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당거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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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 없는 '스포'가 있습니다.)



영화를 보고 나와서, 제목에서 말하는 '부당거래'란 결국 무엇을 말하는 것일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 영화의 어떤 거래도 그렇게 보이지 않아서? 문제는 없어서가 아니라, 너무 많아서다. 이 영화의 거의 모든 '커넥션'들은 불법과 범죄와 폭력과 비리로 점철되어 있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을 아울러야만 그 거대한 부당거래의 끄트머리라도 조금이라도 끄집어낼 수 있을는지 모른다. 즉 이것을 '위에서 내려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다른 말로 하자면, 스크린 밖으로 나와서 차가운 관객이 되어 이들을 들여다보아야만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것을 안다. 부당거래를 하는 자들은, 이것이 부당거래라는 사실을 잘 모른다. 건설회사 사장의 손에서 검사의 손에서 넘어간 시계가, 다시 기자의 손으로 넘어가는 것의 역방향으로 검사는 사장을 위해 적당히 누군가를 '손봐주고', 기자는 검사를 위해 기사를 써준다. 그들은 그저 어떤 것을 주고받는 '정당한' 거래를 한다. 단, 여기서의 정당함이란 그로 인해 쓰러지게 되는 스크린에서 밀려나 있는 다른 이들을 생각하지 않았을 때에만 가능한 것이다. 스크린 외곽에 존재하는 사람들, 그리고 스크린에서 밀려난 자들(아마도 상당수의 관객들)이 '위에서 들여다보았을 때' 이것은 부당거래가 된다.

아니, 여기서 다시 복잡한 스토리를 반복하고 싶은 생각은 없다. 그런 복잡한 이야기들보다는 그저 다른 얘기 몇 가지를 하고 싶다. 먼저 이 영화의 뚜렷한 장점들. 스토리를 죽 써내려가는 것으로 200자 원고지를 몇 장이나 채울 수 있을 정도로, 이 영화의 스토리는 꽤나 복잡한 구석이 있다. 그러나 이 영화는 그런 스토리의 복잡함이 잘 느껴지지 않는 묘한 마법을 부린다. 그 마법은 몇 가지로 가능한 것처럼 보인다. 먼저 한 가지는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것으로 이야기를 시작하고, 스토리를 캐릭터들의 관계 중심으로 구축함으로써 스토리를 최대한 캐릭터에 밀착시켜 버린다는 점이다. 영화의 시작부분에서 각 캐릭터를 정지 화면으로 잡고, 간단한 캐릭터 설명을 자막으로 붙이는 것은 이 영화를 캐릭터 중심으로 보라는 감독의 친절한 부연설명이다. 그러나 그보다 더 효과적인 것은 그 캐릭터들의 특징을 잡는 것이나, 각 캐릭터들의 관계를 한 가지의 아주 인상적인 숏이나, 대사로 처리해버린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팜플렛에 나온 다음의 대사들. 주양 검사(류승범)의 "한번 까드려야 내가 뭐하는 놈인지 아시겄어?!!" 나, 장석구(유해진)의 "절대 나 혼자 못 죽는거 알죠?"같은 것들을 보면, 그 캐릭터의 어떤 특징이나, 관계 같은 것들이 오롯이 드러난다. 즉 인물들의 복잡한 관계도나 사건들의 관계를 설명적으로 처리하는 것이 아니라 관객이 직관적으로 알아차릴 수 있도록 만든다. 이건 절대 쉽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

그로 인해 영화는 초반에 상당한 리듬감도 덤으로 얻게 된다. 많은 사건들이 연이어 지나가고, 여러 새로운 인물들이 계속 등장함에도 관객이 이야기의 흐름을 놓치지 않고 따라갈 수 있는 것은 초반에 만들어놓은 캐릭터들의 힘이고, 처음에 구축한 리듬의 덕이다. 즉 이 영화는 에너지가 넘쳐나고, 그 에너지들이 영화에 지속적으로 힘을 부여하지만, 그것이 너절하게 이어져있다거나, 혹은 뭔가 불안하게 엮어져 있다거나 하는 인상을 주지는 않는다. 도리어 상당히 '웰메이드'하다는 느낌을 준다. 류승완 감독의 영화들은 지금껏 어떤 불균질하게 넘쳐나는 에너지로 승부하는 것들이었지, 이 영화처럼 매끄러움으로 승부하는 것들은 아니었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는, 예를 들어 최동훈 감독이 <타짜>나 <범죄의 재구성>에서 보여준 매끄러운 세공술사 같은 느낌이 있다.

어쩌면 이것은 류승완 감독의 공이라기 보다는 시나리오를 쓴 박훈정 작가의 공인지도 모른다. 이 이야기에서 가장 흥미로웠던 부분은, 종내에는 관객이 어느 캐릭터도 좋아할 수 없도록, 혹은 조금이라도 의지할 수 없도록 만든다는 점이다. 대부분의 관객들은 영화를 보면서 몇몇 캐릭터에 '의지하기' 마련이다. 즉 대부분의 대중영화들은 관객이 조금이라도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를 의도적으로 끼워넣는다. 그러나 이 영화에서 관객이 온전하게 마음을 줄 수 있는 캐릭터는 없다. 아마도 그래서 에필로그와 같은 영화의 마지막 씬들이 필요했던 것이 아니었나 싶다. 류승완 감독이 <무비위크>와 한 인터뷰를 보면 봉준호 감독이 대호 형사(마동석)가 죽는 장면에서 영화를 끝내라고 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마도 봉준호 감독의 충고를 따랐더라면, 분명히 관객들에게는 덜 환영받았을 것이다. 더구나 이 영화와 같은 캐릭터들의 집합이라면, 마지막의 친절하게 정리하는 장면들은 대중영화에서는 어느 정도 불가피한 것이 아니었겠는가 라는 생각이 든다. 즉 마지막의 몇몇 씬들은 대중적인 결점에 발라주는 일종의 호랑이 연고 같은 것이다.

그러나 나에게는 조금은 과잉으로 보이는 부분도 있다. 이것은 한편으로는 조금은 류승완 감독의 전작들과도 관계된 것처럼 느껴진다. 류승완 감독이 전작들에 보여줬던 어떤 여러 단점 중의 하나는 작위적인 구성이 자꾸 엿보인다는 점이었다. 물론 영화란 (어느 정도는) 작위적인 예술이다. 그러나 작위성의 구렁텅이에서 어떻게든 조금이라도 기어나와보려고 버둥대는 것이 영화의 숙명이고, 이것을 어떤 핍진성이라고 부른다면 류승완 감독의 영화에서는 그런 핍진성이 조금은 의도적으로 결여되었다고 보이는 부분들이 많았다. (그래서 그렇게 불평하는 자들에게 에라 엿먹어라 라는 심정으로 밀어붙인 것이 한편으로는 <다찌마와 리 - 악인이여 지옥행 급행열차를 타라!> 아니었겠는가.) 이번에는 그러한 것들이 최대한 자제된 것으로 보이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몇몇 마음에 걸리는 장면들이 있다. 다음과 같은 몇 개의 질문들. 살인범 이동석의 아내는 왜 그런 캐릭터로 설정되었는가(물론 이 질문은 다음의 질문과 연관된다 - 최철기(황정민)는 왜 그런 이동석을 '찜'하는가), 대호 형사의 장례식 장에서 다운 증후군 아이는 왜 스치고 지나가야 하는가, 황정민이 마지막에 울부짖는 씬에서 굳이 그런 음악을 깔아야만 했을까....등등. 이 첨가물들은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을까.

그러나 아무튼 이것은 <PD수첩>도 아니고, <시사매거진 2580>도 아니고, <뉴스 후>도 아니다. 그저 잘짜인 대중영화이다. 아니, 그저 이 모든 내용이 단지 영화에 불과하다는 닭소리를 하는 것이 아니다. 분명히 대중영화에는 대중영화에 맞는 문법이 필요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상기시키고 싶을 뿐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과잉이 가져다주는 효과도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는 점을 강조하고 싶다. 그래서 그럴까. 그러한 과잉은 다른 어떤 것을 약간은 덮으려는 시도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것은 한편으로 이 영화의 어떤 묘한 패배의식이나 냉소주의 같은 것들과 연관된 부분이다. 결국 영화가 마지막에 말하고자 하는 것은 무엇일까. 이 결말은 사실 친절한 듯 보이면서도 사실은 아무것도 해결하지 않는다는 점에서 지극히 냉소적이다. 요즘말로 하자면, 깃털들만 다 부러지고, 몸통은 여전히 건재하다. (물론 누군가는 이 말에 이렇게 반박하고 싶을 것이다. 현실이 그렇잖아요! 나의 대답은 그저 위의 말을 다시 반복하는 것이다. 이것은 <PD수첩>이 아니다.) 어쩌면 그저 우리 모두는 공범들에 불과하다는 것을 말하고 싶은 것일까. 고개가 갸우뚱 거려지는 몇몇 선택들이 있다. 처음 장면의 지하철 역과 쏟아지는 뉴스와 신문들의 조합. 살인범 이동석을 다시 비틀어버리기. 주양 검사와 장인과의 마지막 대화 같은 것들.  

꼭 이것들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사실 나는 류승완 감독의 능력이 여전히 의심스럽다. 사실 박훈정 작가라는 시나리오 블루칩에(이 매끄러움은 분명히 류승완의 공이라기 보다는 박훈정의 공이다), 주연배우들로 한 연기하기로 소문난 황정민, 류승범, 유해진의 쓰리 콤보 조합에, 요즘 충무로에 연기 좀 한다 싶은 명품 조연들은 거의 모아놓은(한국영화들을 좀 보아온 분들이라면 얼굴들 찾기가 재미가 쏠쏠할 거다. 심지어 안길강은 대사 한 마디 없다) 이 영화이고 보면, 거의 실패하기가 더 어렵지 않을까. 오랜만에 평론가도 관객도 만족할 수 있는 영화라는 점에는 동의하지만, 류승완 감독의 최고작이라는 데에는 동의하기가 힘들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절대 이 영화가 구리다는 얘기는 아니라는 말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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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이조부 2010-12-15 06: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작년 이랑 2년전에 비해 좋은 영화(?)가 상대적으로 조금 모자라지 않았나

싶어요. 방화에만 한정지어서 말이죠~

어쩌면 올해의 한국영화로 꼽아도 무리는 없을것 같아요. 아직 황해를 안봐서 장담은 ㅎ

맥거핀 2010-12-15 14:31   좋아요 0 | URL
<황해>가 올해 안에 개봉된다해도, 관례상(?) <황해>는 2011년도 후보작으로 올려야할 듯..^^;
꼭 다시 한 번 보고 싶은 영화입니다. 연기의 앙상블이 이보다 더 맞아떨어지는 영화는 찾기 힘들죠.

다이조부 2010-12-15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극장에서 다시 볼까 생각이 들 정도로 재미있더군요~ 이 영화에 관하여

반론성격의 글 그러니까 금태섭변호사 가 전직검사 출신인데, 영화의 리얼리티에
관한 문제제기를 한 글을 읽어봤는데 재미있더군요.

맥거핀 2010-12-16 12:57   좋아요 0 | URL
아..그런 글이 있었나요. 재미있겠네요. 찾아서 읽어봐야겠습니다. 뭐 그러나 개인적으로는 조금 리얼리티가 떨어진다고 해도, 이 영화의 가치가 그로 인해 훼손되는 부분은 없다고 생각합니다.
 
인문/사회 분야 주목할만한 신간 도서를 보내주세요.



며칠 동안 예비군 훈련을 갔다왔다. 언뜻 보면 예비군 훈련이란 건 책과 어지간히 어울리지 않는 것으로 보이지만, 사실 예비군 훈련만큼 책이 어울리는 시간 및 장소도 없다. 앞에서 열심히 강의를 하시는 분들에게는 상당히 미안한 말이지만, 거의 대부분의 (실외 학과를 제외한) 강의들이 거의 들을 만한 가치가 없는 데다가, 훈련의 특성상 여러 자투리 시간이 많이 생긴다. 그리고 폰도 강의 중에는 허용되지 않고, 음악을 대놓고 듣기에는 너무 눈치 보이고, 다른 전자기기의 반입은 허용되지 않는다. 하지만 그 모든 제약에도 불구하고 책은 가능하며, 그래서 책은 (어떠한 내용이든) 여전히 그곳에서 그 나름의 능력을 발휘한다.  

그래서 거의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 기간 중 손에 책 한 권 씩을 들고 있었다. 내가 선택한 책은 알라딘 서평단으로 받은 조지 오웰의 <나는 왜 쓰는가>였다. 자투리 시간 중 읽기 좋도록 글들이 짤막하게 나뉘어져 있는 데다가, 상당수가 전쟁 기간에 쓰여졌으며, 전체주의에 끊임없이 항거하는 조지 오웰의 이 에세이들은 예비군 훈련과 놀랍도록 잘 어울렸다. 뭐 아무튼 고맙다는 인사는 이것으로 대신.

그리고 이달의 추천하는 (사실은 그저 내가 읽고 싶은) 책들. 다시 보관리스트에서 건져본다.
 

 

향수를 불러 일으키는 공장 - 기억, 시간, 그리고 나이 / 다우어 드라이스마 / 에코리브르

인지심리학 시간에 들은 몇 개의 이야기들은 나를 실망하게 했다. 우리가 가진 기억의 신비로운 부분, 그리고 우리가 동시에 반복하는 망각의 그 아련함이 그저 뇌 속의 정신 작용의 일부분이라니. 그것이 그저 우리의 뇌의 몇 개의 뉴런들과 호르몬들과의 복잡한 신경 작용이 불러 일으키는 물리적인 현상일 뿐이었다니. 우리의 놀라운 반응과 기억의 메커니즘이란 실상은 많은 혼란과 오인의 산물로서 구성된 것이라니. 그러나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나이들수록 시간은 왜 빨리 흐르는가>는 일상과 밀착된 많은 이야기들을 통해 그것이 단순한 어떤 물리적인 작용만이 아님을, 그것에는 아직 많은 신비로움이 남아 있음을 새삼 일깨워 주었다. 그런 다우어 드라이스마의 신작.  



진보와 보수의 12가지 이념 / 폴 슈메이커 / 후마니타스

세상의 여느 곳이나 어느 정도는 그렇겠지만, 우리나라만큼 진보와 보수의 개념이 혼재되어 있는 곳이 있을까. '100분 토론'을 즐겨보곤 하는데, 가끔 놀랄 때가 있다. 내가 지극히 보수적이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의외로 상당히 진보적인 발언을 하는가 하면, 상당히 진보적이라고 생각했던 인사가 의외로 매우 보수적인 발언을 하기도 한다. 그것이 어떤 방송의 영향인지, 일종의 미봉책인지, 아니면, 내가 그동안 알고 있던 보수와 진보의 개념들이 잘못된 것인지 의심스러워진다. 하기는 지난 몇십 년 동안 이 나라에서 보수와 진보라는 것의 의미는 그저 상대방과 나와 구별짓고, 상대방에게 낙인을 찍으려는 용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으니 그리 놀랄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이 책을 읽으면 기본적인 진보와 보수의 이념을 살펴보는데 도움이 될까. 



당신이 모르는 줄도 모르는 100가지 수학 이야기 / 존 배로 / 이미지박스

아무리 부인하고 싶어도 인간의 삶에 있어서 수학은 밀착되어 있다. 고등학교 때 수학선생님들이 나중에 사회나가면 다 써먹을 때가 있다고 할 때 속으로는 비웃었지만, 나이가 점점 들면서 수학이란 게 이렇게나 많은 부분과 사실 연관되어 있다는 것을 종종 깨닫고 한다. (예를 들어 예비군 짐 쌀 때도 말이다!) 그리고 수학에 연관된 책들을 읽을 때마다 느끼는 건데, 의외로 수학의 세계는 재미있는 부분이 너무 많고 뒤늦게 깨닫게 되는 점도 많은 것 같다. 아마도 이 책도 한 재미 할 듯. 



위스트르앙 부두 / 플로랑스 오브나스 / 현실문화

이 책에는 '우리 시대 '투명인간'에 대한 180일간의 르포르타주'라는 부제가 붙어 있다. 실업자에서 시급 8유로의 청소부가 되기까지의 몇 개월의 경험을 적은 르포. 얼마전에 <한겨레21>에서 몇 개월의 노숙 체험을 바탕으로 노숙인의 생활실태를 분석한 논문을 발췌해 놓은 것을 읽었다. 그것을 읽고 조금 충격이랄까, 놀라움이랄까, 혹은 찜찜함이랄까 하는 감정을 느꼈다. 그것은 애써 내가 외면하려고 했던 마음 한 구석의 불길함같은 것이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들이 우리나라에서, 그리고 프랑스에서 투명해졌고, 또 동시에 많은 이들이 여전히 투명해지지 않으려 애쓰고 있다. 창백한 얼굴을 늘 거울에 비춰보며, 불안감을 애써 지우며. 



선제공격 / 앨런 M. 더쇼비츠 / 바이북스

약간은 위험해 보이는 책이다. '국가 간의 전쟁에서 선제공격은 정당화될 수 있는가'라는 질문의 대답을 어떻게 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적어도 먼저 이같은 일들이 실제로 매번 반복되고 있음을, 따라서 그것에 대한 어떤 고찰과 국제법적인 논의가 필요함을 부인하기란 어렵다. 예를 들어 부시 행정부의 (어떤 불확실한 정보에 따른) 이라크에 대한 선제공격들을 어떻게 받아들여야 하며, 그것에 어떤 평가를 내릴 것인가. (지금은 지나간 논의가 되었지만, 한국전쟁을 둘러싼 선제공격 논란도 있었다.) 원혜욱 교수의 반론도 같이 들어 있는 것으로 봐서 꽤 흥미로운, 그러나 찬찬히 생각해 볼 만한 논쟁거리들이 들어 있을 것이라 기대된다.


* 이상 어렵게 5권을 골랐다. 움베르트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도 넣고 싶었으나, 왠지 마음에 걸려서. 허허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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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1-05 1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다 써놓고 다른 분들 리스트를 보니 겹치는 게 거의 없넹..;;

cyrus 2010-11-05 19: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폴 슈메이커, 존 배로,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책이 끌리네요.
특히 플로랑스 오브나스의 책 내용이 조지 오웰의 르포와도 흡사하고요.
그리고 지금 신간도서 후보 중 대세가 에코의 <궁극의 리스트>군요^^;;
이 좋은 책을 19분의 신간평가단원분이 읽으면 참 좋을텐데,,
가격이 세다보니 출판사가 선뜻 알라딘 신간도서로 제공해줄지 모르겠네요.

맥거핀 2010-11-05 22:52   좋아요 0 | URL
사실 제가 위에 올린 책 중에 폴 슈메이커의 책도 만만치 않은 가격이거든요. 가능할 것 같지는 않지만, 읽고 싶은 마음에 선정해 봤어요. 사실 800쪽이 넘어가는 책이라 선정되어도 문제지만..^^; <궁극의 리스트>는 읽고 싶다는 생각보다는 소장 욕구에 더 가깝지요.
 
바흐 이전의 침묵 - The Silence Before Bach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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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글로서 적을 수 없는 영화들이 있다. 글쎄. 이 영화의 몇몇 장면들을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까. 아니, 몇몇 이미지나 짧은 이야기들은 내뱉을 수 있어도, 영화 내내 흐르던 바흐의 음악들은 어떻게 묘사할 수 있을 것인가. 이 영화는 왠지 '영화'라는 것의 처음으로 돌아가야 할 필요성을 말해주고 있는 것 같다. 영화란 보고, 듣는 것이라는 것. 즉 이야기를 이해하거나, 줄거리를 따라잡거나 해서 없는 무언가를 스스로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래서 다시 한 번 말하지만, 이 영화는 보고, 들어야 하는 영화이다. 그것을 애써 이해하려고 아등바등 노력해서는 안되는 영화이다. (그러므로 긴 말은 하지 않겠다.)

2.
<바흐 이전의 침묵>. 어쩌면 그 이전을 완벽한 침묵의 세계라고 부르는 것은 오만한 말이 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바흐 이전의 소위 '음악 이전의 세계'가 어떤 형태였는지 도무지 짐작조차 할 수가 없어진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 형태에 대한 것이라기 보다는 그 이전의 세계의 존재 여부를 믿을 수가 없어진다. 왜냐하면 바흐의 음악들은, 그리고 그로 인해 영향을 받은 후기의 음악들은 이 세계의 어느 곳에나 완벽하게 스며들어가 세계와 조응하고 있음을 영화는 보여주기 때문이다. 그것은 첼로 연주자의 리드미컬하게 움직이는 팔의 움직임에도 있으며, 바람에 나부끼는 나뭇잎에도 있으며, 아이들의 합창 속에 나란히 움직이는 입에도 있으며, 조율사의 떨리는 세심한 손길에도 있으며, 고속도로 위의 달리는 트레일러에도 있다. 그것은 기쁨 속에도 있으며, 그리고 영화 속 2차대전 중 유대인들의 사례에서 보듯이 지극한 고통 속에도 있다. (개인적인 궁금증. 바흐와 헨델 중 왜 바흐는 음악의 '아버지'이고 헨델은 음악의 '어머니'인지? 찾아보니 몇몇 흥미로운 대답들이 있기는 한데, 딱 이거다 싶은 거는 없던데.)

3.
우리가 이전에 체험해 본 적이 없는 음악 영화이다. 이 영화는 음악 외부를 도는 기존의 방식을 거의 따르지 않는다. 즉 기존의 클래식 음악 영화들은 작곡가를 둘러싼 어떤 드라마틱한 내용을 재현하거나, 음악 그 자체가 가진 어떤 이야기를 형상화해내는 것으로 음악을 말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이러한 경우에 어떤 위험이란, 우리가 받는 감동이 그 음악 자체의 감동인지, 아니면 그것의 외부가 우리의 상상과 결합하여 만들어낸 어떤 유사한 감동인지 구분해지기 모호해진다는 점이다. 이 영화에도 '마태 수난곡'의 발견을 둘러싼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일부 나오기는 하지만, 그보다는 거의 비디오 아트나 설치 미술에 가깝다. 그저 그것을 듣고 받아들여라! 영화는 말한다. (일부의 지적대로 이러한 것들이 지루함만을 불러일으키는, 어떤 '있어보이려는 시도'에 불과한가 라는 항변은 그저 카피와 예고편이 불러일으키는 오해라고만 해두자.)

4.
한 가지는 흥미롭다. 그것은 바흐의 음악은 음악 그 자체로만이 아니라 그 음악을 다른 것으로 치환하여도 여전히 일종의 예술품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예를 들어 바흐의 음악을 나타낸 악보들. 그 악보들만 바라보아도 어떤 일정한 규칙이 엿보이며, 그 악보를 전혀 읽을 줄 모르는 나같은 사람에게도 그것에는 일종의 아름다움이 돋보인다. 그것은 일종의 대칭의 미학이며, 신이 숨겨놓은 균형미이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왜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음악이 되며, 어떤 멜로디의 조합은 불협화음이 되는가. 왜 어떤 특정한 화음만이 우리 귀에 듣기 좋은가. 왜 어떤 균형만이 우리에게 듣기 좋고, 보기가 좋은가. 아마도 영화에 난데없이 누드가 등장하는 것은 이와 관련이 있는 것일지도 모른다.) 바흐 음악의 예술성은 심지어, 그 음악을 연주하는 자동 피아노에 사용되는 일종의 전자 악보에도 여전히 드러난다. 그 천공(穿孔)들의 오묘한 흐름이라니.
 
5.
아무튼 이 영화를 보고 나온 당신에게 평균율 클라비어니, 대위법이니 하는 것들은 사실 별로 중요하지 않을 것이다. 확실한 것 한 가지는, 아마도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어질 것이다. 영화에 아무런 드라마틱한 이야기가 없어서 그 감동이 전혀 없었다고 느끼는 사람들은 그 감동을 다시 어떤 방식으로든 찾아내고 싶어서. 그리고 그 반대의 사람들은 반대의 이유 때문에. 바흐 이후의 음악의 세계는 그렇게 당신 곁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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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0-10-25 21: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이런 바흐의 음악과 관련된 영화가 있었다니,, 처음 알았습니다.
바흐와 그의 음악은 위대한 음악가로 평가는 받고 있기는 하나,
그의 작품은 제대로 듣는 사람이 잘 없을 겁니다. 그나마 대중적으로
알려진 미누에트나 G선상의 아리아를 듣기는 하겠지만,,
이 음악만 듣는다고 바흐의 음악을 다 이해하는 것은 아니니까요.
사실은 저도 바흐의 음악이라곤 이 두 곡이랑 토카타와 푸가 뿐이랍니다.^^;;
바흐의 음악이 위대한 것은 일정한 규칙으로 흐르는 멜로디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맥거핀님의 글을 읽고 나니 바흐의 음악을 듣고 싶은데 , , ,
스피커가 먹통이네요-_- 그래도 멋진 글 덕분에 잊혀지고 있었던 바흐를
떠올릴 수 있는 기회가 되었습니다.


맥거핀 2010-10-25 23:26   좋아요 0 | URL
몇군데 안하는 영화예요. 안 그래도 곧 내려갈 것 같기도 하고, 생각보다는 평들이 많이 갈리더라구요. 상당수의 분들이 <아마데우스> 같은 어떤 드라마틱한 이야기(?)를 기대하셨던 것 같은데, 그런 류의 영화는 아닙니다.^^
저도 바흐 음악은 잘 모르구요. 몇 개 들어본 음악들이 있지만, 아직도 음악과 제목들을 헷갈리고 있습니다. 바흐하면 저도 왠지 엄정한 이미지가 연상되기도 하는데, 이 영화를 보고서는 바흐의 핵심은 '균형과 대칭'이 아닐까 생각했습니다. (위의 이미지 처럼요.) 좋은 말씀 감사합니다.
 
월 스트리트 : 머니 네버 슬립스 - Wall Street: Money Never Sleep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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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간의 스포 있음)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고, 20여년 전의 영화 <월 스트리트>는 <월 스트리트:머니 네버 슬립스>가 되어 돌아왔다. 그리고 예전의 악당 고든 게코(마이클 더글라스) 역시 돌아왔다. 그는 달라져 있을까. 일견 보아서는 조금은 달라진 것 같기도 하다. 그는 자신의 경험을 담은 강연을 하며, 탐욕에 대해 경고하고, 앞으로 탐욕이 낳은 버블 경제가 무너질 것을 예견한다. 그리고 곧 이어 최대의 투자은행은 무너지고, 올리버 스톤 감독은 조금은 유치하게 아이들의 비누방울과 극적으로 떨어지는 주가 그래프를 오버랩시킨다. 그렇다면 그들의 앞날에는 투자은행의 대표 루이스 제이블이 그랬던 것처럼, 지하철에서 자신의 몸을 던지는 길 밖에는 남지 않은 것일까. 아니, 그것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역으로 고든 게코 속에 그 답이 있다.

무너지는 투자 은행과 그로 인한 세계 경제의 침체. 그것은 우리 모두가 겪었던 일들이다. 리만 브러더스 사의 파산으로 촉발된 미국발 경제 광풍은 곧 전세계를 집어 삼켰고, 그것은 이 작은 땅까지 지독한 칼바람이 되어 몰아닥쳤다. 위기는 여전히 지속되고 있고, 많이 회복되었다고는 하지만, 일말의 불안감은 조용히 모두를 감싸고 있다. 이 영화는 그런 일련의 과정들을 몇 가지의 익숙한 컷으로 보여준다. 급격히 떨어지는 꺾은선 그래프와 소리를 지르는 증권맨들의 모습과 심각하게 머리를 부여 잡은 투자자들의 모습을 통해서 말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영화는 다른 것을 보여준다. 그리고 묻는다. 실제로 그 위기는 어떤 방식으로 전가되는가. 그 경제 위기 속에서 진짜로 고통받는 사람들은 누구인가 하고 말이다.

위기가 닥치자 월 스트리트를 이끌어 가는 사람들은 한 자리에 모인다. 그들은 모두들 심각한 표정으로 위기를 타개할 해결책을 모색하지만, 사실 이것은 진지한 위기 타개를 위한 것이라기 보다는 일종의 게임에 가깝다. 왜냐하면 그들은 보호받고 있기 때문이다. '공적자금'이라는 전가의 보도가 그들을 그렇게 만들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그것이 자신의 돈이 아니기 때문이다. 그들이 '회사의 직원들과 투자한 선량한 수많은 시민들이 길거리에 나앉는 사태를 막기 위해서' 라는 진지한 위선을 얼굴에 깔 수 있는 이유는, 최종적으로 엄청난 타격을 받는 것은 자신들이 아니기 때문이다. 게임을 하는 사람들은 캐릭터가 죽으면 순간 실망하기는 하지만, 근본적인 충격은 받지 않는다. 실망스럽지만, 그저 다시 새 캐릭터를 만들면 그 뿐이다. 올리버 스톤은 그것을 마지막 인상적인 숏으로 보여준다. 세계 경제가 위기에 빠지고, 그 때마다 회의장에서 심각하게 대책을 논의하는 것처럼 보였던 월 스트리트의 원로는 콧노래를 부르며 마지막에 고든 게코와 손을 잡는다. 그는 지금껏 수차례 그러한 자신만의 방식으로 위기를 '타개'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타개책 덕분에 수많은 개미투자자들은 이중의 고통을 부여받았을 것이다.

영화의 중간, 한 아주머니가 게코에게 '모랄 해저드'의 뜻을 묻자, 게코는 '그것은 누가 아주머니의 돈을 가져가서 쓴 다음,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이라고 대답한다. 그것에 가까운 진실이 있다. '모랄 해저드'는 영화 속에 나온대로, 무너진 투자은행에 공적자금을 무리하게 투입하는 것이 아니라, '아무도 책임지지 않는 것' 그 자체에 있다. 그러므로 월 스트리트의 그들은 모두들 고통에 신음하는 그 순간에도 최고급 양복을 차려입고, 최고급 자가용을 타고, 자선파티에 가서 최고급 와인을 마시며, 비싼 바이크를 타는 취미를 즐길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은 그들의 문제가 아니다. 최악의 경우라도, 그저 게코처럼 몇 년 살짝 살다가 나오면 된다. 그리고는 게코처럼 비싼 저택을 '비록 전세나마' 살면서, 자신의 경험을 책으로 써내면 그뿐이다. 그리고는 강연회를 돌면서 다음의 세 마디를 선전하면 된다. "내, 책을, 사세요!" 그리고 그와 동시에 수많은 개미 투자자들은 무너져 내린다. 뜻조차 모르는 '모랄 해저드' 때문에. 그러므로 '머니 네버 슬립스'라는 이 제목은 왠지 중의적으로 읽히는 부분이 있다. 돈은 돌고 돌아 절대 잠들지 않지만, 절대 잠들지 않는 것은 돈 뿐만이 아니다. 그들 역시 절대 잠들지 않는다. 월 스트리트 불패 신화! 여의도 불패 신화! 그것은 영원히 이어진다. 잠드는 것은 그들에게 돈을 맡긴 다른 사람들이다.

이 영화의 결말은 온건하나, 너무 급작스럽기 때문에 도리어 냉소적으로 보이는 측면도 있다. 올리버 스톤은 아예 그곳에서 벗어나는 것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는 것이라고 말하고 싶은 것일까. 부동산 투기로 먹고 사는 제이콥(샤이어 라보프)의 어머니(수잔 서랜든의 깜짝 등장)마저 굳이 병원으로 돌려보낸 것을 보면, '모랄 해저드'에 빠지지 않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욕망의 구렁텅이에서 걸어나와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어찌되었던 간에, 모든 이의 욕망이 이 월 스트리트를 혹은 여의도를 만들어내는 것임은 부인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물론 미국의 월 스트리트 뿐만이 아니라, 모든 곳의 비슷한 월 스트리트들이 공통적이다. 그리고 그 곳들은 또한 비슷한 한 가지의 속성을 공유한다. 그것은 그것 자신들이 어떤 모호한 베일 속에 싸여 있다는 사실이다. 이 영화 역시 그 모호한 베일을 살짝 들추어보려고 나름 애쓰지만, 그것은 여전히 흐릿하다. 악성 채권이니, 공매도니 하는 말들을 완전히 이해하여 우리가 그 외부의 곁껍질을 살짝 까고 들어가도, 그 내부 깊숙한 곳은 회의실의 검은 벽들로 여전히 둘러쌓여 있다. 우리는 그 내부의 회의실에서 어떤 일이 일어나는지 영원히 알 수 없다. 그래서 그들은 그 곳에서 의미있는 눈짓을 주고받고는 자선 파티 장으로 달려간다. 그리고 그 나머지 사람들은 파산의 구렁텅이로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끌려들어간다. 그러므로 그 게임에 참여한 모든 이들에게 '자신의 욕망을 제어하지 못하고 게이머들에게 자신의 게임칩을 맡긴 너희들은 그렇게 당해도 할 말이 없어'라고 감히 말할 수 있을까 라는 의문이 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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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자체만 놓고 보아서는 좋은 점수를 주기는 힘들 것 같다. 주식 시장에 일시에 퍼지는 괴소문이 어떤 식으로 작동하는가 등등을 보여주는 몇 개의 장면들은 흥미로운 구석이 있지만, 몇 개의 장면들은 우리가 수많은 뉴스 클립에서 보아왔던 익숙한 클리셰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한다. 그리고 전체 내용 역시 그동안 경제에 조금이라도 관심을 두어왔던 사람들이라면 익히 아는 내용들을 그대로 반복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그와 반대로 경제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사람들라면 영화가 딱딱하고 어렵게 느껴질 것 같기도 하다. 설명이 필요한 부분들이 보이는데, 아예 아무런 설명이 없거나, 전체 이야기에서 조금은 동떨어진 맥락으로 보이는 부분들이 있다. 사건의 흐름을 너무 설명식으로 나열하는 것 보다는 조금은 영화적인 구성들이 필요다고 느껴지는 부분들도 있다. 어찌되었거나 이것은 대중 영화이기 때문이다. 경제 위기의 흐름을 설명조로 보여주는 다큐물이 아니라 말이다. 돈은 절대 잠들지 않을지 몰라도, 관객은 잠들 수도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에는 좋은 인상을 받지 못했다. 이 결말은 충분히 예상할 수 있는 것이기도 하고, 다시 온건하지만 지겨운 할리우드 식이라는 인상을 준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그 결말이 영화의 무엇을 해결해주는가.) <7월 4일생>이나 <플래툰>, 혹은 <유 턴>에서 보여줬던 그 반항기나 똘끼는 다 어디로 사라졌을까. 올리버 스톤 감독도 나이가 드니 달라진 것일까. 기껏 마지막에 던진 승부수를 감독 스스로 포기함으로써 그저그런 대중영화에 스스로 머물고 마니 안타깝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이 마지막을 예전의 올리버 스톤 식대로 해석할 수도 있지만 말이다.  언젠가 그 아이도 자라서 경제 주체가 되고, 다시 비슷하게 모든 것들은 반복될 것이다. 세계 경제가 늘 그래왔듯이 말이다. 돈은 잠들지 않고, 비슷한 게코들은 다시 돌아온다. 게코의 강의를 들으며 공감을 표시하는 학생들과 게코의 책에 싸인을 받는 사람들은 그것을 상징적으로 보여준다. 그것을 또한 마지막의 버블들은 말하고 있다. 버블은 부풀어오르다가 언젠가는 터질 것이고, 터질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버블에 바람을 불어넣을 것이다. 우리는 우리 스스로의 욕망을 제어할 수 없음을 모두가 알고 있기 때문이다.


* 전편의 버드 폭스(찰리 쉰)와 찰리 쉰의 아버지 마틴 쉰 등이 깜짝 출연하는 것은 나름의 볼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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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10-20 2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리뷰를 쓰면서 별 세 개는 안 주기로 결심했더니 별 줄 때마다 아주 애매하네..별점 척도를 10개로 늘려주셈!!
 

문학동네 이벤트. 꼭 '문학동네' 책들이어야 한다는 법은 없지만, 그간 보관함에 넣어두었던 '문학동네'의 책들을 몇 권 꺼내 본다. 마침 가격도 딱 맞고.  

구경꾼들 / 윤성희 / \ 9,000

꽤 오랫동안 윤성희의 글들을 좋아해 왔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글들을 좋아해 왔다기 보다는, 그가 그려내는 세계들을 좋아해 왔다는 말이 맞을 것 같다. 윤성희가 그려내는 세계들은 대체로 어딘지 모르게 비현실적이다. 뭔가 나사가 몇 개 빠져버린,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세계. 그러나 그 세계들은 기묘하게 따듯하다. 뭔가 들어맞지 않는 것 같지만, 그 들어맞지 않는 것들이 그 안의 사람들을 따스하게 감싸고 있다. 1인칭 시점의 짤막한 문장들로 이루어진 그녀의 단편들은 묘한 비현실성을 강조하는 데 한몫을 하지만, 동시에 그 수많은 '나'들은 낯선 자와의 연대를 통해 꽤나 단단한 나름의 세계를 구축한다. 그런 그녀의 첫 장편.  

순교자 / 김은국 / \ 9,900

한국전쟁과 기독교. 그리고 거기에 신앙과 양심과 실존의 문제가 버무려진다. 한국 기독교의 역사는 흥미로운 부분들이 너무도 많다. 거기에는 아주 고귀한 것이 들어가 있는 반면, 아주 추악하고 감추고 싶은 것들도 들어가 있다. 이 책이 그런 문제들을 정면으로 파헤치고 있을 것 같지는 않지만, 한국전쟁과 기독교라는 이 2가지의 조합만으로도, 복잡하고도 처절한, 그리고 묵직한 이야기들이 흘러나올 것 같다. 더불어 김은국 작가의 개인적인 이력이 여기에 흥미를 더한다. 꼭 20주 연속 베스트셀러, 그런 것이 아니더라도.  

에브리맨 / 필립 로스 / \ 8,550

필립 로스라는 작가에 대해서는 잘 알고 있지 못하지만, 이 책에 대한 몇몇 찬사들을 들었다. 삶과 죽음,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한 이야기. 글쎄. 이것만 놓고 보아서는 왜 이 이야기가 특별한지 가늠하기가 어렵다. 그리고 늙어간다는 것이 무엇인가에 대해 생각하기에도 아직은 이르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아무튼 당연하게도 우리는 누구나 죽음을 언젠가는 마주하여야 하며, 대부분은 늙어감이라는 것을 언젠가는 고찰해 보아야만 한다. 원하든 원하지 않든 간에 말이다.   

문학동네 64호- 2010. 가을 / \ 13,500 

원래 서점에서 하루키의 인터뷰만 살짝 볼 생각이었는데, 곧 포기했다. 이 하루키의 인터뷰는 길이도 너무 길 뿐더러, 왠지 조용한 공원에서 읽고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물론 이것은 전적으로 <1Q84> 때문이다. 대학 시절에 읽었던 하루키와 지금의 하루키는 어딘가 모르게 달라져 있었다. 그것은 어떤 묵직함이랄까. 예를 들어, 예전의 하루키가 80%의 농담과 20%의 진지함으로 이질적으로 구성되어 있었다면, 지금은 40%의 농담과 60%의 진지함이랄까. (그래도 그가 여전히 세계를 일종의 반농담으로 보고 있다는 사실만큼은 유효한 것 같다.) 그가 문학을 보는 시선들 역시 무언가 달라져 있을까.  

숨그네 / 헤르타 뮐러 / \ 10,800

지하철 통근 시간에 읽은 헤르타 뮐러 노벨문학상 수상 연설문은 숨을 멎게 했다. 그것은 지하철 안의 숨막히는 공기와는 다른 뭔가 이질적인 종류의 것이었다. 그것은 동시에 그 지하철의 살풍경한 이미지와는 뭔가 아주 극과 극에 있는 것이면서도, 동시에 어딘가모르게 맞닿아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그동안 들어봤던 어떤 이야기보다 아름다운 이야기이기도 했다. 그것은 아름다운 이야기이고, 아름다운 문장들이었다. 그런 헤르타 뮐러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   

 

총액 \ 51,75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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