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기 힘든 이야기이다. 부서지려고 하는 것들, 혹은 이미 부서진 것들, 그리고 부서진 것들을 어떻게든 끌어모으려는 사람들, 그리고 그 와중에서도 계속 부서져나가는 마음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이 이야기는 답을 주지 않기 때문이다. 명확한 답이 없는 이야기, 그러나 어떻게든 그 답을 찾아야만 하는 사람들.
김일란, 이혁상의 <공동정범>을 보는 것은 그래서 쉽지 않다. <두 개의 문>에 이은 용산참사를 다룬 연작선상에 서 있는 다큐. 2009년 1월 20일 새벽, 경찰은 용산 철거민들이 망루를 짓고 농성에 들어간 지 25시간만에 이례적으로 이른 진압을 시도하였고, 진압과정에서 철거민들이 지은 망루가 불타오르며 철거민 5명과 경찰 특공대원 1명이 사망에 이르렀다. 이후 수차례 재판이 열렸고, 그 과정에서 화재의 원인은 명확하게 밝혀지지 않았지만, 경찰은 이를 시위자들의 화염병에 의한 것이라 단정짓고, 망루에서 탈출하여 생존한 전원을 공동정범(共同正犯)으로 기소하고, 그들에게 실형을 선고하였다. 영화 <공동정범>은 그 '공동정범'들의 이야기를 다룬다.
그러니까, 이 '공동정범'들의 위치는 사실 특별하다. 그들은 (경찰의 입장에서 보자면) 국가 법집행의 정당한 권리를 방해한 범죄자이지만, 동시에 동료를 잃은 이들이기도 하며, 어떤 의미에서는 죽을 뻔한 위기에서 가까스로 탈출하여 살아남은, 아직까지도 트라우마를 겪고 있는 피해자이기도 하다. 심지어 이들 중 한 명인 이충연 씨는 참사 현장에서 아버지를 잃고, 홀로 살아남았다. 그래서 그들은 묻는다. 나 때문에 모두가 죽었을까? 내가 그들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까?
그들은 차례로 고백한다. 예를 들어 생존자들 중에 한 명인 김주환 씨를 괴롭게 하는 기억은 경찰이 가깝게 오지 못하게 하기 위해서 시너를 뿌리던 기억이다. 내가 시너를 뿌리지 않았다면 피해가 적지 않았을까? 그러나 한 가지 확실한 것은 그들 중 어느 누구도 발화가 어떻게 일어났는지 정확하게 기억하고 있지 못하다는 사실이다. (물론 경찰과 검찰도 이를 정확하게 밝혀내지는 못했다.) 그들의 기억은 분절되어 있고, 심지어는 없는 기억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그들은 겁에 질려 있었고, 그 순간 살기 위해 애쓰던 한 인간일 뿐이었다. 그래서 이 제목 '공동정범'은 중의적으로 들리기도 한다. 사건의 핵심, 그러니까 발화의 책임은 여전히 비어(空洞)있다.
이야기의 한 축이 이것이라면 나머지 한 축은 바로 그 '共同'이다. 너희 모두가 그 사건, 혹은 범죄에 책임이 있다는 것. 그러나 당연하게도 어떤 사건이든 책임은 모두에게 실질적으로 같을 수는 없다. 누군가는 억울하고, 누군가는 그 누군가가 억울하다고 생각하는 것이 억울하다. 누군가는 사건 이후 서로 마음을 추스르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하고, 누군가는 그보다도 진실을 밝히는 것이 우선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그들은 대립한다. 그들을 '공동정범'으로 만든 그 방식의 효과가 그대로 작동한다.
그래서 이 이야기를 그대로 보는 것은 힘들다. 아마도 그런 이유로 감독은 다큐인 이 영화에 극영화의 문법을 적극적으로 도입했을 것이다. 실제 인물들의 인터뷰가 주가 될 수밖에 없는 영화, 더구나 이러한 내용의 영화라면 그것을 계속 보고만 있는 것은 힘들 수밖에 없을테니. 그것을 일종의 플롯의 구축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텐데, 주인공과 주인공에 대립되는 인물을 설정하여 이야기를 이끌어가는 것은 플롯을 구성하는 가장 기초적인 방식이다. 이 영화는 단순히 인터뷰들을 이어붙이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체하고 재조립하며, 일종의 플롯을 만들어내고 있다. 예를 들어 몇몇 장면을 이야기할 수 있는데, 출소 이후 홀로 견디는 것의 어려움을 말하는 인터뷰 뒤에 가족과 행복한 시간을 보내는 것처럼 보이는 이충연 씨의 모습을 붙인다거나, 아니면 사건 현장에서 가장 먼저 탈출한 이가 누구인지 알지만 말할 수는 없다는 인터뷰 뒤에 붙는 장면들을 보면 마치 극 영화의 이야기 흐름을 보는 것 같다. (이는 사실 <두 개의 문>에서부터 이어진 기조라고 할 수 있다. 나는 예전에 썼던 <두 개의 문> 리뷰에서 이것의 어떤 위험성을 말한 바 있고, 이 <공동정범>에서도 여전히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지만, 반복할 필요는 없어 보인다. 아마도 그렇게 해서라도 감독은 이 영화가 많은 이들에게 보이기를 바라는 것처럼 보인다.)
물론 플롯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노리는 것은, 대립항들을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아니다. 그 이면에 있는 것들, 다시 말해서 링 위에서 싸우는 누군가가 아니라, 그들을 링 위로 올려놓은 자들. 그들의 싸움에 열광하는 군중들 뒤에서 거액의 파이트머니를 챙기는 프로모터들. 영화라는 것이 가치가 생기는 지점이 아마도 이것이 아닐까. 즉 영화는 당연히 그들의 싸움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링 가까이에서 즐기는 군중을 보여주기도 한다는 사실이다. 다시 말해서 카메라 안에서 즐기는 군중들은 적어도 그 순간에는 결코 프로모터의 존재를 느끼지 못한다. 그러나 그 밖에 서 있는 우리들은 환호하는 군중의 얼굴을 봄으로써 그것이 상징하는 어떤 무엇인가를 볼 수 있다. 예를 들어 그 중의 하나는 환호하는 군중의 머릿수와 입장료를 곱한 거액의 파이트머니이고, 더 나아가 그 파이트머니의 상당수를 챙길 그 링에 그들을 올려보낸 프로모터다. 물론 그렇다고 해도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그 질문은 이렇다. 영화를 바라보는 우리들의 이면에 있는 욕망은 누가 보아줄 것인가.
용산에서 2009년 사람이 죽었고, 건물이 무너졌다. 버려진 공터는 한동안 주차장이 되었다가 이제는 쇼핑센터가 들어선다고 한다. 누군가는 국회의원이 되었고, 대통령이었던 누군가는 감옥에 들어갔지만, 그것으로는 아무 것도 설명되지 않는다. 여전히 그곳에는 공동(空洞)이 있고, 그 공동은 욕망들이 채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