플라스틱 시티 - Plastic City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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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리니름 있습니다만...)


보고 나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뭔가를 이야기하기가 어려운 영화구나. 아니, 꼭 리뷰를 쓰기가 어렵다는 의미가 아니라, 그저 누군가가 이 영화에 대해 물어도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영화라는 의미다. 영화를 보고 와서 찾아본 몇 개의 리뷰는 대체로 비슷한 것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영화 특유의 전체적인 분위기, 즉 이국적이면서 무거운, 그러면서도 신화적이고 주술적인 어떤 것. 강렬한 색의 대비와 독특한 화면구성. 매우 불친절하고 난해한 내러티브. 오다기리 죠와 황추생의 인상적인 연기, 그 뭐 그런 것들. 그러니까, 다시 정확히 말하면 별로 할 이야기가 없는 것이 아니라, 얘기할 수가 없는 것이었다. 내러티브가 생략된, 이미지와 상징으로 점철된 영화를 무엇이라고 이야기하겠는가. 이러한 영화는 아무리 줄거리를 적어내려간다고 한들, 아무 것도 전달할 수 없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가.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부터 줄거리는 별로 기억나지 않고, 파편화된 몇몇의 이미지만 머리 속에서 맴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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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관을 나오면서 가장 머리에 남은 것은 영화 마지막에 잠깐 스치듯 지나간 짧은 문구이다. 바로 이 문구이다.


一物一數 作一恒河 一恒河沙 一沙一界 一界之內 一塵一劫 一劫之內
일물일수 작일항하 일항하사 일사일계 일계지내 일진일겁 일겁지내

所積塵數 盡充爲劫 
소적진수 진충위겁 


(세상 모든 것들의 수를 세어 그 수만큼의 항하(갠지스강)가 있다고 하고,
이 항하의 모든 모래 수 만큼의 세계가 있으며
그 숱한 세계 안의 한 먼지를 한 겁으로 치고
그 모든 겁 동안에 쌓인 먼지 수를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




영화에 너무 짧게 스치고 지나갔고, 영화 안에 이 말에 대한 별다른 정보도 나오지 않는터라, 그 의미가 궁금했다. 자료를 찾아보니 불교 경전인 <지장보살본원경(地藏菩薩本願經)> (줄여서 <지장경>) 제1품에 나오는 말이다. 이 말은 문수사리보살이 부처님에게 물은 질문에 대한 부처님의 대답에서 나온 말로서, 문수사리보살이 지장보살이 어떻게 그 많은 중생을 제도하는 불가사의한 일을 성취하였는지(혹은 할 수 있는지)를 묻자, 하나의 비유로서 이야기한 것이다. 즉, 위의 시간들보다 훨씬 더 긴 시간을 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왔음을 말하는 것이다. (다시 겁으로 칠지라도...지장보살이 중생을 제도해 온 겁에 비교할 수는 없다.) 해석하기에 따라서 이 말은 여러가지로 받아들여질 수 있겠지만, 왠지 이 자막의 말은 영화 속 유다(황추생)에게 말하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든다. 그렇게 긴 시간을 필요하다는 것, 즉 어떤 고리를, 어떤 업을 끊어내는 것은 매우 긴, 상상할 수조차 없는 긴 시간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자료를 찾아보니 <지장경>에서 담고 있는 가장 큰 주제는, 자업자득(自業自得), 인과법(因果法), 선업(善業), 윤회 등을 이야기하며, 하나의 실천 수행을 강조하는 것이라 한다. 즉, 지금까지 어떠한 생을 살아왔는가에 의해서 다음의 생이 결정되며, 본인이 쌓은 업은 본인이 선업을 행하는 것으로 풀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 영화가 시작과 끝이 거의 같은 동일한 구조로 되어 있는 것을 주목해 볼 수 있다. 영화의 시작에서 유다는 브라질 국경근처에서 누군가에게 끌려가고 있었다. 그 때 한 일본인 가족이 나타났고, 그 가족의 아버지가 총에 맞는 틈을 타서 도망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 아들인 소년 키린(오다기리 죠)을 만났다. 그리고 백호(白虎)가 나타났고,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이 흐르며,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마지막에서 다시 브라질 국경지역으로 이야기는 돌아왔고, 유다와 키린은 다시 백호를 보고, 유다는 키린의 손에 들린 칼을 통해서 자살하고, 다시 그 무겁고도 독특한 분위기의 음악과 함께 엔딩크레딧이 올라간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유다는 이 질긴 고리를, 질긴 업을 끊으려고 했던 것으로 볼 수도 있을 것이다. 자신이 죽어야 하는 곳에서 키린의 아버지가 죽고, 자신이 키린의 아버지가 되어 여러 악행(업)을 저지르고, 키린마저도 그 악행의 한가운데로 끌어들였지만, 결국 키린의 손에 죽는 이 아이러니를 말이다. 이 윤회를 영화는 하나의 형식으로, 그리고 몇 개의 상징으로 보여준다. 그러나 물론 아직까지 머리는 복잡하고, 많은 의문은 섞여 있다. 그것으로 이들의 업은 사라지는 것일까. 아니, 그보다도 왜 다시 이곳(브라질 국경지역)으로 돌아와야 했는가.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어디이기에 말이다.

그들이 지금까지 있던 곳은, 영화의 제목이 말하는 대로 '플라스틱 시티'이다. 그러고보면, 이 제목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 플라스틱 시티라는 곳. 플라스틱이 상징하는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가소성(可塑性)의 공간. 무엇이든 만들 수 있고, 무엇으로도 변할 수 있는 마법의 공간. 그러나 이 가소성의 공간이라는 것은, 다를 말로 하면, 거짓의 공간, 가짜의 공간이다. 플라스틱이 가지고 있는 가짜라는 본연의 속성을 굳이 말하지 않더라도, 그것은 그 플라스틱 시티 안에서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으로도 명백해진다. 유다와 키린이 벌이는 사업이란, 가짜의 물건을 파는 것이기 때문이다. 진짜와 아주 비슷한 가짜를 말이다. 더구나 키린은 영화 속에서 다시 그것을 반복하여 확인해 주기도 한다. 자신은 진짜에는 관심이 없다고 말이다. 자신이 사랑하는 것은 가짜가 진짜 돈을 벌어들이는 것이라고 말이다. 그러나..그러나 말이다. 과연 그 돈은 진짜일까. 어쩌면 그 돈 마저도 가짜인 것이 아니었을까. 왜냐하면 여기는 플라스틱 시티이기 때문이다. 모든 것이 가짜로 이루어진 곳. 진짜는 그 어디에서도 존재하지 않는 곳. 어쩌면 그곳은 지옥인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공간으로 살기 위해서 도망쳤다. 그 마법의 정글에서 결국 얽히고, 맺힌 업의 끈을 풀어내기 위해서 말이다. 그리고 그들은 그곳에서 진짜 백호를 보았고, 업을 풀어내려고 한다. 여기에서 유다는 키린에게 말한다. 너의 삶은 이제 시작이야, 너에게 시간은 많아..라고 말이다. 그러나 그 많고 많은 시간, 겁의 시간, 항하사의 시간, 무량대수의 시간이 흐른 뒤에 그 업은, 그 운명은 사라질 수 있을까. 키린의 뒷모습에서, 조용히 흐르는 강물에서, 부서지는 강렬한 파도에서 우리는 다시 엄청난 절망에 사로잡힌다. 그 강물의 흐름을 하나하나 따라간다해도, 파도의 파고를 모두 하나하나 세어 나간다 해도...이 마지막은 꽤나 강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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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7월4주)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만큼 논란의 여지가 많은 말도 드물 것이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그만큼 여러가지 힘의 파장을 가지고 있는 말도 드물 것이다. 왜냐하면 한국 사회에서 '좌파'라는 말은 지금까지 대부분 그 본래의 의미로 사용된 적이 없기 때문이다. 그 본래의 의미를 넘어서서 '좌파'라는 말은 대부분 누군가에게 어떤 낙인을 부여하기 위해 사용되어 왔다. 때때로 뒤에 '빨갱이'라는 말까지 덧붙여서 말이다. 

그래서 왠지 지금 이 영화 <바더 마인호프>의 개봉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이들은 그저 악명 높은 테러리스트에 불과한 것일까, 아니면 병든 시대를 구원하려 한 진정한 의미의 혁명가들인 것일까. 아마도 문제의 핵심은 이들 자신보다는 이들을 둘러싼 세계에 있을 것이다. 이 세계를 어떻게 바라보는가의 문제가 이들을 어떻게 규정하는가의 문제와 직접적으로 관련된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67년 6월 2일 서독. 이란의 전제군주 방문 반대집회에서 한 대학생이 경찰의 총격에 죽는 사건을 기점으로 정부의 정책과 베트남전쟁에 반대하는 혁명 단체들의 움직임이 과격해진다. 열혈청년 ‘바더’는 동료들과 함께 백화점 폭탄테러를 일으키고, 좌파 언론인 ‘마인호프’가 이들을 옹호하고 활동에 동참하게 되면서 ‘바더 마인호프’ 테러집단이 결성된다.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정부에 대항하는 게 힘들다고 판단한 이들은 테러라는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세상을 바꾸려 한다. 갈수록 대담해져가는 테러활동에 세상은 등을 돌리지만, 아이러니하게도 이들과 싸우는 연방경찰국장 호르스트는 이들을 이해하게 된다. 도대체 무엇이 그들을 역사상 가장 악명 높았던 테러리스트로 만든 걸까? (네이버 펌)  

- 예습이 필요해 -

대체로 이 영화를 보는 시각은 다음의 두 가지 지점으로 나뉘는 것 같다. 하나는 이 영화가 좌파와 우파를 넘어선 너무나도 중립적인 시선으로 이들을 바라보고 있다는 지적과 다른 하나는 이 영화 자체로는 아무 것도 설명해주지 못한다는 것, 즉 마치 이 사건을 하나의 액션 활극으로만 다루고 있다는 지적이다. 따라서 이들을 이해하기 위해서, 다음의 몇몇 책들을 대강이나마 훑어보고 이 영화를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이다. 이들을 비판하거나, 혹은 그에 동조하거나는 그 다음이다..   

 

 

 

 

 

 

  

 

아니면, 이 영화 <레전드 오브 리타> 또한 이들을 바라보는 하나의 어떤 시각을 던져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70년대 서독. 이상사회 실현을 꿈꾸는 리타는 애인인 앤디와 함께 테러운동에 참여한다. 은행강도, 폭탄테러를 감행하던 리타 일행은 앤디의 탈옥을 돕던 중 변호사를 살해하면서 쫓기는 처지가 된다. 그들은 동독의 비밀요원 에빈의 도움을 받아 파리로 피신한다. 그 가운데, 리타는 세상을 바꾸기엔 테러조차 무력하다는 것을 그리고 앤디의 사랑이 멀어진 것을 느낀다. 그러던 어느 날 리타가 쏜 총에 경찰이 희생된다. 더 이상 잃을 것도 없고 숨을 곳도 없는 리타에게 동독 측은 다른 이름과 신분으로 살아가는 길을 제안한다. (네이버 펌, 뒤에 줄거리 소개가 더 길었으나 인용자 마음대로 줄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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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 Let It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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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누구에게나 내려요. 맞잡을 손이 있다면, 때로는 우산은 놓아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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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인 - Let It R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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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왜 제목이 <레인>인걸까. 영화 내내, 비는 커녕, 따스한 햇살만 쏟아지는구만. 남(南)프로방스(영화의 배경이 꼭 여기일 것이라고 장담할 수 없음. 남..프로방스. 그냥 어감이 좋으니까. 적어도 북 프로방스보단.)의 따스한 햇살이 말이다. 그러다가 영화가 한참을 지나고 어느 순간 비가 온다. 그리고 그 후에 이어지는 몇몇 장면들. 아, 이제서야 조금은 이해할 수 있을 것도 같다. 그리고 영화가 거의 끝나갈 무렵, 두 번째 비가 온다. 그리고 미무나의 품에 안겨 있는 플로랑스의 모습이 스치고 지나간 후에서야, 제목이 '레인'인 것이 맞겠다는 생각이 든다. 비는 그렇게 누구에게나 오는 것이니까. 누구에게나.

영화 내내 비는 딱 두 번 온다. 첫 번째 오는 비는, 사람들의 감정을, 혹은 대립을 극단으로 끌어올리는 비다. 높은 산에 올라가 인터뷰를 촬영하려던 미쉘(장-피에르 바크리)과 카림(자멜 드부즈)과 아가테(아네스 자우이)는 양떼의 적절한 도움으로 인터뷰 촬영을 실패하고, 돌아가려 하지만 차는 길바닥에 뒤집어져 있고, 때마침 장대비가 쏟아지기 시작한다. 누구의 잘못이라고 보기도 어렵지만, 세 사람은 모두 화가 머리 끝까지 났고, 상대방에게 책임을 미루고, 상대방에게 마음 속에 담아놓았던 이야기들을 하고, 상대의 가장 아픈 구석을 찌른다. 두 번째 비는, 치유의 비다. 모든 것이 마무리 되고, 아네스는 이제 떠나려고 할 때 쏟아지는 그 비. 그 비가 치유의 비가 될 수 있는 이유는, 첫 번째 비와 두 번째 비가 쏟아지는 사이에 지나갔던 몇몇 마법과 같은 장면들에 의해서이다. 아가테가 자신의 어린시절 앨범들을 살펴보다가, 대부분의 사진이 자신을 찍은 것임을, 동생 플로랑스를 찍은 사진은 거의 몇 장 없음을 발견하고, 뒤늦게야 동생을, 그리고 동생을 대했던 자신을 돌아보는 장면, 혹은 카림이 유아세례식에 갔다가, 촬영 알바를 하고 있는 미쉘을 만나는 장면, 그리고 미쉘도 카림도 잘 알고 있으나, 미쉘이 부탁을 받아 어쩔 수 없이 왔다고 거짓말을 하고, 카림도 이해해주는 척 하는 장면들 같은 것. 

아네스 자우이의 이 영화는, 왠지 여러 캐릭터의 특징적인 부분들을 유달리 부각하고, 서로간의 대립항을 두드러지게 보이게 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는 것 같다. 어떤 면에서는 애 같고, 또 어떤 부분에서는 매우 고압적인 플로랑스의 남편, 마음 속에는 어떤 열정을 품고 있으나, 한편으로는 언니에 대한 일종의 콤플렉스를 안고 있는 플로랑스, 겉으로는 유능하고 차가워보이나, 사실 주위 사람들의 관계를 약간은 버거워하는 페미니스트 아가테, 능력 있는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알려져 있으나, 사실 알고 보면 허점이 많은 미쉘, 이민자 출신이라는 콤플렉스를 극복하려고 노력하나, 여전히 어떤 의미에서는 그것에 사로잡혀 있는 카림. 그리고 이들 간의 성(性)적, 사회적, 경제적, 정치적, 성격적인 대립항들, 플로랑스와 남편간, 혹은 플로랑스와 아가테 간에, 카림과 미쉘 간에, 그리고 카림과 (플로랑스+아가테)와의 대립, 아가테와 그녀의 남자친구와의 대립 등등. 그리고 이것만으로도 모자란지 감독은 여기에 복잡한 사랑 관계를 첨부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여러 특징적인 캐릭터들을 여러가지 복잡한 관계망으로 연결시키고, 거기에서 어떤 관계의 새로운 내포와 외연들을 발견하고, 유머 속에서 은근히 정곡을 찌르려는 영화인 것처럼 보인다. 한편으로는 (영화를 보지는 않았지만) 감독의 전작 <타인의 취향>이라는 제목을 연상시킨다.

그러나, 그러나 말이다. 곧 아까 말한 것처럼 비가 내리기 시작하고,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왠지 그것이 아닌 것처럼 느껴진다. 그치지 않을 것처럼 보였던 비가 금방 그치고, 그들이 마주하게 되는 것은 서로의 약한 모습들이다. 이민자 출신으로 뿌리깊은 차별 속에서, 카림의 날선 말들이, 사실은 약한 부분을 감추려는 일종의 방패에 불과했다는 것. 혹은 농부의 약간은 집요한 시선 속에서 얇은 스카프 속으로 애써 밀어넣는 아가테의 약한 하얀 팔꿈치. 프로듀서와 제대로 계약도 안된 상태에서 알바로 연명하는, 그나마도 제대로 못해 아이의 이마를 맞힌 미쉘의 카메라 마이크. 이런 것들을 서로가 조용히 바라보면서 모두들 깨닫는 것이다. 저 사람도, 별로 다를 것이 없구나. 그저 우리는 그 형태만 다를 뿐이지, 비슷비슷한 효과를 가진 콤플렉스로 둘러쌓인 약한 인간들일 뿐이구나 하는 것 말이다. 그래서 오는 비는 말하고 있다. 나는 누구한테나 내려요. 페미니스트라고, 혹은 이민자 출신이 아니라고, 남자라고, 내가 피해가지는 않는답니다. 그저 누구한테나, 골고루, 쏟아질 뿐이랍니다, 라는 것.

그리고 그 순간 영화는 우리에게 말할 수 없는 안도를 준다. 모두가 다를 바는 그다지 없다는 것, 때로는 많은 일들이 꼬이고, 또 어떤 일들은 우리에게 상처를 주기도 하겠지만, 모두들 비슷하게 누군가에 대한 악담을 늘어놓거나, 비슷하게 서로를 미워하고, 비슷하게 서로에게 짜증을 내고, 비슷하게 서로를 몰래 좋아하기도 하면서 살고 있다는 것, 당신만이 그렇게 유별나게 망가지거나, 이상한 것이 아니라는 것. 어떤 의미에서는 이것은 치유의 코미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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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품격 프랑스 코미디'라는 말이 있었던 것 같은데, 글쎄. 물론 어떤 의미에서는 '키에르케고르' 운운하는 농담이 나오는 것으로 보아서는 맞을 수도 있겠지만, 동의하기는 힘들다. 이 영화의 웃음이 빵빵 터지는 곳은 그보다는 훨씬 '낮은' 지점에 있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아네스가 인터뷰에서 양치기 운운하자 뒤의 양떼들이 '메에~~~'하며 화답을 해주는 장면 같은 것들 말이다. 물론 고품격의 의미를 어떻게 해석하느냐에 따라 논란의 여지는 있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이 영화가 사실 빛나는 지점은 그런 '고품격' 프랑스 유머들보다는, 아름다운 프랑스의 풍광 속에서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마법같은 장면들에 있다. 그런 장면들의 일부는 앞에서도 짧게 언급했으므로 여기서 또 중언부언 늘어놓는 것은 바보같은 일이 되겠지만, 다음의 한 장면만은 상당히 인상적이었으므로 언급해두고자 한다. 영화의 마지막, 쏟아지는 비 속에서 만난 남자와 여자. 그들은 손을 맞잡고, 곧 여자는 들고 있던 우산을 머리 위로 날려버린다. 비는, 누구에게나 가릴 것 없이 쏟아지지만, 가끔은 우산이 필요없을 때도 있어요. 어딘가에 맞잡을 누군가의 손이 있다면, 우산 따위는 놓아버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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걸어도 걸어도 - Still Wal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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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족에 던지는 보통의 시선, 그래서 특별한 (가족이라는) 끝나지 않는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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