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기 활동 마감 페이퍼를 작성해 주세요.

 

시작할 때는 따뜻한 봄날이었는데, 끝날 때에는 어느덧 가장 추운 날이 되었다. 뭐든지 다 그렇지만, 마지막에 이르면 아쉬움만 남는 것 같다.

 

여러 가지가 생각이 나는데, 일단 아쉬운 것은 예술 분야의 책을 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처음 서평단을 하려고 했을 때도 원래는 예술 파트를 하려 했었고, 예술 파트가 인문 파트에 통합되어 이 인문 파트 쪽에 지원할 때도 예술 관련한 책들, 특히 영화와 관련한 책들을 많이 보고 싶다는 생각이 있었는데, 한 권도 보지 못했다. 물론 이는 내가 원한다고 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고, 여러 가지 여건이 맞아야 가능한 것이겠으나, 조금 더 적극적으로 책도 추천하고, 좋은 책들을 찾아봤으면 가능하지 않았을까 싶기도 하다. 또 하나 아쉬운 것은 같이 서평단을 하는 다른 분들과 조금 더 적극적으로 의견을 나누었어야 하는 것 아닌가 하는 생각 때문이다. 사실 이 서평단 활동은 같은 시기에 같은 책을 읽는다라는 좋은 조건을 가지고 있지만, 스스로 그 좋은 조건을 별로 활용하지 못한 듯 하다. 단순한 감상의 교환도 좋고, 비판적인 의견의 제시도 좋고, 잘 이해가 되지 않는 부분을 물어도 좋은데, 결국 시간은 다 지나가고, 이제는 그저 몇 편의 글 밖에 남지가 않았다.

 

물론 가장 아쉬운 것은 성실히 읽고, 성실히 쓰겠다,라는 초반의 다짐을 결국 지키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서평단 활동이 길어지면 길어질수록 책을 읽는 속도는 점점 느려졌고, 글을 쓰는 일은 다른 일들 뒤로 하염없이 미뤄졌고, 결국 거의 매번 마감시간을 넘겨 글을, 그것도 별로 좋지도 못한 글을 올려야만 했다. 서평단 활동이라는 것도 결국 하나의 약속인 바, 그 약속을 지키지 못한 셈인데, 이 자리를 빌어 알라딘 서평단 담당님과 우리 인문/사회/과학/예술 서평단을 위해 수고해주신 가연님에게 인사를 동시에 전하는 바이다. (고맙고, 죄송합니다. 꾸벅.)

 

이번 11기 서평단을 통해 읽었던 책을 뒤돌아보면 개인적으로 책의 편차가 조금 느껴졌다. 좋은 책은 아주 마음에 들었는데, 그렇지 못한 책은 읽는 것 자체가 고문에 가까웠달까. 좋았던 책 5권을 뽑아달라고 하신 것 같은데, 고심 끝에 골라본다. 나머지 책들은 공동 6등으로 해두자.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 사사키 아타루 / 자음과모음

 

저자의 글쓰기라고 할까, 말하는 방식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하고 싶은 이야기를 에두르지 않고, 직설적으로 말하는 것, 그러면서도 적절한 깊이가 있는 내용과 메시지를 담기란 상당히 어려운 일인데 저자는 그 어려운 일을 성취해내고 있다. 

 

 

노동의 배신 / 바바라 에런라이크 / 부키

 

결국 글의 힘이란 체험에서 나온다. 물론 어떤 일들은 체험보다는 한 걸음 물러서서 바라보는 것이 필요할 수 있다. 그러나 노동과 연대의 문제에 있어서라면 한 걸음 물러서는 것은 결국 '그들'을 상정하여 그들과 자신을 갈라놓겠다는 것일게다. 그녀의 <희망의 배신>이나 <긍정의 배신>도 기꺼이 찾아보겠다.

 

 

음식 그 두려움의 역사 / 하비 리벤스테인 / 지식트리(조선북스)

 

별로 기대를 하지 않았는데, 예상외로 재미있게 읽었고, 새로운 관점들을 얻을 수 있었다. 결국 음식을 먹는 데에 가장 중요한 것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 음식을 대하는 마음가짐이 아닐까. (홍상수의 말을 빌리자면 네가 그렇다니까, 그런 것.) 출판사 외에는 다 마음에 든다.

 

 

광기 / 대리언 리더 / 까치글방

 

그간 어렴풋하게 알고 있던 여러 개념들을 정리하는 계기가 되었고, 여러 풍성한 예를 통해 별로 큰 관심을 가지지 않은 분야의 책임에도 '앎의 즐거움'을 느끼며 글을 읽을 수 있었다. 우리는 정신병자를 사회에서 걸러내기 위해, 은연중에 정신병적인 구조를 사용한다. 이는 물론 정신병에만 해당되는 것은 아니다.

 

 

얽힘의 시대 / 루이자 길더 / 부키

 

책의 마지막 저자 인사글을 보면 저자가 사람을 대하는 태도랄까, 세상을 대하는 자세같은 것이 느껴졌다. 양자물리학을 다루는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 양자물리학의 세계를 만들어낸 물리학자들에게 기꺼이 경의를 표하면서도, 그들을 한명한명의 살아있는 인간으로서 대하는 애정같은 것이 느껴져 더 매력적이다.

 

* 가장 좋았던 책

 

 

서평단 활동을 통해 이 책을 읽을 수 있었던 것은 행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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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hining 2012-12-04 1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수고하셨습니다(짝짝짝짝).

그렇네요, 너무 느슨하게 통합된 거 아닌가요; 인문,사회,과학,예술이 한 카테고리...선택의 폭도 넓고 대신 채택될 확률도 엄청 적군요; 맥거핀님의 예술 책 리뷰도 몹시 궁금한데 말입니다+_+ (저는 대놓고 권유.....)

전 노동의 배신, 좀 불편했습니다. 뭐랄까, 이런 '체험'을 하고 있지만 나는 언제든 내 자리로 돌아갈 수 있다, 는 어조가 어떤 얇은 막처럼 계속해서 느껴졌거든요. 다름을 인지하는 자와 다름에 관심없는 자 중 어느 쪽이 더 잔인할까, 생각도 들었고요. 저자의 추진력과 기획에는 감탄하지만 글쎄, 전 오히려 격차만 느껴졌어요. 차라리 긍정의 배신 쪽이 더 공감가는 구석이 있었습니다.

며칠 전에 <시네마 톡>이라는 책을 읽었고 오늘은 영화이론(Robert Stam)이란 책을 빌릴까 합니다. (맥거핀님이 소개해주신 씨네21 추천도서에 있었던 건데 혹시 읽으셨는지요?)

...근데 왜 저는 이런 내용을 댓글에 쓰는걸까요; 그냥.. 그냥 그렇다는 겁니다(하하).

맥거핀 2012-12-05 01:08   좋아요 0 | URL
노동의 배신..무슨 말씀이신지 조금은 알듯도 싶습니다. 얇은 막..그렇죠. 얇은 막 같은 게 있죠. 아무튼 간에 역설적이게도, (아니 역설적이 아닌가요?) 그녀는 이 책들로 명성을 얻게 되었으니까요. 그녀의 책속의 한때 동료들은 계속해서 힘든 파고들을 지나야만 하겠죠. (저는 이것이 한편으로는 '공지영의 의자놀이'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 도용 혹은 표절 논쟁의 이면에 박힌 어떤 포인트와 연관된다고 생각합니다.) 예를 들어 책에서 유머를 구사하는 방식이랄까, 글을 쓰는 방식이라는 측면에서는 특히 그 얇은 막은 더욱 두꺼워지는 듯한 인상도 있습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책을 읽는 저를 포함해서, 우리는 그만큼도 즉, 그 막을 조금이나마 얇게 만드는 데에도 가까이 가지 못하고 있다는 생각도 있습니다. 책을 쓴다는 지식인들이 '그만큼도' 해내지 못하고 있는 어떤 것을 그래도 그녀는 저는 조금은 해냈다고 생각합니다. 물론 그것이 오히려 더 잔인하게 느껴질 수 있다는 견해도 충분히 존중합니다만...

이제 서평단 활동 끝냈으니 제가 읽고 싶은 책을 읽을 작정입니다. 대놓고 권유하시니 읽고나면 뭔가 남겨보려고 노력해보겠습니다. 스탬의 영화이론은 몰라요. 하하. (씨네21이 추천했지, 저는 추천한 적 없다고 발뺌을 해봅니다.)

2012-12-05 15: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인문사회분야를 신청하신 내막엔 그런 이유가 있었군요. 한권도 읽지 못했다니 아쉽네요. (저는 왕년에 예술 분야 서평단을 했었는데, 영화관련 책 딱 한 권 읽었었지요. 근데 그 책은 정말 별로였어요.)
'출판사 빼고 다 맘에 든다'에서 킥- 웃음이 났네요. 막달의 두권이 모두 5위를 차지했군요. '얽힘'이 1위라니, 책은 못 읽어도 맥거핀님 리뷰라도 잘 읽어보렵니다..ㅎㅎ
저도 서평단 끝나니까 읽고 싶은 책을 맘껏 읽자! 하는 자유로운 느낌이 있어서 좋아요. 실제 독서량은 미미하지만..

맥거핀 2012-12-06 18:25   좋아요 0 | URL
알라딘 측에서 이왕하는 거 분야를 독립시켜줬으면 좋겠는데, 한번 통합되었으니 다시 나누기도 힘들겠죠. 과학과 예술이 결합되어 따로 파트가 나오면 좋을 것 같지 않나요? 근데 어떤 영화관련 책이었는지 궁금하군요. 섬님 영화 얘기 읽으시는 거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

근데 말은 그렇게 해도 아무래도 독서량도 줄게 될 것 같기는 합니다. 그래도 일단은 그동안 미뤄놓았던 책을 중심으로 좀 보기는 해야죠. 안 읽고 버려둔 책이 너무 많아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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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루이자 길더 지음, 노태복 옮김 / 부키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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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근본 개념 중의 하나인 '양자 얽힘' 현상과 그의 역사에 대해 다루고 있는 책이지만, 이 책을 다 읽은 나에게 그렇다면, 양자물리학, 양자얽힘 현상에 대해 어느 정도 이해했는가,라고 묻는다면 '그렇다'고 대답하지 못할 것 같다. 이 책을 읽음으로서 조금이라도 알게 되는 단 한 가지가 있다면, 그것은 양자물리학의 세계는 매우 복잡하고, 어지러우며, 그것을 이해하기는 매우 힘들다,라는 점이 아닐까. 그러나 문제는 아직 남아있다. 그것은 그 '이해못함' 마저도 이해했는지가 불확실하다는 점, 즉 '양자물리학이 복잡하고, 어지럽다'는 사실 자체를 이해했는지의 여부마저도 상당히 불확실하다는 점이다. 그렇다고 일찌감치 돌아가지 않는 머리를 부여잡으며 좌절할 필요는 없다. 위대한 물리학자 보어마저도 다음과 같은 말을 한 적이 있으니까. "만약 양자론에 대해 어지럽게 느끼지 않는다면 당신은 양자론을 전혀 이해하지 못하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이치에 누구보다도 가깝게 다가간 아인슈타인마저도 크게 다르지는 않다. 아인슈타인은 그가 1935년 포돌스키, 로젠과 함께 발표한 논문(EPR)에서 양자역학은 불완전하다,고 결론을 내렸다. 즉 그마저도 양자역학의 모든 비밀을 밝혀내지도, 그러므로 완전히 이해하지도 못했으며 그가 이런 견해를 밝히게 해준 '양자 얽힘' 현상은 그로부터 몇십 년 후 존 벨과 일단의 물리학자들에 의해 그 면모가 조금씩 드러나게 된다.

 

양자물리학이 그렇게 이해가 어려운 까닭은 무엇인가? 이 책을 읽고 난 후 어렴풋하게 생각하게 된 몇 가지를 이야기해 보면 그것의 이유 중의 하나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는 그간 우리 세계를 작동시킨다고 믿어졌던 일반적인 원칙, 고전물리학의 법칙, 또는 만물의 근본적인 작동 원칙에 반하는 몇몇 현상들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물론 이 고전물리학의 법칙에 일차적으로 균열을 일으킨 것은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론이다. 그러나 이 양자물리학은 이 상대성이론의 몇몇 원칙들과도 잘 들어맞지 않는다. 양자물리학은 양자의 세계, 그러니까 극소의 세계, 에너지와 물질이 더 작은 조각으로 나누어질 수 없는 궁극적인 조각인 양자의 성질에 대해 다룬다. 그런데 이 양자의 세계에서는 우리 눈에 보이는 세계와 무엇인가 다른 일들, 우리가 그간의 상식으로 '그러하다'고 여기는 일들과는 다른 일들이 벌어진다. 그 큰 부분이 바로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양자의 '얽힘' 현상이다. '얽힘'은 아주 간단하게 말해서 '둘 이상의 물질이나 빛이 떨어져 있어도 긴밀히 연결되어 있는 상태'라고 말할 수 있는데, 이는 물리학의 토대가 되었던 '국소적 인과성'을 가지지 않을 뿐더러, '관찰과 무관한 실재'도 아니다.

 

즉 양자역학 이전의 물리학은 국소적인 인과성이나 관찰과 분리된 실재라는 것에 기반을 두고 있다. 인과성이란 말 그대로 모든 결과에는 원인이 있다는 것이며, 이는 물리학의 세계에서는 국소적 영향으로 이루어진다는 것이 그간의 믿음이다. 즉 한 물체는 오직 국소적인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시 말해서 한정된 시공간에서의 연쇄 작용에 의해서 다른 물체에 영향을 미치며, 따라서 그 영향은 빛의 속력보다 빠를 수 없다(빛보다 빠른 물질은 없으므로). 예를 들어 우리가 누군가의 목소리를 듣고 뒤를 돌아본다면 그의 음파가 그의 성대에서 출발해 우리의 고막에 도착했기 때문이며, 그 속도는 당연히 빛의 속도보다 느리다. 그러나 양자 얽힘 현상에서는 두 광자가 아무리 먼 거리를 떨어져 있어도(비국소성), 어떤 동시적인 운동방식을 보인다. 물론 이 동시성을 어떤 무선통신과 같은 것이라고 생각해 볼 수도 있다. 즉 한 광자가 자신이 운동하기 전 '재빨리' 다른 광자에게 어떤 것(그러니까 데이비드 봄이 이야기한 '양자 포텐셜'과 같은 것)을 보낸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럴 수 있으려면 그 '재빨리'는 빛보다 훨씬 빠른 '재빠름'이어야만 한다. 겨우 빛의 속도로 전파되는 물리적 신호로는 그런 현상(얽힘 현상의 동시성)을 설명해낼 수 없었다. 다시 말해서 완전히 다른 계에 있는 두 광자라도 한 번 얽히게 되면, 그 얽힘이 아무리 먼거리에서도 계속 유지된다는 것이다. 이것이 얼마나 말이 안되는 것인지 생각해 보라. 예를 들어 오늘 아침 당신이 출근길에서 만난 한 사람과 우연히 옷깃이 한번 스쳤을 뿐인데, 그 이후로 두 사람이 얼마나 떨어져 있든 동일한 운동패턴, 혹은 동일한 상태를 보인다는 것,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단 말인가?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

 

더군다나 이는 관찰과 분리된 실재도 아니라는 것이 문제다. 물리학은 아니 우리의 세계는 분리가 가능하다는 믿음, 그러니까 공간적으로 떨어져 있으며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실체(아인슈타인의 말)를 가정하고 이루어진다. 즉 예를 들어 우리가 무엇인가를 관찰할 때(물리학 때문이든 다른 어떤 것 때문이든), 그것은 관찰자의 외부에 분리된 실재로서 존재한다. 그러나 양자얽힘에서는 이것이 보장되지 않는다. 양자의 세계에서는 한 양자의 운동량과 위치를 동시에 알 수가 없으며(하이젠베르크의 불확정성의 원리), 그것은 어떤 확률에 의해서만 기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을 극단적으로 밀어붙이면, 그것의 실재에 대해서 의심할 수밖에 없다. 어떤 것이 확률로서만 존재한다면 그것은 실체로서 존재한다고 말할 수 있는가? 또한 그 확률이란 측정의 확률, 관찰자의 확률이기 때문에 관찰자와 관찰대상은 비분리된다. 슈뢰딩거의 실험에서 슈뢰딩거의 고양이는 살았을 수도 있고, 죽었을 수도 있으며, 그것은 오직 관찰자가 보았을 때에만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관찰자가 보지 않았을 때에는 이 고양이는 살았는가, 죽었는가? "전체 시스템에 대한 파동함수는 이 상황을 설명하면서 살아 있는 고양이와 죽은 고양이가 섞여 있거나 스며들어 (이런 표현을 써서 죄송하지만) 있다고 할 것이다.(p.294)" 즉 고양이의 생사는 관찰행위의 영향을 받는다. 다시 말해서 이런 관점에서는 양자적 실체들은 관찰되기 전까지는 개별적인 존재가 아니라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또 얼마나 웃긴 소리인가? 관찰자가 관찰대상에 영향을 미치다니? 그것이 무엇으로 가능하다는 말인가? 역시 텔레파시? "이에 대해 아인슈타인은 터무니 없는 발상이라며 이렇게 말했다. "아무도 보지 않으면 달이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p.30)"

 

그러나 아무튼 문제는 양자물리학의 세계에 있어서 이 터무니없는 현상들이 실제로 '측정'된다는 데에 있다. 아인슈타인이나 보어, 드 브로이, 슈뢰딩거 등의 이론물리학자들의 세계에서는 사고실험(생각으로만 이루어지는 실험)에서 나타나던 것들이 존 벨이나 클라우저, 혼 등의 실험물리학자들의 세계로 넘어오며, 그러한 얽힘 현상은 실제로 실험실에서 나타났으며, 그것의 작동원리의 여러 부분은 많은 물리학자들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의문 속에 남겨져 있다(예를 들어 그 의문 중의 하나는 양자세계에서 일어나는 얽힘 현상이 왜 그보다 큰 물질, 그러니까 양자들이 합쳐진 보다 큰 물질에서는 일어나지 않는가 등등이다. 차일링거 등은 이를 실험으로 증명하려 한다). 그래서 아직도 어떤 물리학자들은 말한다. 양자역학은 (아인슈타인의 견해와 같이) 아직도 불완전하다고. 고전물리학은 물론이고, 상대성이론마저도 아주아주아주 쉽게 설명한다면 중고생들에게도 그것의 본질을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양자물리학에 대해서는 그것이 불가능하다고 말이다. 양자역학의 발전에 큰 기여를 한 폴 디랙의 견해로는, 그러므로 현재는 양자물리학의 풀리지 않는 여러 문제가 이해되기에는 아직 이른 시기이기이며(1급 난이도 문제- 현재로선 해결될 만한 여건이 성숙하지 않은 문제), 얽힘 현상의 구성에 큰 기여를 한 존 벨마저도 이러한 것을 1964년 마이클 나우엔버그와 공동으로 쓴 논문 <양자역학의 도덕적 측면>에서 다음과 같이 기술하기도 한다. "어찌 되었든 양자역학적 설명은 대체될 것이다. 이런 점에서 그 이론은 인간이 만든 모든 이론들과 마찬가지다. 특이하게도 그 이론의 최후 운명은 그 내부 구조에 명백히 잠재해 있다. 그 자체에 파괴의 씨앗을 지니고 있는 것이다. (p.540)"

 

그렇다면 양자역학은 단지 어렵고 불완전할 뿐인, 언젠가 다른 것(예를 들어 초끈이론)으로 대체될 한정적인 이론일 뿐인가? 분명히 그렇지는 않다. 모든 물리학은 과거의 이론에서 얻어진 어떤 것들을 가지고 새로운 것들로 발전해나가며, 그것이 과거의 이론을 모두 뒤집는 어떤 것이라도, 그것은 과거의 그 이론 없이는 탄생되지 않았다. 양자물리학은 하늘에서 뚝 떨어진 것이 아니며 그것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의 어떤 것들을 바탕으로 해서 그 토대가 만들어졌다. 이를 이렇게 이야기해 볼 수도 있지 않을까? 루이자 길더의 이 책 <얽힘의 시대>는 양자물리학의 역사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다. 그런데 그 이야기하는 방식은 조금 특이하다. 책의 각 장은 특정의 한 시기에 이루어졌던 실제의 대화, 실제의 이야기를 재구성하고 있으며, 그 수많은 대화들의 장면이 중첩되어 이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만들어진다. 즉 이것은 거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역사가 아니라, 미시적인 양자물리학의 장면들의 집합이다. 다시 말해서 이 미시적인 장면들은 모두 이 거시계 속에서 '얽혀 있다'. 그것은 개별적인 물리학자들의 입장에서 보아도 그렇다. 양자물리학의 역사를 만들어낸 이 물리학자들은 책 속에서 모두 각자 나름의 역사를 부여받고 있으며(이 책은 모든 학자들에 대해 '그들이 왜 양자물리학에 빠져들게 되었는가'의 관점으로 그들의 약사(略史)를 기술한다), 이들은 양자물리학에 한 번 얽히게 된 이후에는 평생 그 양자물리학 속에서 헤어나오지 못했다. 그들은 그렇게 얽혀 있었다. 즉 양자물리학이라는 것에 한 번 얽힌 이후에는 아무리 멀리 떨어져 있어도 그 미스테리에 대해 동시에 골똘히 생각했다. 그들은 비국소적인 개체로서 얽혀 있었다. 이를 보다 더 큰 관점으로 보면 양자물리학은 고전물리학과 상대성이론과도 얽혀 있다. 즉 하나가 사라졌을 때 다른 하나가 존재할 것이라 가정할 수 없다.

 

(책에서 한편으로 실제적인 양자물리학의 가치로서 이야기하는 예들은 양자컴퓨터, 양자를 이용한 암호와 같은 것들이다. 그러나 파인먼에게 있어서는 그 양자컴퓨터의 가치 또한 그것의 어떤 실생활에서의 목적보다는(양자컴퓨터는 일반 컴퓨터에서 상상할 수 없는 속도의 연산이 가능하다) 한편으로는 양자역학의 비밀을 밝혀내기 위한 것으로서의 가치였다. "파인먼에게 있어서 양자 컴퓨터가 지닌 위대한 의미는 그것을 만들고 작동시킴으로써 벨이 제시한 서로 관련된 입자들에게 대한 수수께끼를 풀 수 있을지 모른다는 것이었다.(p.533)" 즉 이것은 양자컴퓨터가 어떻게 작동하는가, 그것이 무엇을 보여주는가가 양자론의 작동방식을 보여줄 수도 있다는 의미는 아닐까. 즉 물리학자들이 가지는 양자역학에 대한 난점을 '실제로 그것이 획기적으로 작동하는 어떤 방식'을 봄으로써 해결할 수 있다는 (고전물리학적인) 귀납적인 믿음으로의 회귀라고나 할까.)

 

마지막으로 이 얘기는 하고 끝내고 싶다. 양자컴퓨터나 양자를 이용한 암호 등의 예에서 보듯이, 양자론, 양자물리학의 가치는 무한하다. 양자컴퓨터나 양자 암호 등의 발전 정도가 아직 무궁무진하다는 점에서도 그렇지만("19세기의 이론물리학자인 제임스 클러크 맥스웰도 "전기가 무슨 소용이 있습니까?"라는 질문을 받은 적이 있었다."(p.536)), 다른 많은 부분에서도 양자물리학은 영향을 미칠 수 있다. 작가 루이자 길더는 마지막에 이를 일종의 유머로서 살짝 암시한다. 책의 마지막에서 양자론의 비실재성과 인간중심성(관찰자가 존재하여야 한다는)에 의문을 제기하는 물리학자 테리 루돌프는 물리학자가 된 후에 어머니에게 숨겨진 비밀 하나를 듣게 된다.

 

외할머니는 아주 순진한 아일랜드 카톨릭교도였는데 스물여섯 살 때 나이가 훨씬 많은 남자와 관계를 가진 후 임신을 했다고 한다. 처녀의 몸으로 딸을 낳은 후 아이 아버지가 달라고 하자 아이를 그에게 주었다. 하지만 딸과 떨어져 지낸 지 2년이 지난 후 더블린의 한 공원에서 유모가 이끄는 유모차에 실려 있는 자기 딸과 우연히 마주쳤다. 외할머니는 유모차에 있는 딸을 낚아챈 다음 그 길로 딸과 함께 멀리 남아프리카로 떠났다.

그런데 1년 전에 처음으로 얽힘 현상에 대해서 알게 되어 그 결과 물리학 연구에 헌신하게 된 스물한 살의 루돌프는 이 이야기를 통해 비로소 자기 외할아버지가 슈뢰딩거란 사실을 알게 되었다. (p.550)

 

전혀 다른 환경에서 아무 교류도 없이 오랜 기간 자라난 청년과 그의 외할아버지가 모두 물리학에 그것도 양자물리학에 헌신한다는 것, 이 미스테리에 담긴 것이야말로 얽힘 현상의 (보다 큰 물질에 있어서의) 재현이 아닌가. 얽힘 현상은, 그리고 양자물리학은 언젠가 세상의 모든 비밀을 밝혀낼지도 모른다. 그날이 오기를 기대한다. 빛보다 빠른 텔레파시가 가능할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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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2-03 16: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허. 드디어 서평단 마지막 리뷰를 썼음.

아이리시스 2012-12-03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허허. 맥거핀님 드뎌 서평단 임무 마감.

맥거핀 2012-12-03 18:13   좋아요 0 | URL
아주 좋아요. 기말고사 마지막 레포트를 제출한 느낌이랄까. 아 근데 하나 남았음..

2012-12-03 19: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4 00: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Shining 2012-12-03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양자역학......이래서 저는 인문쪽 지원은 꿈도 안 꿔본 겁니다(흑흑).
인문, 이 아니잖아요............

맥거핀 2012-12-04 00:30   좋아요 0 | URL
하지만 저희 정식 명칭은 '인문/사회/과학/예술'이라는 사실! 그래도 저자가 최대한 쉽게 설명하려고 노력하고 있어서, 반복해서 읽다보면 이해되는 부분도 조금은 있다,고 애써 말해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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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리언 리더 지음, 배성민 옮김 / 까치 / 2012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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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의 시작은 '미친 것(being psychotic)'과 '미치는 것(going psychotic)'을 구분하는 데에서 출발해야 할 것 같다. 간단히 정의하기는 어렵지만, 최대한 간단히 말해보면 '미친 것'은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quiet madness)'의 상태이다. 즉 정신병을 가지고 있으나 그 정신병이 눈에 보이는 현상, 증상으로 나타나지 않거나, 이상행동으로 촉발되지 않은 상태이다. 반면 한편에 있는 '미치는 것'은 우리가 흔히 아는 정신병의 상태이다. 어떤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특이하고 반복된 행동을 보여주거나, 이상한 말을 하거나, 심지어는 살인을 저지르는 상태이다. 그러므로 이를 이렇게 나눌 수도 있다. 미친 것은 일상 생활과 완전히 양립이 가능하며, 어떤 경우에 있어서는 일반인보다 더한 일반성을 보여주지만, 미치는 것은 어떤 상황에서 광기가 촉발되므로 그럴 수가 없다. 이런 예가 가능할지도 모르겠다. 우리 인간을 하나의 시계라고 생각해보면 '미친 것'은 예를 들어 정확하게 항상 5분이 늦는 시계이다. 항상 5분이 늦는 시계를 보며 우리는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는 것도 물론 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것은 분명 정상적인 시계라고 볼 수는 없다. 즉 그것은 매순간 정확하게 작동하고 있지만, 분명히 커다란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반면 '미치는 것'은 가끔 10분이 늦어지다가, 갑자기 5분이 빨라지다가, 혹은 바늘이 하루에 20바퀴를 돌기도 하는 그런 시계다. 즉 우리는 그 시계를 보고는 도저히 정확한 시간을 알 수가 없다. 물론 이 시계 역시 앞의 시계와 마찬가지로 무엇인가가 어긋나 있다. 즉 분명한 것은 두 시계 모두 무엇인가가 고장나 있다는 사실이다.

 

그런데 문제는 지금까지의 이야기에 오해의 소지가 있다는 사실이며, 그것을 정확히 밝혀내는 것이 상당히 어렵다는 사실이다. 즉 '미친 것'과 '미치는 것'을 그렇게 쉽고 간단하게 나눌 수 있는가, 라고 묻는다면 예스라고 대답하기가 어렵다는 것이며, 그와 연관하여 이 사람이 미쳤는가, 그렇지 않은가를 판단하기도 매우 어렵다는 것이다. 망상을 하나의 예로 들어 본다면, 우리가 흔히 망상을 가지고 있거나, 헛소리를 하는 사람을 보면, 정신에 뭔가 문제가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지만, 망상은 그가 정상생활을 하는 데에 큰 버팀목이 되기도 하고, 도리어 그것은 정상으로 돌아온 증거가 될 수도 있다. 또한 '미친 것'을 일상생활과 양립이 가능하며, 그들 대부분의 경우 정상인에 거의 완전하게 가까운 모습을 보여준다고 했을 때, 그들이 '미친 것'이라고 어떻게 규정할 수 있겠는가? 예를 들어 책에 나온 에른스트 바그너의 사례를 보면 그는 1913년 9월 4일 밤에 자식 4명과 아내의 경동맥을 끊고, 뮐하우젠 마을로 가 9명을 사살하고, 12명에게 상해를 입히기 전까지 모범시민이자 가정을 소중히 하는 남자로 전혀 광기를 드러내지 않았다. 그러나 그는 그는 말 그대로 미쳐 있었다. 즉 그가 광기를 보여주었기 때문에 미쳐 있었던 것이 아니라, 그는 그 이전부터 미쳐 있었다. 그러니까 다시 시계로 돌아가본다면 '그'라는 시계는 매시 매순간 정확히 돌아가고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의 시계가 잘못 돌아가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는 말이다. 누군가 정확한 시간을 알아내기 전까지 말이다.

 

그래서 아마도 이 책의 저자 대리언 리더가 비판하는 정신병을 진단하고, 치료하는 새로운 흐름이 나타난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저자 대리언 리더는 환자 한명 한명의 세세한 사례에 주목하고, 그들에게 세밀한 정신분석을 실시하고, 그의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정신병적인 구조가 생겨나게 된 이유와 그것이 촉발하게 된 과정에 대해 분석하는 1950년대 이전 과거의 방식을 긍정하며, 현재와 같은 정신병의 진단과 치료에 부정적인 입장을 취하고 있다. 정신병의 눈에 보이는 증상에 주목하고, 그것을 하나의 질병으로 간주해 약이나 수술 같은 것으로 치료하려는 현재의 흐름을 저자는 비판한다.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은 환자에 따라 모두 다르므로, 정신병이라는 진단의 가짓 수는 점점 늘어나게 되고, 그렇게 눈에 보이는 증상만을 약물로서 치료하려 하다보니 도리어 약에 반응할 것으로 예상되는 증상만이 연구되기 시작했다. 즉 이 책에서 말하는 '조용한 광기'는 어떠한 눈에 보이는 증상도 나타나지 않으므로 점점 정신의학계의 관심에서 사라지게 되었다. 그러나 저자의 관점대로 보면, 이는 매우 위험한 것이다. 앞에서 말한 에른스트 바그너와 같은 극단적인 사례를 굳이 예로 들지 않더라도, '미친 것'의 상태를 정확히 알아내지 못하고, 눈에 보이는 증상에만 대증적인 처방을 하는 것은 정신병을 더 심화시킬 뿐만 아니라, 환자와 주위 사람들을 위험하게 만들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저자가 시도하는 방식은 일단 정신병과 신경증을 구분하고(즉 '미친 것'이 어떠한 상태인지를 규명하고), 정신병을 큰 세 가지 줄기, 즉 정신분열과 편집증과 우울증으로 나누는 것이다. 신경증과 정신병을 나누는 것은 여러가지로 가능하겠지만, 이 책에서 나누는 방식 중에 하나는 프로이트가 말한 외상을 다루는 방식이다. 신경증자에게 외상은 억압된다. 대표적인 억압의 방식은 기억상실이나 대체이다. 즉 신경증자들은 그것을 기억하지 못하거나 히스테리나 강박으로 대체한다. 그러나 정신병자는 이를 억압하는 것이 아니라 폐제(forclusion)한다. 즉 그런 생각 자체가 아예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았던 것처럼 행동한다. 다른 말로 하면 억압한다는 것은, 그것이 생각 속에 어떻게든 남아 있다는 것이다. 즉 생각에 존재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망각되거나 대체하려는 노력이 일어난다. 그러나 정신병자의 폐제는 그것이 아예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그 외상은 폐제로 인해 완전히 없었던 것 같지만, 어떠한 계기로 인해 촉발되면 나중에 실물로서 실재계로서 정신병자에게 돌아온다. 이를 위해서는 라캉의 상상계와 상징계, 실재계에 대해 이야기해야 하는데, (여기서 자세히 논할 수도 없고, 논할 능력도 없지만) 간단하게 상징계는 언어와 법의 세계, 상상계는 몸의 이미지의 세계, 실재계는 몸의 리비도, 즉 흥분이나 자극으로 볼 수 있고, 상징계가 기능을 하지 못하거나 상징계에 무엇인가(예를 들어 외상)를 통합할 수 없을 때, 정신병이 생겨난다. (상징적 질서의 큰 부분은 '말(언어)'이 차지하고 있으므로 또한 이 책에서 주목하고 있는 것은 정신병자의 말과 논리에 대한 부분이다.)

 

이를 라캉이 새롭게 해석한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콤플렉스(Oedifus complex)와 연관지어 살펴볼 수도 있다. 아버지의 남근에 대한 거세 위협으로 남자아이가 엄마를 오이디푸스처럼 사랑하지 못하게 되고, 반명 여자아이는 남근 덕분에 아버지를 사랑하게 된다는 이 프로이트의 오이디푸스 컴플렉스는 라캉에 의해 조금 변형되었다. 즉 라캉은 이를, 아이가 상상계의 수준에서 엄마를 위한 팔루스(phallus, 남근상)가 되는 것을 포기해야 하지만, 상징계의 수준에서 팔루스를 가지거나 받아들여야 하는 것으로 보았다. 다시 말해서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상상계의 수준에 남아있지 않고, 상징계의 수준으로 통합됨으로써 아이의 정신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는 이 상징계에 위치함으로 인하여 의미를 새로 세우고, 몸의 리비도가 활동할 영역을 제한하며, 타자(the Other)와의 거리를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이 상징계의 통합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을 때 정신병이 나타날 수 있다. 다시 말해서 이 오이디푸스 콤플렉스가 상징계가 아니라 상상계나 실재계에서 일어난다면 어떤 일이 벌어지겠는가? 물론 그것은 근친상간으로 금기되고 있기 때문에, 그것은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바로 정신병적인 형태로 말이다. 앞에서 말했듯이 정신병은 정신분열증과 편집증, 우울증의 크게 3가지로 나타날 수 있으며, 이는 각각 조금씩 다른 형태로 나타난다.

 

실제로 이 3가지를 나누는 것은 그리 간단한 문제가 아니며 상당히 복잡하다. 정신분열증자에게 의미는 불안정하며 분명하지 않다. 박해자(정신병자가 자신을 박해한다고 여기는 무엇)는 몸의 내부에 있거나 외부에 있을 수 있으며, 때로 신체감각의 통일성을 잃으며, 리비도는 몸에 집중된다. 반면 편집증자에게는 의미는 좀더 명확하며, 리비도는 박해자에게 집중된다. 즉 박해자는 편집증자에게 있어서는 항상 외부에 있다. 예를 들어 위에 논한 에른스트 바그너의 경우에 편집증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자신의 주위 사람들과 자신이 죽인 뮐하우젠 마을 사람들이 자신을 박해한다고 생각했으며, 그들 안에 있는 (자신을) 박해하는 잘못된 무엇인가를 제거하고 싶어했다. 반면 우울증자는 편집증자의 거울상이다. 우울증자의 경우 리비도는 자신의 이미지 안에 있다. 우울증자는 자신을 무가치하다고 생각하며, 자신을 비하한다. 즉 편집증자에게는 잘못은 타자에게 있지만, 우울증자에게는 자신에게 잘못이 있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때로는 자신을 없어져야 할 존재로 생각하기도 한다. 물론 이는 가장 간단하고 획일적으로 말한 것이며, 실제로는 사태는 훨씬 복잡하다. 우울증과 정신분열과 편집증의 차이는 거의 대부분의 경우 오랜시간 살펴보아야 하며, 이를 진단하는 문제는 그렇게 간단하지가 않다.

 

아무튼 이렇게 정신병의 원인과 증상에 대해서 살펴보는 것은 각각의 경우에 맞게 올바르게 대응하기 위함이며, 정신병자와 주위 사람들의 고통을 줄여주기 위함이다. 즉 문제는 그들을 치료한다, 정상인으로 만든다는 생각은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저자는 자신이 정신병 문제를 처음으로 다루었을 때 모든 스승들이 "정신병을 완전히 낫게 할 수 있다는 생각은 버릴 것"을 충고했다고 한다. 즉 저자가 긍정하는 예전의 정신의학 전통으로 돌아가보면 타임머신을 타고 그가 태어난 바로 그 순간으로 돌아가지 않는 한 정신병이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그 정신분석들이 의미가 없는 것은 아니다. 즉 그를 '미치는 것'이 아니라, '미친 것'의 상태, 그러니까 정신병이 있기는 하지만 정상생활이 가능한, 거의 보통인과 구별할 수 없는 상태로 되돌리는 것은 가능하다. 그것의 방식은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예를 들어 정신병자 스스로가 정신병을 다스리는 방법에서 힌트를 찾을 수도 있다. 정신병자는 자신의 정신병을 다스리기 위해서 몇 가지 기제를 쓰는데 대표적인 두 가지가 안정화와 창작이다. 안정화(동일시)는 예를 들어 자신을 어떤 위치에 있다고 생각하는 것, 자신에게 이상적 이미지를 덧붙이는 것이다. 일례로 자신을 남들이 알아주지 않는 위대한 소설가라던가, 외로운 등반가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창작은 어떤 상징적 질서나 새로운 체계를 만들어내는 것이다. 신조어를 만들어내는 것이 대표적인 예인데, 정신병자는 어떤 특정 신조어를 창작해냄으로써 어떤 예외의 공간, 자신만이 도피할 수 있는 빈공간을 만들어낸다. 그러므로 우리는 흔히 정신병자가 알 수 없는 말을 중얼거릴 때, 그를 '완전히 미쳤구나'라고 생각하지만, 이는 반대로 정신병자가 자신을 어떻게든 다스리려 하는 것, 정상생활이 가능한 상태로 돌아갈 수 있는 가능성이 있는 것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이 책을 읽으면 읽을수록 생각하게 되는 것은 정신병의 문제는 실로 복잡하고, 수많은 사례와 수많은 분석을 통해서 접근해야 하며 그렇게 하더라도 매우 조심스럽게 다루어져야 한다는 점이다. 아마도 그것이 대리언 리더가 원하는 것일 터이다. 이 책을 쓸 때 저자의 목적 중에 큰 하나는 정신병이 약이나 수술로서 처방이 가능하다는 현재 정신병을 다루는 주류적인 시각에 경종을 울리기 위함일 것이며, 환자 각각의 사례와 그의 정신을 들여다보려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는 충고일 것이다. (물론 한편으로 중요한 것은 정신병을 이렇게 생각할 수 밖에 없는 이유는 정신병이 매우 복잡하고 다루기 어려운 것이라는 전대의 경험, 그러니까 대리언 리더가 칭송하는 이 예전의 경험 때문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는 사실이며, 이 정신분석들 역시도 어떤 위험을 여전히 내포한 것이라는 점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점이다. 책에서 두 번째 사례연구로 든 판케예프의 경우가 좋은 예일 것인데, 그가 정신분석가들의 어떤 분석이나 치료로서 좋아진 것이 아니라, 자신 스스로가 정신분석가의 동료로서의 위치를 점해서 좋아졌다는 이 사실 자체가 아이러니하게도 정신분석의 위험성을 또한 보여주고 있지 않은가. 즉 정신병자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의 경우, 그 내용도 내용이지만, '그에게 행해지는 정신분석'이라는 것 자체가 또 새로운 변수로 작용한다는 사실.) 다만 나와 같은 일반독자의 입장으로 보면 너무 논의가 깊숙하게 들어가는 부분이 있어 흥미진진하긴 하지만, 또 너무 어려워지는 경향도 있다. 일반서와 전문서의 경계에 서 있는 책이 아닌가 생각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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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1-26 00: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갑자기 생각이 났는데, 이 책에는 제임스 조이스의 정신병에 대한 이야기가 나온다. 조이스는 일종의 '수신자'로서 그에게 들려오는 신호를 받았고(그러니까 환청을 들었고), 그는 정신병자가 이를 벗어나는 방법인 '수신을 다른 사람에게 넘기는 행위'로서 이를 벗어나려 했다고. 물론 그 다른 사람이란 우리 독자들이다. 그러니까 우리는 제임스 조이스의 소설을 읽음으로써 그가 정신병을 벗어날 수 있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언급된 <피네건의 경야> 같은 작품이 어떤 작품인지 궁금하군..

맥거핀 2012-11-26 12: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기억해 둘 만한 부분

우생학 계획이 도입한 차별 논리는 망상과 비슷한 것 같다. "우리"와 "그들"을 무척 엄격하게 구별하기 때문이다. 정신병적 사고에서도 이것이 때때로 나타난다. 여기서 세상은 단순한 이분법과 두 종류의 가치판단으로 나누어진다. 순수와 불결, 좋음과 나쁨, 흑과 백, 유죄와 무죄 등이 그것이다. 작가인 메리 라우든이 지적했듯이, "정신병에 대한 태도를 논할 때, 많은 사람이 타인이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 문제를 풀어야 자신이 어디에 속하는지 결정되기 때문이다." (p.431)

2012-11-26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증 처방'이 문제가 있는 것은 몸의 치료에서만 그런 게 아니군요. (마음의 치료에서도 그렇군요.) 그리고 간편한 처치, 대응은 역시 또 문제.. 하지만 모든 인간이 그 인생을 송두리채 이해받을 만큼의 치료적 관심을 받기는 쉽지 않을 듯 해요. 예를 들어 헬렌 켈러에게는 결국 설리반이란 사람의 인생 하나가 다 필요했던 것인데, 모두 그런 기회를 얻을 순 없겠죠. 지도를 완전히 그리기 위해선 결국 그 지역과 같은 크기의 지도가 그려져야 한다는 말이 생각나네요.(보르헤스인가요? 저에게는 미지의 소설가.) 여튼 그런 치료는 불가능하더라도 저자의 말대로 올바른 관점에서의 최대한의 접근은 가능하겠군요. 이 책의 요지는 그것일텐데, 괜히 한 번 위와 같은 생각을 해 봤어요. 그냥..ㅋ / 여튼 읽고 많은 개념을 배웠네요. 정신병에 관해서..^^

맥거핀 2012-11-26 23:37   좋아요 0 | URL
지도를 완전히 그리기 위해선 결국 그 지역과 같은 크기의 지도가 그려져야 한다..이거 참 잘 들어맞는 비유네요. 실제로 책에 나온 사례들을 보면(예를 들어 위에 얘기한 판케예프) 한 사람을 상담하는 분량이 엄청나거든요. 하루에 몇 시간 씩 몇 년, 길게는 몇 십년을 상담을 합니다. (그런 면에서 프로이트와 라캉 등에게 모두 엄청난 상담을 받은 판케예프는 매우 운이 좋았던 케이스죠.)

근데 문제는 그러다보면 그 베낀 지도의 크기도 어마어마해질 뿐더러 그 원본지도가 변형이 되요. 즉 상담자의 어떤 태도, 말이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상담자와 맺는 어떤 관계가 이에 영향을 미치게 되더군요. 판케예프의 경우에는 다행히도 그게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습니다만, 반대로 부정적인 영향, 그러니까 예를 들어 환자가 상담사를 죽이려 든다거나 하는 일도 발생할 수 있는거죠.

아무튼 저는 정신병에 대해서는 푸코 식의 해석, 그러니까 사회규범을 반하는 행동이 정신병으로 규정된다는 식의 생각을 가지고 있었는데, 책을 읽다보니 그런 규범과 별개로 '미친 것'으로 규정될 수 있는 상태가 있다는 저자의 의견에 어느 정도 동의할 수 있었구요. 그와 더불어 한편으로는 저라는 사람의 광기에 대해, 혹시 조용한 광기가 나에게도 있는 것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물론 자신이 그 구조를 알아내는 것은 불가능합니다만..)

책이 어려운 부분이 많아서 리뷰를 쓴다는 생각보다는 요약한다는 느낌으로 그저 정리해봤어요.

아이리시스 2012-11-27 01: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언젠가에는 말이죠..저 광기를 부러워하기도 했었어요. 광기어린 표정으로 어떤 화가가 작품 하나를 뚝딱 그려낼 때, 작가가 미친듯이 글을 써내려갈 때, 밤새도록 어떤 질문에 대한 답을 찾아헤맬 때. 그런 것도 광기라고 할 수 있다면 말이죠. 이 책과는 전혀 다른 의미의 광기 같네요;; <피네건의 경야>는 대체 뭐길래 해석서가 발간될까요? 새로 완역본이 나왔던데 모처럼 욕심이 불끈!

어떤 심리학책을 보는데 거기 이런 말을 한 누군가가 있었어요. "지도는 땅이 아니다" 영향..그렇게 연결되기도 하네요.

네! 요즘 리뷰는 요약하는 느낌으로 쓰는 게 유행인 모양..^^

맥거핀 2012-11-27 23:47   좋아요 0 | URL
아무튼 저자에 의하면 조각을 만들거나, 음악을 작곡하거나 같은 창작활동은 정신병의 호전에 상당히 도움이 된다고 합니다. 제임스 조이스가 정신병이라고 저자는 말하던데, 사실 저는 잘 모르겠어요. (원래 조이스의 정신병이 유명한가요?) 간단하게 말하면 조이스가 메시지를 듣는 최종적인 수신자가 아니라, 그가 자신이 듣는 메시지를 건네는 일종의 매개자가 됨으로써 그가 정신병적인 구조에서 조금이라도 벗어날 수 있었다는 게 저자의 의견입니다만, 사실 전혀 모르니, 뭐 그렇다면 그런 줄 알고 있을 수 밖에요.

그러니 <피네건의 경야>가 뭔가 무시무시한 소설일 것 같기는 합니다. 그보다는 이번에 문학동네 전집 세일할 때 산 <더블린 사람들>이나 먼저 읽어야겠습니다.^^

마녀고양이 2012-11-27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신병의 경우, 약물을 무시할 수 없는게,
일단 상담을 통해서 치료를 하기 위해서 적어도 앉아 있거나 말을 통해야 하잖아요.
그 정도의 증상 완화가 약물이 병행되어야 가능하다는 점이 있고, 정신분석학의 이론은 정말 맞는거 같고 많은 증상이 설명되는거 같은데 증명이 안 된다는 점과 너무 오랫동안 치료를 해야 하는 점도 현실적 적용이 어려운 사항 같아요. 물론 약물로 원인을 고칠 수 없다는 점은 동의합니다.

아, 맥거핀님 페이퍼를 보니 또다시 생각이 많아지는게
머리가.... 흑.... 감기 몸살로 쉬는 중인데,, 책임지세요! ㅋㅋ.

맥거핀 2012-11-27 23:39   좋아요 0 | URL
네..맞는 말씀이라고 생각이 됩니다. 저자는 약물에 대해서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나(약에 대응하는 정신병만이 주목이 된다거나, 약은 궁극적으로 치료를 하지 못하고, 그를 멍하게, 둔하게 만들 뿐이라는 점 등등), 정신병에 있어서 약물의 필요성 역시 어느정도는 필요하다고 봅니다. 다만 저자가 이것을 강조하는 이유는 현재에 약물에 의존하는 경향이 너무 심해졌다는 판단에 의한 것이겠죠. 말씀하신대로 결국 이 책을 읽어봐도 정신분석학 역시도 정신병을 완전히 치료할 수 없는 것이 사실이거든요. 부작용, 그러니까 정신병을 심화시키는 경우도 있구요. 물론 모든 환자를 그렇게 상담하는 것이 어렵다는 현실적인 이유도 있습니다.

근데, 저도 감기 비슷한 증세로 계속 몸이 안 좋았거든요. 안좋은 상태에서 이해도 안되는 책을 읽고 쓴 글이니 이해해 주세요.^^ (아무튼 요즘에 감기 조심해야합니다.)

sslmo 2012-11-27 14: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와~, 이렇게 어려운 도서가 신간평가단 도서란 말인가여~ㅠ.ㅠ

님이 예를 들어 잘 정리해주신 덕분에...감 잡았지만, 감히 읽어볼 엄두가 나지 않는다는~--;

맥거핀 2012-11-27 23:41   좋아요 0 | URL
저도 이런 기회나 되야 읽지, 아마도 평생 가야 들춰보지 않을 책 중에 하나가 아닌가 싶습니다.

근데 서평단 책이 두권인데요. 나머지 한 권은 '양자역학'에 대한 거거든요. 그 양자역학 책은 저도 추천한 거기 떄문에 할 말은 없지만, 나머지 한 권도 이런 책일 줄이야..OTL

2012-11-30 21:0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1 13: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3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2-03 18: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터치, 민병훈, 2012

 

 

 

민병훈 감독의 영화 <터치>는 영화 그 자체보다 다른 것으로 화제가 된 안타까운 영화다. 뭐 그것은 알려진대로 교차상영과 그에 반발한 감독의 종영 선언과 관련한 이야기. 교차상영에 관련한 이야기는 아니지만, 내가 끄적거릴 이야기도 그렇게 영화의 내용과 관련있는 이야기는 아니다. (아무튼 웃긴 것은 이 교차상영은 멀티플렉스의 등장과 함께 나타났다는 것이다. 물론 이는 그렇게 간단한 이야기만은 아니고, 모든 책임을 배급사나 멀티플렉스에 돌릴 수도 없다. 그러나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멀티플렉스는 많은 영화를 보여주겠다는 명분으로 탄생했다.)

영화를 보고 나오며, 영화에서 주인공들의 행동이 잘 이해가 되지 않는다는 여러 사람의 투덜거림을 들으며, 요즘의 관객들이 '이해'라는 것을 받아들이는 방식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었다. 일단 간단하게는 요즘에는 거의 모든 것들이 즉각적인 반응으로 나타난다고 이야기할 수 있다. 요즘에는 영화의 엔딩크레딧이 올라가는 도중에, 심지어는 영화가 끝나기도 전에 영화들에 대한 판결이 내려지며, 판결은 수치화되어 바로 점수와 랭킹이 매겨진다. (최근에 들어서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트위터에 그 영화의 단평을 남기는 것을 종종 보게 된다.) 어떠한 영화이든 간에 영화는 보는 이에게 머물러 있는 경우가 거의 없으며, 바로 다른 어떤 것으로 바뀌어 급속하게 빠져나간다. 그러나 그보다 더 조금 이상하게 느껴지는 것은 요즘의 '이해'가 보여주는 어떤 양상들이다. 이상하게도 요즘의 관객들은 이야기를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관대하지만, 주인공들의 어떤 감정이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것에는 점점 관대해지지 못하는 것 같다. 아니,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으므로 다음과 같이 좀 바꿔보자. 요즘의 관객들은 이야기가 이해하기 어려운 형태로 만들어진 것은 보다 잘 견디지만, 주인공들이 이해하기 어려운 행동을 하는 것에는 보다 잘 견디지 못하는 것 같다. (그러니까 나는 여러 사람들의 이해도, 이해의 능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이해에 대한 태도를 말하고 싶다. 사실 대부분의 경우에 이해의 문제에 있어서는 이해의 능력보다는 이해의 태도가 문제가 되니까.) 이야기가 복잡하거나, 일부러 결락을 만들어 놓은 영화들을 보고 나서는 여러 다른 것들을 찾아보며 어떻게든 이야기의 얼개를 맞추려는 관객들은 많아졌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주인공이 어떤 행동, 생각을 보여줬을 때 그것이 나의 생각과 다르면 그것에 대해 곰곰이 생각해보기 보다는 바로 낮은 평점으로 징벌을 내리는 관객들 또한 많아졌다.

물론 이것의 책임을 다른 여러 곳에 돌리거나 영화 그 스스로에게 물을 수도 있다. 요즘에는 이야기는 한껏 복잡해지지만, 주인공들의 감정이나 생각을 너무 쉬운 방식으로 표출하는 경향이 점차 심해지는 것 같다. 예를 들어 어떤 작품들은 설명하는 씬들, 잉여의 씬들이 너무 많아서 어리둥절하게 만든다. 주인공의 감정은 과도한 클로즈업과 구슬픈 음악들로 설명조로 제시되고, 그것도 모자라 대사로서 주인공은 자신의 감정을 다시 설명하고야 만다. 반면 이야기는 소위 반전을 만든다거나, 관객의 허를 찌른다는 이유로 쓸데없이 복잡해지고 있으며, 멀쩡히 놔두는 것이 훨씬 나은 이야기들을 억지로 뒤집고 자르고, 숨기고 있다. (한편으로 드라마나 영화는 아니지만, 예능 프로그램들을 가지고도 이러한 것을 이야기할 수 있다. 요즘의 예능들은 보는 이들의 감정을 극단적으로 컨트롤하니까. 예를 들어 우리는 어떤 내용을 보고 그 내용에 감동하는 것일까, 아니면 그것에 커다랗게 쓰여진 '감동!'이라는 글자를 보고 감동하는 것일까. 물론 예능들은 아예 대놓고 자신들은 시청자가 10세 이하의 아동이라고 생각하고 만든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실 우리는 10세 이하의 아동들에게도 "여기서 감동해!"라고 말하지는 않는다.) 그런 것들이 관객들의 인내심을 혹은 역치를 점점 낮추는 것은 아닐까. 상당수의 관객들이 그것에 놓여져 있는 어떤 공백의 상태(사실 정확히 말하면 공백인 경우는 없지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은 그런 것들을 쉽게 설명해주는 방식에 너무 길들여졌기 때문은 아닐까. (아마 누군가는 이렇게 말할지도 모르겠다. 아니 도대체 왜 견뎌야 하지, 영화는 견디지 않기 위해서 - 그러니까 즐기기 위해서 보는 것이 아닌가. - 그렇게 묻는 사람에게는 답해줄 말이 없다. 아니 우리의 인생도 그런 수많은 공백으로 이루어져 있으니까, 라고 답할 수도 있겠지만, 그 공백을 채우는 것이 영화라는 데 무슨 할 말이 있는가.)

민병훈 감독의 영화 <터치>에서 주인공들은 조금은 이해되지 않는 행동을 한다. 이 영화를 이런 식으로 이야기하고 싶다. 주인공들에게는 계속 퀘스트가 주어지고, 계속해서 악마의 시험이 들이닥친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는 것은 괴롭다. 괴로운 99분의 체험. 그러나 그 1시간 39분을 견디는 것이 바로 영화라는 것이다. 영화라는 것은 그 시간 동안을 견디며 앉아있는 것이 필요하기에 그렇게 만들어진 것이므로 어쩔 도리가 없다(만약 30분 견디고 10분 쉬고 하는 것이 영화의 감상에 더 좋다면, 모든 영화를 그런 식으로 상영하지 않을 이유가 있는가?). 그런데 그렇게 견디다 보면 이상한 감동이 온다. 어쩔 수 없는 선택에 내몰린 사람들이 영화의 어떤 시점에 이르러 아무도 이해하지 못할 선택으로 나아갈 때에 그것을 보는 감동. 정성일 식대로 말하자면, 그들은 아무런 선택도 할 수 없는 처지에 내내 내몰려 있다가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이르렀을 때, 결국 비범한 선택을 한다(그러니까 그들에게 선택지를 주는 것처럼 보이는 초반의 설정들은 사실 선택이 아닌 것이다. 그들은 그렇게 할 수 밖에 없으니까. 정성일의 말대로 그렇게 할 수 밖에 없는 것을 '선택'이라 부를 수는 없는 것이다). 그 선택은 선뜻 이해할 수 있는 것이 아니지만(분명히 나도 그런 위치에 놓여지면, 그런 선택을 할 수 없을 것이므로. 그러니 나는 그 선택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들이 그때서야 비로소 선택할 수 있는 시점에 겨우 이르렀기 때문에, 즉 다른말로 하면 그 선택은 그들이 선택할 수 없는 체험의 끝에 결국 주어진 것이므로, 그런 선택을 한 것은 아닐까.  

그러므로 때로 영화는 이해되지 않아도 괜찮은 것이다. 그것에 대한 어떤 감동의 필수조건은 이해가 아니다. 역으로 이렇게 말할 수도 있다. 우리가 주인공의 어떤 행동을 이해한다고 했을 때 그것은 그들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 선택의 범주 안에 들어있다는 이야기이다. 즉 그것을 흔히 리얼하다거나 현실적인 이야기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류의 감동은 때로 그들이 이해할 수 없는 선택을 했을 때 우리 안에 나타난다. 영화는 시간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지만,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견뎌내는 것이기도 하며, 그렇게 견뎌냄으로써 우리는 도리어 현실에 가깝게 다가선다. 왜냐하면 우리는 삶에서 수많은 이해할 수 없는 순간을 만나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것이 현실을 벗어남으로써 도리어 현실에 가까워지는 것이라고 말할 수도 있다. 그러므로 영화, 혹은 예술의 가치는 그 자체로 존재하는 것이지, 그의 이해 여부와 예술의 가치는 무관하다. 아니 도리어 예술은 이해를 벗어남으로써 예술로서 나아간다. 예술은, 아니 영화는 어떤 의미에서는 관객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 (이것은 관객을 계몽하여야 한다는 말은 아니다. 관객이 무지몽매하니 그들을 앞질러 나가야 한다는 더더구나 아니다. 이야기를 잘라내거나 복잡하게 꼬아버림으로써 앞질러 나가는 것, 혹은 관객에게 메시지를 주입하여 앞질러 나가는 것을 이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그런 앞질러 나가려는 하나의 시도는 예를 들어 이러한 것이 아닐까. 최근에 아트시네마에서 진행되고 있는 '우리 시대의 프랑스 영화 특별전'에서 자크 리벳의 <도끼에 손대지 마라>를 보았다. 19세기 프랑스 귀족사회에서 앙투아네트(랑제 공작 부인)와 아르망 장군의 사랑을 그린 발자크의 소설 <랑제 공작 부인>을 영화화한 작품인데, 영화의 어떤 특이한 형식적인 시도가 눈에 띈다. 그것은 자막의 활용인데, 이는 화면과 병치하여 존재하는 영화적인 시도로서의 자막이 아니라, 검은 바탕화면에 흰글씨로 나오는 무성영화, 혹은 오페라나 연극식의 자막이라고 할 수 있다. 즉 여기서의 자막은 이야기의 진행을 돕는 보조도구로서 기능하는데 '다음날', '그날 저녁' 식의 자막은 물론이고, 며칠이 지나 어디로 이동했다거나, 몇 시간째 그를 기다렸다거나 하는 자막이 계속하여 나온다(즉 '이동한다'는 사실을 관객에게 알리고 싶으면 이동수단을 타고 있는 모습을 보여준다거나 대사로 처리하는 일반 영화와 달리 이 영화는 그것을 그저 자막으로 처리하여 버린다). 그것은 극의 진행을 넘어서, 사랑으로 괴로워했다는 식의 간략한 감정을 설명하거나, 지금까지 본 부분은 사랑의 사회문화적 양상이니 이제 사랑의 종교적 양상을 보자는 식의 논평적인 부분까지 나아간다.
 
그렇다면 이 영화야말로 관객에게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하는, 관객을 바보 만드는 영화의 전형적인 예인가? 그렇지는 않다. 왜냐하면 이 영화의 가장 큰 흐름, 아르망 장군과 앙투아네트의 사랑에 담긴 게임적인 요소의 미스테리는 이것으로서 도리어 강화되기 때문이다. 즉 이 영화에서의 자막들은 영화의 중간중간 관객에게 그저 보여주는 감독의 패이다(어떤 게임도 패를 아예 보지 않고서는 게임을 진행할 수 없다. 아니 게임을 하기 위해서는 패의 일부는 보여주어야만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는 사소한 전개에 관계된 내용들은 간단하게 전달하겠다는 감독의 일종의 전략인 셈이다. 며칠이 지났는지, 어디로 이동했는지 같은 것에 왜 쓸데없이 머리를 써, 그보다 이 영화에 머리를 쓸 것은 이 두 사람의 관계라는 감독의 대답이라고 할까. 즉 전적으로 이것의 힘이라고 말하기는 힘들지만, 이 자막들은 관객이 이 두 사람의 관계에 주목하게 하고, 이들의 관계의 문제를 골똘히 생각하게 하는 데에 초점이 맞춰져 있다. 즉 우리는 그 자막들로서 영화에 조금 더 가깝게 들어오게 된다. 

그러니 쓸데없이 그만 좀 비틀고, 관객을 어떻게하면 좀 더 영화에 들어오게 만들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지 않을까. 필요없는 수식들로 영화를 잔뜩 포장한 후 영화를 보고나서 그 내용에 대한 질문을 인터넷에 올리게 하는 것은 그 영화를 본 사람들을 점점 밀어내는 것이다. 영화를 어떻게 하면 사람들 안에 오래 머물게 할 것인가의 문제를 영화는 생각해 보아야만 한다. 뭐 그것은 이해하지 못하는 선택을 하게 하는 것이나, 자막을 보여주는 것일 수도 있고, 다른 어떤 실험이나 시도일 수 있다. 아무튼 할 수 있는 마지막 이야기는 하고 글을 끝내야 겠다. 이 <도끼에 손대지 마라>는 1928년생 영화감독이 2007년에 만든 영화이다. 그리고 <터치>는 교차상영으로 종영하기에는 상당히 아까운 영화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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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시스 2012-11-22 1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예요! 그러니까 좋은 영화인데 그걸 보는 인간들은 맘에 안 들더라..그런 얘기 맞죠? 이 영화..김지영이 일생일대의 연기변신을 시도했고 이걸 찍으려 많은 것을 포기했다는 얘기를 들었을 때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지난 번에 [광해] 보고 온 이후로 극장이라는 공간에 대한 으악 정이 뚝 떨어져버려서.. 극장공포증에 걸린 것 같아요. 여기서는 멀티플렉스 아닌 극장을 찾기 힘들고 저는 백화점/쇼핑몰/시내에 가기가 싫어요.

그러니까 내용도 좀 알려주시면 안돼요?(라고 묻는다..관객의 제일 나쁜 자세!)

맥거핀 2012-11-22 17:12   좋아요 0 | URL
제 중언부언을 이렇게 간단하게 줄여주시다니, 님좀짱인듯.^^ 어 그니까 이 영화가 무슨 내용이냐면, 사슴이..그러니까, 사슴을..아니 사슴이 나오는데..(궁금증 유발전략)

아무튼 김지영 씨나 유준상 씨 역할이 기본적으로 계속 힘들어하는 역할이라 연기를 하기에도 좀 힘들었을 듯 한데, 아무튼 이런 식으로 영화가 묻혀 버리면 주연배우로서는 화가 좀 나기는 할 것 같아요. (감독은 물론이구요.)

저도 멀티플렉스 안 좋아해요. 특히 영화시간 많이 남았을 때 시간 때워야하는데, 멀티플렉스는 대부분 너무 시끄러워서, 조용히 책 볼 데도 없고..난감할 때가 많죠. (도대체 극장 안에 오락기는 왜 설치하는 것임?)

다락방 2012-11-22 17: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앗, 저도 이 영화 토요일날 보려고 예매해두었어요. 저 역시 말씀하신 그 기사를 보았거든요. 그 기사를 보기전까지 이 영화에 대한 어떤 정보도 알지 못했던 터였는데, 뭐랄까, 저는 반발심이 생겼어요. 나만큼은 송중기를 보는 대신 터치를 선택하겠어, 하는 그런 심정 말이죠. (이것은 영화를 관람하는 순수하지 못한 의도일까요?)

제가 이 영화를 제대로 이해할 수 있을지는 알 수 없지만, 교차상영으로 종영하기에는 아까운영화라고 하시니 기대를 해봐야겠어요.

맥거핀 2012-11-24 16:54   좋아요 0 | URL
답글이 늦어서 이미 영화를 보셨을지도 모르겠네요. 거의 상영하는 극장이 없어서 혹 저랑 같은데서 보실지도 모르겠고..(저는 필름포럼) 저도 사실 우연하게 보게 되었거든요. 이 영화 말고 다른 영화보려다가 어찌어찌한 몇 개의 일들이 겹쳐서요.

제가 이야기하고 싶은 것은 위에 글에도 있지만, 이해의 능력이 아니라 이해의 태도니까요. 다락방님 나름대로 영화를 받아들이시면 되죠. 혹 보시고 가능하면 글 남겨주세요.^^

프레이야 2012-11-22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유준상, 김지영을 연기자로 믿으니 볼 예정인데, 힘든가요??
그래도 볼래요. 왜 주인공들이 이해가 안 되었던 건지 나도 사람들처럼 그런지
확인해 볼까 싶기도 하고... '이해'라는 것, 꼭 필요할까요? 어차피 주관적인 것.
삶에서 무수한 것들이 이해불가한 것들인 걸. 맥거핀님의 생각에 동감이에요^^

맥거핀 2012-11-24 16:57   좋아요 0 | URL
네..사실은 좀 힘들기는 합니다. 쉴새없이 앉아있는 사람을 몰아붙인다고나 할까요. 근데 저는 그 몰아붙임의 마지막에서 뭔가가 왔거든요.

맞는 말씀이에요. 사실 우리는 수많은 것들을 이해하지 못하고(혹은 자신만의 방식으로 이해하고) 삶에서 무수한 오해와 왜곡 속에 둘러쌓여 있잖아요. 영화에 대해서도 조금 더 관객들이 관대해졌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Arch 2012-11-22 23: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는 극장에서 보는게 제맛인데 언제부턴가 극장에서 영화보는게 불편해졌어요. 저 역시 사람들이 나오면서 이런 저런 평들이 들릴 때 참 곤혹스러워요. 뭐랄까. 나는 그 부분이 잘 정리가 안 됐는데 나름대로 깔끔하게 정리하는 소리를 들으면 내가 모자란 것인지 그토록 영화가 선명한건지 잘 모르겠더라구요.

두달 전에 '여행자'를 봤는데 영화의 롱테이크로 찍은 창문씬이 계속 기억에 남아요. 사실 별로 특별할게 없는 장면이거든요. 카메라가 창문을 원경과 근경으로 잡고 있는데 주인공이 총에 맞아 죽는. 그런데 자꾸 생각이 나요. 그 장면과 그 분위기, 그 느낌이 어떤건지 명확하진 않지만 '그녀에게'를 보면서 두 여자가(이마저 정확하지 않지만) 누워서 해를 쬐는 장면처럼 기억에서 떠나지 않아요. 요즘 영화는 그런 장면, 뭔가 환기시키는 분위기는 없어요. 관객들의 눈높이기도 하겠고 영화가 예술이기보다 산업으로 받아들여져서인 것 같기도 해요.

막연하게 왜 영화를 본 사람들은 저런 소리를 할까 싶었는데 맥거핀님 얘기를 들으니까 그렇구나, 싶어요. 정성일씨 책은 참 재미있습니다. 적극적으로 이해되지 않는데 자꾸 보면 나도 씬과 쇼트, 사운드를 생각할 수 있겠구나 싶고.

Arch 2012-11-22 23:02   좋아요 0 | URL
댓글이 너무 길어요 ㅡ,.6

맥거핀 2012-11-24 17:04   좋아요 0 | URL
실제로 몇 주전의 경험인데, 작은 극장들을 가면 엔딩크레딧이 다 올라갈 때까지 통상 불을 안키거든요. 근데 어떤 분이 휴대폰을 꺼내서 무엇인가를 적으시더라구요. 별로 보고 싶지 않았는데, 불빛이 워낙 세서 어쩌다보니 들여다보게 되었는데, 트위터에 감상을 올리고 있더라구요. 아이쿠나 싶었죠. 뭐 바로 생생한 감상을 남기는 것이 왜 나쁜가..그럴 수도 있지만, 저로서는 좀 이해하기 힘들었습니다.

요즘에 어떤 영화들을 보면 너무 매끄럽다고 할까요. 그러니까 영화를 보다가 말씀하신대로 툭 걸리는 지점이 없어요. 위에 든 <도끼에 손대지 마라>도 보면 초반 장면에 수도원을 확대해서 잡는 장면이 있는데, 통상 줌을 쓰는 경우들이 많은데, 이상하게도 점프컷을 쓰거든요. 그게 이상하게 기억에 많이 남았어요. 근데 아무튼 요즘에는 공식대로 간달까, 말 그대로 스무스하게 진행하는 영화들이 많아요. 그래서 그 영화들은 눈에 걸리지 않고, 어딘가로 죽 빠져나가는 느낌들이 들어요. 그게 좋은 건지, 나쁜 건지 잘 모르겠습니다만.

꼭 정성일 씨 뿐만이 아니라, 가끔 씬과 쇼트에 대해 분석해놓은 글들을 보면, 대단해보이기도 하지만, 좀 징글맞기도 하죠..^^

Mephistopheles 2012-11-22 23: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가 발전하는 만큼 관객들도 발전했으면 좋겠습니다.

맥거핀 2012-11-24 17:06   좋아요 0 | URL
아..제가 하고싶은 얘기가 그 얘깁니다. 좋은 작품을 보기 위해서는 우리도 좋은 관객이 되야겠죠.

2012-11-23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3 12: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1-24 17: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넙치 2012-11-23 15: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이 날다>를 보면서 그야말로 런닝타임을 견뎌 냈던 터라;; 민병훈 감독 작품은 무의미한 실험이라 단정짓고 쳐다도 안 보게 되었는데 글 읽으면서 뜨끔해지면서 영화가 궁금해지네요.


맥거핀 2012-11-24 17:26   좋아요 0 | URL
저는 솔직히 민병훈 감독의 영화를 이번에 처음 보았습니다. 근데 여러 의견을 보니 이번 영화는 예전 영화들보다 스토리라인의 구조가 훨씬 살아난 영화라는 견해들이 있더군요. 제 생각에도 이 영화는 말 그대로 '지루한' 영화는 아닙니다. 도리어 사건이 너무 많이 들어있어서 계속 이야기에 휘둘린다는 느낌이 들 정도니까요. 어렵거나 현학적인 이야기는 아니라고 생각해요. 다만 우리 스스로를 주인공과 동일시했을 때 어느 정도는 '견뎌내야'하는 부분들이 있겠죠.^^

아이리시스 2012-11-27 01:0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러니까 사슴에 대해서 우리는 토론을 해야 해요!!! 사슴 나올 때마다 멘붕됐어요ㅠ.ㅠ

맥거핀 2012-11-27 23:43   좋아요 0 | URL
근데 그 사슴 꽤 이쁘지 않았습니까. 제가 위에 사슴 어쩌구 얘기할 때 비유인줄 알았죠?

아이리시스 2012-12-03 19:37   좋아요 0 | URL
비유일 수도 있고 사슴농장이 나오나 보다..라고 생각을 하긴 했었어요. 그런데 그 비유를 이해하지 못한다는 게 비극이죠. 저는 사슴인가 봐요(응?).

맥거핀 2012-12-04 00:32   좋아요 0 | URL
근데 저도 중간에 골목길에서 사슴이 나올 때는 멘붕이 왔어요. 그 사슴이라면 되게 좋은 의미 아닐까요? 그러니까 사슴 하세요.^^
 

 

간만에 알라딘 중고서점에 들러 살만한 책이 있는지 휘휘 둘러보았으나, 그다지 건질만한 책을 발견할 수 없었다. 왠지 예전보다 책이 좀 줄었다는 느낌이었는데, 알라딘이 서울 여러 곳에 중고서점을 열면서 책도 그만큼 분산되는 것일까?

 

그래서 타겟을 돌려 DVD와 음반을 집중적으로 보았는데, 운좋게도 한동안 절판되어 찾기 어려웠던 <질투는 나의 힘> DVD를 발견, 득템. 이 <질투는 나의 힘> DVD는 영화 본편도 본편이지만, 박찬옥 감독과 배우들의 코멘터리 외에도 박찬옥 감독이 봉준호 감독을 초빙하여 진행한 코멘터리가 들어있다는 것이 특징(이번에도 "아니, 도대체 저 장면은 어떻게 찍었죠?"를 얼마나 날려줄지 기대중). 그밖에 박찬옥 감독의 단편 <느린여름>이 스페셜 피처로 들어 있으므로, 박찬옥 감독의 팬이라면 상당히 챙겨볼만한 DVD임.

 

 

 

이라고 생각하며, 8000원에 득템했다고 좋아하고 있었는데, 집에 돌아와 심심하여 인터넷을 검색해보다가 멘붕이 왔다. 이 <질투는 나의 힘> DVD를 3000원대에 새 것을 팔고 있는 것이 아닌가? 아니 필요이상으로 과잉공급된 내 돈도 돈이지만, 우리 찬옥찡의 이 좋은 영화가...하며 바르르 떨리는 손으로 클릭질을 하며 판매제품을 자세히 살펴보았는데, 뭔가 좀 이상했다. 일단 '역수입 한국영화 할인'이라는 미스테리한 말머리가 붙여져 있는데다가, 이렇게 팔고 있는 한국영화가 한 두 개가 아니었다. 눈에 띄는 작품만 해도, 윤종찬의 <소름>, 박찬욱의 <복수는 나의 것>, 이정향의 <미술관 옆 동물원>, 봉준호의 <플란다스의 개> 등등.

 

궁금해서 좀 더 캐보니 이 영화들은 '씨네라인(Cine Line)'이라는 외국의 미스테리한 회사에서 제작되어 국내로 들어온 것들. (http://kongkwak.blog.me/140159202975  http://dvdprime.donga.com/bbs/view.asp?bbslist_id=1650203&master_id=20 등 참고.) 2-3년 전부터 판매되다가 단속으로 판매가 중단되었던 것 같은데, 여전히 계속 팔리고 있는 듯(심지어 교보 같은데서 판매하는 할인 DVD에도 종종 끼어있는 듯). 제품의 화질과 음질, 그리고 자켓의 인쇄상태 등이 조악하다고 하니 '씨네라인(Cine Line)'이라는 제작사의 DVD는 구입을 조심하시길.

 

다행히 내가 구입한 것은 '스타맥스'에서 제작된 정품(<질투는 나의 힘>의 경우 'KD미디어'에서 나온 아웃케이스 판이 있음. '스타맥스'것은 킵케이스).

 

 

추가.

 

근데 혹시나 해서 찾아보니 알라딘에서도 이 '씨네라인'의 DVD를 판매하고 있군요. 대표적인 예가 강제규 감독의 <은행나무 침대>인데, 이 씨네라인 DVD를 알라딘 특가라는 이름으로 2900원에 판매하고 있네요. 정가 16500원인데, 82%할인이라는 명목으로 말이죠. 그런데 16500원은 '덕슨미디어'에서 국내정식 출시한 DVD 가격입니다. 제조사가 다른데 동일한 제품이라고 할인해서 판다는 것은 엄밀히 말하면 사기죠(더구나 '짝퉁'에 가까운 제품을요). 뭐 알라딘에서 좀 의심스러운 DVD를 파는 것은 어제오늘의 일은 아니었습니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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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1-21 09: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라인, 조심해야겠군요. 할인품 중 어떤 건 음량이 너무 낮아 볼륨 최고로 올려들어야 돼서 별로더라구요. 김명민, 장진영 초기작 소름, 좋게 봤어요. 디비디 구매한 지 오래전에요. 좋은하루 보내세요, 맥거핀님.^^

맥거핀 2012-11-21 15:40   좋아요 0 | URL
사실 그래도 재생이 되면 그나마 다행이죠. 어떤 경우에는 아예 재생조차 안되는 경우가 있어요. DVD 1장 짜리 경우에는 듀얼레이어인 경우가 많은데, 정체를 알 수 없는 할인품들은 거의 싱글레이어죠. 그러니 화질과 음질이 나빠질 수 밖에요.

저도 소름은 좋아하지만, 가슴이 아픈 영화이기도 합니다. (소개팅녀와 이 영화를 봤다가, 연락이 끊어짐..;;)

프레이야 2012-11-21 19:18   좋아요 0 | URL
꽈당ᆢ 소개팅녀와 볼 영화론 너무 센대요.
맥님이 잘못하셨어요. ㅠ 아까워라. ㅎㅎ
왜 제가 다 아깝죠ㅋ

맥거핀 2012-11-22 16:43   좋아요 0 | URL
네..제가 잘못했습니다(보기 전에 검색만 열심히 했어도..)ㅋ
그분도 어딘가에서 잘 살고 계시겠죠.^^

2012-11-21 19:1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씨네라인 조심! 좋은 정보네요.ㅎ 2900원짜리를 조심해야겠군요.
그나저나 소개팅녀와 소름을 보시다니 왜 그러셨어요~. 그런 영화는 친구랑 봐야져..ㅋㅋ

맥거핀 2012-11-22 16:45   좋아요 0 | URL
제 생각에는 친구도 친한 애랑 봐야지, 안 친한 애랑 보면 괜히 사이가 나빠질 수 있는 영화입니다.ㅋ

암튼 알라딘도 그렇고 다른데도 그렇고 싸게 파는 데는 다 이유가 있으니 조심하시길..

Shining 2012-11-22 11: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DVD 잘 사는 건 어려운 일인 것 같아요. 특히 온라인은 조심해야하는..
이벤트 당첨되어서 받은 DVD들도 어쩐지 수상해보이는 것들이 많은 걸 보면(그것도 영화쪽에 응모한 거였는데요) 조심해야합니다_- 최근에 제가 산 DVD는 <더 문>이었습니다(그냥 말해봅니다ㅎㅎ).

맥거핀 2012-11-22 16:48   좋아요 0 | URL
아..무슨 영화인지 몰라 찾아봤어요. 의외의 영화네요. SF는 안보실 듯한데..최근 <다크나이트 라이즈>가 출시되었죠. 살까말까 고민중..

근데 속마음을 좀 더 말해보면 사실 싸구려 리핑판이라도 좋으니 구하고 싶은 DVD들이 좀 있기는 해요. 출시만 되면 감사합니다..그런 영화들. 좋은 온라인몰 아시는 데 있으면 공유 좀.

Shining 2012-11-23 12:27   좋아요 0 | URL
예, 제가 SF를 잘 안 보긴 합니다만ㅎㅎ 이 영화는 좋더군요, 샘 록웰(락웰?)이 연기를 잘 한다는 걸 잘 몰랐는데 이 영화 보고 재발견한 기분이었어요. 하필 <뉴 문>과 같은 해에 나와서 다들 "아, 그 영화?"이러길래 "뉴 문 말고"라고 말하는 게 버릇이 된 영화였어요_- 제가 참 좋아하는 영화 중 하나입니다.

네, 그런 영화 있어요-_ㅠ 해피 투게더, 구스 반 산트, 타르코프스키 영화, 가 그래요 저는. 이놈의 나라는 음반 아카이빙 뿐 아니라 DVD 시장도 조악해요_-

좋은지는 모르겠고 가끔 들어가는 데가 있긴 한데 집에 있는 노트북에 저장되어 있어서; 찾아보고 알려드릴게요 :)

맥거핀 2012-11-24 18:02   좋아요 0 | URL
아..그래요? 저도 한번 영화를 찾아서 봐야겠군요. SF를 잘 안보시는 분이 좋아하는 SF란 어떤건지 궁금하네요.

DVD로 출시되지 않은 많은 영화들...어떤 영화들은 파일로 가지고 있는 영화들도 있는데, 자막이 없거나, 영어자막만 있는 영화들이 있어서 제대로 이해를 못하고 있어요.(영화보면서 영어공부하고 싶지는 않아서요.^^;)

Shining 2012-11-29 20: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맥거핀님, 제가 말했던 사이트는 없었습니다;; 그러고보니까 제가 맘에 안 드는 DVD를 사고 홧김에 사이트를 지워버린 기억이...-_- 지금 제 노트북에 즐찾 된 영화 관련 사이트는 KMDB와 Kofic, 한국영상자료원, 아마존DVD 이렇게군요.

그리 도움이 되지 않으셨죠?-_ㅠ 혹시 기다리셨다면 죄송, 도움이 되지 않아서 더 죄송한 바입니다ㅠ

맥거핀 2012-11-30 14:46   좋아요 0 | URL
저도 혹시나하고 여쭤봤던 건데요.^^ 하긴 근데 알아도 최근에 DVD를 사게되도 거의 중고를 사는 편이라..(DVD라는 게 뭐 본다고 닳는 것도 아니고, 중고를 사는 게 더 좋더라구요.) 집에 있는 DVD도 구매 후 보지 않은 게 수두룩 하고요.

책도 그렇고, DVD도 그렇고, 요새는 있는 것부터 일단 보자,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