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발행된 <씨네21> 821호에서는 '가을날의 영화산책'이라는 주제로 최근 발간된 영화관련 서적 중 추천할만한 10권의 책을 소개하고 있다. 그래도 나름 영화 좀 봤다하는 사람들의 추천이니 한번쯤 읽어볼 만하지 않을까? 이런저런 사정으로 영화를 볼 수 없어, 책으로 아쉬움을 달래야 하는 사람들에게도 추천. (기사에는 덧붙여, 영화평론가 13인이 추천한, 복간되거나, 번역되어야 할 영화책, 그리고 지금은 없지만 언젠가 출간되면 좋을 상상의 영화책을 소개하고 있는데, 그것은 잡지에서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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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다르 X 고다르- Jean-Luc Godard Interviews
장 뤽 고다르 지음, 데이비드 스테릿 엮음, 박시찬 옮김 / 이모션북스 / 2010년 11월
18,000원 → 16,200원(10%할인) / 마일리지 900원(5% 적립)
*지금 주문하면 "내일 수령" 가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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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영화의 래디컬한 의지
요모타 이누히코 지음, 강태웅 옮김 / 소명출판 / 2011년 4월
35,000원 → 31,500원(10%할인) / 마일리지 1,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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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로마에서 말하다- 안토니오 시모네와 나눈 영화이야기
시오노 나나미.안토니오 시모네 지음, 김난주 옮김 / 한길사 / 2010년 11월
15,000원 → 13,500원(10%할인) / 마일리지 750원(5%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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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한번은,- 빔 벤더스의 사진 그리고 이야기들
빔 벤더스 지음, 이동준 옮김 / 이봄 / 2011년 7월
17,500원 → 16,630원(5%할인) / 마일리지 700원(4% 적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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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10-1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짤막한 글을 쓰는데도 헷갈린다. '한번쯤'의 띄어쓰기를 어떻게 해야하나 싶어 찾아보니, '한번'의 경우, 한 번, 두 번..할 때는 띄어쓰고, '한번 해본다'는 식으로 쓸때는 붙여쓰는 것이 맞다, 그리고 '쯤'의 경우 접미사이니 붙여써야 한다는 것이 결론. 아...
 

 

1.
지난주 와우북페스티벌에 들러 몇 권의 책과 함께 수잔 와이스만의 <빅토르 세르주 평전>을 들고 왔다. 러시아 혁명을 다룬 주요한 저작 중의 하나인 <러시아 혁명의 진실>의 저자로 알려져 있는 그다(이 책 <빅토르 세르주 평전>에는 원제에 충실하게 <러시아 혁명의 첫 해>라는 제목으로 나와 있다). 책날개에 붙어있는 그의 삶을 정리한 간략한 글은 어떠한 의미에서는 참 전형적이다. "러시아의 혁명 인민주의자 집안에서 태어난 세르주(본명 : 빅토르 키발치치)는 열다섯 살까지 벨기에에서 살았다. 고국 러시아에 처음 발을 내디뎠던 1919년, 스물여덟살 되던 해에 볼셰비키 당원이 되었으며 다양한 정치적 임무를 띠고 세계 곳곳에서 활발히 활동하였다. 그러나 1923년 독일판 10월혁명이 실패한 뒤 러시아로 다시 돌아가 좌익반대파와 함께했다. 언제나 정치적 반대파였던 세르주는 자본주의와 스탈린주의, 그 어느 편에도 서지 않았다. 그로 인해 평생을 핍박 속에서 가난에 시달리며 살아야 했다. 결국 1936년 러시아에서 쫓겨나 파리와 마르세유를 전전하다가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 속에 1947년 멕시코에서 눈을 감았다." 

전형적이라는 것은 그의 삶이 우리가 흔히 상상할 수 있는 실패하고 몰락한 자의 초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이기 때문이다. 그는 지독한 가난 속에서 태어났고(세르주는 어린 시절 딱딱하게 말라붙은 빵을 커피에 적셔 먹는 끼니를 서술했으며, 그의 동생은 쫄쫄 굶는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아홉 살에 굶어 죽었다), 한 때 꿈을 가지고 혁명 전선에 뛰어들었으나, 그 혁명이 그 혁명을 지지해준 자들에게 적으로 돌아서는 광경을 목도하고는 그 반대편으로 돌아서고자 했다. 그러나 그 반대편에는 그가 결코 지지할 수 없는 것이 있었고, 아무 조직과 힘이 없었던 그가 오로지 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기고할 수 있었던 모든 매체를 통하여 치열한 반대 의사를 지속적으로 표명하고, 진정한 혁명을 향한 희망의 끈을 놓지 않는 것이었다. 그러나 전술하였듯이 그 와중에 그는 당연하게도 지독한 가난과 생명의 위협에 시달렸고, 결국 거의 지구의 반대편까지 쫓겨간 후에 숨을 거두었다.

어디선가 본 듯한 그런 이야기. 아마도 영화로 만들고자 시나리오로 잘 정리하여 제작자의 책상에 정성껏 올려둔다고 해도, 두어 줄의 간단한 시놉만 보고도 그것은 쓰레기통 속으로 던져질 것이다. 지금의 이 때에 이런 것을 읽는다는 것이 의미가 있을까. 차라리 다른 의미에서라면, 성공한 혁명가의 책, 아니 성공한 혁명가라는 것이 존재할 수 없다고 해도, 이보다는 훨씬 낭만적으로 보이는 다른 혁명가의 평전들 - 대표적으로 체 게바라 - 을 읽는 편이 낫지 않을까. 그러나 이상하게도 몰락한 혁명가의 생애, 아니 굳이 혁명이라는 말을 아예 없애버리고라도 몰락한,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에 대해 흥미가 생긴다. 이건 무슨 이상 심리일까. 어쩌면 몰락해가고 있는 것들을 통해 나의 삶에 대한 조금이나마 위안을 찾으려는 당연한 심리일까. 



2.
몰락한 것은 한 러시아 혁명가의 삶 뿐만이 아니다. 매일 저녁 프라임시간에도 지금 몰락한 자들의 이야기가 방송되고 있다. 그것도 비극물이 아니라 시트콤이다. 물론 그것은 김병욱의 새 시트콤 <하이킥! 짧은 다리의 역습>의 이야기이다. 김병욱은 이번 시트콤의 키워드를 '몰락'이라고 말할 수 있다고 인터뷰했다. 물론 김병욱의 전작들에서도 몰락의 이야기는 심심치 않게 등장하였으며, 몰락한 캐릭터들도 가끔 등장하기도 하였다. 어쩌면 웃음이라는 것은 그렇게 몰락해 가고 있는 자들이 망가져 가는 틈에서 원래 만들어지는 것인지도 모른다. 아무튼 김병욱의 이야기들은 꽤나 자주, 깔깔깔 웃음이 터지는 와중에서도 가슴이 서늘해지는 순간을 만들었다. 아니 어떤 의미에서는 서늘한 순간을 만들어내기 위해 부러 묘한 웃음들을 끼워넣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그것의 가장 직접적인 증거가 그의 시트콤의 주인공들에게 마지막 순간에 예기치 않게 찾아오는 죽음이 아닐까. 김병욱의 시트콤들은 이제 웃음은 뚝!, 이라는 식으로 마지막 순간에 시청자들에게 당혹스러운 순간들을 여러번 선물하였다. 그것은 각각의 에피소드를 끊어버릴 때도 그랬고, 전체 이야기를 종결해 버릴 때도 그랬다. 그리고 그 덕분에 시트콤에서 상쾌하게 웃는 것으로 끝내고 싶었던 많은 시청자들에게 원망을 받기도 하였다. 하기는 김병욱의 시트콤을 보는 시청자들이 가장 자주 되묻던 질문은 "이거 시트콤 맞아?" 였으니까.

(글쎄. 앞의 심리와 연결될지도 모르지만, 개인적으로는 김병욱의 시트콤에서 그런 서늘한 순간들을 더욱 좋아했던 것 같다. 나는 김병욱의 시트콤들을 어떤 시트콤을 대하는 느낌보다는 그냥 드라마를 보는 느낌으로 받아들였으니까. 많은 시청자들을 '김병욱 안티'로 돌아서게 만들었던 바로 전작의 꽤나 비극적인 결말도 내심 속으로는 상당히 괜찮게 생각했다. 그래서 그 결말을 본 후 주위의 하이킥 팬들과 이야기를 할 때도, 겉으로는 그게 무슨 말도 안되는 결말이야!, 라고 했었지만, 집에 와서는 그 마지막 회를 몇번인가 돌려보기도 했다.)

그리고 그 '몰락'은 이번에는 전면에 나섰다. 집안의 가장인 안내상은 절친한 친구의 배신으로 하루아침에 집도 절도 없는 신세로 내몰렸으며, 그 덕분에 아들 종석은 모든 것을 걸었던 아이스하키를, 그리고 딸 수정은 미국 유학을 접어야만 했다. 그러나 몰락의 이야기는 이들에게만 있는 것은 아니다. 그들이 얹혀 사는 계상의 옆집에는 청년 실업의 상태로 선배 언니에게 얹혀 살고 있는 진희가 있으며, 이 집의 집주인인 지원에게도 아직 정확히 밝혀지지 않았지만, 뭔가 어린 시절의 트라우마가 있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아직 캐릭터의 중심을 잡는 초반임에도 길바닥에서 누워서 자고, 바다에 뛰어들기도 하고, 툭하면 나타나는 빚쟁이들을 피해 집 바닥 땅굴로 공습경보를 받고 대피하듯이 달려가기도 하고, 조폭들을 피해 쓰레기통에 숨기도 하고, 사기 당하여 학교 공금을 날리기도 하는 등, 그간 다른 김병욱표 시트콤들보다 훨씬 더한 고초를 겪고 있는 중이다. 한가지 흥미로운 것은 이들의 몰락은 어떤 사건들보다도 이 캐릭터 자체에 더욱 밀착되어 일종의 징후적으로 나타난다는 사실이다. 예를 들어 안내상은 별 것 아닌 일에 집착하고, 때로는 필요 이상으로 비굴해지는 성격이 도드라지며, 백진희의 경우는 그의 삶의 피곤이 중첩된 몽유병의 형태로 나타난다. 그리고 한편으로 그것을 기이하게 만드는 것은 나레이션의 등장이다. 이 나레이션은 (적어도 지금까지는) 사건을 설명하거나, 이들의 속마음을 보여주려는 목적으로 등장하는 것이 아니라, 이들의 행동을 마치 인류학적 보고서를 써내려가듯이 차분하게 분석하고 설명한다(물론 이는 미래의 이적이 과거의 어떤 때를 회상하는 식이라는 이 시트콤의 거대한 액자와도 관련이 있다). 즉 이 시트콤은 이들의 흥미로운 이야기에 주목하는 것이 아니라, 이 흥미로운 이야기 속에서 이들이 보이는 어떤 '징후적인 신호'에 관심이 있다. 이 시트콤은 이 몰락한 시대의 징후를 잡아내 거대한 분석 보고서를 만들고 싶은 것일까. 이 몰락한 세기의 징후를 어떤 식으로 포착해 낼 것인가. 그리고 한편으로 이들의 몰락은 마지막에 극적으로 회복될 수 있을까. 아니면 전작처럼 결국 몰락의 종말인 죽음에 이르게 될까.

3.
그리고 여기 한국프로야구에도 몰락의 거의 대명사가 되어가는 팀이 있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는 위업을 남긴 팀이자, 내 20년 가까이 되는 응원팀인 트윈스다. 9년 연속 포스트시즌 진출 실패라고 하니, 뭔가 상당히 어려운 미션을 실패하는 것 같지만, 이 리그는 수십개의 팀 중에 달랑 몇 팀 포스트시즌 진출하는 그런 리그가 아니다. 8개 팀 중에 4팀 포스트시즌 나가서 뚝딱뚝딱 아장아장한 다음 우승팀 가려내는 그런 작은 리그다. 그런 트윈스를 보는 팬들의 심정은 뭐랄까, 9년 넘게 반등수 50% 안에 못들고 있는 그런 자식을 보고 있는 심정이랄까. 그런 트윈스는 올해는 더욱 기적적인 드라마를 연출했다. 시즌 초중반까지 2-4위권을 유지했고, 초반 30승도 다른 어떤 팀보다 빨리 올렸음에도 결국 6위(그것도 공동이니 사실상 7위)로 시즌을 마감했다. 그런 트윈스 상당수의 팬들이 바라는 것은 이번 야구 시즌이 빨리 끝나는 거였다. 망가져가고 있는 팀을 보면서 DTD니, 내려갈 팀이니 하는 비아냥을 더 듣고 싶어하지 않는 마음들도 있었지만, 이번 시즌이 끝나면 무엇인가 희망이 생길 수 있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물론 늘상 스토브리그에 가장 바쁜 것은 트윈스팬들이었고, 가장 설렜던 것도 트윈스 팬들이기는 했다. 그러나 올해는 여러 시기가 맞아떨어지는 듯 했고, 마침 박감독의 사퇴 발표로 팬들은 올것이 왔다고 잔뜩 기대했다. 트윈스 홈페이지 게시판과 각종 야구 게시판에는 희망적인 꿈을 가득 담은 각종 카더라와 설들이 난무하였고, 팬들은 곧 거의 예정되어 있는 김연아 금메달을 생각하며 마지막 프리를 즐기자는 심정으로, 발표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올것이 왔다, 전혀 기대하지 않았던 올 것이.

팬들이 분노하고, 그 분노를 넘어서, 허탈과 그에 따른 이탈을 예고하는 것은 단순히 원하지 않는 감독이 선임되었기 때문만은 아니다. 김감독이 새로 부임하여, 나은 성적을 올리고, 포스트시즌에 진출시킬지도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그것을 거의 기대하지 못하고, 혹은 기대한다고 해도 다른 면에서 분노하는 것은 일종의 학습효과 때문이다. 트윈스 팬들이라면, 몇년 동안 이어진 트윈스의 부진이 단순히 야구 실력적인 문제만은 아니라는 것을 안다(물론 야구 실력의 문제가 가장 크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그 야구실력이란 것이 결국 무엇으로 만들어지는가. 트윈스나 다른 어느 팀이나 기본 자원은 같다. 좁은 한국 고교야구가 그것이다). 그간 부임해왔던 정치적인 인사들과 아직 프런트 및 코치진에 자리잡고 있는 정치적인 인사들이 팀을 어떻게 망가뜨리는지 조금씩 보아왔다. 그런 정치적인 인물들을 이번에 갈아엎을 수 있는 절호의 기회라고 생각했는데, 구단의 생각은 팬들의 생각과는 전혀 달랐다. 학교로 따지자면, 아이들을 가르치는 데에는 관심없고 교장의 비위만 맞추는데 혈안이 되어있던 교사를 아이들 성적이 엄청 떨어져서 해고했다고 좋아했더니, 교장의 친인척이 와서 그 자리를 메우는 꼴이다. 옆 명문학교의 정말 잘 가르치기로 소문난 교사들이 몇 명씩 놀고있는데도 말이다.

결국 역설적으로 팬들이 이번에 다시 떠올리게 된 것은 현재가 아니라, 우리 프로야구의 기원에 있는 것들이다. 군사독재의 선전용, 혹은 귀막음 도구로 재벌들의 결합으로 시작된 우리의 프로야구. 그 프로야구는 그들이 말한대로 결국 국민들과 어린아이들에게 꿈과 희망을 주기 위해 시작된 것만은 아니라는 사실. 한국프로야구에서 구단은 결국 그것을 가진 기업의 소유물이라는 것을 말이다. 팬들의 목소리라는 것이 현재 전혀 들어갈 틈이 없게 짜여진 이 구조에서, 팬들의 바람이란 결국 헛된 카더라일 뿐이라는 것. 내 소유물을 내가 원하는 대로 하는데 당신들이 왜 나서는가, 아마도 트윈스 구단은 그런 생각을 하고 있는지도 모른다. 팬들은 포스트시즌 진출을, 우승을 열망하지만 구단도 그것을 열망하고 있을까. 어쩌면, 뭐 우승...하면은 좋기야 한데, 뭐 안해도 항상 야구장에는 관객들 그득하고, 어차피 적자인 상황에서 야구단이야 일종의 홍보물일 뿐이고...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확률이 훨씬 더 높아 보인다. 그리고 현재 트윈스 홈페이지의 회원게시판은 감독 선임 이후 며칠 째 오류를 핑계로 작동되고 있지 않는 중이다(뭐 어쩌면 엘지의 기술력이 이 수준일지도..). 그런 상황에서 팬들이 할 수 있는 것은 현수막을 들고 야구장에 갔다가 폭도로 몰리거나, 지나친 팬심이라는 엄중한 경고를 뉴스에서 듣는 것 뿐이다. 그리고 이미 길들여져 버린 우리들은 오늘도 여전히 멍하니 야구중계를 튼다. 

 
    

4.
자꾸 몰락이라는 것을 이야기했더니, 몰락과는 사실 별 상관이 없는, 장정일 작가가 <빌린 책/산 책/ 버린 책 2>(이 책 역시 와우북페스티벌에서 사왔다)에 쓴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라는 문장이 떠오른다. 장정일 작가는 책 뒤에 다음과 같이 썼다. "쾌락이란 어떻게 보면 모순되고, 서로 길항하는 두 개의 근원을 가지고 있습니다. 나보다 더 큰 전체에 몰각됨으로써 얻는 쾌락이 있고, 전체와의 일체감 속에서 자신을 명료하게 느끼는 쾌락이 있습니다. 마약이나 알코올에서 느끼는 쾌락이 전자라면, 신비주의에 귀일해서 얻는 쾌락은 후자일 것입니다. 그런데 독서는 몰각과 자각, 이 양켠 모두에서 쾌락을 느낄 수 있습니다. 우리는 책을 읽으면서 지은이의 생각에 완전히 녹아들기도 하고, 그 속에서 반성적이 되거나 자각을 얻기도 합니다."

몰각과 자각, 명확하게 구분이 되지는 않지만, 함경록 감독의 영화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런 생각을 하기는 했다. 예를 들어 <도가니>와 같은 영화가 몰각에 가까운 것이라면, 이 영화 <숨>은 자각에 가까운 것이 아닐까. 물론 영화는 기본적으로 몰각에 가까울 것이라는 생각은 있다. 스크린과 합일하여 충만해지는 상태적인 쾌락이 몰각이라면, 아마도 영화보기는 그에 가까울 것이다. 그러나 내가 <숨>을 보고 나오면서 그것을 떠올린 것은, 이 영화 <숨>이 <도가니>와 가까운 이야기를 상당히 다르게 하고 있기 때문이다. <숨>에서는 결국 장애인 여주인공의 결혼과 가정이라는 꿈이 외부의 선을 표방한 사람들에 의해 깨어지게 된다. (<도가니>를 아직 보지 않았기 때문에 확정하여 말할 수는 없지만, 그간 <도가니>에 대한 여러 글을 읽어본 바에 따르면) <도가니>의 명확한 선악 구분과 달리, 이 영화의 선악 구분은 상당히 모호한 데가 있다. <도가니>가 분노하게 만드는 영화라면, 이 영화 <숨>은 생각하게 만드는 영화다. 즉 분노가 일종의 쾌락과도 맞닿아 있다면, 그것은 몰각에 가까울 것이고, 생각과 반성은 일종의 자각에 가까울 것이다.

물론 나는 <도가니> 보다 <숨>이 더 영화적으로 낫다고 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시 한 번 말하지만, 그 영화를 보지도 않았을 뿐더러, 사람들을 분노하도록 하는 목적을 가지는 영화가 사람들을 충분히 분노하게 만든다면(즉 몰각을 시도한 영화가 그 몰각으로 사람들을 이끌고 있다면), 그것만큼 충분한 것은 없을 것이다. 다만, 이 영화 <숨>은, <도가니>와 그로 인해 이어져가고 있는 광주 인화학교를 둘러싼 일련의 진행들을 보면서 조금은 우려되는 부분들, 조심해야할 부분들에 대해 생각하도록 해준다. 그것은 이 분노가 무엇을 위한, 진정으로 누구를 위한 분노인가라는 점이다. 어쩌면 이 분노는 나의 쾌락적인 만족감과 맞닿아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광주인화학교 대책위에서 과도한 관심에 대한 우려를 표명한 것이나, 학교 폐쇄를 우선으로 하고 있는 정부의 대책들을 보면 조금은 여러 생각이 미치게 된다. 그리고 또 동시에 일반적인 성폭력 사건은 물론이거니와, 아동이나 장애인을 상대로 한 성폭력 사건은 더더욱 조금은 조심스럽고 최대한 피해자들을 보호해가면서 사건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어쩌면 <도가니>의 열풍 속에서 그런 조심스러운 접근을 또 조금은 간과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을 이 영화를 보면서 했다.

아무튼 이 영화 <숨>은 굳이 <도가니>와 연결짓지 않아도 그 나름의 영화적 성취 속에서 또다른 윤리의 문제를 제기하고 있다. 그 윤리의 문제 역시 우리가 되돌아보아야만 한다. 그 영화적 성취나 윤리의 문제는 혹시라도 쓰게 될 다음 포스트에. <도가니>를 본 사람에게 추천, 곧 내려갈 것 같으니 더 추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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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딧불이 2011-10-09 1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평전에서 시트콤으로 야구로 책으로 영화로....숨가쁘게 따라 읽었습니다. 부끄럽게도 저는 그 중 어느 하나도 읽지도 보지도 못했습니다만 이렇게 다양한 문화영역을 몰락이라는 주제로 꿰어가시다니... 놀랍습니다.

맥거핀 2011-10-10 18:23   좋아요 0 | URL
왠지 요즘 보고, 듣고 한 것들 중에 뭔가 통하는 게 있는 것 같아서, 무리하게 연결해 본 글입니다. 사실은 다른 건 훼이크고, 요즘 트윈스 구단 때문에 너무 열받아서 쓴 글..이라는 게 더 정확한 사실에 가깝구요.^^;

노이에자이트 2011-10-09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혁명에 대한 책이 요즘 안 팔리죠.좌익반대파의 우두머리인 트로츠키 관련 서적도 잘 안 팔리는데 세르쥬 같은 사람의 전기가 팔릴 리가 없습니다만...

몇 년 전 중국의 트로츠키주의자인 왕범서의 회고록이 번역되었던데 이 책도 몇 부나 팔렸을지...여하튼 시대가 많이 변했으니까요.

맥거핀 2011-10-10 18:41   좋아요 0 | URL
하기는 책을 싸게 판다는 와우북페스티벌의 전반적인 분위기를 감안한다고 해도, 정가 18,000원의 책이 5,000원에 팔리고 있더군요. 그나마도 잘 안팔려 다른 책들보다 많이 남아있기도 했고, 다른 평전 시리즈보다 이 책이 더 유달리 싸기도 했구요.
말씀하신 책도 한 번 찾아봐야겠네요. 중국 트로츠키주의자 회고록도 번역된 적이 있었군요.

노이에자이트 2011-10-10 22:45   좋아요 0 | URL
공산당 당수 하다가 트로츠키주의자로 전향한 진독수 평전은 절판된 지 20년이 넘으니 왕범서 것이라도 읽어야죠.요 몇 년 새 일본의 아나키스트들 전기도 나오고 그렇더라구요.역시 갈수록 세상은 발전하죠.예전엔 이런 책들 구경도 못하고 소문으로만 들었으니까요.

맥거핀 2011-10-11 22:23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노이에자이트 님은 어찌 그리 다양한 영역에 대해서 잘 아시는지..늘상 여러 가르침주셔서 감사합니다.

2011-10-10 19:4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10-11 22: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 장정일의 독서일기 빌린 책, 산 책, 버린 책 2
장정일 지음 / 마티 / 201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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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몰각과 자각의 쾌락적 독서'라는 말로 짐짓 내뱉는 그 나름의 사회적 독서 권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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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운트다운 - Countdow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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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의 결말에 대한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영화에 대한 이야기를 막상 정리하려고 하니 꽤 힘들다. 그것은 이 영화가 어떤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거나, 대답하기 어려운 질문을 하고 있어서가 아니다. 그것은 사실 이 영화가 별 이야기를 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무엇인가 복잡한 이야기를 하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 사실 조금 생각을 해보면, 과연 무엇을 담고 있는지 조금 의심스러워진다. 요즘의 많은 한국영화가 그러하듯이 이 영화도 상당한 '기획물'의 냄새가 난다. 물론 기획하는 것 자체를 나쁘다고 말할 수는 없다. 지금 명작으로 추앙받는 많은 영화들도 상당수는 철저한 기획의 산물이고, 감독의 힘이라기 보다는 제작자의 힘으로 탄생한 명작들도 많다. 그러나 최근 몇몇 한국영화들을 보면, 조금 이상한 기획들을 하는 것 같다. 이런 영화들은 일단 그럴듯해 보이는 한줄의 문장으로부터 시작한다. 아들을 잃은 냉혹한 채권추심원이 암선고를 받고 장기이식을 받기 위해 사기꾼 여자를 만난다..아마 이 영화도 이런 그럴듯하고, 뭔가 물씬물씬 재미있는 이야기를 들려줄 것 같은 한 줄의 문장으로부터 출발했을 것이다. 자 이거 돈이 될 거 같으니, 여기서부터 시작해보자. 일단 명확한 캐릭터들은 이런 기획에 필수적이다. 주조연할 것 없이 캐릭터들의 성격은 과장에 가까울정도로 선명해지고, 그들은 인상적인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러나 여기에 조금씩 살이 붙으면서 영화는 점점 이상해지기 시작한다. 이야기는 맥락을 알 수 없게 덕지덕지 붙기 시작하고, 붙은 이야기들은 처음의 플롯과 조금씩 겉돌기 시작한다. 어쩌면 당연할지도 모른다. 처음부터 깔끔하고 차근차근히 뼈대를 만들지 않고, 일단 큰 줄기만 세운 다음에 가지를 붙여나가는 식이니까. 동시에 뭔가 새로운 입김이 여기에 계속적으로 붙는다. 액션도 붙어야 하고, 감동도 붙어야 하고, 유머도 붙어야 하고, 잔재미도 붙어야 한다. 그러므로 난데없이 신파의 코드가 등장하고, 카체이스가 등장한다. 그리고 그러다보니 처음에 필요하지 않았던 캐릭터들이 등장하기 시작하고, 이들에게도 뭔가를 만들어주려다 보니, 이상한 잔개그들이 붙는다. 영화는 점점 뭔가 어리둥절해진다.

이 영화 <카운트다운>이 딱 그런 식이다. 그런데 <카운트다운>이 조금 안타까운 것은 이 다음이다. 어차피 이런 기획류의 영화에서는 이야기가 덕지덕지 붙게 마련이고, 그 어지럽게 붙은 이야기들을 어떻게 매끄럽게 연결시킬 것인가의 문제를 고민해야 할 것이다. 아마도 감독의 역량이 필요한 부분이 이런 지점이 아닐까. 그런데 이 영화는 그 매끄러운 봉합에 실패하고 있는 것 같다. 이 영화에는 인상적인 캐릭터들이 수없이 등장하고, 인상적으로 보이는 씬들도 많다. 그런데 그 씬과 씬들이 이상하게도 잘 붙지 않는다. 이 영화는 마치 인상적인 영화들의 모자이크인 것도 같다. 각 씬들은 때로는 날카로운 유머를 발휘하고, 다른 영화에서 잘 볼 수 없는 시원한 액션을 보여주고, 그 장면 하나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순간을 만들면서 어떤 인상들을 심지만, 그 인상들이 뚝뚝 분절되다 보니, 그 인상의 힘마저도 조금은 의심하게 만든다. 즉 각각의 씬들은 영화에서 툭 튀어나와 다른 어떤 좋은 영화들을 연상시키게 하는 것에 그친다. 

그러다보니 영화를 보고 나와서는 어떤 인상적인 장면들에 대해서, 혹은 그 인상적인 장면을 보여준 배우의 훌륭한 연기에 대해서는 뭐라고 말할 수 있지만, 전체 이야기를 놓고서는 당연히 영화에서 진작 해결되어야 할 필요없는 질문들을 하게 만든다. 그 중 하나만 예로 들자면, 영화의 주인공 태건호(정재영)는 영화의 처음에서부터 일종의 생존의 화신으로 등장한다. 그의 외면적인 차가운 냉혹함은 겉과는 다르게 속에서의 부글부글 끓는듯한 살고자 하는 욕구로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그는 그 살고자 하는 욕구로 차하연(전도연)과 또다른 의미에서 목숨을 건 동행을 하게 된다. 그는 왜 그렇게 살아남고자 하는 욕구의 화신이 되었을까. 단지 젊은 나이에 죽는 게 억울해서? 아니면, 아들의 죽음에 어떤 책임을 느끼기 때문에? 아들이 이 냉혹한 세계에서 죽었기 때문에, 자신만이라도 강해지려고? 냉혹해지는 것이 이 사회에서 살아남는 방법이기 때문에? 살아남아서 자신의 방식으로 이 사회에 어떤 복수를 행하려고? 이 중 어떤 것도 답일 수 있고, 몇 가지를 조합한 것이 답일 수 있다. (또 한편으로는 사실 태건호가 영화의 거의 마지막까지 아들이 죽은 진정한 이유를 모르기 때문에 이 답변만으로는 뭔가 군색해지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 어떤 답에도 모호한 입장을 내비친다. 아니, 어떻게 보면 뭔가 입장이 있을지조차 의심스럽다.



그것은 어쩌면 이 영화에서 두 번이나 반복되므로, 어떤 중요한 메시지처럼 보이는 '아이러니(irony)'라는 것에 그 답변이 숨어 있는 것이 아닐까. 영화에서 뜻풀이까지 보여지듯이, 아이러니는 '예상밖의 결과가 빚은 모순이나 부조화'다. 즉 다른 말로 하면 '황당하다'는 말이다. 이 '황당하다'는 말은 결국 그 이유나 의미는 신경을 쓰지 않겠다는 말이다. 황당한 것은 황당한 것이지, 그 황당한 것에 무슨 이유가 있고, 무슨 의미가 있을 것인가. 그것은 그저 우연이 빚은 결과일 뿐이며, 합리적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것을 위의 이야기로 가져와본다면 태건호가 그렇게 된 것은 그저 그렇게 된 것일뿐, 다른 이유를 찾을 수 없는 것이다. (동시에, 이 이야기는 다른 수많은 것에도 비슷한 입장을 취하고 있다. 차하연의 딸이 있다는 것도 어떻게 보면 참 아이러니하지만, 그것은 그저 설명될 필요 없이 아이러니에 가까워질 뿐이다. (마지막 감동 코드를 넣으려면 필요해!) 영화 속 여러 사건이 일어나는 것이나, 뭔가 그것이 해결되는 과정을 보면, 개연성이 거의 사라지고 없지만, 그것 역시 아이러니할 뿐이다. 예를 들어, 영화 속 마지막 태건호는 조명석(이경영)과의 만남에서 차하연을 스와이(오만석)에게 인질로 맡기고, 뭔가 승부수를 띄우는 듯 하지만, 스와이가 차하연을 데리고 그 장소에 나타남으로써, 멋진 대결은 김상진씩 떼싸움이 되어버리고, 사건은 결국 태건호가 부른 경찰에 의해 일단락된다. 그렇다면 그 전에 무슨 이유로 스와이에게 나타나 담판을 짓는 듯한 액션을 취하는지? 참 아이러니한 결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그 '아이러니'라는 것으로 가려진 의미를 관객들이 심각하게 생각하지 않도록 여러 장치를 건다. 그것은 몇 가지 방식으로 이루어지는데, 그 중에 하나는 가끔 숏의 빠른 분절로 관객을 어리둥절하게 만드는 것이다. 대표적으로 차하연의 사기행각을 표현하는 장면들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이는 숏의 빠른 분절과 타이트한 리듬과 인상적인 대사들로 나타내어져 있다. 그러나 이 장면들이 굳이 이런 방식으로 표현될 필요가 있을까. 차하연의 사기행각은 사실 훨씬 간단한 방식이니까. 차하연의 말대로 그런 남자들이란 이쁘고, 돈 좀 가지고 그럴듯하게 말해주면 넘어오는 단순한 존재들일 뿐이니까. 차하연의 캐릭터를 만드는 데에 굳이 그런 다른 몇몇 영화들에서 보이는 그런 식의 설명들이 필요했을까 의문이다. 숏의 잦은 분절로 빠른 리듬을 만들어내는 것은 복잡한 이야기를 빠르고 효과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전달하는 방법이지, 단순한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게 현혹시킬 때 쓰는 방법이 아니다.

그런 비슷한 이야기를 이 영화가 캐릭터를 불러들이는 방식으로 이야기할 수도 있다. 이 영화에는 여러 인상적인 캐릭터가 등장하고, 나름 중요한 장면들을 부여받는다. 그리고 그 인상적인 장면을 소화해 영화에 활력을 부여하고는 다시 바로 사라질 것을 요청받는다. 그런데 장애를 가진 아동이나, 장애를 가진 사람이 이와 비슷하게 등장하는 장면을 보았을 때 나는 어떤 불편한 감정을 느꼈다. 그런 캐릭터를 영화에 불러들일 때는 조금 더 세심한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영화는 이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소비되는 것을 경계하여야 한다. (예를 들어 성소수자들이 단지 이미지로만 스크린에서 소비될 때는 어떤가.) 이들은 단지 관객에게 눈물샘을 자극할 요량으로 이 스크린에 불려나와서는 안된다. 그런데 이 기획물의 맥락에서 이들은 단지 다른 어떤 목적에 의해서 이 앞으로 소환된 듯한 인상을 준다. 예를 들어 태건호에게 추궁당한 장애를 가진 늙은 부모는 그렇게 소환된 후 곧 스크린에서 사라져버린다. 그러므로 나는 이런 질문도 하고 싶다. 태건호의 부모가 그렇게 장애를 가진 인물로 표현될 이유가 있을까. 태건호의 아들이 또 장애를 가진 인물일 필요가 있을까. 이러한 캐릭터들은 결국 무엇을 위함인가. (비슷한 것을 차하연의 딸에게도 물을 수 있을 것 같다. 10억을 그렇게 쉽게 뿌리치는, 친부모에게 버려진 채 어렵게 살아온 10대 소녀가 단지 '쿨한 것'으로만 느껴질 수 없는 이유. 웃으면서도 어리둥절하다.)

그러므로 이 영화 <카운트다운>을 보고 나오니 결국은 이런 질문을 하게 된다. 강한 캐릭터도 있고, 재치있는 대사도 있고, 인상적인 씬들도 있다. 그 인상적인 씬들은 액션 장면에서는 충분히 쾌감을 느끼게도 하고, 감동을 자아내는 씬에서는 충분히 눈물을 흘리게도 한다. 그럼에도 이 영화가 인상적으로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뭘까. 이것이 대중영화로서의 전부일까, 혹은 대중영화에서 바랄 수 있는 것은 이것이 극대치일까. 요즘의 어떤 한국영화들을 보면, 영화의 전체적인 매끄러움이 유달리 눈에 띈다. 예전의 한국영화들에서 잘 찾아볼 수 없던, 할리우드적인 매끄러움이 점점 대세가 되어간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나 동시에 그 영화들은 어떤 할리우드 영화들의 일부 특징들도 같이 흡수하는 것 같다. 그것은 질문을 하기는 하되, 그 답을 극도로 빠른 시간에 관객들에게 되돌려줘 일종의 쾌감을 지속적으로 느끼게 한다는 점이다. 생각 따위는 하지마라, 생각은 내가 대신해준다는 식이다. 당신은 재치있는 대사 나올 때 적당히 웃어주고, 액션씬 나올 때 적당히 쾌감을 느껴주고, 감동씬 나올 때 적당히 따뜻해지면 된다는 식이다. 그러나 이 영화 <카운트다운>은 조금 다른 방식을 취한다. 뭔가 질문을 하기는 하는 것 같은데, 그 답변은 이거다. 그건 그냥 아이러니한 일이라는 것, 즉 황당한 일일 뿐이니 생각하지 말라는 것. 그게 무슨 의미일까...생각해본다.




덧.
요즘에 개봉 전주 주말에 유료시사회를 하는 것이 대세인 것 같다. 말이 유료시사회지, 그저 미리 땡겨서 하는 주말개봉일 뿐이다. 여러 이유가 있겠지만, 아마도 빠른 입소문으로 동시에 개봉하는 영화 사이에서 대세를 선점하려는 배급사들의 고육지책일 것이다. 대체로 입소문으로 선전할 것 같은 영화들 - 다른 말로 하면, 조금 '자신이 있는' 영화들 - 이 이런 전략을 쓰는 것을 보아도 그러하다. 글쎄. 개인적으로는 이 <카운트다운>은 조금 호불호가 팽팽하게 갈릴 것 같은 영화다. 이런 '불호'에 가까운 나같은 관객의 이런 리뷰가 먼저라서 죄송합니다. 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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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9-26 17: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6 23: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꽃도둑 2011-09-28 14: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고편 보면서 아 전도연 썩소(?)가 매력있다고 생각했는데...
그 묘한 미소에 이끌려 영화를 보면 안되겠군요....^^
얼마전 도가니와 활을 연이어 봤어요. 전 도가니가 더 좋았는데...맥거핀 님도 물론 봤겠죠?.. 정말 영화 좋아하시는 거 같은데..좀 있음 부산국제영화제 하는데..한 몫하시는 건가요? 아님 구경만?,,,,ㅎㅎ
아 10기 활동하게 되었어요. 이 기쁜 소식을...ㅋㅋ

맥거핀 2011-09-29 13:56   좋아요 0 | URL
전 아직 도가니는 못봤구요. 활만 봤습니다. 도가니 보러가고 싶기도 한데, 보게 되면 혈압오를 거 같아서 주저하게 되네요. 나이가 들면 들수록 아무래도 혈압관리를..쿨럭쿨럭.;;

부산국제영화제가 시작을 하는군요. 저는 아무래도 먹고 살려다 보니(?) 이번에는 가보지 못할 거 같아요. 예전에는 주말에 살짝 보러갔다오기도 했었는데, 그러려면 가는 것도 가는 거지만, 그 전에 주말표 구입이니, 기차표 구입이니, 숙소 컨택이니 가기도 전에 피곤해지고 마니까요(지금으로서는 남는 표가 있을지도 의심스럽고..;;). 감성적으로는 부산은 아주 가까이에 있는데, 이성적으로는 너무 머네요.
하하.^^

 
북촌방향 - The Day He Arrive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영화의 여러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북촌방향>이라는 제목은 절묘하다. 그 제목은 북촌이라는 마법의 공간을 담고 있으면서, 동시에 방향이라는 시간성을 담고 있다. '방향'이라는 것은 결국 이동한다는 것이며, 이동이란 그 안에 시간을 내포한 것이기도 하다. (그러나 동시에, 이 영화에서 '이동하는 행위'가 보여지고 있지 않음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주인공은 어디론가의 공간에서 밥을 먹고 술을 마시고, 다시 어디론가로 이동하여 밥을 먹고 술을 마시지만, 그 이동하는 행위는 거의 보여지지 않는다. 아니, 이동하고자 하지만, 그는 그 길에서 끊임없이 누군가를 만나고, 이동은 번번이 지연된다. 다만 영화의 처음 부분에 그가 북촌의 밖인 고덕동으로 향할 때에는 그가 택시에서 내리는 장면이 보인다. 북촌 안에서의 이동과 북촌 밖의 이동의 이 차이. 나는 이상한 질문을 하고 싶다. 그는 북촌 밖으로 정말 나갔던 것일까.) 이 영화에서의 시간이란, 많은 평자들이 지적한 부분이므로 자세히 말할 필요는 없겠지만, 참으로 독특하다. 그는 연속된 시간을 사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고, 같은 하루를 살고 있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동시에 시간은 가끔 이상하게 흐르고 있는 것처럼도 보인다. 예를 들어 주인공인 성준(유준상)이 중간에 술집여주인 예전(김보경) - '예전'이라니! 이 유머는 도대체. -  과 키스를 하며 나누는 대화를 보면, 시간의 흐름에 따라 읽을 수도 있지만, 마치 과거로 돌아가 경진(김보경)과 하는 대화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다보면 결국에는 이상한 질문을 하게 된다. 도대체 이 영화의 시간은 어떻게 되어가고 있는 것일까. 통상적으로 우리가 영화를 볼 때 밤씬 다음에 낮씬이 이어지면, 우리는 분명히 하루(혹은 며칠)가 흘렀다고 짐작하게 된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만큼은 그러한 짐작이 의미가 없어진다. 아니, 어떤 부분에 이르면, 낮씬과 밤씬을 구별하는 것이 별로 의미가 없어진다(홍상수는 이 영화를 흑백으로 찍었다. 그것이 또 한몫을 한다). 이들은 도대체 낮술을 먹고 있을까, 아니면 밤술을 먹고 있을까. 왜 이 영화에서는 시간이라는 것이 파괴되고 있는 것일까.

물론 많은 영화에서 독특한 시간들이 보여지는 것은 그렇게 찾아보기 어려운 것만은 아니다. 영화는 결국 시간의 예술이므로, 그 시간들은 대개의 영화 속에서 나름 의미를 가지고 변주되게 마련이다. 그러나 대부분의 경우 그렇다 하더라도 시간은 대체로 정방향으로 흐른다. 약간 농담을 섞어서 이야기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에서도 시간이 결코 거꾸로 흐르지는 않았다. 거꾸로 가는 것은 벤자민 버튼의 몸이었지, 그것을 결코 시간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다른 말로 하자면, 그건 일종의 착시와 비슷한 거였다. 그리고 상당수의 영화에서 시간은 앞으로도 당겨지고, 뒤로도 보내지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 보내진 공간에서 그 시간은 다시 정방향으로 흐른다. <북촌방향>과 시간의 반복이라는 측면에서 비교되는 <사랑의 블랙홀>에서도 시간은 감겨지기는 했지만, 감겨진 상태에서는 정확히 다시 24시간이 반복되었다. (그리고 거기에는 중요한 차이가 있다. <사랑의 블랙홀>에서 빌 머레이는 매번 침대에 눕는다. 그리고 같은 시간에 주인공을 깨우기 위해 울려대는 알람이라는 상징적인 장면이 나온다. 그러나 <북촌방향>에서 성준이 잠을 자는 장면은 없다. 일반적으로 말했을 때 '잠을 잔다'는 의미는 '하루가 지나간다'는 것이다.) 그러나 이 <북촌방향>의 시간은 점점 사라져 모호한 의미만으로 우리에게 남는다. 그것의 이유가 있을까. 시간을 제거해버리면, 같이 제거되는 것, 혹은 시간을 제거함으로써 우리에게 드디어 보이게 되는 '그것'은 무엇일까.

여기에서 이 영화의 독특한 예고편에 대해 이야기를 해야할 것 같다. 나는 운 좋게도, 이 영화의 예고편을 넓은 스크린으로 감상하였는데, 그것은 순간적으로 눈을 뗄 수 없게 했다. 예고편은 이 영화를 본 많은 사람들이 명장면으로 꼽고 있는 여러 사람들이 택시를 잡기 위해 눈발 날리는 거리에 나와 서 있는 그 장면이다. 그런데, 이 예고편이 독특해 지는 것은 음악과 음성을 그대로 두되, 화면을 거꾸로 돌려버렸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처음에는 이들의 움직임이 어떤 별 의미없는 동작들의 합인 것처럼도 느껴지며, 일종의 약간 우스꽝스러운 무용인 듯도 느껴진다. 즉 그들의 동작은 처음 의도인 '택시 잡기'를 의미하고 있지 못하며,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만든다. 어쩌면, 여기에 뭔가 생각할 부분이 담겨 있는 것은 아닐까. 예를 들어 이 영화를 본 사람이라면, 그 장면에서 보람(송선미)이 길을 건너 뛰어가 프레임에서 사라지고, 뒤이어 영호(김상중)가 그 뒤를 따라가 프레임에서 사라져 버리는 것은 영호가 보람을 바래다주기 위한 것이며, 그리고 어떤 '맥락'에 따라, 영호가 보람을 좋아하는 감정이 있다는 '의도'와 이 장면을 연결시키게 된다. 그러나 이것을 거꾸로 돌려버리면, 우리는 그 장면의 의도를 전혀 알 수 없게 되어 버린다. 그것은 그저 조금 우스꽝스러운 프레임으로의 뛰어듬(거꾸로 돌렸으므로)일 뿐이다.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곧 그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이다. 즉 그렇다면 이렇게 생각할 수도 있다. 시간을 파괴해버리는 것은, 곧 그 '의도'를 알 수 없게 하는 것이라는 점. 다른 말로 하자면, 시간이 사라진다는 것은, 곧 의도가 사라짐을 말하는 것이다.

의도가 사라진다? 여기에서 기억나는 홍상수의 전작 <옥희의 영화> 진구(이선균)의 대사. 이 우유곽이 여기에 놓인 이유를 알면 모든 것을 알 수 있다던 말. 그러나 예전에도 말했었지만, 우리가 그 이유를 알 수는 없을 것이다. 왜냐하면 거기에는 수많은 우연이 개입되었을 것이고, 그 이유, 즉 우연의 의도를 우리는 알 수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것은, 우연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되는 우리가 알 수 없는 수많은 이유가 들어가 있다. 예를 들어 바람이 불어 우유곽이 거기에 날려왔다고 해도, 그 바람이 분 것에는 결국 어떤 이유가 있다. 과학적 이유라고 해도 좋고, 신의 어떤 커다란 계획이라고 해도 좋다. 어찌되었던 간에 뭔가의 '이유'가 있다. 그러므로 진구의 말이 이해가 되지 않는 것도 아니다. 결국 그 이유를 안다는 것은 일종의 신이 되는 것일 수 있기 때문이다. 그 하나의 우유곽이 거기에 놓인 복잡한 메커니즘의 이유를 아는 자가 혹시라도 있을 수 있다면, 그자는 아마 신일 것이고, 신은 그렇다면 다른 모든 것도 자연히 알 수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신은 그것을 미리 커다란 '의도'를 가지고 계획했을 것이므로. (저번에도 이야기했던 박성원의 단편 <하루>. 누군가의 하루를 알면 모든 것을 아는 것이다. 이것은 마치<북촌방향>의 변주인 것도 같다. 성준의 하루를 알면 아마 모든 것을 우리는 알게 될 것이다.)



홍상수는 그 의도를 사라지게 만들었다. 이제 더 이상 우리는 의도를 가지고 어떤 것을 생각할 수 없다. 영화 속에서 보람은 오늘 짧은 시간 동안 영화 관계자를 우연히 여러 번 마주쳤다고 이야기한다. 그러자 성준은 그것은 우연이며, 우리는 그 우연에 어떤 이유를 붙여서 일종의 필연을 만들어낸다고 이야기한다. 즉 우연의 중첩은 그 우연이 일어난 후 사후적으로만 어떤 의미망으로 들어온다. 어떤 일들이 우연적으로 일어났을 때 그 이유에 대해 바로 깊이 생각하는 것(<옥희의 영화>의 진구처럼)은 아무 의미가 없다. 우리는 운이 좋다면,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난 후에야 그런 우연들에 담겼던 의미에 대해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게 될 뿐이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일이 일어났을 때, 우리는 결코 그 전체를 볼 수 없다. 운이 좋다면, 아주 일부의 이유만 나중에 어렴풋하게 깨달을 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신의 의도'라고 부르기도 한다.) 그리고 사실 대부분의 경우는 우리는 그조차도 알지 못한다. '필연'이라는 이름을 갖다 붙여서 우연에 일종의 통제권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지만, 대부분의 경우 그것은 착각이며, 잘못된 의미를 부여한 경우들이 대부분이다. (영화에 대해 이야기를 하면서 이런 이야기를 하려니 손가락이 간질간질하다. 우리는 툭하면, 영화의 의도가 어떻고, 작품의 의도가 어떻고를 이야기하니까. 그러나 사실 그 우리가 말했던 '의도'가 그 '의도'였던가.)

그러므로 시간을 무너뜨리고, 그럼으로써 어떤 의도를 무너뜨린 홍상수는 우리에게 충고하고 있다. 그 우연들(어쩌면 신의 '의도'들)의 오묘한 조화에 겸손할 것. 신이 되려고 하지말고, 찰나를 겸손하게 잡아나갈 것. 우리가 볼 수 있는 것은 사실 그 찰나적 순간밖에 없으니까. 우리는 어찌되었던 전체를 영원히(적어도 죽을 때까지는) 볼 수 없으니까. 그러면 우리는 어떻게 그런 찰나적 순간을 잡아챌 수 있을까. 아마도 그런 방법 중에 하나는 영화 속 성준이 제시한대로 '일기쓰기'가 아닐까. 그러나 그 일기쓰기는 분명 보통의 일기쓰기는 아니다. 홍상수는 말한다. (<씨네21> 819호 김혜리에 의해 이루어진 홍상수 인터뷰. 질문(김혜리): 성준은 예전과 헤어지며 매일 일기를 쓰라고 당부한다. 감독님이 생각하는 영화 만들기가 일기의 개념과 겹치는 부분이 있나. 답변(홍상수): 어떤 식의 일기냐에 따라 다르다. 보통은 책임이나 세상의 이데올로기나 어떤 틀거리를 갖고 그걸 내가 왜 잘 못 맞췄을까 후회하는 내용으로 일기를 쓴다. 그런 일기와 영화 만들기는 다르다. 그런데 다른 식으로 일기를 쓴다면, 매일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쳐다보는 행위라면 영화 만들기와 비슷할 수 있겠지. 쓴다는 행위가 어떤 결과물을 낳는 점도 같고. 하지만 흔히 쓰는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려고 쓰는 일기는 영화 만들기와 닮은 점이 없다. 영화는 언어적인 속박을 벗어나 미디엄을 통해 어딘가로 가보려는 일이니까.) 반성, 자기 정돈, 부추기거나 격려하는 것이 아닌 닥친 일에 대한 자기의 대응을 매일 쳐다보는 것. 그것이 홍상수가 말한 찰나적 순간을 조금이라도 잡아채는 일기쓰기이다. 

이러한 말은 영화 처음의 성준의 대사를 생각하게 한다. "어떤 새끼도 안 만나. 서울을 얌전하고 조용하게 깨끗하게 통과해 가겠어. 그리고 집으로 슝슝!” 깨끗하게 통과해가는 것. 어쩌면 우리의 삶도 그것과 비슷하지 않을까. 아주 작은 미세한 구멍들이 몇 개 뚫린 커다란 구를 하나의 직선의 화살표가 관통하는 그림을 상상해주기 바란다. 우리는 그 화살표가 가리키는 방향대로 그 직선을 따라 그 커다란 구를 조심스레 통과하고 있다. 우리는 운이 좋으면 통과하다가 그 뚫린 구멍으로 구의 바깥을 찰나적 순간에 들여다 볼 수 있다(홍상수식 일기를 오래 쓰다 보면 어쩌면 가능할 수 있다). 바깥에 무언가를 어렴풋이 감지하지만, 우리는 그 바깥의 전체 메커니즘을 결코 알 수 없다. 우리가 들여다본 것은 작은 구멍을 통해서일 뿐이니까. 구의 바깥은 결국 완전히 그 구를 빠져나왔을 때만 알 수 있는 것이다. 우리는 주위의 여러가지를 보고, 즐거워하기도 하고, 슬퍼하기도 하고, 노여워하기도 하다가, 때로 그 구멍을 들여다보고 그 순간 귀 뒤가 서늘해진다. 그러나 그것은 그 때뿐, 우리는 그 구멍을 찰나적으로 지나쳐갈 뿐이므로 곧 잊어버린다. 그 전체를 보는 것은 그것을 다 통과한 마지막 이후이다. 삶이라는 구의 바깥에는 무엇이 있을 것인가.

그러나 그것을 통과한다는 것, 관통한다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영화 속 성준도 조용하고 깨끗하게 통과해나간다고 했지만, 곧 영호에게 전화를 걸었고, 경진을 만났다. 어쩌면 그에게 처음부터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는 결국 북촌이라는 공간안에서 붙들렸다. 그가 붙들린 것은 사람도 아니고, 정념도 아니고, 바로 시간이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계속 같은 자리에서 맴을 돈다. 그는 그 시간 속에서 빠져나올 수 있을까. 관통하려는 자가 시간에 붙들렸을 때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는 영화 속에서 마지막 찬스를 만났다. 바로 사진 찍히기. 이것이 찬스인 것은 두 가지 이유다. 하나는 사진 찍히기란 다른 말로 하자면, 찰나적 시간을 잡아채는 것, 즉 찰나적 시간을 순간적으로 박제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결국 사진을 찍는 것은 좋은 것을 보고자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어떤 사람도 일그러지거나, 나쁘게 보이는 얼굴을 남기고 싶어하지 않는다. 이 마지막 찬스에서 그는 탈출의 기회를 잡고 빠져나갈 수 있을까.

그러나 이 마지막은 묘하고 어두운 기운을 남긴다. 그것 역시 두 가지의 이유. 하나는 그가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는 것. 저승을 빠져나오기 위해서는 저승의 물건을 먹으면 안된다는 신화 속 경고. 비슷하게 말하자면, 그는 북촌이라는 팻말 옆에서 사진을 찍음으로써 사진 속에서 북촌 안에 영원히 박제되어 버리고 말았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성준의 표정. 그는 그 찰나적 순간에 무엇을 보았을까. 구의 바깥을 작은 구멍을 통해 운좋게 들여다본 자가 짓는 두려워하는, 혹은 놀란 듯한 표정. 그는 구의 바깥에 있는 무엇을 보았을까. 무엇이 그가 구를 통과하여 밖으로 나가는 것을 두렵게 만드는가. 이 질문은 우문이다. 왜냐하면 우리 역시도 물론 대부분 그것을 두려워하니까. 인간들이란 결국, 하루하루 죽음을 지연시키려 노력하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그래서 말로는 깨끗하게 통과하여 집으로 슝슝 가겠다고 하지만, 우리도 그것을 깨끗하게 통과할 마음은 없다. 그리고 누군가에게 전화를 건다. 그리고는 '소설'로 달려가 술을 마신다.

 


덧.


홍상수의 영화는 글로 이야기한다는 것이 상당히 힘들다. 예를 들어 당신에게 30분간 시간을 줄 테니, 영화를 안 본 사람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도록, 이 <북촌방향>의 이야기를 정리해서 써보라고 하면 가능할까. 아마 그렇게 쉬운 작업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몇 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가깝게는 어떤 평자들(대표적으로 <씨네21>의 정한석)이 영화를 설명하고자 할 때 자꾸 뭔가 그림을 그리려고 하는 것도 그렇고, 멀게는 홍상수의 영화를 '영화적'이라고 부르는 것이 그렇다. 어떤 영화가 글로 쉽게 설명된다는 것은 다르게 말하면 그 영화가 영화라는 고유의 속성과 상당히 멀리 떨어져 있다는 반증이다. 글은 분명히 영화와는 다른 나름의 고유의 특성을 가졌기 때문이다. 따라서 글로 이루어지는 영화 비평이 결국 어떤 한계를 가지게 되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다. 아마도 어떤 영화를 망가뜨리지 않으면서 비평하는 가장 효과적이고, 가치 있는 방법은 영화로 비평하는 것이 아닐까. (그런 맥락에서 김혜리 씨의 이야기도 수긍이 간다. 음악이 가장 순수한 예술이라는 말, 모든 예술은 결국 음악을 닮고자 하는 것이라는 말. 그 이유 중의 하나는 음악은 결코 글로 설명될 수 없기 때문이 아닐까.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글로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아름다운 선율'이라고 말할 때 결국 듣지 않고서는 그것을 어떻게 알 것인가.) 홍상수의 영화들은 결국 그 영화를 이야기하기 위해서는 다른 영화를 가지고 화답해야 하는 것이 아닐까하는 생각을 불러 일으킨다. 글쓰기의 무력함을 느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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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1-09-20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홍상수 감독이 더 나아갈 수 있는 지점이 있을까 생각했지만, 그의 영화는 항상 기대 이상을 보여주는 듯 하다.

본문에 언급한 <북촌방향> 트레일러(영상 수정).





2011-09-20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3:1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2 20:0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3 16:5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6: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9-20 19:2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마녀고양이 2011-09-20 2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를 봐야만 글이 마음으로 스며들겠는걸요.
안 그래도 프레이야님께서 이 영화 보라고 추천해주셨는데,
프레이야언니와 맥거핀님의 리뷰를 보면서, 마음이 슬슬 동하는 중입니다.
(그런데 요즘 할 일이 많아서...... ㅠㅠ)

시간의 변주, 네, 얄팍한 기억에 의존하는 저를 보면서
영화의 반복적 이미지가 슬프게 다가오곤 합니다.

좋은 리뷰세요....

맥거핀 2011-09-21 16:39   좋아요 0 | URL
영화리뷰라는 게, 또 책 리뷰하고는 다른 게 있어서, 영화를 보지 않으면 이게 뭔소린가 싶기도 하고, 쓰는 사람은 감동이 어쩌고, 재미가 어쩌고 해도 잘 안오는 경우들이 많지요.^^; 그리고 본문에도 썼지만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또 글로만 이야기할 수 없는 부분들이 있어서..홍상수 영화 리뷰들 보면 사실 상당히 복잡하고, 세밀하고, 구조적으로 분석을 한 글들이 있는데, 막상 그런 글을 보고 영화를 보면 약간 이게 뭥미하는 부분도 있는 것 같아요. 굳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아도 심플하고, 재밌고, 단순하게 읽히는 부분도 있으니까(단순하게 읽는 것도, 읽는 자의 '당연한' 하나의 선택이니까).

그래도 만약 누군가가 최근 개봉영화 중 골라서 딱 한편만 봐야하는데, 어떤 거 보는 게 좋겠냐고 물어보면, 그래도 이 영화를 이야기할 수 밖에 없을 것 같습니다. 그 사람이 영화를 본 이후에 저에게 투덜거린다 해도..^^

노이에자이트 2011-09-25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본주의 이행논쟁>(동녘)은 1984년 것과 1997년 것이 동일한 책입니다.영국 미국 일본의 경제사학자들의 논쟁을 논문으로 소개했습니다.<자본주의 이행논쟁의 새로운 전개>(아침)는 소련학자들 (소련해체 이전)의 경제사(당연히 13세기~15세기 서유럽 경제사를 주로 다룸)논문집입니다.이 논문들은 일본학자들이 선별했습니다.후자의 책에서는 전자의 책에 실린 저자들을 논평 및 비평하는 내용이 있으니 두 책을 연이어 공부하면 좋을 것입니다.

위 두 책에 실린 논문의 저자들은 일급의 경제사학자들입니다.많은 이들이 이런 책들로 기초를 닦지 않고, 뱁새가 황새 흉내만 내려드는 경박한 풍조가 안타까울 뿐입니다.

열심히 공부하십시오. 이런 책에 관심을 가졌다는 것 자체가 남들보다 여러 발자국 앞으로 나아간 증거입니다.

맥거핀 2011-09-25 23:36   좋아요 0 | URL
아..그렇군요. 제 서재까지 방문하셔서 자세한 설명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두 권 다 구매해서 차례로 정독하면서 공부를 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충고 말씀도 정말 감사합니다. 남들보다 나아간 지는 잘 모르겠지만, 요즘에 들어서 공부의 필요성을 절실히 느낍니다. 고맙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