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또 다른 길>,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1999, 면회>에 대한 약간의 스포 있음)

 

 

최근에 본 영화들에 대한 리뷰라기보다는 수다성 잡담 혹은 잡담성 수다.

 

 

 

 

 

 

 

 

 

 

 

또 다른 길, 카롤리 마크, 야노스 크산투스, 1982

 

1957, 실질적으로 소련의 지배를 받는 공산국가였던 헝가리를 배경으로 오직 자유를 꿈꿨던 한 레즈비언 기자의 이야기를 그린 카롤리 마크와 야노스 크산투스가 만든 헝가리 영화 <또 다른 길>은 두 가지의 축을 가지고 있다. 하나는 자유로운 영혼을 가진 에바와 그 에바에게 이끌린 리비아의 사랑 이야기라는 감성적인 축, 그리고 다른 하나는 각종 검열과 거짓과 프로파간다와 억압이 존재하던 당시 헝가리의 분위기와 특히 언론인들의 진실된 보도를 향한 갈망이라는 이성적인 축. 헝가리 국민들은 스탈린의 충실한 개였던 지도자 라코시를 1956년의 봉기로 끌어내고, 잠깐 '부다페스트의 봄'을 맞이하였으나, 그해 11월 소련 지도부는 부다페스트로 전차를 진격시켰고, 새로 지도자가 된 임레 너지는 소련에 반기를 든 대가로 처형당했다. 그러므로 그런 1957년의 헝가리에서 자유로운 보도를 갈망하는 레즈비언 기자인 에바는 영화 속의 표현대로 허리 위에서나 허리 아래에서나 일종의 바이러스와 같은 존재였고, 그러므로 이 영화 속에서 이런 감성과 이성의 문제는 여기자 에바의 안에서 하나로 통합된다.

 

이것을 일종의 정치적인 멜로라는 하나의 비유로서 생각해 볼 수도 있는데, 이 에바라는 자유로운 영혼의 바이러스는, 아무 것도 모른 상태에서 군인 남편과 함께 이것이 당연한 삶이라고 여기며 살아가던 리비아, 그러니까 군부를 등에 업은 독재의 억압 속에서 살아가던 일반 국민들에게 침투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에바와 함께 도피를 꿈꾸던 리비아는 결국 그 군인의 총탄을 받고 살아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가 되며, 이것은 다시 소련의 전차의 침공을 받은 헝가리의 상태를 하나의 비유로서 보여준다. 즉 헝가리의 국민들, 더 나아가 이 헝가리라는 하나의 나라는 존재하고 있으나 움직일 수 없는 상태와 마찬가지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소련의 지배를 받는 일종의 괴뢰 국가와 마찬가지였던 대외적인 상태로서도 그렇고, 대내적으로도 당시의 사람들은 겉으로는 자유롭게 존재했으나 속으로는 철저하게 자유가 억압된 상태였다. 그것을 영화 속 에바와 리비아가 취재하게 되는 협동농장의 사례에서 살펴볼 수 있는데, 자발적인 농민들의 참여로 이루어졌다고 선전된 협동 농장이 강요와 억압 속에서 만들어진 것임을 그들은 취재하면서 알게 되기 때문이다. 영화 속에서 보여지듯이, 공산주의 사회는 혁명으로 시작하였지만, 그 혁명은 구호로서만 존재하였고, 혁명의 실질적인 의미를 이야기하는 것은 사실상 금기되었다. 그러므로 그 혁명의 바이러스를 잔뜩 담고 있던 에바는 당연히 제거되어야 할 대상이었다. 공산주의 사회를 만들어냈던 많은 혁명가들이 그 공산주의 사회에 의해 제거된 것과 마찬가지로.

 

영화 속에서 두 가지의 이야기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영화 속 후배 기자들의 갈망과 상부의 억압 속에서 고뇌하는 늙은 편집장과 관련된 일화. 이 편집장은 오래전 어떤 이유로, 아마도 뭔가 정부에 밉보일만한 기사들을 썼다는 이유로 사형선고를 받은 적이 있다. 그러나 그 사형 직전에 사형선고는 취소되었고, 그 사형집행인이 지금까지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죽는 것보다는 농담이 낫잖소?,라고 말했다는 이야기. 그러니까 공산주의 사회의 어떤 비인간성, 즉 아마 혹 그대로 죽었어도 그것은 그대로 농담으로만 치부되지 않았을까,라는 질문. 다른 하나는 진실된 기사를 쓰지 말라고, 그 내용을 듣기 좋은 다른 이야기로 바꾸어 실으라고 억압하는 상부의 사람에게 그 편집장이 들려주는 이야기. 한 소년이 사소한 버릇을 고치기 위해 병원에 갔다. 의사는 최면 요법을 통해 그 소년을 치료했고, 사라지지 않을 것 같던 그 버릇은 놀랍게도 사라졌다. 그러나 몇 달 후, 그 버릇은 사라졌지만 그 소년에게는 다른 증상이 생겼다. 바로 시도때도 없이 심한 경련을 하는 증상이. 그것은 비단 1957년의 헝가리의 경우만일까. (서울아트시네마)

 

 

 

 

 

 

 

 

 

 

 

 

다이하드: 굿 데이 투 다이, 존 무어, 2013

 

쇠락해가는 시리즈를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그러나 더욱 슬픈 것은 시리즈의 마지막 작품이 전작들에게 엿을 먹이는 것을 보는 일이다. 이 마지막 작품(그렇다, 나는 이것이 마지막이리라고 확신한다. 이것이 조금 나았더라면 어땠을지 모르지만, 이 상태로는 후사는 어림도 없는 일이다)은 태어나지 말았어야 할 운명이었던 것처럼 보이는데, 강약, 중강약을 구사하던 전작들의 액션 리듬은 사라졌고(영화의 구조로서 가장 이상해보이는 점은 그나마 가장 매력적이고, 거대한 액션을 영화의 초반부에 배치해놓고, 뒤에는 심심한 잔재주들로 채운다는 부분), 매력적인 악인들은 자취를 감췄다. 아니, 알아서 자취를 감춰주신다. 존 맥클레인의 부루퉁한 유머는 약간은 살아있으나, 이제 그는 땀과 피에 절은 러닝셔츠를 입고 뛰기는 힘들어 보이고, 뜀박질은 그 대신 그의 차와 헬리콥터, 혹은 그의 아들이 대신해준다

 

가장 무엇보다도 이해할 수 없는 점은 이 영화가 존 맥클레인의 캐릭터를 제대로 파악하고 있는가 하는 점이다. 4탄에서 맥클레인은 왜 이렇게 거대한 적에 맞서는지 그냥 도망가자는 제안에 대답한다. 이거는 귀찮고, 힘들고, 한 마디로 할 거 못되는 짜증나는 일이지만, 누군가는 해야되는 거라고. 그게 바로 NYPD 존 맥클레인의 매력이었다. 아이, 정말 하기 싫어 죽겠네,가 얼굴에 가득 쓰여져 있지만(그는 항상 술이 약간 덜 깬듯한 얼굴이다), 그래도 그거 안하면 많은 사람이 죽으니까, 어떻게든 한 사람이라도 살려야 하니까 해야한다는 뭐 그런 닭살돋는 거. 그리고 그것은 한편으로 이 <다이하드> 시리즈의 매력이기도 했다. 아니 고작 너 따위가 내 적수가 되냐는 식의 악당들의 태도, 그리고 그에 맞서는 마누라에게 구박당하고, 상관에게 욕먹는 존 맥클레인, 그리고 그 옆에서 같이 뛰고, 때로는 권총 한 자루로 맞서는 다른 경찰들. (좀 다른 얘기지만, 드라마 <24>에서 가장 슬펐던 장면 중의 하나는 잭을 도와주던 스쳐 지나가던 어떤 여경찰의 죽음이었다.) 그래서 존 맥클레인은 그래도 그나마 최대한 시민의 피해를 줄이려 한다. 그것이 경찰의 임무이기 때문에. 예를 들어 존 맥클레인은 3탄에서 어쩌다가 같이 임무에 뛰어든 제우스(사무엘 잭슨)가 공중전화를 오래 쓰는 여자에게 강제로 전화를 끊게 하자, 그에게 화를 낸다. 그리고 그것이 바로 부루퉁한 뉴욕경찰 존 맥클레인의 예의있는 매력이었다.

 

그러나 우리의 맥클레인 씨, 이번에는 안면 하나 없는 러시아로 날아가고, 그 덕분에 이제 그는 뉴욕경찰이 아니라 자식새끼 건사하려 애쓰는 휴가나온 아버지가 되었다. 그리고 아들의 말마따나 잘 돌아갈 수 있는 작전을 이상하게 망가뜨리는 민폐 캐릭터로 전락한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도 달아나는 나쁜놈을 쫓기 위해 시민의 차를 빼앗으면서 그 시민에게 주먹질을 날리는 존 맥클레인을 보는 것은 슬픈 일이다. 영화 속에서 볼 만한 순간들은 존 맥클레인이 나는 단지 휴가왔을 뿐이라며 징징댈 때와 루시 맥클레인이 특별출연할 때 뿐. 나는 루시 맥클레인으로 나오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이 배우 좋아한다우.

 

아무튼 맥클레인 씨, 지금까지 수고하셨고, 이제 그만 세 가족 함께 휴가 즐기세요. (CGV 대학로)

 

 

 

 

 

 

 

 

 

 

 

 

1999, 면회, 김태곤, 2013

 

그러니까 1999년에 두 친구가 한 친구의 군대 면회를 가는 이야기다. 그러므로 그 두 가지, 1999년이라는 시간과 '면회'라는 것을 만들어내는 그 독특한 공간에 대해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아마 재수를 하고 있는 친구가 수능을 보았다는 이야기로 미루어 볼 때, 이들은 아마도 98학번 세대이고, 이때는 1999년 초인 듯하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 당시 대학에 다녔던, 혹은 대학을 준비했던 젊은이들을 생각해 볼 때, 1997년은 전년의 통칭 '연대사태'와 한총련 이적단체 규정으로 지도부 구속 및 잠적 등으로 이념이 위태로운 시기였고, 1998년은 1997년말 벌어진 소위 'IMF 사태'로 경제가 위태로운 시기였으며, 1999년은 9라는 숫자가 꽉찬, 그야말로 한 세기가 끝나는 혼돈스러운 분위기가 가득한 세기가 위태로운 시기였다. 우리는 그 이전에는 술자리에서 얼굴을 마주하고 가끔은 공동의 적에 대해서 이야기했었으나, 1998년 이후로는 모두들 1차를 '간단히' 처리한 후 컴퓨터 앞으로 자리를 옮겨 개별의 가상의 적을 맞이하였다. 모두들 2차를 가자고 할 용기는 없었고, 용기는 각자의 PC방 값과 집에 돌아갈 차비만큼만 주머니 속에 남아있었다. 김대중 정부의 출범으로 오래된 적들은 사라진 것처럼 보였고, IMF라는 경제적 적은 뉴스에만 존재할 뿐 어디에서도 그 실체가 보이지 않았으므로, 어쩔 수 없이 우리는 테란이니, 저그니 하는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

 

공간은 어떨까. 영화 속에서도 묘사되는 군인이 외박을 나와서 맞이하는 군대 주변의 공간들(위수 지역이 있으므로 먼 곳으로는 가고 싶어도 갈 수가 없으니)은 참으로 이상해 보인다. 그곳은 군대의 울타리 밖에 있는 공간이지만, 이상하게도 군대의 일부처럼 보인다. 그 곳에서는 백골부대 마크가 선명히 붙어있는 식당에서 고기를 먹을 수도 있고, '오바로크'를 칠 수도 있으며, 여전히 선임에게 조인트를 까일 수도 있다. 그러니 실질적으로 군인들이 먹여살리는 그곳은 군대가 아님을 애써 항변하고 있지만(예를 들어 '서울다방' 혹은 '부산마트'라는 그 곳의 미스테리한 명칭의 간판들을 보라), 마치 군대의 거대한 일부처럼 보이고, 때로는 강원도 전체가 군대의 거대한 주둔지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러므로 군대에 간 친구를 만나기 위해 향하는 두 (남자) 친구의 여정은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구멍으로 스스로 기어들어가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예를 들어 일부 미국영화에서 보이는 중서부의 드넓은 평원이 마치 빠져나올 수 없는 거대한 그물처럼 보일 때처럼 말이다. 하룻밤의 여정을 다루는 이 <1999, 면회>는 그러므로 빠져나올 수 없는 여정이 계속되는, 낯선 마을에서 일이 점점 꼬여가는 것처럼 보였던 <유턴>과 같은 영화처럼 이야기가 이어진다. 두 친구는 친구를 전기가 통하지 않는 철조망안에 되돌려놓고 무사히 서울로 돌아갈 수 있을까?

 

결국 세 친구는 그 곳에서 자의든 타의든 한 가지씩을 잃어버린다. 대학생 친구는 동정을 잃었고, 재수생 친구는 카메라를 잃었고, 군인 친구는 사랑을 잃었다. 그 때는 그렇게 무엇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다. 아니, 이건 허세고, 무엇인가를 잃어야 조금이라도 덜 찌질해지는 줄 알았다. 그래서 때로는 억지로 잃었고, 때로는 기꺼이 버렸다. 그리고 그대신 기꺼이 우정을 얻었다, 라고 쓰고도 싶지만, 대신 그들은 그 이후에 이상한 것들을 얻었다. 그 이상한 것들을 얻게된 2013년의 남자들은 이제 떼를 쓴다. 차라리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아 갈 수 없을까, 이 이상한 것들을 버릴테니, 제발 찌질한 자신으로 되돌려달라고 애타게 울부짖는다. 그것이 어쩌면 <건축학개론>이나 <응답하라 1997>, 혹은 <1999, 면회> 등에 남아있는 밑바닥의 정서가 아닐까. 예를 들어 실제의 적이 보이지 않으니 가상의 적을 만들어 그들과의 싸움을 했었던 찌질한 자신으로 돌아가고 싶은 욕구, 지금은 그런 찌질함마저 없어져버렸으니까, 찌질한 자는 콩알만큼이라도 염치가 있으니 찌질해지는 것이니까. 적어도 몰염치, 혹은 파렴치하지는 않으니까.

 

영화적으로 볼 때는 너무 도식적인, 있음직한 사건의 구성이라는 생각이 든다. 즉 이 영화를 리얼하다고 말할 수는 있지만, 그것이 우리의 경험에서 비추어진 리얼함인지, 혹은 들은 리얼함, 만들어진 리얼함인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어쩌면 이는 우리가 그것이 리얼한 것이기를 바라는 그런 종류의 리얼함이 아닐까.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내가 불일치할 때, 우리는 과거의 기억을 조작함으로써 맞춰나갈 수밖에 없으니까. 그렇게 하지 않고 조작되지 않은 과거의 나의 어떤 부분을 절실하게 끄집어내는 순간, 그것은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될 것이다. 물론 그것은 안타깝게도 상당히 어려워보인다. (CGV 대학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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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3-02-20 21: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1.죽는 것보다는 이 모든 것이 농담이었다,고 하는 게 낫다는 얘기. 인상적이네요. 현실사회주의는 그 찬란한 이상과 현실 재현의 간극이 너무도 커서 진짜 차라리 농담같은 면이 있는 것 같아요.(<굿바이 레닌>이 왠지 생각나네요. 물론 다르지만..) 물론 얼굴에 철판을 깐 자본주의는 그런 간극은 없지만, 파국적 비극이지요.

2. 다이하드4 관람기 읽으니, 전작들의 매력이 도리어 확 다가오네요. -"세번째는 아니 만났어야 좋았다." 피천득의 <인연>, 마지막 문장이 생각나는군요.- 흐흐 근데 이 글 무척 재밌어요!

3. 1999, 면회 관람기. 무척 설득력 있는 글이에요.
무언가를 잃어야 어른이 되는 줄 알았고, 무언가를 기꺼이 잃으면서 대신 이상한 것을 얻었고, 그런 어른이 된 현재 차라리 무언가를 잃기 전의 찌질이가 되고 싶어한다. -맞는 말 같은데,, 이걸 영화 속에서 도식화하면 또 상투적이다, 이 또한 설득력 있어요. 사람들이 건축학개론과 응답하라1997의 회고주의를 비난했던 게 이런 부분 아닌가 싶네요. 상투적인 구도.
"쉽게 파악되지 않는 과거를 포착할 때, 현재의 나를 이해하는 하나의 단초가 된다. 그런데 이건 어려워 보인다." 이런 '인식'에 대한 조심스러움은 이전의 김종관 글 인용과 통하는 면이 있구요.

맥거핀 2013-02-21 14:36   좋아요 0 | URL
장문의 댓글을 보니 좋군요.^^

공산주의 국가에서 어린시절부터 자라난 사람과 또 외부에서 보는 시선은 다를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산권 국가의 작가들의 글이나, 그곳에서 만들어진 영화 등을 보면 어떤 인식 자체가 뼛속깊이 자본주의인 우리와 확실히 다르구나 하는 생각이 들 때가 많습니다. 이상을 꿈꿨던 사람들이 현실 공산주의 사회를 보고 또 한편으로 절망했던 부분들을 보면, (자본주의 사회에 살고 있는 제 입장에서)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고 또 한편으로는 여전히 이해되지 않는 부분이 많은 것도 사실인 듯 합니다.

<1999, 면회>를 비롯한 예전으로의 타임머신을 보내는 작품들을 보면, 결국 중요한 질문은 '왜' 지금 90년대를 돌아보는가,라는 부분이라고 생각해요. 그 때를 돌아봄으로써 현재의 무엇을 생각할 것인가라는 문제를 살펴봐야겠지요. 그저 좋았던 옛일..로 끝나는 것은 현재의 나를 기만하게 될 확률이 높기 때문에 위험하다고 봅니다. (예를 들어 소위 '운동권 회고담'을 보는 불편한 시선 같은 것 말이죠.) 현재의 나와 과거의 나를 교묘하게 분리시키려는 시도들은 위험하죠.

<다이하드>는 이제 그만 나왔으면 좋겠어요. 저는 존 맥클레인을 보고 싶지 맥클레인의 탈을 쓴 다른 인물이 나와서 하는 것은 별로 보고 싶지가 않거든요. 아니면 루시 맥클레인을 주인공으로 해서 하면...

최근에 1-2 사이에 관심있는 영화들이 줄줄이 개봉이더군요. 김지운의 <라스트 스탠드>, 박찬욱의 <스토커>, 박훈정의 <신세계>, 홍상수의 <누구의 딸도 아닌 해원>...<분노의 윤리학>이나 임순례 감독 영화도 관심이 있기는 한데..몇 편이나 볼 수 있을지 모르겠군요. 일단 박찬욱의 <스토커>는 어떻게든 보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2013-02-22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훗 '장문의 댓글'을 부르는 글을 쓰시니까. + 흠. '또 댓글'을 부르는 긴 답글이군요.

음. 그렇겠군요. 사회주의 국가에서 태어나 자란 사람은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란 사람과 뼛속 깊이 다른 인간, 다른 시각을 가질 수밖에 없겠어요. (생각 못해 봤네요.) 그런 시각의 차이를 보여주는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전 동구권 감독 영화 본 거 두 편 정도 생각나는데(철의 사나이, 붉은 시편), 둘 다 그 적당한 예는 아닌 것 같고...

흠. 그러네효. 왜 지금 90년대인가,라는 질문이 더 핵심이겠어요. 근데 모든 복고주의는 뻔한 것 같아요. 현재에 대한 손쉬운 도피, 그때가 좋았어.. 라는 것. 그나저나 저야말로 엄청 회고적인 인간인데요. 복고와 회고는 다르지만, 여하튼 상투적인 건 모두 나빠요.ㅎ

루시 맥클레인 떔에 <다이하드4>를 보고 싶을 정도로 찬양하시는군요~. 하지만 그외 요소의 데미지가 너무 클 것 같아, 포기.ㅋㅋ

흠. 저도 당연히 라스트 스탠드, 스토커! 그리고 홍상수 신작은 아마 접근 불가로 못 볼 것이고. 분노의 윤리학은 시간 되면 보려고요... (되게 볼 것 같이 썼는데, 사실 요즘 영화 진짜 안 봐요. <베를린> 이전 본 게 한 달 전의 <파이 이야기>?!) 그리고 '남쪽~튀어'는 내일 예매해놨어요.

맥거핀 2013-02-22 14:37   좋아요 0 | URL
글쎄요..그런 영화가 뭐가 있을까요? 저도 막상 물어보시니 뭐가 있을지..(말씀하신 두 영화는 모두 제목만 알아요. 미클로시 얀초의 영화가 좋다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만..) 뭐 꼭 어떤 영화의 내용같은 것 보다도, 러시아 문학, 러시아 영화, 예를 들어 타르코프스키나 최근의 알렉산더 소쿠로프 등에서 보이는 인간 본연의 탐구, 어떤 거대한 질문 같은 것을 보면, 정확히 설명하기는 힘들지만, 러시아정교나 어떤 대륙적인 기질 외에도 이 공산주의, 사회주의 같은 것이 어떤 작용을 하지 않았나 하는 생각이 들어요. 중국 영화나 지아장커의 다큐 등에서 인민복을 입은 사람들로 가득한 거리를 볼 때의 어떤 이질적인 감정 같은 것도 말이죠.

저는 그 배우,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영화는 거의 챙겨봤거든요. 으하..너무 매력적이예요. 작년에 내한했었을 때 한 번 가볼까, 심각하게 고민을..루시 맥클레인이 아버지의 대를 이어 경찰이 되어 하는 걸로 했으면 좋겠네요.

홍상수 감독의 영화는 예고편만 봐서는 그냥 예전 영화들의 재반복처럼 보이기도 하는데, 과연 또 그안에서 무엇을 변주해낼지 궁금하구요. <스토커>나 <라스트 스탠드>는 감독 본연의 스타일을 헐리우드와 어떻게 혼합해냈을지..걱정반 기대반이고..<남쪽으로 튀어>는 제가 좋아할 스타일의 영화인 것 같은데, 일단 보고나서 감상 전해주세요. 평은 나쁘지 않던데..(근데 저도 생각보다 별로 못봐요.)

2013-02-23 20: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미클로시 얀초의 <붉은 시편> 좋았어요.
흠 저는 모르는 배우네요.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
<남쪽으로 튀어>는 별로였어요. 모든 요소가 삐걱대는 느낌. 재미없어서 졸았어요. 임순례 감독은 영화를 못 만드는구나, 하고 혼자의 결론을 내렸어요. (데뷔작 <세 친구>도 호평에 비해 영화가 재미없었던 기억이..)

맥거핀 2013-02-25 21:17   좋아요 0 | URL
이런 답글이 늦었네요. 아마 얼굴 보시면 아..이 사람,하고 기억이 나실지도 모르겠네요. 하기는 그렇게 탑스타라고 하기도 뭣하고, 그렇다고 연기파라고 하기에도 뭣하죠.

아..그런가요. 저는 임순례 감독을 상당히 신뢰하는 편인데. 감독으로서의 특유의 정서가 있어요, 임순례 감독은. 그러니까 우리나라에서 어떤 독특한 지점을 가지고 있는 감독이랄까요. 좀 덜 대중적인 면이 있기는 하죠. 특히 이번 영화는 만드는 과정에서 약간의 삐걱거림도 있었으니 그런 면도 조금은 감안을 해야할 겁니다. 아무튼 그래도 <와이키키 브라더스>만한 게 그 이후로 없는 것 같기는 합니다.

감은빛 2013-03-12 15: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 위에 섬님께서 말씀하신 것처럼,
맥거핀님의 글을 읽으면서 앞선 다이하드 시리즈가 그랬구나.
존 맥클레인이 그런 캐릭터였구나 하고 되새겨 보았습니다.

메리 엘리자베스 윈스티드가 누군지 검색해봤더니,
데쓰 푸르프에 나왔던 미녀로군요.
제가 본 건 그 영화 뿐인데 그 미모가 인상적이었습니다.

'이들과 매우 가까이에서 대학을 다닌 내 입장에서'로 시작해서
'가상의 적들을 만들어 전쟁에 몰두했는지도 모르겠다.'로 끝나는 부분,
정말 인상적이네요!
늘 느끼지만 맥거핀님 글 솜씨가 거의 예술입니다.
이렇게 잘 쓴 글을 얼마만에 읽어보나 싶은 기분이 들어서,
그 부분만 여러번 반복해서 읽었습니다.

좋은 글, 재밌는 글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맥거핀 2013-03-13 16:38   좋아요 0 | URL
좋게 봐주셔서 감사합니다.^^ 그냥 여담입니다만, 글에는 그렇게 쓰기는 했지만, 그때 한창 '스타' 열풍이 불었는데, 사실 저는 '스타'를 잘 하지도 못하고, '스타'를 그렇게 좋아하지도 않습니다. 저는 그 당시에도 늘 '피파'를 했었어요. 저는 당시에나 지금에나 늘 간단한 걸 좋아합니다. 골을 넣고 이긴다, 뭐 그런거요. 암튼 당시에 또하나 기억나는 건 그 수많았던 학교앞 비디오방들이 상당수 PC방들로 명함을 바꿔 달았다는 사실입니다. 물론 그 이후로 또 그 수많은 PC방들은 또다른 무엇이 되었습니다. 그 사라진 수많은 PC들과 그 주인들은 어디로 갔을까, 그런 게 궁금하기는 합니다.

아..'데쓰 프루프'를 보셨군요. 네. 그 영화에 나와서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지요. 최근의 '다이하드'에서 보니 그 때보다 몸이 좀 불었더군요. '데쓰 프루프'는 영화보다도 그 OST를 참 좋아합니다. 영화 개봉 후 몇 년인데, 아직까지 그 OST는 제 기계 안에 들어있어요.
 

 

 

어제 밤을 거의 샜더니 졸려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 잠 좀 깨려고 간단한 정보성(?) 글 하나 적어봅니다. 얼마전 알라딘 전자책 서비스 오류(http://blog.aladin.co.kr/cscenter/6124342)로 전자책 이용자들에게 적립금 2000원씩이 주어진 것으로 알고 있는데요. 이게 유효기간이 내일, 그러니까 2월 15일까지군요.

 

2000원이 주어져서 좋긴한데, 뭘 사야할지 모르겠고, 그렇다고 내 돈 들이기는 아깝다, 하시는 분은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중에 하나를 고르심이 어떨까 싶네요. 전자책 '살림지식총서' 시리즈 구간은 1900원이라 가격이 딱 맞더군요. 내용도 다양하니 선택의 여지도 많고요. (아..참고로 살림 출판사와는 전혀 이해관계 없습니다.)

 

 

저는 이걸 샀습니다. 뭐 어차피 이걸 읽어도 가스통 바슐라르에 대해서는 겉핥기로 알게 될 뿐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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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3-02-14 19: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거 좋네요. 책샀다고 자랑하면서 1900원짜리 쿠폰으로 저 어려운 책을 겉핥기하다니! 그런데 왜 어제는 밤을 샜어요? (눈 초롱초롱 0('o')0) :)

맥거핀 2013-02-15 20:46   좋아요 0 | URL
뭐 먹고 살려다보니 가끔 밤도 새고 그래야죠.-_- 지금 한 3장인가 봤는데, 아직 뭔 말인지 잘 모르겠음..^^;

가연 2013-02-22 01: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 이 시리즈가 은근히 좋은 것 같더군요ㅋ 저도 여기 있는 시리즈 중 한 권을 적립금으로 샀었답니다.

맥거핀 2013-02-22 14:25   좋아요 0 | URL
흐흐흐. 네..5만원을 채워야 사은품 받을 수 있는데, 애매하게 한 2-3천원 남을 때 이 시리즈를 자주 활용합니다. 그냥 왔다갔다 할 때 읽기 좋아요.^^
 

 

 

출처: http://www.kmdb.or.kr/indie/board/column_list.asp?seq=83&GotoPage=1

 

언제나 윤리의 편에서서

 

- 글: 김종관 (영화감독)

 

 

프로파간다는 상업영화의 전략이 되었다. 잔혹한 살인과 인신매매를 일삼는 악한의 내장을 뜯고 눈알을 파내는 잘 생긴 남자가 나오는 영웅담이 흥행이 된 것처럼 (동시에 개봉했던 두 개의 잔혹한 액션 영화 <아저씨>와 <악마를 보았다>, 같은 잔혹성에도 확실한 주적이 있는 아저씨는 흥행했고 주적을 찾을 수 없는 악마를 보았다는 상대적으로 부진했다.) 사회의 모순과 무조건적인 악의를 겨냥한 호전적인 영화들이 상업영화의 진영에서 달려들고 있다. 그들은 우라까이 액션영화처럼 단순하고 저돌적인 힘을 추구하기 위해 이분법적인 세계관을 만들고 사회 저편의 절대적인 악을 설정해 놓고 그들과 치열하게 싸운다. 타깃화 된 이념, 그룹, 종교는 단순화되고 그 특징적인 단면들이 사람들의 마음을 분노케 한다. 사람들의 마음은 뜨겁게 움직인다. 아무도 영화에서 이성적인 균형감을 원하지 않는다.

많은 사람들은 싸우고 있다. 많은 사람들은 화를 내고 있다. SNS에 관심이 있다면 우리의 분노를 자주 목격할 수 있다. 그 분노는 일리 있고 현명할 때도 있지만 상당수는 그렇지 못하다. 커다란 강물처럼 흘러가는 트윗의 타임라인에서 사람들은 분노에 가장 많이 모여든다. 어떤 범죄, 어떤 진영, 어리석은 식견과 아둔한 실언들은 공분의 대상이 된다. 그렇게 모여든 사람 중 누군가는 연대하기 위해, 한편의 무리에 섞이기 위해 분노를 이용한다. 또 누군가는 자기 안의 결함을 사회적인 분노로 치환한다. 많은 사람들이 그 분노의 뇌선을 건드려 주기를 기다리고 있다. 대중들이 확보된 셈이다. 사회의 의식을 겨냥한 영화, 특히 화를 내는 방식의 영화는 대중영화로써 요소를 가지고 있게 된 것이다. 독립영화는 그보다 현명하고 다양한 시선을 가지고 있지만 사실 노골적으로 화를 내는 영화도 심심치 않게 본다.

먼저 말한 바와 같이 우리는 '우리'라는 굳건한 범주 안에서 화를 내고 논쟁하며 연대를 만들어 간다. 어찌 보면 많은 창작자들도 창작물들로 열심히 싸우고 있다. 여기까지는 나쁜 것이 아니다. 하지만 어느새 많은 이들 그중에 창작자들이 윤리의 편에 서고 있다. 자기 혹은 자기를 지탱하는 테두리의 사람들을 선한 위치에 두고 저 건너에 비판을 둔다. 그들은 저 멀리의 괴물을 본다. 스스로의 괴물, 스스로의 모순에는 눈을 두지 않는다. 언젠가부터 그렇게 돼 버렸다. 상업영화는 대중을 위해 화를 내고 몇몇의 독립영화를 포함한 작가주의 영화들은 예술적 보상을 위해 무척 단순한 방식으로 화를 낸다. 상업영화가 애초에 대중적 기호에 맞춰간다 판단을 하더라도, 균형 없는 독립영화는 보는 이들에게 더욱더 많은 고민을 하게 만든다.

좋은 예술가는 자기 안의 모순을 응시하면서 성장하고 성취한다. 가면을 걷어내고 옷을 벗고 자기 안의 추醜를 꺼내어 해부해야 한다. 일본 사회파 추리소설의 대부 마쓰모토 세이초는 매우 사회 비판적인 시각을 둔 소설을 쓰지만, 그가 메스를 들고 도려내는 것은 그 스스로의 개인적 욕망에서 반추한 인간의 속성들이다. 그는 악인의 범행을 차갑게 기술하지만 욕망을 자기 안에서 찾고 대입하기에 세월이 지나도 그 이해의 깊이가 훼손되지 않는다.

그처럼 창작자가 자신의 욕망을 드러내고 균형을 가지려고 노력한다면 예술적 가치가 완성될 것이다. 하지만 내부에 대한 응시 없이 비판의 날만 휘두르는 창작자들을 많아지는 것은 하품만 나오는 일이다. 오늘날 정의롭지만 비겁한 문학과 영화들이 종종 만들어지는 것을 보면서 그 편협한 속성에 이질감을 느낀다. 그런 창작물들이 피곤하다. 창작자가 윤리의 편에 서서 악을 단순화하는 것도 재미없거니와 모든 개인의 악행 이면에 사회적인 현상이 있더라는 식의 시류 적이며 쉬운 결론도 재미없다. 조직이 아니라 사람, 타인이 아니라 스스로의 내부를 자각하는 영화들이 많이 만들어지길 바라고 나 스스로도 그러한 영화를 만들고 싶다. 세월이 지나 이 재미없는 시류에 돋보이는 창작물들이, 칼날을 스스로에게 돌려 결국은 세상을 찌르는 이야기들이 독립영화 안에 있었으면 좋겠다. 

 

 

<폴라로이드 작동법>, <연인들>, <조금만 더 가까이> 등의 영화로 주목받았던 김종관 감독의 글. 요즘 우리 영화들 사이에서 떠돌고 있는 분노의 유령들에 대해 생각해 보게 하는 글이다. 아니 분노보다 기이한 것은, 대부분 이 분노의 유령들은 결국 깊은 허무와 승리의 (혹은 패배의) 자기기만으로 귀결된다는 점이다. 분노로 시작되어 허무로 끝나는 lose-lose 게임들. 이 글의 제목은 최근 개봉하는 어떤 영화를 연상케 하기도 하는데, 그 영화는 정말 '분노의 윤리학'을 제시해 줄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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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3-02-12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금이나 예나 영화를 많이 보진 않지만 요새 언뜻 보는 한국 영화들은 노골적으로 사회적인 분노를 표출해요. 그런 영화들을 보면서 사회의식이 있네란 생각이 반복될수록 영화에서 받은 감흥이랄까 문제의식이 조금씩 희석되는 것 같기도 하구요. 마지막 문단이 참 좋은데요.

맥거핀 2013-02-13 00:21   좋아요 0 | URL
마지막 문단에 그런 말이 있잖아요. 정의롭지만 비겁하다. 형식과 내용이라는 문제로 말하자면, 그것은 정의로운 내용을 표방하고 있지만, 정의롭지 않은, 비겁한 방식으로 표현된다고 말할 수도 있겠는데요. 가끔 조금 이상한 이물감이 들때가 있어요. 그렇게 영화에서 내용과 형식이 분리되어 존재할 때.

창작자 뿐만이 아니라, 그것을 보는 사람도 자기 안의 무엇인가를 찌를 수가 있어야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생각해 봅니다. 그것은 위에서 얘기한 대로 쉬운 결론을 피하는 것이기도 할테지요.

2013-02-13 11: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좋은 글이네요. 뭐라 덧붙일 말 없이 공감! / 김종관 감독이 최근에(?) 책 낸 거 같던데, 읽어보셨남요?

맥거핀 2013-02-14 13:27   좋아요 0 | URL
아..책을 내셨는지 몰랐는데, 찾아보니 있군요. 이 글에서도 느껴지지만 좋은 생각을 하시는 분 같은데, 한 번 읽어보고 싶네요.

Mephistopheles 2013-02-13 12: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젠 "정당한 분노"와 "확고한 도덕심" 마저도 깊이 없이 쌈마이화 되가는 것 같은 느낌이네요.

맥거핀 2013-02-14 13:30   좋아요 0 | URL
사실 영화라는 것은 어떤 사회의 무의식의 총체라고 볼 수도 있을텐데, 영화에서 깊은 성찰이 사라지고 있다는 것은 우리 사회가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는 하나의 증거겠죠. 물론 좋은 예술가는 그 와중에서도 그 물결을 거스르려는 사람일테고요.
 

 

 

 

 

 

 

 

 

 

 

베를린, 류승완, 2013

 

 


(영화의 내용이 약간 들어 있습니다.)


 


액션 영화는 다른 무엇보다도 액션이 좋아야 한다는 데에 동의한다. 그러나 그것이 액션'만' 좋아도 된다도 것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액션 영화는 액션 영화이기 이전에 영화이기 때문이다. 즉 이 액션들은 액션이기는 하되 이야기로 이어지는 액션이어야만 하고, 2시간 동안 그것을 앉아서 볼 동력을 제공해주는 액션이어야 한다. 단절적인 액션만이 중요한 것이라면 굳이 그것을 2시간이라는 긴 시간으로 묶어서 영화로 볼 이유가 있는가. 상당수의 평들에서 지적하듯이 영화 <베를린>이 아쉬움을 주는 부분은 액션이 아니라, 액션 이외의 나머지 부분이라는 의견에 동의한다. 많은 평들에서 이야기의 중요한 부분을 전달하는 북한 리학수 대사(이경영)의 대사가 잘 안들렸다, 발음이 좋지 않았다, 사투리를 잘 알아들을 수 없었다, 등등의 이야기가 있었다. 그런데 문제는 사실 발음이나 사투리가 아니라, 그것을 굳이 설명하는 이야기로 풀어내려고 한다는 점이다. 설명을 특정전략으로 구사한다면 모를까, 대체로 이야기의 이러한 기본 구조를 한 인물의 대사로 풀어낸다는 것은 감독이 그것을 효과적으로 잘 드러낼 자신이 없거나(즉 이야기가 잘 만들어지지 않았다는 사후적 처치이자 고백이거나), 혹은 사실은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다는 뜻이고, 류승완의 선택은 후자에 가까운 것 같다. 그렇다면 의문이 남는다. 이야기에 별 관심이 없는데, 왜 이렇게 이야기를 복잡한 것처럼 보이려 할까. 그게 아니라면 이야기를 잘 풀어내려 했지만, 그것에 실패한 것일까.

도리어 이렇게 물을 수도 있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좋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도리어 상당히 간결하다. 이 영화와 자주 비교되는 '본 씨리즈'의 핵심도 사실은 간단한, 그러니까 기억과 정체성을 잃어버린 본 요원이 자신의 정체성을, 그러니까 아이덴티티를 찾아나가는 이야기이다. 그 주 플롯은 영화의 처음부터 관객들에게 제시되며, 세부적인 다른 플롯은 본 요원이 아무 것도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익스큐즈'된다. 즉 (영리하게도) 이 영화에서는 그렇게 자세하게 설명할 필요도, 이유도 없고 처음부터 관객은 본 요원과 마찬가지로 기억을 잃어버린 상태에서 아무 것도 모른 채 이 영화를 흥미진진하게 보게 된다. 이 영화 <베를린>의 주 플롯은 뭘까. 처음에 얽혀 있는 여러 개의 플롯 중에서 마지막까지 살아 남는 플롯은, 그러니까 일종의 주 플롯은 북한 내부의 권력 암투와 그것이 주독 북한 대사관의 요원들의 시효 만료로 이어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주 플롯은 영화의 중반부까지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것은 통상 액션 영화가 아니라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가 쓰는 전략이다.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이 영화 <베를린>은 액션을 보여주고자 하는 영화 같은데, 이상하게도 미스터리나 스릴러 영화인 척 한다. 물론 그럼으로써 어떤 이야기에서 얻게 되는 쾌감을 노릴 수도 있다. 그러나 영화라는 매체는 시간이 한정되어 있고, 얻고자 하는 것이 있으면 잃는 것이 있게 마련이다.

잃는 것은 캐릭터를 구체화할 시간이다. 영화의 중반부 북한 요원 표종성(하정우)과 남한 요원 정진수(한석규)는 서로에게 묻는다. 도대체 니가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고, 왜 그렇게 목숨을 걸고 이 일에 매달리는지 모르겠다고 말이다. 문제는 그게 서로 모르는 데에 있는 것이 아니라 관객마저도 잘 모르게 된다는 데에 있다. 즉 이야기를 설명하느라 영화의 시간을 소비함으로써 캐릭터를 구축할 시간은 상대적으로 줄어들고 따라서 그럴 수록 캐릭터는 평면화된다. 한석규나 하정우가 좋은 배우들이고 좋은 연기를 보여주는 것 같기는 하나, 그들에게 자주 어떤 기시감을 느끼게 되는 것은 이 영화에서 캐릭터를 관객 안에 구축시킬 시간이 충분히 주어지지 않다보니 관객은 그 캐릭터를 자기 스스로 이해하기 위한 하나의 방법으로 그들에게서 비슷한 과거의 캐릭터들을, 그러니까 한석규에게는 <쉬리>의 요원이나 <눈에는 눈, 이에는 이>의 형사, 하정우에게는 <황해>의 조선족 남자 등을 찾으려고 하기 때문이다. 또한 이것은 한편으로 그 '중요하게 보이려는' 액션에도 영향을 미치는데, 액션 영화에서 액션의 합 못지 않게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그 액션을 행하는 캐릭터이기 때문이다. 즉 '어떻게' 액션을 하는가에 못지 않게 중요한 것은 '누가' 액션을 하는가이며 그 '누가'라는 캐릭터는 액션의 형태와 관객의 쾌감에도 영향을 미친다. 예를 들어 우리가 <미션 임파서블>의 '이단 헌트'에게 바라는 액션과 <스카이 폴>의 '제임스 본드'에게 바라는 액션은 다르며, 그것은 그동안 충분히 구축된 캐릭터의 힘인 것이다.

 


그러므로 다시 질문할 수밖에 없다. 이 이야기를 이렇게 복잡한 것처럼 꾸며낼 이유가 있을까. 왜냐하면 궁극적으로 감독이 관심을 가지고 있는 것은 이야기보다는 액션인 것처럼 보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내내 비장하게 깔리는 배경음악으로도 유추해 볼 수 있는데, 이 비장한 배경음악은 유독 액션씬이 등장할 때만 나타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감독은 우리에게 이 액션씬을 비장한 어떤 것으로, 예를 들어 오우삼 영화 속의 어떤 비장함처럼 보아주길 바라는 중이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그 캐릭터들이, 즉 성냥개비를 잘근잘근 씹는 그 쌍권총의 사나이들이 없으니 어쩌나. 즉 이상하게도 이 비장한 음악이 깔리는 액션씬들은 영화의 이야기들과 다른 것을 이야기한다. 다시 말해서 지금까지 애써 설명하려던 이야기들은 이것이 사실 그저 소모품 버리기임을, 그것이 아무것도 아니었음을 '사실적으로' 보기를 원한다. 그러나 액션씬에서 이것은 갑자기 비장한 생존투쟁이 된다. 지금까지 이 생존투쟁이 비장한 것이 아니었음을 애써 설명한 다음, 다시 그것이 비장하게 등장할 때 우리는 그것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할까.

어차피 많은 액션 영화에서 이야기는 브릿지에 불과한 것이고, 그것은 어느 정도 납득할 수 있는 이야기이면 된다. 그러므로 이 필요 이상의 많은 이야기가 붙은 이 이야기에서 남는 것은 잉여적인 몇 가지의 질문일 수밖에 없다. 이 영화는 스파이 첩보 영화일까, 아닐까. 그렇다면 굳이 베를린이라는 분단의 상징과 같은 도시를 배경이어야 할 이유가 있을까, 없을까. 아니 어쩌면 (사실은 아니지만) 남북한이 얽힌 복잡한 스파이 영화인 척 하는 것, 바로 이것에 정성일의 말대로 무의식적인 메시지가 들어 있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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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rch 2013-02-06 16: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부당거래의 연속선상에서 이 영화를 봤어요. 권력 때문에 희생되는 개인의 이야기에서 캐릭터는 그렇게 중요해 보이지 않았어요. 영화는 짧고 담을 이야기는 많기 때문에 인물이 평면적으로 그려지는건 어쩔 수 없을 것 같아요. 그렇다고 이야기를 간소화하자니 애초의 의도를 못살릴 것 같고. 감독으로선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는데 저는 그게 과히 나쁘지 않았어요.

맥거핀 2013-02-07 01:08   좋아요 0 | URL
말씀하신대로 <부당거래>와 연관지어보면 조직과 개인 간의 관계 속에서 개인의 생존투쟁 같은 측면을 생각해 볼 수는 있을 것 같습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로는 이 영화는 <부당거래>와 장르적인 위치가 좀 다르니까요. 장르가 다르면 어느정도 접근방식이 달라야 하는 부분이 있지 않을까 생각합니다.

저는 류승완 감독이 너무 많은 것을 담으려했다고 생각해요. 제작사나 투자사의 입김인지도 모르지만, 휘뚜루마뚜루 해치우려는 느낌이랄까. 저는 류승완 감독이 잘하는 걸 좀 더 살리면 좋을 것 같아요. 잘하는 게 커지면 못하는 건 자연히 줄어들어 보이게 마련이죠.

Arch 2013-02-07 09:36   좋아요 0 | URL
며칠 전에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을 봤는데요. 분명히 괜찮은 소재인데 너무 뻔하게 풀어낸게 안타까웠어요. 이렇게 하면, 저렇게 하면 더 좋을 것 같은 아쉬움이 막 남더라구요. 분명히 베를린도 그런 아쉬움이 남는데 저는 그냥 류승완 감독이라니까 그래도 괜찮다가 돼버렸어요. 실버라이닝 플레이북의 감독은 잘 모르지만 베를린의 감독은 잘 안다, 이런거? 좋은 선입관은 아니죠.

휘뚜루마뚜루는 처음 들어본 말인데 막 활용하고 싶어요. 이 말의 연관검색어는 하춘화이던데요.


맥거핀 2013-02-07 14:30   좋아요 0 | URL
아..저도 영화 소개 프로그램에서 봤어요. 뭐 거의 내용을 다 보여줘서 안 봐도 될 정도.

하춘화씨 최근 발표곡이죠, 아마? 하춘화 씨 얘기하니까 갑자기 한가지 일이 떠오르는데, 별로 듣고 싶지 않으실지 모르지만 그냥 적어볼께요. 제가 군대에서 장교로 복무를 했거든요. 장교들은 돌아가며 당직을 서는데, 하루는 한 병사가 오더니, 오늘 하루만 밤에 TV볼 게 있는데 여기 당직사관실에서 보면 안되겠냐고 간청하는거예요.(원래 병들은 10시 이후에는 취침해야 하니까.) 그래서 그게 도대체 뭔데?,그랬더니 하춘화 디너쇼라고 자기는 하춘화 팬이라는거예요. 한 21살이나 22살 정도 되었을까 한 친구가, 소녀시대도 아니고 하춘화라니..이게 뭔가 싶어서 벙쪘죠. 벙쪄서 그래 뭐 봐라, 하고 틀어줬더니 신나서 열심히 보더군요. 막 노래도 흥얼거리면서. 그 친구와 그 밤에 하춘화 디너쇼를 보면서 이런저런 얘기를 나눴던 기억이 나네요.

정말로 구라 아니고, 그냥 하춘화 얘기하시니 갑자기 생각나서 적어봤어요. 하춘화 좋아하던 그 친구는 잘 살고 있는지...

Mephistopheles 2013-02-07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류승완 감독의 영화는 짝패 이후에는 본것이 없다보니 (아 다찌마와 리 빼고) 뭐라 평가할 입장은 아닙니다만 그래도 간간히 그냥 아무생각없이 봐도 무방한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가 가장 류승완다운 영화같이 느껴지곤 합니다.

맥거핀 2013-02-07 14:33   좋아요 0 | URL
다찌마와 리 같은 영화야 말로 아이러니하게도 류승완의 어떤 작가적 자의식이랄까, 같은 게 잘 드러난 작품이었죠. 이 영화 <베를린>은 어떤 공산품 같은 느낌 같은 게 있어요. 최근 CJ표 영화들에서 어떤 공산품들 냄새가 좀 나는데, 위험해 보여요.

Mephistopheles 2013-02-07 20:53   좋아요 0 | URL
조만간 한계가 분명 오겠죠.

맥거핀 2013-02-08 13:11   좋아요 0 | URL
영화와 자본을 분리할 수 없으니 어쩔 수 없는 부분도 있지만, 그렇다고 CJ가 꼭 자본주의적으로 굴러가는 것도 아닌 것 같은데 말이죠. 예를 들어 저는 이번에 <타워>의 감독이 김지훈인 것을 보고 깜짝 놀랐어요. 김지훈 감독의 밥줄을 끊어야 된다, 그런게 아니라 <7광구>같은 엄청난 자본이 투입된 영화에서 완전한 실패를 보여줬는데, 또 그런 큰 돈을 덥썩 맡기다니..일반 회사에서도 좀 큰 프로젝트 실패하면 맡게되는 프로젝트 크기가 줄어들고 하는 것은 당연한데도 말이죠. CJ에 다른 감독이 없는 것도 아니고...

2013-02-07 11: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2-07 14:39   URL
비밀 댓글입니다.

노이에자이트 2013-02-07 2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본' 시리즈의 원작소설인 로버트 러들럼,<잃어버린 얼굴>은 국제물 첩보물 소설 특유의 분위기가 있죠.이 분야가 국제분쟁이나 외교 등 상당히 복잡한 문제를 다루잖아요.두툼한 소설이니까 그런 복잡한 이야기를 담을 수 있지만 영화화하려니 그걸 빼고 액션 위주로 만들었죠.그래서 스파이물이라기 보다는 재밌는 활극영화가 되었고요.
맥거핀 님의 평을 읽으니 '베를린'은 액션물에 스파이물 특유의 고뇌를 다 담으려고 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드는군요.

맥거핀 2013-02-08 13:19   좋아요 0 | URL
네..본 시리즈의 영리한 부분이 아마도 그런 부분이겠죠. 그리고 많은 영화를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칭송받는 부분도 이야기보다는 액션을 만들어가는 방식이나 촬영 스타일 같은 부분이 더 컷구요. 이 <베를린>에서도 예를 들어 유리천장으로 추락하는 씬 같은 부분에서 본 씨리즈를 상당히 벤치마킹한 듯이 보이더군요.

근데 사실 <베를린>은 첩보물인 척 하지만, 저는 첩보물이 아니라고 생각하거든요. 배경만 따고, 그저 액션물로 스트레이트하게 밀어붙이면 훨씬 좋지 않았을까 생각합니다. 아..그리고 이 영화가 최근 톰 롭 스미스의 소설 <차일드44>와 이야기가 너무 유사하다는 지적도 있더군요. 혹시 그 소설은 보셨는지..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7:53   좋아요 0 | URL
알라딘에도 <차일드 44>가 많이 거론되고 있다는 것에 관심을 가지고 있습니다.

2013-02-08 16: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에도 흥미로운 이야기가 많이 있군요.
엄청난 예산을 받고도 자유롭게 자기 스타일을 살리면서 그 예산을 감당해내는 감독은 잘 없는 것 같아요. 그렇게 치면 엄청난 예산 자체가 족쇄 혹은 걸림돌...

맥거핀 2013-02-11 22:07   좋아요 0 | URL
섬님, 설은 잘 보내셨어요? 제가 댓글이 좀 늦었네요.

그렇죠. 영화에서 자본과의 결합은 일종의 필요악이라고 할까, 아무튼 많은 예산을 준다는 것은 그만큼 기회이지만, 그만큼 감독에게는 큰 위험부담이 되기는 하죠. 그런 면에서 큰 예산으로 아주 재미있는, 그러면서도 좋은 영화를 뽑는 스필버그 감독 같은 사람이 대단해보이기는 하죠.

노이에자이트 2013-02-09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춘화 씨는 젊은 연예인 많이 나오는 오락프로그램에서도 잘 하더라고요.함께 어울리는 느낌...이번에 엠넷 채널의 <비틀즈 코드>에 소녀시대와 함께 나오는데 주거니 받거니 잘해요.예순이 내일 모레인데도...한 번 다시보기로 보세요.웃음 폭발입니다.

맥거핀 2013-02-11 22:08   좋아요 0 | URL
네..노이에자이트님도 좋은 설 보내고 계신지 모르겠네요. 저도 예전에 다른 오락프로그램에서 하춘화 씨가 나오는 것 보고, 젊은 감각에 비교적 잘 맞춘다 싶었어요. 말씀해주신 것 못봤는데 챙겨보겠습니다. 소녀시대도 볼겸..^^
 

 

 

 

 

 

 

 

 

 

 

범죄소년, 강이관, 2012

 

 

 

(영화의 전체 내용이 들어 있습니다.)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영화적 화면 구성의 측면에서 흥미로운데, 그것은 영화의 내내 인물의 곁에 카메라가 바싹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즉 <범죄소년>은 다른 어느 샷보다도 인물의 어깨나 가슴께에서 머리끝까지를 찍는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주로 영화를 구성하고 있으며, 그것은 영화의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거의 이어지고 있다. 이러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통상 인물의 얼굴을 드러내며 그 인물의 표정과 감정을 관객이 읽도록 하는 데에 그 목적을 두는데, 일반적인 클로즈업샷과 다른 점은 인물의 얼굴을 타이트하게 당겨서 찍는, 그럼으로써 인물의 아주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클로즈업샷과 달리 인물의 신체 언어가 가지는 의미를 드러내게 해준다는 점이다. 다시 말해서 강이관의 <범죄소년>은 인물들의 눈빛을 주의깊게 보되, 그 눈빛만이 아니라, 그들의 신체가 이야기하는 것, 그러니까 그들의 어깨도 보아줄 것을 요구하는 영화다. 미디엄 클로즈업샷으로 이루어지는 영화에서 인물들은 종종 어깨로 말을 한다. 그러니까 그들의 말이, 그들의 표정이 아무 것도 이야기하지 않아도 종종 어깨는 미세하게 움직이며, 우리가 그 미세한 움직임을 보아줄 것을 요구한다. 예를 들어 범죄소년 장지구(서영주)의 어린엄마 효승(이정현)이 노래방에서 업주에게 모욕을 받으면서도 일자리를 잃지 않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아양을 떨며 "언니~"라고 부르기 전의 미세한 어깨의 멈칫거림 같은 것 말이다. 우리는 그 미세한 멈칫거림 앞에서 그녀에게 이런 일이 수없이 반복되었음을, 그래서 그녀가 왜 아양을 떠는 목소리를 꾸며내야 하는지 대략 짐작한다.

왜냐하면 수많은 '범죄소년'들의 표정을 우리는 읽을 수가 없기 때문이다. 영화의 시작부 인물에게 바싹 달라붙어 그들의 눈빛을 보여주는 카메라에서 우리는 그들의 무엇인가를 읽어내고 싶어한다. 그들은 왜 범죄를 저지르는가? 그리고 범죄로 처벌을 받았음에도 왜 다시 범죄를 반복하는가? 우리는 혹시라도 그들의 눈빛에 어떤 답이 들어있지 않은가 해서 그들의 눈을 들여다본다. 그들의 눈에서 무엇인가를, 그러니까 반성하는 눈빛이라든가, 사회와 어른들에 대한 경멸이라든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분노라든가, 아무튼 무엇인가를 읽어낼 수 있지 않을까. 그러나 그들의 표정을 읽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범죄소년들은 범죄를 저질렀기 때문에 범죄소년이 되고, 범죄소년이 되었기 때문에 사회에서 내몰리고, 또 내몰렸기 때문에 다시 범죄를 저지른다. 그러니까 어쩔 수 없이 그들의 어깨라도 보여줄 수밖에. 범죄자라는 낙인을 받은 채, 움츠러들어 있는 그들의 어깨, 그리고 그 어깨가 다른 범죄에 빠져들기 전에 아주 잠깐 멈칫거리지만, 다시 새로운 범죄로 나아가는 과정을 지켜볼 수밖에.


물론 미디엄 클로즈업샷이 클로즈업샷, 익스트림 클로즈업샷과 갈라지는 지점은 이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인물의 배경마저도 동시에 어느정도 담는다는 점이다. 즉 한편으로 미디엄 클로즈업샷은 일반적인 클로즈업과 다르게 배경을 담으며, 동시에 그럼으로써 보는 우리와 인물과의 사이에 어느 정도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즉 우리는 범죄소년과 약간의 거리가 있는 상태에서 그들 자신만이 아니라, 그들의 주위도 함께 보게 된다. 다시 말해서 이 범죄소년들은 그 배경과 분리되어 생각할 수 없으며, 모든 문제를 그들의 어떤 개인적인 문제로 놓을 수 없고, 동시에 그렇다고 해서 모든 문제를 사회의 책임으로 돌릴 수도 없다. (어려운 위치에 처했어도 범죄를 저지르지 않는 수많은 소년이 있다.) 아무튼 개인적 문제이건, 사회적 문제이건 간에 범죄를 저지르면 그들은 사회와 분리되어 갇히지만, 다시 언젠가는 사회로 돌아가야만 한다. 그러나 문제는 사회는 그들을 맞이할 어떠한 준비도 하지 않고 있다는 점이다. 즉 혹 그들이 사회와 격리된 상태에서 조금이라도 변했더라도, 그들이 다시 돌아가는 사회는 예전과 그대로인 채로, 즉 예를 들어 범죄소년들에 신경쓰지 않는 어머니도 그대로이고, 범죄소년에게 폭력을 휘두르는 아버지도 그대로인 그런 상태, 아니 이제 그것을 넘어서 아버지와 어머니 모두 소년원에 다녀온 자식을 외면하고, 예전에 그를 알던 모든 사람이 이제 그를 멀리하는 그런 상태의 한가운데로 되돌려진다는 점이다. 그런 상태로 돌아간 범죄소년들이 어떻게 되는가, 이 영화 <범죄소년>은 그 메커니즘을 일종의 통시적 관점에서 살펴보고자 하는 영화다.

통시적 관점이라는 것은, 결국 이 영화에서 장지구의 엄마 효승의 현재 모습은 장지구의 여자친구 새롬의 미래 버전 중의 하나로서 그려지기 때문이다. 즉 장지구의 아이를 가진 채 가족과 학교에서 모두 떨려나가는 새롬은 효승의 과거의 반복이며, 효승의 현재 모습은 우리가 그릴 수 있는 새롬의 미래의 여러 모습 중의 하나이다. 즉 강이관은 여기에서 묻고 있는 것이다. 범죄소년이 대를 이어 재생산되기까지, 즉 범죄소년이 또다른 범죄소년을 만들어내기까지 그 긴 시간 동안 우리는 과연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라는 질문. 그런데 보다 문제는 이것이 그리 나쁜 케이스가 아니라는 점이다. 즉 이 영화에는 그럴듯한 악인을 별로 찾을 수가 없다. 예를 들어 중간에 효승과 같이 사는 효승의 후배나 효승이 만나는 여관의 주인이나 식당의 여주인 같은 사람들을 보면, 일견 야멸차게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이 결코 나쁜 사람이라고는 말할 수 없다. 아니 임시로나마 효승과 지구에게 살 거처를 제공하고, 여관비를 깎아주는 모습 등을 보면 도리어 큰 호의를 베풀었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즉 문제는 개인적 호의라는 것이 한계가 있고, 오로지 그들이 기댈 수 있는 것은 개인적 호의나 범죄밖에 없도록 이 구조가 만들어져 있다는 것이며, 그 구조는 상당히 단단해 보인다는 점이다.

그것이 아마 이 영화가 이렇게 툭 잘라내는듯이 끝나는, 아주 불안하고 미세한 희망을, 희망이라고 부르는 것이 미안할 정도인 그런 것을 애써 전달하는 것처럼 보이며 끝나는 이유일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인물의 눈을 들여다 볼 것을 주문하되, 그 눈에서 아무 것도 읽을 수 없게 하는 이유일 것이다. 우리가 그 인물의 눈에서 어떤 미세한 반성이라도 읽어낸다면, 우리는 혹시 그것을 조금은 오해하게 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범죄를 오로지 개인의 악의 산물로서 읽어내는 오류같은 것 말이다. 저 눈을 보니 틀려먹었어, 그들은 또 범죄를 저지를거야, 혹은 반성하는 것을 보니 앞으로 잘 살게 될 것 같군, 이라는 우리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희망 같은 것. 그러나 그런 희망이란 없다. 우리는 어떠한 희망도 제공되지 않은 이 이야기에, 이 불안한 결말에 스스로 이야기를 붙여나가는 수밖에 없다. 영화에 어떠한 추가적인 희망도, 혹은 절망도 없는 상태에서 우리는 지금 현재 우리가 처한 현실이라는 틀 안에서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낼 수밖에 없다. 그리고 그 추가적인 이야기가 좋아지려면 우리가 처한 현실을 어떻게든 변화시켜 나갈 도리밖에 없다.

 

 

덧.
강이관은 좋은 감독이다. 보통의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한가지를 전달하는 감독이다. (물론 이런 보통의 감독도 그렇게 널려 있는 것은 아니다.) 즉 어떤 씬은 인물의 캐릭터를 잘 설명하거나, 혹은 인물들 간의 관계를 잘 그려내 보여줄 수 있다. 좋은 감독은 하나의 씬에서 두 가지를 전달한다. (물론 아주 좋은, 그러니까 위대한 감독들도 있다. 그런 감독들은 하나의 씬에서 서너가지를 아무렇지도 않게 밀어넣는다. 그러나 대체로 그 서너가지가 무엇인가가 생각할 틈이 없다. 왜냐하면 그 장면은 동시에 너무 아름다워서 가끔은 숨을 못쉬게 하기 때문이다.) 예를 들어 하나의 씬이 인물의 캐릭터와 인물들 간의 관계를 동시에 효과적으로 잡아내고 있다면 그 장면은 좋은 장면이고, 그러한 것을 만들어낼 줄 아는 감독은 좋은 감독이다. 몇 가지 장면을 예로 들 수 있는데, 처음에 지구가 보호관찰 전화를 받는 장면을 보면, 보호관찰이라는 것의 어떤 서늘한 방식, 그것의 기계화되고 무책임한 구조를 보여주면서도, 할아버지의 병든 숨소리를 넣고, 그 병든 숨소리를 무심히 보는 지구를 보여줌으로써 그 캐릭터를 구체화시켜 나가고 있다. 즉 적어도 관객은 이 장면에서 지구가 보호관찰을 받고 있기는 하나 아주 나쁜 녀석은 아니라고 생각하게 되는 것이다. 혹은 미용실에서 효승이 효승의 후배의 지시를 받는 짧은 씬에서도 이것이 드러나는데 효승이 후배에게 대하는 비굴한 뉘앙스를 효과적으로 전달함으로써 그들의 관계가 어떤지도 잘 드러내면서 효승이라는 캐릭터의 위치나 성격 역시도 잘 표현하고 있다. 즉 효승은 지금까지 저런 것을 얼마나 반복해왔을 것인가, 그리고 앞으로도 얼마나 견뎌내야 하나,라고 관객에게 익히 짐작하게 한다. 그런 좋은 감독이 만들어낸 이 영화는 좋은 영화다. 그렇게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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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3-02-04 01: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말씀하신 미디엄 클로즈업샷의 촬영기법을 주로 쓰는 영화에선 배우들의 섬세한 연기는 기본사항이겠구나 싶군요. (세월이 흘렀어도 이정현이란 배우라면 그 섬세함이 왠지 수긍이 되기도 합니다. ) 이런 기법을 쓴 영화 중 대표적인 건 뭐가 있을까요??

맥거핀 2013-02-04 13:26   좋아요 0 | URL
저도 이정현이라는 배우가 상당히 좋은 배우라고 생각합니다. 왜 자주 연기를 하지 않는지 궁금합니다. 가수보다는 연기자로서 훨씬 낫다고 보는데..

글쎄요. 통상 미디엄 클로즈업도 클로즈업의 일종이고, 그런 만큼 클로즈업을 남발한다는 것은 관객에게 답답하게 보이는 경우가 많죠. (즉 아시겠지만 미디엄 클로즈업은 다른 샷과 섞여야만 그 효과를 발휘하는 법이니까..) 간혹 가다가 인물의 감정을 중점적으로 표현해야할 영화의 경우 그런 샷이 의도적으로 많이 쓰이기도 합니다. 제가 본 것 중에서 생각나는 건 <블랙 스완>이나 <그 남자는 거기 없었다> 같은 것..두 영화 모두 미세한 감정을 잡아내는 게 상당히 중요한 영화이고, 특히 <블랙 스완>은 신체나 표정의 미묘한 움직임 같은 것이 중요한 영화였기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 봅니다. 발레 공연을 잡는 몇몇 씬을 제외하고는 이러한 미디엄 클로즈업이 상당히 많이 나왔던 영화로 기억해요.

책에 보니 차이밍량 감독의 <다크 서클스> 같은 영화를 미디엄 클로즈업이 잘 사용된 영화로 꼽고 있던데, 제가 보질 않아서..^^;

Shining 2013-02-05 11: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정현 씨의 연기는 확실히 과소평가 된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음, 영화에 대해서는, 언제가 되든 보고 난 후 다시 댓글 달게요 :)

이 영화도 그렇고 <신의 소녀들>과 <더 헌트>도 결국 못 봤네요. 아직 1월밖에 되지 않았는데도 놓친 영화가 넘치는 씁쓸함ㅠ 사람을 보러 간 건지 팀 버튼을 보러 간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무튼 다녀왔습니다, 팀 버튼 전(웃음). 가면서 신년 통합본(?) 씨네21을 샀는데 신형철 씨가 쓴 <라이프 오브 파이>글은 정말 멋지더군요. 신형철 씨의 글은 정말.... 오직 글로만 사람에게 이만큼 반하는게 얼마만인지 모르겠어요.

맥거핀 2013-02-06 15:59   좋아요 0 | URL
저는 사실 팀 버튼을 그렇게 좋아하지를 않아서, 팀 버튼 전이 해도 가게 될 것 같지는 않지만, 뭔가 기괴한 이미지로 가득해서 나름 재미는 있을 것 같아요. 물론 사람이 많은 것은 저도 참 그렇습니다만...팀 버튼 영화 중에서 마지막으로 본 게 <스위니 토드>였고, 그것도 약간 앉아있는게 괴로웠습니다.

근데 말이죠. 이번호 <씨네21>이 조인성 브로마이드를 부록으로 주던데, 그것 때문에 산 거 아닙니까? 으걀걀.

Shining 2013-02-07 11:25   좋아요 0 | URL
얼마 전 일말의 기대를 갖고 (<앨리스>때 하도 실망해서) <다크섀도우>보다 졸 뻔 했어요. 재미가 없다 없어 짜증낼 뻔 했다는_- 인산인해라는 말로도 설명이 안 되는 인구밀도였어요....

가는 길에 베를린 표지가 붙은 씨네21이 걸려있길래 저 씨네21 주세요, 했더니 아저씨께서 꺼내시다말고 오늘 나온 거 줄까? 라고 속삭이시길래 눈을 반짝이며 고개를 끄덕였습니다(하도 말투가 은밀해서 누가보면 암표상인줄 알았겠다는...). 알고보니 그게 신년통합본인가 되더라구요. 그렇게 얻은 조인성 씨입니다ㅎㅎ

...그 안에 부록이 있었나요?ㅎㅎ 전 인터뷰도 제대로 안 읽었어서...훗, 미남스타나 그들의 부록에 집착하지 않아요_-(으쓱)........원빈이라면 약간 고민은 했을거에요.....

맥거핀 2013-02-07 14:43   좋아요 0 | URL
왜 조인성 때문에 샀다고 말을 못하니..흑흑흑..이 아니고, 그런 연유로 사게 되었군요. 저는 씨네21 정기구독 중인데, 정기구독자들의 상당수가 그러듯이 일단 뜯어보고 한 1분간 휘리릭 넘겨본다음, 나중에 자세히 봐야지, 하고 마음을 먹고는 다음주 책이 올 때까지 잊어버려요.; 그래서 맨날 휴일 같은 때 몰아서 보게 되요. 이번 설에도 밀린 씨네21이나...

근데 주간지 같은 거는 신년통합본 이런 거는 씨네21 아니더라도 자주 구매해요. 값은 똑같은데 더 두꺼워서 좋고, 중간에 특집퀴즈 같은 게 들어있어서 문제푸는 재미도 쏠쏠. 작년 추석 때 씨네21이랑 한겨레21 두 개 응모했는데, 다 국물도 없더라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