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장 강탈자 - 당신의 심장은 나의 것
딘 R. 쿤츠 지음, 김진석 옮김 / 제우미디어 / 2009년 8월
평점 :
절판


"본 도서는 Daum책과 TISTORY가 제공하는 서평단 리뷰 포스트입니다."



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스릴러 혹은 추리물적인 성격을 표방하고 있다. 그러나 사실 읽어보면 이러한 성격 규정이 딱 맞아떨어지지 않음을 알게 된다. 사실 일종의 스릴러나 추리물을 원하는 독자에게는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원하는 만큼의 만족감을 주지 않을 것 같다. 이해되지 않는 사건들이 벌어지기는 하지만, 그 강도는 낮으며, 어떤 명확한 적이나, 혹은 보이지 않는 적들이 주인공을 뒤쫓는 것도 아니다. 소설이 중반을 넘어갈 때까지 주인공 라이언 페리는 몇 번의 이상스런 심장발작을 겪기는 하지만, 그것이 전부다. 어떤 그를 도사린 음모나, 보이지 않는 적들이 존재한다고 보기에는 그 근거가 여러모로 미약하다. 대신 소설은 주인공 라이언 페리의 심리묘사에 상당부분을 할애하고 있다. 그리고 결국에는 그 조밀한 심리묘사가 나중에는 어느 정도 그 힘을 발휘한다.

사실 결국 소설을 다 읽고 책장을 덮고 나면, 약간은 맥이 빠지는 부분이 있다. 그 결말은 우리가 예상할 수 있는 범위를 넘어서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맥빠짐은 적어도 우리가 그 결말에만 주목할 때만 그렇다. 아마도 이 소설에서 그가 나중에 겪게 되는 일들은 부수적인 문제일 것이다. 그가 후에 겪게 될 여러 일들이 단지 그가 모르는 어떤 일들(혹은 그가 어쩌면 예상했음에도 애써 모르는 척 했던 어떠한 일들 때문일 수도 있지만 그 가능성은 제외하기로 하자) 때문에 벌어진 일들이라고 생각하기에는 조금 모자란 부분이 있다. 그러한 결말은 상당히 이해되지도 않거니와 상당한 부분에서 우스꽝스럽게 보이기조차도 하다.

아마도 그에 대한 해답은 소설 중에서 상당히 중요하게 제시되는 이 말 “폭력의 가장 근원적인 원뿌리(‘근원적인 원뿌리’? 이상한 번역이다)는 진실에 대한 증오다.” 속에 있을 것이다. 아마도 그가 나중에 당해야 했던 일들, 그리고 그가 행한 죄악들이 이 말 안에 있을 것이다. 그는 자수성가한 사업가다. 자신의 노력으로 자신이 부를 이루었다고 생각하고, 자신이 이 부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그는 어느 정도는 자신이 주위 사람들에 합리적으로(또는 ‘어떤 의미에서는’ 공정하게) 대한다고 생각하는 것 같다. 아무튼 그는 적어도 돈의 힘은 안다. 그리고 그것의 힘을 또 적절히 이용할 줄 안다. 그러나 그는 한편으로는 주위 사람들을 잘 믿지 못한다. 여자친구인 사만다를 매우 사랑하면서도, 자신에게 계속 심장발작이 일어나고, 점점 자신이 약해진다고 생각하자, 그녀를 의심하고, 그녀의 어머니나 주위 사람을 의심한다. 그리고 집안일을 해주는 싱 부부도 철저히 뒷조사를 하고 채용했음에도, 의심하기 시작한다.

아마도 그래서 초반에서 중반에 이르는 그 많은 이야기들이 필요했을 것이다. 이 이야기가 우스꽝스러워지지 않으려면, 주인공 라이언 페리가 어떠한 사람인가를 보여주는 것이 필수적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독자들에게 어느 정도 받아들여졌을 때에만 이 마지막은 어느 정도 의미가 있어 보인다. 그는 최후의 순간에 도달해서야, 즉 자신의 목숨이 경각에 달리고서야 진실을 이해하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 어떠한 의미인가를 이해하게 된다. 그가 이 마지막 순간에 이르지 않았다면, 그가 진실을 받아들였을까. 아마도 그는 또다른 변명으로 또다른 허구적인 세계를 만들어내려고 했을 것이다. 그 진실의 일부란, 이런 것이다. 그가 쌓아온 부가, 그가 사는 삶의 방식을 설명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리고 그가 살아나가는 세상에 그 자신만 존재하지는 않는다는 점, 그가 결국 보아야 하는 진실은 그가 구축한 세상의 바깥에 존재하고 있다는 점, 어쩌면 그가 진실을 깨닫고 살아나가는 그 후의 삶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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딘 쿤츠의 이 소설 <심장강탈자>는 사실 이야기의 중간에 약간 모호한 부분들도 존재한다. 간호사 이스메이 클렘을 둘러싼 이야기들이라든가, 사람들의 자살(혹은 안락사)을 도우며, 그 사체를 수집하는 스티브 바게스트를 둘러싼 이야기들이 그렇다. 그 부분을 둘러싼 어떤 상징성들은 강하지만, 그것이 왜 필요한 이야기인가를 생각해보면, 약간은 모호한 부분이 있다. 그것에 대한 어떤 판단을 유보하고 있다는 부분에서도, 작가의 철학적인 사유가 잘 드러나지는 않는다. 어쩌면 작가가 이야기를 끌어나가기 위한 하나의 자극적인 도구로만 이러한 이야기들을 억지로 끌어들였는지도 모를 일이다.

아마도 이에 대한 판단은 딘 쿤츠의 다른 소설들을 읽어본 후에 행해야 할 듯하다. 책 소개에 보면, 오컬트적인 요소를 잘 사용하는 작가이나, 이 소설에서는 그러한 요소가 상당 부분 배제되어 있다고 하는데, 그런 부분이 잘 드러난 소설들이 어떤 이야기들인지 궁금해진다. 구미권에서는 스티븐 킹과 비슷한 명성을 지닌 작가라고 하는데, 이것이 출판사의 어떤 선전문구에 불과한지, 아니면 스티븐 킹이 지닌, 어떤 불가해한 일들을 다루면서도 그 속에서 어떤 철학적인 상징성을 끌어내는 능력을, 이 작가도 갖추고 있는지는 이 작가의 다른 작품들을 읽어보고 판단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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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주말엔 무슨 영화를 볼까? >10월4주

 

제작 과정에서부터 여러 관심이 갔던 영화, 우니 르콩트 감독의 <여행자>가 드디어 개봉을 하는 모양이다. 우니 르콩트 감독의 자전적인 이야기를 다룬 영화, 그리고 이창동 감독이 제작자로 나선 영화라고 여러 관심이 많이 있었던 것 같은데, 최근 이 영화에 대한 여러 글들을 보니, 꼭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다.  

먼저 이창동 감독의 경우에는, 이창동 감독 스스로가 본인의 역할을 한국에서 이 영화를 촬영하도록 여러 여건을 마련해주는 입장에 한정짓고 있고, 또 무엇보다도 어떠한 영화이든, 영화는 결국 감독 그 자신의 결과물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한편으로, 이 영화가 감독의 어린 시절 자전적인 경험이 모티브가 된 것은 사실이지만, 이 이야기를 온전히 감독 자신만의 이야기라고 생각해서는 안될 것 같다. 왜냐하면 보육원에 있다가 외국으로 떠나야만 했던 경험은 감독 자신의 특수한 경험이라고 보기에는 너무 그 사례가 많기 때문이다. 어쩌면 우리나라 역사의 이면에는 이러한 가슴 아픈, 아니 단지 가슴 아프다는 것만으로 표현하기 어려운 이런 일들이 또하나의 역사로 자리잡고 있는 것이다. 아마도 그러한 많은 아이들의 소리없는 눈물들이 이 영화의 생생한 디테일이 되었을 것이다. 

아무튼 스틸컷만 보아도 먹먹해지는 이 영화는 개봉을 앞두고 있고, 영화 속 아이들은 이제 막 여행을 떠나려 하고 있다. 그 여행들은, 또 하나의 여행이라고 말할 수 있는 우리 각자의 삶 속 그 어떤 부분을 건드려 줄까. 아..그리고 이 영화의 주인공 김새론의 연기는 상당한 격찬을 받고 있으니, 그 부분에 주목해 보아도 좋을 것이다.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아빠와의 행복한 데이트를 보낸 진희는 내일이면 아빠와 함께 여행을 떠날 생각에 가슴이 설렌다. 다음 날 아침, 아빠는 진희를 보육원에 맡긴 채 친구들과 사이 좋게 지내라는 말만 남기고 떠난다. 아빠가 자신을 버렸다는 사실을 믿을 수 없는 진희는 말도 안하고 밥도 먹지 않고 보육원을 벗어나려 저항도 해보지만 아무도 자신의 마음을 알아주는 사람도 없고, 갈 곳도 없음을 알게 된다. 그렇게 진희는 조금씩 아빠와의 이별을 준비하는데… (네이버 펌)  





 

아..그리고 이번 주에는 이 영화의 예습이 될 만한 영화를 소개하기 보다는 다음의 또다른 영화에 주목해 보고 싶다. (아...이번주는 땡기는 영화가 많다. <파주>도!) 

43년만에 우리나라에서 정식 개봉되는 영화 <알제리 전투>. '역사상 가장 위대한 정치영화'라는 수식은 제쳐두고라도, 우리나라에서 43년만에 개봉되어야만 했던 이 영화의 배경을 생각해보면 한번쯤 보아둘 가치가 있다는 생각이 들 것이다. 이 영화의 어떤 부분 때문에 우리는 그동안 이 영화를 극장에서 볼 수가 없었을까. 운영주체가 바뀐 씨네큐브에서 앞으로도 계속 이런 영화를 틀어준다면, 얼마든지 환영이다. 영화의 대강의 줄거리는 다음과 같다. 

1954년에서 1962년 사이, 9년간 프랑스 식민통치에 대항한 알제리민족해방전선(FNL)의 무장 독립투쟁과 프랑스군의 정치적 폭력행위 등을 다큐멘터리 형식으로 재구성한 영화! 1957년 10월 어느 새벽, 알제리민족해방전선(Font de Lib ration Nationale/FNL) 소속의 나이 든 반군 한 명이 프랑스 부대의 고문을 견디다 못해 마지막 남은 지도자 ‘알리’의 은신처를 누설하고 만다. 은신처를 포위한 프랑스 군은 당장이라도 폭파할 태세이다. 오직 해방을 목표로 투쟁해 온 지도자 ‘알리’는 생사의 갈림길에서 상념에 잠긴 채 치열했던 지난 3년을 회상한다…. (네이버 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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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에게 묻고 싶다. 영화가 어떻게 변하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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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4 1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 변하지 않는 건 없지요.

맥거핀 2009-10-14 23:26   좋아요 0 | URL
아..물론 그렇지만요, 예전의 허진호 영화를 기억하는 사람 중의 하나로서,
조금은 달라진 영화톤이 살짝 예전 생각들을 나게 하더라구요.ㅎ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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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우시절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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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진호 감독의 장점은 그의 어떤 디테일함에 있을 것이다. 물론 이 '디테일하다'라는 것은 봉준호 감독이나, 이창동 감독의 영화들처럼, 영화적인 디테일함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를 표현할 마땅할 말이 잘 떠오르지 않지만, 굳이 말하자면 이는 '감정의 디테일함', 즉 감정의 미세한 부분을 잘 포착해내는 능력이라고 해야할 것이다. 첫사랑을 만났을 때의 아련한 감정, 사랑하는 사람을 어쩔 수 없이 떠나보내야 할 때의 미묘하고도 복잡한 심정, 자꾸만 보고 싶은 사람을 만났을 때의 두근거리는 설레임..이런 것들을 어떤 사물이나 상황이나 대사들을 이용하여 잘 형상화하여 우리 눈에 드러내주는 것, 그것이 바로 허진호 감독이 지닌 장점들이었다. 그것은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아있어야만할 아버지를 위하여 비디오를 작동시키는 방법을 세심하게 적어내려가던 남자의 모습을 잡아내는 것이나, 인구에 회자되었던 <봄날은 간다>의 "사랑이 어떻게 변하니?""라면 먹고 갈래요?"와 같은 대사들, 혹은 <행복>에서의 산길을 걸어오다 슬며시 손을 잡는 장면 같은 것들이다.

이 장면들이 기억에 남는 좋은 장면들이었던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겠지만) 그 장면의 감정들에 우리가 공감할 수 있어서가 아니었는지 싶다. 즉, 아..나도 언젠가 저런 적이 있었지, 혹은 저런 느낌이 어떤 느낌인지 대강 알 것도 같다..라고 어느 틈에 생각하게 되는 것. 그리고 그것이 가능했던 한편의 이유는 그것이 전체적인 드라마의 틀 속에서 움직이고 있었기 때문이다.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방법은 의외로 간단하다. 한쪽에서 무언가(아마도 '사랑'이) 얻어지고 있는 그 순간에, 다른 한쪽에서는 또다른 무엇인가가 상실되고 있는 것을 그려내보이는 것이다. <8월의 크리스마스>에서 남녀가 서로에게 다가가는 조그만 발걸음들을 보여주면서, 동시에 이 세상에서 떠날 준비를 하는 남자의 모습을 그려내는 것, <봄날은 간다>에서 다가가는 한편, 동시에 멀어지려고 하는 여자의 모습과 세상이나 사랑에 대해 알아가면서 어떤 것(순수?)을 잃어버리는 남자의 모습(그리고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장면도 그렇고), <외출>에서 완전히 모든 것을 다 잃어버린 상황에서, 새롭게 시작되는 사랑...그리고 아마도 이 모든 것들의 집약판이라고 느껴지는 <행복>. 즉 사랑과 그 사랑을 이루어 내는데 방해요소로 작용하는(그러나 사실 한편으로 보면 허진호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은 이 방해요소에는 왠지 상당히 초연한 듯한 느낌이 있다. 그것은 이 영화 <호우시절>에서도 그렇다) 육체적인, 혹은 정신적인 상실들, 그리고 한편으로 충족되면 충족될수록 상실에 대한 두려움이 커지는, 사랑 그 자체의 속성을 잘 버무려내어 보여주면서, 신파로 흐르지 않게 하는 것, 그것이 허진호 감독이 드라마를 만들어내는 능력이었고, 그것 자체가 감독의 역량이었다고 생각된다. 즉 아마도 한국 감독 중에, 사랑에 대한 어떤 부수적인 것들을 모두 제외하고, 사랑 그 자체의 감정과 진행양상에 대한 보고서를 써내라면 가장 잘 써낼 수 있을 듯한 감독이 허진호 감독이라고나 할까.




근데 왠지 이번 영화 <호우시절>에서 허진호는 상당히 다른 노선을 취하는 듯 하다. 등장인물들의 성격과 그에 관계된 주변사람들을 상당히 시시콜콜하게 보여주면서, 즉 이야기를 초반부터 만들면서 시작하는 전작들과 달리, 이 영화의 남녀주인공들에게는 어떤 개인사를 보여주는 별다른 장면을 할애하지 않고, 대뜸 두보초당에서 남녀주인공을 대면시킨다. 청두로 출장차 온 동하(정우성)와 두보초당에서 가이드로 일하는 메이(고원원). 그리고 그 이후에 두 사람의 어떤 밀고당기기(?)를 통해 관객은 조금씩 몇 가지 사실들을 알게 된다. 동하의 유학시절, 이미 이들은 만났던 사이라는 것, 서로 간에 어떤 호감을 가지고 있었다는 것, 그러나 여차저차첫차막차하다보니, 이들은 연인이 되지 못하고, 서로간의 다른 인생길로 접어들어야 했다는 것 등등 말이다. 그런데 조금은 이상한 것은, 영화가 중반을 넘어서, 후반에 이르기까지, 이러한 과거의 추억들만 서로의 이야기를 통해 되새겨질 뿐, 정작 중요한 현재의 이야기는 숨기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는 점이다. 그리고 영화는 후반에 이르러서야 숨겨진 이야기들을 조금씩 끄집어낸다. 그러고는 짧은 시간 속에서 몇 가지 감정의 파고를 급속하게 보여준 후, 다시 중간을 생략해버리고, 마무리를 제시한다.

즉 이 영화 <호우시절>이 허진호 감독의 전작들에 비추어 볼 때, 이상하게 느껴지는 점은, 드라마를 처음부터 밀도있게 쌓아나가며, 관객들에게 그 감정선을 서서히 따라오도록 했던 전작들에 비해, 중반을 넘어 갈 때까지 일종의 로맨스코미디 식으로(정확히 말하면 '코미디'라고 보기는 어렵지만) 남녀주인공의 일종의 '사랑만들기(혹은 밀고당기기)'를 보여준 후, 정작 드라마는 후반 짧은 시간에 몰아넣고 있다는 점이다. 그래서 관객의 입장에서 볼 때는 초중반의 밝고 싱그러운 분위기에 비추어볼 때 후반부의 급격한 감정의 변화들을 따라잡기가 어려워지는 면이 있다. 그래서 개인적으로는 후반부의 동하 역의 정우성의 연기가 많이 아쉬웠는데, 한편으로는 이해되는 부분도 있다. 이렇게 이어지는 몇 개의 장면들로 감정선을 만들어내기에는 많이 어려운 부분이 있었을 것이다. 즉 정우성에게 관객을 그 감정으로 끌고 갈 수 있도록 배정된 공간들이 후반부에 짧게 집약되어 있기 때문에 좋은 연기를 설혹 보여줬다고 할지라도, 관객이 그것에 따라가는 것이 쉽지 않았을 것 같다는 말이다(물론 이 말은 정우성의 연기 '자체'가 좋았다는 말은 아니다). 따라서 후반부의 몇몇 씬들이 - 예를 들어 정우성의 급정색 씬 같은 - 조금은 이해되지 않으며, 혹은 약간은 우스워보인다면, 그것은 감독에게 더 책임을 물을 일이라고 생각된다. 




아무튼, 전체적으로 이 영화는 뭔가 좀 어정쩡해진 감이 있다. 어떤 잘 짜인 드라마라고 보기에는 아쉬운 부분이 있고, 그저 아름다운 풍광들 속에서 남녀주인공이 귀여운 대사들을 내뱉는, 풋풋하고 상큼한 영화라고 말하기에는 그것도 어색한 감이 있다. 그렇다고, 중국 청두에 대한 관광홍보물이라고 말하거나, 아님, 남녀주인공의 좋은 비주얼을 감상할 그냥 눈만 즐거운 영화라고 말하는 것은 또 이 영화에 대한 너무 가혹한 평가가 될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본 영화의 예고편에서 이미 이 영화에 대한 큰 기대를 버렸기 때문에, 그저 중국 청두의 멋진 풍광이나, 정우성, 고원원 그 자체의 청두라는 공간에 못지 않은 비주얼을 감상하자고 마음을 먹었기 때문에 나름 만족스러웠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도, 이 영화의 포스터에 박힌 '허진호 감독 작품'이라는 문구와, 그의 필모그래피들을 살펴보면 한편으로 아쉬운 마음이 남는 것도 사실이다. 예전의 그 좋은 감성들은 다 어디에 던져두고...허진호 감독도 나이를 먹은 것일까. 그의 필모의 정점은 여전히 <봄날은 간다>다.

(비주얼이 좋은 영화니 사진이나 많이 넣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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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14 2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래도 전 '행복'보다 훨씬 좋았어요.^^
맑고 담백하고 아릿한 감흥이 있더군요.
화면 가득한 연초록 진초록 물빛 색감도 좋았구요.

맥거핀 2009-10-14 23:30   좋아요 0 | URL
그렇죠. 두보초당도 그렇고, 팬더들 나오는 부분도 그렇고, 자전거 타는 장면들도 그렇고..전체적으로 자연의 풍경들이 아름답게 찍힌 영화였습니다.
(그래서 살짝 관광홍보물 같은 느낌도 있었지만요.)
저도 개인적으로 맑고 담백한 감성은 느꼈지만, 너무 맑고 깨끗하다고나 할까요..그래도 허진호 영화의 몇몇 인장들은 여전하더군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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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 (夢みるように眠りたい / To Sleep so as to Dream)
1986 / 하야시 가이조



독특한 느낌의 영화이다. 몽환적이고 아름다운 제목처럼, 영화도 묘한 아름다움을 보여준다. 이 영화는 1986년도에 제작되었지만, 일종의 무성영화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일부의 대사들은 음성으로 전달되지만, 그 예전의 무성영화들처럼 이 영화는 거의 모든 내용을 화면과 자막과 음악으로만 전달하고 있다. 하야시 가이조 감독의 무성영화에 대한 오마주라고 하는데, 이 영화의 독특한 내용에 이러한 형식이 잘 어울리는 듯 하다.

전체적으로 이야기는 3개의 층으로 전달된다. 먼저 첫번째 층은 주인공 우오츠카 탐정이 조수와 함께 납치된 소녀를 찾는 이야기. 이 이야기는 하나하나 문제를 해결해나가며, 조금씩 답에 근접하는 일반적인 추리물의 형식을 가지고 있는데, 중간에 슬랩스틱적인 코미디와 액션들이 적절하게 조화되어 흥미로운 전개로 이어진다. 또한 중간에 등장하는 의문의 3인조(오래된 필름에서 튀어나온 듯한) 역시 여기에 독특한 느낌을 더해준다. 그리고 다른 한 층은 영화 속 영화로 진행되는, 주인공 탐정과 조수가 나중에 보게되는 이야기이다. 여자를 구하기 위해 적들과 맞서는 주인공 흑두건이 등장하는 영화 속의 또 하나의 (무성)영화. 그리고 나머지 하나는 이 흑두건의 이야기를 종이 그림극으로 구성하여 아이들에게 보여주는 장면이다. 영화의 가장 흥미로운 부분은 이 세 가지의 다층적인 이야기가 영화의 마지막에는 하나로 통합되는 것에 있다. 이는 마치 영화 속의 영화가 그대로 스크린을 부수고 나와 우리가 보고 있는 영화와 통합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이는 한편으로 보았을 때 영화 속 영화가 본 영화 그 자체와 이어지는 것에 그치지 않고, 이 본 영화 자체가 이 영화를 보고 있는 관객들(우리들)을 다른 공간으로 이끄는 듯한 기묘한 체험을 가능하게 한다.
 
이는 단순히 이야기의 중첩적인 연결로만 가능했다라고 보기에는 모자란 측면이 있다. 여기에 한편으로 영화 속 회전목마나 회전하는 물체와 같은 독특한 씬들, 그리고 이 영화의 형식이 한 몫을 한다. 즉 영화 속 분리된 상태에서 연결되는 것처럼 보이는 물체들(회전하는 물체들)과 그 물체들에 접근하는 카메라는 중첩되고 있는 이야기를 별 무리가 없이 받아들이게 하는 어떤 몽롱한 경험을 관객들에게 전달한다. 즉 '꿈꾸는 것처럼 잠들고 싶다'라는 말은 꿈꾸는 것처럼(즉, 그 꿈이 완성된 상태에서) 영원한 잠에 들었던 마지막 영화 속 여주인공에게만 해당되는 말이 아니라, 꿈꾸는 것처럼 이 모든 것을 받아들이게 되는 관객들에게도 해당되는 말일 것이다. 

  



친구여, 조용히 잠들라 (友よ,靜かに瞑れ / Tomo yo shizukani nemure)
1985 / 최양일



이 영화는 왠지 다른 어떤 영화들을 떠올리게 한다. 물론 이는 이 영화의 어떤 부분부분이 다른 영화들에게서 영향을 받아 이루어졌다는 말은 아니다. 내 머리 속을 스치고 지나가는 몇몇 장면들은 모두 이 영화보다 훨씬 후에 만들어진 영화들 속 장면이므로, 도리어 다른 영화들이 이 영화에 영향을 받아서 만들어졌다고 말하는 것이 옳을 것이다. 이 영화에 대한 설명에 있었던 말처럼 '이후 만들어진 하드보일드 영화들에 일종의 모델이 될 만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친, 80년대 하드보일드 영화의 최고 걸작' 정도로 생각하는 것이 좋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무튼 몇몇 장면들은 어쩐지 비슷한 느낌에 피식하게 되는 경우가 있다. 예를 들어 마지막 장면들은 클린트 이스트우드의 <그랜 토리노>를 떠올리게 한다. 클린트 이스트우드가 분명히 이 영화를 보고 이 장면을 흉내냈을거야 하는 의심마저 든다.

아무튼 이 마지막 장면은 앞의 장면들을 모두 잊게 만들 정도로 인상적이다. 이상한 삼각형 구도. 나쁜 놈들(경찰)과 조금 더 나쁜 놈들(건설회사 측)과 주인공 신도와 그의 곁에 있는 친구의 아들이 균형을 이루고 있는 길거리에서의 기묘한 삼각형. 여기에 경찰이 그간 붙잡고 있던 주인공의 친구 사카구치를 풀어주면서 이 삼각구도의 균형에 균열이 생긴다. 그리고 이어지는 총격씬과 떨어지는 레몬과 고개를 들어 그 장면을 보도록 하는 주인공 신도와 다시 급커브를 그리며 그 곳을 떠나는 신도와 레몬을 깨물어먹는 아이를 교차하여 보여주는 장면은 짧은 순간에 많은 것을 응축하여 보여준다. 이 싸움에는 승자도 패자도 있을 수 없다는 것, 즉 시스템의 붕괴는 가능하지 않으며, 오로지 일시적인 균열만이 가능하다는 점, 그리고 언젠가는 저 아이도 세상에 맞서서 싸워야 한다는 것(그러나 한편으로 그 승리가 가능한가(혹은 의미가 있는가)라는 물음에는 쉽게 답하기가 어려워진다).

이 장면 외에도 주인공 캐릭터를 만드는 데 일조하는 주변의 풍경들이 인상적이다. 외딴 마을에 들어온 주인공을 모두 외면하는 이상하게 적막해 보이는 마을 풍경과 그에 대비되는 주인공의 모습은 폭력과 권력의 균형으로 이루어진 이 작은 공간을 균열시키는 하나의 점으로 주인공을 관객들에게 각인시킨다. 그리고 말없는 이 캐릭터는 그가 무슨 일을 하려는지 영화 속 다른 인물들은 물론이고, 이를 보고 있는 관객들마저도 알 수 없게 함으로써 어떤 특유의 아우라를 만들어낸다("가장 무서운 사람은 무엇을 하려는지 알 수 없는 사람이지요."). 그리고 적막한 마을의 풍경과 대비되는 주인공이 머무는 호텔의 자유롭고 시끌벅적한(그리고 한편으로 따뜻해 보이는) 공동체의 모습은 이러한 주인공의 캐릭터를 더욱 도드라지게 보이도록 한다. 즉 어떤 의미에서 이 영화는 하드보일드한 캐릭터를 창조시키는 하나의 전형을 보여준다.

영화 속 적들의 모습이나 추격씬, 그리고 나중에 적의 중간 보스와 벌이는 결투 등, 수많은 클리셰들이 도사리고 있고, 한편으로 그 클리셰들을 우리가 알고 있기 때문에 그 장르적 굳건함이 유지되는 흥미로운 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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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레이야 2009-10-06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다양하게 찾아서 보시고 좋은 글로 남겨주셔서
또 잘 읽었습니다.^^
둘 다 상당히 매력적으로 보이는군요.

맥거핀 2009-10-07 11:59   좋아요 0 | URL
제가 잘 찾아서 본다기 보다는, 요새 여러 좋은 기획들이 많아서요.
좋은 영화들을 볼 수 있는 루트는 늘어나는데, 여유가 없어서 잘 못 보네요.^^

네..고전이 좋은것은 여러 번의 검증을 거쳤다는 이유때문이겠지요.
옛날영화들은 그래서 실패(?)할 확률이 별로 없습니다.
아무튼 두 영화 다 지금의 관점에서 보면 약간 이상하게 보이는 부분들도 있지만,
말씀해 주신대로 또 매력적인 부분들도 많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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