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우트 - Doub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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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난 생각이 많은 편이다. 생각이 많다는 것은 어떻게 보면 의심이 많다는 것이다. 생각이 많은 것과 의심이 많은 것은 다른 문제가 아니냐고? 글쎄, 어쩌면 생각과 의심이란 것은 거의 동의어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예를 들어 데카르트의 유명한 명제 "나는 생각한다, 고로 존재한다"는 말에서 '생각한다'는 것은 '의심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의심한다고 해도, '의심을 하고 있는 내 존재'만큼은 의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즉 데카르트의 사상(생각)의 출발은 '의심하는 나를 의심하는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그의 생각의 출발을 의심에서 시작한 것처럼, 이 '의심'이라는 것은 실로 오래된 듯 하다. 그 기원을 찾기 어려운 인류의 오래된 저작인 <성경>에도 '믿음'의 반대로서 '의심'이라는 것은 끊임없이 거론된다. 믿음을 보여주는 자, 그 반대편에 의심하는 자들이 있다. 이들은 하나님이 가까이에서 그의 말씀을 들려주어도, 그의 존재를, 그의 말을 의심한다. 예를 들어 최초의 인류인 아담과 이브가 그렇지 않은가. 그들이 선악과를 따먹지 말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의심하지 않았다면 어땠을까. 아니, 나는 종교적 믿음의 문제를 말하고 싶은 것이 아니다. 단지 이 의심이라는 것이 얼마나 오래된 것인지, 어쩌면 인간이 존재하면서 동시에 생겨난 것이 의심이 아닌지...의심하는 중이다.

뭐 아무튼 쓸데없이 길어졌는데,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나는 의심이 많다'라는 것이다. 그래서 이런 영화를 보면, 내내 머리가 아프다. 내가 말하는 '이런 영화'라는 것은 대체로 이런 것이다. 누구에게도 의지할 수 없는 영화. 이와 반대로, 어떤 영화들은 영화보기가 안락하다. 나의 감정을 대입시킬 수 있는 주인공이 존재하는 영화. 대체로 착한 누군가가 존재하는 영화. 이런 영화들을 보면, 나는 그저 그 주인공에게 내 감정을 그대로 의지하면 된다. 뚜렷한 선과 악 속에서 악을 물리치고 승리하는 선과 함께, 나도 그 승리에 밥숟가락 하나 올리고 같이 가는 것이다. 물론 가끔 안락함이 지나쳐 꿈의 세계로 인도하기도 하지만.

그러나 위에도 말했듯이 이 영화에는 의지할 수 있는 누군가가 없다. 우리가 알고 싶어하는 진실은, 그래서 우리가 그토록 간명하게 원하는 선과 악은 끝내 주어지지 않는다. 플린 신부(필립 세이무어 호프만)는 정말 그 소년에게 '어떤 행위'를 했을까. 그 이전에 플린 신부가 있던 성당에서는 무슨 일이 있던 것일까. 알로이시스 수녀(메릴 스트립)가 생각한 것은 단지 오해에 불과했을까. 그녀는 왜 플린 신부에게 계속 의심을 품고 있는 것일까[각주:1]. 알로이시스 수녀가 말하는 '자신이 저질렀던 부도덕한 일'이라는 것은 어떤 일일까. 그녀는 결혼을 했었던 적이 있는데, 왜 수녀가 되었을까[각주:2]. 과연 그 소년은 정말 동성애적 성향이 있을까....단지 의심만 끊임없이 늘어날 뿐이다. 우리의 이 의심을 끊어줄 '확실한 누군가'는 존재하지 않는다. 우리는 , 아니 천성적으로 의심이 많은 나는, 단지 의심할 뿐이다. 영화 내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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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쩌면, 이 영화의 목적은 '우리를 의심하게 만드는 것'에 있을지도 모른다. 알로이시스 수녀와 플린 신부가 충돌하는 것은 그들이 '의심'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다. 그들이 충돌하는 지점은 그들의 '확신'에 있다.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가 어떤 아동들에게 '어떤 행위'를 저질렀을 것이라고 확신한다. 반면, 플린 신부는 그의 행동은 자비와 사랑에서 나온 것이며,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을 모함하고 있다고 확신한다. 이 두 개의 확신은 영화 내내 충돌하며, 긴장을 만들어 낸다.

의심의 최종의 단계가 확신이다. 인간이 의심하다가 어떤 근거를 확보하게 되면, 그 의심은 확신으로 돌아선다. 그러나 이 확신이라는 것이 반드시 근거를 동반하는 것인가 라고 하면 꼭 그렇지만은 않은 듯 하다. 알로이시스 수녀도 어떤 결정적 근거 없이 플린 신부를 몰아붙일 뿐이다. 제시되는 증거들은 빈약하고, 어느 한 구석이 무너져 있다[각주:3]. 그래서 그녀의 이 확신은 영화 내내 불어오는 세찬 바람과 맞선다. 대부분의 우리는 그 세찬 바람을 맞으며 흔들리다가, 때로는 부러지기도 하지만, 그녀는 흔들리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에게는 의심이 필요하다. 과연 나의 확신은 어떤 타당한 근거가 있는 것인가. 과연 우리들이 그렇게 믿을 만한 무엇인가가 확실히 있는 것인가. 이 '건전한 의심[각주:4]'은 해도해도 모자르다. 우리는 계속 물어야 한다. 의심하는 나 자신에 이르를 때까지.

그것을 가장 잘 보여주는 마지막이 이 영화에는 있다. 바로 알로이시스 수녀가 자신의 의심이 맞는 것인지 자신을 의심한다며 갑자기 울음을 터뜨리는 이 마지막 장면. 이 마지막 장면에서 그녀는 확신에서 의심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바람이 멎었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를 생각하게 한다. 여기에서 알로이시스 수녀는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이기 때문이다. 미사 시간에 조는 학생에게 일어나라고 소리치고, 식사 시간에 덜익은 고기를 내뱉는 제임스 수녀를 말없이 쳐다보던, 마치 인간의 감정이 거세된 하나의 기계처럼 보이던 그녀가 처음으로 인간답게 보였다. 이는 명백한 사실 하나를 떠오르게 한다. 의심이야말로 인간이 가진 보편적인 것이란 점. 의심하는 것이야 말로 인간다운 것이라는 점.

그랬다. 기계는 YES와 NO의 분기에서 어느 길이 더 빠를지 의심하지 않는다. 내비게이션은 남부순환도로를 탈지, 올림픽대로를 탈지 고민하지 않는다. 그저 계산된 더 빠른 길로 갈 뿐이다. 만약 그 순간에 의심하는 내비게이션이 있다면, 그것은 이미 기계가 아닌 것이다. 따라서 어느 길로 갈지 고민하는 내비게이션을 본다면, 그 순간 우리는 진정으로 무서워해야 할 것이다. 따라서 의심하라, 의심하는 나 자신까지 의심하라. 인간이고 싶다면.

 

 


1. 그녀가 플린 신부를 의심하는 것은 제임스 수녀(에이미 아담스)가 사건을 이야기하기 훨씬 전부터다. 플린 신부가 다른 소년의 팔을 잡아당기는 것을 본 이후부터일까. 아마도 그것은 아닌 듯 하다. 그보다 훨씬 전부터 알로이시스 수녀는 플린 신부에게 어떤 의심을 가지고 있었던 듯 하다. 그 기원은 무엇일까.

2. 그런데, 결혼했던 사람도 수녀가 될 수 있나요? 잘 몰라서...

3. 그래서 제임스 수녀는 단지 의심에 머물러 있다. 그녀는 알로이시스 수녀처럼 확신하지 못한다. 단지 의심할 뿐이다.

4. <씨네 21> 694호 '전영객잔'에서 정한석 기자님은 이를 '회의(懷疑)'라고 말했다. 아마도 '회의'라고 말하는 것이 조금 더 적확한 표현인 듯 하다. 가끔 내가 하고 싶은 말을 잘 정리해 놓은 이런 글을 보면 맥이 풀린다(방금 전에 봤다). 그래도 나는 쓰련다. 에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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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볼루셔너리 로드 - Revolutionary Roa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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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나 오래전 얘기다. 대학 2학년 때의 어느 술자리. 갑자기 한 친구가 내게 말했다. 너는 말이야. 어딘가모르게 부자연스러워. 매사 연기를 하고 있는 것 같다고 할까. <레볼루셔너리 로드>에서 프랭크(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가 그러는 것처럼, 정곡을 찔린 사람은 화를 내기 마련이다. 나는 아마도, 네가 나에 대해서 뭘 안다고 그래, 너나 잘 하시지 같은 뻔한 대사를 내뱉었던 것 같다. 20살의 인간들이란, 돌려서 말하는 법을 잘 모른다. 더구나 술에 취한 상태였으니, 그저 내뱉고 지르고 만다. 그리고 그 날의 술자리는 어그러졌고, 나와 그 친구의 관계는 그날 이후로 조금 서먹해졌다.

그리고 나는 조금 놀랐다. 그 친구가 그렇게 말했다는 것에 대해서. 글쎄, 내가 놀란 부분은 무엇이었을까. 그 친구가 나의 진심을 몰라줬기 때문에? 그 친구가 나를 오해했기 때문에? 그런 것 보다도, 나의 놀라움은 이것에 가까웠던 것 같다. 내 연기가 그렇게나 어설프다니. 그다지 친하지 않았던 저 친구도 이 연기의 어설픔을 알아차렸을 정도였으니, 가까운 데 있는 사람들은 어땠을까. 돌이켜 생각해보면 그랬었던 것 같다. 나는 누구와도 불편한 관계로 지내고 싶지 않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소리를 듣고 싶었으나 그 방법을 잘 몰랐다. 단지 내가 할 수 있었던 것은 내가 아는 좋은 사람들의 행동을 모방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위에서도 말했지만, 20살의 인간이다. 실체가 없는 모방은 한계가 있고, 그 모방마저도 어설픈 모방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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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자기 이 꽤나 오래전 일이 생각난 것은 전적으로 이 영화 때문이다. <레볼루셔너리 로드>. 처음부터 나는 프랭크와 에이프릴(케이트 윈슬렛), 이 두 사람이 뭔가 '연극적인 연기'를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예를 들어, 두 남녀가 차를 옆에 두고 다투는 장면에서도 합(合)이 딱딱 맞는다고나 할까. 그 적절한 대사들과 과장된 손동작과 고함들. 그리고 이 연극적인 연기는 그 이후에도 계속 반복된다. 그러나 이 연기들은 그들에게서만 보이는 것은 아니다. 프랭크와 에이프릴 부부의 옆집 부부 혹은, 이들에게 집을 소개한 여자도 이 예의 연극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이들의 말투나 행동은 어딘지모르게 부자연스럽다. 이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은 무슨 이유때문인가[각주:1].

이의 해답은 곧 밝혀진다. 이들이 사는 세상은 하나의 매트릭스(Matrix)였던 것. 에이프릴이 이 '레볼루셔너리 로드'가 하나의 매트릭스임을 쓰레기를 버리러 나와 갑자기 깨달았을 때,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설명이 된다. 즉 이들의 부자연스러움은 정교하지 않은 소스코드였던 것. 혹은 언캐니 밸리(uncanny valley)와 같은 것[각주:2]. 물론 나는 에이프릴이 진짜 매트릭스를 발견했다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단지 그녀가 이 세계를 매트릭스와 비슷한 어떤 것, 즉 실체가 없고, 가짜만 존재하는 세계, 위선과 위악과 공(空)만으로 이루어진 것임을 깨달았다는 것이다[각주:3]. 그리고 에이프릴은 이 매트릭스에서 탈출하고자 한다.

그러나 에이프릴의 말에 진정으로 동의하는 사람은 없다. 일견 에이프릴의 말에 동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프랭크도 이미 매트릭스에 길들여져 있는 것. 프랭크가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몰랐던 것 같지는 않다. 가벼운 마음에 장난처럼 내뱉었던 기획안이 사장에게 엄청난 것으로 받아들여지는 기이한 세계. 그것을 가까이에서 보고도 이것이 매트릭스임을 깨닫지 못한다는 것은 이상하다. 단지 그는 그 매트릭스를 선택한 것 뿐이었다. 영화 <매트릭스>에서 네오와 무리들을 배신한 남자가 스미스 요원을 만나 스테이크를 먹으면서 내뱉는 대사처럼. "나는 이게 가짜임을 잘 알고 있지. 그러나 맛있단 말이야. 너무나도." 에이프릴을 유일하게 이해하는 사람은 집을 소개한 여자가 데려온 '미친 남자' 뿐이다. 어찌보면 역설적이지만, 어찌보면 당연하지 않은가. 예를 들어 내가 거리로 나가 '이 세상은 매트릭스, 가짜로 만들어진 세계'라고 주위 사람들에게 말한다면 어떨까. 대부분은 피할 것이고, 친절한 몇몇은 경찰서로 전화를 걸어줄 것이다. "여기 미친 사람 있어요!"

그래서 이 마지막은 숨이 막히게 한다. 에이프릴의 이 선택이. 매트릭스에 길들여지지 못한 그녀의 선택이[각주:4]. 그러나 이 선택만 있었을까. 매트릭스를 사는 우리들에게는 죽거나, 미치거나, 길들여지거나의 답지만 있는 것일까? 반드시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예를 들어 보청기를 끄는 것도 한 방법이 될 수 있다. 듣고 싶은 것, 보고 싶은 것만 적당히 골라서 보고 듣는 것. 물론 나이가 들고 보청기를 낀 연후에만 가능한 것이겠지만.

그전까지는? 그저 계속 어설픈 연기를 선보이는 것 밖에. 완벽한 연기보다는 어설픈 연기가 낫다고 생각하면서. 물론 완벽한 연기를 할 능력도 안되지만.

 

p.s. 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와 케이트 윈슬렛의 두 번째 만남. 이 둘이 처음에는 잘 안 어울린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이 둘은 세트로 있는 것이 나아 보인다. 디카프리오의 불안한 에너지를 잡아주는 케이트 윈슬렛의 묵직한 덩치. 뭐 아무튼 이제는 소설 <레볼루셔너리 로드>를 읽어야 할 때.




1. 그러고보면 이 영화의 배우들은 고난도의 연기를 선보이고 있었다. 자연스러우면서도 미묘한 부자연스러움을 보여주는 것.

2. "나는 로봇이 점점 사람이 가까워질수록 친밀도가 증가하다가 어떤 계곡에 도달하는 것을 관찰했다. 나는 이런 관계를 '섬뜩함의 계곡'이라 부른다." 계곡의 발견자는 일본의 로봇공학자 마사히로 모리(政弘森). 처음에는 로봇의 인간유사성(human likeness)이 친밀도를 증가시킨다. 하지만 어느 정도를 넘어서면 그것이 외려 혐오감을 준다. 그러다가 인간과 거의 구별할 수 없을 정도로 똑같아지면, 친밀도가 회복되어 정상에 도달한다. - 진중권, <진중권의 Imagine>에서

3. 아마도 그녀는 이를 깨닫는 감각이 다른 이들보다 조금 더 발달했을 것이다. 그러고보면 극 중에서 연극배우로 나오는 그녀의 연기가 형편 없음이 이해가 된다. 부조리극이나 일부의 실험극을 논외로 하고 본다면 모든 연극에서 최고의 연기는 만들어진 어떤 것이 아니라, 관객에게 그것이 '실제 감정과 거의 같은 것'이라고 믿게끔 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녀는 자꾸만 이것이 하나의 연극임을, 이것이 거짓 세계임을 깨닫고 있는 것. 본인이 이를 거짓 세계라고 생각하는데, 소위 말하는 '진실된 연기'가 나올 턱이 없지 않는가.

4. 이 선택은 아래의 질문에 조그만 암시를 준다. 프랭크와 에이프릴에게는 두 명의 자녀가 있음에도, 그들은 왜 거의 나오지 않은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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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03-04 17: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초반에 에이프릴이 연극연기를 보고 관객들이 말하길 참 연기 못하다고..
그녀는 삶에서도 연기를 계속해야하는 걸 견디지 못했어요.
매트릭스로 푼 님의 리뷰, 잘 읽었습니다.
공감되는 부분이 많아요. 첫인사 드려요, 맥거핀님^^

맥거핀 2009-03-05 00:41   좋아요 0 | URL
아..네 반갑습니다. 혜경님.^^
안그래도 혜경님이 이 영화에 대해 쓰신 글도 봤는데, 저도 그 글에 여러가지 공감했습니다.
아무튼 이 영화는 여러가지로 마음을 건드리는 영화예요.
요즘의 마음이 에이프릴의 마음과 비슷해서 그런지도 모르지만요.
 
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 -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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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포일러)



시계는 거꾸로 돌아간다. 이 시계는 전쟁에 나가서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을 담아 만들어졌다.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시간을 거꾸로 돌려서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 있다면, 그것이 가능하다면. 그리고 그 해에 벤자민 버튼(브래드 피트)은 태어났다. 죽을 날을 앞둔 노인의 몸을 가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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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벤자민 버튼의 시간은 거꾸로 간다>는 이런 기이한 설정으로부터 출발한다. 그러나 이 제목은 조금 이상해보인다.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이 영화의 원제는 'The Curious Case of Benjamin Button'. 직역하자면, '벤자민 버튼의 신기한(기이한) 사례' 정도 될 것이다. 아마도 수입하는 측에서는 벤자민 버튼의 '육체'가 점점 젊어지는 것을 상징적으로 표현하고 싶어서였겠지만, 이 제목은 자꾸만 무엇인가를 오해하게 만든다. 그래서 다시 질문을 던져본다. 정말 과연 시간은 거꾸로 가고 있는 것일까.

내가 생각하는 거꾸로 간다는 것은 이런 것이다. 죽은 아들이 다시 집으로 돌아오기를 바라는 시계공의 소망처럼 죽은 자가 살아서 돌아오는 것. 오늘의 나는 어제 알았던 무엇인가를 잃어버린 내가 되어 어제의 인생을 사는 것. 즉 육체적으로만 젊어지는 것이 아니라, 정신을 포함한 내 주위의 모든 것이 어제로 돌아가는 것. 그러나 벤자민은 그렇지 않다. 그는 다만 육체적으로 '젊어질' 뿐이다. 그의 정신과 삶의 진행은 보통 사람과 동일하다. 아무 것도 모르던 '아이'였던 벤자민은 조금씩 집 바깥에 있는 무엇인가를 알게 되고, 집을 떠나 세계를 알게 되고, 주위의 사람들이 죽는 것을 보게 되고, 다시 집으로 돌아와 부모의 죽음을 알게 되고, 결혼하고, 아이를 낳고... 많은 보통의 사람들이 사는 삶도 약간은 다르지만, 대부분은 비슷한 삶을 살게 된다. 즉 보통 사람들에게 시간이 직선으로 흐르고 있다면,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직선으로 흐르고 있는 것이다.

아니 나는 수입사의 한글 제목에 문제제기를 하고 싶은 것은 아니다. 말장난을 하고 싶은 것도 아니다. 단지, 말하고 싶은 것은 내게는 이 벤자민 버튼은 하나의 거대한 맥거핀처럼 보인다는 것이다. 보통 사람에게 기이하게 보이는 이 벤자민 버튼도 결국은 태어나고, 삶을 살고, 죽는다는 것. 그가 육체적으로 다르다고 해서 달라지는 것은 크게 없다는 것이다. 어쩌면 이는 시계공의 질문에 대한 신의 답인지도 모른다. '시간을 거꾸로 돌릴 수는 없나요?' '죽은 자가 살아돌아올 수는 없나요?' 라는 질문을 시계공이 자신이 만든 시계를 통해서 신에게 던졌을 때, 신은 벤자민을 태어나게 하는 것으로 답했던 것이다. '이 기이하게 보이는 벤자민도 남들과 같단다. 태어나고, 배우고, 사랑하고, 주위 사람을 잃고, 죽는단다.'라고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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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보았을 때 아마도 이 영화는 크게 두 가지를 말하고자 하는 것 같다. 물론 그 두 가지는 각각 분리될 수 없는 것이며, 연결될 때에만 가치가 있는 것이기는 하지만.

하나는 '결국에는'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 말은 그에게 세상을 가르쳐 준 선장 마이크가 죽으면서 하는 말이지만, 이 말은 그 후에도 여러 번 반복된다. 벌어놓은 많은 돈으로 편하게 지낼 수 있는 이 이승을 떠나고 싶지 않은 벤자민의 아버지. 그러나 그도 최후에는 받아들여야만 하는 것이다. 죽음을 피할 수는 없다는 것을. 신은 시계공에게 했던 답을 선장에게도, 그리고 벤자민의 친부에게도 들려주고 있다. 이는 한편으로 말하자면, 이 신 앞에서, 신의 세계 앞에서 인간이란 얼마나 나약한 존재인가를 말해주고 있다고도 할 수 있다. 이를 잘 말해주는 에피소드가 영화 중간에 제시된다. 데이지(케이트 블란쳇)의 교통사고 장면. 감독은 이 교통사고가 얼마나 많은 우연이 결합되어 이루어진 것인가를 자세한 장면으로 제시한다. 벤자민은, 그리고 우리는 가정을 해볼 수는 있다. '...했었더라면' 하고 말이다. 그러나 그 수많은 우연의 결합으로 사고는 일어났다. 우리는 어떠한 일이 우리의 책임이 아니었다는 것을 이렇게 말한다. 우연이었어. 우연이었다는 것을 다른 말로 하면,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다는 말이다.

또다른 장면도 있다. 지금 데이지가 누워서 딸에게 벤자민의 일기를 읽어달라고 하는 이 병원. 이 병원에는 거대한 폭풍우가 몰아닥치고 있다. 그러나 그 폭풍우 앞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것은 그다지 많지 않다. 다른 곳으로 피하거나, 그저 조용히 지나가기를 기다릴 뿐. 죽음이든, 또다른 어떤 것이든 인간이 맞설 수 없는 것이 있다. 그 맞설 수 없는 것에 맞닥뜨릴 때는 방법은 없다. 그저 '받아들일 뿐'. 그런 면에서 이 영화에서 조용히 '받아들이는' 캐릭터인 벤자민의 양모 '퀴니'의 존재는 인상적이다. 그녀는 벤자민 같은 '괴물'이 태어난 것도 모두 신의 뜻이라 생각하고, 그저 그를 잘 키울 뿐이다.

또다른 하나는, 따라서 결국 모든 인간은 단 한 번의 인생을 산다는 것이다. 아프리카에서 잡혀 와 남들에게 구경거리가 되는 삶을 산 피그미족 청년도, 버튼 공장을 운영하며 부유한 삶을 산 실업가도, 예인선 선장으로 여러 곳을 구경하고, 2차대전에도 참전했던 용감한 선장도, 볼쇼이 발레단과 처음으로 협연한 발레리나였던 호기심많은 여인도, 누구보다도 강단 있는 여성이었으나, 또한 그저 '엄마'였던 어느 여인도, 그리고 벤자민도.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죽음을 맞게 되리라는 것. 삶의 중간에는 여러 분기가 있을지언정, 그 분기를 되돌아 거슬러 올라갈 수는 없다는 것. 하나의 인생을 다시 살 수 없다는 것. 누구나, 결국 벤자민에게도 시간은 거슬러 오를 수 없는 일직선이라는 것. 즉, 시간은 거꾸로 흐르지 않는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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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든(대다수의) 인간은 처음에는 침대에서 일어나지도 못하다가, 네 발로 기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바라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며 죽음을 맞이한다. 이는 역설적이게도 벤자민에게도 마찬가지이다. 그 역시 침대에 누워 있다가, 양 손에 지팡이를 끼고 네 발로 걷다가, 두 발로 서서 세상을 살펴보다가, 다시 걸을 수 없게 되어 죽음을 맞이했다. 벤자민이 죽음을 맞이하는 이 마지막 장면은 여러가지로 '살아간다는 것'에 대한 생각을 하게 만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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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삶의 대칭성(아침부터 엉뚱한 소리)
    from 삶의 환희 그리고 열정 2009-03-04 04:37 
    늙은 아이로 태어나 어린 아기로 삶을 마무리한다. 얼마전 이 영화를 보는네네 무엇인가 머리속을 톡톡 건드렸다. 남들과 다른 벤자민은 어려서는 타인에게 연륜을 존중받았고, 나이 들어서는 귀여운 아이로 대해졌을 것이다. 영화속에 벤자민은 사랑도하고 여행도 하고 전쟁도 겪으며 그렇게 살았지만 그 속에 숨어있는 자신의 삶에 대한 "거짓"으로 그리고 정체성에 대한 의문으로 평생을 살아갔을 것이다. 작은 노인으로 태어나
 
 
 
중경 - Chongqing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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녀석은 힘들다 했다. 회사는 경제불안과 환율상승과 지도력부재로 이미 어려움에 빠진 상태였고, 더구나 그 녀석은 회사에 다소간의 빚도 들어가 있었다. 회사는 미끄러지는 중이었고, 그 녀석 역시 그 미끄럼틀에 올라탄 채였다. 그걸 알아차린 나는 이야기를 다른 쪽으로 돌렸다. 이야기는 순식간에 수능날이라는 데서 97년 수능이야기로 옮아갔고, 덕분에 녀석과 나는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다.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좋았다는 것에서부터, 그날 날씨가 상당히 추웠다는 것까지. 그리고,지금은 어딘가에서 아이를 키우고 있을 시끄러운 여학생에서부터,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결혼해버린 동기의 이야기까지, 몰라도 좋을, 그러나 알았다고 해서 크게 달라지는 것 없는 그런 이야기들을. 

나는 녀석에게 필요 이상의 이야기들을 들은 값으로, 그러나 더욱 정확히 말하자면, 필요 이상의 이야기라고 생각했던 값으로 술값을 치렀다. 그리고 우리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아니, 다시 정확히 말하자면 '나는' 껄끄러운 친구를 불렀다. 나는 녀석이 껄끄러워 하는 것을 알고 있었다. 나는 어느 정도는 즐기고 있었다. 그러나 나의 즐김의 한계는 딱 그 친구에게 전화를 하는 것까지 였다. 그친구가 진짜로 오겠다고 했을 때, 나는 보리의 쓴 맛을 다시 되새기고 있었다. 나는 심지어 내가 그 녀석보다 수능 점수가 8.2점이 앞섰다는 것까지 잊어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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똑같은 이야기는 반복된다. <중경>의 쑤이는 성인용품점에 들어가고, <이리>의 태웅 역시 성인용품점에 들어간다. 몇 십년만에 옛 친구를 만난 할아버지의 옆에서 신기하게 그들을 바라보는 진서, 그 옆으로 할머니들이 '이별의 부산정거장'을 부르며 지나가고, 벤치에서 자신이 따귀를 때렸던 창녀에게 지친 손을 내밀던 쑤이 옆으로는, 마을 주민들이 '인터내셔널 가'를 부르며 지나간다. 만국의 노동자여, 단결하라! 

이 외에도 많은 부분에서 동일한 장면들이, 동일한 느낌으로, 동일한 카메라 워킹으로 반복된다. 단지 이 두 이야기는, 즉 <중경>과 <이리>는 같은 주제를 같은 느낌으로 반복해서 찍은 것에 불과하단 말인가. 결국은 같은 이야기의 또다른 변주란 말인가.

물론 다른 부분은 있다. 동일한 듯 하지만, 두 이야기는 하나의 대구를 이루고 있다. 예를 들어서 <중경>의 쑤이는 점점 자신의 몸을 일부러 더럽히는 쪽을, 자신의 몸을 일부러 다른 이에게 내주는 쪽을 택하지만, 그 몸은 계속 다른 이에게 거부 당한다. 예를 들어, 한국인 유학생 김광철은 그녀에게 자신의 몸을 확인하게 하며, 노숙자는 그녀가 겁탈하려고 할 때, 그녀의 뺨을 세차게 때린다. 그리고, 경관 역시 그녀의 몸을 거부하고, 커다란 Doll을 껴안는다. 그리고 그녀는 그 대신, 즉 그의 성기 대신에, 그의 성기를 닯은 물건인 총기를 소유한다.  

반대로 <이리>의 진서는 대신에 자신의 몸을 지키려고 하나, 그 몸은 계속 유린 당한다. 이리역 폭발사고로, 모든 것을 잃어버린 진서, 그녀에게 단 하나 정상으로 남아 있는 몸은, 바로 그 정상으로 남아 있다는 이유 때문에 약탈의 대상이 되는 것이다.

어쩌면, 이것은 장률 감독의 다른 영화의 변주와 마찬가지로, 공간의 이야기를 커다랗게 확장한 것인지도 모른다. 그 제목 <이리>, 그리고 <중경>이 상징하는 것처럼, <이리>의 속성, 그리고 <중경>의 속성을 그냥 그 도시에 살고 있는 개인들에게 커다랗게 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익히 잘 알고 있겠지만, '이리'는 1977년 폭발사건 이후로 폭발 이후의 어떤 것, 폭발 이후의 허무함과 슬픔과 잿더미를 상징하는 어떤 것으로, 말할 수 있으며, '중경'은 폭발 직전의 어떤 도시, 그리고 우연하게도 이 영화가 촬영된 직후, 대지진으로 알려진 도시로 상정할 수도 있다. 그리고 각각의 두 영화의 여자캐릭터, 즉 진서와 쑤이는 폭발 이후의 남겨진 후유증을 상징하는 삶과, 폭발 이전의 끈적하고 불안한 삶을 상징하는 캐릭터로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전히 질문은 남는다. 그렇다면 결국 이 영화들은 폭발 이전의 삶과 폭발 이후의 삶은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는, 캐니한 삶의 또다른 증명에 불과한 것인가.

그러나, 우리는 몇몇 부분들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리>의 태웅과 진서, 그리고 <중경>의 쑤이는 모두 죽으려고 하나, 죽지 못한다. 다시 한 번 반복해 말하지만, 그들을 둘러싸고, '이별의 부산정거장'과 '인터내셔널 가'가 흘러나온다. <이리>의 마지막 장면에서, 진서는 드디어 한국에 들어온 쑤이에게 또렷한 목소리로, 그리고 중국어로 '안녕하세요, 나는 진서입니다'라고 말한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중경에서 계속 반복되는 그 시구, 창가들을 들어보라. 결국은 세상은 슬프고, 어렵지만 그래도 나는 살아가겠다, 언캐니하게. 그거 아닌가?
......................................
 

우리는 결국 많은 이야기를 나누지 못했고, 다시 필요 이상의 몇 가지 정보를 알게 되었을 뿐이다. 나는 그 친구 역시 회사에 염증을 느끼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고, 역시 결혼하지 못한 또다른 친구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물론 중요하게 달라진 것은 없다. 나는 여전히 펀드들과 수수료와 언페어한 게임 때문에 정부를 증오할 것이고, 녀석은 여전히 끝이 보이지 않는 미끄럼틀에 올라타 있을 것이고, 친구는 내일 아침에 공항으로 마중 나오라고 했던 비상식적인 분 때문에 분노하고 있을 것이다. 그러나 캐니한 삶에 친구가 달려와 준 덕분에 한 때나마 우리는 언캐니한 이야기를 했을 뿐이고, 다시 캐니한 삶에 올라탈 동력을 얻게 된 것 뿐이다.

그리고, 나는 다시 한 번 술값을 치렀다. 경제력으로 따지면 그 친구가 치러야만 하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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렛 미 인 - Let the Right One in
영화
평점 :
상영종료


 

(늘상 그렇지만, 스포일러 있음)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 피가 모두 어디론가로 사라진 채 죽어 있는 남자는 눈이 녹아 흘러내리는 하수구 옆 도랑에 버려져 있다. 목에는 작은 이빨 자국만 남겨진 채.

이러한 이야기는 사실 이제 너무도 많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인간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뱀파이어라는 존재. 그리고 그의 천형과도 같은 운명. 그 잔인하면서도, 스산한, 그러면서도 묘한 에로티시즘을 발산하는 그런 이야기들. 그러나 이런 이야기라면 어떨까? 그 뱀파이어가 어린 소녀이고, 그 옆 집에는 세상 누구와도 쉽게 소통을 하지 못하는 아웃사이더 소년이 살고 있다면. 이런 작은 설정에서 출발한 이 영화는 때로는 예상되는 지점에서, 그리고 더 자주는 아주 뜻밖의 지점에서 보는 이들의 마음을 건드린다.



영화의 제목은 <렛미인 Let The Right One In>. 영화에서도 설명되지만, 뱀파이어는 그 곳의 누군가가 초대해 주어야지만 그곳에 들어갈 수 있다. 바로 이 제목은 그를 설명하고 있는 셈인데, 이 설정은 조금 흥미로운 부분이 있다. 이 영화는 다른 여러 뱀파이어를 다룬 문학이나 영화들에게서 많은 부분을 빚지고 있다. 즉 다른 영화의 클리셰들이 이 영화에서도 계속 반복된다는 것인데, 예를 들어 뱀파이어는 햇빛을 보면 안된다거나, 뱀파이어에게 물린 자는 뱀파이어가 된다는 설정 등이 그러한 것이다. 그러나 이렇게 초대해 주어야만 들어갈 수 있다는 설정이 다른 영화나 문학에 있었던가? 아니 그건 그렇다치고, 초대받지 않고 들어간 뱀파이어는 몸의 곳곳에서 피를 토해내게 된다라...

물론 이와 비슷한 것은 다른 이야기들에도 있을 것이다. 뱀파이어는 결국 인간이 아닌 '어떤 것'이기 때문이다. 동물일수도, 괴물일수도, 혹은 악마일수도 있다. 그러나 이 피를 토해내게 된다는 설정이 자못 의미심장한 것은, 뱀파이어는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피는 뱀파이어에게는 무엇보다도 소중한 것.

어떤 의미에서 뱀파이어의 '피'와 같은 것을 인간의 입장에서 대입해 보면 '마음'과 같은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물론 피와 달리 인간의 마음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그러나 때로 마음이 눈에 보일 때도 있다. 우리가 누군가의 마음 속으로 들어가기 위해서는 우리의 마음을 내어 놓아야 한다. 그리고 대부분의 인간들은 누군가의 마음을 갈구한다. 뱀파이어가 피를 갈구하듯이 말이다.

그리고 그렇게, 누구와도 소통하지 못하던 소년 '오스칼'은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에게 마음을 건넸고, 뱀파이어 소녀 '이엘리'는 기꺼이 자신의 피를 건넸다.


영화의 마지막, 소년과 소녀는 멀리 길을 떠난다. 해피 엔딩이라고 말해주고 싶지만, 그렇게 보기에는 너무 스산한 풍경이다. 기차 커튼은 열려진 창문으로 들어오는 바람으로 흩날리고, 기차 안에는 그들 외에는 어떤 승객도 찾아볼 수 없다. 이들은 어디로 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세상의 끝으로. 누구도 그들을 찾을 수 없는 곳으로 가고 싶은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들은 갈 수가 없다. 왜냐하면 뱀파이어는 다른 사람의 피를 먹어야만 살 수 있는 존재이기 때문이다. 다른 사람과 멀어지려고 하나, 다른 사람과 멀어져서는 살 수 없는 존재. 그것이 바로 뱀파이어의 가장 슬픈 점이다. 또 어떤 의미에서는.


그래서 그들은 검게 시작된 엔딩 크레딧이 서서히 붉은 빛으로 변해갈 때, 마지막 붉은 빛이 화면에서 사라졌을 때 즈음에는 또다른 곳에 도착해 있을 것이다. 날은 어둡고, 눈은 끊임없이 흩날리고, 새는 낮게 하늘을 선회하고, 어디선가 낯선 동물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북구의 어느 밤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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