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연 속으로 (Into the Abyss), 베르너 헤어조그, 2011

리스트 (LIST), 홍상수, 2011

잿가루 (Ashes),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샤크다 (Sakda), 아피찻퐁 위타세라쿨, 2012

일장춘몽 (Dream is Awakening), 궈펑 허, 위에 첸, 2011

 

 

미국의 어떤 사형수를 근접하여 보여주며 사형제도와 그것을 둘러싼 여러 것들에 대해 묻는 베르너 헤어조그의 다큐 <심연 속으로>는 정공법을 택하는 것처럼 보인다. 아마도 이런 영화에서 포인트가 되는 부분은 그 사형수가 어떠한 사람인가,라는 점일 것이다. 그리고 베르너 헤어조그와 같이 사형제도를 반대하는 입장에서(그는 영화 시작 부분에 자신이 사형제도를 반대한다고 밝힌다), 보다 쉬운 방법은 조금은 논쟁이 될 수 있는 사건, 혹은 그래도 어느 정도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사형수를 선택하여 그를 조명하는 것이다. 그러나 감독이 누군가. <아귀레, 신의 분노> 등에서 정면돌파를 선택했던 베르너 헤어조그가 아닌가. 그가 선택한 두 명의 범죄자, 이제 스무살을 갓 넘은 것으로 보이는 마이클과 그의 공모자 제이슨은 거의 구원의 여지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이들은 고작 차 한대를 훔치려고 세 사람을 죽였고, 도주하다가 잡혔다. 이들은 게다가 이어지는 인터뷰들에서 서로에게 책임을 떠넘기려는 듯이 보인다. 모두가 상대방이 더 큰 잘못을 저질렀고, 자신은 단지 상대방의 지시를 받아 움직인 것에 불과하다고 항변한다. 이어지는 내용들을 보면 더 기분이 묘해진다. 이들이 그 세 사람을 죽이고, 그 멋드러진 차를 몬 시각은 고작 72시간이 채 안되었고(그러니까 이들은 단지 3일간의 어떤 '즐거움' 을 위해서 세 사람의 목숨을 앗아간 것이었다), 40년 형을 선고받은 제이슨(제이슨은 마이클의 종범이라는 것이 인정되어 형이 감형되었다. 마이클은 사형선고를 받았다)의 아버지는 모든 게 자신 때문이라며, 자신이 제이슨을 잘못 키웠기 때문이라고 한탄한다. 감옥 안에서, 자신도 예전의 어떤 범죄 때문에 아들과 동일하게 40년 형을 받아 복역하는 와중에 말이다.

 

그러므로 이 영화는 제목에서와 같이 관객을 깊은 '심연 속으로' 빠뜨리며 몇 가지 질문을 하게 만든다. 예를 들어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저와 같은 자들에게 구원이란 불가한 것이 아닌가. 저들은 그야말로 '죽을 죄'를 저지른 것이 아닌가. 저들을 사형시키는 것이 바로 공정한 사회정의의 실현이 아닐까. 그러나 이렇게 '죽일만한 사람이 있다는 식의 생각'은 동시에 다른 질문도 가능케 한다. 그렇다면 반대로 정상참작의 여지가 있는 경우(그러니까 살려둘만한 경우)가 있을까. 예를 들어 어떤 중대한 이유 때문에 세 사람을 죽였다면, 그는 살려둘만한 여지가 있는 것일까. 이 영화에서도 제이슨의 경우 마이클의 지시를 받고 행동했다는 이유로 사형대신 40년 징역형이 부과되었는데, 이는 온당하다고 볼 수 있는 것일까. 그러므로 이런 영화의 정공법은 결국 이러한 질문이 필요하게 만든다. 그들의 삶과 죽음을 우리는 무슨 기준에 의거하여 결정하는가. 그 기준들이란 과연 한 사람의 삶과 죽음을 결정할 정도로 정당한가. 그 기준을 우리 인간이 스스로 만들어내는 것이 가능한가. 즉 살려둘만한 사람과 죽일만한 사람을 구분하여 나누는 것, 그것 자체가 무엇보다도 '반인간적'인 것은 아닐까. (물론 이의 반대편에서의 논리도 가능할 것이다. 다른 한 인간을 죽인 인간은 이미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스스로가 판단하여 결정하였으므로, 그 스스로가 이미 인간이기를 포기했다는 논리. 그러나 그럼에도 여전히 개운치 않은 부분은 남는다. 과연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의 삶과 죽음을 결정하는 것이 '사형제'라는 제도로 인해 허용되어야 하는가. 법이라는 것은 결국 한 인간이 다른 인간을 해하는 것을 막기 위해 탄생한 것이 아닌가.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다른 인간을 죽여야만 하는가.)

 

(한 마디 덧붙이자면, 나는 사형제에 반대하는 입장이다. 다른 인간을 죽이는 것을 막기 위해, 우리는 인간을 죽이는 것을 허용한다는 이 모순된 질문에 여전히 답을 찾지 못하겠고, 동시에 사형제와 범죄율의 상관관계에 대해서도 정확히 밝혀진 바가 없는 것으로 알고 있다. 가끔 그렇다면 당신의 부모나 자식이 죽었을 때를 생각해 보라는 식으로 접근을 하는 경우가 있는데, 이에 대한 나의 답은 이렇다. 나의 가장 가까운 가족이 누군가에 의해 무고하게 살해된다면, 나도 분명 그 누군가가 대신해 죽기를 바랄 것이며, 분노에 몸서리칠 것이며 그를 내가 죽이고 싶어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이는 그러한 것을 제도로 만드는 것과는 이미 별개의 위치에 와있다. 법이라는 것은 그런 사적복수를 가능하게 하지 않기 위해 탄생된 것이며, 법은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체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 아니다. 그런 사적복수의 집합이 법이라면 법률 자체가 존재할 이유가 없다. 법은 가장 이성적인 판단의 집합체로서 존재해야 하며, 가족을 잃은 나는 이미 이성을 잃은 상태일 것이므로.)

 

두 가지가 기억에 남는다. 하나는 아주 오랜기간 사형집행인으로 살아오다가 한 사형수가 죽는 것을 보고 갑자기 충격을 받아 연금을 포기하고 사형집행인의 길에서 벗어난 한 남자의 케이스. 사형인을 사형집행 침대에 데려가고 그를 침대에 묶고, 약물을 주입하고, 죽은 시체를 시체보관소에 옮기는 등의 합법적인 살인 행위를 저지르는 이 사형집행인을 그렇다면 그 누가 구원해 줄 것인가. 다른 하나는 사형 집행 과정에 대한 정밀한 묘사 중 사형이 몸 상태가 정상이 아니면 실시될 수 없다는 규정에 대해서. 예를 들어 사형수의 질병과 같은 심각한 신체적 문제로 사형이 집행될 수 없다면 사형이 연기된다. 그러니까 우리는 그를 죽이기 위해서 살려둔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그가 이 세상에 더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하는 것이 아니라, '그가 죽는 바로 그 순간'을 보기 위해 사형을 집행한다.

 

 

                                                   (<샤크다>의 한 장면)

 

마지막으로 본 영화는 몇 가지의 단편들이다. 아피찻퐁 위타세라쿨의 두 단편 <잿가루>와 <샤크다>는 형식상의 실험이 인상적이다. <잿가루>는 흔들리는 이미지들을 연속하여 이어붙임으로써 꿈을 효과적으로 우리의 눈앞에서 재현한다. <샤크다>는 마치 육체와 영혼의 분리를 보여주는 듯하다. 영화의 메시지대로 우리는 자유롭게 태어났으나 육체에 혹은 기계에 갇혀 남자가 되거나 여자가 되거나 가난한 자가 되거나 단지 목소리가 된다. 장률 감독의 <중경>에도 나왔던 배우이자 음악가인 궈펑 허가 그의 연인(이자 역시 음악가인) 위에 첸과 만든 <일장춘몽>은 옛 카바레의 전통을 계승하는 듯한 그림자극의 형식도 인상적이지만, 영화가 끝난 후 감독의 말도 인상적이다. 나와 너라는 두 사람의 관계에는 '내가 보는 나, 내가 보는 너, 네가 보는 나, 네가 보는 너'라는 네 가지가 늘 존재하며, 이 네 가지는 매우 다른 것이다.

 

물론 가장 흥미로운 것은 홍상수의 단편 <리스트>이다. <리스트>에는 다시 한 모녀가 등장한다. 딸 정유미와 어머니 윤여정. 이 조합을 아마 기억하는 분들이 많을 것이다. <다른 나라에서>의 바로 그 딸과 그 어머니다. 배경은 <다른 나라에서>와 같다. 딸과 어머니는 바로 그 펜션에 갇혀 있으며, 이유도 동일하다(정확히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 장면을 그대로 쓰는 것 같기도 하다). 이들은 누군가의 사업실패로 이 펜션에 갇혀 있으며 무료해 미칠 것 같은 상태이다. 그러나 <다른 나라에서>와 차이점이 있다. <다른 나라에서>의 딸이 시나리오를 썼다면, 여기서의 딸은 리스트를 쓴다. 자신이 이곳에서 하고 싶은 일의 리스트. 그런니까 리스트를 쓰는 것과 이야기를 쓰는 것의 차이다(또 '차이'인가,하실 분이 있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이상하게도 다음 문장이 기억이 났다. "사실 무라카미 하루키는 그의 처녀작 <바람의 노래를 들어라>에서 "내가 여기서 써 보일 수 있는 것은 단지 리스트다. 소설도 문학도 아니고 예술도 아니다."라고 말하고 있다. 바꿔 말해, 그것은 패스티쉬(pastiche)이다." - 가라타니 고진 <역사와 반복>, p.164).

 

 

뭐 아무튼 그러므로 리스트는 시나리오, 즉 이야기라는 것과 미묘하게 달라진다. 시나리오에서 주인공 안느는 자유롭게 움직였지만, 리스트는 제약이 따른다. '실현가능성'이라는 제약이 말이다. 예를 들어 시나리오에서는 안느와 교수는 맛집에서 회를 먹지만, 이 리스트는 '맛집에 가서 먹는다'가 아니라 '맛집을 찾아본다'가 되며(즉 '맛집'이라는 것은 여기에 당연히 존재하지 않을 수도 있다), '배드민턴을 친다'가 아니라 '배드민턴을 칠 사람을 찾아본다'가 된다. 그리고 딸과 어머니는 이 리스트를 하나하나 처리하려고, 아니 사실은 정말 무료하기 때문에 밖으로 나간다. 그런데 영화가 꽤나 흥미로워지기 시작한다. 딸과 어머니는 한 남자(유준상-그는 이 영화에서는 구조대원이 아니라 유명 영화감독으로 나온다)를 만나며 이 리스트에 있는 10가지가 넘는 모든 항목은 점차 현실이 된다. 물론 영화가 마무리로 가까워질수록 관객은 이 마지막을 대략 짐작한다. 실현되는 리스트, 그것은 분명 꿈일 것이므로. 마지막 장면에서 딸은 리스트를 쓴 테이블에서 엎드려 자고 있으며(<다른 나라에서>에서 앉아서 시나리오를 썼던 바로 그 테이블이다), 어머니는 그런 딸을 깨워 밖으로 나가자고 한다. 리스트는 과연 실현될 수 있을까.

 

이는 꿈이라는 것을 생각해 보게 한다. 꿈이라는 말은 두 가지의 의미를 담고 있다. 이루고 싶은 것과 그러나 이뤄지지 않는 것. 꿈이라는 말에는 이루고 싶은 것, 되고 싶은 것, '희망'이라는 의미가 담겨 있으나, 그 꿈이라는 말은 동시에 부정적인 의미로도 사용된다. "아주 꿈을 꾸고 있구나. 꿈 깨."할 때의 그 꿈 말이다. 이는 이 영화와 <다른 나라에서>를 비교하면 더욱 도드라진다. <다른 나라에서>는 화려하게 시작했던 이야기가 세 층위를 거치며 점점 현실과 비슷해지며, 결국에는 희망에서 꿈을 거쳐 현실의 어떤 것과 비슷해졌다. 반면 리스트에서는 현실과 맞닿아 있는 것처럼 보이는 이 '리스트'가 점점 실현이 되어가는 꿈이 되었다가 그것은 중의적인 다른 꿈, 그러니까 이루어질 수 없는 한낱 꿈으로 되돌아온다. 즉 현실에서 꿈으로 빠져나오는 것과 꿈에서 현실로 빠져나오는 것의 차이. 이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속성을 떠올리게 하지 않는가. 꿈은 꿈이나, 이루어질 수 없는 꿈으로서 존재하는 이 영화라는 것. 그것이 이루어질 수 없다는 것을 누구나가 알고 있지만, 영화관에서는 누구나 꿈꾸기를 주저하지 않는다. 그렇다. 우리는 이루어질 수 없는 꿈을 꾸러 영화관에 간다. 꿈을 꾸는 것은 언젠가 꿈에서 깰 것을 각오하고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누구의 꿈도, 혹은 누구의 리스트도 실현불가능하다고 욕할 수 없다. 우리는 그 각오를 존중해주어여만 한다.

 

이번 CINDI의 주제말이 'CINDI is not Digital'이던가. 그러므로 그건 디지털이 아니다. 그건 꿈이다. 혹은 그건 누군가의 리스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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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2-10-19 16: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8월달에 본 영화를 9월달에 쓰고, 10월달에 쓰고...아주 막장이구나.

아이리시스 2012-10-19 19: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두 번 읽었어요. 잘 모르면서 영화평론가들이 쓴 책을 하나씩 사들이는데 비슷한 느낌에서 맥거핀님 글은 두 번 읽고싶게 해요. 뉴스 간만에 보니까 사형제에 관해선 사회면이 떠들썩하던데, 살인하고 사형선고 받기도 꽤 어려운 모양입니다(농담이 아니에요ㅠ) 기본적으로 저도 사형제에 관해선 같은 생각. 우리 가족 건드리면(강아지까지도) 다 죽여버릴 거예요,이런 마음가짐.

근데 단편들이 좋네요. <일장춘몽> 감독의 말. 그럼 저는 요즘 '내가 보는 나'에 대해 많이 말하고 싶은 것 같은데 창피해서 글로는 못쓰고 쓸까봐 글을 자꾸 걸러내는 중인 것 같아요. 그러면 11월에도 뭐가 나오겠네요. (좋아요 좋아)

맥거핀 2012-10-22 16:07   좋아요 0 | URL
그 <일장춘몽>이라는 작품에 보면 인형이 나오는데, 그 머리에 '나'라는 글자와 '너'라는 글자가 붙어있거든요, 아마도 내 안의 많은 문제들이 내가 보는 나와 다른 사람이 보는 나가 다르기 때문에 생겨나는 것 같아요. 뭐 아무리 그래도 그 둘을 일치시킬 수 없다는 것을 알지만.

요즘에 뭐 쓸 얘기가 없어서 예전에 본 영화들 재탕하고 있어요. 근데 재탕을 할려고 해도 머리 속에 남아있는게 별로 없어서 힘드네요. 아이리시스님도 그렇고 아주 오랜전에 본 것에 대해 글 쓰시는 분들 보면 대단..

2012-10-20 18: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리스트를 생각해 보게 되는군요..ㅎ 그나저나 위타세라쿤 영화는 평생 한 편도 못 봤고, 홍상수 영화는 6년 내에 한 편도 못 봤어요.. 저의 영화광으로서의 리스트는 홀쭉해져만 가는군요.ㅎ

맥거핀 2012-10-22 16:10   좋아요 0 | URL
저도 뭐 남말할 처지는 아니고, 제 리스트는 요새 빈곤하다못해, 아주 너덜너덜할 지경입니다. 그래도 섬님은 최근에 저보다는 영화를 자주 보시는 것 같기도 한데요?
 

 

 

<씨네21>에서는 매년 가을 즈음에 영화를 이야기하는 책에 대한 기획 기사를 낸다. 이번에는 최근 1~2년 안에 우리나라에 출간된 책들 중에 읽을만한 몇 권의 책들을 여러 평론가가 각각 1권씩 추천하는 형식이다. 기사의 앞머리에 붙은 정성일 평론가의 글대로, '영화를 보는 것'과 '영화(책)을 읽는 것'의 간극은 점점 벌어지고 있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영화(책)들을 읽지 않으며, 영화(책)을 읽는 사람들은 (최근의) 영화들을 잘 보지 않는 것 같다. 몇 가지의 가정들이 맞는 것일까. 최근의 (대중)영화들은 영화에 대한 사유의 지점이 존재할 수 없도록 밀어내고 있으며, 반면 영화에 대한 고루한 이론들은 최근의 영화들을 이야기하는 데에는 점점 무딘 칼이 되고 있으며, 도리어 그 이해를 방해하는 것일까. (여기에 소개된 상당수의 책들이 이미 자국에서 오래전에 출판된 책들이거나, 고전 영화들을 다루는 책들이라는 점은 하나의 묘한 시사점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여기에 대상이 되는 대다수의 영화들이 최소 20년도 더 된 영화들이라는 점.) 정성일 평론가는 약간 다른 시선을 제안한다. 그것은 영화와 책을 억지로 묶는 것이 아니라 그 두 가지가 다른 꿈이자 다른 욕망이라는 것을 전제하고, 그 둘을 오가는 발길을 인정하는 것. ("만일 영화가 꿈이라면 그것을 선택한 행위가 당신의 욕망인 것이 아니라 그 꿈을 해석하려는 노력이 욕망인 것이다. 그때 책은 당신의 욕망에 대한 해석의 판본이 아니다. 그건 다른 꿈 안으로 당신을 끌어당기는 다른 욕망이다. (중략) 그래서 영화를 본 내가 더 잘 돌아오기 위해 더 멀어지는 행위이다.")

 

말이 필요 없는 정성일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크리스티앙 메츠의 <영화의 의미작용에 관한 에세이>이다. 1960년대 프랑스에서 처음 출간된 두 권으로 되어 있는 이 책은 구조주의 기호학을 바탕으로 영화에 대해 기호학적으로 접근한 논문이다. (제목인 '에세이'에 속으면 안된다는 말이다. 상당히 난해한 책이다.) 정성일 평론가는 자신이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의 여러 (절망적인) 추억들을 이야기하며, 이 난해한 독서에 대해 겁을 주는 것으로 도전의식을 자극시키고 있다. ("그러므로 당신이 영화 이론사를 공부하는 대학원생이거나, 기호학을 공부하는 전문적인 아카데미의 학자이거나, 1960년대 구조주의의 한 경향을 연구하는 사상사의 연구자가 아니라면 나는 당신에게 이 책의 독서를 말리고 싶다.") 나는 이들 중 어느 것에도 해당하지 않지만, 이 책의 조각난 일부분을 일본어 번역본으로 접해야만 했던 정성일이 처한 상황보다는 조금 좋은 상황에 놓인 것은 확실한 것 같다.

 

 

 

부산시네마테크의 원장으로 있는 허문영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토마스 엘새서와 말테 하게너가 공저한 <영화이론: 영화는 육체와 어떤 관계인가?>라는 책이다. 허문영 평론가는 좋은 영화개론이 필요하다고 말하며, 이 책과 로버트 스탬의 <영화이론> 두 권의 책을 말하고 있는데, 이 책이 스탬의 그 책보다 확실히 나은 점은 이 책이 제시하는 분류의 방법, 관류하는 질문의 태도라고 말한다. 즉 이 책은 새로운 이론을 전개하고 있지는 않지만, '창과 틀', '문과 스크린', '거울과 얼굴', '눈과 시선', '피부와 접촉', '귀와 공간', '뇌와 정신'이라는 창의적인 새로운 분류틀을 제안하고 있으며, 이 새로운 분류틀이 우리의 머리속에서 기존의 영화들을 새롭게 재배열할 수 있게 해준다(그럼으로써 새로운 사유가 출현할 수 있도록 해준다)는 것이다.

 

 

고전영화와 예술영화들에 대한 애정을 늘 드러내는 한창호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프란체스코 카세티의 <현대 영화 이론: 1945~1995년의 영화이론>이다. 이탈리아에 유학했었던 한창호 평론가는 (그래서 그런지 몰라도) 이탈리아 영화학자가 쓴 이 책에 대한 애정과 공포심을 동시에 보여주는데, 이 책은 영화이론의 발달을 연대기순에 의해 세 가지의 패러다임 - 즉, 존재론적 이론, 방법론적 이론, 특수성의 패러다임 - 으로 나눈다. 위의 책과 비교해서 보다 고전적인 접근방식이라고 할 수 있는데, 영화라는 시간의 연대기를 차분히 살펴보는 데에는 이런 접근방식이 보다 나을 수도 있다. 다만 번역에 있어서의 몇 가지 문제를 지적하고 있으므로 그 부분은 주의할 것.

 

 

여러 분야에서 활발한 활동을 보여주는 김영진 평론가가 추천한 책은 하시모토 시노부의 <복안複眼의 영상: 나와 구로사와 아키라>이다. 이 책은 시나리오 작가이자 제작자였던 하시모토 시노부가 구로사와 아키라 감독과의 작업 과정과 그의 영화에 대해 말하고 있는 책인데, 특이한 점은 단순한 회고록이 아니라, 그의 영화들에 대해 냉정하게 비평을 하고 있다는 점이다. 김영진 평론가가 인용한 다음의 부분은 매우 인상적이다. "(구로사와는) 좋든 싫든 간에 새로운 작품을 모색하기 위하여 밟지 않으면 안되는 발걸음이라고 생각되어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장인의 작업에는 큰 성공은 없어도 실패는 극히 드물고, 성공과 실패가 항상 종이 한장 차이인 예술가에게는 성패의 운명이 숙명적으로 따라다닌다. 구로사와 아키라는 예술가가 되었기 때문에 실패한 것이다." 그러니까 구로사와 아키라는 장인의 길에서 예술가의 길로 나아갔기 때문에 결국 실패했다는 것이나, 그가 그렇게 나아갈 수밖에 없었다는 것.

 

 

가끔 남들이 '예'할 때 '아니오'를 보여주는 신선한 평론가 남다은이 추천한 책은 하워드 휴스의 <클린트 이스트우드: 영화의 심장을 겨누고 인생을 말하다>이다. 남다은 평론가는 글 내내 클린트 이스트우드에 대한 '길티 플레저'를 고백하고 있는데, 그의 영화 출연작이나 그가 연출한 영화들과 그가 평소에 하는 언행의 사이에 있는 있는듯 없는듯한 간극을 생각해보면 그의 이런 '의심스러운 애정'이 이해되지 못하는 바는 아니다. 아무튼 나 역시 그가 공화당 어쩌구 할 때마다 그게 뭔소리인가 싶고, '좋은 보수주의자', '진정한 보수주의자'라고 할 때마다 그게 뭐예요, 그거 먹는 거예요?,라고 묻고 싶어지지만, 그가 앞으로도 오래살아 더 많은 영화를 만들었으면 하는 바람이 있다는 것을 부인하지는 못한다.

 

 

그 밖에 <씨네21> 자체적으로 추천한 다른 책들은 위에서도 나온 로버트 스탬의 <영화이론>과 영화평론가 로저 에버트의 자서전 <로저 에버트: 어둠 속에서 빛을 보다>, 철학자 자크 랑시에르의 고전주의와 낭만주의 시학에서 '이야기'를 건져내려는 노력 <영화 우화>(여기에서의 '우화'란 아리스토텔레스의 뮈토스muthos, 즉 이야기를 말한다), 디지털 시대에 필름 영화는 살아남을 수 있을 것인가를 묻는 데이비드 노먼 로도윅의 <디지털 영화 미학>, '느와르'라는 장르인 것도 같고, 아닌것도 같은 것의 정체성 찾기 프로젝트, 알랜 실버, 제임스 어시니 공저의 <필름 느와르 리더: 느와르에 관한 모든 것>까지 다섯 권이다.

 

 

 

 

이상 도합 열 권(사실은 11권)의 책. 올해 안에 모두 읽자(는 것은 당연히 꿈, 그러니까 거짓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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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14 0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꿈이라도 거짓말이라도 좋은데요.^^ 별찜해두고 참고하겠습니다.

맥거핀 2012-10-15 12:58   좋아요 0 | URL
막상 써놓고 보니 올해가 별로 안 남았다는...시간이 빠르군요. (근데 사실 별찜이 무슨 말인지 몰라서 응?했어요. 찾아보고 알았죠. 알라딘 이런 기능도 있었구나..)

넙치 2012-10-15 00: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 책에 신경끈 지 너무 오래된 걸 상기시켜 주시네요. 덕분에 저도 한번 뒤적여봐야 겠어요. 감사합니다.

맥거핀 2012-10-15 12:59   좋아요 0 | URL
네..저도 의지를 다지는 의미로 굳이 이렇게 글로 남깁니다. 좀 가벼운 책보다는 이론서 격의 책들이 많아서 녹록하지는 않겠네요.;

Shining 2012-10-17 12: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번 주 씨네21에 이런 내용이 있군요. 저는 기차 타면서 샀는데, 박찬욱-김지운-봉준호 감독들의 이야기가 있던데 그건 지난주 건가요?(기억이 가물;) 영화이론서는, 스물 한두살쯤에 많이 읽고 그 뒤엔... 그것도 아주 전설적인 책들만 읽은 초급수준이에요_-

이렇게 글 읽으니 오랜만에 이론서 읽고 싶네요. 먼저 읽으시면 간단한 단평이라도 남겨 주시와요 :D

맥거핀 2012-10-18 12:45   좋아요 0 | URL
아마 말씀하신 것은 지난주 책인 걸로 사료됩니다. 사실 정성일 평론가의 논의가 어느정도 맞는 말인 것도 같은게, 영화이론에 대해 많이 알게 되는 것은 일시적으로 도리어 영화감상을 저해하는 면도 있는 것 같아요. 영화 보면서 자꾸 다른 걸 생각하게 되니까. 그럼에도 결국은 그것이 새로운 관점을 가지게 해준다는 것도 사실인 것 같구요. (근데 개인적으로 영화를 보면서 무슨 이론이 어떻고 저떻고, 무슨 주의가 어떻고, 하는 것은 뭐 그닥...) 뭐 암튼 그래서 이론서를 안본 것은 아니지만요.^^

시간이 없어서 댓글만 남기고 갑니다.

아이리시스 2012-10-18 18: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역시 로저 에버트..가 제일 보고 싶어요. 그런데 영화이론서를 봐서 맥거핀님 리뷰는 감상리뷰에서 벗어나시잖아요. 저는 그게 좋아요.

저는 시간이 많아서 댓글만 남기지 않고 이리저리 돌아다니다가 이제 갑니다..(안녕!)

맥거핀 2012-10-19 17:05   좋아요 0 | URL
아..근데 저 마지막 문장이 오해의 소지가 있군요. '그래서 안봤다' 그 얘깁니다. 뭐 자랑은 아니지만요.; 로저 에버트 저 책 산지 꽤 되었는데, 아직도 사실 한 장도 안펴봤다는..에버트 씨의 저 웃는 얼굴을 볼 때마다 민망해 죽겠어요. 빨리 읽어야 하는데.

아니..시간도 많으신 분이 자주 좀 오세요. 오셔서 글도 쓰시고..^^
 
Pet Shop Boys - Elysium
팻 샵 보이스 (Pet Shop Boys) 노래 / 워너뮤직(팔로폰) / 2012년 9월
평점 :
절판


약간 차분하게 돌아온 그들. 이만한 신경안정제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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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뮤니스트]를 읽고 리뷰 작성 후 본 페이퍼에 먼 댓글(트랙백)을 보내주세요.
코뮤니스트 - 마르크스에서 카스트로까지, 공산주의 승리와 실패의 세계사
로버트 서비스 지음, 김남섭 옮김 / 교양인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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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마도 먼저 두 가지 정도를 이야기하면서 시작해야 할 것 같다. 하나는 이 책에 나온 시기 구분과 그에 따른 명칭들이다. 이 책 <코뮤니스트>는 1917년 11월에 일어난 러시아 혁명(이것이 10월 혁명으로 불리는 이유는 당시 러시아가 쓰던 율리우스력으로는 10월이기 때문이다)을 기점으로 그 이전을 '기원'으로 그리고 그 이후에 만들어진 체제를 '실험'으로 명명한다. 이 코뮤니스트들이 '도약'을 시작하는 것은 스탈린이 트로츠키와 부하린을 밀어내고 집권을 확고히하는 1929년부터이다. 이 '도약기'는 소비에트 정권과 소비에트 블록 건설의 시기라고 볼 수 있는데, 이는 1947년 소련을 중심으로 한 코민포름의 결성과 미국을 중심으로 한 마셜플랜의 대응으로 만들어진 냉전체제인 '확산'의 시기로 넘어가게 된다. 소련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미소냉전의 축에서 소련이 소비에트 블록 안에 어떻게 보면 갇혀있던 시점이라 확산으로 보기가 어렵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중국과 북한, 동유럽에서 공산주의자들이 정권을 잡았다는 사실은 이것이 공산주의의 '확산'의 시점으로 볼 수도 있음을 시사한다. 이는 1957년 흐루쇼프가 정권을 잡으면서 '변형'되기 시작한다. 데탕트가 일어났고, 쿠바, 중남미 등에서 혁명이 일어났으며, 마르쿠제, 알튀세르, 사르트르 등이 맑시즘의 방향을 새롭게 잡으려고 하였다. 이 공산주의가 결정적으로 타격을 받고 '종언'으로 들어가는 것은 1980년 레이건이 미국에서 정권을 잡으면서부터이다. 브레즈네프나 안드로포프 등의 당시의 소련 서기장들은 레이건 이후의 미 행정부에 효과적으로 대응하지 못했고, 1985년 등장한 고르바초프는 그 가느다란 생명줄을 거의 끊어버렸다.

 

다른 하나는 이 책에서 제기하고 있는 질문들이다. 질문과 답의 형식으로 이루어진 책은 아니지만, 이 책은 책 속에서 몇 가지 질문들을 하고 있고, 나름의 답을 내리고 있다(그 답은 마지막 40장에 정리되어 있다). 1부 '기원'에서는 소련 체제가 프롤레타리아 독재였나, 당 독재였나, (공산주의자들의 예상과는 다르게) 자본주의가 가장 발달된 나라가 아닌, 왜 가장 가난한 러시아에서 혁명이 발생하였는가 등의 질문을 한다. 2부 '도약'에서 묻는 것은 왜 소련은 공산주의 확산의 길이 아니라, 일국공산주의의 길을 갔는가, 주변국, 미국 등에서의 국제적인 봉기는 왜 일어나지 않았는가 등의 물음이다. 3부 '도약'에서는 권력 투쟁 중에서 어떻게 스탈린이 정권을 잡았는지, 소비에트는 나치즘과의 대결에서 어떻게 승리할 수 있었는지, 왜 그토록 커다란 억압의 체제가 필요했는지 등에 대해 묻는다. 4부 '확산'에서 보고자 하는 것은 냉전 체제가 어떻게 유지될 수 있었는지, 냉전 체제가 왜 스탈린에게 필요했는지, 그리고 작은 조직에 불과했던 마오쩌둥이 어떻게 거대한 장제스 군대를 이길 수 있었는지에 대한 것이다. 5부 '변형'에서는 왜 모든 공산주의가 변형되며, 동일한 실패의 길을 걷는지, 그리고 공산주의가 모색한 탈출구는 왜 결국 실패로 가는 출구였는지에 대해 살펴본다. 마지막 6부 '종언'에서는 중국과 소련의 개혁이 어떻게 달랐으며, 왜 중국은 성공하고, 소련을 실패하였는지, 그리고 공산주의는 왜 그토록 허망하고 급속하게 붕괴되었는지 돌아본다.

 

로버트 서비스의 이 책 <코뮤니스트>는 이 많은 질문들에 대해 나름 성실히 답변하려고 노력한다. 단편적인 사실이나, 의견의 제시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과 풍부한 사료의 제시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제시하고, 되도록 여러 정황들을 제시하여 독자의 판단을 이끈다. 그러나 한편으로 보면 이 질문 자체가 그렇게 신선하지만은 못한 것이 사실이다. 뒤에 옮긴이도 비슷한 이야기를 하고 있지만, 우파 역사가들에 의해 이 질문들의 상당수는 거의 결론이 내려진 이후이고, 로버트 서비스가 다른 점은 보다 성실한 자료조사를 통해 나름의 근거를 더 많이 확보했다는 것 뿐이며, 그 답 자체는 예전의 역사가들과 동일하게 상당히 편향적이다. 사실 이 질문들에 대한 각각의 답을 뭉뚱그려 보자면, 결국 로버트 서비스가 보는 최종의 답은 공산주의는 무너질 수밖에 없는 이념이었다는 것이다. 즉 공산주의 체제는 태어날 때부터 문제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것은 인간이 가지고 있는 권력욕이나 생존욕과 결합하여 언젠가 무너질 수밖에 없는 괴물의 체제였다는 것이 로버트 서비스가 내놓은 최종의 답이다. 공산주의자들은 자본주의가 급속히 무너질 것이라고 계속 오판하고 있었으며, 그들이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기묘한 개념을 발명해 낸 순간부터 당의 독재는 시작되었다. 그의 관점에서 보면 공산주의 체제에서 스탈린이나 마오쩌둥, 차우세스쿠나 폴 포트 등의 잔악한 폭군들이 등장한 것도 그리 놀랄 일은 아니다. 왜냐하면 공산주의 사회는 감시와 억압으로 기능하는 체제이고(그것은 거의 모든 공산주의 체제가 비슷한 형태를 가진 소비에트 모델을 모방함으로써 생존이 가능했다는 점이 그 증거가 된다. 즉 소비에트 모델은 결국 실패했지만, 그나마 그 모델이 일시적인 유지라도 가능케했다), 그런 체제라면 감시와 억압과 폭력을 가장 잘 수행해낼 자, 그러니까 가장 잔악하고 폭력적이며, 교활한 자가 높은 지위에 오를 것이기 때문이다. 즉 스탈린이 정권을 잡은 것은 그가 말 그대로 '강철'이었기 때문이다.

 

로버트 서비스가 이러한 기조를 유지하기 위하여 사용하는 한 가지 방법은 코뮤니즘의 역사에서 코뮤니즘을 제거하는 것이다. 그러니까 저자는 이를 사상의 흐름이 아니라 사건의 흐름으로 치환하고, 모든 '주의'의 개념들을 독자의 머리 속에서 효과적으로 제거한다. 이 책에는 일견 비슷비슷해 보이는 수많은 '주의'들의 명칭이 나온다. 공산주의, 맑시즘, 사회주의, 스탈린주의, 마오주의, 아나키즘, 나로드주의, 아나르코생디칼리즘, 사파티즘, 카스트로주의 등등 거의 셀 수가 없을 정도다. 그러나 저자는 이들에 대한 효과적인 설명을 대체로 하지 않는다. 그것은 저자가 모르거나 귀찮아서가 아닌 것처럼 보이는데, 왜냐하면 소비에트 권위주의나 스탈린주의 이데올로기에 대해서는 각각 한 챕터를 할애하여 열심히 설명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렇게 코뮤니스트들을 탈코뮤니즘화하는 것은 이들 코뮤니스트들을 자신들의 이익이나 정권을 잡기 위한 정복욕의 화신, 혹은 쓸데없는 투쟁에 골몰하는 골치아픈 종자들, 혹은 죽은 마르크스나 엥겔스에게 조종당하고 있는 꼭두각시처럼 보이게 한다. (예를 들어 1920년대 독일의 경우만 보더라도 카우츠키의 맑시즘과 베른슈타인의 수정주의, 그리고 로자 룩셈부르크의 맑시즘은 얼마나 다른가. 그러나 그것이 무엇을 위한 맑시즘이고, 무엇을 위한 수정인지 전혀 알 수가 없기 때문에, 이들은 단지 권력에 목마른 멍청한 꼭두각시들로 보인다.) 이는 책의 내용 전체를 지루하게 만들 뿐 아니라, 그저 이들이 결국은 사라질 권력을 잡기 위해 각종 잔악한 일을 저질렀던 그야말로 오류로 가득찬 인물처럼 보이게 만든다. (이와 관련하여 같이 읽을 책으로 한형식의 <맑스주의 역사강의>를 추천.)

 

물론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이 있다. 공산주의의 역사에서 수많은 폭력과 학살, 기근, 감시와 억압이 실제로 있었고, 공산주의는 현재 거의 종적을 감춰가는 것처럼 보인다는 사실이다. 이 책 역시 다음과 같은 질문으로 시작하며, 그 질문에 담긴 함의는 결코 작지 않다. "마르크스주의의 희망은 왜 절망이 되었나?" 즉 자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출발은 다르다. 자본주의는 이미 그 태동에서부터 그 잔악성을 수많은 사람들이 감지했고, 그에 대한 대답으로 마르크스주의가 출현하였다. 즉 마르크스주의는 많은 사람들의 희망을 안고 탄생하였고, 그래서 수많은 사람들의 지지를 얻었고, 그것이 잔인한 뒷모습을 보여주었을 때 많은 이들은 그래서 더욱 절망했다. 그러나 이 질문을 한 번 곰곰이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과연 그 희망이 절망이 된 것일까. 로버트 서비스의 이에 대한 답은 예스다. 즉 공산주의의 희망이라고 믿어졌던 요소들, 그것들은 이미 잘못 만들어진 뿌리에서 길러졌으며, 따라서 공산주의 체제는 자연스럽게 절망의 길로 들어설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이 책에 보면 농업의 국유화는 생산성 저하와 마치 직결되는 문제인 것처럼 보인다. 즉 땅이 내 소유가 아니면 모두 생산을 할 생각을 잃어버린다는 것이다.) 문제의 요소는 이미 공산주의 그 자체에 들어있었으며, 미국이 조바심을 내지 않았어도 이 소비에트 체제는 언젠가 무너졌을 것이라는 것이 저자의 이 질문에 내린 답이다. 즉 희망처럼 보였던 그것은 사실은 절망이었다는 것. (이의 반대편, 그러니까 수정주의적, 좌파적인 시각에 물론 다른 해석이 있다.)

 

(이를 이렇게도 말할 수 있다. 자본주의는 정치형식과 그렇게 밀접한 관계가 없는 것처럼도 보인다. 자본주의는 자유민주주의와 양립할 수 있고, 동시에 독재나 전제정치와도 양립할 수 있는 것처럼 보인다. 반면 공산주의의 경우 민주주의라는 정치형식과 도리어 밀접한 관련을 가져야만 하는 것처럼 보인다. 민중들이 분배하여 나눠같자는 공산주의의 이상은 민주주의의 이상과 비슷한 것으로 여겨지기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로 수많은 공산주의 정권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교묘한 용어를 내세워 어느 틈엔가 그것을 당 독재로 교묘하게 치환하였으며, 그런 측면에서 마르크스주의의 절망은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용어를 교묘하게 변질시킨 레닌 등의 인물들에 의해 촉발되었다고 볼 수도 있다. 실제로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 독재'에 대해 그리 고정된 견해를 가지고 있지는 않았다.)

 

그러나 동시에 또 한가지 부인할 수 없는 사실들도 있다. 그것은 그 희망에 수많은 사람들이 지지하고 열광적인 찬성을 보내고 때로는 목숨을 걸었다는 것. 그렇다면 그들은 모두 그 오류를, 오류의 가능성을 발견하지 못한 바보들이었는가, 단지 멍청한 꼭두각시들에 불과했을까. 아마도 그건 아닐 것이다. 그들은 그것에 희망을 보았고, 절망적인 현실에서 어떻게든 가능성을 발전시키고 싶었을 것이다. 그것은 분명 현재에도 마찬가지이다. 공산주의의 폭력적인 현실들이 드러나고 그것이 거의 종말에 다다른 지금에도 여전히 자본주의의 폭력성에 대항하기 위해 조금이라도 내용을 가져올 수 있는 것은 공산주의와 사회주의에 내재된 가능성들이다. 저자 로버트 서비스도 책의 뒤편에서 쥐꼬리만큼 밝히기는 했지만, 자본주의가 저지른 폭력들도 결코 공산주의에 뒤지지 않기 때문이며, 어떠한 의미에서는 더 거대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여전히 공산주의의 완전한 종언에 대해서는 그 누구도 확신할 수 없다. 책을 보며 저자의 시각과 다르게 사실 역으로 놀랐던 것은 온 세계에 공산주의자들이 이렇게도 많았다는 사실이다. (공산당을 콩사탕으로 말해야만 했던 우리의 시각에서는 신선하기까지 하다.) 그 수많은 공산주의자들의 등장과 스러짐을 보며, 도리어 한 가지를 생각하게 된다. 공산주의는 아직 끝나지 않았다. 적어도 자본주의의 폭력성이 살아있는 한.

 

 

덧.

그러므로 사실 내가 보기에는 이 책은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나 비우호적인 사람이나 어딘가모르게 아쉬운 부분이 있을 것이다. 공산주의에 우호적인 사람이면 공산주의의 피의 역사만을 줄기차게 서술한 부분이 마음에 걸릴 것이고, 비우호적인 사람이면 도대체 이 책을 읽어야할 이유를 찾기 못할 테니. (시작부터 망가져서 어차피 언젠가 당연하게도 끝날 운명이었던 이들의 이야기를 왜 이렇게 길게 읽어야 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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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10-11 12:4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10-12 0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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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지막이 올까, 생각했는데 아무튼 마지막이 왔다. (그러나 사실 실질적으로 아직도 써야하는 리뷰들이 5편이 남았으므로, 실질적인 마지막은 조금 후에 보게 될 것 같다.) 내가 하는 상당수의 일들이 그렇듯 의욕적으로 출발했으나 마지막은 역시 '의욕적'이란 게 그런 뜻이었나,하는 질문을 하게 되는 것 같다. 리뷰들은 거의 제 때 올리지 못했고, 매번 대장님에게 민망한 메일을 보내야만 했다. (그러고도 심지어는 그 메일의 기한마저 지키지 못하고 있으니 이 글도 보시게 될 대장님에게 송구할 뿐이다. <코뮤니스트> 리뷰는 빠르면 오늘 중, 늦어도 내일 중으로는 꼭 올릴께요.-_-) 내가 앞으로 서평단을 하려는 생각을 접는다면 그것의 8할은 이 민망함 때문이다. (나머지 2할은 읽고 싶지 않은 책을 끝까지 읽어야 하는 것을 견디게 해준 박하사탕 값?) 예전에 알라딘 측에 직접 양해를 구할 때에는 솔직히 그런 생각이 별로 없었는데, 같이 리뷰를 쓰는 입장에서 말하자니...(아마도 알라딘에서 노린 것이 이것인듯.)

 

아무튼 하나 확실한 것은 마지막이라고 생각하니 이상하게도 좋아보이는 책이 점점 많아지는 것 같다는 사실이고, 이게 착각인지 아니면 9월에 유달리 내 입맛에 맞는 책들이 많이 출간되어 그런 것인지 잘 모르겠다. (아마도 분명 다음 서평단의 책들을 보면서 울분을 토하겠지.) 그러니까 뭐든지 기회가 있을 때, 그 기회들을 소중히 다루어야 하는 법이다.

 

 

 

약탈적 금융사회 - 누가 우리를 빚지게 하는가 / 제윤경, 이헌욱 / 부키

 

로버트 서비스의 <코뮤니스트>는 공산주의 사회가 그 인민들을 폭력과 억압, 감시와 상호고발로 지배한다고 말한다. 그렇다면 자본주의 사회는 그 국민들을 어떻게 지배할까. 그 지배전략 중의 하나는 그들을 빚지게 만드는 것이다. 일단 한 번 빚을 지기 시작하면, 직접적인 폭력 혹은 효과적인 수사 따위는 필요가 없다. 사람들은 빚을 갚기 위해 뼈가 부서져라 '알아서' 움직이기 시작한다. 왜냐하면 자본주의 사회에서 채무자들은 2등민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빚을 지지 않으면 되지 않겠냐고? 이 책은 왜 빚을 지지 않는 것이 불가능한지, 이 사회의 효율적인 메커니즘을 알게 해 줄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한겨레21>에서 제윤경 씨의 칼럼들을 재미있게, 그러나 등줄기의 서늘함을 때로 느끼며 읽었다.)

 

 

게임, 게이머, 플레이 - 인문학으로 읽는 게임 / 이상우 / 자음과모음

 

여전히 (컴퓨터) 게임은 (특히 모든 부모들에게) 악의 근원처럼 받아들여져 왔다. 이후 시기에 다시 중세와 같은 거대한 암흑이 도래하고, 인간의 7대악을 초래하는 수많은 물건들이 화형당한다면 아마도 (야동이 가득찬 하드들과 함께) 수많은 게임 소프트웨어가 기꺼이 한자리를 차지할 것이다. 그러나 국민게임 애니팡이나 앵그리버드를 들먹이지 않더라도, 한 번도 게임을 안해본 자, 여기에 성냥불을 당기거라,라고 하면 쉽게 성냥개비를 집어들 만한 사람이 있을까. (물론 야동도 마찬가지.) 그러니 우리는 싫든 좋든 그 이후에도 여전히 '게임과의 전쟁'을 계속해야 할 것이고, 그 게임들을 정벌할 십자군 기사가 되고 싶은 사람이거나, 기꺼이 수많은 정령들과 수도사와 마법사들과 함께 그 십자군에 맞설 사람들(그대가 레벨1일지라도 말이다) 모두 한번쯤 읽어볼 책이 아닐까 싶다. 

 

 

  

얽힘의 시대 - 대화로 재구성한 20세기 양자 물리학의 역사 / 루이자 길더 / 부키

양자 불가사의 - 물리학과 의식의 만남 / 브루스 로젠블룸 외 / 지양사

 

이번 달은 흥미롭게도 양자역학에 다룬 두 권의 책이 눈에 띈다. 한 권은 양자역학 중에서도 특히 양자 얽힘 현상에 대해, 대화라는 형식으로 풀어낸 책이고, 다른 한 권은 양자이론의 주요 내용들에 대한 교양강좌를 책으로 엮은 것이다. 그러니까 아무튼 '쉽게 썼다'는 말이다. 물론 이런 책들의 쉽게 썼다는 말에는 함정이 있기는 하다. 예를 들어 최근에 알라딘 중고서점에서 산, 책 뒤편의 '대중들도 이해할 수 있도록 간략하고 명쾌한 수식으로 풀어냈다'고 문구가 쓰인 아인슈타인의 <상대성이란 무엇인가>라는 책을 보자. "하지만 물질의 특성에 대한 응력 성분의 의존성을 나타내는 방정식에 불변성이 있는지 조사하고, 이 불변성 조건을 바탕으로 압축성 점액에 관한 방정식을 작성하는 것이 좋다."와 같은 문장은 그나마 알아들을 수 있는 축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그 '대중'이 그 '대중'이 아니란 얘기다.) 그게 걱정되어 서점에서 두 책에 대해 꼼꼼이 살펴보았는데, 앞의 한 챕터 정도까지는 적어도 욱하는 마음이 들지는 않았다. 아니, 도리어 꽤 재미가 있었다.

 

 

죽음 / 임철규 / 한길사

 

마지막 추천의 마지막 책에 어떤 책을 넣을까 고민했다. 유홍준, 김윤식, 강준만, 진중권, 강상중 등 쟁쟁한 필자들의 책들이 나온 9월이다. 그런데 이 문구를 보고서는 이 책을 집어넣을 수밖에 없다. 한 노학자의 평생에 걸친 '죽음'에 대한 성찰. 저자 임철규는 그리스 로마 문학 등의 문학 연구와 비평에 평생을 천착해 온 학자로, 마지막으로 모든 인간들의 피할 수 없는 형벌인 죽음을 맞닥뜨리고자 한다. 이 책은 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철학 등에 나타난 여러 다양한 죽음에 대한 사유를 통해 '살자'는 당위의 문제가 아닌 '죽음' 그 자체를 들여다보고자 하는데(물론 이들 문학, 신학, 정신분석학 등은 인간에게 죽음이 없었으면 탄생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 고찰을 통해서 우리가 죽음 전에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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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12-10-05 06: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죽음, 담아둡니다^^

맥거핀 2012-10-05 23:19   좋아요 0 | URL
서점에서 봤는데, 책 자체가 뭔가 묵직한 느낌이 있어요.

2012-10-05 21: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흠. 에세이 분야인 저도 근근히 했고, 막달이라 안도하고 있는데, 인문사회분야인 맥거핀님이야 오죽했겠습니까~. 그러나 분명 저도 다음달에 울분을 토하고 있겠지요.

저는 성냥불을 댕길 수 있는 사람인데.. 하드에 야동도 없고, 국민 게임조차도 손끝 하나 안 대본~~.ㅋㅋ 제가 안 좋아하는 두 가지는 게임, 윈도우 쇼핑입니다. 왜냐면, 둘 다 실질적으로 남는 게 없어서.. 전 가상 세계에 혹하지 않는 종류의 인간~.

그나저나 전 이미 약탈적 금융사회의 명백한 2등민이라, 약간의 소개글만 읽어도 등골이 서늘하네요. 읽고 나면 섬뜩하겠죠~

맥거핀 2012-10-05 23:24   좋아요 0 | URL
근데 정말 이상해요. 할 때는 이것도 그렇고 저것도 그렇고 툴툴대는데, 막상 끝날 때가 되면 그 '툴툴대기'자체가 너무 그리워져요. 아..그래도 저거라도 할 수 있는 때가 좋았어 그러고 있지요.

아..진짜요? 그건 믿기어려운데요. 어렸을 때 오락실 너구리는 해보시지 않았을까..(그것도 컴퓨터 게임입니다요. 야동은 믿습니다만.) 저는 하루에 컴퓨터를 끼고 있는 시간이 너무 긴 인간이라서요. 좀 줄이기는 해야하는데. 근데 저도 인터넷쇼핑은 잘 안해요. 돈이 없어서...;

신용카드를 가지고 있는 한 적어도 우리모두는 빚진 사람이죠. 제윤경 씨는 늘 모든 신용카드를 어서빨리 잘라버려라..하고 주장하지만.

2012-10-06 08:57   좋아요 0 | URL
ㅋ 죄송~ 성냥불 못 댕기겠군요. 현재만 생각했어요. (국민게임에 손끝 하나 안 댔다는 건, 위에 언급된 두 개에 대한 이야기..^^)
-과거엔 1943,1942에 동전 많이 바쳤었네요. PC로 헥사 하느라 눈알 빠진 적도 있고, 테트리스야 뭐 당연히.. 지금은 아무도 안하는 폭탄게임도 PC로 무진장 했었구만요.ㅋ (근데 아무튼 쓰고 보니 정말 조잡한 게임만 했었구나, 싶네요.)
근데 언제부턴가 모든 게임에 완전히 흥미를 잃었지용...

맥거핀 2012-10-08 12:01   좋아요 0 | URL
오..1942. 그거 재미있죠. 가끔 폭탄을 날릴때의 쾌감! 저는 어렸을 때 스포츠게임에 좀 미쳐있었죠. 신야구, 세이부축구, 버추어스트라이커..요즘에도 술마시고 어쩌다 오락실에 가는 때가 있어요. 술깨는 데는 그런 게임들이 가끔 도움을 주죠. 헥사..오랜만에 듣는 추억의 이름이네요. 요즘에도 헥사게임이 있나..(애니팡의 선조격?) 찾아봐야지.

가연 2012-10-05 22: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ㅋㅋ 파트장이라서.. 아무래도 우수리뷰 선정도 있고 그러다보니 공정성(?)을 위해서 일부러 평가단하시는 분들 글에는 잘 댓글을 달지 않는데, 혹은 모든 분들께(너무 바빠서 달지 못할 때도 있지만) 다 달거나.. ㅋㅋ 첫 문단을 읽으니 안달수가 없네요. 저는 리뷰 안올리신 분들 서재에 재촉 댓글 쓸 때가 그렇게 민망할 수가 없더라구요.. 내가 이렇게 재촉 댓글 달아도 되나, 이런 기분도 마구 들고.. 물론 이 댓글은 재촉 댓글이 아니랍니다, ㅋㅋ

맥거핀 2012-10-05 23:27   좋아요 0 | URL
그래도 한 가지 다행인 것은 방금 리뷰를 올리고 이 댓글을 봤다는 사실이네요. (너그러이 기다려 주셔서 감사드립니다.) 사실 말이죠. 파트장 본인도 좀 늦고 그러면 별로 민망하지 않는데(원래 회사에서도 같이 지각하는 상사가 뭐라하면 별 신경 안쓰잖아요), 워낙 항상 빨리 하셔서..아무튼 늘 감탄하고 있습니다. 리뷰 빨리 쓰는 비결 좀..

아무튼 이제 거의 마지막이네요. 그간 수고 많으셨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