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이 꺼지고, 아핏차퐁 감독의 영화제 트레일러가 시작된다. 이 트레일러는 묘하다. 기묘한 분위기의 피아노 곡이 흘러나오면서, 몇 겹의 커튼이 열렸다가 닫히고, 그 안에 숨겨진 스크린이 드러날 듯 하다가 다시 가려진다. 멜로와 공포와 미스터리와 스릴러와 슬픔, 그 어느 것도 전부는 아니지만, 묘하게 그런 이미지들을 조금씩 불러 일으킨다. 그리고 앞으로 시작될 영화도 어느 것인지 모른다. 이 영화는 멜로일 수도, 공포일 수도, 혹은 스릴러일 수도 있다. 그렇게 묘한 기대감을 가지고 드디어 열린 스크린을 들여다본다.

테러리스트들 (The Terrorists) - 툰스카 판시티보라쿤 감독

"작은 고깃배 위에서 두 소년이 뭔가 알아들을 수 없는 말로 대화를 나누고 있다. 카메라는 이윽고 바다를 관통하는 빛을 응시하고, 바닷물 아래 헤엄치는 작은 생명체들을 관찰한다. 그 수면에는 누군가에게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이 비치고 있다. 고무 농장의 어둠 속에, 꺼질 듯 희미한 불빛만이 길을 밝히고 있다. 현재의 진실은 피에 굶주린 과거와 겹쳐진다. 과거는 태국 역사의 페이지에서 지워지고, 남은 것은 그들이 테러리스트라는 비난뿐이다."

영화제에서 이 영화를 소개하는 글은 위와 같다. 그러나 사실 위의 글은 영화를 조금은 오해하게 만든다. 어렴풋이 외곽을 빙빙 돌고 있을 뿐이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이해가 되는 부분도 있다. 도대체 이 영화를 어떻게 제대로 설명할 것인가. 영화가 시작하면 몇 명의 남자들이 배 위에서 물고기를 잡고 있다. 수면에 고통을 당하고 있는 사람의 형상?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런 것은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갑자기 화면이 전환되고, 흔들리는 불빛 아래에서 한 남자가 성(性)고문을 당하고 있다. 그리고 다시 화면이 전환되고 고무나무에서 고무를 채취하는 남자의 빠르고, 지속적인 손길이 이어진다. 그 다음, 고무 농장에서 일하는 일꾼들의 어지러운 대화. 그리고 그 다음 한 남자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위로 아버지와의 관계를 이야기하는 자막이 이어진다. 이 자막은 계곡에서 목욕을 하고 있는 이 남자의 이야기인가, 아니면 또다른 누군가의 이야기인가. 그리고 그 다음....그 다음을 이야기하기도 전에, 내 옆에 남자는 모자를 뒤집어 쓰고, 어느덧 자신만의 환상의 세계로 달려가버렸다.
 
몇 가지 말할 수 있는 것, 혹은 몇 가지의 불친절한 독해. 이 영화에서는 자막의 독특한 활용이 도드라진다. 이 자막은 일견 화면의 내용과 거의 상관이 없는 것처럼 보인다. 위의 계곡에서 목욕하는 남자의 경우 다음에는 한 남자의 세밀하게 촬영된 자위 화면 위로(이 영화는 남성 성기의 노출이 참으로 빈번하다), 1976년 태국의 대학에서 일어났던 군인들에 의한 학생들의 학살 사건에 대한 리포트가 이어진다. 우리는 이것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영화의 시작과 함께 자막으로 이런 말이 나온다. "테러리스트는 누군가에게는 아주 위험한 범죄자일 수 있지만, 누군가에게는 자유의 투사일 수 있다." (정확하지는 않지만, 이런 맥락.) 그것을 화면으로도 비슷하게 보여주고 있는 것일까. 예를 들어 자위행위는 누군가에게는 엄청난 쾌락일 수 있지만, 동시에 강제로 당하는 행위(성고문을 당하던 남자)는 엄청난 고통일 수 있다..는 것? 아니, 나는 농담을 하는 것이 아니다. 아니면, 다른 독해. 어쩌면 이는 검열을 피하기 위한 것이 아닐까. 지금까지의 자막들만 지워버리면, 이 영화는 전혀 다른 영화가 된다. 움베르트 에코의 포르노의 정의에 따르면 이 영화는 조금은 정적인 게이 포르노에 가까워진다. 검열관은 그저그런 포르노라고 생각할 것이다. 아니, 어쩌면 그렇게 생각하기도 전에 잠들어버릴지도 모른다. 아무튼, 나는 불편해진다. 그리고 아직까지 눈을 뜨고 있는 몇몇 사람들도 불편해졌을 것이다. 나를 불편하게 만드는 것은 무엇인가. 성기노출이 빈번한 이 화면인가, 아니면, 이런 화면과 함께 1976년에 일어났던 이 학살사건의 세밀한 리포트를 듣는 것인가.

그리고 놀라운 일이 일어난다. 화면과 자막은 조금씩 일치하기 시작한다. 아니 일치한다고 생각하는 것은 나의 착각일지도 모른다. 아름다운 음악과 함께 흘러나오는 옛날 사진들과 자막으로 나오는 공산주의자라는 이유로 주위 사람들을 잃어버린 어머니의 이야기. 그리고 태국의 기차역과 기차역에 있는 외국인과 태국인들을 보여주는 화면 위로 지나가는 다음의 이야기들. "1978년 어렸을 때, 어머니는 내가 말을 잘들으면 전차를 태워주신다고 하였다. 태국에서 전차는 1976년 모두 철거되었다. 그러나 나는 확실히 전차를 탄 기억이 난다. 과연 어떤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1976년 그렇게 수많은 사람이 죽었지만, 아무도 그것을 기억하지 않는다. 기차역에서 조금은 지쳐 보이는 태국인들의 모습과 아무 생각 없어 보이는 외국인들의 모습을 보면, 그런 생각을 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마치 시가전을 방불케하는 현재의 태국의 모습과 가족과 주위 사람들을 모두 잃어버리고, 오로지 그것밖에 할 수 없어서 거리로 나와 소리를 지르는 사람들의 모습이 비춰진다.

그러므로 마지막에는 묘한 울림이 생기며, 처음의 질문을 돌아보게 만든다. 완전히 힘의 균형이 무너진 상황에서, 예를 들어 군인들이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공격하는 상황에서, 오로지 의지할 것이 테러밖에 없을 때 행하는 테러를 우리는 어떻게 생각해야 하는가. 그들을 단지 테러리스트라고 규정지을 수 밖에 없는 것일까. 예를 들어 우리가 안중근 의사를 테러리스트라고 부르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우리가 한국인이기 때문인가, 아니면 그것에는 다른 이유가 들어 있는 것일까. 힘의 균형이 완전히 무너진 상황에서 할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그래도 나는 테러를 반대한다, 라고 명확하게 말할 수 있는 것인가.

영화의 마지막, 지금까지 깨어있는 사람은 꼭 보아 달라는 듯이 아주 충격적인 화면이 이어진다. 누군가가 몰래 촬영한 듯이 보이는 민간인을 무차별적으로 폭행하고, 총격을 가하는 군인들의 모습. 충격적이지만 낯설지는 않다. 우리는 이 비슷한 화면을 몇 번이고 보았으니까. 예를 들어 1980년 광주에서의 일들. 그러므로 영화의 질문을 되돌아 우리에게 물을 수도 있다. 어느 것이 더 무서운 일일까. 일어나지 않은 일을 기억하는 것과, 일어난 일을 기억하지 못하는 것. 우리는 요즘 일어나지 않은 일을 잘도 기억하는 대신에, 몇 가지를 잊고 있다. 얼마전 어느 전직 대통령은 자신이 벌인 일에 대해 아무 것도 책임이 없다는 투로, 회고록을 써냈다. 그리고 비슷한 일은 지금도 여전히 일어난다. 평택에서, 용산에서, 명동에서, 울산에서, 그리고 우리가 잘 모르는 어느 곳에서. 그것이 어쩌면 단지 기이한 포르노였던 것처럼 보였던 이 영화가 모골을 송연하게 만든 이유다.

감옥과 천국 (Prison and Paradise) - 다니엘 루디 하리얀토 감독



약간은 내 책임도 있지만, 비슷한 내용을 다룬 영화를 하루에 연이어 보는 것은 힘든 일이다. 2002년 인도네시아 발리에서 자살 폭탄 테러가 일어났고, 202명의 사망자가 생겼다. 거의 대부분은 민간인들이었고, 외국인들이 많았지만, 현지인들의 사망도 적지 않았다. 이 영화는 당시 사건의 주범들에 대한 인터뷰와 그 가족들에 대한 인터뷰, 그리고 피해자 가족들 일부의 인터뷰를 담고 있다. 이 인터뷰들의 연결고리는 그 사건의 범인과 학창시절 룸메이트로 지냈던 워싱턴포스트 기자 이스마일이다. 그는 또한 테러를 조사하는 전문가로서 이 사건과 함께, 테러라는 것의 전반적인 의미를 이해하려 애쓴다.

영화의 막바지, 이스마일은 자신이 처한 위치의 딜레마적인 어려움을 토로한다. 그는 자신이 지하드(성전)를 지지하는 세력에게는 미국의 앞잡이, 경찰의 끄나풀이라고 오해받고 있다고 하고, 동시에 경찰에게는 이들 세력을 비호하고 있다고 비판받고 있다고 토로한다. 그것은 이 영화가 끝나고, 하리얀토 감독이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토로했던 것과 비슷하다. 그는 양쪽의 비판을 받고 있다고 말한다. 과격한 이슬람 지하드를 옹호하는 입장에서는 이 영화의 관점은 잘못되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고, 동시에 인도네시아 정부는 이 영화가 인도네시아인들을 과격한 테러 분자처럼 묘사하고 있으며,  테러리스트들의 입장을 일방적으로 대변하고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영화를 보고 나니, 감독의 말이 이해가 간다. 이 영화는 한편으로 자살 폭탄 테러 사건을 일으켰던 사람들의 목소리를 장시간 동안 여과없이 보여주고 있으며, 그들의 논리를 가감없이 그대로 드러내보인다. 이들은 한마디로 확신범들이다. 그들은 공고한 자신만의 세계를 가지고 있으며, 비이슬람인의 관점에서 비집고 들어갈 틈은 없어보인다. 이들은 자신들이 아주 옳은 일을 했다고 믿고 있으며, 확신을 가지고 테러를 저질렀으며, 자신들의 죽음(사형) 역시 기쁘게 받아들이는 것처럼 보인다. 그들은 자신들에 대해 비판하는 목소리도 당연히 알고 있으며, 그것의 논리도 한편으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자신들을 비판하는 것도 당연하다고 말한다. 왜냐하면, 다른 사람들은 자신들을 절대 이해하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이들의 죽음에는 한편으로 동정의 여지가 전혀 없는 것처럼 보인다. 아니, 정확하게 말한다면, 동정의 여지가 없다기 보다는, 동정이라는 것은 어쩐지 다른 세계에 존재하는 말처럼 보인다.

이렇게 이슬람 자살 폭탄 테러범의 이야기를 듣는 것도 흥미롭지만, 영화가 한편으로 흥미로워지는 것은 영화가 단순이 이들의 논리만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한발 비틀어 가족들의 모습을 보여주기 때문이다. 카메라는 이들 폭탄 테러범의 가족들의 모습과 그들의 인터뷰를 보여주며, 묻는다. 이들은 자신의 가족에게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혹은 자신의 가족이 죽었어도 그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어린 아이들은(이 테러리스트들에게는 어린 자식들이 있었다) 도대체 무슨 죄란 말인가. 남겨진 어머니들은 몇 년이 지나 아버지들이 사형당한 후에도(영화는 사건이 일어난 후 8년 후의 이야기까지 담고 있다) 아버지가 사실은 테러리스트라고 밝히지 못한다. 아마도 어쩌면 거의 영원히 말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피해자 가족들이 받은 충격 못지 않게 이들이 받은, 혹은 받게될 충격도 못지 않다.

그러므로 이 영화를 보고 나서는 일종의 영화의 균형에 대해서 생각해보지 않을 수 없다. 이 영화는 감독 자신이 밝혔듯이 위태로운 균형 위에 서 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테러리스트들의 논리를 관객들에게 그대로 펼쳐보이는 동시에 이스마일의 입을 통해서, 이들에게 비판을 가하고 있다. 그 비판은 이들의 지하드가 잘못된 지하드라는 것이다. 테러는 민간인들에게 가해졌을 때 정당화 될 수 없다. 테러, 혹은 공격이 정당화되는 것은 군대 대 군대, 무장한 자와 무장한 자 사이의 경우이다. 그러므로 상당수의 민간인 관광객들과 일부 현지 민간인 무슬림에게 행한 발리의 자살 폭탄 테러는 정당화 될 수 없다는 것이 이스마일의 논리이다. 그러면서도 이스마일은 이슬람을 지키기 위한 지하드는 필요하다고 말한다. 그것은 단 다른 방식의 지하드여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 영화도 이런 이스마일의 관점을 지지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것은 두 가지 부분에서 그러한데, 한 가지는 이스마일이 이 영화의 전체를 이끌어가는 화자이기도 하려니와(그러고보니 이름도 이스마일), 영화의 마지막이 이스마일의 발언 컷으로 끝난다는 점, 다른 한 가지는 음악의 활용에 대해서다. 이 영화는 피해자나 가해자 가족의 인터뷰를 보여줄 때에는 으레 서정적인 음악이 삽입된다. 그러나 이 테러리스트들의 인터뷰에는 어떠한 서정도 허용하지 않는다. 관객과 이들은 두가지 의미에서 '차단'되어 있다. 하나는 인터뷰를 행하는 이들 앞을 가리는 감옥의 창살, 그리고 다른 하나는 서정의 차단. 따라서 이들의 논리는 나름 논리적이되,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이해해서는 안되는 것으로 그려진다. (아마도, 과격 이슬람 옹호자들의 이 영화에 대한 비판에는 이러한 관점이 반영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앞에서도 말했듯이 이 영화가 논쟁을 피하는, 균형감각을 유지하는 하나의 방법은 영화를 살짝 비트는 것이다. 즉 그것은 가해자와 피해자의 가족들 이야기를 영화의 겉에 씌우는 것이다. 감독도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이 영화의 주된 이야기는 남아있는 가족들의 이야기라고 밝히고 있다. 그러나 그러면서도 여전히 영화는 논쟁의 불씨를 그대로 안고 있다. 그것은 지하드와 이슬람 정치 운동, 테러리즘, 인권 등에 관한 불씨들이다. 그리고 동시에 내가 생각하기에는 거기에는 한 가지의 논점이 포함된다. 그것은 과연 가해자의 가족들을 영화라는 이유로 여과없이 보여주는 것이 윤리적으로 옳은가라는 질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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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성탈출: 진화의 시작 - Rise of the Planet of the Ap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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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화는 어떻게 시작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너무 안일한 대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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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종병기 활 - War of the Arrow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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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야기가 단순해지니, 캐릭터가 눈에 들어온다. 좋은 선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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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파워블로그들에 대한 여러 문제점과 그에 대한 논의들이 나오는 것을 보면서, 여러가지 두서없는 생각들을 하게 된다. 먼저 일차원적으로는 파워블로그라는 것에 대해. 개인적으로는 파워블로그들에 대한 이야기들을 보면서 아이러니를 조금은 느낀다. 사실, 블로그라는 것의 처음 시작의 의의 중의 하나는 기존의 미디어 권력들이 가졌던 독점적인 발언권을 해체하고, 그 발언권을 무수히 많은 개인들, 시민들에게 나눠줌으로써 언론의 권력이동을 꾀하는 것에 있을 것이다. 그런데 어느덧 시간이 지나 그 블로그들 중에서 기존의 미디어의 방식이 아닌, 새로운 방식의 권력을 행하는 소위 '파워블로그(거)'들을 볼 때에 느껴지는 그 씁쓸함의 정체는 뭘까. 어쩌면 그 씁쓸함의 비밀은 그 '파워'블로그라는 천박한 이름에 담겨져 있는 것이 아닐까.  

오늘 뉴스에 보니, 포털사이트들에서 파워블로거들을 선정할 때, 상업성을 배제한 블로그들을 선정한다고 하던데, 그런 것이 근본적인 해결책이 될 수 있을까. 우선 드는 생각은 상업성을 배제한다고 했을때 그 기준이 무엇이 될 것인가라는 점이다. 예를 들어 최근에 문제가 된 것처럼 블로그에서 특정 회사의 제품을 공구하는 것을 여기서의 '상업성의 기준'이라 한다면, 그것은 그에 뒤따르는 다른 질문을 낳지 않을까. 예를 들어, 그렇다면 블로그에 광고를 도배하는 수많은 다른 '파워블로그'들은 '상업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아니면, 굳이 광고를 걸지 않더라도, 거의 제품에 대한 홍보와 리뷰의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일부의 블로그 글들은 '상업적이지 않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일까. 사실 보다 근본적인 해결책은 그런 선정을 그만두는 것이 아닐는지. 개인적으로는 도대체 왜 그런 식의 블로그들을 선정하는 작업을 하는 것인지 알 수가 없다. 아직은 내가 모르는 몇 가지의 비밀들이 거기에 담겨 있는 것일 게다. 

사실 이야기를 먼 곳으로 돌릴 필요도 없이, 이곳 알라딘의 블로그들을 보아도 이 상업성의 경계는 상당히 모호하다. 예를 들어 별 의미가 없는 40자평으로 도배를 한 몇 개의 블로그들이나, 잔뜩 리스트만 올려놓은 블로그들을 내가 상업적이라고 비판한다면 나는 다음의 몇 개의 질문들에도 답해야만 할 것이다. 리뷰를 올리고, 혹은 때로 리스트를 올리고, (거의 들어오지는 않지만)  thanks to를 받는 것은 그렇다면 상업적이지 않은 것인가. 신간평가단이라고 참여하여 그 책들에 대한 리뷰를 올리는 것은 상업성과 무관한 것인가. 이달의 영화 리뷰에 뽑혀 알사탕(별사탕이던가?)을 받는 것은 상업성과 무관한 것인가. 알라딘에서는 도대체 무슨 목적으로 그것을 지급해준다는 말인가. 아니, 보다 근본적으로는 특정의 인터넷 서점 블로그에 계속적으로 리뷰를 남기고 있다는 이 사실 자체가 상업적이지 않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조금은 다른 얘기지만, 왠지 이것은 삼성 문제에 대한 대처들의 모호한 경계와 닮았다. 예를 들어 삼성을 비판하는 의미로 삼성 제품을 불매한다고 했을 때, 다음의 어떤 질문들. 그렇다면, 나는 삼성 TV를 버리고, LG 제품을 쓰면 조금은 나아지는 것인가. 아니면, 중소기업의 제품을 써야하는 것일까. 아니, TV를 아예 버려야만 정답이 되는 것일까. 잘 모르겠다. 

아무튼 간에, 어쨌거나, 나는 여전히 이 블로그에 리뷰들을 (요즘에 들어서는) 아주 가끔 남기고 있고, 부수입들을 얻고 있다. 그래서, 상당히 양가적이고, 이중적이 되어가는 것 같다. 블로그에 광고들을 도배하는 블로그를 보면서, 참 저런 블로그들은 뭐야..라는 생각이 들면서도, 리뷰가 이달의 리뷰로 뽑히는 것은 즐겁고, 우쭐한 마음이 든다. 그리고 그 즐겁고, 우쭐한 마음의 어딘가에는 알사탕이 떼굴거리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런걸까. 예전에는 뭔가 어딘지 모르게 미심쩍은 블로그들을 보면서, 여러 비판들을 마음껏 하기도 했었는데, 말은 점점 조심스러워지는 것 같다. 내가 그들을 비판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 

사실은 다른 얘기를 하고 싶었고, 좀더 가벼운 투로 이야기를 하고 싶었는데, 쓰다보니 이야기가 다른 결로 빠진 것 같다.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 파워블로그들에 대한 이야기를 보면서, '나는 왜 지금 무엇을 쓰는 걸까'라는 문제를 생각하고 싶었다. 그 파워블로거들도 처음에는 그저 뭔가를 쓴다는 사실이 좋아서, 여러가지 이야기를 사람들에게 전해주고, 이야기를 듣고 하는 것이 좋아서 시작했을 것이고, 나 역시 마찬가지였다. 그 사람들은 지금도 그런 마음일까. 무엇인가를 쓰고, 무엇인가 이야기를 나눈다는 그 순수한 사실이 그들을 지금도 기쁘게 할까. 그렇다면 나는 무엇을 위해, 어떤 것 때문에 지금도 이 블로그라는 것을 계속하고 있는 것일까.    

내 블로그 생활을 돌이켜 보면, 처음 시작은 '블로그인'이라는 사이트였고, 그 후에 네이버 블로그 생활을 꽤나 길게 했다. 그 때 블로그 생활이라고 해봤자, 주력은 락음악들을 올리는 것이었고, 그 외에 잡담을 올리고, 짧은 영화 감상을 올리는 것이 다였다. 그 이후에 좀 제대로된 리뷰들을 써보자 싶어서 시작한 것이 티스토리였고, 그것은 지금까지도 이어져오고 있다. 그리고 중간에 '씨네21' 블로그에서도 잠깐 티스토리의 글들을 옮겨 놓았었고, 알라딘에서는 영화 리뷰를 10개인가 올리면 적립금을 준다기에 시작했고, 어쩌다보니 여기에도 지금까지 글들을 옮기고 있다. (그러고보면 알라딘에서의 시작이야 말로 철저한 '상업성'이었던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도리어 알라딘에만 쓰는 글들이 있고(이 글을 포함하여), 티스토리보다 여기에 훨씬 더 자주 들르게 되었다. 

티스토리보다 알라딘에 훨씬 더 자주 들르게 된 이유는 간단하다. 여기에는 글을 올리면, 누군가가 읽어주는 것 같은 느낌이 드니까. 그리고 몇 마디 이야기라도 나누게 되니까. 티스토리의 경우 꾸준히 들러주시는 분이 한 분 계셨는데, 그 분도 요즘은 블로그를 거의 안하시고, 트위터를 주로 하시는지라, 당장 티스토리를 그만둔다고 해도 별 죄책감이 없다. 그러나 알라딘은 매우 상업적인 목적으로 시작했지만, '즐겨찾기등록: 16명'이라는 우측의 표시와 아주 가끔 늘어가는 추천수와 꾸준히 들러서 글 읽어주시고, 코멘트를 남겨주시는 몇몇 이웃 분(제가 이렇게 표현해도 괜찮겠지요?)들을 뵈면 뭔가를 자꾸만 써야만 할 것 같은 의무감을 느낀다.  

이렇게 말하고 나니, 내가 추천수나 즐겨찾기 숫자에 민감해하고 있다는 것을 인정해야만 할 것 같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리고 그것은 일부분 나의 어떤 욕망과 연결된다. 그것은 글을 잘 쓰고 싶다는 욕망이다. 사실 예전에 '씨네21' 블로그에 글들을 옮기게 된 것도 거기에 글을 올리면, 거기는 아무래도 날카로운 눈들이 많은 곳이니 누군가 나의 글들을 발견하고 신나게 까주지 않을까 해서 시작하게 되었고, 즐겨찾는 사람이 1명 생길 때까지만 버텨보자 싶었는데(거기도 알라딘과 비슷하게 확인이 가능하다), 결국 버티지 못했다. (블로그를 그만두게 된 것은 사실 '씨네21' 측이 블로그 운영을 함에 있어서, 전혀 성의를 보이지 않는 측면도 있었다. 그리고 요즘에 보니 결국 블로그 쪽을 일방적으로 닫아버렸다. 현재 '씨네21' 사이트에서는 블로그와 관련된 어떤 링크도 없다. 예전에는 블로그 글들을 일방적으로 사이트 메인에 올리더니, 관심을 못 끄니 한마디로 블로거들을 '팽' 한 것이다.)  

아무튼 그래서 가끔, 그리고 자주 이 블로그에 들러 글을 남겨주시는 분들을 보면 참 감사하다. 그것이 어떠한 내용의 글이 되었건, 내 글이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밑거름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가장 감독을 비참하게 만드는 영화는 아무도 보아주지 않는 영화다. 줄줄이 별 0개의 20자평이 달린 영화라 해도, 아무 20자평도 달리지 않는 영화보다는 감독을 기쁘게 만들 것이다. 글도 당연히 마찬가지가 아닐까. 나는 몇몇 그런 블로그들을 알고 있다. 정말 괜찮은 글들이 올라오는 블로그였는데, 그 블로그에는 아무 댓글들도 없었고, 블로그 주인은 어느날 슬며시 블로그를 닫고는 어디론가로 없어져 버렸다. 영화 <경>에 나왔듯이 그들은 없어졌다기보다는 그저 더 이상 '검색되지 않을' 뿐이다. 그러나 나는 그 '검색되지 않음'에 쓸쓸함을 느낀다. 그리고 그 쓸쓸함에는 나에게 느끼는 쓸쓸함도 포함되어 있다. 내가 무언가 열심히 댓글을 남겨주었다면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래서 어쩌면 파워블로그 100위를 뽑네, 어쩌네, 알라딘에서도 서재의 달인이네, 어쩌네 하는 것도 이해할 수가 있을 것도 같다(글의 초반에는 비판 비스무리하게 해놓고, 이제는 옹호하고 있으니 글이 어째 점점 병맛으로 가는 것 같다). 우리들 모두는 검색되지 않음을 두려워하니까. 100위 안에 들어서 어떻게든 이곳 어딘가에 자신의 블로그 이름을 남겨놓고 싶으니까.  

.............................................. 

쓰다보니 글의 결론을 어떻게 맺어야 하는지 잘 모르겠다. 전형적인 병맛이다. 처음에는 왠지 요즘에는 리뷰를 잘 쓸 수가 없어서, 가볍게 아무 이야기나 하자, 그리고 한 달에 한 개 올린 리뷰로 2달 연속 이달의 영화리뷰를 받으니 참으로 민망해서, 뭐라도 쓰자 싶어서 시작한 글인데, 글을 쓰다 보니 이야기는 점차 산으로 가고, 어떻게 끝을 내야 하는지 모르겠다. 아무튼 그래도 원래 하려던 얘기는 뜬금없이 하자. 몇 개의 메모들을 쌓아두고 있는데, 뭔가 리뷰 같은 것을 왠지 쓸 수가 없다. 영화를 보고 와서 바로 쓰면 좋으련만, 여차저차 자질구레한 이유로 조금씩 미루다가 결국 나중에는 영화 내용이 기억이 안나고, 메모의 맥락을 도저히 알 수 없어서 못 쓰게 되는 악순환이 점차 늘어만 간다. 지금도 한 영화 5개 정도가 그런 식으로 쌓여 있는 상태고, 책 <사유의 악보>는 오래전에 책을 다 읽고, 메모에도 무엇인가 잔뜩 적어두었는데, 여전히 무엇인가를 쓰지 못하고 있다. 반딧불이 님께 꼭 쓰겠다고 한 공언(?)도 있고, 개인적으로도 평가단이라고 받은 책인데 꼭 무엇인가는 써내야하지 않겠냐는 다짐이 있다. 

김혜리 씨는 나루세 미키오 감독의 영화 <방랑기>(위에서 말한 영화 5개 중에 하나다)를 보고 남긴 글에서 첫머리에 반성하고 있다고, 나는 지금 너무 많이 먹는 대신에 너무 안쓰고 있다,고 남겼던데, 이 말은 나에게도 고스란히 해당된다. 물론 이렇게 말하면 당연한 질문이 뒤따를 것이다. 김혜리 씨는 전문적으로 글을 쓰는 사람이고, 너는 아니지 않느냐고 말이다. 글쎄. 이렇게 말하게 되면, 다시 근본적인 질문으로 돌아간다. 나는 왜 무엇인가를 자꾸 쓰고자 하는가. 왜 지금도 뭔가를 쓰겠다는 다짐을 스스로에게 하고 있는가. 무엇을 위해서? 

글쎄. 아무튼 아주 오랫동안 뭔가를 조금씩 쓸 수 있었으면 좋겠고, 누군가 다른 사람들이 아주 조금씩이라도 내 글을 읽어준다면 기쁠 것 같아서...라는 대답은 대답이 될까. 그냥 나는 가늘고 길게 갔으면 좋겠다. 가끔 정말 엄청나게 공력이 들어간 것 같은 글들을 보며(사진도 엄청 들어가고..) 저런 글들을 따라해 볼까 하는 생각이 들다가도, 곧 포기하게 되는 것은 한편으로는 그런 이유다. 몇 개의 글들은 그렇게 써볼 수도 있겠지. 그리고 그런 다음 아마도 곧 나는 지쳐서, 더 이상 별로 글을 쓰고 싶지 않게 될지도 몰라. 그렇게 되면, 그런 다음은 어쩌지?...라는 그 공포. 그러니, 그저 가늘고 길게. 내 스타일대로, 읽을테면 읽고 말라면 말라는 식으로...그래도 누군가가 읽어주기를 바라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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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이드 2011-08-11 02: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파워블로그에 대해선 엄청나게 다양한 입장이 존재하고 있어서, 누구라도 이야기를 시작할 수는 있어도, 끝맺기는 어려운 것 같습니다. 저역시.. 몇 번인가 썼다 지웠다 임시저장은 되어 있으려나. 하는 상태. ^^

제가 생각하는, 지향하는 파워블로그는 '상업적'인 것과 필연적으로 연결되어야 한다고 생각해요. 그것이 블로그에 '파워'를 더해주고요, 더 나은 포스팅을 생산하게 하지요. 그러니깐, 블로그 포스팅 하는 것이 '일'이라면, 그건 당연히 더욱 전문적이고, 시간과 돈과 노력이 들어간 포스팅이 되는거죠. 뭔가 꼬여버린 우리나라의 소위 '파워블로그' 들 말고, 전문적인 해외 파워블로그들처럼요.


맥거핀 2011-08-11 11:23   좋아요 0 | URL
고견 감사합니다. 그런데 하이드 님의 '상업적'과 제가 말하는 '상업적'은 조금 다른 의미를 가진 것 같습니다. 말씀하신 대로 글의 가치로서의 어떤 ‘상업성’이라면 저도 동의합니다. 즉 글 자체의 가치, 시간과 노력과 돈이 들어간 포스팅 그 자체의 상업적 가치 말입니다. (다만, 그것이 상업적이 되어야만, 그 글이 퀄리티가 올라가게 된다는 것에는 부정적입니다.) 예를 들어 제 글이 엄청나게 퀄리티가 좋아져서, 미래에 언젠가 제 글이 상업적으로 팔린다면 기쁘겠죠.

그러나 한편으로는 예를 들어 지금의 일부 블로그처럼, 이 글을 보려면 이 정도 광고는 감수해라는 식의 광고 도배를 ‘상업성’이라고 부른다면, 저는 그 ‘상업성’에는 동의하지 않습니다. (농담이 아니라, 예전의 한 블로그에서는 이런 사례를 본 적이 있습니다. 성형의 만연을 걱정하는 포스팅이었는데, 키워드 광고기법(맞나요?)을 쓴 탓인지, 그 밑에는 성형외과 광고가 즐비하게 붙었더군요. 이게 뭔가 싶었습니다.) 동시에, 블로그 포스팅의 퀄리티를 높이려는 노력 없이, 다른 상업적인 이익을 낼 방도만 추구하는 (것처럼 보이는) 블로그들도 마찬가지구요. 말장난이라고 느끼실지도 모르겠지만, 블로그의 최후의 목적은 ‘많은 돈을 버는 것’이 아닌 ‘좋은 포스팅(글)을 써내는 것’이어야겠지요...작가들이 때로는 어쩔 수 없이 돈 때문에 글을 쓰지만, 결국 모든 작가들의 최종의 꿈은 불멸의 명작을 써내는 것인 것처럼요. (말씀하신대로 ‘파워블로그 문제’에는 여러 다양한 의견이 존재할 수 밖에 없나 보네요.^^ 아무튼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하이드 2011-08-11 23:03   좋아요 0 | URL
상업적이 되어야 퀄러티가 올라간다는 것은 그것이 일인 경우에, 예를 들면, 제가 꽃일을 하고, 꽃에 관한 포스팅을 올린다면, 그건 부지런한 일반인이 따라올 수 없는 전문적인 포스팅이 되겠죠. 전문적이기도 하고, 재미도 있어서 팔로워들, 즐찾들, 이웃들이 많아지면, 저의 포스팅은 '광고' '홍보' 효과가 있는 것이고, 닭이 먼저냐, 달걀이 먼저냐겠지만, 보여지는 이미지.를 생각한 유익하고 올바른(?) 포스팅을 내킬때마다가 아닌, 꾸준히 일로서 하게 되는거.

그런것이 제가 생각하는 상업적인 것입니다.

해외 블로그 중에서는 잘 알려진 '사토리얼리스트' 과 같은 블로그나 제가 자주 가는 디자인, 데코, 책, 뉴스 블로그들이 그 카테고리에 들어가구요. 우리나라에선 롤모델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습니다만..



맥거핀 2011-08-12 00:32   좋아요 0 | URL
네..무슨 말씀이신지 알 것 같습니다. 일종의 '강한 의무감'을 말씀하시는 거라고 이해하면 될까요? 그냥 좋아서 쓰는 것이 아닌, 책임감과 의무감을 느끼면서 일정 수준 이상의 포스팅을 생산해내는 것..

제가 외국블로그 쪽은 잘 몰라서, 어느 정도 퀄리티를 의미하시는지는 감이 조금 덜 오지만, 그런데 한편으로는 여전히 어떤 의문이 남기는 합니다. 그것이 그렇다고 해서 퀄리티가 창출된다고 볼 수 있을까..도리어 그런 일종의 의무감과 책임감이 매너리즘을 만들어내고, 도리어 포스팅의 질적저하로 이어지지 않을까..(일부 국내의 파워블로거들이 걸어가는 길을 보거나, 혹은 일부 소위 전문가들이 어느 순간 이상부터 매너리즘에 빠진 글을 양산해내는 것을 보면요.)

결론을 내리기가 어려운 문제겠지요..

cyrus 2011-08-11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마음에 와닿네요. 댓글은 안 달더라도 보이지 않는 누군가가(한 명일이지라도)
읽어주게 된다면 참 좋겠죠. 글 쓰는 맛도 나고요. 저도 작년에 처음 블로그할 때
서재지수, 추천에 좀 민감하게 반응한 적도 있었어요. 그런데 차츰 변하는 저의 모습을
보면서 조금씩 겁이 나면서도 어리석다는 것을 알았어요. 맹점에서 벗어나지 못하게 되면
오히려 독서를 하면서 경험을 흔적에 남기는 글쓰기의 목적 자체가 전도되어버리거든요.
그리고 저 이외에도 서재 이웃분들도 그런 마음을 한번쯤은 가졌을 것이라고 생각이 들어서
작년부턴가 아예 서재지수랑 즐겨찾기 수를 확인할 수 있는 거를 비공개로 해버렸어요.
이게 최선의 방안이지는 모르겠지만,, ^^;; 저나 이웃분들이나 서로간에 수치에
대해서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을 방지하는 차원에서 그렇게 했었답니다.

어쨌든 많이 부족한데도 댓글이라도 달아주시는 이웃분들 보면 참으로 감사하게 생각하면서도
정작 제가 이웃분들에게 직접 서재에 들리지 못한 저의 나태함 때문에 죄송스럽기도 합니다.
역시 온라인 관계 역시 오프라인만큼 오랫동안 유지되는게 어려운가 봅니다. ^^


맥거핀 2011-08-12 00:46   좋아요 0 | URL
저 역시 글에도 썼지만, 다른 분들 블로그에도 많이 가서 댓글도 남기고, 글도 좀 꼼꼼하게 읽어보고 그래야하는데, 그러지를 못해서 한편으로는 반성하게 됩니다. 때로는 댓글을 남길까 하다가도, 괜히 주저되기도 하구요. 몇 번 왕래가 있는 블로그들도 그러한데, 처음 보는 블로그는 더더욱 그러기가 쉽지 않구요.

저는 처음에 여기 왔을 때, 글 추천수 같은 것은 도대체 왜 있을까 싶어서, 거의 다른 분들 글들을 읽어도 '추천' 같은 것은 누르지 않고 그랬는데요. 제가 이후 어느 순간부터 그거 한 개 올라갈 때마다 꽤나 기분이 좋아지더군요. 그래서 그 이후부터는 다른 분들 글 중에서 좋다 싶은 것은 꼭 잊지 않고 추천하고 있습니다. 다만, 그러면서도 여전히 경계를 하고 있기는 하지요. 추천수가 많다고 꼭 더 좋은 글도 아닌데(다른 분들과 비교해서가 아니라, 제 글끼리 비교해보면요), 왜 그런 것을 생각하고 있을까...라구요. 그래도 알라딘만의 재미있는 시스템이라 생각해서 굳이 거부감은 가지지 않으려 합니다.

이러니 저러니 해도 사실 들러주셔서 한 마디 해주시면 늘 고맙지요. 저는 다른 분들께 잘 못하는데, 블로그에 굳이 찾아와 주셔서 의견 남겨주시는 거니까요. 물론 cyrus님도 감사드리구요. 좀 다른 얘기지만, 제가 위의 글에 공력이 많이 들어간 글 운운하며, 저는 그렇게는 못 쓴다..고 했는데, 그런 생각이 드는 때 중에 하나가 cyrus님 블로그에 들를 때에요. 어떻게 생각하실지 모르겠지만, cyrus님의 글들을 재미있게 읽으면서도, 걱정이 되는 때가 있어요. 이렇게 한편한편 공을 들이시다가 어느 순간 지쳐서 아예 안 쓰시면 어쩌나 하구요. 하하..오지랖이지요? 부담감 가지시라고 하는 말은 아니고, 그저, 좋은 글 편한대로 많이 써주세요. ^^

2011-08-11 20: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12 00: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영화평론가 정성일 씨의 트위터 한마디. 

정말 맞는 말이다. 동시에 아주 무서운 말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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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8-06 10:1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8 15: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9 01: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8-09 18:11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