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톤 - Ston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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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 속에 있는 악마를 대하는 몇 가지의 선택지들. 악마를 불러내 놀거나, 악마에게 다른 이름을 덧씌우거나, 악마보다 먼저 다른 것에 자신을 넘기거나, 그 악마에게 맞서 대항하거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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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23 03: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실 종교적 메시지는 없이 훨씬 보편적으로 읽힐 수 있는 영화인데, 괜히 특정의 종교적 도그마가 있는 척한다. 그 이유가 뭘까.
 

 

조금 된 글이지만, 영화 <숨>을 보게 된 계기가 된 글이기에 옮겨둔다. 
 

   
 

뒤틀린 몸과 시선을 이해하다 [한겨레 21 2011.09.05 제876호] 

[문화] 장애인 시설 다룬 두 편의 영화, 조금 다른 접근법… 선악구도 선명한 <도가니>와 장애인의 주체적 욕망 중시한 <숨>

장애인 시설의 실화를 다룬 영화가 잇달아 개봉한다. 광주 ‘인화학교’ 사건을 다룬 <도가니>와 전북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 사건을 모티브로 한 <숨>이 개봉할 예정이다. 두 영화는 장애인 시설의 성폭력 사건을 소재로 삼지만 접근법이 다르다.  


직설적이고 계몽적으로 사건 알려

인화학교는 청각장애 기숙학교로, 교장과 교직원들이 장애학생에게 상습적인 성폭행을 가했다. 아이들은 침묵 속에 갇혔고, 교사들은 모른 척했다. 가해자들은 지역 유지로, 이들과 연루된 교육청·시청·경찰 등은 재단을 감사하거나 조사하지 않았다. 2005년 일부 교직원이 장애인 성폭력상담소에 제보하고 ‘인화학교 성폭력대책위’가 꾸려지며 오랜 침묵의 카르텔이 깨졌다. 문화방송 을 통해 전국에 알려졌고, 본격적인 수사가 이루어졌다. 그러나 재단은 임원을 해임하지 않았다. 해임을 촉구하는 대책위의 천막농성이 해를 넘기고 등교 거부와 천막 수업이 이루어지는 가운데, 학생들이 교장에게 계란과 밀가루를 던지는 일이 발생했다. 교장은 학생들을 폭행 혐의로 고소했고, (1991년 정원식 총리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여론은 악화되었다. 그러는 사이 재단은 성폭행 혐의로 직위 해제되었던 교직원들을 복직시켰고, 대책위에 참여한 교사와 보육사를 파면·해임했다. 2007년 법원은 교장과 행정실장에게 집행유예를 선고했고, 평교사 한 명만 징역 10개월의 실형을 선고받았다. 학교로 돌아온 교장은 나중에 암으로 사망했고, 다른 가해자들은 지금까지 인화학교에서 근무한다.

‘인화학교’ 사건이 세인의 관심에서 멀어질 즈음, 공지영의 르포 소설 <도가니>가 나왔다. 소설은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일들이 어떤 권력의 메커니즘에 의해 일어나는지를 냉철하게 그렸다. 영화 <도가니>는 소설을 원작으로 비교적 충실하게 사건을 고발하고, 진실을 위해 싸우는 이들의 심경을 조명했다. TV <인간극장>의 실화를 바탕으로 해외 입양인의 문제를 그린 영화 <마이 파더>를 찍었던 황동혁 감독이 연출을 맡고, 끔찍한 진실을 파헤치려고 분투하는 교사와 인권센터 간사 역할을 공유와 정유미가 맡았다. 영화의 시선은 직설적이고 계몽적이며, 장르영화의 기법 속에 선명한 구도와 문제의식을 담아냈다.

<숨>은 전혀 다른 스타일의 영화다. 극영화라기보다 다큐멘터리에 가까운 질감의 화면에, 명쾌함이 아닌 애매함을 지향한다. 2007년 한국방송 전주총국과 전북장애인시설인권연대의 조사로 김제 ‘기독교 영광의 집’의 성폭행과 횡령 사건이 밝혀졌고, 이란 프로그램에 세 차례 방영되었다. 사건이 알려지기 전 ‘기독교 영광의 집’은 원생들끼리 합동결혼식을 시켜주는 훈훈한 시설로 언론의 칭찬을 받았다. 그러나 운영자인 목사가 지적장애 여성을 15년간 성폭행하고 증거인멸을 위해 자궁적출 수술까지 받게 한 사건이 알려진 뒤, 시설은 폐쇄되었고 피해여성은 쉼터로 보내졌다. 2009년 목사는 성폭행 혐의로 징역 3년에, 부인인 원장은 횡령 혐의로 징역 10개월에 처해졌다.


고발이 놓치는 지점의 리얼리티

<숨>의 감독은 당시 한국방송의 자료를 토대로, 시설과 쉼터를 생생한 리얼리즘으로 재현한다. 그러나 영화는 고발이 아니라, 고발이 놓치는 지점에 주목한다. 수희는 뇌병변장애로 언어장애와 약간의 운동장애가 있으며, 지적장애는 없다. 노동능력이 있는 수희는 청소와 빨래를 도맡아 한다. 그녀는 지적장애인 민수를 몰래 보일러실로 데려와, 여느 연인처럼 립스틱을 바르고, 거울로 알몸을 비추어보며 성관계한다. 수희는 과거에 목사에게 성추행당한 적이 있지만, 지금은 민수의 아이를 임신했다. 임신 사실을 안 목사는 수희에게 민수와 결혼시켜 시설에서 살게 해주겠다고 말한다. 수희는 희망에 부푼다. 그러나 원장의 아들이 지적장애 여성을 성폭행해 임신시킨 것을 알게 된 외부 사회복지 관계자들이 시설에 들이닥치고, 임신한 수희를 ‘보호 조치’한다.

영화는 <도가니>가 취하는 선악의 구도가 아니라, 판단 유보의 지점을 보여준다. 임신 사실을 안 원장이 수희를 강제로 데려간 곳은 산부인과일 것이란 예상과 달리, 웨딩숍이었다. 원장 부부의 약속이 어디까지 사실인지 판단하기 어렵다. “우리는 오랫동안 같이 산 가족이고, 이 공동체를 유지하며 사는 것이 좋지 않겠냐?”는 원장의 말은 표독스럽게 들리지만, 한편으론 진실처럼 느껴진다. 시설은 폭력적인 곳이지만, 그곳에서 수희는 ‘노동하는 주체’였다. 반면 쉼터는 극도로 친절하지만, 수희는 ‘보호 대상’일 뿐이다. (시설에서 수희는 다른 사람을 목욕시켰지만, 쉼터의 상담사는 매니큐어를 칠하고 있는 수희를 끌고 가 목욕을 시킨다.) 쉼터 상담사는 부드러운 어투를 사용하지만, 수희의 말을 듣지 않거나 듣고 싶은 대로 듣는다. 상담사는 수희가 성폭행을 당했다고 단정하며, 가해자를 계속 추궁한다. 말을 하는 도중 수희가 “안 할래”라고 하지만, 상담사는 성폭행 당시의 거부 의사로 알아들을 뿐, 말을 그만하겠다는 뜻으로 듣지 못한다. 상담사는 언어장애가 있는 수희를 당연히 지적장애가 있는 것으로 생각하고, 지적장애인의 경우 어린아이와 같은 무성적 존재로 취급한다. 장애여성은 성 문제에서 오로지 성폭행의 피해자로만 사유될 뿐, 성적 욕망과 행위의 주체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못한다. 이는 장애여성의 섹슈얼리티를 사고할 때 흔히 빠지는 오류이자, 장애여성의 성폭력 피해 문제를 이슈화하는 영화들이 놓쳐온 지점이다. 피해자성이 강조될수록, 성적 자기결정권이라는 핵심적 화두는 멀어진다. 장애여성은 모성의 권리도 무시된다. 장애여성은 보살핌의 대상이지 보살핌의 주체가 될 수 없을 것이라는 생각으로 모성이 배제된다. 수희가 인형을 껴안는 행위는 모성적 욕구의 표시지만, 유아적 행위로 간주된다. 수희가 육아 책을 본다는 사실은 간과된 채, 상담사는 수희에게 어린아이를 대하는 말투로 아이는 입양시켜야 한다고 말한다.


‘장애인-되기’로 장애인과 눈 맞추기

<숨>은 시설과 쉼터를 이분법적으로 판단하지 않는다. 그 대신 처음부터 끝까지 수희의 뒤통수에 카메라를 밀착시킨 채 그녀의 눈높이와 시선으로 사건을 보여준다. 관객은 그녀가 본 만큼 알고, 그녀가 답답한 만큼 답답해하며, 시설과 쉼터의 태도가 똑같이 폭력적이란 것을 체험하게 된다. 이는 중요한 성과다. <도가니>와 비교해보면 차이점이 명확해진다. <도가니>가 처한 상황에서는 시설은 악이고, 선생님과 인권활동가라는 외부 세력은 선이다. 절대 악의 폭력에 시달리는 무고한 장애인들과 이들을 구출하려고 위험을 감수하는 외부인의 고군분투를, 외부인의 시점에서 그려나간다. 소설을 바탕으로 하는 영화는 선명한 선악의 구도 속에서 관객은 착하고 잘생긴 비장애인 주인공에게 감정이입을 하고, 장애인은 순결한 피해자로 객체화될 우려를 안고 간다. 물론 이런 방식을 통해서라도 장애인의 고통에 공감하고 관심을 갖는 것은 나쁘지 않다. 그러나 뒤틀린 장애인의 몸과 시선을 일치시키며, 남루하지만 열정적인 그녀의 섹슈얼리티를 납득하게 하고, 그녀가 일상적으로 겪는 소외를 경험케 함으로써 시설이나 쉼터나 동일한 폭력성을 지니고 있음을 깨닫게 하는 <숨>의 관람 체험은 소중하다. ‘장애인-되기’를 통해 장애인의 주체성을 사고할 있는 흔치 않은 기회이기 때문이다. 수희의 마지막 대사와 표정에서 결기를 느꼈는가? 그렇다면 당신은 장애인과 눈을 맞추고 대화할 수 있는 첫 관문에 닿은 것이다. <숨>은 9월1일, <도가니>는 9월22일에 개봉한다.

황진미 영화평론가

 
   

 


황진미 평론가의 글은 평소 별로 좋아하지 않는 편이지만, 이 영화에 대한 전체적인 코멘트에는 동감한다. (다만, 이 영화의 목표 지점이 '장애인-되기'인가,라는 점에는 의문이 든다.) TV 시사고발 프로그램에서 자주 하는 그런 이야기라고 지레짐작하던 관객이 조금은 이상함을 느끼는 순간의 시작은, 시설 원장이 임신한 수희를 (낙태를 목적으로 한) 병원이 아닌, 웨딩샵에 데려가는 장면일 것이다. 물론 아주 간단하게만은 말할 수 없다. 원장 부부의 호의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다르게 보면 사건을 간단하게 무마하려는 그들의 시도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또한 한편으로 생각해보면, 과연 이 시설에 어떠한 사건들이 있었는지, 수희가 그간 겪어왔던 일들이 무엇이었는지 명확하게 짐작하기는 어렵다. 예를 들어 위 글에서는 시설에서 목사가 행한 '어떤 일'들이 단정적으로 있었으리라 결론을 내리고 있지만, 적어도 영화상으로는 그것은 뉘앙스로만 짐작될 뿐, 세부적인 정황을 판단하기가 어렵다. 그러므로 대부분의 관객들이 원하는 명확한 진실은 관객들에게 끝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위의 글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의 시점이 거의 철저하게 주인공인 수희의 시점에 맞춰져 있기 때문일 것이다. 수희가 모르는 것은 관객도 모르며, 수희가 짐작하게 되는 것은 관객도 짐작한다. 그런데 거기서 영화가 한 발짝 더 나아가고 있는 것은 그렇다고 해서 관객인 '우리'가 수희가 아는 것은 적어도 알고 있는가, 즉 그녀의 생각을 알 수 있겠는가라는 점이다. 우리는 수희가 처해 있는 상황과 거기서 그녀가 취하는 미세한 반응들만 영화를 보면서 알게 될 뿐, 그것에 있어서 수희가 진정으로 생각하고 느끼는 점이 무엇인지 명확하게는 잘 모른다. 물론 우리는 대강의 어떤 것을 짐작하게 되고, 누군가의 행동이 옳은가 그른가를 영화를 보면서 심판하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우리의 느낌일 뿐, 그 때 그녀도 그렇게 느꼈을까, 혹은 우리가 저 위치에 처해있다면 어떻게 대응할 수 있을까라는 것은 쉽게 이야기할 수 없게 된다. 그것은 물론 수희가 처할 수밖에 없는 위치와 우리가 현재 처한 위치가 달라서이기도 하겠지만, 스크린을 앞에 둔 우리의 입장이 기본적으로 방관자이고, 방조자일 수밖에 없음에 그 이유가 있다.

위의 글에서 말하는 것처럼,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모호하다. 그러나 그것이 아마도 진실에 더욱 가까울 것이다. 이 사회에는 아직도 나쁜 것들이 도처에 널려있고, 대체로 나쁜 것들이 오래 지속되고, 그 생명력을 질기게 이어나가는 것은 그것이 눈에 잘 보이지 않는 까닭이므로. 눈에 쉽게 보이는 상처는, 카메라가 쉽게 잡아내 그 명확한 실체를 밝혀낼 수 있는 악은, 사실 많지 않다. (물론 나는 이 문장이 명확한 악이란 없다, 만들어진 것이다, 그보다는 보이지 않는 악이 더욱 중요하다,라는 식으로 읽히는 것 또한 경계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골똘히 고민하게 되며, 조심스럽게 그 환부를 헤치고, 몇 가지 의문을 던지게 된다. 그 의문에는 아마도 이런 것도 포함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어쩌면 이 일들에 대해서 일종의 공범이 아닐까. 우리 역시도 장애인이 우리의 눈 앞에 드러나지 않고 어딘가에 갇혀서 적당히 '보호'되고 있는 것을 어느 정도는 긍정하고 있었던 것, 바라고 있었던 것은 아닐까. 우리는 그들의 욕망이란 없다고, 그들의 욕구란 없다고, 그들은 단지 인큐베이터 안에 잘 담겨져 있어야 할 대상이라고 어느틈에 편하게 생각하고 있던 것은 아닐까. 시사고발 프로그램을 보고 느끼는 우리의 분노란, 어쩌면 아주 조금은 우리 자신의 죄의식을 다른 누군가에 대한 분노로 돌렸던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질문은 이런 것과도 맞닿아 있다. 나는 이 영화에서 한 두 차례 등장하는 주인공 수희의 노출 장면을 보면서 어떤 불편함을 느꼈다. 그리고 그 불편함을 이 영화에서 그런 것이 필요했을까 라는 물음으로 치환하려 애썼다. 그러나 그 질문은 온당할까. 그것을 불편해하는 나의 내면에는 무엇이 담겨 있는가. 다른 이의 악들을 들여다보기 전에, 나의 내면부터 깊게 들여다보아야 한다. 거기에 무엇이 있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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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여러 내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의 마지막을 보다보면, 이 영화는 미래의 묵시록일까, 아니면 우리가 애써 외면하고자 했던 현재의 진실일까,라는 물음에서 후자의 손을 들어주고 싶어진다. 구제역 파동, 밀림들의 파괴, 대형 제약사들의 농간, WHO와 CDC의 음모, 사스와 신종플루의 창궐 등에 관한 몇 개의 뉴스릴을 재주껏 조합하면 아마도 이런 영화가 나올 것 같기도 하다. 어쩌면, 김혜리 씨던가, 아니면 다른 누군가인가가 농담삼아 말했던, 이 영화는 감독 스티븐 소더버그의 뉴스들로만 영화를 만들 수 있는가라는 실험이라는 말이 어쩌면 아주 농담만은 아닐지도 모르겠다. 그런만큼 이 영화는 드라마를 거의 철저하게 배제하고 있다. 아마도 드라마를 만들고자 작정하고 마음먹었다면, 몇 개의 눈물나는 드라마를 여기서 쭉쭉 뽑아낼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감독은 그런 것에 별 관심이 없다. 그가 원하는 것은 이 '양상'을 철저하게 보여주는 것이다. 그는 그러므로 작정하고 '시사매거진 2580'이나, '추적60분'에 나올 법듯한 배경음악들을 삽입하고, 수천만달러 짜리 배우를 극 초반에 죽여 기꺼이 머리가죽을 벗겨낸다. 그는 자칫 드라마에 빠져 관객이 다른 것을 보기를 원하지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러나 여기에는 묘하게 드라마가 살아있다. 그것은 물론 이것이 결국 뉴스가 아니라 영화이기 때문에 그렇기도 하겠지만, 소더버그 나름의 메시지를 전달하려는 노력이 스며들어 있기 때문에 그러한 것처럼도 보인다. 어떤 리뷰들의 농담들처럼, 단순히 그 메시지란 '손을 철저하게 잘 씻자'와 같은 것은 아닐 것이다. 영화의 초반부, 첫 희생자인 베스(기네스 펠트로)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을 카메라는 세밀하게 좇는다. 그녀가 물잔을 들고, 카드를 집어들고, 어딘가를 스치듯이 만지고 하는 등의 동작들. 물론 이것의 주 목적은 그녀의 동작을 잡아내는 것이 아니라, 그 동작들 사이로 유유히 유영하는 바이러스를 잡아내기 위한 것이다. 그리고 동시에 다른 여러 사람들의 별 의미없어 보이는 동작들도 영화는 비슷하게 잡아낸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이 있는데, 이 시작은 접촉(이 영화의 제목이기도 한 contagion)들을 잡아내기는 하되, 그 접촉은 대체로 사람과 사물의 접촉이라는 점이다. 우리의 일반 상식이 가르쳐주는대로, 당연하게도 바이러스는 사람과 사물이 접촉했을 때만 전염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과 사람의 직접 접촉, 예를 들어 악수나 포옹 등에서 바이러스는 더욱 신나게 자리를 옮길 것이다. 그러나 소더버그는 그 장면들을 왠지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 해답처럼 보이는 장면이 영화 후반부에 제시된다. 치버 박사(로렌스 피시번)는 자신이 일하는 센터 직원의 아들에게 개발된 백신을 놓아주며, 악수를 하고, 악수의 진정한 의미를 가르쳐준다. 악수라는 것의 의미는 내 오른손에 무기가 없음을, 즉 내가 당신에게 적이 아님을 보여주는 것이라는 점. 이 장면이 약간 특이하게 보이는 점은 소더버그는 이 영화에서만큼은 잉여를 조금도 용납하고 있지 않음에도, 불필요하게도 악수의 참의미까지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 장면은 결국 어떤 잉여를 감수하고라도 이 위치에 들어갈 필요가 있었다는 의미이고, 그 의미란 결국 소더버그가 담고 싶던 메시지일 것이다. (물론 베스의 딸이 남자친구와 춤을 추며 유투의 노래가 깔리는 장면도 마찬가지일 것이고..) 그러므로 이 영화에서 메시지란 결국 영화를 뒤집어보는 데에서 생겨난다. 왜냐하면 이 영화에서 바이러스의 창궐에 의한 파국을 막는 방법은 결국 접촉을 최소화하는 것인데, 그렇다고 해서 그 접촉이 제로가 된다면, 결국 바이러스에 인간은 패배하고 말 것이기 때문이다. 당신이 고립된 채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는다면 누가 당신을 구하러 올 것인가. 그러므로 결국 최종적인 극복은 인간들간의 연대로 가능한 것이라는 소더버그 식의 믿음이 여기에 들어가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이 소더버그 식의 연대는 한편으로 조금은 특이해보이는 점도 있는데, 그 연대는 예를 들어 우리가 흔히 믿고 있는 소셜미디어적인 연대, 혹은 다른 어떤 것을 매개로 하여 이루어지는 연대는 아니라는 점이다. 버스에서 쓰러진 남자를 구해줄 생각없이 휴대폰으로 찍는 사람들도 그렇고, 블로거 저널리스트(주드 로)를 영화에서 처리하는 뉘앙스에서도 느껴지지만, 소더버그는 이러한 방식의 연대, 혹은 관계에 별로 신뢰를 가지지 못한 것으로 보인다. 왜냐하면 이런 소셜미디어나 인터넷은 전혀 긍정적이지 않은 방식으로도 엄청난 위력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아마도 그것은 공포의 전염이라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보이지 않는 것들에 대해 공격을 받는 상황에서 결국 문제가 되는 것은 바이러스 그 자체보다도, 마찬가지로 눈에 보이지 않지만 더욱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공포심 그 자체'이며, 그것은 도리어 이런 바이러스의 확대보다도 인간 자신들에게 더 심각한 문제를 야기한다. 그 심각한 문제란 앞에서도 말했지만, 바이러스의 근본적 퇴치 방법인 '긍정적인 연대' 자체를 불가능한 것으로 만든다는 점이다. 연대는 결국 이성의 힘으로 가능한 것인데, 그 이성이란 공포에 잠식되지 않았을 때만이 그 기능을 발휘하기 때문이다. (영화 속 맷 데이먼이 이성적인 판단이 가능하며, 인간적으로 보이는 이유는 무엇보다도, 자신이 살아남는다는 확고한 믿음이 있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러므로 영화의 마지막 블로거 저널리스트가 살아남는 것을 보았을 때 그런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가 실제로 바이러스의 공격을 받았는지는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이 마지막은 왠지 영화 <링>을 연상하게끔 하기도 한다. 영화 <링>에서 가장 무서운 씬은 아마도 사다코가 TV에서 스멀스멀 기어나오는 씬이 아니라, 마지막에 비디오테이프를 들고 고속도로를 타고 있는 여자의 굳은 얼굴일 것이다. 사다코 바이러스는 자신을 복제하여 전파시키는 자에게 남은 삶이라는 상(혹은 벌)을 내려주었다. 어쩌면 이 <컨테이젼>에서의 바이러스도 비슷한 것이 아니었을까. 결국 그 블로거 저널리스트는 바이러스의 생존에 필수적인 '공포의 확산'의 매개체로서 그것의 전파에 큰 공헌을 했으니까. 어쩌면 그것은 영화 속 누구보다도 헌신적이었던 미어스 박사(케이트 윈슬렛)의 죽음이 그런 식으로 그려져야만 했던 것과도 맥을 같이할지도 모르겠다. (물론 이 <링>의 사다코 바이러스는 이 <컨테이젼>의 바이러스보다는 조금은 나은 점이 있다. 그것은 이 사다코 바이러스는 누구나에게 찾아간다는 점. 돈이 있거나, 없거나, 지위를 가졌거나, 가지지 못했거나.)  

스티븐 소더버그 감독은 축구로 치자면 전술과 전략에 능하기보다는 선수들의 적재적소의 배치와 교체에 능한 감독이다. 그는 이번 영화에서 효율적인 장면 구성이란 어떤 것인지를 보여준다. 즉 그는 숏의 낭비를 결코 원하지 않는다. 그리고 동시에 배우들의 이미지의 낭비 또한 원하지 않는다. 그의 이번 영화가 한편으로 뉴스릴들의 조합처럼 보이는 것은 그 까닭이다. 왜냐하면 뉴스란 무엇보다도 제한된 시간에 메시지를 전달해야 하는 것으로, 가장 필수적인 숏들의 조합으로만 이루어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는 동시에 이것이 뉴스가 아니라, 영화라는 점 또한 잘 인식하고 있다. 아마도 한편으로는 누구나 척 하면 알 수 있는 배우들이 캐스팅되어 등장한 것도 그 이유일 것이다. 왜냐하면 잘 알려지지 않은 배우들은 이 영화를 거의 정말 뉴스처럼 보이게 할 수도 있거니와, 이 영화의 캐스팅된 배우들은 표정만으로도 짧은 드라마를 만들어 낼 수 있는 능력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드라마를 거의 배제한 것처럼 보이는 이 영화에서도 단 한 두 장면으로 메시지를 효과적으로 드러내면서 자잘한 드라마를 만들어냈다. 이것은 확실히 자신의 능력을 잘 갈고닦은 장인만이 보여줄 수 있는 솜씨이다. 흥행에 개의치않고, 자신이 하고 싶은 얘기를 한 그의 결단력과 능력에 경탄을.  

 

 

 

 

덧.  

아..이 영화에서 케이트 윈슬렛은 너무 멋있다. 그녀가 바이러스에 감염된 것을 확인하고 가장 먼저 한 일은 주위 사람이나 가족에게 전화를 거는 것이 아닌, 자신으로 인해 바이러스에 감염될 위험이 있는 사람들이 누구인가를 찾아내기 위해 호텔 프런트에 전화를 거는 것이었다. 아참... 나도 이제 그녀의 충고를 받아들여 얼굴은 그만 만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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꽃도둑 2011-10-19 12: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부산국제영화제에서 영화를 두 편이나 봤어요. 일본영화,터키영화
일본영화는 아주 인상적이었는데 근데 왜 제목이 생각이 나지 않는 걸까요?,,
단지 기억하는 건 영화내용이 아주 강렬했다는 것과 친구 덕에 소수만 들어가서 볼 수 있는 거의 침대 수준의 쇼파에서 편안하게 봤다는 사실이지요...^^
내년 쯤에 영화비평이나 공부해볼까 하는데...^^
영화도 제대로 볼 줄 알아야 맥거핀 님처럼 비평을 쓰지요. 저도 해보고 싶네요.

맥거핀 2011-10-20 00:58   좋아요 0 | URL
하기는 사실 저도 공부 좀 하고 뭔가 쓰더라도 써야하는데, 야매로 아무 이야기나 쓰니 아직 잡설에 가깝구요. 비평을 쓰고 싶기는 한데, '비'는 없고, 어설픈 '평'만 있으니..

그건 그렇고 아주 좋은 친구분을 두셨네요.^^ 영화제 후기 글들만 보면서 아쉬움을 달래고 있습니다. 그 중에 몇 편이나 국내 극장들에 걸릴지 모르겠네요. 인상적인 일본영화라..어떤 영화를 보셨는지 궁금하네요. 이번에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신작영화가 꽤 괜찮았다는 소리가 들리던데, 혹시 그 영화는 아닌지..아무튼 부러워요~!!
 
비우티풀 - Biutifu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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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iutiful [형.] beautiful할 수 없는 이 세계에서 어떻게든 그에 가깝게 다가려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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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4 00: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삶은 결코 뷰티풀해질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이 다르덴적 세계에서 그렇게 결코 될 수 없다는 것을 그는 안다. 그러나 그는 어떻게든 그 뷰티풀에 조금이라도 어떻게든 필사적으로 가깝게 다가가려고 한다. 그 종착역이 결국 '뷰티풀'이 아닌 '비우티풀'이라도 말이다. 그 반대편에는 무엇이 있는지 그는 알고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그는 죽음을 볼 수 있기 때문에, 그렇지 못하고 죽은 자들은 결국 마지막 순간에 비참한 자신과 마주쳐 후회한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그러므로 그는 적어도 그 참혹함을 맞서서 직시해야 한다는 것을 안다. 그것에 결코 고개를 돌려서는 안되는 것 정도는 알고 있다.

글쎄. 아마도 이 영화를 보는 누군가의 반응을 예상할 수 있다. 그는 영화내내 얼굴을 찌푸릴지도 모르고, 한숨을 내쉴지도 모르고, 어쩌면 울음을 터뜨릴지도 모르고, 영화관을 벗어나 나갈지 심각하게 고민할지도 모른다. 당신은 무엇을 할 것인가. 잊을 것인가, 외면할 것인가, 뒤돌아설 것인가, 참혹함에 고개를 돌릴 것인가. 영화는 마지막에 가서야 결국 약간의 희망을 보여준다. 영화가 가르쳐준 것은 그것이다. 마지막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절망을 어떻게든 마주해야 한다는 것. 마지막 십분의 희망을 보기 위해서는 백이십분의 절망을 버텨내야 하는 것. 인생이란 그런 것, 마지막 바람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필사적으로 '뷰티풀'하려 노력해야 하는 것. 그럼에도 우리가 도달할 수 있는 것은 결국 '비우티풀'인 것.

맥거핀 2011-10-20 02: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 21> 이후경 기자는 단평에서 '그런데 죄지은 자들이 난무하는 가운데 시민권과 부권을 둘 다 지닌 욱스발에게만 면죄부가 주어질 때, 영화는 거짓 휴머니즘에 빠진다. 그의 가족이 가부장주의적 환영의 비호를 받는 동안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은 끝끝내 외면당한다.'라고 썼다.

글쎄..몇 가지 진술에 대해서 좀 고개가 갸우뚱거려진다. 시민권은 모르겠지만, 부권은 욱스발에게만 주어진것도 아니다. 또 무엇보다도 욱스발에게 과연 면죄부가 주어진걸까. 그는 그의 책임을 부인할 생각이 없으며, 관객 역시도 그 책임을 알고 있다. 가부장주의적 비호라고 했는데, 그것은 영화상으로 볼 때 어떤 비호나 죄사함보다는 일종의 심판에 가까웠다. 한편으로 영화가 중국인이나 세네갈인의 고통을 다른 식으로 다루었다면, 어쩌면 그것이 거짓 휴머니즘이 되지 않을까.

맥거핀 2011-10-20 0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별점 수정. 4개->5개.
이 영화의 몇 씬이 며칠이 지난 지금에도 머리 속을 떠돌고 있다.
 

리스트를 만든 김에 하나 더. 지난 2010년 10월 발행된 <씨네21> 776호에서도 'MUST READ 10'이라는 주제로, 2009년에서 2010년 사이에 발간된 영화 관련 도서 중 읽어볼 만한 책들에 관해 소개한 적이 있다. 영화인이나 준영화인들이 추천하는 읽어볼 만한 영화책들. (읽은 책도 있고, 아직 읽지 못한 책도 있고, 읽을 예정인 책도 있고, 산지는 꽤 되었으나 책장에만 박혀 있는 책도 있고, 앞으로 읽을까 의심스러운 책도 있다..그러고보니, 참 안 읽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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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2 23: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그러고보니 BEST 10이라며, 11권이네..하길종에 관한 책은 전 3권이니 실질적으로는 13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