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며칠 동안 예비군 훈련을 갔다왔다. 언뜻 보면 예비군 훈련이란 건 책과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예비군 훈련만큼 책이 어울리는 시간 및 장소도 없다. 앞에서 열심히 강의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말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실외 학과를 제외한) 강의들이 거의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데다가, 훈련의 특성상 여러 자투리 시간이 많이 생긴다. 그리고 폰도 강의 중에는 허용되지 않고, 음악을 대놓고 듣기에는 너무 눈치 보이고, 다른 전자기기의 반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책은 가능하며, 그래서 책은 (어떠한 내용이든) 여전히 그곳에서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간 중 손에 책 한 권 씩을 들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알라딘 서평단으로 받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였다. 자투리 시간 중 읽기 좋도록 글들이 짤막하게 나뉘어져 있는 데다가, 상당수가 전쟁 기간에 쓰여졌으며, 전체주의에 끊임없이 항거하는 조지 오웰의 이 에세이들은 예비군 훈련과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뭐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는 이것으로 대신.

그리고 이달의 추천하는 (사실은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들. 다시 보관리스트에서 건져본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 다우어 드라이스마 / 에코리브르

인지심리학 시간에 들은 몇 개의 이야기들은 나를 실망하게 했다. 우리가 가진 기억의 신비로운 부분,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반복하는 망각의 그 아련함이 그저 뇌 속의 정신 작용의 일부분이라니. 그것이 그저 우리의 뇌의 몇 개의 뉴런들과 호르몬들과의 복잡한 신경 작용이 불러 일으키는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었다니. 우리의 놀라운 반응과 기억의 메커니즘이란 실상은 많은 혼란과 오인의 산물로서 구성된 것이라니. 그러나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나이들수록 시간은 왜 빨리 흐르는가>는 일상과 밀착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단순한 어떤 물리적인 작용만이 아님을, 그것에는 아직 많은 신비로움이 남아 있음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그런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신작.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 폴 슈메이커 / 후마니타스

세상의 여느 곳이나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우리나라만큼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 있을까. '100분 토론'을 즐겨보곤 하는데, 가끔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의외로 상당히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의외로 매우 보수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방송의 영향인지, 일종의 미봉책인지, 아니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보수와 진보의 개념들이 잘못된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하기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이 나라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것의 의미는 그저 상대방과 나와 구별짓고, 상대방에게 낙인을 찍으려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그리 놀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기본적인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될까. 



당신이 모르는 줄도 모르는 100가지 수학 이야기 / 존 배로 / 이미지박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수학은 밀착되어 있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들이 나중에 사회나가면 다 써먹을 때가 있다고 할 때 속으로는 비웃었지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수학이란 게 이렇게나 많은 부분과 사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종종 깨닫고 한다. (예를 들어 예비군 짐 쌀 때도 말이다!) 그리고 수학에 연관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의외로 수학의 세계는 재미있는 부분이 너무 많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점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이 책도 한 재미 할 듯. 



위스트르앙 부두 / 플로랑스 오브나스 / 현실문화

이 책에는 '우리 시대 '투명인간'에 대한 180일간의 르포르타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실업자에서 시급 8유로의 청소부가 되기까지의 몇 개월의 경험을 적은 르포. 얼마전에 <한겨레21>에서 몇 개월의 노숙 체험을 바탕으로 노숙인의 생활실태를 분석한 논문을 발췌해 놓은 것을 읽었다. 그것을 읽고 조금 충격이랄까, 놀라움이랄까, 혹은 찜찜함이랄까 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애써 내가 외면하려고 했던 마음 한 구석의 불길함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투명해졌고, 또 동시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투명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창백한 얼굴을 늘 거울에 비춰보며,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선제공격 / 앨런 M. 더쇼비츠 / 바이북스

약간은 위험해 보이는 책이다. '국가 간의 전쟁에서 선제공격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먼저 이같은 일들이 실제로 매번 반복되고 있음을, 따라서 그것에 대한 어떤 고찰과 국제법적인 논의가 필요함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의 (어떤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에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지금은 지나간 논의가 되었지만, 한국전쟁을 둘러싼 선제공격 논란도 있었다.) 원혜욱 교수의 반론도 같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꽤 흥미로운,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볼 만한 논쟁거리들이 들어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 이상 어렵게 5권을 골랐다. 움베르트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도 넣고 싶었으나, 왠지 마음에 걸려서.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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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05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써놓고 다른 분들 리스트를 보니 겹치는 게 거의 없넹..;;

cyrus 2010-11-0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슈메이커, 존 배로,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책이 끌리네요.
특히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책 내용이 조지 오웰의 르포와도 흡사하고요.
그리고 지금 신간도서 후보 중 대세가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군요^^;;
이 좋은 책을 19분의 신간평가단원분이 읽으면 참 좋을텐데,,
가격이 세다보니 출판사가 선뜻 알라딘 신간도서로 제공해줄지 모르겠네요.

맥거핀 2010-11-05 22:52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위에 올린 책 중에 폴 슈메이커의 책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거든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선정해 봤어요. 사실 800쪽이 넘어가는 책이라 선정되어도 문제지만..^^; <궁극의 리스트>는 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소장 욕구에 더 가깝지요.
 
바흐 이전의 침묵 - The Silence Before Bach
영화
평점 :
상영종료




1.
글로서 적을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글쎄.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몇몇 이미지나 짧은 이야기들은 내뱉을 수 있어도, 영화 내내 흐르던 바흐의 음악들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영화란 보고, 듣는 것이라는 것. 즉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줄거리를 따라잡거나 해서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들어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애써 이해하려고 아등바등 노력해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그러므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2.
<바흐 이전의 침묵>. 어쩌면 그 이전을 완벽한 침묵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오만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바흐 이전의 소위 '음악 이전의 세계'가 어떤 형태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형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세계의 존재 여부를 믿을 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바흐의 음악들은, 그리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후기의 음악들은 이 세계의 어느 곳에나 완벽하게 스며들어가 세계와 조응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첼로 연주자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에도 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에도 있으며, 아이들의 합창 속에 나란히 움직이는 입에도 있으며, 조율사의 떨리는 세심한 손길에도 있으며, 고속도로 위의 달리는 트레일러에도 있다. 그것은 기쁨 속에도 있으며, 그리고 영화 속 2차대전 중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극한 고통 속에도 있다. (개인적인 궁금증. 바흐와 헨델 중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인지? 찾아보니 몇몇 흥미로운 대답들이 있기는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거는 없던데.)

3.
우리가 이전에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음악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음악 외부를 도는 기존의 방식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즉 기존의 클래식 음악 영화들은 작곡가를 둘러싼 어떤 드라마틱한 내용을 재현하거나, 음악 그 자체가 가진 어떤 이야기를 형상화해내는 것으로 음악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어떤 위험이란, 우리가 받는 감동이 그 음악 자체의 감동인지, 아니면 그것의 외부가 우리의 상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어떤 유사한 감동인지 구분해지기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도 '마태 수난곡'의 발견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거의 비디오 아트나 설치 미술에 가깝다. 그저 그것을 듣고 받아들여라! 영화는 말한다. (일부의 지적대로 이러한 것들이 지루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있어보이려는 시도'에 불과한가 라는 항변은 그저 카피와 예고편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라고만 해두자.)

4.
한 가지는 흥미롭다. 그것은 바흐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도 여전히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나타낸 악보들. 그 악보들만 바라보아도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엿보이며, 그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것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대칭의 미학이며, 신이 숨겨놓은 균형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왜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음악이 되며,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불협화음이 되는가. 왜 어떤 특정한 화음만이 우리 귀에 듣기 좋은가. 왜 어떤 균형만이 우리에게 듣기 좋고, 보기가 좋은가. 아마도 영화에 난데없이 누드가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흐 음악의 예술성은 심지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에 사용되는 일종의 전자 악보에도 여전히 드러난다. 그 천공(穿孔)들의 오묘한 흐름이라니.
 
5.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당신에게 평균율 클라비어니, 대위법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마도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에 아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 감동이 전혀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감동을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반대의 이유 때문에. 바흐 이후의 음악의 세계는 그렇게 당신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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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바흐의 음악과 관련된 영화가 있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바흐와 그의 음악은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는 받고 있기는 하나,
그의 작품은 제대로 듣는 사람이 잘 없을 겁니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알려진 미누에트나 G선상의 아리아를 듣기는 하겠지만,,
이 음악만 듣는다고 바흐의 음악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은 저도 바흐의 음악이라곤 이 두 곡이랑 토카타와 푸가 뿐이랍니다.^^;;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일정한 규칙으로 흐르는 멜로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맥거핀님의 글을 읽고 나니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은데 , , ,
스피커가 먹통이네요-_- 그래도 멋진 글 덕분에 잊혀지고 있었던 바흐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맥거핀 2010-10-25 23:26   좋아요 0 | URL
몇군데 안하는 영화예요. 안 그래도 곧 내려갈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는 평들이 많이 갈리더라구요. 상당수의 분들이 <아마데우스> 같은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
저도 바흐 음악은 잘 모르구요. 몇 개 들어본 음악들이 있지만, 아직도 음악과 제목들을 헷갈리고 있습니다. 바흐하면 저도 왠지 엄정한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는 바흐의 핵심은 '균형과 대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위의 이미지 처럼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 - 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
영화
평점 :
상영종료




(약간의 스포 있음)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고, 20여년 전의 영화 <월 스트리트>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의 악당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돌아왔다. 그는 달라져 있을까. 일견 보아서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강연을 하며, 탐욕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 탐욕이 낳은 버블 경제가 무너질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곧 이어 최대의 투자은행은 무너지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금은 유치하게 아이들의 비누방울과 극적으로 떨어지는 주가 그래프를 오버랩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에는 투자은행의 대표 루이스 제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길 밖에는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역으로 고든 게코 속에 그 답이 있다.

무너지는 투자 은행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들이다. 리만 브러더스 사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경제 광풍은 곧 전세계를 집어 삼켰고, 그것은 이 작은 땅까지 지독한 칼바람이 되어 몰아닥쳤다.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조용히 모두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몇 가지의 익숙한 컷으로 보여준다. 급격히 떨어지는 꺾은선 그래프와 소리를 지르는 증권맨들의 모습과 심각하게 머리를 부여 잡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영화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는가. 그 경제 위기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위기가 닥치자 월 스트리트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지한 위기 타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사의 직원들과 투자한 선량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라는 진지한 위선을 얼굴에 깔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죽으면 순간 실망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그저 다시 새 캐릭터를 만들면 그 뿐이다. 올리버 스톤은 그것을 마지막 인상적인 숏으로 보여준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그 때마다 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월 스트리트의 원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에 고든 게코와 손을 잡는다. 그는 지금껏 수차례 그러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개책 덕분에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 한 아주머니가 게코에게 '모랄 해저드'의 뜻을 묻자, 게코는 '그것은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가서 쓴 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 '모랄 해저드'는 영화 속에 나온대로, 무너진 투자은행에 공적자금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월 스트리트의 그들은 모두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순간에도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자선파티에 가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비싼 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저 게코처럼 몇 년 살짝 살다가 나오면 된다. 그리고는 게코처럼 비싼 저택을 '비록 전세나마'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면 그뿐이다. 그리고는 강연회를 돌면서 다음의 세 마디를 선전하면 된다. "내, 책을, 사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은 무너져 내린다. 뜻조차 모르는 '모랄 해저드' 때문에. 그러므로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이 제목은 왠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지만,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월 스트리트 불패 신화! 여의도 불패 신화! 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잠드는 것은 그들에게 돈을 맡긴 다른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온건하나,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냉소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아예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먹고 사는 제이콥(샤이어 라보프)의 어머니(수잔 서랜든의 깜짝 등장)마저 굳이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을 보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걸어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이의 욕망이 이 월 스트리트를 혹은 여의도를 만들어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월 스트리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의 비슷한 월 스트리트들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 곳들은 또한 비슷한 한 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것 자신들이 어떤 모호한 베일 속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그 모호한 베일을 살짝 들추어보려고 나름 애쓰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릿하다. 악성 채권이니, 공매도니 하는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여 우리가 그 외부의 곁껍질을 살짝 까고 들어가도, 그 내부 깊숙한 곳은 회의실의 검은 벽들로 여전히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 내부의 회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서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선 파티 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파산의 구렁텅이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게임칩을 맡긴 너희들은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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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주식 시장에 일시에 퍼지는 괴소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등등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몇 개의 장면들은 우리가 수많은 뉴스 클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클리셰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전체 내용 역시 그동안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아는 내용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경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라면 영화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아예 아무런 설명이 없거나, 전체 이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맥락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사건의 흐름을 너무 설명식으로 나열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영화적인 구성들이 필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것은 대중 영화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의 흐름을 설명조로 보여주는 다큐물이 아니라 말이다. 돈은 절대 잠들지 않을지 몰라도, 관객은 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시 온건하지만 지겨운 할리우드 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영화의 무엇을 해결해주는가.) <7월 4일생>이나 <플래툰>, 혹은 <유 턴>에서 보여줬던 그 반항기나 똘끼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리버 스톤 감독도 나이가 드니 달라진 것일까. 기껏 마지막에 던진 승부수를 감독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그저그런 대중영화에 스스로 머물고 마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마지막을 예전의 올리버 스톤 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자라서 경제 주체가 되고, 다시 비슷하게 모든 것들은 반복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돈은 잠들지 않고, 비슷한 게코들은 다시 돌아온다. 게코의 강의를 들으며 공감을 표시하는 학생들과 게코의 책에 싸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또한 마지막의 버블들은 말하고 있다. 버블은 부풀어오르다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터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버블에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편의 버드 폭스(찰리 쉰)와 찰리 쉰의 아버지 마틴 쉰 등이 깜짝 출연하는 것은 나름의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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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0-2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면서 별 세 개는 안 주기로 결심했더니 별 줄 때마다 아주 애매하네..별점 척도를 10개로 늘려주셈!!
 

문학동네 이벤트. 꼭 '문학동네' 책들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간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문학동네'의 책들을 몇 권 꺼내 본다. 마침 가격도 딱 맞고.  

구경꾼들 / 윤성희 / \ 9,000

꽤 오랫동안 윤성희의 글들을 좋아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들을 좋아해 왔다기 보다는, 그가 그려내는 세계들을 좋아해 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윤성희가 그려내는 세계들은 대체로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뭔가 나사가 몇 개 빠져버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 그러나 그 세계들은 기묘하게 따듯하다. 뭔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그 안의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다. 1인칭 시점의 짤막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그녀의 단편들은 묘한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데 한몫을 하지만, 동시에 그 수많은 '나'들은 낯선 자와의 연대를 통해 꽤나 단단한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 그녀의 첫 장편.  

순교자 / 김은국 / \ 9,900

한국전쟁과 기독교. 그리고 거기에 신앙과 양심과 실존의 문제가 버무려진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거기에는 아주 고귀한 것이 들어가 있는 반면, 아주 추악하고 감추고 싶은 것들도 들어가 있다. 이 책이 그런 문제들을 정면으로 파헤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이 2가지의 조합만으로도, 복잡하고도 처절한, 그리고 묵직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 같다. 더불어 김은국 작가의 개인적인 이력이 여기에 흥미를 더한다. 꼭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에브리맨 / 필립 로스 / \ 8,550

필립 로스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이 책에 대한 몇몇 찬사들을 들었다. 삶과 죽음,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글쎄. 이것만 놓고 보아서는 왜 이 이야기가 특별한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에도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무튼 당연하게도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언젠가는 마주하여야 하며, 대부분은 늙어감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문학동네 64호- 2010. 가을 / \ 13,500 

원래 서점에서 하루키의 인터뷰만 살짝 볼 생각이었는데, 곧 포기했다. 이 하루키의 인터뷰는 길이도 너무 길 뿐더러, 왠지 조용한 공원에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1Q84>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하루키와 지금의 하루키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묵직함이랄까. 예를 들어, 예전의 하루키가 80%의 농담과 20%의 진지함으로 이질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40%의 농담과 60%의 진지함이랄까. (그래도 그가 여전히 세계를 일종의 반농담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유효한 것 같다.) 그가 문학을 보는 시선들 역시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숨그네 / 헤르타 뮐러 / \ 10,800

지하철 통근 시간에 읽은 헤르타 뮐러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은 숨을 멎게 했다. 그것은 지하철 안의 숨막히는 공기와는 다른 뭔가 이질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 지하철의 살풍경한 이미지와는 뭔가 아주 극과 극에 있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모르게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동안 들어봤던 어떤 이야기보다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그런 헤르타 뮐러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총액 \ 5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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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다른 사람들의 경우도 많이 그럴 것이라고 생각하는데, 온라인 서점을 자주 이용하게 된 이후부터는 오프라인 서점에서 책을 잘 사지 않게 되었다. 가끔 서점에 가서 여러 신간들을 돌아보고는 하는데, 사고 싶은 책이 있어도 오프라인 서점에서는 그냥 세세하게 보기만 하고는 그 목록만 휴대폰에 적어둔다. 그리고는 얼른 집에 돌아와 온라인 서점 보관함에 그 책들을 던져 넣는다. 책 값을 줄여보려는 얄팍한 시도이지만, 다만 한 가지 단점이 있다면, 대부분 그런 책들은 그 이후에도 잘 사지 않게 되는 것 같다. 글쎄. 나중에 온라인 서점에서 사려고 하면 왠지 그 책을 오프라인에서 보았을 때의 가벼운 흥분이 되살아나지 않는다. 뭔가 의무감에서 사게 된다는 것 같달까. 책이건 뭐건 간에 일단 지름신이 왔을 때 질러야 하는 걸까. 

알라딘 8기 신간평가단이 되었다.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신간을 써먹어 볼 때다. 여기에 신간을 몇 개 적어두면 운 좋게 그 책 중 하나를 볼 수 있게 될지도 모른다. 물론 희망사항에 지나지 않을지도.   

종교학 세계명저 30선 / 시마조노 스스무  

이렇게 30선이니, 100선이니 하는 책들은 대체로 좋은 평가를 받지 못하지만, 나는 나름대로 괜찮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일단 이런 기회가 아니면, 내가 절대 시도해보지 않을 책들을 간접적으로 맛볼 수 있다. 그리고 예전의 경험을 돌이켜보면, 그 중 몇 권의 책들은 실제로 다음의 독서로 이어지기도 한다. 종교학에 대해 여러 기초적인 지식이 없는 상태에서 이런 책으로 가벼운 워밍업을 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종교라는 것에 대해 조금이라도 알고 있지 않으면 세상의 많은 것들을 그대로 놓쳐 버리고 만다. 우리 사회에서는 종교가 약간은 부정적인 뉘앙스를 조금 가지고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만(아마도 한국의 일부 개신교의 행태가 그에 큰 영향을 미쳤을 것이다) 지금도 종교라는 것 때문에 수많은 사람들이 죽어가기도 하고, 살아나기도 한다. 부정을 하건 긍정을 하건 인간의 삶에 있어서 종교는 큰 부분이다. 그것을 부인하기는 힘들다.

나는 왜 쓰는가 / 조지 오웰 

조지 오웰의 문학적 에세이 혹은 정치적 칼럼들. 무엇보다도 제목이 매력적이다. 오래 전부터 왜 나는 뭔가를 쓰려고 노력하는가- 가끔 스스로에게 질문을 던져보는데, 적당한 대답을 찾지 못했다. 모두가 뭔가를 쓰려고 하는 시대, 이런 시대에서 이 질문은 나뿐만이 아닌, 여러 사람에게도 궁금한 부분일 것 같다. 이 대작가는 과연 무엇을 위해서 쓰고 있는가. 궁금해진다. 

 

20세기 문화 지형도 / 코디 최 

조금은 기대반, 우려반 되는 책이다. 이 책 한 권으로 20세기 문화의 흐름을 꿰뚫어 볼 수 있으리라는 기대도 있고, 너무 서양의 문화흐름만을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 아닌가 하는 우려도 있다. (예를 들어 그런 우려는 이런 것이다. 왜 독립영화관은 썰렁한데, '프랑스 영화 특별전'에는 사람이 넘쳐나는 것일까.) 지은이의 약력으로 볼 때에, 설익은 상태에서 있어 보이는 이론들만 줄줄이 꿰어 놓은 책이 아닐까 살짝 걱정이 되지만, 전체적인 목차 구성은 상당히 흥미가 간다.   

 

민주주의는 거리에 있다 / 제임스 밀러 

유럽의 신좌파에 대해서는 몇 가지 책을 읽어 보았는데, 미국의 신좌파에 대해서는 별다른 저작을 읽어 본 기억이 없다. 그들의 활동상을 일목요연하게 살펴볼 수 있는 책이 아닐까 기대하고 있다. 물론 아직도 많은 사람들에게는, 특히 일부 사람들에게는 민주주의는 거리에 나와서는 안되는 것이다. 국회의사당에 갇혀 있거나, 혹은 일부 사람들의 책상 위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것이다. 하기는 아침 저녁으로 G20 홍보 방송을 지하철 역에서 세뇌되도록 들어야 하는 이 사회에서 뭔가를 기대하기란 여전히 요원한 일이다. 그래도 아직은 희망이 있다고 믿고 싶다.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박노자 

주간 <한겨레 21>에 연재되는 박노자 선생의 이 칼럼을 잡지를 살때마다 종종 보곤 했었는데,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띄엄띄엄 불규칙하게 보지 않고 한꺼번에 읽을 좋은 기회다. 외국인이자(물론 귀화는 했지만), 자칭 무정부주의자인 저자가 우리 고대사를 보는 시선은 기존의 학계와 다르게 독특한 측면이 있다. 이런 표현이 적당할런지 모르겠지만 아스트랄하다고 말할 수도 있다. 다른 시각을 얻는다는 장점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박노자 선생의 글은 재미있다. 그 시선의 독특함을 넘어서 그 재미 때문에라도 읽어볼만 하다. 중고등학교 교과서도 이렇게 재밌게 써보면 좋을텐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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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06 11: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번에 나온 박노자 교수의 신간이 한겨레 잡지에 연재했던 글이었군요.
처음 알았습니다. 저도 페이퍼에 이 책 추천했어요^^
한국사에서 상세히 다루지 않는 고대사에 대해서 박노자 교수가 논한다면
왠지 지루하지 않을거 같습니다. 좋은 페이퍼 잘 읽었습니다^^ㅋ

맥거핀 2010-10-06 22:02   좋아요 0 | URL
반갑습니다. 박노자님은 꼭 고대사에 대한 부분이 아니더라도 항상 그 나름의 독특한 시각을 가진 글을 많이 쓰셔서 읽어보면 여러가지로 생각할 부분을 많이 던져줍니다. 그래서 때로는 부당한 공격도 받지만, 글쎄요. 제 입장에는 한국 사회에서 박노자님 같은 분들도 필요하다고 생각이 되네요. cyrus님도 이번 평가단이신 거 같은데, 같이 잘 활동해 보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