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느지막이 투표를 하고, 알라딘 중고서점을 갔다. 중고서점은 동선상 늘 종로점을 갔었는데, 아무래도 인터넷으로 확인해보니 신촌점에 더 구미에 맞는 책들이 많이 있는 듯하여 일부러 신촌점까지 찾아갔다. 아무래도 알라딘 중고서점은 지점별로 책의 회전 속도가 다른 모양이다. 며칠 전에 인터넷에서 확인한 몇몇 책은 이미 팔렸는지 찾을 수 없었지만, 예상 외의 신간들을 꽤 발견할 수 있었다. 예를 들어 며칠 전에 S님의 서재에서 본 미치오 슈스케의 <광매화> 같은 책이 떡 하니 있다거나 하는 정겨운 풍경을 본다거나 하는 등의. 정겨운 풍경에 이것저것 화답하다보니 어느덧 그리 정겹지 않은 시간을 마주해야만 했다. 이른바 '내려놓음의 시간'.

 

중고서점에서 책을 고르는 것은 과거의 아주 오랜 기억들을 상기시킨다. 1990년대의 어느날 몇몇 레코드점에서 마주해야했던 반갑지 않은 시간들. 나는 그 때 문제집을 산다는 명목으로 흥겹게 삥땅친 만원 짜리 한 장이 생길 때마다 우리동네 사거리에 있던 레코드점, 혹은 큰 마음 먹고 종로나 명동, 때로는 압구정이나 노량진까지 원정을 가곤 했다. 레코드점을 A에서 Z까지 뒤지며 새로나온 신보들의 따끈따끈한 냄새에 황홀하게 취하는 것도 잠시, 주머니에 넣어둔 꼬깃한 만원 짜리 한 장은 늘 내가 이제 '내려놓음의 시간'을 만나야 한다는 것을 상기시켰고, 나는 많은 뮤지션들과 원치 않은 작별인사를 해야만 했다. 제기랄, 왜 그렇게 전설들은 많고, 그 전설들의 숨겨진 명반들은 불쑥불쑥 나타나는지. 나는 그 '내려놓음의 시간'을 만날 때마다 애꿎은 '핫뮤직' 기자에게 욕을 퍼부었고, 용기가 없어 만원짜리 두 장을 삥땅치지 못한 내 소심함을 자책하곤 했다. 그리고 정말 진지하게, 그 어느 때보다 진지하게 고민했다. 어떤 게 명반인지를? 아니. 이 중에 어떤 걸 들고가야 내일 뒷자리 H 녀석의 부러움에 목마른 얼굴을 확실히 볼 수 있을지를. 

 

2.

그리고 서울아트시네마로 가서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의 두 단편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를 보았다. (네이버 필모에는 각각 <따뜻한 포옹>과 <달팽이: 나의 할머니>로 되어 있는데, 아마도 이것이 맞는 제목 같지만, 시네마테크 데이터베이스에는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로 되어 있으므로 이렇게 써도 크게 무리는 없으리라.)

 

시간이 꽤 남은 상태에서 도착한 터라, 출구조사 결과도 보고, 사온 책들도 들여다보고, 인증샷도 찍어 알라딘 스마트폰 편집기의 능력도 확인해보면서 시간을 때우고 있었는데, 맞은 편에 앉은 어떤 중년여성이 아들과 통화하는 게 귀에 들어온다. 아마도 영화를 혼자보러 나온 엄마가 집에 혼자 남아 있는 어린 아들이 밥 챙겨먹을 것이 걱정되는 모양이다. 아들에게 국은 어떻게 데워먹고, 반찬은 뭘 꺼내먹고, 라면 끓여먹지 말고 등등을 이야기하는데, 아들의 심드렁한 대답은 들리지 않지만 익히 연상을 할 수 있었다. (내가 많이 그래봤으니...) 그런데 조금 재미있는 것이 그러면서도 아들에게 부탁을 하고 있지 않은가. 아빠 오시면 엄마 6시 넘어서 극장 갔다고 해줘, 2시에 극장갔다고 하지 말고, 알았지, 아들? 그러니까 이 엄마는 이곳 아트시네마에서 오늘자 3시 타임 영화인 레나토 카스텔라니 감독의 1961년작 <산적>을 본 다음, 이제 7시 타임의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것이다. 아..이게 무슨 영화광 엄마와 그런 영화광 엄마 때문에 혼자 국을 데워야 하는 아들의 훈훈한 대화, 영화 <레인보우>의 현실 버전이란 말인가.

 

그래도 영화 보느라 애들 밥 안 챙겨주는 건 괜찮은 거 아닌가요,는 나만의 생각인가.

 

3.

오늘 이 영화를 보게 된 것은 우연일까, 아니면 이곳 시네마테크 측의 계획된 아이러니일까.

 

가와세 나오미의 초기의 두 단편 <내 아버지>와 <내 할머니>는 지극히 사적인 영화이고, 일본 사(私)소설의 계보를 잇고 있다고 말해도 과장은 아닐듯한 작품이다. 가와세 나오미 감독은 태어남과 거의 동시에 아버지에게 버려졌고, 어머니마저 다른 남자와의 결혼을 위해 그녀를 자기의 친정어머니, 그러니까 감독의 외할머니에게 맡기고 떠나가버렸다. 그런 가와세 나오미 감독을 불쌍히 여긴 그녀의 외할머니가 그녀를 자신의 호적에 딸로 입적시켰고, 그렇게 할머니를 엄마라 부르며 홀로 외롭게 카메라를 벗삼아 자라난 아이가, 성인이 되어 아버지를 찾는 이야기가 <내 아버지>이고, 그런 자신을 힘들게 키워준 할머니를 그린 영화가 <내 할머니>이다.

 

그러니까 이 영화에서 주목해서 보아야 할 것은 아마도 두 가지인 것 같다. 하나는 이 영화가 기록하는 시간에 대한 태도와 다른 하나는 카메라 뒤에 숨어 이 영화를 찍고 있는 가와세 나오미라는 개인, 이 두 가지. 이 영화들에서 시간은 어떤 이벤트로서 기록되거나 분절되어 기록되지 않는다. 시간은 어떤 사건들로서 기억되는 것이 아니라, 흐름 그 자체로서 남아있고, 과거의 작은 소녀는 어느틈에 점점 자라 스물세살의 어른이 된다. 그리고 이제 그 스물세살의 어른은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그 기록으로만 남아있는 과거를 현재 속에서 복원시킨다. 예를 들어 사진 속에만 남아있는 어떤 풍경은 현재의 촬영된 화면과 겹쳐지며 현재 속에서 되살아나고, 단지 호적기록으로만 존재하던 아버지는 전화상으로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살아있는 인물이 되어 시간을 거슬로 올라가 우리 앞에 선다. 그러나 그럼에도 한편으로 이것은 온전히 극복될 수도 없다. 어떤 영화적 처치에도 그들은 과거의 시간으로 돌아가 온전히 과거에 머무를 수는 없다. 그들은 이 영화의 마지막에서 전화속 현재의 아버지, 어머니, 감독 그리고 그와 분리된 과거의 사진으로만 남아있다. 결국 영화가 어떤 처치를 해도 영화의 시간은 완성될 수 없고, 사실 영화라는 매체는 그 시간을 결국 온전하게 담아낼 수는 없는 불완전한 매체다. 예를 들어 그녀의 스물 세 해의 시간을 영화라는 이 제한된 기록도구가 어떻게 담아낼 수 있을 것인가의 문제. 그러나 가와세 나오미에게는 16mm 카메라라는 불완전한 매체 밖에는 그것을 기록할 도구가 없었고, 그것은 사실 우리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한편 우리는 이 영화들을 보며, 감독의 아버지 찾기와 그녀의 할머니를 보지만, 동시에 카메라를 들고 있는 '그녀'의 존재를 매순간 매장면에서 환기한다. 예를 들어 <내 할머니>에서 주인공인 할머니가 그렇게 자주 웃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은 그것을 찍고 있는 카메라를 그녀의 손녀이자 딸인 감독이 들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것은 동시에 할머니와 감독의 관계가 얼마나 긴밀한 것인지 따로 설명하지 않아도 매순간 관객들에게 깨닫게 만든다. 카메라 안의 존재가 카메라 밖의 존재를 환기시킴으로써 말이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카메라 밖의 존재인 관객은 동시에 각자 나름의 카메라 안의 존재를 예기치않게 불러온다. 자신의 할머니, 혹은 자신의 아버지, 혹은 자신의 다른 누군가. 어떤 영화는 그렇게 끊임없이 스크린 밖의 환영들을 불러온다. 

 

4.

내가 아이러니하다고 말한 것은 오늘이 대통령 선거일이기 때문이다. 개인이 아닌 국가의 구성원으로서 조마조마하게 무엇인가를 보게 되는 오늘 같은 날에, '모두를 위한', '새시대', '새로운 국가', '새로운 미래' 같은 단어가 전혀 어색하지 않은 오늘 같은 날에, 아주 지극히 내밀한 한 개인의 사적기록을 보게 된다는 것에는 무슨 의미가 있을까.

 

새로운 미래, 위대한 시작, 힘찬 첫 발걸음 같은 것을 나는 잘 믿지 않는다. 그건 누군가가 당선되었거나, 누군가가 당선되지 못했거나 하는 등의 문제와 하등 상관이 없다. 어차피 그래도 누군가는 아버지에 의해 버려지고, 할머니와 힘들지만, 또 즐겁게 버티며 살아가고, 그런 할머니를 삼각대가 없어 흔들리는 화면으로 기록하거나, 자신을 버린 아버지와 언젠가 통화를 하고 싶어할 것이다. 아니 나는 정치에 대한 냉소 따위를 이야기하는 것은 아니다. 어떤 미래가 오든 개인들은 각자 나름의 방식으로 살아가야 하니까. 외부에서 강제적으로 주어지는 무엇이 있더라도, 그 내부에서 개인들은 또 각자 자신의 삶을 살아가야 하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니까. (그러므로 그분이 이야기하는 '하나되는 국민'은 즐. 하나되는 국민은 있을 수도 없고, 있어서도 안된다.) 그러니까 가와세 나오미 감독의 이 영화들에는 어떤 긍정적이면서도 단호한 기운이 숨어들어가 있다. 삶이 자신을 속일지라도, 그 삶 앞에서 무너지지 않겠다는 다짐이랄까. 할머니도 있고, 아버지도 있고, 카메라도 있으니까. 

 

그러므로 새로운 미래, 위대한 시작, 힘찬 첫 발걸음 같은 것을 잘 믿지 않는다는 것은 동시에 쓰라린 패배, 절망스러운 미래 같은 것을 믿지 않는다는 의미도 된다. 누군가가 이겼다고 해서, 희망찬 내일이 갑자기 시작될 수도 없고, 다른 누군가가 이겼다고 해서 절망의 나날들이 갑자기 시작될 수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 절망이나 희망같은 것은 결국 그것을 받아들이는 본인이 만들어내는 것이니까. 모든 개인은 각자 나름의 의지를 가지고 각자의 삶을 살아간다는 것, 그리고 살아가야만 한다는 것. 그것을 이 지극히 개인적인 영화들이 보여준다고 생각한다면 내가 우둔한 걸까. 그리고 결국 시간이란 과거로 흐르는 듯 보여도, 결코 과거로 흐를 수는 없다는 것을 이 영화들은 또한 보여주니까. 결국 시간이라는 역사는 후퇴하지 않는다. 에둘러 돌아갈 수는 있지만...(이라고 말한 것은 역사가 서중석 선생이던가.)

 

5.

그런 의미에서 마지막으로 나도 지극히 개인적인 사진 하나 올리고 잔다. 사실은 이게 원래 목적. 이런 얘기 쓰려던 게 아니라 그저 투표 인증+오늘 산 책 인증하려던 거였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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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ephistopheles 2012-12-20 09: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셨군요.(어..어..아닌가?)

맥거핀 2012-12-20 12:54   좋아요 0 | URL
어머 언니 왜 그래요...으걀걀

기억의집 2012-12-20 10: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할머니 소리만 들어도...격하게 혐오감이 올라와요.

맥거핀 2012-12-20 12:55   좋아요 0 | URL
그래도 세상에는 좋은 할머니가 더 많죠.^^

Arch 2012-12-20 20: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 대선은 심드렁했는데 이번엔 후보 토론이며 인터넷에 올라오는 글들을 보다보니 어떤 열망 같은게 막 생기더라구요. 그런데 맥거핀님 글을 보니 너무 쉽게 절망하거나 기뻐하지 말아야겠다는 생각이 드네요. 어떤 미래가 오든.

참, 손이 많은걸 얘기하는데요 ^^

2012-12-20 13: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0 21:0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1 02: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0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20 13: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다락방 2012-12-20 14: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앗, 저도 손등에다가 저렇게 찍어서 알라딘에 인증샷 보냈었는데. 찌찌뽕이요. ㅎㅎ

맥거핀 2012-12-21 02:08   좋아요 0 | URL
요즘에는 손등 인증샷이 대세죠^^ 제가 손가락이 이쁘다는 얘기를 많이 들어서 손가락을 다펴고 찍으려 했는데 특정 후보 지지가 될 수 있을 것 같아서...

다락방 2012-12-21 12:21   좋아요 0 | URL
이제 선거 끝났으니 손가락 사진 좀 올려주면 안돼요? 네?

맥거핀 2012-12-23 21:30   좋아요 0 | URL
Share photos on twitter with Twitpic

댓글을 보고 급촬영..
하하 별로 특별할 건 없는 손이에요(급 자신감하락).

일이 있어 댓글이 좀 늦었네요.^^


다락방 2012-12-23 23:32   좋아요 0 | URL
우앗 하하. 잠이 안와서 와봤는데 맥거핀님 손가락이. 희희. 이뻐요. 손가락도 댓글보고 급촬영하는 맥거핀님도. 자신감 그대로 붙들어 매두어도 될만큼 이뻐요. 흣

맥거핀 2012-12-26 21:05   좋아요 0 | URL
손가락 보여드리는게 어려운 일도 아니고, 급촬영해야죠.^^ 덕분에 저도 간만에 제 손을 새삼스럽게 들여다봤습니다.

2012-12-20 15: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긍정적이고도 단호한 기운'. 오늘부터 필요한 것입니다요. 그나저나 영화광 엄마의 통화, 재밌네요. 그 엄마, 10년 전엔 아마 풋풋한 젊은 여자로 같은 시네마테크 로비에 표 들고 계셨었겠지요.
'내려놓음의 시간'이 그런 것이었군요. 이제는 자금 압박보다 공간 압박 땜에 내려놓는 이유가 더 크지 않나요?ㅎㅎ

맥거핀 2012-12-21 02:14   좋아요 0 | URL
저는 여전히 자금압박도 있고 공간압박도 있구요. 주위에서 왜 읽지도 않는 책을 사냐는 압박도 있구요.^^

저는 다른 건 몰라도 좋은 영화를 보기 위해 잠시 가족의 밥걱정일랑은 잊는 어머니를 지지합니다!

정말 영화만 보고 책만 아무걱정 없이 읽을 수 있는 세상이 되었으면 좋겠어요. 내가 왜 우리나라 앞날까지 걱정을 해야하냐고...

아이리시스 2012-12-21 2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투표인증이라기에 얼굴 보여주는 줄 알았는데요.................에잇 바보.

맥거핀 2012-12-23 21:27   좋아요 0 | URL
신성한 투표 인증은 얼굴이 중요한게 아님니...ㅋㅋ
아이리시스님이 인증하시면 생각해보겠음.ㅋ

아이리시스 2012-12-29 01:28   좋아요 0 | URL
맥거핀님..네가 해야 나도 한다..라는 자세는 나빠요ㅠ.ㅠ
그리고 인증도 아니고 뭣도 아니지만 제 서재에는 여전히 제 사진이 있다는ㅎㅎ
그럼 이제 생각해보는 거 맞죠? 히힛

맥거핀 2012-12-31 17:41   좋아요 0 | URL
새해 인사 전하는 걸로 대신하면 안될까요?
새해 인사를 전하러 가겠음~!

카스피 2012-12-21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저도 저렇게 인증 샷 올릴걸 그랬네요.

맥거핀 2012-12-23 21:28   좋아요 0 | URL
...에효..사실 이제 인증이 무슨 소용이겠습니까.
아무튼 카스피님도 투표하시느라 수고하셨어요.

마녀고양이 2012-12-24 13: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두 가끔 신촌 중고점에 들리는데,
우리가 모르는 상태에서 한 공간에 있을 수도 있겠다 라고 생각하니
참 재미있다는 생각이 들어요, 그게 삶이 아닐까 싶어지구요.

손 이쁘네요, 인증 도장두요.
자그마한 희망같아서 참 좋네요. 즐거운 연말되셔요.

맥거핀 2012-12-26 21:07   좋아요 0 | URL
그러게요. 알지 못하는 사이에 같은 카페에 있거나 지하철에서 지나쳤거나, 같은 극장에 앉아있거나 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뭐 아무튼 달여우님과 저는, 그리고 수많은 우리들은 각자 개인이면서도, 동시에 대한민국이라는 그다지 넓지 않은 땅에 같이 살고 있으니까요. '개인인 동시에 우리'라는 말을 생각해보게 되네요.

달여우님도 가끔은 휴식도 취하시면서 좋은 연말 보내세요.^^
 
거꾸로 보는 고대사 - 민족과 국가의 경계 너머 한반도 고대사 이야기
박노자 지음 / 한겨레출판 / 2010년 9월
평점 :
품절


박노자는 한국사회에서 특이한 존재이다. 러시아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태어나, 한국 고대사를 전공하고, 한국에 귀화하여 '블라디미르 티호노프'가 아니라, 한국인 '박노자'가 된 그의 이력도 그러하지만, 그가 한국 사회에 직격으로 쏟아내는 비판들을 통해서도 그러하다. 박노자는 항상 우리에게 고정관념을 탈피할 것을, 우리를 둘러싼 몇 겹의 사회적 장벽들을 뛰어넘어 사고하기를 강변한다. 그의 발언들은 한국의 정치적인 문제에서부터, 사회적 제도의 문제, 지식인 사회의 문제, 스포츠나 생활 습관을 대하는 자세에 이르기까지 거의 한국의 전 사회에 걸쳐져 있다. 그리고 그는 거침없이 말하기를 주저하지 않으며, 때로는 가끔 지나치다 싶은 데까지 나아가기도 한다. 그런 면에 있어서, 그는 한국 사회에 분명히 필요한 존재이며, 의견이 존중되어야 마땅한 인물이다. 한국인이면서도, 진정한 외부자의 시선을 자처하며, 우리 사회를 들여다보고, 새로운 각도에서의 해결책을 제시하는 역할을 그보다 잘해낼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기 때문이다.

 

그런 그가 이번에는 그의 주종목인 고대사에서 '다르게 보기'를 자처하고 나섰다. 모스크바 국립대학에서 고대 가야사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은 이래로, 그는 한국 고대사에 대해 꾸준히 연구하고, 글을 써왔다. 주간 <한겨레 21>에 꾸준히 연재해온 "거꾸로 보는 고대사"라는 칼럼도 그 중의 하나인데, 이번에 책으로 묶어져 나왔다. 이 칼럼들에서 그가 원하는 것은 사실 이 제목에 농축되어 있다. 즉, 기존에 우리가 가지고 있던 고대사에 대한 여러 지식들에 의문을 가져보자는 것. 학교 교육을 통해 가져온 고대사에 대한 어떤 인식들을 이번에 '거꾸로 보는' 작업들을 통해 다른 시각에서 살펴보자는 것이다.

 

물론 그간 다른 시각에서 우리의 고대사를 살펴보자는 논의들이 지속적으로 전개되어 왔다. 특히 기존의 주류 학계의 사관, 혹은 식민주의적 사관을 벗어나고자 하는 민족주의적 시각들을 기반으로 한 논의들이 그렇다. 그러나 박노자는 여기에 일침을 가한다.

 

세계 각국의 민족주의적 사학에는 한 가지 놀라운 공통점이 있다. 근현대사를 서술할 때 '우리들의 피해'를 강조하여 민족/국민의 상(像)을 역사적 정통성이 있는 '피해자'로 그리면서, 고대사의 상(像)은 '우리들의 위대성' 위주로 그린다는 점이다. 근현대사에서 '우리'가 타자를 침략했다면 그것은 '우리'의 정통성을 훼손하는 일로 인식되지만, 고대사에서는 위대한 정복군주들이 '우리'의 자랑거리가 되곤 한다. (p. 10)

 

그러나 오해가 없어야 할 것은 박노자의 이런 논의가 어떤 재야사학자들의 민족주의적 사관을 공격하고, 올바름을 가장한 '우리 역사 깎아내리기'를 의미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박노자의 논의는 그보다는 어떤 제3의 시각을 향해 있다. 그것은 이제 우리의 고대사를 바라보는 해석의 시각이 미래의 시각이 되어야 한다는 점이다. 즉 기존의 고대사를 해석하는 시각이, 지배계급 중심적인 시각이 반영된, 우리 민족의 위대성을 표출하여 국민국가로서의 정체성을 만드는 것이었다면, 이제 새로운 시각은 우리의 고대사를 다르게 해석함으로써 동북아시아의 새로운 세계 질서를 만들어가기 위한 기초를 닦아나가는 것이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이 책은 오늘날 지배계급의 팽창적 야망이 아닌 다수 한반도인들의 진정한 이해관계에 맞는 고대사를 지향한다. (중략) 지금 우리의 과제는, 지역 내의 이웃나라들과 보다 잘 어울리고, 다양한 소수자들에 대한 관용을 가지고, 피지배계급이 지배계급의 영향력을 견제할 수 있는, 성숙한 동북아시아의 사회민주적 사회를 만드는 것이다. (중략)

한 마디로, 이 책에서 다루고자 하는 것은 '우리 선조들의 고대 국가들의 위대성'이 아니다. 고대 한반도를 둘러싼 지역에서 벌어지는 물적, 인적, 사상적 흐름, 국가가 아닌 민중을 비롯한 한반도 주민의 다양한 계층, 집단이 서술 대상이다. (p. 13-15)

 

우리가 가진 고대사에 대한 기존의 지식들을 깨뜨리기 위해 박노자는 계속 묻는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질문들이다. 1부에서는 "우리는 만주의 주인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조선이 중앙집권적 국가가 아니었음을 밝히며, 따라서 고조선에 의한 만주의 영토적 지배는 일종의 오해였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낙랑 및 한사군을 일종의 침략 세력으로 보거나, 고구려를 강대한 제국으로만 보는 시각에 문제가 있음을 밝히기도 한다. 2부에서는 "신라는 민족의 배신자였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고구려, 백제, 신라의 삼국을 하나의 민족으로 보는 시각의 위험성을 보여주며, 그 당시의 외교적 관계를 염두에 두며 당과 발해 등의 주변국가까지 포괄하여 전체 구도를 볼 것을 주문하고 있다. 즉 이러한 박노자의 시각으로 보면 통일 신라 역시도 단일민족이나 종족으로 보기는 어려운 것이다. 3부에서는 "일본은 언제나 우리의 적이었는가"라는 질문을 통해, 임나 일본부설이나, 왜와 백제의 관계들을 다시 살펴보고 있다. 이를 생각하는 데에 있어서, 식민주의적 관점이나, 민족주의적 관점에 따른 시각, 즉 후대의 역사로 비롯된 일종의 콤플렉스적 시각들을 배제하고, 중립적인 시각에서, 그 당시의 맥락을 살펴볼 것을 주문한다. 마지막 4부에서는 고대의 성(性)문화나 민중의 생활사를 살펴보는 글들을 통하여, 기존의 고대국가를 살펴보는 시선들이 후대의 시각들에 의하여 새롭게 '창조'된 것임을 밝히면서, 고대 국가가 단순히 종교와 전제정치의 억압만이 존재하던 곳이 아니라, 사적 소유와 정치적 발언이 허용되던 활력의 국가였음을 보여주고 있다.

 

이 책이 가치를 가지는 것은 위의 내용들에 의해서이기도 하지만, 사실 다른 부분에서 생각해 볼 수 있는 지점도 있다. 그것은 고대사 연구, 그 자체에 대한 박노자의 시각을 생각해봄으로써 가능하다. 그것은 아마도 고대사 연구란 '사실'의 문제라기 보다는 '해석'의 문제에 가깝다는 것을 밝히는 과정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박노자는 "역사쓰기는 늘 취사선택의 과정이고, 늘 서술 주체의 시각이 개입하게 돼 있다"라고 말하며, 머리말을 통해 자신이 고대사를 어떤 방향으로 해석할 것인가를 명확하게 밝히며, 이것이 무엇을 위한 것임을 말하고 있다. 또한 상당수의 본문에서도 명확한 결론을 내리기 보다는 이러한 방향으로 추측이 가능하지 않을까라는 식으로, 조심스럽게 독자를 유도하고 있다. 그러나 일부의 고대사 논의들은 그렇지 않다. 그 논의들은 자신들의 '해석의 시각'이 무엇을 위한 것인지를 독자들에게 숨기며, 마치 명확한 사실만을 이야기하는 것처럼 독자를 이끌어가는 경우가 있다.

 

그러나 그들이 말하는 명확한 사실이란, 사실 얼마나 명확한 것인가. 고대사의 많은 자료들은 여전히 베일에 감추어져 있으며, 혹여 베일을 벗었다 할지라도, 그것에는 후대의 다른 시각들이 새롭게 덧붙여진 경우들이 많다. 또한 그 당시의 명확한 사실을 기술했다 할지라도, 그것을 어떠한 시각에서 기술했는가에 따라서 해석의 여지란 무한한 것이다. 예를 들어 지금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기술한 몇 개의 글들만이 1000년후의 사람들에게 공개된다면, 그들은 한국과 미국의 관계를 어떻게 해석할 수 있는 것인가. 혹자는 촛불 시위를 예로 들며, 한국과 미국이 적대적이었다고 할 것이며, 혹자는 미군이 한국에 주둔한 것을 들며, 한국이 미국의 식민지였다고 밝힐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고대사를 이야기하는 데에 있어서, 박노자처럼 조심스럽게, 또한 자신의 해석 의도를 밝히는 것이 차라리 나을지도 모른다. 그러므로 박노자 역시 대다수의 고대사학자들처럼 일부의 자료들을 편의적으로 취사선택하는 경향이 있으나, 그것은 이러한 맥락에서는 이해할 수 있다.

 

무엇보다도 박노자 글들은 앞에서도 논의하였지만, 미래를 지향하고 있다. 최근 며칠간의 아시안게임으로 촉발된 대만의 반한 시위와 그에 대한 우리나라 네티즌들의 경멸적인 대응을 보며, 이러한 것의 이면에 들어있는 것들을 생각해 보게 된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이러한 것들에는 분명히 그간 우리의 역사교육이 초래한 일말의 사고관이 개입되어 있다는 것이다. 반만년 역사의 민족적 자긍심만을 강조하는 기존의 역사교육을 받아온 대다수들이(우리 및 대만 모두) 그런 일방적인 시각을 가지지 않을 도리란 없을 것이었으니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에게는 박노자와 같은 미래 지향적인 역사를 바라보는 시각이 필요하다. 적어도 당신이 그런 대만의 시위에 맞서서, 우리도 대만의 국기를 불태우는 것이 해결책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면 말이다.

 

 

............................

 

사이트가 사라진다길래 예전에 리브로에 작성한 리뷰를 가져옴.

처음 작성일: 2010. 11. 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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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2-19 17: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미국과 울나라에 대한 예시를 논거로 하니, 확 다가오네요..

맥거핀 2012-12-19 18:44   좋아요 0 | URL
박노자님 시각이 비판을 많이 받는 것으로도 알고 있는데 아무튼 책은 재미있었던 것 같은...(2년 전에 읽은 책이라 기억이 ㅠ.ㅠ)
 
코쿤벨즈(Cocoon Bells) - EP 2집 Healing Of The Mind
코쿤벨즈 (Cocoon Bells) 노래 / 신나라뮤직 / 201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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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용히 미끄러지며, 한없이 부스러져 손끝으로 조금씩 빠져나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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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18 14: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주 오래전에 라디오에서 한 음악을 처음듣고 '어머 이게 뭐야' 싶어서 바로 음반매장으로 가 묻지마 구입했다. 그게 HARU의 Really라는 앨범. 그 후로 도대체 활동을 하는 건지 안하는 건지 궁금했는데, 이렇게 음악을 들려주고 있었구나. 목소리는 둥글둥글해졌고, 때로는 평범한 카페뮤직 같지만, 나이들었나봐, 이런게 좋네.
 

 

 

 

 

 

 

 

 

 

 

늑대소년, 조성희, 2012

 

 

 

(영화의 전체적 내용이 들어있음)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다. 조성희 감독이 인터뷰에서 말했듯, 이 영화는 철저하게 '동화'라는 컨셉을 가지고 시작을 했으며, 조성희 감독은 그 컨셉을 충실하게 이행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복잡하고 어지러운 플롯이 아니라, 단선적인 기승전결의 구조와 캐릭터들의 활용이 그런 부분일텐데, 예를 들어 엄마(장영남)나 마을 사람들의 캐릭터, 악역인 지태(유연석) 등을 보면, 이들은 철저하게 기능적인 활용에 머물러 있으며, 적시적소에 나타나, 이야기의 흐름을 이끌고 나가는 데에만 도움을 줄 뿐, 그 활용이 제한되어 있다. 즉 외로운 산골 마을에서 딸 둘을 데리고 사는 엄마의 어려움이나, 지태의 내면적 갈등 같은 것은 이 영화가 동화를 표방하고 있는 한, 이 영화에는 필요가 없다. 예를 들어, 동화 <빨간모자>에서 늑대가 소녀를 잡아먹을까, 말까 내적갈등을 겪는다면 그건 이미 동화가 아닌 것이다. 물론 이를 한편으로는 순이(박보영)와 철수(송중기), 이 두 메인 캐릭터에게 덧씌워진 어떤 적절한 한계와 같은 부분에서도 찾을 수 있다. 즉 이 두 메인 캐릭터는 사랑을 하되, 그것은 동화적인 사랑이어야만 한다. 즉 이 영화는 호소다 마모루의 <늑대아이> 혹은 <트와일라잇> 시리즈처럼, 두 메인 캐릭터가 섹스를 하고, 아이를 낳는 데에까지 나아갈 생각은 없다. 두 사람이 이루어지지 못해서가 아니라, 설혹 사랑을 이루어냈더라도 크게 달라질 것은 없다. 왜? 동화니까. 동화는 '그 후로 오래도록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야지, '그 후에 섹스도 하고, 애도 낳고, 부부싸움도 하면서 잘 살았습니다.'로 끝내서는 안되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서 <늑대소년>은 조금 걸리는 부분이 있고, 나의 흥미를 끌었던 부분도 그런 부분이다. 앞과 뒤에 액자를 씌워 놓고, 여기에 할머니가 된 순이를 등장시킨다는 것. 이게 명백히 동화를 표방하고 있다면, 이것은 상당히 이상하게 느껴진다.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동화 <백설공주>가 다 늙은 백설공주가 나와 과거를 회고하는 것으로 시작할 때를 상상하는 그 이질감 말이다. 즉 영화 <늑대소년>은 동화, 판타지를 표방하고 있으면서도 그 시작과 끝은 그 판타지를 스스로 무너뜨리며 시작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일단 두 가지 가능성을 생각해 볼 수 있다. 감독이든 혹은 제작사이든 이것이 판타지를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도리어 판타지를 강화해주는 것으로 생각했다는 것이 일단 하나. 다시 현재로 돌아온 마지막 씬들에서 과거의 모든 것은 그대로 보존되어 있다. 시골집도, 카라멜도, 심지어는 철수도 말이다. 그 모든 것이 보존된 공간이 순이에게 너도 전혀 달라지지 않았어, 전과 완전히 똑같아, 라고 말해줄 때, 이것이 어떤 판타지를 강화한다고 보는 것일까. 그러니까 다시 말해서 꿈이 깼다고 생각한 사람에게 꿈속의 인물이 나타나, 아니야 너는 아직 깨지 않았어, 라고 말하는 것이 그 꿈을 억지로라도 지속시킨다고 보는 것일까. 아니면 여기에 어떤 영화의 잠재된 핵심, 그러니까 여기에 영화의, 혹은 감독의 무의식이 들어 있는 것은 아닐까. 즉 이 앞과 뒤의 액자들은 영화의 주플롯과 분리되어 있으며, 당연히 그것이 존재하지 않아도, 이 아름다운 동화에는 아무런 문제가 없다. 아니 모든 영화제작사들은 1분이라도 영화에서 줄어들기를 바라므로, 이 액자가 사라지기를 바랬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와 더불어 리뷰들을 보면 상당수의 관객들도 이 액자를 그렇게 바라지는 않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면 이 필요치 않은 것을 억지로 집어넣었다는 이 사실이, 다른 무엇인가를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

 
문학평론가 신형철은 이 <늑대소년>을 다룬 글(씨네21)에서 철수를 '어정쩡한 타자'로 규정한다. 즉 철수는 '10대 소녀의 백일몽(김혜리)'이라는 견해와 '근대의 정상성에 맞선다(이용철)' 라는 견해 사이에 어정쩡하게 위치해 있다. 다시 말해서, 그는 10대 소녀의 꿈속에 나타날 수 있는 미소년의 형태를 가지고 있지만, 분명히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이기도 하다. 철수라는 늑대와 인간 사이에 위치한 이 존재는 도대체 어떠한 존재인가. 이 질문은 영화의 마지막 철수를 둘러싼 여러 사람들의 질문이기도 했다. 지태나 군인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이므로 - 그 자체로 위험하기도 하고, 자신들의 어떤 것을 감추기 위해서 - 죽여야 한다는 것이었고, 박사나 순이의 가족, 마을사람들의 의견은 철수가 위험한 존재가 아니므로 이곳 인간세상에 포함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즉 우리가 타자를 만났을 때 제기되는 즉각적인 질문, 이 타자는 나에게 위험한가, 그렇지 않은가가 여기에서 다시 한 번 반복된다. 그리고 여기에서 영화가 의도한 바대로 대부분의 관객은 순이의 편, 그러니까 철수가 위험하지 않다는 것에 동조하게 된다. 왜? 우리는 지금까지 철수의 '길들여짐'을 보았기 때문이다. 즉 철수는 위험한 존재였을지도 모르지만, 순이의 조련으로 인해 길들여졌다고 보는 것이다. 그러나 마지막에 철수는 기다리라는 순이의 간절한 외침에도 다시 야수성을 드러내 보이고, 철수의 인간세상에로의 편입은 실패한다.

즉 이 영화 <늑대소년>을 조금 다른 관점에서 보면, 인간이 아닌 다른 어떤 것, 간단하게 말해 '괴물'을 인간과 비슷한 어떤 것으로 길들이려다 결국에는 실패하는 내용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여기에서 석연치 않은 부분이 생긴다. 인간이 되는 것이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지만, 몇십 년 후 순이가 돌아왔을 때, 그 괴물은 스스로 인간이 되었기 때문이다. 즉 실패하는 것처럼 보였던 이 길들여짐은 몇십 년이 지나서야 완성이 된다. 그것도 조련사의 도움이 없이도 말이다. 다시 말해서 이 괴물은 조련사가 길들이는 데 실패하였지만, 기어이 스스로 길들여졌고, 더 나아가 조련사보다 훨씬 나은 위치에 서 있다. 즉 조련사는 늙고, 괴물이 되었지만, - 영화의 첫 대사를 기억해보라. 할머니는 거울을 보며 말한다. "이런 괴물을 봤나..." - 괴물은 잘생기고, 뽀송뽀송한 예전의 그대로의 모습으로 인간이 되었다. 이것이 어떻게 가능할까. 내가 묻는 것은 물리적인 가능성이라기 보다는, 이 영화에 깔린 어떤 전제이다. 즉 철수는 길들여지기 훨씬 이전부터, 괴물인 적은 없지 않았나, 이미 시작부터 이 영화는 철수를 인간이라는 틀 안에 집어넣고 시작하지 않았나,하는 물음이다. 즉 순이의 길들이기는 어쩌면 '가짜 길들이기', 아장아장 소꿉장난과 같은 것은 아니었나 하는 물음이다. 

몇 가지의 힌트들이 있다. 철수와 순이의 첫 조우. 예를 들어 이렇게 물을 수 있다. 철수는 왜 순이를 공격하여 잡아먹지 않았나. 그가 늑대라면 도리어 인간인 순이를 공격하는 것이 마땅하지 않을까. 물론 누군가는 반론을 제기할 것이다. 철수는 늑대가 아니라, '늑대인간'이라구요. 그래서 철수는 순이와 엄마가 내민 감자를 게걸스럽게 먹어치운다. 감자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그런데 우리는 그 전에 사실 철수의 먹이를 이미 본 적이 있다. 철수를 만들어낸 정체불명의 인물이 영화의 첫 장면에서 들고 있던 양동이에 가득담긴 생고기 조각들. 그런데 이제 와서 감자와 밥과 국과 잡채를 먹는 늑대인간이라. 뭐 좋다, 늑대인간은 잡식성일 수 있으니까. 다음의 장면. 김혜리는 짤막한 글(씨네21)에서 예리하게 다음의 장면을 집어낸다. 철수가 마을의 염소를 해쳤다는 누명을 쓰자 순이가 "네가 그런 거 아니지?"라고 캐묻는 장면. 그러면서 설명을 단다. '그녀도 영화도, 늑대소년을 슬픈 인간으로 볼 뿐, 그의 수성(獸性)까지 받아들이진 못한다.' 김혜리의 지적대로 늑대소년이 염소를 잡아먹을 수 있다는 것이 도리어 당연한데도, 그녀도 영화도, 나를 포함한 관객들도 그가 그럴 리 없다고 굳게 믿는다. 지태가 저지르는 일을 이미 보았기 때문에? 그것도 그것이지만, '처음부터' 그가 그러지 않았기 때문이다. 다시 반농담으로 돌아가자면, 그가 처음부터 감자를 먹었기 때문이다. 즉 그가 괴물이라는 가능성은 순이에게도, 마을사람들에게도, 그리고 관객들에게도 처음부터 배제되어 있었다. 그는 완벽한 인간의 형상을 하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송중기니까.    

즉 우리는 이 영화에서 어정쩡한 타자 늑대소년을 보며, 그의 밝은 면만 들여다본다. 늑대소년의 기원에 대해 장황하게 설명하는 박사에게 엄마가 "아..무슨 소리인지 하나도 모르겠구요."라고 말하는 영화 속 장면과 같은 것이라고나 할까. 그것은 관객이 나빠서가 아니라, 영화의 구조가 그렇게 짜여진 탓이다. 다시 말해서 이 영화에서 '늑대소년'이라는 사실 이 복잡한 타자는 무엇인가가 제거되어 있고, 소녀도, 영화도, 관객도 보고 싶어 하는 것은 무엇인가 - 예를 들어 수성이라고 말할 수도 있고, 타자가 가지는 불온성이라고 할 수도 있는 - 가 제거된 늑대소년, 혹은 송중기이다. 영화의 마지막에서 우리는 과거의 모든 것이 그대로 보존된, 심지어는 당연히 변해야 할 늑대소년마저도 그대로 보존된 공간을 본다. 그래서 이를 과거로의 타임머신, 혹은 과거의 박제라고 부를 수도 있을 것이다. 박제를 하겠다는 것은 그것을 어떤 상징으로 만들고, 그 상징에 의미를 부여하겠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사냥꾼들의 동물 박제이건, 북한의 김일성 박제이건 간에 그 박제물에는 어떤 상징적인 의미가 뒤따른다. 그렇다면 이 영화에서 굳이 액자로 만들어낸 과거의 박제는 무엇을 담고 있는가?

그것은 혹시 시간의 망각과 같은 것이 아닐까. 예를 들어 북한의 김일성 박제가 시간을 망각시키는 하나의 도구로서 사용되는 것처럼 말이다. 영화의 시작부 "이런 괴물을 봤나...'라고 중얼거리는 할머니를 보며, 그것은 어떤 중의적인 의미가 있을지 모른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늙고 변해버린 자신의 모습에 대한 한탄이면서, 동시에 과거의 어떤 시간에 대한 회한이나 안타까움 같은 것을 담은 것은 아닐까 생각했다. 그러나 그녀가 결국 과거로 돌아가 보게 되는 것은 과거 자신과 늑대소년을 둘러싼 어떤 것이 아니라, 어떤 것이 더욱 완벽히 제거되어 완전히 인간이 되어버린 괴물, 아니 그 괴물이라는 말이 어울리지 않은, 아름답고 뽀송뽀송하게 스스로 정화된 과거의 어떤 박제물이다. 즉 이 과거에는 과거 그 시간 이후로 사십 여년이 넘게 흐른 그간의 세월이 끼어들 여지가 없다. 깨끗하게 보존된 김일성의 박제에 몇십 년 간의 인민들의 고난의 행군이 끼어들 여지가 없는 것처럼 말이다. 게다가 이 늑대소년은 김일성이 아니라 송중기다. 과거의 괴물에게는 이미 어느정도 이 수성이 제거되어 있기는 했지만, 다시 퇴행하여 돌아간 이 현재적 과거에서는 그 수성의 흔적조차 이제 거의 남지 않게 되었다. 그러므로 이 이야기는 소녀의 성장담도 아니고, 철수의 성장담도 아니고, 그저 박제담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액자의 시작부분에서 그녀의 대사 "이런 괴물을 봤나...'에만 정신이 팔려 한 가지를 놓치고 있었다. 그녀가 거울을 보며 그 대사를 하고 있었다는 사실. 싸이보그지만 (예쁘니까) 괜찮아. 괴물이라도 잘생겼으면 괜찮아. 인간이라도 늙었으면 괴물인걸. 늙음, 그 늙음이 보여주는 시간은 그렇게 망각되어 다시 타자들을 분리해낸다. 물론 여기에는 근대가 만들어낸 '정상성'이라는 기제가 여전히 작동된다. 아름다운 아리아인, 아름다운 육체, 아름다운 인간성. 

아..물론 글의 첫머리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이야기는 동화다. 동화는 물론 동화로 남겨두어야만 한다. 하지만 모든 동화는 동화 이면의 기담을 담고 있음이 또 사실이 아니던가. 한 잉여의 늑대소년 기담, 쯤이라 해두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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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12-12 16: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건 아마 이 영화가 동화이기 때문 아닐까요? 마지막 장면에서 중년여성들의 마음이 흔들렸다, 이거누어쩌면 첫사랑에 대한 또 다른 건축학개론이 아닐까, 여전히 나를 예쁘다고 해주는 지금의 당신. 이라는 요지의 칼럼을 신문에서 읽었거든요(중앙일보였나..). 전 이 영화를 안봤는데, 이 말이 꽤 설득력 있다고 생각했거든요. 아 그래서 나이가 든 순이와 재회하게 했구나, 판타지를 깨서 판타지를 지켰군 싶은 느낌(안 보고도 잘도 말하는군요^^;).

전 지난 주말 <심플라이프>를 봤습니다, 아, 유덕화는 정말 멋지더군요..

맥거핀 2012-12-13 14:07   좋아요 0 | URL
아마도 그런 측면도 있겠죠. 중년여성들의 판타지를 건드린다, 뭐 그런. 그런 측면에서 젊은 관객을 버리고, 보다 더 나이든 관객을 타겟으로 삼았다고 볼 수도 있겠구요. (젊은 관객들은 이 액자를 대체로 안 좋아하는 듯.)

근데 또 한편으로 철수는 타자니까요. '타자'라는 것이 원래 그런 것이듯, 알 수 없는 어떤 것. 그런데 이 영화가 결국 선택하는 것은 그 알 수 없는 타자를 뽀샤시한 이미지, 예쁜 어떤 것에 박제, 고착시키는 거라고 봤어요, 저는. 타자가 위험하니까 배척하여야 한다도 위험하지만, 타자가 이쁘니까 받아들여야 한다(어떤 이미지를 씌우는 것)도 마찬가지로 저는 위험하다고 봐요. 예를 들어 현재 우리사회에서 대표적인 타자가 외국인 노동자들일텐데, 이들이 범죄만 저지르는 위험한 사람이다고 낙인찍는 것도 문제가 있지만, 동시에 '러브 인 아시아' 같은 데서 하는 식으로 착하고 아름다운 사람들이다라고 이미지만을 씌우는 것도 저는 마찬가지로 조금은 위험하다고 봐요. 그러니까 그들도 나쁜 짓도 하고, 이상한 생각도 하고, 동시에 선의도 있고, 때로는 좋은 일도 하는 우리랑 같은 사람들이라고 생각하는 것이 타자에게 조금은 가깝게 다가가는 것이겠지요.

아무튼 간에 그런데 이 영화에서 철수에게 어떤 이미지를 고착화하여 씌워버리는 것, 마지막에 그를 박제시켜 버려두는 것은 판타지를 강화했을지 몰라도, 저는 그런 판타지가 그리 반갑지는 않았습니다. 물론 동화이기 때문이라는 Shining님의 말씀도 공감하지만요. 사실 상당수의 동화가 따지고 들어가면 좀 이상한, 그러니까 꺼림칙한 부분들이 있잖아요.^^;

유덕화 씨는 나이가 들어도 왜 그렇게 멋진지..동안 뭐 그런 거 보다도, 어떤 사람의 분위기라는 게 있잖아요. 그런게 멋있는 것 같아요.

저는 개봉영화들 중 일단 <레미제라블>, <신의 소녀들>, <아무르> 이 세 편을 최우선 순위에 놓고, 볼 예정입니다. (원래 대선국면에는 대선이라는 워낙 잼있는 영화가 하는터라, 영화에 관심이 떨어지는데, 이번 대선은 양쪽이 하는 행태들을 보니 그만 관심이 뚝 떨어져서 영화나 열심히 봐야할 듯.)

맥거핀 2012-12-13 14:32   좋아요 0 | URL
다시 보니 댓글이 필요이상으로 너무 기네요. 댓글이 반가워서 그래요..^^;;;

Shining 2012-12-14 15:48   좋아요 0 | URL
하하. 저도 만날 댓글 완전 길게 달잖아요ㅎㅎ 음, 맥거핀님의 글에 댓글이 적은 건... 어떤 말을 해야할지 모르기 때문일겁니다ㅠ 추천을 누르는 것 외엔, 대체 무슨 말을 쓰지, 하는 느낌 말이죠. 저도 그럴때 많거든요ㅠ 밑의 영화 <생선 쿠스쿠스>는 몇 년 전 영화제에서 봤습니다. 알모도바르의 <귀향>에 비견된다는, 프로그래머님의 말씀에 홀딱 넘어갔는데 전 다소 지루했던 걸로 기억합니다. <귀향>이라니, 제가 완전 사랑하는 영화예요!

동의합니다. 타자인만큼 어떤 의미로든 필터를 씌우는 건 위험하지만, 어쨌든 사람은 타자(넓은 의미로서)를 바라볼 때 필터로밖에 볼 수 없으니까요, 라는 생각이 드네요(영화랑은 무관하게 댓글을 읽다 떠오른 생각입니다). 때로는 자기 자신을 볼 때도 필터링을 하는데, 남을 볼 때는 좋든 나쁘든 좋다고 여기든 나쁘다고 여기든 어떤 타자화, 가 작용되는 게 별 수 없는 게 아닐까 문득 생각이 듭니다.

전 <가위손>에 비유한 누군가의 평에 넘어갈 뻔, 했는데 친구가 코웃음 치더라구요;(아마 그 친구에겐 <귀향>에 비유된 <생선 쿠스쿠스>였나요...) 맞아요, 동화는 기본적으로 뭔가 그로테스크하죠.

유덕화 씨, 젊을 땐 좀 느끼하다고 생각했는데. 아, 완전 멋졌어요. 외모가 아니라 느낌이, 풍체나 눈빛이나 표정에서 오는 느낌이.. 완전 멋지던데요ㅠ

<신의 소녀들>은 개봉 안하고; 나머지 두 개는 저도 볼 겁니다*-_-*

맥거핀 2012-12-16 23:23   좋아요 0 | URL
아시듯이 원래 프로그래머들이 좀 과장하는 경향이 있죠. 하긴 뭐 그러라고 있는 자리니까요. 저도 영화제에서 소개하는 영화 소개글 같은 거 열심히 읽는 편인데, 사실 읽고나도 이게 뭔 소리인가..하는 경우가 더 많아요. 근데 문제는 그렇게 뭔 소리인지 모르겠다,라는 영화에 더 끌린다는 점입니다만.

아..근데 이 영화 <가위손>을 연상시키는 부분이 있기는 해요. 물론 가위손이나 그 원형인 프랑켄슈타인 이야기에서처럼, 주인공 괴물이 어떤 내적인 갈등을 겪는 부분이 없지만요. 그런 부분에서 모티브를 따오기는 했는데, 그걸 그냥 동화적으로만 이용하고 있죠.

<심플라이프>도 보러가야 하는데, 늘 새로운 영화가 출현하고, 기존에 보려던 영화는 늘 기억 속 어디론가로 사라져버리지요. :)

Shining 2012-12-17 14:15   좋아요 0 | URL
아하, 그래서 맥거핀님은 어워드 대신 한 해 동안 놓쳐서 아쉬운 영화들을 정리하시는 건가요?+_+

어제 <호빗>을 봤습니다. HFR 3D로 봤는데 3D 효과는 약간 아쉽고(아직까지 3D로는 <아바타>에 버금가는 영화가 없었다,는게 제 생각입니다) 스토리도 약간 쳐지는 인상이었는데 액션씬이 정말 멋지더군요. 게다가 이게 1편, 도입과 전개라고 하니 역시 피터 잭슨이다, 싶네요. 확실히 정교하더군요, 색채며 움직임이 부드럽구요. 어지럽다는 일부 평이 있다던데 전 어지럽지는 않았는데 몇몇 장면에서 <트랜스포머> 처음 볼 때 생각이 났어요. 프레임 전환이 너무 빨라서, 어떤 장면들은 인지하기도 전에 지나간다는, 그런 느낌이요. 이걸 네거티브 필름으로 현상한다면 엄청 신기하겠다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네, 그냥 그렇다구요^^;

맥거핀 2012-12-17 22: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그렇군요. 늘 이렇게 기술적인 측면에서 새롭게 시도하는 영화들을 보면 흥미가 가기는 합니다. 다만 문제는 제가 잘 적응을 못한다는 게 문제기는 한데요, 사실 3D를 못견뎌하는 편이라서 그냥 3D도 아닌 HFR 3D를 잘 볼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근데 생각해보면 재미있기는 해요. HFR이라는 게 프레임수를 늘린다는 거죠? 게다가 3D니까..즉 그만큼 '현실에 가까운', '눈앞에서 보는 어떠한 것'에 가깝게 다가간다는 건데, 영화가 점차 이렇게 되어가는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어요.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사실 이중의 모순된 심리를 가지잖아요. 그러니까, 현실에 가까운 화면을 보고 싶어하면서도, 동시에 이것이 현실이 아니기 때문에 안도를 하지요. 그러니까 예를 들어 이번에 개봉하는 <타워> 같은 재난영화를 봐도, 그 재난은 최대한 실감이 나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그것은 관객이랑 분리가 되어야 하잖아요. 그 중간 어딘가에 영화가 서 있는 것인데, 이것이 자꾸 현실에 비죽비죽 가까이 갈 때 균형점을 어디서 잡아야 하는건가, 같은 것.

그러니까 예를 들어 아주 오래전 스크린에서 기차가 달려올 때 관객들이 그것이 진짜인 줄 알고 놀라서 피하려던 같은 일들이 벌어지는 것이 영화의 감상에 도움을 줄 것인가, 아닐 것인가의 문제. 혹은 영화에서 물이 튀는 장면같은 것이 있을 때 실제로 물을 관객에게 뿌리는 것이 실제의 영화관람에 도움을 줄 것인가의 문제-극단적인 4D 같은 것.

비근한 예로 '언캐니 밸리' 같은 것도 있으니까요. 디지털 캐릭터가 너무 인간에 가깝게 되면 도리어 관객들이 그것에 거부감을 가지는 것, 그런 비슷한 것이 아마도 이 3D, HFR 3D를 둘러싼 문제에도 여전히 일어날 것 같다는 생각이 드네요. 현실적으로 눈의 피로와 같은 문제도 있을 것이고요. 프레임 수를 높인다는 것은 게임에서 사용하는 고프레임과 비슷해진다는 건데, 게임 오래하면 눈이 많이 아프잖아요, 뭐 그런 문제도 있을 거고...아무튼 정지해있는 물체를 위해 고프레임을 쓰지는 않으니까요. <호빗>이 좀 길다고 하던데, 3시간 가까이 되는 시간동안 그 고프레임의 물체의 이동을 지켜보는 것이 피로감을 어느정도 불러오는가의 문제도 있겠죠.

(물론 이는 관객의 측면에서만 본 것이고, 영화 제작의 측면에서 보면 더 심한 변화가 많이 일어나니까요. 얼마전 <카페느와르> DVD 코멘터리를 보니 디지털에 대한 이야기를 하던데, 배우들 말이 필름에서 디지털로의 변화가 배우들의 연기패턴에도 여러 변화를 불러온다고 하더라구요. 3D, HFR 3D로의 변화도 비슷한 강도의 변화를 불러오겠지요.)

아무튼 어쩌면 이런 것도 신기술에 대한 일차적인 거부감에서 유래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네요. 영화에서 소리가 처음 등장했을 때, 왜 영화에서 소리가 필요하죠?라고 묻는 사람들이 있었던 것처럼요.

Shining 2012-12-19 01:34   좋아요 0 | URL
필름영사기는 정말 신기해요. 어떻게 보면 아주 단순한 원리지만 어떤 면에선 굉장히 섬세하죠. 필름을 편집할 때는 더 조심스럽죠. 하나하나 잘못된 컷을 손과 눈으로 잡아내지 않으면 잘못하면 필름을 통째로 버리게 되거든요. 20번대 프린트와 200번대 프린트(블록버스터 영화는 200벌 이상을 만들죠)는 당연히 화질이 다르고 거의 복불복인데; 200번대 프린트가 200번 이상 상영을 하기도 하구요. 쇼박스의 상징인 하얀 얼굴이 회색이 되고, 음질도 늘어나고 무엇보다 이건 상영을 접으면 무조건 쓰레기가 되거든요(재활용이 불가능한, 그저 처치곤란한..). 반면에 디지털은 외장하드만 딸랑 오는데다 몇 백번을 상영하든 똑같으니까요. 그런데 재밌는 건, 디지털이 사고나면 더 파장이 커진다는 거. 사고날 확률은 적지만 사고나면 줄줄이 이어질 확률이 높거든요. 저는 영사기가 엄청 신기했고 지금도 신기해요. 그래서, 좀 낡고 늘어져도 그 자체로도 참 좋았거든요. 기술적인 면이 아닌 어떤 감상적인 면에서 말이죠.

아이맥스는 관람한 적이 없어서 모르지만 3D는 자리선정이 아주 중요하죠. 사실 <호빗>보고 나와서 약간 눈이 뻑뻑한 느낌은 들었어요. 집중을 한 탓도 있겠지만 워낙 정교하다보니 눈을 깜빡이는 속도도 더뎌진것 같았거든요. 프레임 수가 늘어난다는 말에 가장 처음 생각난 건 필름의 무게였어요. 필름을 하나하나 봐도 참 신기한데 이게 두 배라면 거의 미동도 없는 것처럼 느껴지겠다는 것과 필름으로 따지자면 양이 어마어마할 거라는 거. 그런 느낌을 받고 디지털이란 참 편하고 유익하고 쉽다는 생각이 계속 드네요.

그렇네요. 영화란 판타지를 가장한 현실을 믿으러 가는 곳이며 현실인 척 하는 판타지를 보러 가는 곳이니까요. 현실을 반영하지 않는다며 비판하다가도 지나치게 현실적이면 거부감을 느끼기도 하고.

<휴고>가 생각나네요. 마틴 스콜세지는 정말 영화를 사랑하는구나, 몇 십년 전에도 지금도 똑같이 사랑하고 경애하는구나, 라는 느낌. 맥거핀님 글과는 약간 무관하지만(쓰다보니;) 글을 읽다보니 드는 마음들을 적어봅니다 :)

맥거핀 2012-12-20 02:36   좋아요 0 | URL
네..하신 말씀을 들으니 재밌네요. 사실 필름같은 아날로그는 조금씩 마모되고 망가지고 하기는 하지만, 어떤 물리적인 실체가 있으니 복구의 여지가 있잖아요. 그런데 디지털은 이것이 철저하게 가상의 공간에만 있으니 한번 문제가 생기면 그냥 휙 날라간다는 것...그러니까 미래의 어느날에 지구에 엄청난 전자기파가 몰아닥친다면 디지털 공간의 자료들은 아무 티끌도 없이 한 방에 휙 사라지게 되는 것이잖아요. 책이나 필름이 불에 탄다면 탄 자국이라고 남지만, 디지털은 뭐 그냥 날라가게 되니. 디지털 백업도 중요하지만, 아날로그 백업도 그래서 여전히 필요한 게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Shining님은 아무래도 아날로그를 사랑하시는 아날로그형 인간이신 듯 해요. 프레임 수가 늘어난 영화를 보면서 필름의 무게를 생각하신다니요. 사실 디지털 같은 것을 생각할 때는 대체로 그런 물리적인 무게 같은 것은 생각안하잖아요. 그러고보니 궁금하긴 하네요. 1M 파일과 1G 파일은 물리적으로 무게가 어떻게 달라지는가, 같은 것.

갑자기 야밤에 쓸데없는 생각이 듭니다. 갑자기 문제가 생겨서 디지털 상에만 있는 내 글이 다 날라가면 어떡하지, 지금 미리 프린터로 따로 뽑아두어야 하나 같은 것...-_-;

Shining 2012-12-20 12:49   좋아요 0 | URL
2분 30초, 4분 짜리 예고편 필름을 몇 개 갖고 있는데요. 그걸 촘촘하게 말아도 크기가 꽤 되거든요. 당연히 무게도 있구요. 필름을 한 번 접하면, 그 무게를 먼저 짐작하게 되는 것 같아요. 그렇네요. 디지털은 부피, 아날로그는 질량일까요.

저는 중요한 문서를 온라인, 외장하드, usb에 똑같이 복사해뒀는데요. 하지만 잃을라고 하면 세 개로 나눠나도 방법이 없겠지, 라는 생각이 들 때는 있습니다. 저희 집에는 프린터가 없는데, 저는 어떻게 하죠?

맥거핀 2012-12-20 13:16   좋아요 0 | URL
Shining님은 머리 속에 다 들어있기 때문에 굳이 프린터 해놓지 않으셔도 될겁니다.^^

2013-01-13 23:5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3-01-14 00:02   URL
비밀 댓글입니다.
 

 

 

 

 

 

 

 

 

 

 

 

생선 쿠스쿠스, 압델라티프 케시시, 2007

 

 

 

(영화의 결말부의 내용이 들어있습니다.)

 

 

 

영화를 뒤에서부터 거슬러 올라가 보자. 영화의 마지막, 이제 새롭게 선상(船上)식당을 시작하려는 늙은 슬리만의 배 위에서 시범 운영 겸 개업 축하 파티가 벌어진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대접하여야 할 전처가 만들어준 생선 쿠스쿠스는 자식들 간에 벌어진 소동 끝에 어디론가로 없어져 버리고, 슬리만은 그것을 찾으러 나가지만, 그가 발견하게 되는 것은 생선 쿠스쿠스가 아니라 아들과 며느리의 부서질듯한 관계와 자신의 오토바이를 몰고 달아나는 어떤 아이들이다. 손님들의 불만은 폭발 직전에 이르고, 그녀의 새 딸, 그러니까 새로 만나고 있는 여자의 딸인 림은 그런 손님들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갑자기 밸리댄스를 춘다. 그런 밸리댄스는 손님들의 열광 속에 농밀하고 아슬아슬하게 하염없이 이어지고, 슬리만은 자신을 거의 데리고 노는 듯한 아이들의 뒤를 쫓다가 그만 쓰러지고 만다. 그런 쓰러진 슬리만의 모습과 이국적이고도 이질적인 밸리댄스의 음악이 겹치며 엔딩크레딧이 오른다. 

이 마지막은 여러가지 복잡한 문제를 보여주고 있다. 여기에는 프랑스 사회를 살아가는 슬리만 가족을 비롯한 아랍계 이민자들의 모습과 그들의 문화가 들어 있으며, 예전 세대의 퇴장과 새로운 세대의 등장의 문제, 그 안에서 일어나는 갈등과 화합의 문제가 들어 있고, 구성된 가족과 가족의 해체, 분열, 그리고 새로운 가족의 결합과 그런 가족들 사이의 미묘한 갈등의 문제가 나타나며, 동시에 계층과 계급의 문제, 즉 그 선상식당의 수많은 손님들의 다양한 동상이몽이 드러난다. 이것을 감독 압델 케시시는 거의 마법과 같은 솜씨로 마지막에 압축시키며, 드러내 보이면서 동시에 감춘다. 즉 이 수많은 문제들은 수면 아래에 여전히 남아 있으면서 수면 위에는 오직 두 가지만을 드러내 보인다. 그 하나는 밸리댄스, 그 중에서도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 아니 이 표현으로는 사실 다 담기 어렵지만 - 배이며, 다른 하나는 오토바이를 타면서 와서 가져가보라고 조롱하는 아이들의 뒤를 쫓는 슬리만의 달리기이다. 이 두 가지가 교차하며, 여기에 밸리댄스의 흥겹고도 농밀한 음악이 겹쳐질 때, 그것은 어떤 이상한 축제가 된다. 예를 들어 임권택 감독의 영화 <축제>가 축제가 아닌 축제, 그럼으로써 더 축제가 된 어떤 마법과 같은 풍경을 보여주던 것처럼 말이다.

즉 이 마지막은 산적한 문제들을 드러내 보이면서도 이상하게도 활력과 축제의 힘이 만들어내는 희망과 같은 것들이 있다. 그것은 마치 한편으로는 여성들의 힘, 여성성이 지배하는 사회의 힘과 같이 보이기도 하는데, 어딘가로 사라져버리는 아들, 그리고 결국 길에 쓰러지는 아버지와 달리, 이 축제를 지속시키는 것은 여성들이기 때문이다. 밸리댄스를 춤으로써 모든 이들의 곤경을 누그러뜨리는 림의 행동은 물론이거니와 새 딸인 림과 전처와의 사이에서 난 딸들과의 불편한 관계는 림의 밸리댄스로 약간은 해소되는 것처럼도 보이고, 그 사이에 슬리만의 새 여자는 다른 음식을 해가지고 가져온다. 그리고 동시에 슬리만의 전처는 남은 생선 쿠스쿠스를 어느 노숙자에게 전해준다. 즉 아이러니하게도 이 영화에서 마지막에 생선 쿠스쿠스를 유일하게 맛보게 되는 것은 초대받지 못한 손님이다. 물론 이것이 수렴되는 것은 위에서 얘기했듯이 밸리댄스를 추는 림의 풍만한 배이다. 이는 어떤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다산성이나 모성과 같은 느낌인데, 이 림의 배와 슬리만의 달리기가 교차하면서 만들어내는 어떤 이미지가 생겨나기 때문이다. 즉 슬리만의 아이들을 뒤쫓는 달리기는 마치 그의 생을 압축하여 보여주는 것처럼 보인다. 닿을듯이 닿을듯이 오토바이에는 닿을 수 없지만, 그는 달리기를 멈출 수 없다. 그 오토바이는 그때 그가 가진 모든 것이기 때문이다. 마찬가지로 그는 가족들을 건사한다는 목표로 한평생 공장에서 일했지만, 공장에서는 버려졌고, 성적으로는 불능의 상태가 되었으며, 이제 선상식당을 시작한다는 새로운 목표를 세웠지만, 그 목표는 이제 위기에 처해있고, 그는 그 목표가 가장 가까이에 와 있을 때 달리기의 끝에서 예정된 쓰러짐을 맞는다.

 

그렇다면 그것은 불길한 마지막이고, 안타까운 결말인가. 그렇지만은 않다. 여전히 슬리만의 다음 세대, 그러니까 그의 자식들과 그들이 만들어낼 세계는 남아있기 때문이다. 그것을 선상식당의 밸리댄스는 보여주고 있는 것이 아닐까. 새 딸 림이 축제를 지속시키기 위하여 추는 춤, 그것으로 조금은 가까이 가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새로운 가족들간의 화해, 그 새로운 세대가 만들어나갈 발걸음을 이 마지막이 보여주고 있는 것은 아닐까. 왜냐하면 이 곳 프랑스는 그들이 계속 이어나가 살아야할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의 초중반부 슬리만은 선상식당을 하기 위해 낡은 배를 구입하고, 그것을 고쳐나간다. 그리고 선상식당을 열기 위해 여러 복잡한 절차, 그러니까 식당허가를 받고, 투자를 받고, 위생에 대한 감독을 받는 등의 통과의례를 거친다. 이 배는 그러니까 어쩌면 슬리만이라는 사람의 재현일지도 모른다. 그라는 존재는 오랫동안 이 이민자사회에 적응하려 애쓰느라 점점 낡아졌으며, 그 마지막에서 그는 새롭게 수리되어 새로운 용도로 사용하려는 배처럼, 새로운 삶의 길로 나아가려 한다. 그러나 사람은 배와 달리 완전히 고쳐질 수 없는 것. 대신 사람은 배와 달리 다음의 세대를 낳고, 그들에게로 삶은 이어진다. 그리고 새로운 세대는 전대의 경험을 바탕으로 다시 새롭게 자신들의 세계를 만들어 나간다.
 
이는 한편으로는 이민자들의 세계를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민자들은 새로운 땅에 들어온 낡은 사람들이다. 그들은 고기잡이 배가 식당용 배가 되려면 여러 복잡한 규칙과 절차를 따라야 하는 것처럼 낯선 땅에 적응하기 위해 과거의 습관을 버리고, 새로운 문화와 새로운 규칙에 적응하여야만 한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그들은 동시에 과거의 습관, 과거의 문화를 완전히 버릴 수가 없다. 그 완전히 버릴 수 없는 과거의 어떤 것들은 새로운 땅에 긴장을 불러일으키고, 그 일부는 또 새로운 세계로 긍정적으로 수렴되어 새로운 문화가, 새로운 삶의 양식이 된다. 그것의 대표적인 예는 바로 이 영화에서의 '생선 쿠스쿠스'와 같은 것이다. 쿠스쿠스(couscous)는 파스타의 일종으로 그것에 채소를 곁들이면 채소 쿠스쿠스, 생선을 곁들이면 생선 쿠스쿠스 등이 되는 음식이다. 이는 슬리만 가족과 같은 튀니지 이민자들에게는 흔하디흔한 음식이지만, 그것을 접할 기회가 흔치 않은 선상식당의 손님과 같은 프랑스 인들에게는 조금은 낯설고 이질적인 음식이며, 따라서 그 선상식당에서 처음으로 이 음식을 대접하는 것은 긴장되는 일이다. 그러므로 그 음식은 한편으로는 이민자 사회의 상징, 즉 전통의 보존과 새로운 규칙의 습득 속에서 만들어지는 어떤 긴장들을 상징한다고 볼 수 있을 것이며, 그 긴장들은 다음의 세대들로 여전히 이어지는 것이다.

이 영화의 감독 압델 케시시는 이러한 것을 그들의 육체로서 효과적으로 드러내보인다. 나는 이 영화를 음식, 그 음식을 소비하는 육체의 영화라고 부르고 싶은데, 이 영화의 모티브는 음식이면서, 그 음식을 소비하고 활동하는 육체이기도 하다. 압델 케시시는 이 영화의 거의 모든 부분을 인물의 곁을 바싹 따라붙는 클로즈업에 가까운 화면들의 교차로 채우고 있는데, 이는 인물들간의 갈등과 그들의 미묘한 생각을 드러내는 도구이기도 하면서 동시에 그들의 육체를 선명하게 드러내보이며, 이는 마치 세대들의 육체성의 차이를 드러나게 하는 것처럼 보인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는 여성들의 가슴이나 배를 스치고 지나가는 씬이 많고, 이것과 연관한 이야기 등이 나오는데, 이는 성적인 느낌이라기 보다는 어떤 세대간의 연속성을 만들어낸다는 느낌이 있다. 예를 들어 뚱뚱하고 축 늘어진 전처의 몸매는 한편으로는 영화에 등장하는 슬리만의 여러 자녀들, 그 자체를 의미한다고 볼 수도 있을 것이며, 림이 그 몸매를 흉보는 것은 그 자식들에 대한 미움을 드러내보인다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 또 그 슬리만의 자녀들 세대 역시도 이미 그 다음 세대의 어머니, 아버지이기도 하다. 영화 속에 계속 등장하는 아기들이나, 더 나아가 그 림의 풍만한 배는 그런 것을 이야기하고 있지 않을까.

그렇게 싫든 좋든 이민자 사회는 새로운 세대를 이어나가야만 한다. 그리고 슬리만이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절차를 거쳐야 했던 것처럼, 그들 역시도 새로운 것들에 적응하기 위해 복잡한 규칙들을 배우고, 또 새롭게 생겨나는 문제들에 적절히 대응하여야만 할 것이다. 위에서 이야기하였듯이 이 영화는 축제가 아닌 축제를 보여주며, 그리 쉽게 해결을 주지 않는다. 그래서 아마도 누군가는 이 영화에서 따스함을 읽지만, 누군가는 폭력을 읽고, 또 누군가는 밸리댄스에 흥겨워할 테지만, 다른 누군가는 사라진 생선 쿠스쿠스에 답답해 할 것이다. 삶이란 그렇게 쉽게 희망이나 절망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님을, 단지 이어나갈 뿐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보여준다. 그들은 그렇게 싸우고, 화해하고, 의심하고, 험담하고, 애정을 보여주고, 서로를 돕기도 하면서 그렇게 별다른 도리 없이 다음 세대로 삶을 이어나갈 것이다. (영화 속에서 슬리만을 위해 연주를 해주는 노인들의 대화가 이 양상을 그대로 드러내 보인다.) 그리고 그 다음 세대는 전세대와 비슷하지만, 또 다른 그들만의 방식으로 새로운 길로 나아갈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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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06 18: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가지에 집중해야 한다. 간결하게 쓰는 것과 괄호를 만들지 않는 것. 이번에는 실패.

아이리시스 2012-12-15 15: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생선 쿠스쿠스가 어떤 맛일지 맥거핀님은 알 것 같아요? 프랑스 영화인데 남미 분위기 물씬나는 이 영화는 당연히 튀니지 사람들이 이민 와서 그런 거죠? 근데 튀니지는 아프리카일 뿐이고. 튀니지 음악은 어떨까요. 영화 속에서 다양한 문화적 향기를 체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꼭 챙겨봐야겠어요. 갑자기 생각났는데 얼마 전 읽은 <스웨덴을 가다>에서 스웨덴 음식이 맛없고 먹는 데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대요. 그래서 줄이 길게 늘어진 어느 가게에 가서 음식을 먹어도 우리나라의 제일 맛없는 집 음식맛 같다고 했어요. 스웨덴 가서 분식집 열면 대박날 것 같다고 저자분이 우스갯소리 하던데 그것도 스웨덴 이민자가 보는 모습과 스웨덴 여행자가 보는 모습이 많이 다르겠죠. 튀니지 가족도 프랑스에서 생선 쿠스쿠스를 파는데 스웨덴 가서 라면장사 못하란 법이 없죠. 근데 제가 라면도 못 끓인다는 게 문제죠.

여튼 이 영화는 찜했습니다.

맥거핀 2012-12-16 23:32   좋아요 0 | URL
영화 속에서보면 그 사람들이 되게 맛있다고, 그러면서 신나게 먹거든요. 근데 사실 제가 먹으면 별로 맛이 없을 것 같기도 해요. 대체로 우리가 먹는 외국음식들도 거의 '우리화'된 외국음식들이잖아요. 그 사람들이 먹는 정통식 그대로 먹으면 아무래도 뭔가 좀 이상한 게 있겠지요. 그러니 우리가 먹는 그대로 분식 장사를 스웨덴에서 하면 분명히 망할거예요.^^ 라면도 못 끓이는 아이리시스님 식으로 끓이는 라면이 혹 스웨덴에서는 통할 수도...

아무튼 그러면서 생선 쿠스쿠스라는 것도 변하겠지요. 1세대가 만들어내는 쿠스쿠스는 다음의 세대로 이어지면서 조금씩 뭔가 '우리화'가 되는거고, 그것을 싫어하면서도, 받아들여야만 하고, 또 어쩔 수 없게 조금은 변화시키면서도, 그 변화시킨 쿠스쿠스를 어떻게든 꾸역꾸역 먹는 게 이민자들의 삶이라는 것을 이 영화는 말해주고 있지 않은가 싶어요.

세계 여러 곳을 순례하시기 좋아하는 아이리시스님에게 딱인 영화입니다. 프랑스+튀니지, 1타 2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