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쪽으로 튀어! - South Bound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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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 이상으로 말랑말랑해진 우에하라 이치로, 그래도 남쪽은 아름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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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씨네21> 지난 763호 '정성일, 허문영의 씨네산책'에서는 평론가들끼리의 대화를 담고 있다. 한국의 영화 비평의 최일선에 서 있고, 또 가장 대중적인 평론가라고 말할 수 있는 김영진, 김혜리, 이동진 평론가들과의 대화. 거기에 정성일 평론가의 말 중에 인상적인 대목이 있다. "지금도 저에게 영화비평이란 결국 영화를 본다, 는 문제입니다. 해석이 아니라 말 그대로 본다는 문제.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


한국 영화비평에 있어서 일종의 상징적인 존재가 그런 말을 할 때에 그것을 어떻게 생각하면 좋을까. 내가 본 것을 쓸 것, 내가 만들어낸 착란상태에 빠지지 말 것이라는 말을 어떻게 이해하면 좋을까. 몇 가지의 갈래로 나누어 생각해야 함을 느낀다. 먼저 비평이라는 것. 즉 단순한 리뷰나 외부를 돌면서 말하는 것과 비평과의 어떤 차이. 비평에 대한 정의를 여러 각도에서 할 수 있겠지만, 눈에 가까이 띄는 것부터 가져와 보자. 진중권은 <서양미술사>에서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근대적 의미의 '비평'이 되려면, 그것은 문학적 텍스트의 형태를 취해야 한다. 예술에 대한 언급을 텍스트로 옮겨놓았다고 저절로 비평이 되는 것도 아니다. 비평문 안에는 반드시, 첫째, 작품의 특성에 대한 기술, 둘째, 작품에 관련된 역사와 이론의 제시, 셋째, 작품의 예술적 수준에 대한 판단이 들어가야 한다. 이 세 가지가 빠진 글은 비평이라고 할 수 없다. (p.273)"

이를 영화라는 것으로 그대로 가져와 생각해 본다면, 영화비평의 필수적인 요소 중의 하나는 이 영화의 예술적 수준이 어떤지, 즉 예술적으로 보았을 때 왜 다른 작품들보다 뛰어난지, 혹은 뒤떨어지는 지를 밝히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아마도 다른 보통의 리뷰나 영화 외곽을 둘러싼 글들과 갈라지는 부분일 것이다. 보통의 영화 리뷰에서는 이 영화가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를 밝힐 필요는 없다. 즉 영화 리뷰는 우열의 문제라기 보다는 취향의 문제에 가깝다. 예를 들어 그것에는 그저 나는 <인셉션>이 이러이러한 면에서 좋다라고 밝히는 것이 중요하지, <인셉션>이 왜 다른 영화들보다 뛰어난지 악다구니를 쓸 이유는 없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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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셉션> 이야기가 나왔으니 하는 말인데, 개인적으로 <인셉션>은 흥미를 주는 요소들이 있으나, 그렇게 매혹적이지는 못한 영화였다. 영화평론가 듀나 씨가 그런 말을 했던 것으로 기억하는데, 인셉션은 여러 많은 규칙들을 가지고 있고, 그 규칙들을 영화 속에서 철저하게 지켜나가기 때문에 성공할 수 있었던 영화다. 즉 일부의 영화들은 어떤 규칙을 애써 세워놓고는, 그 규칙들을 나중에 스스로 무너뜨리는 것으로 관객들의 기대를 저버린다. 즉 과잉이 되거나, 혹은 함량 미달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러나 영화의 감독 크리스토퍼 놀란은 몇 가지의 규칙들을 구축하고는, 그 규칙들을 스스로 철저하게 지키는 것으로 관객의 기대에 부응했다. 다만, 그것을 말할 수는 있다. 놀란 감독은 그 규칙들 모두를 친절한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공개하지 않았다. 몇 개의 규칙들은 영화 속에서 급박하게 지나가며, 또 몇 개의 규칙들은 쉽게 제시되지 않고, 복잡한 내러티브 속에서 슬그머니 제시되며, 또한 일부만 보여지기도 한다. 마치 이는 감독의 전작 <메멘토>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그 영화도 역시 어떤 정확한 규칙이 지배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규칙은 예상보다 간단한 것이었다. 아니 정확히 말해서 그 규칙은 너무나도 쉽게 관객들이 파악할 수 있는 것이었다. 그래서 놀란 감독은 여기에 어떤 트릭을 건다. 즉 이야기를 거꾸로 뒤집어 버리는 트릭. 그 트릭은 성공했고, <메멘토>는 일종의 전설이 되었다. 그리고 이 영화 <인셉션>에도 그런 몇 개의 트릭들이 존재하며, 그 트릭들은 관객을 지속적으로 현혹시킨다.

그것이 아마도 영화 외부에서 영화의 스토리에 대한 이야기들이 끊임없이 흘러나오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의 세계가 정확하게 구성되어 있지 않다면, 그렇게 영화의 이야기, 혹은 규칙들을 논리적으로 연결하려는 시도들이 행해질 이유는 없을 것이다. 영화를 둘러싼 많은 '완벽 분석'의 시도들이 그 영화가 얼마나 논리적으로 구축된 세계인지를 증명해준다. 그러나 그 세계는 아마도 영원히 '완벽 분석'될 수는 없을 것이다. 놀란 감독은 트릭으로 그것을 방어하고 있으니까 말이다. 아니, 나는 관객들이 트릭에 속아넘어가서 멍청하다거나 하는 이야기를 하는 것은 아니다. 다만, 그 트릭의 승자는 언제까지나 설계자인 놀란 감독일 것이라는 말이다. 그리고 그저 (나 자신의 개인적인 취향으로) 그런 세계에는 그다지 크게 관심이 없다. 정확히 만들어진 세계를, 몇 가지 불충분한 정보만을 가지고, 그 세계를 탐험해 나가야 하는 것 말이다. 그보다는 다른 세계가 더욱 관심이 많다. 예를 들어 박찬욱의 세계. 잘 짜여졌다고 보기는 어렵고, 여러 갈래로 뻗어나갈 수 있는 어떤 뭉툭한 원형질의 세계. 그러나 그 속에 많은 아름다움과 비참함과 안타까움과 괴기스러움과 기묘한 열락을 가지고 있는 세계. 그것을 다른 말로 하자면, 나는 영화를 보는 내내 불충분하고 혼란스러운 정보들 사이에서 영화의 흐름을 이해하기 위해 급급해야 하는 영화는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영화가 마친 후 남는 것은 그저 어떤 이야기 그 자체 밖에 없으니까 말이다. 감독이 만들어낸 잘 짜인 그 이야기 속에 내가 스며들 틈이 없으니까 말이다. 그보다는 그저 영화 중에는 아무 생각없이 멍하니 바라볼 수 있는 마술적인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영화가 끝난 후에는 생각과 감정을 천갈래, 만갈래로 흩어놓는 영화들이 좋다. 물론 이것은 그저 개인적인 취향.

개인적으로는 사실 그 스토리 자체보다는 그 이야기의 외곽에 존재하고 있는 몇몇 의문들이 더욱 관심이 간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질문들. '인셉션'은 가능한가. 영화 속 아서(조셉 고든 래빗)는 '인셉션'이 불가능하다고 이야기한다. 그는 다음과 같은 흥미로운 비유를 든다. 코끼리를 연상하지 말라고 하면, 무엇이 연상되지요? 그러나 이 질문은 영화 속에서 충분히 대답되지 않았다. 그저 코브(레오나르도 디카프리오)의 불충분한 반박으로만 이어질 뿐이다. 글쎄. 나도 아서와 같은 의문이 든다. 타인의 꿈 속으로 들어가 어떤 생각을 심는 것이 가능한가. 그것은 도리어 어떤 반대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가능하다고 해도, 그것이 실제적인 어떤 다음의 행동으로 연결되는가. 예를 들어 꿈 속에서 냉면을 먹는 꿈을 꾸었다고 해서, 그것이 다음날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할까. 즉 꿈은 그의 의지와 어떻게 연결되는가. 그래서 사실 영화 <인셉션>의 가장 허술해(이상해) 보이는 부분은 그 인셉션의 내용이다. 즉 너무나도 직접적인 인셉션. 다른 말로 하자면, 그에게 냉면을 먹게 하기 위해서는 그의 꿈 속에는 냉면 그릇을 앞에 두고 못 먹게 만드는 것이 더욱 효과를 가질 것이다라는 일종의 역설이 반영되지 않은 그 인셉션. 이것은 아마도 최면이나 암시의 메커니즘과도 연관되는 부분일 것이다. 그러나 사실 솔직히 최면이나 암시를 믿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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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아무튼 간에 이 이야기는 (내게는) 매혹적이지는 않지만, 흥미로운 요소를 많이 담고 있는 것은 사실이다. 이 이야기는 심리학, 철학, 문학, 인류학, 신화, 뇌과학 그리고 물리학과 수학까지도 연결지어서 생각할 수 있는 부분들이 있고, 그래서 많은 사람들은 아마도 이 영화를 다양한 각도로 해석해보려고 할 것이고, 그것을 통해서 뭔가를 이해하려고 들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그 중의 몇몇은 정성일 평론가의 말대로 조금씩 착란상태에 빠져들어갈지도 모른다. 영화는 보이지 않고, 해석만 보이는, 그래서 자신의 해석에 조금씩 도취되는 일종의 정신착란. 그리고 정신착란의 제1의 요소는 '자신'만을 생각하는 것이다. 주위의 모든 것이 왜곡되어 보이고, 주위의 모든 것이 자신을 공격하는 듯이 느껴지는, 오로지 자신만이 그 안에서 존재하는 일그러진 세계. 그리고 영화 리뷰에 있어서도 일종의 비슷한 현상들이 일어난다. 오로지 자신의 의견만을 옳다고 주장하는 것. 그리고 여전히 별점과 몇몇 담론이라는 무기를 들고 싸우는 지독한 찬반의 세계.

물론 정성일 평론가가 이야기하는 착란상태는 이것과는 약간 거리가 있다. 왜냐하면 평론가는 계속 싸워야 하기 때문이다. 자신이 옳다고 믿는 영화들에 대해서 말이다. 그리고 과감히 찬반의 입장에 서야 한다. 그는 아마도 그보다는 보는 것에 집중하지 않고, 자꾸 그것을 해석하려고만 드는 일종의 경향을 말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다. 그것은 일종의 경향이다. 영화 외부를 둘러싼 담론들을 자꾸 영화 안으로 가지고 들어와 그것을 해석하려는 태도. 많은 담론들이 영화를 풍성하게 만드는 자양분이 되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를 찔러 죽이는 일종의 칼이 되는 그런 경향들. 어떤 영화들이건 간에 어떤 담론에 완전히 들어맞는 영화란 없다. 아니, 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때는 아마도 물어야할 것이다. 그것을 어떤 '영화'라고 부를 수 있는지 없는지. 어떤 영화들이건 담론에 넓고 느슨하게 걸쳐져 있고, 조금씩 그 담론들과 거리를 두고 있다. 그래서 어떤 담론을 너무 광범위하고 무리하게 어떤 영화에 적용하려 할 때에 그 영화는 조금씩 평론가의 머리 속에서 정신착란의 길로 나아간다. 

즉 담론은 영화를 잡아먹지 말아야 한다. 그렇기 위해서는 영화는 영화 내부적인 것들로 이야기될 필요가 있다. 글쎄. 그것은 어떻게 가능할 수 있을까. 그것의 하나의 힌트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에 있다. 허문영 평론가의 글들은 몇몇 장점이 있다. 일단 가장 눈에 띄는 장점은 쉬운 글쓰기다. 그는 한 영화를 놓고 차분하게 앞뒤 주변을 세밀하게 관찰한다. 세세한 것 하나도 놓치지 않고, 상당히 조심스러운 태도로. 그러다가 그는 갑자기 한 지점으로 푹 찌르고 들어간다. 정성일 평론가가 이 책의 발문에서 말한 것처럼 '이상한 일이다'라는 문장을 통해서. 그리고는 우리가 미처 발견하지 못한, 혹은 발견하였더라도 지나쳤던 부분들을 다시 펼쳐내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어떤 현학적인 문장들을 통해서 이루어지지 않는다. 아주 조심스럽게 쉬운 말들로 조금씩 조금씩 이루어지기 때문에 관객들은 어떤 이물감을 느끼지 않는다. 그리고 어느 틈에 관객들은 조금은 색다른 지점에 도착해 있다. 그 색다른 지점에 그대로 머무를지, 아니면 다른 지점으로 넘어갈 것인지는 오로지 관객의 선택의 몫이다.

그것들이 어렵지 않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또 있다. 그는 거의 대부분 영화의 내부에 머물러 있도록 노력한다. 즉 어떤 외부의 담론이나 방대한 지식에 의존하지 않는다. 그는 영화에서 제기된 질문을 영화 내부의 다른 부분들에서 답을 구하려고 노력한다. 즉 이것은 일종의 영화의 정합성을 찾는 과정이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통해 몇몇 그 정합성이 떨어지는 영화들은 그의 어떤 의문들을 통해 뒷자리로 밀려나게 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어떤 담론에 비추어 보았을 때만이 보이는 그 영화에 대한 문제들을 보여주는 것이 아니라, 그 영화의 흐름에 비추어 보았을 때 내부의 어떤 것들이 있어야 할 자리에 존재하지 않거나, 너무 지나치게 많이 존재하고 있을 때 그는 그 영화에 어떤 의문을 제기한다. 즉 그와 함께 영화를 보는 관객들은 그 영화를 이해하기 위해서 어떤 다른 담론들을 같이 공부할 필요가 없다. 오로지 그와 함께 같이 스크린을 들여다보면 된다. 단, 아주 주의깊게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할 일은 오직 한 가지이다. 그것은 그 영화를 보는 것이다. 영화를 이야기하는 좋은 글들은 영화와 분리되어서도 그 나름의 어떤 문학적인, 또는 예술적인 가치를 가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단 적당한 착란도를 유지하는 경우에 한해서 말이다. 그러나 영화평론가의 글은 아마도 그와는 약간 다를 것이라고 생각한다. 영화평론가의 좋은 글들은 영화 그 자체와 분리될 수 없다. 그것은 오로지 다시 그 영화를 보는 행위로 환원된다. 다른 말로 하자면, 평론가의 입장에서 어떤 목적 중의 하나는 '그 글을 읽는 사람들에게 좋은 영화를 보게 만드는 것'이다. 그 영화를 보지 않았다면, 보게 만들고, 보았다면, 다시 보게 만든다. 평론가가 의도하였건, 의도하지 않았건 간에 말이다. 그것을 이 책에 실린 수십개의 한국영화, 그리고 외국영화 평론들이 증명한다. 이 책에 실린 여러 영화들이 보고 싶어졌다. 그리고 다시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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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에 읽은 허문영 평론가의 책 <세속적 영화, 세속적 비평>의 리뷰를 쓰려고 글을 시작했는데, 쓰다보니 뭔가 책에 대한 얘기보다는 다른 얘기들을 해버리고 말았다. 이것도 리뷰라 할 수 있을까. 글쎄. 잘 모르겠다. 그러나 그것에 대해서 자세히 생각해 볼 틈이 없다. 난데없이 정성일 평론가의 두 권의 비평집이 도래했기 때문이다. 알라딘에서 난데없이 받은 적립금을 유용하게 사용할 수 있을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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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11 11: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1 17:2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11 20:26   URL
비밀 댓글입니다.
 
이끼
영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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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리뷰는 영화의 중요 내용과 원작 웹툰의 중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끼>는 재미있는 스릴러다. 그러나 다만 영화를 보고 나오면서 몇몇 석연치 않은 장면들이 영화에 좋은 점수를 주는 것을 망설이게 만들었다. 그것은 예를 들어 몇몇 사소한 장면들에서도 그렇고, 인물들간의 관계나 캐릭터들의 모습도 그렇다. 먼저 몇 가지 사소한 장면들. 전석만(김상호)은 왜 갑자기 유해국(박해일)을 습격하는가. 그리고 그는 그날 유해국이 찾아올 것을 어떻게 미리 알고 있었을까. 하성규(김준배)는 죽어가면서 왜 그렇게 벽에 걸려있는 사진들에 집착하는가. 자신의 목숨을 버려가면서 말이다. 그리고, 유해국은 왜 맨 처음에 이영지(유선)를 의심하지 않았을까. 박해일 정도의 캐릭터라면, 이영지에게 전화를 받았다는 그 사실부터 충분히 의심해보아야만 했다. 물론 결과론적인 얘기가 될 테지만 말이다.


그러나, 사실 사소한 장면들보다는 조금은 더 의심스러워 보이는 것은 캐릭터의 어떤 일관성이나, 그로 야기되는 인물들간의 관계의 문제이다. 예를 들어, 이 유해국이라는 캐릭터. 그의 전사(前事)는 영화 속에 매우 짤막하게 처리되며, 그와 박민욱 검사(유준상)와의 사이에 구체적으로 어떠한 일이 있었는지 관객은 알 수 없다. 다만, 어떤 뉘앙스로만 짐작할 뿐인데, 이것만을 놓고보면, 사실 이야기의 중심 흐름은 약간은 의아하게 보인다. 예를 들어 다음과 같은 것들. 유해국은 왜 그렇게 아버지의 죽음을 의심스러워 하는 것일까. 그리고 박민욱 검사는 왜 유해국을 그렇게까지 돕는가. 뭔가 아귀가 딱 맞아떨어지지 않는다는 느낌을 준다.

그리고 사실 어떻게 보면 이 영화 <이끼>는 이야기의 힘이 캐릭터를 끌고간다기 보다는, 캐릭터의 힘이 이야기를 끌고가는 구조이기 떄문에 캐릭터의 어떤 비일관성, 또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 모호함은 이야기의 흐름을 심하게 어지럽게 만든다. 그런 의미에서 사실 제일 이상하게 보이는 것은 유해국의 아버지 유목형(허준호)이다. 영화만을 놓고 보자면, 이 영화는 거의 유목형의 '실패의 기록'이다. 사실 결과론적으로 보았을 때, 유목형은 결국 아무도 교화시키지 못했기 때문이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사실 그다지 강해보이는 캐릭터는 아니다. 극 초반에 많은 사람들이 유목형에게 감화되지만, 그 감화의 이유마저도 사실 모호하다. 그리고 유목형은 결국 천용덕 이장(정재영), 전석만, 하성규, 김덕천(유해진) 그 누구도 교화시키지 못했다. 유목형은 영화 속에서 거의 '유약한 선인(善人)'으로만 보일 뿐이다. 따라서 그의 뒷방 늙은이 신세는 사실 거의 정해진 수순으로 보인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의문이 생긴다. 그는 도대체 무엇을 믿고, 천용덕과 같이 공동체를 이루려고 했던 것일까. 그리고 천용덕 이장에게 그는 과연 가치가 있었을까. 영지에게 유목형은 자신의 몸을 내어주면서까지 지켜낼(혹은 현혹될) 가치가 있었을까. 계속 이어지는 질문들, 그것에 대한 어떤 불충분한 해답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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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들이 기어코 원작을 보게 만들었다. 그리고 몇 가지 이유들을 어렴풋하게 알겠다. 그리고 어쩔 수 없이 동의를 해야만 할 것 같다. 강우석 감독이 이 좋은 원작에 무리한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 말이다. 물론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썼듯이 원작에 메스를 가져다댔다는 사실만으로, 감독을 비판할 수는 없다. 어떤 의미에서는, 영화화에서 원작에 대한 메스질은 필수불가결한 것이다. 그래서 사실 원작의 이야기와 다르다는 사실만으로, 뒤에 나온 이야기에 비판을 하는 것은 그리 온당치는 않아 보인다. 원칙적으로는 뒤에 나온 이야기는 어떤 새로운 창작을 거친 이야기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뒤의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 내부의 것만을 가지고 비판을 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그러나 이 강우석 감독의 <이끼>는 새로운 이야기를 하고 싶어하는 것 같으면서도, 원작의 어떤 부분들에 대한 미련을 버리지 못했다. 그래서 어떤 모호한 원형같은 것만이 이 영화에는 남아 있으며, 그 남아 있는 원형과 새로운 것들이 이질적으로 섞여 영화를 어지럽게 만든다. 그리고 원작과 이 영화를 그저 단순하게 두 개의 이야기로만 놓고 비교해보아도, 원작의 이야기에 손을 들어줄 여지는 충분히 많다. 

먼저 사소한 것들은 패스. 앞에서 제시한 사소한 의문들은 사실 원작을 보면, 거의 해소가 된다. 그래서 나머지 굵직한 것 몇 가지. 먼저 유해국과 박민욱 검사의 앞의 이야기들을 대폭 들어내 버린 것. 이것이 야기한 문제는, 뒤의 문제들과도 연관되지만, 이 두 캐릭터의 행동에 어떤 단순함만을 부여한다는 사실이다. 원작의 훌륭한 점 중의 하나는, 이 앞의 이야기가 계속 뒤의 이야기, 즉 유해국이 아버지 죽음의 미스테리를 캐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데에 어떤 힘의 원천을 부여한다는 것에 있다. 원작에 존재하는 이 앞의 이야기와 유해국의 어린 시절의 이야기들은 유해국의 계속된 행동에 어떤 개연성을 지속적으로 부여하며, 동시에 박민욱 검사의 캐릭터도 더욱 풍성하게 만든다. 그리고 종국에는 이 원작 웹툰의 주된 메시지에 강한 알레고리를 제공한다. 즉, 마을 사람들과 유해국은 종내에는 매우 비슷해진다는 점, 그리고 동시에 그것은 유목형을 강하게 연상하게 만든다는 점이다. 이렇게 놓고 보았을 때 박민욱 검사와 유해국의 관계는 느슨하게 천용덕 이장과 유목형의 관계를 다시 연상시키며, 따라서 박민욱 검사가 유해국과 연대하는 것을 이해하게 만드는 어떤 단초를 제공한다.

그러나 영화에서는  이 두 사람의 전사를 아예 들어내버렸기 때문에, 유해국은 마을에 들어와 쓸데없이 의심만 하고 사고만 일으키는 민폐 캐릭터이자 좌충우돌 돌진하는 활기찬 인물이 되어 버렸고, 박민욱 검사는 정의감에 불타오르는 멋진 캐릭터가 되어 버렸다. 아마도 박민욱 검사의 몇몇 씬들에서 감독의 전작을 떠올린 사람은 나뿐만은 아니었을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이 이 두 사람을 이렇게 만든 것에는 결정적인 이유가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마도 그 이유란 유목형이 원작과 달리 유약하지만, 너무 착해진 것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다시 원작과의 차이. 원작과 영화와 가장 달라지는 캐릭터라면 아마도 유목형을 말해야만 할 것이다. 유목형은 원작 웹툰에서는 영화와는 달리 상당히 강력해지고, 선악의 경계를 알 수 없는 인물로 묘사된다. 그리고 그렇게 되었을 때에 영화의 몇몇 설명되지 않은 점들이 이해된다. 예를 들어 다음의 구절. '눈은 눈으로, 손은 손으로, 발은 발로, 화상은 화상으로, 상처는 상처로, 멍은 멍으로' 유목형은 성경의 많은 구절에서도 하필이면 왜 그 구절을 선택한 것일까. 그리고, 유목형의 감화력. 웹툰에서 유목형의 감화력은 어떤 두려움과 연관된 것처럼 보인다. 사람들은 때로 속을 알 수 없는 미스테리한 대상이 두려움을 주면, 그 대상을 분석하여 이겨내려고 하기보다는, 그를 도리어 맹목적으로 믿어버리는 것으로 그 두려움을 없애려 한다. 이른바 <미스트>의 세계. 그리고 유목형의 칼질. 영화에서는 이것은 약간은 느닷없어 보이고, 도리어 유약한 자의 어떤 마지막 몸부림처럼 보이는 측면이 있다. 그러나 웹툰에서는  이는 충분히 설명이 된다. 유목형은 얼마든지 그럴 수 있는 사람이며, 이것은 어떤 의미에서는 천용덕 이장과의 헤게모니 싸움이었다. 

아무튼 이것으로 볼 때에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사실 명확해진다. 강우석 감독의 행위는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이는 것이다. 즉 관객들에게 선악과를 먹여, 관객들이 선한 인물과 악한 인물을 명확하게 가려내도록 한 것이다. 아마도 강우석 감독의 의도는 두 가지였던 것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서 관객들이 이 영화의 캐릭터를 더욱 잘 이해할 수 있도록 하는 것과 그렇게 함으로써 이 영화의 스릴러성을 더욱 강력하게 만드는 것. 아무래도 강력한 악이 있을 때에 스릴러는 더욱 강해지는 것일테니 말이다. 그러나 이것은 솔직히 강우석 감독의 오판으로 보인다. 그로 인해 원작의 눅진한 공기에서 오는 어떤 끈끈한 긴장감과 불길한 메시지에서 오는 묵직한 뒷맛은 사라져버렸기 때문이다. 원작의 가장 큰 긴장은 마지막에 찾아온다. 그것은 유해국을 다시 뒤집어 보았을 때에 생긴다. 유해국은 유목형의 모든 행위들을 다시 비슷하게 반복하였으며, 결국 천용덕 이장을 쓰러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어떤 상쾌한 승리가 아니다. 그것은 다시 독자들에게 어떤 불길한 뒷이야기들을 암시한다. 예를 들어 그것은 크로넨버그의 <이스턴 프라미스>를 연상시킨다. 니콜라이가 세미온의 그 자리에 앉아있는 것을 마지막으로 엔딩크레딧이 올라갈 때에 그 묵직하고도 불길한 끝맺음. 그러나 강우석은 유해국에게 상큼한 승리를 전달해주고는 느닷없이 이영지에게 그 마지막 자리를 맡긴다. 이 이탈이 가져다주는 어리둥절함.

그래서 어떤 의미에서는 이 이야기를 <이끼>라고 부르기가 망설여진다. 원작 웹툰에서는 그 제목 '이끼'의 의미를 여러가지로 생각할 수 있다. 이끼는 음지에서 자라고, 조금씩 조금씩 바위를 침식해들어가며, 종내에는 그 바위를 망가뜨린다. 그리고 이끼는 아무리 씻어내려고 해도 잘 씻겨내지지 않는다. 다 씻어 없어졌다고 생각하지만. 어느 틈에 다시 그 바위를 조금씩 침식한다. 그러나 우리는 이끼낀 바위와 그렇지 않은 바위를 쉽게 구분해내기는 힘들다. 아니, 이끼가 하나도 끼지 않은 바위가 있을까. 이끼는 항상 그 이면에, 보이지 않는 곳에 달라붙어 있기 때문이다.  그 이끼는 누구도, 심지어 바위 그 자신마저도 볼 수 없는 곳에 위치하여, 어느 틈에 그 자신을 파멸시킨다. 그러나 이는 영화 속에서는 박민욱 검사의 말을 통해 그 의미가 너무나도 간단하게 축소된다. 이끼처럼 달라붙어서 살라고, 하찮게. 그러나 이끼는 그렇게 하찮은 것이 아니다. 이끼는 어느 바위에나 존재하며, 결국 바위를 파괴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끼가 완전히 달라붙지 않게 할 수는 없지만, 이끼의 확산을 계속 주시할 필요가 있다.

원작 웹툰의 여러 팬들이 지적한 바대로, 이 이야기의 영화화를 강우석 감독이 맡았다는 것은 불행한 일이다. 그것은 원작의 팬들에게도 불행한 일이지만, 그 이야기 자체에도 불행한 일이다. 이 이야기는 여전히 많은 모호하면서도 동시에 매력있는 점들을 담고 있기 때문이다. 팬들의 지적대로(무리한 바람이겠지만), 이 이야기에 봉준호 감독이 메스를 들이댔으면 어떨까. 아마도 이 영화는 원작의 공기를 간직하면서도, 그 내면에 더욱 묵직하고도 눅진한 이야기들을 담아냈을 것이다. 강우석 감독의 실패한 수술. 수술실에 들어간 복잡한 인간 머피는 단순하고 명쾌한 로보캅이 되어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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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08-04 12:4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0-08-04 18: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지난 주 14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PiFan)에 다녀왔다. 그곳에서 본 2편의 영화에 대한 간단한 감상. 늘상 그렇듯이, 기대하고 본 영화는 기대감에 못 미치는 것 같고, 별 기대감 없이 본 영화는 꽤나 의외의 만족을 주는 것 같다. 어쩌면 이 '기대감'이라는 것이 문제인지도 모르겠다.



먼저 본 영화는 요시다 다이하치의 <퍼머넌트 노바라>. 묘한 마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이야기다. 남자가 존재하고 있지 않은 이상한 마을. 아니, 정확히 말하면 몇 명 있기는 한데, 모두들 그다지 멀쩡해 보이지는 않는다. 술 퍼마시고, 여자를 때리거나, 도박에 미쳐 살거나, 그도 아니라면, 전신주에 도끼질을 해댄다. 사실 여자들도 조금 이상하기는 마찬가지이다. 바람만 피우는 남편을 응징하는 마사코도 그렇고, 계속 얻어맞으면서도 여러 남자들을 계속 만나오는 토모도 어딘가 모르게 나사가 빠져 보인다. 유일하게 정상으로 보이는 것은 오로지 주인공 나오코뿐. 일본판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 사실 어떤 의미에서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따지고 보면) 제일 이상했던 것은 여왕도, 토끼도, 쌍둥이도 아닌, 앨리스라는 점에서.

이 영화의 장점은 도대체가 종잡을 수 없는 이 영화의 독특한 분위기이다. 영화의 내용으로만 보면, 거의 막장드라마에 가까운 이야기들이 연이어 일어나지만, 영화는 시종일관 코믹한 분위기에서 진행된다. 그리고 그것으로 모자라, 감독은 다시 숨겨진 이야기를 슬며시 드러내보이며, 영화에 또다른 색채를 덧씌운다. 묘한 분위기와 재치있는 대사들, 그리고 영화의 이야기를 예측할 수 없게 만드는 감독의 능숙한 연출력이 돋보이는 영화. 단점이라면, 그래서 과연 무엇을 이야기하고 싶은 것인지 조금은 모호하다는 것. (부천시청)



두 번째 본 영화는 도미닉 제임스 감독의 <다이>. 글쎄. 이 영화에 대해서는 그다지 좋은 소리를 해주기는 힘들다. 정신과 병동에서 깨어난 6명의 사람들이, 제정신이 아닌 범인에 맞서서 생사를 건 게임을 해야한다는 설정인데, 생각만큼 훌륭하지 못하다. 이런 류의 영화는 아마도 두 가지 중에 하나를 선택해야 할 것이다. 참신하거나, 혹은 (이야기의 만듦새가) 매끄럽거나. 그러나 아무 것도 모른채 낯선 곳에 갇히는 사람들이 어떤 범인 또는 보이지 않는 적과 목숨을 건 대결을 벌인다는 설정은 이미 <쏘우>, <큐브> 등의 영화에서 익히 보아왔던 내용인 데다가, 그것에 참신함을 부여해야 할 범인 캐릭터마저도 어딘지 모르게 뜨뜻미지근하다. 거기다가 이야기의 내용과 연결, 그리고 이야기를 끌어가는 방식에는 왜 그렇게 구멍이 많은지. 예를 들어, 주인공이 각 사람들에게 죽이는 방법을 차분하고 친절하게 설명해주는 대목에서는 계속 헛웃음이 난다. 왜냐하면, 그것을 관객에게 이해시키는 것이 중요하기 때문인데, 그것을 저런 방식의 지겨운 설명으로 밖에 처리할 수 없는지 의문이다.

그리고 한 가지 더 덧붙이자면, 이런 류의 영화에서는, 전달하고자 하는 메시지보다는, 게임 규칙의 치밀함이나 죽음의 스릴 강도가 더 중요한 문제라고는 해도(그래서 어쩌면 <쏘우>가 단지 그 죽음의 스케일만을 키우는 속편밖에 만들어내지 못하는 것은 필연적이라 해야할 것이다), 이 영화에서 내세우는 메시지는 쉬이 이해하기 힘들다. 예를 들어, 이 영화의 중심 이야기인 '죽음을 어떤 우연에 맡긴다'는 것. 글쎄. 완벽한 우연이란 어떻게 가능한 것인가에 대해 조금 더 생각해 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그 한가지로, 왜 주사위는 꼭 1부터 6까지의 숫자가 쓰인 것만을 사용해야 하지? 2부터 7이 쓰이면 안되는 건가? 아니, 차라리 12면체 주사위를 써보는 것은 어떨까?
 
즉 그 주사위를 '선택'했다는 그 아주 작은 한 가지의 사실도 '우연'이라는 것의 존재를 무너뜨린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우연'이라는 것은 무슨 의미를 가지는 것일까. 물론, 죽음의 이유보다는 죽음의 양상을 보여주는 것이 중요한 감독으로서야 그런 것은 아무래도 좋았겠지만 말이다. 그렇다면 아예 <쏘우>처럼 '그런 것쯤은 아무래도 좋아'라고 처음부터 선언하던가, 끝까지 그 '우연'에 대해 항변하는 건 뭥미? (프리머스 시네마 소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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맥거핀 2010-07-27 01: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관련 상품으로 두 영화를 넣으려고 했는데, <퍼머넌트 노바라>는 검색되지 않고, <다이>를 검색하니 무려 718개의 영화가 나와서 포기.
 
환상의 빛 - Maborosi
영화
평점 :
상영종료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영화 <환상의 빛>을 보았다. 감독의 데뷔작인 이 작품에서부터 그가 그리고자 하는 세계는 비교적 선명하게 드러난다. 그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야 하는 세계'다. 물론 이 세상의 모든 세계는 남은 자들이 살아가는 세계이다. 우리 인간들이란, 어쩔 수 없이 떠나간 사람들과 이별하여야 하며, 남은 자들이 되어 떠나간 사람을 추억하여 살아갈 수 밖에 없다. 물론 그 떠나감의 가장 대표적인 것은 죽음일 것이지만, 죽음만이 떠나감의 모든 것이라고 부를 수는 없을 것이다. 예를 들어 <아무도 모른다>의 어머니의 부재도 여기에 포함될 수 있을까. 아무튼, 그런 의미에서 어쩌면 영화란 '모든 남은 자들의 이야기'라고 불러도 될 것이다. 그러나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은, 그 영화들 중에서도 조금은 특별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그러한 특별한 위치의 일부분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영화들이 가진 어떤 특유의 세계관이 한 몫을 하는 것 처럼 보인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도 왠지 그것을 말해주는 것 같은 장면이 있다. 주인공 유미코는 결혼한지 얼마되지 않은 남편이 거의 자살과 같은 죽음으로 떠나간 이후 그 이유를 알지 못해 괴로워한다. 그 괴로움에는 한편으로는 단지 그 이유를 알지 못한다는 막연한 답답함도 있는 듯 하지만, 한편으로는 자신이 그를 죽음에서 구해내지 못했다는, 즉 그의 죽음을 막지 못했다는 일종의 죄책감도 있는 듯 하다. 물론 직접적으로 유미코는 남편의 죽음에 아무 책임이 없다. 그러나 가장 사랑했던 사람이 자신의 곁에서 생을 스스로 마감함을 선택했을 때, 대부분의 사람은 일종의 자책감을 느끼지 않을까. 그것은 한편으로는 유미코의 어린 시절의 기억과도 관련되어 있다. 집을 떠나는 할머니를 끝까지 막지 못했고, 할머니는 그 길로 어디론가로 영원히 사라져 버렸던 것. 유미코는 여전히 자책하고 있다. 내가 그 때 할머니를 필사적으로 막았다면, 무언가 달라지지 않았을까. 그리고 새로 가정을 이루어 살게 된 그 후의 어느날, 그가 죽던 날처럼 어디선가 자전거 방울 소리가 들리고, 옆집의 해녀 할머니는 궂은 날씨에도 물질을 하러 가겠다고 나선다. 그리고 날씨는 급격히 나빠지고, 할머니는 밤 늦도록 돌아오지 않는다. 그 할머니도 남편과 어린 시절의 할머니처럼, 자신이 막지 않아서, 자신이 어떤 식으로든 관계되어 있어서, 돌아오지 않는 것일까. 그러나 할머니는 거짓말처럼 살아 돌아오고, 남편은 장난스럽게 덧붙인다. 그 할머니, 불사신이라니까. 이 장면에는 묘한 감흥이 있다.

고레에다 감독은 마치 이렇게 말하고 있는 듯 하다. 어떤 일이 벌어지고, 어떤 사람들이 돌아오거나, 혹은 돌아오지 않거나 하는 것은 남은 사람들과 전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이다. 남은 사람들이 그것에 자책감을 느끼거나, 그것 때문에 남은 삶을 괴로워한다고 해도, 그것과 그 사람들이 떠나간 것은 거의 별개의 문제와 같다고 말이다. 예를 들어 유미코가 아무리 필사적으로 막았어도, 할머니는 기어코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고, 남편도 또 어디론가로 사라져 버렸을 것이다. 그리고 반대로, 유미코가 아무리 어떤 저주를 내렸어도, 그 할머니는 살아 돌아왔을 것이다. 그것은 어떤 기적이나, 미신이나, 노력의 부족이나, 불사신 같은 것이 아니다. 그저 삶이 그런 것이다. 삶은 그런 불가해한, 우리가 알 수 없는, 그리고 남은 사람들이 영향을 미칠 수 없는 많은 것들로 이루어지고 흘러가고 있다.
 
그리고 남은 사람들은 그 모든 아픈 기억에도 어쨌든 살아가야 한다. 남은 자들을 구원하는 하나의 방법은 그 기억을 떼어내는 것이다. 그러나 아픈 기억을 떼어내고 살아가는 방법은 없다. 유미코는 죽은 남편이 남긴 유물인 자전거 열쇠에서 방울만 떼어내려고 하지만, 그 방울만 떼어낼 수 있는 방법은 없다. 아마도 방울을 떼어내어도 그 자전거 열쇠에서는 방울 소리가 들릴 것이다. 그리고 삶이란 한편으로는 그렇기 때문에 숭고하다. 우리 남아 있는 사람들이 (떠나간 사람들을 따라 죽지 않고) 살아가는 것이 숭고한 이유 중의 하나는, 우리는 모두들 어떤 아픈 기억들을 가지고 있지만, 그 기억들을 품어 내고 어떻게든 살아내려고 하기 때문이다. 고레에다 감독의 이 영화의 후속작 <원더풀 라이프>에서와 같이, 기억이 모두 사라지고, 행복한 기억만이 남으면 남은 삶은 과연 행복할까. 혹여 행복할지는 몰라도, 아마도 그것은 숭고한 삶이 될 수는 없을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혹 우리가 원한다 해도 가능할 수 없을 것이다. 이 영화 <환상의 빛>에서 장터의 할머니는 유미코에게 넌지시 말한다. 남은 아들은 아주 어릴 때에 남편이 죽었기 때문에, 기억이 남아 있지 않아, 나을 거라고 말이다. 그러나 과연 그럴까. 그것을 기억하지 못해도, 아들은 아버지의 애초의 부재(不在)는 기억할 것이고, 언젠가는 어머니의 죽음도 기억하게 될 것이다. 즉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지 않는 것은 애초에 가능하지 않다.

유미코가 남편의 기억을 잊는 것도 불가능하고, 남편이 왜 죽었는지를 밝혀내는 것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녀는 남은 삶을 살아가야 한다. 그녀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을까. 어쩌면 새 남편이 내놓은 답이 그 하나의 길이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유미코가 괴로워하자, 남편은 유미코에게 말한다. 환상의 빛이 있다고. 죽은 사람들은 가끔 그 환상의 빛을 자기도 모르게 따라간다고 말이다. 어쩌면, 아마도 어쩌면, 그것에 답이 있을 것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것이 답인지 아닌지는 중요하지 않다. 그렇게 어떤 식으로든 답을 찾아내고, 그 떠나간 사람들의 기억을 가슴 속 어딘가에 담고, 남은 삶을 어떻게든 살아내는 것, 그것이 아마도 유미코가 할 수 있는, 해야만 하는,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그렇게 하고 있는 일일 것이다. 환상의 빛은 아마도 떠나간 사람들을 기억하는, 동시에 떠나간 사람들을 붙잡아 두지 않고, 떠나 보내는 하나의 길인 것처럼 느껴진다. (한편으로는 이것은 이러한 것을 생각해보게 한다. 우리 삶의 어떤 제의들은 떠나간(죽은) 자를 기억하기 위한 것이기도 하지만, 동시에 그를 어떻게든 우리 삶과 조금이라도 멀어지게 하려는 것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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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레에다 감독은 이 담담하지만, 그러나 아름다운 이야기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재주를 지닌 감독이다. 그는 롱테이크와 독특한 화면 구성을 통해, 이 이야기들이 관객의 마음 속에 조용히 미끄러져 들어오도록 한다. 그러나 이 화면 구성들은 단지 어떤 스크린의 아름다움을 위한 것만은 아니다. 예를 들어 빛이 쏟아지는 외부와 어두운 실내를 분리하고, 창이나 문을 통해 빛이 들어오도록 화면을 구성하고, 주인공을 어두운 실내에 위치시키는 것은, 이동진 평론가가 관객과의 대화 시간에 설명한 대로 고레에다 감독이 즐겨 사용하는 구도이기는 하지만,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갖혀 있는 주인공의 심정을 그대로 표상해주는 기능을 하기도 한다. 밝은 빛으로 나아가지 못하고, 어두움 속에 갇혀 있는 주인공은 관객의 마음마저도 괴롭고 불안하게 만든다. (그래서 개인적으로 가장 좋았던 장면은 아이들이 어두운 터널 안에 있다가 터널을 빠져나가 밝은 빛과 만나는 장면이었다.) 여기에 또한 한편으로 주인공들이 입고 있는 옷은 그들의 심리 상태를 의미하는 것처럼 느껴진다. 주인공 유미코는 처음에는 계속 어두운, 거의 검은색에 가까운 옷들만 입고 나오다가, 중간에 새 남편과의 안정을 통해 조금은 옷의 톤이 밝아지다가, 다시 괴로움에 빠진 후, 옷이 검어진다. 그리고 가장 괴로움을 느끼고 미친 듯이 따라가는 누군가의 장례식 장면에서 그녀의 옷의 괴기함은 절정에 이른다.

그리고 이 영화에는 고레에다 감독의 나중 작품들의 원형과 같은 장면, 캐릭터들이 등장한다. 예를 들어 이 영화에 등장하는 유미코의 친정 엄마는 왠지 <걸어도 걸어도>의 어머니를 연상시키기도 한다. 어머니들이란 사실 어찌나 그렇게 무섭고, 강인할 수 있는지. 사위의 죽음을 맞고도, 태연하게 딸의 곁에서 딸의 앞날을 이야기하는, 그 태평스럽고도, 무심하게 보이는 말투. 그것은 아주 복잡하게 느껴진다. 그 딸의 앞날을 걱정하는 그 소소한 솔직함과 따뜻함, 그러면서도 그것은 동시에 무섭고 강인하게 보이기도 하고, 또한 한편으로는 왠지 쉽게 갖출 수 없는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숭고함의 다른 형태일까. 아마도 그럴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유미코도 아마도 언젠가는 그렇게 살 수 있을 것이다. 어쩌면 유미코의 엄마도, 언젠가 그렇게 남편을 잃었는지도 모른다(유미코의 아버지는 처음부터 끝까지 등장하지 않는다). 아니 꼭 남편이 아니더라도, 수많은 세월을 거치면서 사람들을 하나하나 떠나 보내면서 그녀는 가슴 속에 아마도 굳은 살들을 조금씩 쌓기 시작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 모든 것들을 버텨내면서 사람들은 그렇게 살아가는 것이고, 그렇게 앞날로 조금씩 나아가는 것일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앞으로도 꽤나 오랜 시간을 그렇게 버텨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아마도 유미코도 그렇게 살아낼 것이다. 아니, 나는 그렇게 믿고 싶다. 영화의 마지막에는 밝은 빛이 비치고 있었으니까. 그것을 우리는 다른 이름의 '환상의 빛'이라고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환상의 빛은, 떠나간 사람들에게만 보이는 환각의 빛 뿐만이 아니라, 남아 있는 사람들이 그 모든 것을 안고, 어떻게든 그곳으로 나아가려고 애쓰는 그 곳에 있는 그 환상의 빛, 유미코가 앉아있던 어두운 방 바깥에 있던 그 환한 빛을 말하는 것이 아닐는지도 모르겠다.



* 시사회를 보게 해주신 시사회 주관 출판사와 알라딘 관계자 분들께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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