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방TV <역전다방>의 최근 에피인 과달카날 전투에 대한 영상을 보게 됐다. 이미 그전부터 너튜브에서 열심히 보고 있는 닥터 제이의 시리즈가 많이 도움이 된 것 같다. 또 이야기가 삼천포로 빠지지만, 과달카날 전투에 대해서는 나름 잘 안다고 생각하는데 맥아더의 반격이 시작된 1943년 6월 30일 카트휠 작전 초반의 뉴조지아 문다를 공략하기 위한 렌도바 상륙작전은 금시초문이었다. 이런 걸 보면 진짜 밀덕의 세계는 끝이 없다는 생각이다.
국방TV에서 많이 본 MC 허준과 나머지 네 명의 동지들이 벌이는 밀덕 대토론은 흥미진진했다. 기존에 내가 알고 있던 부분들에 대해서는 다시 한 번 확신할 수가 있었고, 독일에 이어 일본도 뛰어들었다는 석유 액화 기술에 대한 이야기는 정말 새로운 발견이 아닐 수 없었다. 그것도 북한의 아오지 탄광을 거점으로 삼았었다고. 당시 아오지 탄광은 동북아시아의 패자로 군림하던 일본의 최첨단 산업의 시험장이었던 것이다.

일본이 미국을 상대로 해서 맞짱뜬 태평양전쟁의 출발점은 1931년 만주사변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일본은 미국 페리 제독의 흑선내항 이후 강제개국과 극심한 내전의 과정을 거쳐 250년 동안 일본을 지배해 오던 에도의 도쿠가와 막부를 끝장내고, 대정봉환으로 일본국왕에게 다시 대권을 넘겨주게 되었다. 메이지 국왕의 출현으로 시작된 유신을 거치면서 일본은 군국주의 국가의 길을 걷게 된다. 류큐 왕국의 복속부터 시작해서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통해 이웃 조선을 식민지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그 다음 목표는 만주였다.
영국은 백년 이상 세계 곳곳에서 북국의 강자 러시아와 벌인 그레이트 게임의 최종전을 동맹국 일본과의 전쟁을 통해 마무리지었다. 대신 동양에서 일본이 새로운 강자로 부상하게 되는 계기가 되기도 했다. 영국과 미국이 전 세계의 패자로 등장하는 마당에 그들이라고 해서 안될 게 없겠냐는 자부심이 치솟기 시작했다. 게다가 일본은 계속된 전쟁으로 톡톡히 재미를 보았다. 가장 대표적인 전쟁이 바로 단기결전으로 끝낸 청일전쟁이었다. 대만과 랴오둥 반도를 할양받고 엄청난 전쟁배상금을 받아내면서 군국주의 일본의 출발을 알렸다.
하지만 그 다음에 전 세계를 충격에 빠뜨린 러일전쟁의 승리는 좀 달랐다. 전쟁에서는 이겼지만, 먹을 게 거의 없었다. 남부 사할린 정도가 고작이었다. 전쟁배상금은 한 푼도 얻지 못했다. 만주 전역에서 막대한 인적 피해와 상상을 초월하는 전쟁비용을 치렀지만, 패전국 러시아로부터 단돈 1엔도 받지 못하는 그런 상황이 된 것이다. 이 정도는 일본 전쟁지도부에게 틀림없이 멘붕이었으리라.
한편 각종 전쟁을 치르면서 일본 군부의 영향력은 점차 강화되어 갔다. 사무라이 후예를 자처하는 일본 군부는 걸핏 하면 무력을 동원해서 정부 고위직 인사들을 암살하고 쿠데타를 도모했다. 1931년의 만주사변도 관동군 소속의 참모 이시하라 간지와 일단의 장교들이 저지른 하극상이었다. 그런데 일본 군부에서는 그런 관동군 장교들을 처벌하지 않고 승진시키면서 침략전쟁을 부추겼다.
소위 황도파로 알려진 일단의 청년 장교들이 1936년 2-26사건을 일으키면서 일본 군부의 발호는 더 이상 통제할 수 있는 영역을 벗어나게 됐다. 그 결과, 주동자 16명이 처형되고 숱한 청년 장교들이 변방의 만주로 쫓겨나게 됐다. 그런데 자신들의 모국 일본에서 자신들이 꿈꾸던 이상향의 꿈을 펼칠 수가 없게 된 청년 장교들에게 새롭게 일본의 영역으로 포함된 만주는 엘도라도였다. 일본 육대 출신의 엘리트 장교들은 만주에서 새로운 모험에 나서게 되는데 바로 그것이 1937년 중국과의 전면전이었던 중일전쟁이었다.
언제나 단기결전을 선호하던 일본군은 전쟁 초기, 중국의 주요 도시들을 석권하면서 임진왜란 이래 그들의 염원이었던 중국 정복에 성공하는가 싶었다. 2년이면 전 중국을 석권할 거라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꿈은 장제스가 이끄는 중국의 완강한 저항에 무산되어 버렸다. 바로 그 순간부터 중국은 일본에게 수렁이 되어 버렸다. 거대한 중국을 인적 자원과 물적 자원이 한정된 일본이 점령하는 건 그야말로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일본은 현상 유지를 원했으나, 태평양 건너의 큰형님 미국은 그것을 원하지 않았다.
동남아시아 제국을 석권한 서구 열강제국의 마지막 목표는 바로 중국이었다. 중국이라는 거대한 시장을 일본이 집어 삼키려는 것을 한 시절 동맹국이었던 영국 그리고 새롭게 세계 패권국으로 부상한 미국이 허용할 리가 없었다는 점을 일본은 간과하고 있었다. 미국과 영국은 일본에게 밀리는 중국을 쿤밍 루트와 불인 루트를 통해 공공연하게 지원하고 있었다.
어쩌면 일본은 그 시점부터 미국/영국을 미래의 적국으로 가상하고 제압해야 할 상대로 생각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들의 우려는 조금도 틀리지 않고 그대로 현실이 되었다. 미국이 1941년 8월 전략물자인 석유 금수 조치를 취하자, 코너에 몰린 일본은 미국을 상대로 한 전쟁 계획을 짜기 시작한다. 그런데 과연 그들은 자신들보다 100배나 많은 생산력을 가진 미국을 상대로 승리가 가능하다고 생각했던 걸까?

당연히 연합함대 사령관이었던 야마모토 이소로쿠 같은 지미파들은 개전에 반대했다. 개전하면 엄청난 물량전이 벌어질 텐데, 과연 일본이 그런 보급 중심의 물량전을 지탱할 수 있을 것인가? 히로히토 국왕 역시 대본영 회의에서 미국의 석유 금수 조치로 개시하게 될 남방작전에 보급부터 물었다고 하지 않은가.
하지만 계속된 전쟁으로 재미를 봤다고 오판한 일본 군부에서는 이번에도 미국을 상대로 한 도박이 성공할 거라는 wishful thinking에 사로 잡혀 전쟁에 나서게 된다. 1941년 11월, 미국 국무장관 헐이 일본에게 보낸 최후통첩으로 알려진 헐 노트에서 미국은 아무런 조건 없이 일본이 그동안 침략해서 점령한 중국으로부터 물러나라는 강압적 요구를 전달했다. 이것은 일본 군부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사항이었다. 지난 10년 동안 중국 전선에 숱한 인력과 물자를 투입했는데 아무런 성과 없이 물러나라는 것이 아닌가 말이다. 일본 군부에서는 강요된 전쟁이라는 미명 아래, 개전 준비에 나서게 된다.
중일전쟁이 조슈 군벌 육군이 치른 전쟁이었다면, 태평양전쟁은 사쓰마 번 중심의 해군이 중심이 될 수밖에 없는 그런 전쟁이었다. 육군은 그전부터 북방의 소련을 주적으로 삼았고, 해군은 해양 강국 미국을 주적으로 상정하고 있었다. 일본 최정예로 알려진 관동군 역시 소련을 상대로 한 전쟁을 치를 목적으로 구성된 군대였다.
석유 금수 조치에 맞서 일본에서는 석탄에서 인조석유를 만들어내는 석유 액화 산업에 눈길을 돌렸다. 하지만 역전다방 선수들에 의하면, 100이라는 석탄을 집어넣으면 각종 단계를 거쳐 20 정도의 석유 밖에 만들어낼 수가 없었다고 한다. 이 얼마나 비효율적인 사업이란 말인가. 그럴 바에야, 동남아 최대의 산유지인 네덜란드령 바타비아 수마트라섬에 있는 팔렘방 유전을 집어 삼키자는 복안이 등장했다. 결국 전쟁으로 이 난국을 타개하자는 전통적 방식이 아닐 수 없다.

일본은 진주만 기습으로 미국의 태평양함대를 두들겨 부수고, 시간을 벌어 그동안 남방작전을 성공시키고 절대 방위선을 구축해서 미국을 협상 테이블로 끌어낸다는 기본 전쟁 계획을 세웠다. 그리고 실제로 일본은 영국령 말레이-싱가폴, 네덜란드령 바타비아(지금의 인도네시아) 그리고 미국령 필리핀을 차례로 정복하면서 남방작전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여기서 역전다방 선수들은 진주만 공격에 나선 나구모 주이치의 기동함대가 두 차례 공중공격으로 8척의 미국 전함을 침몰시키는 성과를 거두고, 한 번 더 공격에 나서 유류저장고와 도크를 완파했다면 어땠을까라는 what if 상황에 묻는다. 진주만 기습에 일본에서는 귀중한 4척의 항모전단을 파견했었는데 이어지는 남방작전과 다른 작전에 투입하기 위해 더 이상의 손실을 막기 위해 철수했다고 한다. 일본군이 좀 더 진주만을 철저하게 파괴했다면, 미국은 태평양함대의 전진기지를 서부 해안으로 옮겨야 할 지도 몰랐다. 그랬다면 일본은 더 시간을 벌 수 있지 않았나 하는 역사의 가정이다.
[뱀다리] 지난달과 이달 들어 신나게 너튜브의 세계에 빠져 드는 통에 책 읽기도 소홀해져 버렸다. 스웨덴 러시아 덴마크 등지에 사는 이들의 솔로캠핑 아니 거의 생존훈련에 가까운 솔캠 영상도 무척이나 매력적이다. 내가 캠핑에 나설 수가 없으니 다른 이들의 캠핑을 보고 대신 즐거움을 얻는 걸까?

탁탁거리며 타 들어가는 야외에서 구한 장작타는 소리들은 정말 예술이다. 어떤 이들은 영하 17도의 혹한에서도 판초 우의로 얼기설기 엮은 초막 같은 집에서 하루를 난다. 대단하지 않은가? 대개의 영상들이 나무로 티피 천막 같은 걸 만들고, 그 다음에는 불을 피운 다음 온갖 베리들을 주워 먹는 아주 간단한 영상으로 구성되어 있다. 낚시를 해서 잡은 물고기들은 솔캠러들에게 귀중한 단백질 공급원이다. 이들은 자연에 절대 쓰레기를 버리지 않으며, 캠핑이며 불 피운 자리까지 원상복귀하고 자리를 뜬다.
그들의 모습을 보면서 진정한 캠퍼들이 그렇구나 싶더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