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르 아브르>에 대한 짧은 평. 이 영화는 소위 말하는 어른들을 위한 동화이다. 악인은 벌을 받고, 선인은 착한 일에 대한 보답을 받는다. 불가능은 가능해지고, 기적은 (말그대로) 예기치 않게 찾아온다. 그런데 한가지 흥미로운 점은 이 영화는 그 내용만 동화와 비슷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그 형식이나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도 동화 혹은 아주 어린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와 비슷해진다. 그것은 영화의 첫장면에서부터 감지할 수 있는데, 무표정한 등장인물들의 모습에 뭔가 코믹적인 분위기가 감돌고, 사건은 과장된 효과음으로만 제시되며, 그것은 이들에게 (그리고 그것을 보는 우리에게도) 아무 영향도 미치지 않는다. (예를 들어 아이들을 위한 만화에서 등장인물이 크게 얻어맞아도 우리는 그가 죽지 않을 것을 안다. 왜냐하면 이것은 아이들을 위한 만화(동화)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톰과 제리>에서 우리는 결국 톰의 모든 악행이 제리에게 위해를 끼치지 못할 것을, 그리고 결국 톰이 제리를 잡아먹지 않을 것을 안다.) 그러므로 이것은 따스하고 유머러스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동시에 뭔가 약간은 기괴한 인상을 풍기는 것도 사실이다. (많은 동화가 결국 아주 기괴한 이야기임을 생각해본다면 말이다.)

 

그런데 더욱 흥미로운 것은 여기에 아주 힘든 이야기가 결합된다는 점이다. 아프리카인들의 유럽으로의 (아마도 불법적인) 밀항(인간 거래), 그리고 그 와중에서 한 소년의 탈출. 많은 이들이 결코 상상하지 않는, 아주 먼, 뉴스에서나 나올, 아니, 뉴스에서도 잘 나오지 않을 그런 이야기. 동화적인 분위기와 이 힘든 서사가 결합하였을 때 어떤 이야기가 탄생할 것인가. 그런데 이 영화는 이 힘든 서사가 결국 한계에 부딪혔을 때마다 쉬운 선택을 한다. 이 아주 힘든 서사가 현실이라는 벽에 부딪혀 좌초될 위기에 이를 때마다 쉬운 동화적 데우스마키나가 출현하여 이야기를 이끌어나간다. 몇몇 장면들을 이야기할 수 있다. 예를 들어 소년이 컨테이너에서 탈출할 때의 동화적인 시퀀스들, 감옥에서 소년의 할아버지를 만나야 할 때 동화적 거짓말이 먹혀드는 것, 혹은 소년의 탈출 비용으로 3000유로가 필요했을 때 남편과 아내의 조금은 우스꽝스러워보이는 동화적 화해.

 

글쎄. 이것이 어떤 영화적 솔직함이라고, 현실을 과장하거나 기만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 있는 것인지 모르겠다. 물론 우리는 늘 영화에서 표면적으로 이야기되는 것과, 그와 다른 층위에서 작동하는 것들을 분리하여 바라볼 필요가 있다. 또한 한편으로 늘 동화라는 것이 그 표면에서 이야기하는 권선징악 외에 다른 층위에서 중요한 진실을 이야기하여 왔다는 사실도 간과해서는 안된다. 그러나 이 인물들의 소박한 진심이 서사적인 커다란 벽에 부딪혔을 때, 그 커다란 벽이 그저 간단한 동화적 처치로 사라져버리는 것을 보면서, 불편함을 조금 느낀 것도 사실이다. 이야기가 진행되는 도중에 찾아오는 몇 개의 작은 (거짓과 같은) 기적들 속에서 마침내 찾아온 진짜 기적, 그 기적을 보며 헛웃음이 나왔던 것은 아마도 나뿐이었겠지.

 

 

덧.

 

같은 이야기를 다르덴 형제의 <약속>은 소년과 아프리카 여인을 지하철 속의 출구없는 통로에 가둬놓는 것으로 마무리를 지었다. 그리고 지하철의 소음은 화면이 사라진 이후에도 오랫동안 지속되었다. 아주 아름다워 보이나, 그것을 애써 들여다보기 불편한 세계가 <르아브르>의 세계라면, 처절하고 고통스러워보이나, 기꺼이 들여다봐야할, 그리고 들여다볼 수 밖에 없는 세계가 <약속>의 세계는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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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3 21: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영화 보고 참 좋았었는데, 그와는 별도로 맥거핀 님 비판이 일리가 있다고 생각됩니다. 정말 "거부할 수 없는" 의견이군요. 이 글은. (-대부의 조악한 패러디ㅋ)
마지막 문장 좋습니다. <약속>을 봐야겠다고 생각하게 되는 문장입니다.

맥거핀 2011-12-13 21:42   좋아요 0 | URL
음..그럼 악인은 저군요. 대부에서 거부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것은 늘 조금 더 나쁜 쪽이니.^^
제가 연말도 되었고 한데 마음이 불량스러워서 그런가봐요. 이런 영화보고 감동도 좀 받고, 마음도 좀 따스해지고 그래야하는데..뭐 못만든 영화도 아니고, 아키 카우리스마키니까..기꺼이..이래야하는데, 그 기꺼이가 안되네요.^^;

꽃도둑 2011-12-14 11: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크크 저는 듣도보도 못한 영화네요.
하기야 영화 보는 거 연말결산해봐도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이니...
표면과 또 그 이면에서 드러내고자 한 진실을 보고자 한 리뷰 매력적입니다.

맥거핀 2011-12-14 23:27   좋아요 0 | URL
뭐 꽃도둑님이야 영화 외에 다른 문화생활 많이 하시니..^^(절에도 다녀오시고..책도 열심히 읽으시고..) 저도 올한해 여러 영화를 봤지만, 기억에 아직 남아있는 영화는 몇 편 안되요.

표면과 이면의 진실 같은 거라기 보다는, 위에도 썼지만 제가 마음이 악해서..

아이리시스 2011-12-14 18: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형제 하니까 말인데, 다르덴 형제와 코엔 형제와 스콧 형제 중에 저는 단연 스콧이거든요! 영화들도 좋아하고, 미드시리즈 <넘버스>도 좋고! 코엔 형제는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보고 나가 떨어졌고, 다르덴은 아예 관심도 없어요. 최근에 나온 게 맥거핀님 메인사진 포스터 저 약속이죠? <약속>이 다르덴 형제 것이고, 이 영화가 같은 이야기라길래 안보고도 "어른들의 동화"를 보기에 저는 때가 많이 묻었다는 생각이, 흙흙. 우리 기꺼이 하지 마요. 마음을 따라야죠. 크리스마스에만 따스해지란 법 있나요? 히히히히.

맥거핀 2011-12-14 23:35   좋아요 0 | URL
아아..스콧형제! 뭐 형이야 이미 거장이 된지 오래고, 동생은 스타일리쉬한 그만의 작품 세계를 이미 가지고 있지요. (그래도 저는 여전히 다르덴에 소심하게 한표를..) 영화도 확실히 유전인가봐요. 우리나라에도 정가형제도 있고, 곡사형제도 있고, 조금 다르지만, 류승완, 승범 형제도 있고..그러고보니 이 영화 <르 아브르>의 감독 아키 카우리스마키도 그의 형 미카 카우리스마키 감독이 있죠. 아..나도 영화 잘 찍는 형이라도 있었음 좋았을 것을...^^

저도 이미 마음이 썩었어요. 동화를 보면 뭔가 이상하고, 기괴한 것부터 눈에 들어오니..기적을 들려줘도 그 기적을 의심하고 앉아있으니, 아마도 기적은 저에게 찾아오지 않을 겁니다.^^

아이리시스 2011-12-15 18:20   좋아요 0 | URL
형제들이 많네요! 그렇다면 저도 다르덴에 꼭 한 번 도전해보겠습니다. 웬만하면 매니아적으로 좋아하는 것만 보는 취향을 고치려고요. 저는 오래전부터 노력했는데, 다양성을 인정하려는 노력과도 연관되구요. <르 아브르>도 형제라니 이건 정말로 전혀 모르겠는 거네요. 제가 졌음ㅋㅋㅋ

맥거핀 2011-12-16 12:16   좋아요 0 | URL
형제 배틀에서 승리 Get!!(아..이건 아니고..;;) 저는 개인적으로 사실 영화는 편협하고, 매니아적으로 보는 게 좋다고 생각해요.^^ 멜로, 판타지, 액션, 스릴러, 공포, 다큐멘터리 뭐 이렇게 다양하게 보는 것도 좋지만..매니아적으로 한 분야만 또 열심히보다보면, 거기에서 영화를 보는 시각도 좀 길러지는 듯하고, 조금 더 깊이있게 볼 수도 있게 되겠지요. 아무래도 같은 영화라도 장르(장르라고만 하기는 좀 그렇습니다마는..)에 따라 문법과 구성이 많이 달라지니까요.
뭐 책도 그렇지 않겠습니까. 여러 분야를 넓게 보는 것도 필요하지만, 사실 대부분의 경우 한 분야를 깊게 보는 것이 더 필요할 때가 많지요. 거창하게 말하자면, 세상에 조금 더 영향을 미치는 사람들이 한 분야를 깊게 파고든 사람들이기도 하겠구요.;
 
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내용이 글에 전반적으로 들어있습니다.)

 

 

 

나는 이제 김기덕의 새영화 <아멘>에 대해 악의적인 리뷰를 쓸 참이다. 물론 이 첫문장을 보고 당신이 머금었을 희미한 웃음을 짐작한다. 대체로 '악의적인 무엇인가를 하겠다'라고 말을 하는 자들일수록 그 악의라는 것과 가장 거리가 먼 자들이니까. 그렇다면 이것은 리뷰쓰기의 새로운 전략인가, 아마도 당신은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아무튼 나는 이 리뷰가 결국 악의적인 리뷰가 될 것임을 안다.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먼저 첫 번째 이유는 나는 이 영화의 이야기들을 결국 '해석'하려고 할 것이기 때문이다. 영화는 애정의 대상이지, 해석의 대상이 아니다. 해석이라는 것은 결국 잘게 나누어, 각각의 것을 본 다음, 그것을 자신의 입맛에 맞게 재조립하겠다는 것이다. 그 틈바구니에서 영화는 종종 정체를 알 수 없는 괴물이 되고, 누군가가 겨우 얻게된 마음의 안식이나 감동을 때로는 고스란히, 그리고 폭력적으로 앗아가버린다. 어떠한 경우에서든 해석이 애정의 우위를 점할 수는 없다. 두 번째 이유는 해석인데다가, 그것이 감독의 현재 주위를 둘러싼 어떤 일들에 기초한 해석이기 때문이다. 즉 이 해석은, 감독 김기덕에 대해 여러 매체를 통해 알게된 부정확한 사실들에 기초한 해석이다. 영화가 그 의도한 바와 다르게 스크린 외부의 어떤 것들에 의해 지배되며, 그 자장 안에서만 해석될 때, 영화는 때로 저열한 프로파간다가 되거나, 누군가의 이익을 위한 도구만이 된다. 물론 나는 이제와서, 지금 이런 시대에, 영화의 순수성 같은 것을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단지 한 영화가 그 영화에서 이야기하고 있는 것과 분리된 채, 그것을 보는 이에게 영화 외부의 어떤 것들만 끊임없이 환기시킨다면, 그것은 또 얼마나 슬픈 일인가. 그것이 슬픈 이유는 그것은 그 영화 자체의 내적인 존재목적을 묻게 하기 때문이다. 결국 다른 어떤 것을 이야기하는 것이 이 영화의 목적이었다면, 그 영화는 그런 형태의, 그런 내용일 이유가 있을 것인가라는 질문. 이 두 가지 이유를 들은 누군가는 그럼 이렇게 물을지도 모르겠다. 아, 그렇다면, 리뷰가 결국 그렇게 될 수밖에 없다면, 리뷰 자체를 아예 안쓰면 되지 않나. 그러나 나는 이런 식의 말도 안되는, 악의적인 리뷰라도 이 영화에게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뒤에서도 잠깐 이야기하겠지만, 결국 가장 잔인한 것은 무관심이며, 가장 잔악한 행동 중의 하나는 그 무관심을 무기로 휘두르려고 할 때일 것이므로.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야말로 어떤 의미에서는 그 무관심의 무기에 맞고 비틀거리는 사람의 간곡한 호소일 것이므로.

 

감독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소문들이 있었다. 폐인설도 있었고, 후배감독과의 불화설도 있었고, 계약이나 영화의 진행과도 관련한 여러 이야기들이 있었다. 그리고 그 와중에 영화 <아리랑>이 세상에 나왔고, 그 영화의 특이한 형식과 내용을 둘러싸고도 여러 이야기들이 오갔다. (자세한 내용은 <씨네21> 832호에) 그리고 그 <아리랑>과 짝을 이룬다고 할 수 있는, <아리랑>이 병적 질문들로 가득한 영화라면, 그에 대한 종교적 치유물일 <아멘>이 연이어 공개되었다. <아멘>은 프랑스로 날아가고 있는 여자(김예나)로부터 이야기가 시작된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별로 이야기라 할만한 것은 없다. 이 여자는 파리에서부터 시작하여 베니스, 아비뇽 등 여러 곳곳에서 '이명수'라는 남자를 찾아다니는데, 이 '이명수'는 여자가 찾아가는 곳마다, 이미 어디론가로 떠나버린 후다. 이 영화는 그런 여자를 그저 건조하게 쫓아다닐 뿐인데, 사건이라 할 만한 것은 그 여자를 몰래 관찰하고 따라다니는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은 남자가 있다는 것이다(이 남자는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고 있다. 물론 계속 방독면을 쓰고 있기 때문에 얼굴을 확인할 길은 없지만, 뒷모습만으로도 쉽게 알아볼 수 있다). 이 남자는 야간열차 안에서 이 여자가 자는 틈을 타서 이 여자를 강간하는데(이 장면은 직접적으로 제시되지는 않는다), 여자는 후에 선명한 두 줄의 임신선을 통해 자신의 임신 - 당신은 이제 한 사람이 아니라, 두 사람이라는 - 것을 알게 되고, 이 방독면을 쓴 남자는 여자에게 자신의 아이를 고향(한국)에 돌아가 낳아달라고, 자신은 자수를 하고 죗값을 치르겠다는 쪽지(아기신발과 군복에 쓴)를 보낸다. 그리고 낙태를 할 것 같아 보이던 여자는 결국 아이를 낳으려고 결심하는 것처럼 보이며 영화가 마무리된다.

 

물론 이러한 줄거리만 본 분들은 또 그런 (변태적인) 이야기인가..생각할지도 모르겠다. 김기덕의 영화세계에서 그렇게 새로운 이야기도 아니고, 그간 해왔던 이야기에 비하면 그렇게 발전한 것도 없는 이야기처럼도 보인다. (초중반까지는 <나쁜 남자>의 프랑스 버전 같아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현재 김기덕을 둘러싼 여러 상황을 생각해보면 이 이야기가 조금은 다르게 읽히는 측면이 있다. 예를 들어 <아리랑>의 연장선상에서, 이 여자와 방독면을 쓴 남자를 김기덕의 여러 다른 분신들로 보는 견해들이 있다. (사실 <아리랑>을 아직 보지는 않았지만) <아리랑>은 인간 김기덕과 감독 김기덕의 여러 분신들이 출몰(충돌)하는 영화라고 하니까. 그러나 <아리랑>을 건너뛴 입장에서 보면, 조금 더 단순하게 읽히는 측면도 있다. 군복을 입고, 방독면을 쓴 남자를 쓴 김기덕 자신이 연기하는 것으로 볼 때, 그가 김기덕을 상징하고 있음을 부인하기는 어렵다. 군복은 그간 김기덕 영화세계에서 주요한 클리셰들 중에 하나였고, 방독면은 두 가지 의미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간단하게 외부세계와의 차폐적 의미로, 현재 외부와 차단된 그의 자폐적 심리상태를 말하는 것으로 보는 것이며, 다른 하나는 그의 영화세계에 대한 보호적인 측면으로는 보는 것이다. 방독면이라는 것은 결국 외부의 오염을 막기 위해 필요한 장비이기 때문이다. 즉 이미 오염된 것은 외부세계이고, 보호되어야 할 순수한 것은 그 방독면 안에 있는 것, 즉 김기덕의 영화세계이다.

 

이것을 기초로 하여 이 여성을 생각해 보면, 이 여성(김예나)은 한국의 영화인들, 평론가들, 관객들이다. 남자가 주위를 맴돌고 있으나, 결코 가까이 다가갈 수 없는, 다가갈 때마다 거부반응을 보이는 이 여자는 왠지 한국의 관객들에 대한 김기덕의 비유로 읽힌다. 상징적으로 볼 때도, 후반부에 이 여자의 대한민국 여권을 클로즈업하는 불필요해 보이는 장면은 그런 것을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그러므로 이 여자에게 이 방독면을 쓴 남자가 원하는 것은 자신의 아이(작품)를 낳아주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작품이란 결국 감독 혼자서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는 결국 작품으로서의 가치를 가질 수 없다. 그러므로 이 남자는 기괴하게, 그리고 한편으로는 간곡하게 고향에 돌아가 아이를 낳아줄 것을, 즉 한국의 스크린들에 자신의 영화가 성황리에 받아들여지기를 고대한다. (그러나 한편으로 주목해야 할 것은, 이것이 결국 잠든 여자에 대한 강간의 형식, 즉 여자가 알지 못하는 사이에 이루어진다는 사실일 것이다.) 그리고 이 여자에게 조심스레 다가가려 애쓰면서, 자신의 물건 - 겉옷, 군복, 아기신발 - 들을 여자에게 전해주려 애쓴다.

 

그러나 흥미로운 것은 이 여자가 찾아다니는 것은 오로지 '이명수'라는 실체를 알 수 없는 남자라는 것. 파리에도, 베니스에도, 아비뇽에도, 즉 유럽 어느 곳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남자. 여자는 돈이 떨어져 동냥을 하면서까지 이 실체없는 실체를 찾아다니고, 때로는 바보같아 보일 정도로, '이명수~!'라는 공허해보이는 외침을 내지른다. 이것이 바보같아 보이는 이유는 그 행동도 행동이지만, 이 때만큼은 유독 더 바보같은(즉 아주 단순해보이는) 컷들과 편집을 의도적으로 사용하고 있기 때문인데, 중간에 남자의 이름을 외치는 여자의 모습과 그녀의 외침이 가닿는 모습을 형상화하는 듯한 줌인컷을 번갈아 넣는 장면이 대표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즉 이 행동들은 바보같은 행동이라는 것이 결국 김기덕의 말인 셈인데, 그것은 두 가지 이유인 것처럼도 보인다. 즉 그것은 이 여자가 결국 한국의 관객들을 상징한다는 연장선상에서, 아직도 한국의 관객들은, 동냥을 하면서까지 프랑스의 실체 없는 실체만을 찾아다니는 여자가 상징하듯이 외부(국)의 영화적 권위와 영화적 자본에 길들여져 있다는 의미일 것이고, 다른 하나는 영화 후반부에 말해주는 것처럼 결국 이 '이명수'가 누구인지를 알아보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그 하나의 이유일 것이다. (사실 기차로 지속되는 지금까지의 이 여행은 방독면을 쓴 남자가 준 돈으로 지탱되었다. 명확히 제시되지는 않지만, 동냥으로는 거의 돈이 모이지 않았고, 그 때마다 거금을 전해준 사람은 방독면을 쓴 남자였다. 이를 조금 더 악의적으로 말한다면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의 영화계는 지금껏 베니스에서, 그리고 칸에서 통할 수 있는 '이명수'를 찾고, 지지를 모으기 위해 애썼지만, 역설적으로 해외에서 가장 인정받고, 지지를 받고, 우리 관객들을 조금이나마 그 베니스와 칸에 가깝게 데리고 간 것은 여자(관객)에게 그토록 외면받는 방독면을 쓴 남자 - 김기덕 감독인 것.)

 

영화 후반부, 여자가 애타게 찾아다니던 '이명수'가 결국 방독면을 쓴 남자일지 모른다는 암시가 제시된다. 그리고 여자는 (낙태를 위해) 병원으로 향하던 발걸음을 돌리고, 방독면을 쓴 남자는 경찰서로 향한다. 그리고 여자는 열차 안에서 남자의 방독면을 쓰고, 군복을 입고, 한참 후 그것을 홀연히 벗더니 카메라를 향해 스크린을 만들어 보인다. 결국 김기덕 감독이 바라는 것은 그것이 아니었을까. 여자가 남자가 입었던 군복과 방독면을 쓰고 그를 이해하려 노력하는 것처럼, 한국의 관객들이 자신(김기덕 감독)의 영화세계를 조금이라도 더 이해하고. 자신이 이제 앞으로 만들어낼 새로운 스크린 앞으로 조금이라도 더 나와 주는 것. 여러 연이은 사건들로 인해 폐쇄된 자신을 조금이라도 끌어당겨줄 수 있는 사람은 결국 한국의 관객들밖에 없다는 그런 의미. 그리고 그것을 위해서 자신도 반성하고 새롭게 자신의 영화세계를 만들어 나가겠다는 것(경찰서로 걸어들어간 남자)은 아닐까.

 

그래서 나는 애타게 그의 새로운 영화가 보고 싶다. 인간 김기덕과 현재 그를 둘러싼 여러가지를 연상케 하는 영화, 그래서 악의적인 리뷰를 쓸 수 밖에 없게 하는 그런 영화보다도, 그가 만들어낼 새로운 세계, 현재의 모든 것을 넘어서 관객에게 충격을 안길 수 있는 새로운 세계의 영화를 보고 싶다. (마치 그의 첫 영화가 세상에 나왔을 때처럼 말이다. 그의 첫 영화는 충격적이었고, 많은 관객들을 기꺼이 그의 안티로 만들거나, 그의 추종자로 만들었다. 이 <아멘>에서 우려되는 점 중의 하나는 이 영화가 아직도 어떤 성(聖)으로서 간단한 봉합을 하려 든다는 점이다. 변성찬 평론가가 지적한 바대로 이 영화의 가장 우려되는 부분은 이 영화의 성당 씬과 관련된 부분들이다.)

 

 

 

덧.

 

<씨네21> 832호 김영진 평론가는 이 영화에 대한 반대평에서 다음과 같은 문장들을 썼다. "예술의 살인적인 또는 자기 파괴적인 속성의 비유라는 것 외에 김기덕의 영화팬이 아니라면 이 영화를 볼 필요가 있을까(그런 면에서 이 영화를 정식 개봉하지 않은 것은 김기덕의 양심이 살아 있다는 증거다).", "평론가이기 전에 한 명의 관객으로서, 나는 <아리랑>과 <아멘>에서 김기덕이라는 예술가가 에고를 과시하고 투정부리는 것을 왜 봐야 하는지 모르겠다."

 

<평론가 매혈기>나 다른 여러 매체들에서 보여준, 김영진 평론가의 평소 영화에 대한 견해들을 즐겨 읽고 때로 공감을 느끼기도 했던 독자이나, 이러한 문장들에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다. 어떠한 이유에서든,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영화로 밥을 벌어먹고 산다는 평론가의, 한 영화에 대한 무관심의 선동을 나는 받아들일 수도 없고, 이해하기도 힘들다. 영화의 세계에서, 누군가의 영화에 대한 무관심을 표할 것을 이렇게 언론매체에 대놓고 주장하는 것은, 어떠한 경우에도 휘둘러져서는 안될 무기이다. 그가 말했듯 한사람의 관객이기도 하지만, 그가 단순히 한 사람의 관객으로 읽는 이에게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에 그렇다(그러니 이렇게 <씨네21>에도 '기고'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그는 단순히 '관객의 입장에서' 여기에 기고를 한 것인가). 물론 '반대'는 당연히 가능하다. 그러나 '반대'와 '선동'은, 특히 '무관심에의 선동'은 단호하게 구분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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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12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2-12 21:2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12-12 15: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 굉장히 좋은데요, 다른 분들은 어찌 말씀하실지 모르나 저는 많은 생각을 했습니다.

제일 처음 제시한 두가지 기준이라면, 인간은 그럴 수 밖에 없다고 생각합니다.
어짜피 주관적 경험에 주관적 해석 아닙니까. 아무리 정확하고 객관적인 사실이라 하더라도, 그것이 과연 정확하고 객관적인지는 의문스럽습니다.

김기덕 감독을 좋아합니다만, 그를 보면 이번에 임재범 씨의 인터뷰가 생각납니다.
흔히 천재, 또는 재능있는 분들이 그렇습니다만.. 애정을 갈구하고 인정을 갈구하지만
자신이 있는 그대로, 무엇을 하든 사랑받기를 원하지 않나 싶습니다. 하지만 가끔 그것은 타인에 대한 터무니없는 오만이라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다른 한편으로 그렇기에 훌륭한 작품이 나오는 것이다 라는 생각을 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어떤 영화인지 궁금하네요.. 일산에서는 이런 영화들 개봉 자체를 하지 않아요. ㅎ

맥거핀 2011-12-12 21:40   좋아요 0 | URL
아..감사합니다.^^ 물론 말씀하신 바대로 해석은 주관적일 수밖에 없습니다. 어떤 해석이 객관적이라고 말해지는 순간 그 해석이야말로 가장 주의해야할 해석이겠지요. 다만, 저는 요즘의 어떤 해석들이 두려울 따름입니다. 수잔 손택의 말대로 해석이 지식인이 가하는 복수가 되어, 누군가의 감성, 예술적 감수성을 잡아먹을 때의 두려움이요. (김기덕의 영화도 그간 많은 해석가 - 특히 심리적 해석가 - 들에 의해 난도질되어, 거의 사이코들의 영화가 되어버린 측면도 있구요.) "비평의 기능은 예술작품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예술작품이 어떻게 예술작품이 됐는지, 더 나아가서는 예술작품은 예술작품일 뿐이라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여사의 말을 다시 되새겨봅니다.

예술가들이 종종 에고가 지나쳐 주위를 망가뜨리고, 더 나아가 자신마저 망가뜨리는 경우를 종종 봅니다. 그의 경우 여러가지 벌어진 일들과 겹쳐있었기 때문에 더욱 그런 것 같구요. 그의 이 영화가 그런 지나친 에고가 가득한 측면이 분명 있습니다만, <아리랑>이나 <아멘>은 조금 특수한 상황으로 보아야 할 듯 싶구요, 그의 다음 영화가 정말 눈이 번쩍 뜨일 좋은 작품이었으면 좋겠습니다.

(일산에도 좋은 영화들이 많이 상영하길 바라며..)

2011-12-13 2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렇군요. 진짜 김기덕 영화는 너무 드러내 놓거나 너무 절제하거나 였던 거 같아요. 근데 제가 좋아한 영화는 주로 절제한 쪽... (파란 대문이야말로 내가 젤 좋아할 듯도 한데, 안 봤으니까 패스~) 제가 좋아했던 것은 <빈 집>, <사마리아>, <봄 여름 가을 겨울 그리고 봄> (사실 마지막 영화는 봤을 당시엔 앞의 것과 다름없이 좋았지만, 그 뒤에 기억에 남기론 앞의 두 영화가 더 좋아요.) <나쁜 영화>은 좀 힘든 설정들만 빼면 좋았고. <비몽>과 <파란대문>은 안 봐서 후회했고, <수취인불명>과 <섬>은 절대 못 볼 것 같고... <활>은 잘 모르겠고. <아멘>과 <아리랑>은 볼래야 볼 수가 없네요. 여튼 그가 맥거핀님 말씀대로 상처받기보단 좀 더 펼쳐나갔으면 하는 마음입니다. 김기덕 감독은 여러 모로 굉장히 연구대상, 흥미로운 분입니다.
그나저나 영화광인 맥거핀님께 자랑 하나 지르자면, 저 18일 (일)에 압바스 키아로스타미 <클로즈 업> + 관객과의 대화, 간답니다...으하하하ㅎ 맥거핀님이 젤 부러워해주실 듯 하여, 여기에다 자랑질...ㅋㅋㅋ

맥거핀 2011-12-13 22:12   좋아요 0 | URL
음..맞아요. 김기덕 감독에게 한국 최고의 감독이라는 이름을 붙이기에는 약간 주저되지만, 항상 최고의 논쟁을 불러일으킬 수 있는 감독임에는 틀림이 없지요(절대 빈정대는 말이 아니구요). 그만큼 스타성도 있는 감독이구요.
섬님의 댓글을 보고, 네이버가서 김기덕의 필모를 보면서 예전에 본 영화들을 생각해봤어요. 저는 <야생동물보호구역>이나 <실제상황>, <수취인불명> 같은 초기작이 좋았고 (나름) 충격을 받았었습니다. 이미지들도 그러했지만(진짜 몇 장면은 큰 스크린으로 보며 다리가 후들후들했던 기억이..), 그보다는 이야기를 풀어가는 방식이나, 될대로되라 식의 주인공 설정 등이 그랬었지요(그래서 아직도 조재현 씨 보면 지금 이미지들에 몰입되지가 않아요). 그 후에 <시간>이나 <빈 집> 같은 중간의 작품들을 봐도 처음만큼 새롭지는 않더라구요. 아무튼 김기덕 감독의 경우 보여줄 것이 아직도 많이 남아있다는 생각인데, 뭔가 괴물같은 충격적인 영화가 나왔으면 좋겠어요.

오..압바 감독이 한국에 왔군요. 몰랐어요. 하이...섬님께 미션 하나드리지요. 이란어로(한국어나 영어 안됨) 정곡을 찌르는 질문 하나 하시고 그 결과를 블로그에 알려주세요. 심통나서 드리는 말씀임!

2011-12-14 0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그렇군요. 야생동물보호구역, 씨네21에서 20자평이나 리뷰를 보며, 진짜 설정 독특하다고 생각했던 기억이 나네요. (아, 제목 격 안난 영화가 <실제상황>이군요. 이 영화는 좀 보고 싶어요..ㅎ)
전, 선점하는 스타일은 아닌가 봐요. 그니까 예를 들어 드라마도, 소문난 뒤에 5,6회부터 보는 스타일?! 그렇군요. 맥거핀님이 말한 초기작이 더 좋을 수 있겠단 생각이 듭니다. 하지만 모든 경험은 당대에 해야, 특히 영화는 개봉관에서 봐야 제 맛이니 이미 놓친 거지요.^^

여튼 한국의 다른 먹물 감독들과 비교할 수 없는 말그대로의 독특함이 있는 감독 맞아요. 다만 그것을 낳은 그의 `비범한` 인생이 그에게 남긴 상처도 있는 듯 합니다. 여배우들에 대한 소문(좀 비하인드로 들은 거라 믿을 만한 소식통이라 생각되는 소문..)도 그렇고, 그 외에도 관객이나 평론가, 아니 한국 사람들 전체에 대한 그의 거칠고도 솔직한 + 양가적인 모습에서도 그렇구요. 어쨌든, 다른 무엇보다 `볼 가치가 있는 영화`로 말을 하는 사람이니 한국영화계의 소중한 사람은 맞지요...
(그는 진짜 `궁금해지는` 인물인지라, 정성일이 엮은 <김기덕, 야생 혹은 속죄양>이란 책을 읽게 되더군요. 읽은 결과는, 역시나 대단히 흥미로운 사람이구나.였지요.)

맥거핀 님의 미션에서 힌트 하나 얻었네요. 이란어 인사 하나 공부하고 + 뇌리를 파고드는 예리한 질문 하나 던져서, 압바 감독님께 잊지 못할 추억 하나 남겨드릴까요? 결과 인증은 압바감독님과 제가 함께 있는 사진으로 대신하고용. 으흐흐흐흐흐 (사실 적극성 결핍증이 있어서 있을 수 없는 일입니다만. 둘 다.)

맥거핀 2011-12-14 23:24   좋아요 0 | URL
저는 키노였던가, 씨네21이었던가에서 계속 문제적 감독이니 어쩌니 논쟁들이 붙어서, 도대체 영화가 어떻길래..하고 처음에 김기덕을 접했었던 기억이 납니다. (<실제상황>의 경우 옛 여친님이 주진모 씨 광팬이어서, 어쩔 수 없이..^^;) <수취인불명> 같은 경우는 정말 극장도 황량했는데, 영화는 그보다 훨씬 황량했었구요.

사실 김기덕에 대한 가십들은 별로 들은 바가 없습니다. 항간에는 엄청 순수한 사람이라고도 하고, 뭔가 이상하다는 얘기도 있는 걸로 아는데, 글쎄요. 사람을 가까이서 접해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이지요. 뭐 아무튼 감독은 작품으로 말하면 되니까요. 아주 큰 흠결이 있기 전에는 대체로 그의 작품이 좋으면 그를 지지하게 되는 것 같습니다. (예를 들어 밑에 제가 글을 쓴 로버트 알트만 감독 같은 경우에도, 사생활 측면에 있어서는 많은 소문을 가지고 다녔지만, 뭐 영화가 저렇게나 좋다면야...)

그리고, 뭐 그럼 이젠 압바 님과 섬 님의 인증을 기다리면 되는 건가요? 뭐 인증은 안하시더라도, 압바 님이 해주신 좋은 얘기 있으면 전해주세요.^^
 
르 아브르 - Le Havre
영화
평점 :
현재상영


아키 카우리스마키의 동화적인 기적, 혹은 (이 세상에 나올 수 없는) 기적적인 동화. 그러나 그 동화에 마음이 움직이질 않으니..기적은 스크린 위에만 있다고 (나는) 믿고싶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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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2-09 14: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큐브 1관과 2관의 분위기는 흡사 천국과 지옥이었다. 2관에서는 유머가 가득한 기적의 동화가 상영중이었고, 1관에서는 음울하고 세기말적이고 분열적인 수난극(혹은 수태고지극)이 상영중이었다. 한쪽은 사람들로 가득했고(맨 앞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을 정도로), 끊임없이 웃음이 넘쳐흘렀으며, 영화를 보고서는 훈훈한 정담이 쏟아져나왔고, 무엇보다도 따뜻했다. 그보다 훨씬 넓은 다른 한쪽에서는 사람은 손에 꼽을 정도였고, 표정들은 굳어있었으며, 어떤 아저씨는 영화가 마친 후 이상한 표정을 지어보이며 이거 돌아이 아니냐는(유 헤드 빙빙) 포즈를 지어보였고, 무엇보다도 너무나 추웠다. 지독스럽게 추웠다. 그러나 참 이상하게도, 나는 도리어 따듯한 천국을 지나고 나와, 그 추운 지옥에서 이상한 마음의 평안을 얻었으니............................................변태인가.

아이리시스 2011-12-09 15: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저라면 1관에..^^ 따뜻이고 뭐고 방 구들장에서 군고구마랑 찐빵, 오뎅탕 같은 거 먹으면서 영화 보는게 제일 기적스럽다니까요, 히히.

그럼 저도 변태인가.. 그러니까 맥거핀님은 2관에 갔다가 실망하신 거 맞죠?

맥거핀 2011-12-10 00:41   좋아요 0 | URL
괜히 꼬아서 썼네요.(이렇게 문장을 써서 안된다는 전형적인 문장되시겠습니다.;;)
영화를 보기전에 생각했어요. 예정은 2관의 <르아브르> 이후에 1관의 <아멘>이었는데, 이걸 순서를 바꿔야 하는 거 아닐까. <아멘>으로 뭔가 시험에 든 다음, <르아브르>로 깨끗하게 치유, 뭐 이런 식으로요. 그런데 그렇게 하기에는 여러가지 고려했을 때 도저히 시간을 맞출수가 없더군요. 그래서 일종의 "각오"를 하고, 두 편의 영화를 봤습니다. 그런데 도리어 2관의 따스한 관객들 사이에서 외톨이가 되어 "아..나만 이 영화가 썩 와닿지 않는걸까"하고 생각하다가, 1관에서 예상치 못하게 "그래도 영화라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는 그런 이야기입니다. 네, 단지 그런 이야기일 뿐이죠.^^

2011-12-09 18: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맥거핀 님같은 관객이 있어서, 1관 수태고지극의 감독이 위안과 희망을 얻는 것 아니겠어요. 그러니까 빨리 `수태고지극` 리뷰를 올려 주세요! ^^

맥거핀 2011-12-10 00:45   좋아요 0 | URL
네..가능하면 열심히, 별거는 없겠지만, 리뷰를 남겨보겠습니다. 영화를 보고나니, 1관의 감독(김기덕 감독)이 얼마나 "자신의 영화를 보아줄 누군가"를 열망해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을 조금은 알겠어요. 그러니 섬님도 여력이 되신다면 언젠가 관람을..^^
 
아멘 - Ame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아멘`. 진리, 확실하다 혹은 이루게 하소서의 뜻. 이 영화는 둘 중 어느 쪽인가. 영화에서 자꾸만 영화밖의 다른 것을 말하게 될 때....슬프면서도 여전히 그가 무엇인가 찍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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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1-12-09 15: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전히 그가 무엇인가 찍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 하는 건 맥거핀님인거죠? 감독이 하면 큰일날 것 같은데..( ..)

맥거핀 2011-12-10 00:35   좋아요 0 | URL
아..애매한 문장을 썼네요.(100자로 줄이다 보니까요.) 물론 접니다. 그냥 제가 소소히 안도하는 중이죠.
 
숏컷 - Short Cut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상영시간이 짧아도 매우 지루한 영화가 있고, 상영시간이 길어도 꽤 흥미로운 영화가 있다. 영화 <숏 컷(Short Cuts)>이 바로 후자의 경우라고 할 수 있는데, 이 영화는 레이먼드 카버의 단편소설 여러개를 오려붙인, 미국 LA의 아홉 커플(여덟 쌍의 부부와 한 쌍의 모녀)이 거의 동등한 비중을 가지고 등장하는 3시간 7분 짜리 영화이다. 이 영화는 그 제목이 의미하는 바대로 무수한 숏 컷들의 끊임없는 이어붙이기로 영화가 전개되는데, 놀라운 것은 그럼에도 이 영화는 고유의 리듬을 지속적으로 유지하며, 동시에 그 모든 등장인물들을 관객의 뇌리에 고스란히 남겨놓는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영화가 별 특이한 방법들을 사용하는 것은 아니다. 이 영화는 어떠한 플래시백이나 과도한 점프를 사용하지 않으며(즉 영화는 이 아홉 커플의 현재의 시간을 무심히 쫓아간다. 다만, 회상씬은 없지만, 등장인물의 대화로서 이루어지는 회상은 있다. 뒤에 또 이야기하겠지만, 이 대화들이 어떤 식으로 작용하는지를 보는 것도 흥미롭다), 과도한 카메라워크를 허용하지 않는다. 카메라는 조금 뒤로 물러서서, 이들에 대한 차가운 관찰자적 시선을 유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보다는 이 영화의 놀라운 리듬감은 그 숏 컷과 숏 컷들이 붙여지는 순간에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것처럼 보인다.

몇 가지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다. 웨이트리스 도린은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피니건 부부의 어린아들 케이시를 차로 친다. 아이는 별로 다친 것 같지 않지만, 병원에 데려다주겠다는 도린을 뒤로 하고 집에 돌아오는데, 집에 돌아와 갑자기 급격한 이상 증세를 보이며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를 마시지 않고 긴 잠에 빠진다. 컵에 가득 따라져 있는 우유를 클로즈업하며 컷의 마무리. 컷의 연결은 TV속 재난에 대한 위험을 이야기하는 공익(보험?)광고로 이어진다. 화면 속 우유컵이 탁자에서 쓰러지며 우유가 바닥에 쏟아진다. 이 화면은 도린의 집에서 도린의 남편 얼이 보고 있는 것인데, 얼은 아이에게 큰 사고를 입힐 뻔했다는 도린의 말을 시큰둥하게 들으며, 오로지 그것을 경찰이나 누군가가 보지 않았다는 것에만 안도한다. 또다른 장면. 첼리스트 여자가 농구를 한참 한 다음 옷을 모두 벗더니 갑자기 수영장에 뛰어든다. 그리고 마치 죽은 듯이 물에 떠 있다. 그것을 발코니에서 바라보는 딸(첼리스트)과 사이가 좋지 않은 재즈여가수 어머니는 그녀에게 뻔한 수법(관심을 불러일으키는 수법)을 쓰지 말라고 한다. 그리고 이것을 몰래 숨어서 지켜보는 수영장 청소부 제리가 있다. 그리고 컷의 연결. 한 여자가 나체로 물 속에 죽어 있다. 그리고 이것을 계곡에 낚시를 하러간 스튜어트 일행이 발견한다. 이 장면들은 이 영화의 대표적인 연결 장면들이다.

예를 든 첫번째 장면과 두번째 장면은 모두 시각적으로 장면이 연결된다. 피니건 부인이 따라준 우유컵과 광고 속 가득담긴 우유컵, 그리고 수영장에 죽은 듯이 떠있는 나신의 여자와 죽어서 계곡에 떠있는 나신의 여자 시체. 그러나 이 연결들이 단순한 시각적인 연결이기 때문에 의미가 있는 것은 아니다. 의미적으로 볼 때 이 장면들은 이 등장인물들의 망가진 영혼들을 드러내주는 역할을 한다. 사고를 당한 케이시의 컷 이후에 곧바로 그에게 해를 입힌 도린과 얼의 컷을 붙임으로써, 이들, 특히 얼의 추악한 진짜 속내를 드러내보인다. 두번째 장면도 마찬가지다. 수영장에 들어간 여자와 그녀에게 전혀 관심이 없이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어머니, 그에 이어지는 컷은 계곡에서 나신의 시체를 발견한 낚시꾼들이다. 이들의 행동은 어떨까. 그것은 익히 예상이 가능하다. 이들은 이 시체를 물에서 꺼낸다거나, 경찰에 신고할 생각을 하지 않고, 태연하게 술을 마시고, 그 물에서 물고기를 잡는다(즉 관심이 없다). 그러나 이 영화의 놀라운 편집의 예술은 이것으로만 끝나는 것이 아니다. 이 장면들은 모두 의미망 아래 층위에서 작동하며 일종의 복선의 구실을 함으로써 표층의 의미망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첫번째 장면에서 우유는 광고 속에서 모두 바닥에 쏟아진다. 이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케이시가 처하게 될 운명을 암시한다. 두번째 장면에서 수영장에서 나신으로 시체처럼 떠 있는 여자 첼리스트, 그리고 이것을 몰래 훔쳐보고 있는 제리. 이것은 이 여자 첼리스트가 닥치게 될 앞으로의 일을 말해줌과 동시에, 제리의 미래까지도 보여준다. 동시에 그 계곡 속의 여자에게 닥쳤던 범죄(성폭행)가 무엇이었는지 관객이 짐작할 수 있도록 한다.

두 가지 장면을 예로 들었지만, 이 영화에서의 무수한 컷과 컷의 연결에는 이러한 장면들이 많다. 즉 이 컷의 연결은 세 가지 층위에서 작동을 하는데, 그것은 시각적인 컷과 컷의 연결이 하나고, 그것을 이야기하는 역(逆)의 의미망 발생이 하나고, 그 등장인물들의 내면에 잠재된 욕구와 미래의 운명을 암시하는 연결이 하나다. 이 영화 <숏 컷>의 지속적인 리듬과 의미의 발생에는 바로 이 컷과 컷의 연결, 즉 로버트 알트만의 놀라운 편집 감각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볼 수 있는데, 이것은 실로 정교한 기술이며, 놀라운 감각이기도 하다. 한마디로 이렇게 짧은 컷으로 이루어진, 그리고 많은 등장인물들이 등장하는 영화의 교과서같은 편집이며, 전범같은 영화라고 할 수 있다. 이것은 이후에 이 영화의 영향을 받은 것으로 말해지는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도 결코 도달하지 못한 리듬이라고 말할 수 있는데, 사실 개인적으로는 두 영화의 유사성은 마지막의 예기치못한 재난밖에 없는 것이 아닌가 라는 생각도 든다.



영화 <매그놀리아>에서 마지막 예기치 않은 개구리비가 쏟아졌듯이 이 영화에서는 마지막 예기치 않은 지진이 발생한다. 어쩌면 예기된 재난이라고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이 영화는 장률의 <중경>과 같이 폭발 직전의 욕망들이 끊임없이 누적된다는 인상이 있다. 아무튼 예기되었건, 예기치 않았건 간에 재난 그 자체보다는 재난 이후의 모습이 더 흥미롭다. 처음 이 지진이 발생할 때는, 시작부터 성적타락과 도덕적 해이가 가득한 추악하고 위선적인 모습만을 보여주었던 등장인물들에게 일종의 징벌로서 이 지진이 발생했다고 생각하게 되지만, 이 지진은 그들에게 별 영향을 미치지 못한다. 그들에게 지진은 진도 7인지, 진도 8인지에 대해 논쟁하게 하는 한낱 흥미거리일 뿐이며, 도리어 어떤 범죄를 덮어주는 좋은 기회일 뿐이다. 그것은 아마도 이 지진에 대한 리포팅을 영화 내내 가장 엉망인 모습을 보여주었던 헬기조종사 스토미가 하는 것으로 상징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므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어쩌면 이들의 존재가 재앙 그 자체는 아니었을까. 영화의 시작은 유럽 파리떼의 습격을 리포팅하는 TV뉴스와 그들을 박멸하기 위해 헬리콥터로 뿌려지는 살충제들이다. 이 TV뉴스는 과장되어 있으며, 이들(파리)의 박멸을 일종의 전쟁과 거의 같은 급에 놓고 이야기한다. 그러나 사실 이 영화에서 가장 흥미로운 점은 이렇게 파리와의 전쟁을 영화 시작부분에 이야기하면서도, 영화 중간에 파리 코빼기 하나도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그렇다면 박멸하여야 될 파리는 무엇일까. 이 등장인물들의 집 지붕으로 쏟아지는 살충제는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아마도 그들 자체가 박멸되어야 할, 즉 유럽에서 온 재앙(미국인들)은 아니었을까. 영화 속 살충제를 뿌리고 차례로 내려앉은 헬리콥터들이 마치 파리처럼 보였던 것은 우연이 아닐 것이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은 영화 내내 수많은 대사를 지껄인다. 때로는 너무 많이 지껄여대 이제 그만 좀 닥치라고 소리를 지르고 싶을 정도다. 그러나 그 수많은 대사들은 거의 대부분 아무 의미가 없거나 음담패설이거나, 누군가를 욕하는 말들일 뿐이다. 발화는 끊임없이 이루어지지만, 그것은 서로가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다는 점에서 대화가 아니다. (이것은 그들이 자주 보는 TV를 연상시킨다. 이 영화의 등장인물들에게는 유달리 술을 마시고, 담배를 피우고, TV를 보는 씬들이 자주 배당된다. 그들이 무엇인가 바보 같은 대사를 하거나 바보 같은 행동을 저지를 때면 어김없이 TV가 틀어져 있다. TV는 과장되어 있고(파리에 대한 리포팅처럼), 거의 대부분의 경우 진실을 이야기해주지 않는다. 진실을 이야기하는 것은 도리어 아이들을 상대로 한 만화들이다. 앞에서도 말한 컷과 컷의 연결에서 등장인물들의 위선적인 행동을 보여준 이후 연결되는 컷들이 TV 속 만화(코믹스)인 경우들이 있는데, 그것은 이유가 있다.) 그들은 오로지 자신의 입장만을 이야기하며 과거의 자신을 반성하지 않는다(플래시백은 없다).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등장인물들의 대화로만 이루어지는 회상이 있는데, 이 회상은 반드시 말하는 자의 숨김이나 듣는 자의 외면으로 끝난다. 즉 회상은 결코 과거에 대한 반성을 불러오지 않는다. 그 과거를 이야기하는 사람들은 그 불가해했던 과거를 애써 외면함으로서 현재의 추악한 자신으로만 남는다. 그리고 그것은 결국 누군가의 죽음을 불러일으킨다.

사실 영화 속 가장 불가해한 일은 파리떼의 습격도 지진도 아닌, 케이시의 죽음이다.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 것처럼 보였지만, 끝내 케이시는 조금은 어리둥절한 죽음에 이른다. 이것은 무엇을 말해주는 것일까. 삶은 그렇게 불가해한 일로 가득차 있고 역설적인 일로 가득하다. 이 영화는 앞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역(逆)의 컷으로 계속 이어진다. 또 영화 전체적으로 보아도 그러한 면이 있는데, 영화 속 위선으로 가득한 병든 영혼들 속에서도 그나마 가장 긍정적으로 그려지는 사람을 찾자면, 웨이트리스 도린이다. 그러나 이 도린은 결국 영화 속에서 가장 중대한 잘못(케이시의 죽음)을 저지른 사람이기도 하다. 이것은 이 불가해한 역설로 가득한 세상을 보여준다. 그것은 전체적인 측면에서도 그렇고, 각 등장인물들 하나하나에서도 그렇다. 대부분의 인간은 겉으로는 전혀 문제가 없어 보이지만, 동시에 위선과 위악을 가득 담은 존재들이기도 하다. 그들은 결코 과거를 돌아보지 않는다. 현재만을 보고, 현재만을 생각할 뿐이다. 그것을 이 영화 <숏 컷>은 어떠한 회상도 없이 느리게 그들을 관찰하면서 붙여나간다.

우리는 단지 현재의 '숏 컷'만을 연기하고 있을 뿐이다. 그것이 어떻게 붙여질지는 우리 자신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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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12-06 00: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잘 읽었습니다. / 마지막 문장, 멋진데요?!

맥거핀 2011-12-06 16:53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민망하네요.ㅎ

Shining 2011-12-06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다양한 영화를 보시는군요. 맥거핀 님의 리뷰는 언제나 놀랍지만 가끔은 영화 목록만 훑어도 감탄할 때가 있답니다^^; 저는 편협한 성격이라ㅠ 이게 잘 안 고쳐지네요ㅠ

맥거핀 2011-12-06 23:39   좋아요 0 | URL
요즘에 여러 자잘한 영화제들도 많고, 여러 좋은 기획들도 많아서, 좋은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루트는 점점 늘어나는 편이지요.(뭐 하다못해 집에서 볼 수도 있구요.) 근데 뭐 영화는 많아도 시간이 잘 안받쳐주니..ㅠㅠ 알트만전 같은 경우에도 시간을 맞추다보니 보고 싶던 영화는 못보고 다른 영화들만 보고 왔네요.
근데 뭐 저도 편협한 건 마찬가지라..액션물이나 블록버스터 같은 것은 또 잘 안보네요.^^;

아이리시스 2011-12-06 20: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에 말씀하셨을 때 훑어보다 이 영화에 관심이 갔는데 보셨군요. 저는 이제 영화 볼 때 100분 이상은 집중을 못하겠어요. 초딩의 집중력ㅋㅋㅋ

저 사진 한 장이 맥거핀님 글의 많은 부분을 상상가능하게 합니다. 사진이 막 시끄러워요, 으하하^^

맥거핀 2011-12-06 23:47   좋아요 0 | URL
아..저 장면은 영화의 거의 마지막이에요. 마구 떠들던 인물들이 잡담은 이제 그만이라는 식으로 레몬을 한입씩 깨무는 장면입니다. 알트만의 위트라 할수도 있구요. 뭐 인생의 신맛좀 보라는..;
100분의 집중력이면 뭐 슈퍼초딩인데요.^^ 저도 요즘에는 한 120분이 넘어가는 영화면 시작부터 약간 긴장을 해요. 뭐 이렇게 아예 긴 영화는 그냥 마음을 비우고요. 중간에 졸리면 자자 이런 식으로.^^

아이리시스 2011-12-08 01:33   좋아요 0 | URL
상업영화 아닌 그래도 <영화>란 걸 좋아한다 말하려면 100분은 초딩 집중력 맞아요. 하하하. 100분은 다들 집중하고 견디잖아요. 마음을 비우는 방법 좋겠군요. 끝까지 꼭 봐야한다는 강박이 그렇게 만들기도 하는 것 같아요.

맥거핀 2011-12-09 00:34   좋아요 0 | URL
사람이란 참 웃긴게, 뭐 어떻게든 참고 버텨야지...하면 대체로 잠이 오니까요. 근데 또 한편으로는 아무리 해도 안되는 영화도 있어요. 저는 예전에 <엑스맨> 볼 때 극장에서 3번인가 4번인가 자다가 깨다가를 반복한 적도 있어요. 그것도 짧게 그런거도 아니고 한 20분 보다가 한 5분 자다가 깨고, 그리고 다시 정신차려서 한 20분보다가 또 졸고..제가 `맨`나오는 영화를 워낙 안좋아하기는 합니다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