꾼(조폭)이 경찰을 부르라며 큰 소리를 치는 장면이 있다), 그들은 TV에 나와 돈을 다 갚고 다시 보통인의 지위를 회복할 것을 간증한다. 그리고 경선은 대답한다. "나 사람 아니야. 나 쓰레기야." 이 대답이 막막하게 만드는 것은, 결국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이야기가 자본주의 사회가 만들어낸, 청소해야 할 대상으로 여겨지는 인간쓰레기가 잉여인간이 되려다 그나마도 실패하는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차경선이 타겟으로 삼았던 강선영은 종근이 말한대로, 어느 순간 사라져 버린다해도 아무도 알 수 없는, 아무도 관심조차 가지지 않는 잉여인간이다. 그러나 차경선에게는 가능한 선택지가 없다. (뒤에 나오는 선택지들도 그렇게 나아보이지는 않는다.) 그것은 한편으로 그 뒤를 쫓고 있는 종근도 마찬가지다. 처음에 말한대로 이 영화에는 잉여적인 씬들이 상당히 나오고, 그것의 대부분은 종근의 배경과 관련되어 있다. 왜 이 영화에는 그토록 종근의 이야기가 필요한 것일까. 아마도 그것이 감독이 그려내고자 하는 세계이기 때문일 것이다. 종근의 삶 역시, 그 자신이 말한대로 거의 끝난 것처럼 보이는 잉여의 삶이니까. 그것이 아마도 이 영화가 그려내고 있는 어떤 비정함일 것이다. 즉 변영주가 보는, 그려내는 이 세계는 한 인간쓰레기가 그보다 겨우(이 단어를 쓰는 것을 용서하시길) 한 단계 위인 것처럼 보이는 잉여인간이 되려다 다른 잉여인간의 추적으로 인해 실패하는 이야기이다. 이 무섭고도, 막막한 세계에는 어떤 엘리베이터도 어떤 에스컬레이터도 어떤 출구도 없다.

 

그러므로 어쩌면 긴 에스컬레이터를 올라 어디론가로 가려다 결국 막다른 낭떠러지에 몰리게 되는 이 마지막은 아마도 예정되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그 에스컬레이터의 중간에는 그 에스컬레이터에 어쩌면 같이 올라타 줄 수도 있는 문호가 있었지만, 그는 그녀를 놔버렸고, 그녀는 끝까지 올라가버렸다. 그 끝에는 낭떠러지가 있음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그 낭떠러지로 그녀를 보냈고, 스스로 청소하도록 했다. 그러고보면 그녀가 처음 사라진 장소는 고속도로 휴게소였고, 다시 나타난 곳은 역의 대합실이었다. 역과 고속도로 휴게소. 끊임없이 이동하여야만 하는 사람들의 공간. 유목하는 자들은 늘 정주하는 꿈을 꾸고, 그 정주의 시도는 늘 한낱 꿈으로 돌아간다. 그래서 아마도 경선은 모델하우스를 찍은 사진을 그렇게 몰래 끼워두었을 것이다. 물론 그녀는 정주에 실패했고, 그녀의 시체는 여전히 기차길 한 가운데에 놓여져 있다. 더 절망적인 것은 아마도 그 이후에 문호도 꿈을 꿀 것이라는 사실. 이 모든 것이 그저 없었던 과거로 돌아가는 꿈. 그녀의 전남편이 원했던 것처럼 말이다.

 

 

 

덧.

결국 이들을 구원할 수 있는 것은 어떤 사회적인 안전망이다. 가족도, 친척도, 친구도, 종교도 이들을 구원할 수 없다면, 이 사회가 무엇을 할 수도 있지 않을까. 좋은 사회를 꿈꾸는 감독 변영주가 2012년의 한국사회에 다시 이 이야기를 끌고 들어온 것도 그런 맥락이 아닐까 싶다. 아무런 사회적 안전망이 없는 사회, 우리는 이 사회에서 기껏 폭탄돌리기나 하고 있어도 좋습니까, 라는 물음. (물론 세상은 늘 반대로 가니까. 현재 우리 사회에서 가족과 친척과 친구와 종교가 버리기 전에 늘 먼저 나서는 것은 사회이니까. 폭탄을 안전하게 제거할 사회적 안전망은 커녕, 폭탄의 세기만 점점 커진다.)

 

미스터리물의 껍질을 벗겨내도 한가지 아쉬운 점이 있다면, 여전히 문호의 캐릭터와 관련된 부분이다. 정서적인 부분을 강조하려는 영화라면 어떤 심리적인 요인, 동기를 묘사하는 것이 중요한 부분일 텐데, 문호가 그녀를 끝까지 추적하려는 동기는 여전히 부족한 것처럼 보인다. 왜 그는 그녀의 실체를 알고난 후에도 그녀에 대한 추적을 멈추지 않는가. 동물을 돌보고, 수술하는 잉여적인 씬들과 이러한 부분들이 관계가 있는 것처럼 보이는데, 단순히 로맨스로 치부하기에는 여전히 모호한 구석이 있다.

 

조성하 씨는 예전에 다른 작품들에서는 그다지 연기를 잘하는 배우라고 생각해 본 적이 없는데, 이 영화를 보고 나니, 이 아저씨가 꽤 연기를 하는 편이구나, 라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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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오 2012-07-04 20:2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변영주가 8년만에 작정한 영화치곤 조금은 시시하군요 ㅋ

맥거핀 2012-07-05 13:38   좋아요 0 | URL
아..<발레교습소> 이후에 8년만인가요..뭐 저는 <발레교습소>도 괜찮았고, 이 영화도 괜찮았어요.

이진 2012-07-04 2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화차>를 보며 단 한번도 웃은 적이, 실소를 지은 적도 없는데, 이 영화를 보며 웃을 수 있다는 게 부러울 따름입니다. 영화 <화차>는 매우 신선하고 과장해서 충격적이기까지 했네요. 영화를 보면서 내내 든 생각이 "이 영화, 참 잘 만들었다." 은교와 화차 두 작품 모두 소설을 먼저 읽고 영화를 차례로 읽었는데요, 은교는 소설의 퀄리티가 훠얼씬 뛰어났다고 생각되는 반면 화차는 소설과 영화의 퀄리티 갭이 거의 없다고 봐요. 아니 소설 영화 따지는 것 필요없이 소설과 영화는 거의 다른 이야기. 어쨌든 배우들의 연기보다 영화 자체가 좋았달까요. 그렇다면 변영주 감독이 좋은 거군요. ^__^

한 가지 제 시점에서 아쉬운점을 꼽자면 영화를 다 보고나서 생각해보건대 개인 파산의 이야기가 홀라당 해 버린거 같아요. 내가 놓친건가...음.

맥거핀 2012-07-05 13:46   좋아요 0 | URL
저는 위 글에 쓴대로 소설을 읽지 않아서 소설은 어떤 정도인지 잘 모르겠어요. 그러나 뭐 아무튼 그렇게 스테디셀러인 소설은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이유가 있겠죠. 당연히 어느 정도 퀄리티도 될테고..변영주 감독은 방송에서 나와서 하는 말이나, 여러 참여하는 활동들을 봐도 상당히 사회적 의식이 강한 감독이지요. (가끔 그런게 도리어 창작활동에는 독이 되는 사람들도 있지만요.) 저는 변영주 감독이 그런 것에서 약간 깎아먹는 게 있기는 하지만, 능력이 기본적으로 있는 감독이라고 생각을 해요.

다른 리뷰에 보니 경선에게 너무 가혹한 지위를 부여한 것, 차라리 선영같은 정도였으면 어땠을까 하는 의견도 있더군요. 확실히 경선은 이 영화에서 자신이 할 수 있는 부분이 거의 없는 캐릭터니까. 연민은 되지만, 또 쉽게 공감이 가기 어려운 캐릭터인 것은 사실이죠. 개인 파산과 관련된 기본소설의 메시지와도 상당히 달라지는 부분이 여기에 있는 것 같고..

프레이야 2012-07-05 08: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화차의 영어제목이 와닿네요. 잘 지은 것 같아요.
원작과 내용상 말하고자 하는 건 크게 다르지 않은데
전, 원작의 결말이 좀 더 마음에 들었어요. ^^
변영주가 고른 여주인공은 역할에 잘 맞는다는 느낌도 들었구요.
맥거핀님의 리뷰는 늘 참 좋습니다. 다시 영화와 원작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맥거핀 2012-07-05 13:53   좋아요 0 | URL
원작은 더 모호한 결말이라고 하죠? 저도 사족이라고 느껴지는 장면도 있고, 이런건 굳이 설명하려 들지 않아도 괜찮은데..하는 생각이 드는 장면도 있었어요. 그러나 용산역 시퀀스만큼은 꽤 전체 구축이 좋았다고 생각합니다. 그 마지막에서 끊어버린 것도 좋았구요. 파토스가 기본적으로 꽤 센 영화입니다만, 그 파토스의 강도를 그렇게 한 것은 의도적이라는 생각이 듭니다.

김민희는 조금 한계가 있는 배우라고 생각하지만, 그 표현할 수 있는 캐릭터가 잘 맞으면 시너지를 낼 수 있는 배우라고 봅니다.(그런 면에서 본인이 잘 할 수 있는 캐릭터를 시나리오에서 잘 고른다는 느낌이 있어요.) 아무튼 그렇다고 해서 이번 영화에서의 연기를 폄하할 이유는 없구요. 용산역 장면들은 김민희 커리어 최고의 연기라고 부를 수 있을 정도로 그 에스컬레이터씬 같은 것은 정말 좋았어요.

Shining 2012-07-07 2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화차>는 제가 처음 읽은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이었어요. 그때는 지금만큼은 유명한 작가는 아니었죠(물론 자국에서야 이미 입지가 굳었지만 국내시장에서는 아직). 놀랍기도 하고 감탄하기도 했어요. 마쓰모토 세이초의 (문학적) 장녀라고 부르는 부분이 맞구나 싶은 놀라움과 문학적으로도 글을 잘 쓰는구나 싶은 감탄 말이죠. 게다가 이 책의 출간년도가 90년대 후반인 것에 가장 그랬죠.

그래서 변영주 감독이 이 책을 영화화 한다고 했을 때 지레 염려와 불안이 생기더군요. 하지만 <화차>가 감독님이 여태껏 만든 영화 다 합친 것보다 더 흥행이 잘 됐다고 하니ㅎㅎ 아직은 볼 계획이 없지만 언젠가는 보게 될 것 같습니다, 이 영화.

이선균의 근래작이 분명 흥행에는 성공했지만 그의 연기 커리어에는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것이 주관적 생각... 이건 사족입니다^^;

2012-07-08 11: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09 18:35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말해서 미야베 미유키의 소설을 한권도 읽지 않았습니다. 명성에 대해서는 익히 들어 알고있지만, 왠지 끌리지 않는달까..아님, 제가 아직도 어떤 편견을 가지고 있는지도 모르겠구요. 약간은 (흔히 말하는) 사회파 미스터리라는 것에 대한 어떤 의구심을 조금은 가지고 있어요. 이 소설 국내출간이 90년대 후반이던가요? 그럼 아이러니하게도 그 이후에 우리나라에 본격적으로 그런 신용사회가 구축된 것이겠군요. IMF 이후니까.

뭐 상당수의 리뷰들을 보면 원작보다 못하다는 의견이 많은 것 같아요. 저는 흥미롭게 보았습니다만, 돌이켜보면 볼수록 뭔가 안타까운 이야기인것 만큼은 틀림이 없어요. (뭐 현실에는 더한 케이스들도 있겠지만.)

이선균에 대한 의견에는 전적으로 동감합니다.

2012-07-09 18: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07-10 11:24   좋아요 0 | URL
90년대 후반, 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이 책이 흥미롭고 그런데 변영주 감독이 그 이야기를 '지금에야' 하겠다는 점에서 좀 의아했어요. (당연한 말이지만)이건 시대를 안고 있는 이야기인데다, 작금의 현실에선 이정도 이야기 혹은 이보다 더 심한 이야기들을 모르는 사람은 없고 심지어 익숙하다고 느낄 정도인데 말이죠. 때문에 원작보다 못하다는 이야기도 어쩌면 어쩔수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미 뉴스를 통해 관객들은 이런 일들에 대해 아니까요. 불이해와 연민, 어느 정도의 공감을 동시에 느끼게 한다는 것이 이 이야기의 가장 무서운 점이 아닐까 생각합니다.

하하, 저 영화도 안 봐놓고 말은 참 잘하네요^^

2012-07-10 1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맥거핀 2012-07-11 23:06   좋아요 0 | URL
아마 변영주 감독이 보는 현재의 우리사회가 그 정도의 사회겠죠. 좀 다른 얘기겠습니다만, 최근의 한국영화들의 어떤 가혹함, 혹은 적당한 체념 같은 것들이 점점 많아지고 있는 것 같아요. 어떤 정치적인 인식과도 관계가 있는 것 같다는 생각도 들구요. (MB정권 5년간의 한국영화들을 분석해보면 재밌는 양상이 나올 것 같아요.) 근데 이것이 일본의 20년 전의 이야기라는 것은 어찌보면 좀 슬프네요.

<다크나이즈 라이즈>는 저도 보고싶기는 한데, 초반에 너무 열기가 엄청나다보니 괜히 반감이 생기네요. (이상심리) 천천히 보려고 생각중입니다.^^

아이리시스 2012-07-12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성하 아저씨 원래 되게 좋은데..성균관 스캔들에서도..영화는 기억이 안나요! 예전에 아침연속극을 본 적 있는데 저는 그때 첨 알아서 드라마에서만 기억이 많이 남아있어요.

근데 맥거핀님이 맥거핀을 심어놓는다고 쓰니까 어쩐지 맥거핀님이 심기는 것 같..(죄송해요, 아침부터ㅋㅋㅋ 빨리 아침을 먹어야겠어요!)

근데 질문!
저 비밀 댓글 속엔 뭐가 있는 겁니까? 연애합니까?ㅋㅋㅋ

맥거핀 2012-07-14 16:04   좋아요 0 | URL
아..아이리시스님 도대체 잠수했다고, 빨리 안오신다고 험담중이었습니다.ㅋ 조성하씨는 성균관스캔들은 아니고 다른 독립영화에서 처음봤었는데요. 이상하게 예전부터 특유의 발성이 약간 거시기했어요. 그랬는데 이번에는 몸에 잘맞는 배역을 만난듯한 느낌. 이분은 꽃중년 이런 거 말고, 이렇게 꾸질꾸질한 배역을 맡아야..

맥거핀이 맥거핀을 심어놓는다고 표현하는 것이 맥거핀이라고 말하는 게 맥거핀이죠.^^

2012-07-12 2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잉여씬들이 미스터리보다 정서를 지향한다는 해석에 끄덕끄덕.
저ㅡㄴ <발레교습소> 보고 좀 시시해졌다, 이랬는데, 이 영화 보고 우왕~ 역시 변감독님~! ㅇ.ㅇ 이렇게 눈이 바꼈죠. 원작 이하니 아니니 하는 논쟁이 있던데, 저는 이 영화 참 좋았어요.
그리고 이 글은 대체로 아, 맞아. 이러면서 읽었네요.

그나저나 늦게도 보셨구만요. 극장에서 보셨어야 진짠데, 그러셨을라나?!

맥거핀 2012-07-14 16:08   좋아요 0 | URL
집에서 뒹굴뒹굴 보기 시작했습니다만, 보다가 보니 괜찮아서 나중에 자세를 고쳐앉고는 열심히 봤어요.

변영주 감독이 오랫동안 안찍기는 했지만, 이번 영화는 좋더군요. 특히 마지막 용산씬 같은 것은 영화의 주제를 공간과 잘 합치시킨, 최근 메이저 한국영화중 좋은 장면 중의 하나였다고 생각합니다.
 

 

 

 

 

 

프로메테우스, 리들리 스콧, 2012.

 

 

 

(글 중간중간에 영화의 스포일러성 내용이 있습니다. 영화를 보지 않은 분은 보시지 않기를 권합니다.)

 

 

 

에이리언 시리즈는 상당수의 다른 프랜차이즈 시리즈들과 비슷한 길을 걸었다. 1편의 성공과 그보다 나은 2편, 그리고 조금 모자라기는 했지만, 그래도 예전의 유산들을 모아 가까스로 선방을 해낸 3편, 그리고 만들지 않았던 것이 나은 것처럼 보이는 4편, 그리고 시리즈는 결국 막을 내리게 된다. (물론 이는 어느 정도의 역량을 갖춘 감독들이 시리즈를 이끌어나갔을 때 그나마 적용되는 것이다. 2편부터 망가진 시리즈들이 얼마나 많던가.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야말로 대단한 이름값을 자랑하는데, 1편은 리들리 스콧, 2편은 제임스 카메론, 3편은 데이빗 핀처, 4편은 장 피에르 주네이다.) 더 보여줄 것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올해 1편의 감독 리들리 스콧은 관객의 예상을 뒤엎는 새로운 이야기, 즉 에이리언 시리즈의 일종의 프리퀄인 <프로메테우스>를 들고 나왔다. 리들리 스콧 자신이 이야기하였듯이 어쩌면 이 이야기는 프리퀄이 아니라 별개의 이야기일 수도 있고, 여기에서 파생되는 새로운 이야기, 새로운 세계로 나아갈 수많은 가능성을 안고 있다. 그러므로 어쩌면 이 <프로메테우스>의 느슨한 서사, 빈공간이 뻥뻥 뚫린듯한 모호한 이야기는 이어지는 시리즈를 염두에 둔 의도인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래서 이 이야기는 여전히 여러 논쟁들을 낳고 있는게 아닌지도 모르겠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이야기는 팀 버튼, 크리스토퍼 놀란의 배트맨 시리즈(혹은 <인셉션>)나 제임스 카메론의 터미네이터 시리즈에서 제시하는 꽉 짜여진 세계가 아니다. 이 영화는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와 새로운 시리즈를 연결하는 일종의 연결고리로 볼 수 있지 않을까. 프레데터와 연결된 이야기들을 제외하더라도 에이리언 시리즈는 그 자체가 이미 헐거운 부분이 많은 시리즈였기도 했다. 그러므로 여전히 게시판들에서 이어지고 있는 논쟁들을 보면 정말 궁금하기는 하다(조롱의 의미가 아니라 순수한 궁금증이다). 서로가 자신이 맞는 답이고, 다른 해석이 틀렸다고 하는데, 도대체 그 정답지는 어디에 있는지. 그런 이야기는 이어지게 될 몇 개의 이야기를 놓고 해도 괜찮지 않을까. 마치 이는 낚인 물고기들이 바구니에 담겨서는 내 떡밥이 더 맛있었다, 혹은 네 떡밥이 더 맛있었다며 싸우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 <프로메테우스>는 구멍이 많은 서사라고 해도, 흥미로운 이야기인 것만큼은 사실이고, 설혹 프리퀄이 아니라고 할지라도, 그 에이리언 시리즈의 기괴하고 끈적끈적하고 음울한 분위기만은 잘 살려내고 있다. 그것은 디자인이나 미술적인 부분, 혹은 캐릭터의 활용(아마도 많은 에이리언 시리즈의 팬들은 이 <프로메테우스>에서 누가 가장 먼저 희생당할지 쉽게 예상했으리라고 생각된다)과 같은 부분에서도 그렇지만, 이 영화가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의 큰 줄기를 훌륭하게 계승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다. 그간 에이리언 시리즈에는 두 가지의 흥미로운 캐릭터가 나왔다. 그 하나는 여전사 리플리이고, 다른 하나는 비숍으로 상징되는 안드로이드이다. 이것을 한편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진화론의 세계와 창조론의 세계. 진화는 결국 수없이 반복되는 생식으로 이루어지지만, 창조에는 그러한 생식의 과정이 없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계속 반복되고 있는 것은 이 생식 혹은 임신(수태)에 대한 상징 혹은 이미지들인데, 여성 전사 리플리, 인간(숙주)의 배를 뚫고 나오는 에이리언의 형상, 2편에서 리플리와 소녀의 관계 등에서 이러한 부분이 나타나기도 하지만, 동시에 괴생물체 에이리언 역시도 그러한 번식과 관련된 부분들이 계속 등장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에이리언도 번식을 한다는 것. 이것은 한편으로 비슷한 루트를 걸은 프랜차이즈인 영화 <주라기공원>에서 가장 섬뜩한 이야기 중의 하나였던 섬의 공룡들도 번식을 한다는 사실을 연상시키기도 한다.) 반면 창조된 안드로이드에게 결여된 것은 흔히 감정에 관계된 부분으로 이야기되기도 하지만, 이보다 더 결정적인 것은 생식과 관계된 부분일 것이다. 아니 어쩌면 이 감정이라는 것은 생식 혹은 번식과 꽤 밀접한 연관이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가장 비통한 괴성이 터져나왔던 장면은 인간의 그것이 아니라, 퀸 에이리언이 자신의 알을 불지르는 리플리를 보고 내뱉은 괴성이었다.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에서도 감정이 없는 안드로이드 데이빗(마이클 파스빈더)이 쇼 박사(누미 라파스)가 죽은 아버지를 생각하며 꾸는 꿈을 훔쳐보는 장면이 있다. 왜 그는 이 꿈을 보는가.)

 

이 에이리언 시리즈에서는 외부의 괴물말고도 이 창조된 안드로이드를 보는 (생식하는) 인간의 섬뜩한 감정이 내내 지배하는 부분이 있다. (그러니까 '에이리언'이라는 이 시리즈의 제목은 한편으로는 밖의 괴물을 말하기도 하지만, 동시에 내부의 안드로이드에게도 해당된다. 이 <프로메테우스>의 장점은 마이클 파스빈더가 이 섬뜩한 느낌을 잘 살려냈다는 것이다. 그가 "모든 자식은 아비가 죽기를 바란다."고 대사를 할 때를 보라.) 그리고 그 섬뜩한 기분에 부응이라도 하듯이 이 안드로이드들은 결정적인 순간에 뒤통수를 치기도 했다. 그러나 승리하는 것은 결국은 진화론 쪽이었다. 에이리언 시리즈에서 살아남는 것은 결국 여전사 리플리였으니까. 물론 한편으로 그것은 완벽한 승리는 아니었다. 그것은 결국 단지 '살아남는 것', '살아남아 탈출하는 것'에 불과했으니까. 밖에는 여전히 에이리언이 우글우글하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당연한 것일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에이리언은 그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니까.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일종의 헤테로, 그것이 에이리언이다. (<프로메테우스>에서 그것을 조금 더 확연하게 알 수 있는데, 결국 이 에이리언이라는 괴물은 창조와 진화가 결합된 것이다. 최초의 에이리언은 쇼 박사의 임신 과정을 통해 시작되었고, 다시 그것이 엔지니어(스페이스 자키)와 결합되면서 탄생되었다. 즉 최초의 에이리언은 인간의 정자, 그리고 불임의 수태로부터 시작되었다는 기이한 역설이 시작된다. 즉 그것은 창조되었지만, 생식의 과정으로 이 세상에 기어나왔다.)

 

 

그런데 <프로메테우스>는 이러한 측면에서 흥미로운 가설을 제시한다. 인간의 탄생에도 단지 진화만이 아닌 창조가 개입되었다는 것, 그리고 이 창조에는 외부의 손길, 외계인들의 어떤 작용이 개입되었다는 것. 즉 이는 일종의 변형된 지적설계론 혹은 창조과학론이다. (예를 들어 캄브리아기 대폭발에 어떤 외부의 무엇인가가 개입되었다는 주장과 비슷하다.) 그런데 결국 이렇게 놓고보면 인간은 에이리언들과 다를 바가 없어진다. 에이리언이 처음 엔지니어들의 (군사적인) 필요에 의해 개발되었다가, 우연히 진화의 과정(영화 속 쇼 박사의 임신의 형태)을 거쳐 탄생된 것처럼, 인간도 결국 엔지니어들이 먼 옛날 뿌려둔 씨앗에서 진화의 과정을 거쳐 탄생한 그 무엇이 된다. 즉 그 태생적 뿌리는 인간이나 에이리언이나 별로 다를 바가 없어진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이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에이리언이 괴물이라면 인간도 괴물이 아닌가. 에이리언의 행동들은 결국 번식을 향한 본능이고 생존본능이다. 'Alien'이라는 것은 '외계의', '이질적인'이라는 뜻일 뿐이므로 그들에게는 인간이 에이리언일 것이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에이리언과 같은 지위를 벗어나려는 인간의 발버둥이 생기며 창조론의 오래된 믿음 저편에 있는 것, 그러니까 신이 등장하게 된다.

 

진화론이 과학의 영역이라면 창조론은 믿음의 영역이다. 창조론에는 한 가지 뿌리깊은 믿음이 들어있다. 그것은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필요에 의해 자신과 닮은 어떠한 것을 이 세상에 내보냈다는 믿음이다. 즉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에 대한 믿음은 인간의 고귀함에 대한 믿음이기도 하다. 겨우 원숭이에서 튀어나온 존재가 아니라 완벽에 가까운, 적어도 완벽의 시작지점에 있는 어떠한 것, 그것이 인간이 되려면 신이라는 완벽한 존재가 그 창조의 시점에 있어야만 한다. 그러나 이 영화 <프로메테우스>는 그러한 믿음에 몇 가지 불길한 가설을 제시한다. 만약 인간을 만들어낸 존재가 완벽하지 못한, 자신들도 죽음을 피할 수 없는 존재들이라면. (불사(不死)를 향한 웨이랜드 회장의 믿음과 그것의 깨어짐은 이미 엔지니어들의 죽음이 발견된 처음에 예정된 것이었다. 그리고 한편으로 보면 죽지 않기를 바란다는 것은 역설적이다. 왜냐하면 안드로이드야 말로 영생의 존재이기 때문이다. 영화 초반부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들여다보고 있는 쇼 박사의 꿈을 생각해보라. 그 장례식 장면. 생과 사에 대한 동경. 모든 안드로이드들의 질문은 우리는 어디에서 시작되어 어디로 가는가라는 질문이었음을 생각해보라. <은하철도 999>에서 <블레이드 러너>까지.) 아니면, 인간이 필요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가 아니라, 실수로 만들어진 존재, 혹은 어떤 형벌에 의해 만들어진 존재라면. (인간에게 불을 전해준 프로메테우스가 매일 간을 독수리에 쪼아먹히는 형벌을 받듯이, 처음 지구에 남겨진 엔지니어는 마치 사약을 받는 죄수의 모습처럼도 보인다.) 그래서 결국 창조주들에 의해 파괴되어야 할 대상으로 지목되었다면. (잘못 만들어진 것이니까.)

 

이의 반대편에 안드로이드 데이빗이 있다. 영화 초반부 데이빗이 영화 <아라비아의 로렌스>를 보고 몇 번 따라하는 대사가 있다. "어떻게 불을 잡을 수 있지?" "뜨겁지 않다고 믿으면 되지." 영국인으로서 아랍인들의 편에 서서 싸우는 이 영화를 선택한 것도 흥미롭지만, 이 대사들도 흥미로운 구석이 있다.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 이는 마치 인간에 대한 데이빗의 조롱처럼 보인다. 웨이랜드 회장은 데이빗을 인간들에게 소개하며 말한다. 그들에게는 영혼이 없다고. 그러나 데이빗의 입장에서 보면 이는 한편으로 웃기는 것이다. 왜냐하면 데이빗이 보기에 인간에게 영혼이 있다는 것은 단지 그들의 믿음, 그러니까 불을 뜨겁지 않다고 믿는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영화 속에서 내내 데이빗은 어느 누구보다도 가장 적극적으로 나선다. 왜냐하면 자신을 그토록 무시하고, 섬뜩한 존재로 여겼던 인간들이 자신과 별반 다르지 않게, 아니 어쩌면 자신보다도 훨씬 못한, 단지 잘못 창조된 존재로 점점 떨어지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쇼 박사는 이를 받아들일 수 없다. 아니 쇼 박사가 아니라 어떤 인간도 이를 쉽게 받아들일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데이빗이 이 와중에 그것을 하고 싶냐고 조롱하지만) 데이빗이 벗겨낸 십자가 목걸이를 다시 목에 걸고 자신들을 창조한 존재를 만나러 간다. 왜냐하면 그 목걸이는 인간이 잘못 창조된 존재가 아니라는 믿음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인간은 원죄를 가진 존재이기는 하지만, 신(창조주)과 닮은 형상의 어떤 것이라는 믿음. 그녀는 그 믿음을 버릴 수가 없다.

 

그러므로 이제 두 명의 생식기능이 없는 존재, 즉 불임의 쇼 박사(그리고 이를 전시라도 하듯 그녀의 배에는 거대한 칼자국이 이제 생겨났다)와 안드로이드 데이빗은 창조주들의 별로 간다. 두 번째 이야기가 아마도 거기에서부터 시작될 것이다. 그들은 이곳에서 무엇을 묻게 될까. 그리고 어떤 대답을 얻게 될까. 이제 시작일 뿐이다. (아마도 이 마지막 장면에서 많은 SF 영화의 팬들은 어떤 장면들을 연상했을 것이다. 예를 들어 <스타워즈>의 그 유명한 장면. "내가 네 아버지다." 혹은 <블레이드 러너>의 엔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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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28 23: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엘지트윈스 덕분에 탄생된 글..아하하 져도 좋으니 멘붕이나 안오게 해주세요...-_-

Shining 2012-06-29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프로메테우스>가 <에일리언>의 프리퀄이었어요?; 전 SF, 판타지, 신화(타이탄 같은)는 영 못 보는 이상한 성격이라; 이 영화도 완벽한 무관심이었는데_- 궁금해지네요.

그런데요 맥거핀님, 맥거핀님은 영화에 늦게 입문(??) 하셨다면서 왜 이렇게 분석을 면밀히 잘 하시는겁니까! 사람 기죽게! 맥거핀님 때문에 전 영화글 더 이상 못 쓰겠어요, 흑.

맥거핀 2012-06-30 14:48   좋아요 0 | URL
저도 판타지나 신화물은 잘 안보지만, SF는 꽤 봅니다. SF는 모든 소년들의 로망들의 아니겠어요. 특히 에이리언 시리즈는 나름 애착이 있는 시리즈이기도 하구요. 제 기준에서는 이 영화 꽤 괜찮았어요. 에이리언 시리즈는 특유의 느낌이 있는데, 그 느낌을 잘 살려냈더라구요.

어..역시 가는 말이 고우니 오는 말이 곱습니다. 하하.

아이리시스 2012-06-29 14: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번에 네오님 리뷰 보고나서 스콧인데 제끼기로..어차피 제가 모든 영화를 다 본 건 아니니까요 맘 편히ㅋㅋㅋ 저는 SF, 판타지는 모르겠고 '타이탄'류의 신화물은 쭉 좋아해왔는데 이 영화는 공부해야겠네요. 궁금하지만 공부 안하면 보이는 게 없을 것 같아요 -_-

저 리뷰 좀 빌려주세요. 본 영화가 없어서 이번달에는 영화리뷰 네 편을 못 채우게 생겼네요. 한 편 썼는데 푸하하(3개월만에 나가떨어질지도 모르는 파워리뷰어)

맥거핀 2012-06-30 14:52   좋아요 0 | URL
아니..스콧이면 이 영화를 봐야죠.^^ 리들리 스콧하면 사실 화면빨..(리들리 스콧이 <블레이드 러너> 덕분인지 철학적인 어떤 영화를 찍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기도 한데, 그런 거 별로 없다고 생각...)

뭐 마음 같아서는 빌려드렸으면 좋겠네요. 그런 거 숫자 채우는 거 되게 짜증나죠! (적극 공감)

2012-06-29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에일리언 시리즈를 하나도 안 본 사람이라 프로메테우스도 패쓰~입니다. 이 글 읽어보니 조금쯤 흥미도 생깁니다만.. 그러나 은영전 시리즈 어디 재미없어서 안 보겠습니까? 다만 인생이 짧아서이지요.ㅎㅎ
아, 쇼 박사가 무얼 만날지 1편도 안 본 내가 2편이 궁금해지는 것은 이 글을 성실히 읽은 증거인 겁니다..^^

맥거핀 2012-06-30 14:57   좋아요 0 | URL
네..저도 여기 알라딘 분들이 무슨 소설 시리즈 얘기할 때 과감히 패스합니다. 프로메테우스는 별개의 영화라고 하지만, 아무래도 에이리언 시리즈를 좀 봐야만 여러가지로 재미가 있을 것 같아요. 담번에 쇼 박사가 뭔가 새로운 것을 만나게 되면 얘기를 전해드리죠.
 

1.

술을 마시고 돌아오는 길에는 작은 사이다 페트병을 홀짝거리면서 자주 Pet Shop Boys의 음악을 듣는다. (그러니 얼굴이 빨개진 채로 귀에 이어폰을 꽂고, 사이다 병나발을 불며, NewYork City Boy~를 흥얼거리는 작자가 있으면 저라고 생각하시길.) 가볍고, 쉽고, 밝다. 그것만이면 충분하다. 좀 다른 얘기겠지만, 이 Pet Shop Boys의 음악들은 어느 소설의 한 부분을 늘 연상시킨다. 그 부분은 그 소설에서 그렇게 중요한 부분도 아니고, 그렇게 공들여 쓰여진 것 같지도 않다. 그러나 늘 그 부분이 생각나니 신기한 일이다. 강석경의 <숲속의 방>의 한 대목.

 

옆에선 라디오 소리가 들려 흘끗 보니 남자아이가 트랜지스터를 꺼내 귀에 대고 있었다. 막 다섯 시를 알리면서 음악이 울려나왔다.

"시작할 땐 언제나 밝은 음악이 나와요."

그의 표정도 음악처럼 밝았다. 긴장이 풀리는지 갑자기 눈꺼풀이 무거워지면서 내 포근한 잠자리가 그리웠다. 이젠 집에 돌아가야 했다. 나는 눈을 비비곤 웃음지었다.

"여태 같이 있어 주어서 고마워."

"누나 같은 사람이 많으면 좋겠어요. 또 만날 수 있을까요."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우리는 다시 만날 수 없으리라.

 

새벽 다섯 시에 라디오가 처음 시작하면 흘러나오는 밝은 음악. 나에게는 그게 Pet Shop Boys의 음악들이다. 새벽 다섯 시, 꿈이 깨어지는 시각, 이제 집으로 돌아가야만 하는 시각, 아마도 다시는 만날 수 없는 시각. 그리고 술이 깨야만 하는 시각. 술이 깨면 나는 다시 일상으로 돌아가야만 한다.

 

이 강석경의 <숲속의 방>은 고등학교 때 교지편집부 담당 선생님이 단합MT 때 토론하자며 읽어오라던 책이다. 교지편집과 <숲속의 방>이 어떤 상관관계가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그래서 꽤나 열심히 읽었던 기억이 난다. 그래서 토론은 이루어졌냐고? 물론 예상대로 나 외에 아무도 그 소설을 읽어오지 않았고 <숲속의 방>에 대한 토론은 숲속의 방에서 몰래 마시는 술로 대체되었다. 하긴 MT에서 무슨 독서토론이랴. 나는 단지 그 연상작용이 이상스러울 뿐이다. 술-Pet Shop Boys-숲속의 방-교지편집부.

 

2.

가끔 술을 같이 마시곤 하는 선배는 말버릇이 하나 있다. "중요한 게 뭐냐면..." 그런데 참으로 이상한 일은 그 중요한 얘기는 단 몇 마디로 끝나버린다는 것이다. 지금까지 두 시간이 넘게 이것은 이렇고, 저것은 저렇고 떠들었으면서 "사실 중요한 게 뭐냐면..."으로 시작되는 이 이야기는 단 몇 마디로 끝내 버리다니. 그렇다면 정작 중요하지 않은 이야기는 길게 하고, 중요한 이야기는 짧게 마쳐버리는 셈이니, 그것 참 이상한 일이다.

 

라고 그 선배가 사주는 소주와 오뎅탕과 꽁치구이 같은 것을 마주 앉아 먹으면서 생각하는 것도 참 송구한 일이긴 하나, 문득 다른 생각들이 들었다. 어쩌면 이 말버릇이라는 것에는 자신이 결코 해낼 수 없는 것, 혹은 자신의 아킬레스건 같은 것이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닐까. 예전 회사(라고 해두자)의 모 동료 하나는 거래처와의 통화시에 자주 "솔직히 말하면요..."라는 말을 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그 말 뒤에는 늘 그 전화통화에서 가장 솔직하지 않은 이야기들이 나왔다. 그러니까 "솔직히 말하면요..."라는 그의 말버릇은 이제부터 거짓말을 좀 할께요,라는 일종의 선전포고와 같은 것이었고, 어느쪽 펜스로 공을 넘겨버릴 것이라고 투수에게 호언장담하는 예고홈런과 같은 것이었다.

 

그렇다면 내 말버릇은 어떤 게 있을까. 말버릇은 정확히 잘 모르겠지만, 글에는 종종 그런 말들을 쓰는 것 같다. "음..뭐.." 같은 것. 뭐, 라는 말에 붙어서 가장 어색하지 않은 말은 '어때'나 '괜찮다'와 같은 말들이다. 뭐 어때, 뭐 괜찮아. 그러니까 사실은 나는 괜찮지 않은 것이고, 계속 신경이 쓰이는 건지도 모르겠다.

 

3. 

신경이 쓰인다는 것은 예를 들어 일종의 강박증 같은 것이다. 가벼운 강박증은 현대사회를 살아가는 데에 있어 필수적인 요소라고 누군가가 말했지만, 내 강박증이 그런 필수요소의 범주에 들어가는지, 아니면 그 범주를 벗어나, 일상생활을 방해하고 있는지 잘 모르겠다. 물론 가끔 그런 강박증이 강하게 인지되는 때가 있다. 예를 들어 CD 정리를 할 때. 나는 음악 CD를 뮤지션의 ABC, 혹은 가나다 순서로 놓기 때문에 새 CD를 사게 되면, 다시 하나하나 배열을 맞춰야 한다. 그것은 어지간히 귀찮은 일인데, 왜냐하면 CD를 일일이 빼서 다시 꽂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정리하다가 가끔 생각이 멈추기도 한다. Verve가 그냥 Verve더라, 아니면 The Verve더라..

 

그것은 온라인 상에 글을 쓸 때도 묘하게 발휘되는 것 같다. 나는 퇴고하는 것을 어지간히 귀찮아해서, 한번 쭉 읽어보고 눈에 보이는 몇 가지를 고친 후 그냥 올려버리는 편인데, 그러다보니 계속 어딘가에서 오타들, 잘못된 맞춤법들이 튀어나온다. 그래서 일단 글을 올려놓고 매번 수정 버튼을 클릭해서 창을 띄운 후 오타를 고치고, 맞춤법을 바로잡고는 한다. (물론 내 맞춤법 실력이 좋은 편이 아니어서, 그 수정작업은 완벽하지 않으며, 계속 후속작업들을 동반한다.) 그런데 문제는 그것이 예전 글들에도 적용된다는 것. 가끔 예전에 썼던 리뷰들을 읽어보고는 하는데, 그 때마다 새로운 오타와 맞춤법들이 발견되어 나를 괴롭히곤 한다. 물론 그것을 이제와서 고쳐야 할 이유는 없다. 2009년에 썼던 글을 이제 누가 볼 것인가. 그러나 그 오타와 맞춤법은 화면상에서 점점 확대되어 기어이 내 손목을 붙들고, 수정 버튼을 누르게 만든다. 왜 오타들은 늘 뒤늦게 발견되는지. 물론 가장 고마운 것은 뒤늦은 수정 시에도 예전에 글을 올렸던 시간이 그대로 보존된다는 사실이다.

 

4.

이러한 강박증은 예를 들어 무엇인가를 요리할 때도 그 빛을 어느정도는 발하는 듯 하다. 뭐 요리라고 해도 거창한 것을 하는 것은 아니고, 끽 해봐야 간단한 반찬 같은 것들이지만, 그 강박증은 이상한 지점에서 발휘가 된다. 나는 레시피 요리의 신봉자라 항상 아주 간단한 반찬을 할 때도, 인터넷에 널려있는 수많은 레시피들을 참고하는 편이다. 그런데 레시피에서 가끔 이상한 요구들을 할 때가 있다.

 

예를 들어 계란찜을 한다고 해보자. 갑자기 어떤 레시피에서 계란을 풀고 그 액을 체에 걸러야 한다는 일반적이지 않은 요구를 한다. 물론 나는 그 요구에 따를 마음이 없으며, 더군다나 체도 없다. 그렇다면 아마도 그 부분을 건너뛰고 다음으로 넘어가면 될 것이다. 그러나 나의 강박증은 이때부터 슬슬 시작된다. 그 레시피가 미심쩍어진 나는 다른 레시피를 찾기 시작한다. 물론 레시피는 얼마든지 있다. 새로운 레시피를 발견했다. 이 레시피는 계란을 풀 때 체는 커녕, 거품기 대신에 과감히 숟가락을 사용할 것을 주장하는 아주 마음에 드는 레시피다. 그런데 이 단계를 넘어가니 또 난관이 생긴다. 이 레시피는 계란을 푼 다음 거기에 다시마를 삶은 물을 섞을 것을 주장한다. 오 마이 갓. 아니 계란도 숟가락으로 푼 주제에 무슨 다시마 삶은 물이람. 다시 레시피를 찾는다. 이번에는 레시피를 찾는 조건이 좀 복잡해졌다. 체와 거품기도 없어야 하고, 다시마 삶은 물도 없어야 한다. 몇 십분을 찾은 끝에 용케 새로운 레시피 발견. 그리고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 이번에는...

 

에라, 계란후라이나 먹자.

 

5.

그래도 알라딘이니까 책 얘기를 하려고 했는데(그래서 시작은 강석경의 <숲속의 방>으로 시작했건만), 뜬금없이 요리 이야기와 급기야는 계란후라이로 빠지고 말았다. 다시 책 얘기로 돌아오자. 오늘 저녁부터 알라딘 중고 서점에서 충동구매한 엘러리 퀸의 <그리스 관 미스터리>를 읽고 있다. 이런 본격 추리소설을 읽는 것은 오랜만이다. 책도 옛날 느낌이 나고, 한 때 셜록홈즈니 미스 마플이니 에르큘 포와로니 하는 것을 즐겨 읽었던 아주 오래전이 생각이 난다. 읽은 것은 아직 초반부까지인데, 여러 등장인물에 대한 간단한 스케치들이 끝나고 사건이 본격적으로 머리를 들려는 찰나, 그러니까 엘러리 퀸이 등장인물들 앞에 그 모습을 드러내는 순간에 지하철은 목적지에 도착했고, 나는 책을 집어서 가방에 넣고는 술을 마시러 갔다.

 

다만 아직까지는 등장인물이 너무 많아서 머리가 복잡해지고 있다. 아마도 읽는이의 머리를 복잡하게 만들어 추리를 어렵게 하려는 작가의 심산이겠지만(등장인물이 많아질수록 그만큼 범인을 맞출 확률은 낮아질테니), 이런 류의 책을 오랜만에 보다보니 책 앞의 나오는 사람들 목록과 저택 평면도만 보아도 머리가 복잡해진다. 사촌이니 집사니 가정부니, 갤러리 관리인이니 주치의니 이웃 사람이니 한명한명씩 내가 누구입니다, 라고 등장할 때마다 등장인물 엄청 나오는 사극을 보는 느낌이랄까. 그리고 그 때마다 맥이 딱딱 끊겨버리고 만다. (사실 개인적으로 대하사극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대하사극에는 꼭 누군가 한 명 등장할 때마다 그 밑에 자막-그러니까 간단한 인물소개가 붙는데, 이것을 볼 때마다 왠지 몰입감이 뚝뚝 떨어진다. 이거 드라마야, 다큐야.) 물론 아직 초반이니까 그럴테지. 그리고 나올만한 양반도 어느정도 다 나온듯 하고.

 

이왕 시작한 김에 책 얘기를 조금 더하면, 이번에 영화와 관련된 책을 한두권 구입할까 생각 중이다. 갑자기 어떤 책이 흥미를 끌었다기 보다는 그저 단지 메일로 날아온 예술도서 관련 이벤트를 보고 든 생각이다. 이럴 때가 가장 고민이고 동시에 가장 위험하다. 책과 수중의 돈과 이벤트 금액을 놓고 벌이는 삼각의 저울질. 저울의 균형을 맞춰보려 하지만, 저울은 늘 불균형하고, 저울질하는 사이에 책을 읽고 얻게 될 마음의 양식 따위는 이미 하늘 저 멀리 어딘가로 날아가버린다. 그래도 한 권은 사야지.

 

6.

그러니까 다시 책에서 영화얘기. 딴 건 몰라도 이번 주 개봉하는 <두 개의 문>은 봐야지 싶다. 지난 용산참사를 비교적 객관적인 시선에서 다루었다고 하는 다큐다. 그러므로 영화를 본 뒤에는 '무엇이' 객관적인지, '어떻게' 객관적인지, 혹은 '객관적'이라는 것이 가능한지도 물어야만 할 것이다. 물론 이 영화를 본다고 해서 (나의) 무엇이 근본적으로 달라지거나, 내가 무엇인가 좋은 방향으로 조금 나아갔다고 말할 수는 없을 것이다. 하나의 영화가 한 인간(의 행동)을 바꾸는 것은 거의 불가능에 가깝다. 물론 그것은 책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동시에 완전히 불가능한 것도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다.)

 

다만 말할 수 있는 것은 영화를 보지 않았으면 나는 아마도 훨씬 나쁜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는, 나에 국한된 사실 뿐이다. 물론 이는 이 영화 <두 개의 문>을 놓고 하는 이야기는 아니다. 그저 '영화'라는 것에 대한 일반적인 이야기이다. 아니 조금 더 정확하게 말하면 내가 태어나서 지금까지 본 그저 몇 편의 영화에 대한 이야기이다. 그 영화들을 보지 않았더라면, 아마도 나는 내가 예상할 수 있는 것보다 훨씬 안좋은 인간이 되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자신의 예상이라는 것은 늘 현재의 자신이라는 것의 범주, 혹은 한계 안에 들어있으므로 장담할 수는 없다.) 내가 영화에 감사하는 점은 단지 그 뿐이다.  

 

7.

조금 더 버텨서 유로게임을 봐야지 생각하고 있었는데, 방금 오늘은 유로게임이 없는 날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그러니 글을 더 연장할 이유는 없다. 쉐브첸코의 국가대표의 마지막 게임은 그렇게 되어서는 아니되었다. 첼시로 이적한 후 그가 보여준 모습들은 상당히 실망스러웠지만, 그래도 나는 그의 국가대표로서의 마지막 게임이 그런 게임이었다는 사실이 못내 마음에 걸린다. TOP밴드도 그렇고, LG도 그렇고, 내가 응원하는 팀은 왜 늘상 그 모양인지. 그러니 역레발. 잉글랜드 우승에 한표를 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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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2-06-21 09: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시간에 잠시 깨서 물 한잔 마셨던 것 같은데... 유로게임을 기다리셨구나.
'솔직히 말해서'라고 강박적으로 말하는 사람의 말은 의심이 가요. 그렇다고 제가 솔직히 말한 것과 그렇지 않은 것을 구별해내는 재능도 없는 것 같고. 좀 둔한편이랄까 무신경하달까 그래요.
어떤 소설에 자주 쓰는 말에 대한 이야기가 나와요. 명사나 형용사 부사가 아니라 조사, 자주쓰는 문장 형태와 남발하는 조사들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그 말을 듣고 그 소설 속 작가는 자괴감에 빠지던데. 일테면, 어쩌면, 00아닐까. 저는 이런 말을 잘 쓰네요. 확신있게 밀어부치고 싶은데 한톨의 확신도 없는거죠. 또, 막, 정말이란 말을 자주 쓰는 걸로 봐서는 그럼에도 불구하고 막 밀어부치려는 의지같은건 있는 것 같고 ^^
저 역시 표준법과 문장이 개판이지만 그걸 또 막 고치려고 안 해요. 은근한 나르시즘은 나름 자족적인 면이 있어요. 안 그러면 저는 한줄도 못썼을텐데. 맥거핀님의 잠이 안 와서 쓰는 글에선 오타나 비문은 안 보이는데요. 물론 제 기준은 헐렁합니다요.

맥거핀 2012-06-22 01:06   좋아요 0 | URL
아니 분명히 오타와 비문은 넘쳐나겠지요. Arch님이 제 글에 호의적이기 때문에 눈에 잘 안띄는 거겠죠. 아마도 분명히 계속 발견될겁니다. 근데 아무튼 바꿔도 바꿔도 끝은 없죠. 뭐 띄어쓰기 같은 거라면 말할 것도 없구요.(띄어쓰기는 한국인이 가장 약한 부분이긴 하니까.)

저도 위에 좀 쓰기는 했지만, 제 말버릇이나 글버릇은 정확히 모르겠어요. 사실 민감한 사람이라면 금새 잡아내겠지요. (어쩌면 말버릇같은 것은 도리어 뭔가 단정적으로 말하는 경향이 약간은 있는 것 같아요. 글에는 '약간은 있는 것 같아요'라고 쓰면서 웃기죠.) 아무튼 저는 그런 말버릇과 사람들의 실제행동이 충돌할 때 재밌습니다. 물론 그사람이 저보고 재밌으라고 그러한 행동을 하는 것은 아니겠지요.^^ 암튼 제 이론에 따르면 Arch님은 도리어 확신이 있는 쪽 같은데요. OO아닐까..이런 말버릇이라면.

2012-06-21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잠이 안 와 쓰는 글.. 시리즈화되는 군요. 계속 써 주세요. ㅎㅎ
강석경의 숲속의 방, 듣자마자 환기되는 기억이 있는책이름입니다. - 나름 추억의 책이지만, 읽지는 않았어요. / 인터넷 레시피 체험담. 상당히 실감나는 디테일이 재밌어요. 제 동생은 진짜 그거 보고 달걀을 체에 내리고 다시마 우린 물을 만드는 타입이고 전 인터넷에 검색어 넣는 자체를 기피해서 모르는 건 못해먹고 마는 타입인데요. 그 극과 극 사이엔 사연있는 계란후라이가 있겠군요.
영화관련 책 읽으신 후 리뷰 또는 단평, 부탁합니다~.

맥거핀 2012-06-22 01:10   좋아요 0 | URL
저는 되도록이면 레시피 그대로 하려고 하거든요. 그러니까 레시피에 가끔 애매한 표현들이 들어있으면 좀 그래요. '소금 한 줌' 이런 거 말이죠. '한 줌'이란 건 도대체 어느정도일까 생각을 하죠. 차라리 소금 5g 이런거면 괜찮을텐데..늘 생각하죠. 그러니 강박증 환자들을 위하여 레시피를 쓰시는 분들이 신경좀 썼으면 좋겠어요.;

강석경의 숲속의 방은 그 이후에 몇번이고 다시 읽었습니다. 그 소설은 이상하게 마음을 건드리는 부분들이 많아요. 영화는 보지 않았습니다. 괜히 소설을 본 느낌을 망가뜨릴까봐.

으하하..제가 과연 영화관련 책을 읽고 뭔가를 쓰게 될까요. 노력해보겠습니다.^^

Shining 2012-06-21 11: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한 가지 발견 한 것 같아요. 맥거핀님이 잠이 안 와 쓰는 글은 술을 마신 날 올라온다는 거.. 그러니까 맥거핀님은 술 마시고 귀가 후 잠이 안 와, 쓰는 글을 쓰는 것_- 맞죠?ㅎㅎ

제 말버릇은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입니다_- 진짜 이 말 자주 해요; 이런 말을 하기 그렇다는 것을 알릴만큼 소심하고, 그렇지만 말하고 마는 직선적인 성격탓이죠_- 물론 이런 말해도 괜찮을, 사이에만 씁니다ㅎㅎ 아, 글 쓸때는 '랄까'또는 '인 듯 하다'에요. 생각한 걸 말하고는 싶은데 장담하기는 싫고.. 안 좋은 버릇이죠.

전 올해 출간 된 클린트 이스트우드 책을 읽으려고 합니다, 그냥 그렇다는 이야기입니다(웃음).

맥거핀 2012-06-22 01:18   좋아요 0 | URL
아..사실은요. Shining님의 잡담 시리즈에 영향을 받아....라는 건 농담이구요. 음..술을 약간 마신날이라고 해두죠. 많이 마시면 글이고 뭐고 잘잡니다. 하하. (예전에 다른 블로그에서 술을 좀 꽤 마시고 쓴 글을 나중에 보게 되었는데, 그야말로 얼굴이 화끈거려서..다음날 아침에 광속삭제했습니다.)

음..그 말이 사실 재밌네요. 이런 말하기 좀 그렇지만..그 말은 결국 그 말을 하겠다는 거니까. 랄까 같은 것은 저도 많이 쓰니까요. 요즘 인터넷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결국 자기검열이 필수적이고, 빠져나갈 구멍은 만들어두어야 하니까 그런 것 같기도 하고..안 좋은걸까요. 글쎄요. 잘 모른다랄까.

아..읽어보시고 재밌는 부분 있으면 나중에 소개부탁해요. 제가 진지하게 읽겠습니다. 이래봬도 이스트우드 영화는 꽤 좋아하니까.

카스피 2012-06-21 22: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전 런던 올림픽대비 체력을 미리 보충하고자 밤에는 열심히 자고 있습니당^^

맥거핀 2012-06-22 01:19   좋아요 0 | URL
저는 올해 올림픽은 어째 좀 시큰둥한데요. 나이들수록 올림픽에는 어째 덜 열광하게 되는 것 같아요. 이번 올림픽에는 야구도 없고. 나중에 마라톤은 챙겨서 봐야지 생각하고 있습니다.^^

꽃도둑 2012-06-27 15: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문장의 길이로 봐서는 밤을 꼴딱 샌거 같은데...
에효~ 이 생각 저 생각 잡생각들로 넘치군요. 맥거핀 님이 이렇게 변하다니...
예전에 진지모드 그 자체였는데... ^^

중요한 게 뭐나면....음,,
중요한 게 뭐나면,.,.이 말은 이 방을 떠나도 귓가에 계속 남을 거 같아요..
어쩌면 중요한 게 없는 건지도....알아도 말 할 수 없는 것인지도..


2012-06-27 23:57   좋아요 0 | URL
꽃도둑님.. 저는 꽃도둑님 댓글 팬이에요. ㅎㅎㅎㅎ
ㅋㅋㅋㅋ

그나저나 "중요한 게 뭐냐면" 이 말은 술 많이 취한 사람들이 잘 하는 말인 듯 해요. 이 말 해 놓고, 중요한 얘기 제대로 하는 경우, 한 번도 못 봤어요.
글 속에서 이 말을 접하는 순간, 내 뇌의 빈 공간에서 울려퍼지면서, 엄청 기시감이 느껴졌어요. 아무래도 술자리에서 영양가 없이 꽤 듣지 않았었는가 사료됩니다..후후후...
(꽃도둑님 마지막 말이 여운으로 울려 퍼지네요...)

맥거핀 2012-06-28 23:37   좋아요 0 | URL
저는 여전히 진지합니다. 아하하.

저도 정말 중요한 게 뭔지 알고 싶어요. 술자리에서 하는 그 긴 얘기들은 모두 어디로 가는 것인지..(하기는 뭐 제 서재에서 하는 수많은 얘기들도 다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죠. 그냥 다 맥거핀입니다. 하하하.) 뭔가 계속 이야기하다보면 중요한 것을 언젠가 잡아낼 수 있을까요?

감은빛 2012-07-17 1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최근 어느 회의 자리에서 누군가의 지적에 의해 깨달았습니다.
"감은빛님 말씀하실 때는 늘 '솔직하게' 말씀하셔야만 하는 군요"
즉, 제가 '솔직하게 말하면'이란 표현을 자주 쓴다는 뜻이었습니다.
'솔직히' 좀 놀랐습니다. 제가 그런 표현을 쓴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했거든요.
게다가 그 지적이 있었을 당시에 제가 한 말은 '정말'로 솔직한 이야기였습니다.

그래서 다시 잘 생각해보았더니,
저는 '솔직하게 말하면'이란 표현을 할때는 '정말' 솔직한 이야기를 하는 편이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조금 과장하거나 적당히 디테일을 빼거나,
잘 기억나지 않는 사실을 마치 정확한 것인양 왜곡시키는 경향이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이거 나중에 글로 한번 써보면 재밌을 것 같습니다.)

Pet Shop Boys에서 시작해서 술버릇, 강박, 레시피, 추리소설, 두 개의 문까지 이어지는 이야기 솜씨가 놀랍습니다!

맥거핀님의 '잠이 안 와 쓰는 글'의 팬이 될 것 같습니다! ^^

맥거핀 2012-07-18 21:50   좋아요 0 | URL
음..근데 '솔직하게 말하면'이라고 말하면서 정말 솔직하면 별 문제가 없지 않을까요? 물론 걔중에는 저처럼 괜히 삐딱한 사람들이 있어서, 그런 말을 쓰면 도리어 저거 뭔가 꿍꿍이가 있나..하고 생각하기도 하지만. 그러고보면 참 말(소통)을 한다는 게 어려워요. 나는 분명히 이렇게 말하는데도 상대방이 그렇게 안받아들이면 그만이니까. (근데요. 사실 자기 말버릇은 정말 자신은 잘 모르는 것 같아요. 저도 다른 사람들에게 물어보고 싶기는 한데, 충격을 받을까봐 주저하고 있습니다.^^)

칭찬 해주시니 부끄럽습니다. 조금 더 영양가있는 글을 써야 하는데, 사실 위의 내용들은 그냥 아무 생각없이 나오는대로 쓴거라..(아니면 아무 생각 없이 써야 더 나을지도..)

궂은 날씨네요. 건강관리 잘 하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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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 무엇이 가치를 결정하는가
마이클 샌델 지음, 안기순 옮김, 김선욱 감수 / 와이즈베리 / 2012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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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의 책들에서도 그랬지만, 마이클 샌델은 여러 가지 풍성한 사례들을 통해 자신의 주장을 펼쳐나간다. 그가 말하는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은 여러가지다. 1장에서는 이른바 '새치기 할 수 있는 권리'다. 우선 탑승권, 진료 예약권, 무료로 배부되는 방청권들을 돈으로 구매하려는 행위 등에 대한 비판이 주로 이루어진다. 2장에서는 '인센티브'와 관련된 항목들이다. 불임시술을 장려하기 위한 현금보상, 상금으로서 어떤 좋은 행위를 하도록 유도하는 것, 벌금이 그 행위를 하도록 허가하는 일종의 요금으로 변질되는 것들이 이야기된다. 3장에서는 시장이 점차 도덕을 밀어내는 현상에 대해 말한다. 대리 사과 서비스와 결혼식 축사의 판매, 현금으로 선물을 하는 것, 핵폐기장 후보지 선정에 돈의 문제가 개입되는 것 등이다. 4장에서는 삶과 죽음과 관련된 문제가 전면에 나선다. 타인의 생명보험 증서를 거래하는 '말기환금'의 문제, 유명인사의 죽음을 놓고 벌이는 내기인 '데스풀', 시장에서 테러를 예측하고자하는 테러리즘 선물시장 등이 도마에 오른다. 마지막 5장에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은 '명명권'이다. 예를 들어 스포츠경기장에 차별적인 자리들이 생겨나는 것, 모든 것으로 가능한, 심지어는 신체 일부를 사용하여 이루어지는 광고들, 특정의 지명이나 명명을 시장에서 거래하는 것 등이 이야기된다.

 

좋은 얘기다. 이 이야기들을 놓고 어떤 비판을 하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옳음이나 좋음의 문제, 아리스토텔레스나 롤스, 칸트 등이 이야기했던 공동체와 개인의 정의의 문제, 공화주의인가 공동체주의인가의 문제를 굳이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사실 이와 같은 것들은 오랫동안 '돈으로 거래될 수 없는 것들'의 범주에 들어있었기 때문이다. 위와 같은 새치기의 권리, 생명보험, 명명권 등은 시장과 시장주의의 공세가 어느정도 위세를 떨치게 된 이후에 시장의 영역으로 들어왔다. (물론 더 거슬러 올라가면, 시장 이전의 세계, 그러니까 현재에는 가장 거래해서는 안된다고 여겨지는 인간의 목숨에 대한 권리가 공공연하게 거래되는 세계(예를 들어 노예제)가 존재하였다. 그러나 이는 여기서 말하는 시장지상주의와 관련된 문제보다는 인간의 기본권리와 연관된 문제에 가깝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다시 인권신장과 관련된 인류의 역사를 되짚을 필요는 없을 것이라 생각된다. 물론 현재에도 노예제는 여전히 남아있다.) 즉 이것들은 시장지상주의에서 새롭게 생겨난 거래항목들이다. 예전에 돈(재화)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된다고 여겨졌던 것들이 새롭게 거래의 대상으로 여겨졌을 때, 그것은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도덕적) 가치들과 충돌을 일으킨다. 따라서 마이클 샌델의 이 세심한 논의들에 고개가 끄덕여지는 것도 무리는 아니다. 다만, 내 질문의 몇 가지는 이와는 약간 떨어진 지점에 위치한다.

 

마이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은 바로 지금 현재이다. 바로 지금 미국 혹은 세계 어딘가에서 일어나고 있는 (돈으로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가치들의 거래. 즉 그는 과거나 미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즉 그는 시장이 모든 것의 중심이 되어 있는 시장지상주의에 대해 이야기하지만, 이 시장이 왜 중심에 서게 되었는지, 그리고 왜 이러한 타락의 지경에 이르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입을 다문다. 물론 그것은 이 책의 주제를 넘어설 수도 있고, 그것은 샌델 외의 다른 논의자들의 몫이라고 이야기할 수도 있다. 그러나 다만, 그런 전후 맥락이 없이 이루어지는 이 이야기들은 (본의 아니게) 특정의 한계들을 이 논의를 읽는 사람들에게 덧씌우고 있다. 즉 이 시장은 우리들에게 이미 주어진 상수이고, 그것의 근본적인 한계는 이 책의 관심영역이 아니다. 즉 시장에서 '거래해서는 안되는 어떤 것을 거래하려는 행위'가 문제일 뿐, 그 시장에는 혐의를 씌우지 않는다. 그러나 만약 문제가 그 시장 자체라면? 시장의 근본적인 한계가 바로 그러한 거래행위를 권장하고, 부추기고 있으며 그러한 거래행위 자체를 막는 것이, 그 시장의 근본적인 구조를 뜯어고치지 않고서는 도저히 불가능하다면 어떨까.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아마도 샌델은 인간에 대해 상당히 긍정적인 믿음을 가지고 있는 것이라고. 이 책에서 대놓고 자주 나오는 단어들은 시장, 재화, 가치와 같은 단어들이지만, 은근히 출현하고 있는 단어들은 회복, 훼손, 변질과 같은 단어들이다. 시장의 회복, 공공선의 훼손, 가치의 변질. 즉 좋은 시장이 있고, 좋은 공공선이 있고, 좋은 가치가 있다. 그것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것은 일부 정신나간 경제학자들이고, 정치인이며, 시장지상주의에 물든 사람들이다. 그것은 이러한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거래하는 행위에 관련되어 비판을 할 때 주로 제시되는 두 가지의 중심축과도 연관된다. 그 하나는 공정성이고, 다른 하나는 부패이다. 즉 어떤 특정의 가치가 거래되어서는 안되는 이유는 모든 이에게 그것을 구매할(혹은 판매할) 공정한 기회를 부여하지 않기 때문이고, 그것은 동시에 그 가치를 다른 것으로 변질시키기, 부패시키기 때문에 그렇다. 즉 우리가 이러한 특정가치들의 거래를 막았을 때, 우리는 공정한 우리로, 부패되지 않은 가치를 지닌 본래의 우리로 '돌아간다'. (아마도 이것이 샌델이 그래도 여전히 시장에 어느정도의 믿음을 보이는 이유의 하나일 것이다. 시장에게 무슨 죄가 있는가. 그 시장을 훼손하고 변질시키는 누군가가 문제지. 우리는 도덕적이고 선한 인간으로 돌아가 공공선을 '회복'해야 한다. 그러나 경제학자들에게는 도덕적인 인간은 없다. 오로지 경제적인 인간만 있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렇게 긍정적인 사람은 못된다. 이렇게 시장지상주의의 늪에 깊게 빠져있는 미국과 FTA를 하며 신자유주의의 넘실대는 파고에 흥겹게 올라타고 있는 우리사회에 샌델의 책들이 베스트셀러가 되는 것, 그리고 경제지 '한국경제신문'에서 '왜 도덕인가'라는 샌델의 책이 출판되고, 보수적인 신문들에서마저 샌델의 이야기들이 화두가 되며, MB가 샌델의 '정의란 무엇인가'를 읽고 '공정사회'를 제창했다는 해프닝을 보며 가졌던 어떤 의심이 이렇게 꼬리를 드는 것을 보니 말이다. 그들에게는 마이클 샌델은 그래도 건드려서는 안되는 것은 잘 지켜주는 합리적인 사람이니까. 설혹 샌델의 주장이 실현된 세계가 되어도 그것은 그리 나쁘게 보이지는 않으니까. 시장은 여전히 굳건하고, 시장은 여전히 이 사회에 지배력을 가지고 있다. 그렇게 손해보는 장사는 아니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에게 건드려서는 안되는 성역을 다시한번 일깨울 것이므로 그다지 손해볼 가능성은 없다.) 실패해도, 하버드 교수의 주장을 수용했다는 이미지는 남는다. 그러니까 예를 들어 그런 것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샌델은 2장에서 도덕적 가치들에 적용되는 인센티브의 폐해에 대해서 이야기했다. 막장인 나는, 그 폐해에 고개를 끄덕이면서도 오..이런 것에도 인센티브를 주네..이런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당연히 주어야할 다른 과업과 관련한 인센티브마저도 떼먹는 우리의 회사들을 너무 많이 본 탓이다. 그런 인센티브도 없는데 무슨 도덕적 가치에 따른 인센티브. 우리가 도덕적 가치에 대한 인센티브를 논하는 사이에, (과업에 따른) 정당한 인센티브를 주지 않는 것에 대한 비판은 안드로메다로 날아가버린다. 그리고 (그럴리야 당연히 없겠지만) 이때다 싶은 이 회사의 CEO들이 이 책을 읽고 "우리가 그래서 인센티브를 안주는 것이다."라고 말한다면 어떨까. 물론 이는 농담이다. 그러나 아무튼 우리는 주어야하는 인센티브마저도 당연한 듯이 없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 무슨 도덕적인 행위에 주어지는 인센티브랴. 핵폐기장도 '유치'되고 당연히 주어야 하는 보상금도 떼먹는 사회에서, 무슨 '핵폐기장이라는 폭탄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도덕적인 선택에 반하는 평균 월수입을 훌쩍 넘는 보상금의 부도덕성'인가.

 

어쩌면 이 책의 비밀은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 What Money Can't Buy'라는 이 책의 제목에 숨어있는 것은 아닐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와 돈으로 살 수 있는 것들을 정하는 사회, 어느 쪽이 더 나아보입니까. 막장인 나는 그런 것보다도, 그저 이번에 내한한 마이클 샌델의 강의의 방청권은 얼마에 거래되었을까, 그게 더 궁금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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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2-06-18 10: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서평단 하시는군요.... ^^

"돈으로 살 수 없는 것들을 정한다는 것은 역으로 다른 모든 것은 돈으로 살 수 있다는 이야기도 되니까" 라는 문장이 맘에 와닿습니다. IMF 지원받기 전에는, 일을 잘하든 못하든 회사에서 비슷하게 돈을 받던 시절도 있었지요. 물론 일년에 몇명 뽑아서 포상금을 주기는 했습니다만, 지금처럼 수시로 평가받는 시대는 아니었던거 같아요. 일을 더 잘하라고 평가받고, 그 평가는 금전적 이득으로 이어지지만..... 과연 이런 시스템에서 일을 더 잘하는지는 좀 의심스럽습니다.

기본적으로 평가, 즉 타인이 잘했다 못했다 라는 비판, 무의식 중에 판단,
이런게 좋은걸까 하는 의문으로 이어집니다. 답도 없는, 그저 의문일 뿐이지만요~ ^^

맥거핀 2012-06-19 12:57   좋아요 0 | URL
뭐 그런 것이 샌델이 이야기하는 것이기도 합니다. 예를 들어 학생들에게 공부를 열심히 하는 대가로 돈을 주는 것...그게 좋은걸까? 그게 샌델의 물음이죠. 근데 결국에는 그게 별로 효과도 없을 뿐더러, 효과가 있다하더라도 공부라는 것의 가치를 변질시킨다는 겁니다. (근데 그렇다고 하더라도 여전히 질문은 있죠. 과연 그럼 공부라는 것의 가치는 무엇인가라는 점. 예를 들어 우리나라 학생들은 왜 공부를 열심히하는가. 학문적인 즐거움을 얻기 위해서..? 글쎄요. 좋은 직업을 얻기 위한 것, 그래서 돈을 많이 버는 것이라고도 공공연하게 말해지니까요.)

근데 직장에서의 인센티브를 이야기하는 것도 참 거시기한게 우리나라에서는 인센티브는 커녕 있는 임금도 떼어먹는 판이니까요. 제때 임금도 받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도덕적 가치가 변질되는 것을 막기 위해 인센티브를 거부하라(없애라)고 말할 수 있을까요? 잘 모르겠습니다.

2012-06-20 02: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1 02: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6-20 22: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샌델이 왜 위험하지 않은지(왜 우리 사회 전반에서 반향이 높은지) 잘 알려주는 글이네요. 셋째 문단이 크게 와닿았습니다. '과거도 미래도 얘기하지 않고, 현재만 본다면('현재'를 상수로, 전제로 치면) 그 한계는 개인의 문제가 되어버린다는 것. 그런 의미에서 저는, 샌델을 읽기보단 동생이 갖다준 폴라니를 읽을까나? 싶어지네요.ㅎ

맥거핀 2012-06-21 02:47   좋아요 0 | URL
샌델 씨의 논의들 나름 의미있고 좋아요. 생각하지 못했던 부분들도 많고, 우려되는 점들도 많습니다. 근데 그 논의들을 죽 보다보면 그런 생각이 들어요. 이 논의들이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게 뭐지..? 모든 일의 맥락이란 게 과거와 미래가 있는 법인데, 그렇게 된 원인이나 해결책 같은 것은 이야기하지 않으니까요. 아마도 샌델은 그것은 자기가 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 듯도 싶은데, 그러니 논의들이 공허해지고 맙니다.

오..폴라니. 동생분이 그런 것도 주는 군요. 저희 누나는 기껏 주는 게 폴라티인데. 목도 안 들어가는 폴라티..(헉..죄송합니다. 그래도 여름은 더우니까요. 잠깐이나마 시원해지시라고..-_-)

2012-06-28 00:00   좋아요 0 | URL
헉. 폴라티.. 저도 상당히 주변을 시원하게 해 주는 편인데, 맥거핀님도 만만치 않으심.ㅋㅋㅋ
- 네 저는 동생이 그런 책 주는 여자입니다. 움하하하.. 그러나 읽지도 못하고 반납하게 생겼지요. 요즘 저는 한 달에 책 두 권 겨우 읽어요. 그것도 쉬운 걸로~.

맥거핀 2012-06-28 23:39   좋아요 0 | URL
진짜 그런 교양있는 동생분을 두셨으니.. 저도 요새 서평단 책 소화하기만도 벅찹니다. 최근에 책 두어권을 사긴 했는데, 이것도 틈틈이 보긴 해야하는데..(저번에 얘기한 그 영화책요.^^)

2012-06-29 00:27   좋아요 0 | URL
동생도 뭐 자의로 구입했다기보단 스터디하느라고.. 근데 그 스터디 그룹은 이상해요. 한길문화총서를 종류대로 다 사서 보고 있더랑게요. 뭐 그렇게 두껍고 어려운 책만 하는지?!ㅋㅋ
여튼 영화책 읽고 꼭 평 써 주세요. 궁금궁금해요.^^

맥거핀 2012-06-29 01:03   좋아요 0 | URL
아니..대단한 스터디그룹인데요. 그 한길사에서 나온 시리즈 겉에만 봐도 헉..싶던데. 암튼 열심히 읽고 가능하면 써보겠습니다.^^
 
[김수영을 위하여]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김수영을 위하여 - 우리 인문학의 자긍심
강신주 지음 / 천년의상상 / 2012년 4월
평점 :
절판


 

 

 

 

 

 

몇 개의 키워드가 맴돌고 있는 책이다. 시, 시인, 시대(정신), 인문(정신), 자유,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 단독성, 행동, 불온함, 그리고 김수영. 처음 나열한 키워드들과 마지막 '김수영'이라는 키워드는 이 책에서 무게가 같지 않다. 아니 무게가 같지 않다기 보다는 모든 키워드는 결국 '김수영'으로 수렴된다. 그러니까 김수영은 이 시대에 시를 쓰는 사람이며, 그래서 시인이고, 엄혹한 찬바람을 맞으면서도 자기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고자 했으며, 일반성/특수성의 공식에 매몰되지 않고 단독성을 지키려고 했으며(그럼으로서 보편성이 되었고), 생각에 그치지 않고 행동으로 나아가려 했고, 그렇기 때문에 자유롭고 불온했으며, 그래서 자유와 불온함으로 표상되는 인문정신의 구현자가 되었다. 즉 강신주의 책 <김수영을 위하여>에 따르면, 이 모든 키워드들은 김수영이 마지막까지 지키려고 했던 가치들이자, 김수영의 다른 이름들이며, 인문정신 그 자체이기도 하다.

 

처음에 이 책을 보고서는 뭔가 강렬한 느낌을 받게 된다. 그것은 표지의 바탕과 글씨, 그리고 내부의 속지, 그리고 책날개에 실려 있는 '김일성만세'라는 시가 모두 붉은색이기 때문이다. 처음에는 굳이 붉은색일 이유가 있을까 생각했지만, 책을 보니 그럴 이유가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가독성'이라는 문제를 고려하지 않았다면 모든 글씨를 붉은색으로 하고 싶었을지도 모르겠다.) 왜냐하면 마지막 장의 제목이 '불온함은 긍지다'로 귀결되는 것처럼, 결국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김수영을 이야기할 수 있는 단 하나의 키워드, 그것은 '불온함'이기 때문이다. 불온함은 자유와 행동으로 완성된다. 자유 하나만 놓고서는 결국 불온함에 이르지못한다. 머리 속으로만 행하는 자유, 생각에 그치는 자유는 결코 자유로운 것이 아니다. 그 자유로움은 권력과 우상에 반하는 자유로운 행동으로 이어져야 한다. 즉 누군가가 줄로 감아서, 혹은 채찍질로 도는 팽이가 아니라 각자 스스로의 힘으로 자유로운 궤적을 그리며 도는 팽이. 그것이 불온함이며 그것이 이 책에서 말하는 인문정신이다. 김수영의 경우에는 그것이 시를 쓰는 것이었다. 예를 들어 '김일성만세'와 같은 시를 쓰는 것. '김일성만세'/한국의 언론자유의 출발은 이것을/인정하는 데 있는데/이것만 인정하면 되는데/(중략)/나는 잠이 깰 수 밖에.

 

물론 불온함이 꼭 붉은색일 이유는 없다. 불온함과 붉은색. 발음이 언뜻 비슷하기는 하지만, 이것에는 어떤 태생적인 연관성은 물론 없다. 우리가 불온함에 언뜻 붉은색을 연상하는 것(그리고 그런 이유로 이 책의 표지가 붉은색이 된 것)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이며, 같은 역사를 거쳐왔기 때문이다. 이 책에서는 이런 역사와 관련된 김수영의 두 번의 전환점이 나온다. 첫 번째는 한국전쟁과 그에 이어진 거제포로수용소의 경험이다. 김수영은 북한 의용군에 징집되어 끌려갔으나 탈출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곧 그는 다시 잡혔고, 묻어두었던 인민복과 총을 다시 찾아야만 했다. 그러나 그는 이번에는 다시 남한 경찰에 체포되어 인민군 첩자로 낙인찍혀 거제도 포로수용소로 보내졌고, 포로수용소에서 친공포로임도 반공포로임도 내세우지 않는, 회색인의 삶을 살아야만 했다. 두 번째는 1960년 4월 학생혁명이다. 그는 초기에 학생혁명을 지지하며 집회와 시위에 참가하고 여러 시들을 발표하였으나 곧 그 혁명이 어떤 식으로 마무리가 되는지를 목도하여야만 했다. 그것은 위에 이야기한 '김일성만세'라는 시에 여실히 나와있는데, 4월혁명으로 정권을 잡은 장면 정부 역시 반공을 국시로 내세우던 이승만 정부와 전혀 다를바가 없다는 점. 즉 방을 없애자고 혁명을 하였지만, 그저 단순히 방이 바뀐 것에 불과하다는 점, 자신(과 그리고 다른 모든 이들)은 친공이냐, 반공이냐의 이분법적 도식만이 있던 거제도 포로수용소에 갇힌 것과 크게 다를 바가 없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어떻게 보면 불온함을 붉은색으로만 내세우는 이 책의 표지가 사실은 도리어 어떤 씁쓸함을 담고 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아직도 우리는 불온함에 붉은색을 연상하여야만 하나.)

 

김수영이라는 인간에게 있었던 이 두 번의 전환점은 물론 그의 시 세계에도 영향을 미쳤다. 그래서 그의 시에도 두 번의 전환점이 있는 것처럼 느껴진다. 그 첫 번째 전환은 그가 휴전협정이 되던 1953년에 발표한, 그의 첫 시집의 표제작이기도 했던 '달나라의 장난'이라는 시다. 생각하면 서러운 것인데/너도 나도 스스로 도는 힘을 위하여/공통된 그 무엇을 위하여 울어서는 아니 된다는 듯이/서서 돌고 있는 것인가/팽이가 돈다/팽이가 돈다. 너도 나도, 그러니까 각자 스스로 도는 팽이, 공통된 무엇을 위하여가 아니라 스스로 도는 팽이. 북한이니 남한이니, 친공이니 반공이니, 정치나 이념이니 하는 것에 휘둘리지 않고 모두 각자 스스로가 혼자 힘으로 도는 팽이가 되어야 한다는 것. 그는 그래서 4월혁명이 스스로의 힘으로 돌 수 있는 좋은 기회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는 곧 알게 된다. 시 '육법전서와 혁명'. 혁명을-/불쌍한 것은 이래저래 그대들뿐이다/그놈들이 배불리 먹고 있을 때도/고생한 것은 그대들이고/그놈들이 망하고 난 후에도 진짜 곯고 있는 것은/그대들인데/불쌍한 그대들은 천국이 온다고 바라고 있다. 그러나 그는 이런 시를 통해 비참한 현실을 목도하는 비탄함을 이야기하면서도 동시에 새로운 세계로 나아가기 위한 힘, 그러니까 불온한 자유의 목소리를 놓지 않았다. 불온한 자유를 허락하지 않으려는 외부의 정치적 억압과 내부의 노예적 습성에 대해서 말하며 행동할 것을 이야기하는 것. 이것이 그의 두 번째 전환이다. 시 '푸른 하늘을'. 어째서 자유에는/피의 냄새가 섞여 있는가를/혁명은/왜 고독한 것인가를/혁명은/왜 고독해야 하는 것인가를. 시 '하......그림자가 없다'. 우리들의 전선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그것이 우리들의 싸움을 이다지도 어려운 것으로 만든다/우리들의 전선은 됭케르크도 노르망디도 연희고지도 아니다/우리들의 전선은 지도책 속에는 없다/그것은 우리들의 집안 안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직장인 경우도 있고/우리들의 동리인 경우도 있지만....../보이지는 않는다/(중략)/하늘에 그림자가 없듯이 민주주의의 싸움에도 그림자가 없다/하......그림자가 없다.

 

..................

 

뭔가 좀 묘하게 불편하게 만드는 책이라 생각했다. 일단 이 책은 정확한 형체를 알 수가 없다. 김수영의 전기나 평전도 아니고, 시작(詩作)에 대해 이야기하거나, 철학에 대해 세밀하게 파고 들어가는 책도 아니다. 김수영의 시를 읽은 개인적인 느낌에 대한 글이라고 보기에도 약간은 이상한 점이 있고, 그렇다고 김수영 시에 대한 비평문도 아니다. 더구나 전체적으로 글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다. 책의 앞과 뒤에 붉게 열을 가하고 있어서 그런지도 모르겠지만, 저자의 김수영에 대한 사랑 혹은 찬양의 온도는 시종일관 높아 종종 딴죽을 걸고도 싶어진다. (특히 가장 압권은 에필로그로 실은 저자 자신과 김수영에 대해 이야기할때다.) 이 책을 읽은 다른 많은 분들도 약간은 느꼈겠지만, 그렇다면 김수영만이 시인인가, 다른 시인들은 모두 가짜시만 써낸 허위의 시인들에 불과한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이 책에 따르면 순수시도 참여시도 아닌 김수영의 정신을 가지고 써낸 시, 즉 자신의 시마저도 끊임없이 새롭게 넘어서려는 시(그것도 단지 형태만이 새로운 시여서는 안된다), 다른 누구도 아닌 자신만의 제스처로 써낸 시만이 올바른 시니까. 순수시도 아닌, 참여시도 아닌 각자 자신만의 제스처로 각자 도는 각각의 시.

 

어쩌면, 바로 그것이 묘한 불편함의 원인이 아닐까. 즉 이 책에서 결국 원하는 것은 각자 자신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가득한 사회다. 즉 각자의 중심을 가지고 도는 팽이가 각각 토해낸 시가 자유롭게 어우러져 있는 사회다. 그런 사회에서는 시인이라는 특이한 존재가 더 이상 존재할 이유가 없다. 아니 존재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전혀 눈에 띄지 않을 것이다. 왜냐하면 모두가 시인이므로. 모두가 자신만의 자유로운 시를 써내는 사회이므로. 그러므로 이 책은 김수영에 대해서만, 혹은 그의 시에 대해서만, 혹은 시쓰기나 철학에 대해서만 이야기하지 않는다. 저자가 원하는 것은 김수영에 대해서 자세히 알거나, 그의 시쓰기를 모방하게 되거나, 특정의 철학사조를 전적으로 추종하는 것이 아니므로. 그 모든 것에 대해 자신만의 제스처, 자유와 행동이 결합된 불온을 우리 각자 스스로가 얻는 것이므로 말이다. 그러니 어찌 불편하지 않겠는가. 불편할 때만이 우리는 움직이므로. 편할 때의 우리는 결코 불온해질 수 없으므로.

 

시끄러운 여름밤이다. 공교롭게도 오늘은 김수영의 기일이다. 불온한 그대여. 시를 써라.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도록.

 

지상의 소음이 번성하는 날은

하늘의 천둥이 번쩍인다

여름밤은 깊을수록

이래서 좋아진다

 

 

- 시 '여름 밤'(1967.7.27)의 일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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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06-16 02: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글쓰느라 유로 게임 날리나 싶었는데, 이게 웬일. 아직도 전반. 쉐바 한 골 넣어줘요~.

맥거핀 2012-06-17 16:32   좋아요 0 | URL
네..결국 억지로 쓰게 되는군요. 자발적으로 좀 쓰고 그래야하는데..^^ 한사람님이 읽으시면 긴장해야겠군요.

조금 기획적으로 만들어진 느낌이 없잖아있죠. 사실 같은 얘기를 계속 반복하는 경향도 짙고...강의를 책으로 만든 것이라고는 하지만, 저는 굳이 10개의 챕터로 나눌 이유도 없지 않을까 생각을 했어요. 아무튼 강신주의 김수영에 대한 애정만큼은 생생히 알 수 있었습니다. 확실히 알아듣기 쉽게 차분히 이야기하는 능력도 돋보였구요. 저 같은 경우는 김수영에 대해 피상적으로 알고 있는 편이었기 때문에 김수영의 시세계를 이해하는 데 상당히 도움이 되었습니다.

반딧불이 2012-06-16 12: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김수영의 정신에 감염되고 싶습니다. 김수영에 대한 글은 하도 많아서 무얼 또 보태려하나 싶어 뜨악해하고 있었는데 저자에 대한 믿음이 생기게 글을 써주셨네요. 맥거핀님 덕분에 또 공부했습니다.

맥거핀 2012-06-17 16:36   좋아요 0 | URL
강신주의 논의대로라면 김수영처럼 사는 것은 계속된 자기반성과 자기를 초월하려는 움직임이 뒤따라야하므로 매우 고난한 일이라 생각됩니다. 물론 고난한 일인만큼 기쁨도 맛볼 수 있겠지만요. 저도 김수영의 정신에 조금이라도 따라갈 수 있었으면 좋겠네요.

2012-06-20 22: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을 읽으면서 좀 불쾌했어요. 너무 김수영을 자기 식으로 끌어다 해설해 버리니까.. (그래서 김수영의 연애 이야기까지 읽고 책갈피 꽂아 책장에 넣고 여태 묵혀두었지요. 어쨌든 마저 읽어야겠지요..)
예전에 김수영과 자유를 주제로 '불온함=자유=시정신' 뭐 이런 도식의 강의를 할 때는 재밌고 좋았는데, 그걸 책 한 권으로 써 놓으니(온통 그렇게 자기 논리로 김수영의 삶을 재단해 놓으니) '하나의 해석'이란 걸 넘어서서 '진짜 김수영이 이럴까' 싶은 것이, 불쾌해졌어요. 그래서 맥거핀 님도 '종종 딴죽을 걸고 싶어지'신 게 아닐까 싶네요.

어쨌거나 이 글의 마지막 문단과 인용, 맘에 듭니다.

맥거핀 2012-06-21 02:51   좋아요 0 | URL
아..그랬군요. 강신주 씨의 강의도 들으셨나요? 하긴 좀 보면 너무 한가지 주제로 밀고나가며 모든 것을 다 그 틀에 맞춰서 해석하는 경향이 있지요. 아마도 김수영 시인이 아직 살아계셨으면 불벼락을 내리셨을듯도 싶은데..

그래도 저는 어느 정도는 공감할 수 있었어요. 확실히 글을 쉽게 쓰는 능력이 있고, 조금 어렵다 싶은 이야기도 쉽게 푸는 능력이 있더라구요. 그의 해석에 100% 공감할 수는 없었지만, 그의 해석능력에는 어느 정도 박수를 보내고 싶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