벤야멘타 하인학교 (양장) - 야콥 폰 군텐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6
로베르트 발저 지음, 홍길표 옮김 / 문학동네 / 2010년 3월
평점 :
절판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의 새로 나온 책을 읽다가 접고, 결국 나는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집어 들었다. 아니 원전을 만나 보지 않고 어떻게 그 원전을 다룬 책을 만난단 말인가. 어디선가 알게 된 고트프리트 켈러의 <초록의 하인리히>도 만나보고는 싶으나 방대한 분량 때문에 패스. 발저의 책이 난해하다고 하더니만 다 읽는데 무려 10일이나 걸렸다. 물론 이 책만 붙잡고 있었던 것은 아니지만...

 


스위스 빌 출신의 로베르트 발저는 이례적인 독일어 사용 문단에 있어 무학의 천재 작가였다. 가정 형편상 어려서 학업을 포기하고, 은행의 수습사원으로 돈벌이에 나서야했다. 글쓰기라는 악덕에 매몰된 발저의 또 다른 취미는 걷기였다. 어쩌면 그도 발로 사유를 했을 지도 모르겠다. 1956년 그는 자발적으로 들어간 멘탈 인스티튜트에서 생을 마감하게 된다. 훗날 그가 남긴 기록들을 여섯 권의 책으로 펴냈다고 했던가. 1907년부터 해마다 펴낸 베를린 삼부작은 <타너가의 남매들>, <조수> 그리고 <벤야멘타 하인학교>.

 

1905년 로베르트 발저는 27세의 나이로 실제로 하인학교에 입교해서 하인/집사 교육을 받고, 오버 슐레지엔의 성에서 얼마간 하인생활을 하기도 했다고 한다. <벤야멘타 하인학교>에는 그런 그의 체험이 녹아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이름부터 귀족 출신이 드러나는 우리의 주인공 야콥 폰 군텐은 자신이 원하기만 한다면 무엇이라도 될 수 있는 그런 존재였다. 고전주의 독일 교양소설(bildungsroman)의 기본 플롯을 완전 무시하는 캐릭터가 바로 이단아 야콥이었다. 기존의 규칙대로라면 야콥은 하인학교의 생도로 전락(?)한 자신의 처지를 극복하고 무언가 대단한 존재로 거듭나야 했다.

 

하지만 평생 내적 불안에 시달린 작가 발저는 다른 방식으로 구도에 나선다. 그것은 바로 복종이었다. 이런저런 기술들과 언어 혹은 훌륭한 예절들을 배워 세상에 나갈 준비를 해야 하는 소년들의 선두주자는 크라우스다. 이렇다 할 매력이 없어 보이지만, 독일 국가가 원하는 규칙을 준수하며 체제에 순종하는 인간형이 바로 크라우스가 아니었을까. 정식 학교는 아니지만 어쨌든 벤야멘타 하인학교에서 아무 것도 배울 게 없고, 그저 무쓸모인 존재라는 인식 아래 야콥은 일기 형식의 글들을 계속해서 써 갈긴다.

 

때로는 나폴레옹을 따라 전장을 나서기도 하고, 벤야멘타 교장 선생의 여동생인 리자 벤야멘타를 동경하기도 하면서, 학교에 무언가 비밀을 있으리라는 긴장감을 연출하기도 한다. 언젠가 돈을 많이 벌어 성공하겠다는 상상을 하다가도 그게 다 무어냐는 식의 널뛰는 감정을 슬쩍 비치기도 한다. 그야말로 종잡을 수 없는 그런 서사의 전개다. 벤야멘타 선생님을 따라 나서는 장면에서는 판타지 같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이걸 신종 의식의 흐름 기법이라고 해야 할까.

 

소설의 어느 시점에서 야콥은 깨달음을 얻거나, 성공에 대한 무지막지한 포텐을 터뜨리면서 새로운 단계로 발전하는 게 정석일 것이다. 그러나 그런 독자의 예상을 전복시키고, 야콥은 반항 대신 기존 질서에 대해 복종을 선택한다. 어쩌면 소년에게 복종은 불확실한 세상에서 도피처이자, 유일한 선택지였는지도 모르겠다. 크고 작은 일탈과 쾌락을 추구하는 남자 야콥이 가진 이중성이라고나 할까. 그는 분명 문제적 인간이지만, 도를 넘는 소위 똘기를 드러내지는 않는다. 그에게 무언가 화끈한 일탈을 기대했건만 그런 일은 절대 벌어지지 않는다. 지극히 평범한 일상 속에서 야콥은 작은 것들에 집중한다. 마치 발저 작가 자신이 그랬던 것처럼 말이다.

 

흥청거리던 세기말의 대도시 베를린 혹은 빈에 살던 야콥은 복종과 일탈이라는 서로 상반되는 욕망들이 무시로 충돌하는 가운데, 내적 갈등이나 자아의 분열을 경험했던 게 아닐까. 난해하기로 유명하다는 그의 문장의 행간에서 무언가 핵심적인 것을 찾아내기 위해 나는 고군분투했다. 작가 발저의 페르소나가 분명한 야콥은 자신에게 주어진 역경을 극복한 영웅으로 거듭나야 하는데, 그런 기대와는 달리 소년은 점점 무쓸모한 존재가 되어간다. 이러한 설정은 하인학교를 졸업한 학생들이 세심하게 준비한 이력서(마지막 미션이다)를 들고 자신에게 맞는 일자리를 찾아야 한다는 자본주의 신화를 매섭게 타격한다. 그렇다면 모든 교육의 목적은 사회가 필요한 쓸모 있는 인간이 되기 위한 하나의 과정이란 말인가.

 

무슨 이유에서인지 문제아 야콥에게 매료되었다는 벤야멘타 교장 선생님은 소년에게 자신과 함께 사막으로 떠날 것을 권유한다. 거의 대부분의 학생들이 일자리를 찾아 떠났고, 야콥만이 벤야멘타 하인학교의 마지막 학생이 되었다. 이것은 서구의 산업혁명 이래 시대정신이 된 자본주의 시스템에 맞게 변형을 강요받은 학교 교육의 붕괴를 상징하는 추단이 아닐까. 소설의 처음부터 하인학교에서 딱히 배울 게 없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순전히 적은 분량을 만만하게 보고 덥석 덤벼들었다가 낭패를 당했다. 저자의 저술 의도를 파악해 보려고 노력하면 할수록, 점점 더 미궁에 빠지는 느낌이랄까. 발저 작가의 글이 난해하다는 말이 무엇인지 제대로 경험했다. 어쨌든 그렇게나마 로베르트 발저의 책을 한 권 읽었으니, 다시 제발트의 책으로 복귀해도 괜찮지 않을까. 조금이나마 위안이 되었으니 그것으로 다행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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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뿐호빵 2021-04-30 08:3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ㅎㅎ 로베르트 발저 저도 만났다가
그의 심오함에 한참 헤매다가 기진맥진ㅋㅋ
다음 책을 쉽게 넘기지 못하겠더라고요ㅎㅎ

정말 산책하듯이 천천히 읽히는 ㅎㅎ
발저의 의도, 저는 그리 짐작했습니다

레삭매냐 2021-04-30 09:36   좋아요 2 | URL
분량이 적어서 금방 읽겠지 하고
덤벼 들었다가 아주 곤욕을 치렀습니다.

말씀해 주신 대로,
다른 책의 제목이 왜 ‘산책자‘인지 이번
에 발저를 읽으면서 알게 되었답니다.

coolcat329 2021-04-30 10: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안 읽을 책 목록 상위권에 있는데 제가 잘한거겠죠?

잠자냥 2021-04-30 10:43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ㅋ 굉장히 지루한 고품격 작품입니다. ㅋㅋㅋㅋㅋㅋㅋㅋ

레삭매냐 2021-04-30 10:45   좋아요 3 | URL
우리의 제발트 샘이 독일 문학의
대표선수라고 하는데 도저히
쌩깔 수가 없어서 도전했다가 그만...

나이스 설렉션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레삭매냐 2021-04-30 10:46   좋아요 5 | URL
[투잠자냥님]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읽으면서도 내가 당최 무얼 읽고
있는가 싶었습니다. 이런 저런 자료
들을 찾아 보고서야 그나마 이해가
되더군요.

그런 점에서 지금 읽고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스러운 샘의 독자
를 컨텐츠로부터 격리시키는 그런
작품이 아닐까 싶습니다.

Falstaff 2021-04-30 12:15   좋아요 5 | URL
읽지 마셔요.
저도 그거 읽다가 뇌 엉켰어요!! 그래서 이 모양인가 봐요. ㅜㅜ

coolcat329 2021-04-30 13:01   좋아요 4 | URL
ㅋㅋㅋㅋㅋ 뇌가 엉키다뇨!

청아 2021-04-30 12:31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무슨 일이랍니까
리뷰도 그렇고 댓글도 온통 호기심을 끌어내내요!😳
그리고 ‘발로 사유한다‘니 너무너무 멋진 말입니다!!👍

레삭매냐 2021-04-30 15:34   좋아요 2 | URL
로베르트 발저의 산문집인 <산책자>
읽겠다고 하다가 나가 떨어졌던 흑역
사가 있답니다.

이번 참에 다시 한 번 도전해 볼까
합니다.

붕붕툐툐 2021-04-30 23: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도전의식 생기게 하는 책이네요. 집어 던질 때 던지더라도 일단 읽어보겠습니다!ㅎㅎ

레삭매냐 2021-05-01 09:35   좋아요 0 | URL
하도 데여서 산문집이라는
<산책자> 도전을 못하겠습니다.

하긴 그전에도 읽어 보려다가
망한 적이 있었죠...

우리는 집에 있는 책을 읽습니다.
 
메즈 예게른 - 아르메니아인 대학살 1915-1916 미메시스 그래픽노블
파올로 코시 지음, 이현경 옮김 / 미메시스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지난 424일은 홀로코스트 이전 최대의 제노사이드였던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106주년이었다. 이탈리아 출신 작가의 파올로 코시가 쓰고 그린 <메즈 예게른>은 지금으로부터 딱 10년 전에 읽었던 그래픽 노블이다. 지난주에 인천에 갔다가 찾아서 다시 읽게 됐다.

 

좀 더 디테일한 부분들이 알고 싶어서 너튜브를 검색해 보니 터키 사람으로 보이는 너튜버가 오스만 터키 입장에서 아르메니아 사람들이 주장하는 그런 집단학살은 없었다는 주장을 하고 있었다. 그 장면에서 나치 독일에 의한 홀로코스트는 없었다고 주장하는 이들의 모습이 떠올랐다.

 

아르메니아어로 대재앙을 의미하는 <메즈 예게른>은 철저하게 피해자였던 아르메니아 사람들의 입장에서 서술된 그래픽 노블이다. 그리고 이 책을 읽은 뒤 지난 십년 동안,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부정하는 터키인들의 입장은 아예 무시해왔다. 그런데 오늘 인터넷으로 자료를 검색해 보니 오스만 터키의 군인들과 관료들이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가혹하게 다룬 배경에 대해 알게 되었다. 1877년 노토전쟁(러시아-터키 전쟁) 당시, 러시아는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을 부추겨서 종주국 오스만 터키에 저항하도록 사주했다. 그 결과, 터키의 술탄은 1895~1897년 사이에 1차 대학살을 명령해서 30만에 달하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죽였다.

 

그 후에도 아르메니아 지역에서 반란활동은 계속됐다. 일단의 아르메니아 민족주의자들은 터키 요인 암살과 테러 활동을 개시했다. 1차 세계대전 중에는 독립을 약속한 러시아 편에 붙어 터키에 불리한 전황을 유도하기도 했다. 이런 배경은 쏙 빼놓고, 오로지 오스만 터키의 잔학행위에만 초점을 맞춘 점에 대해서는 <메즈 예게른>이 균형감각을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 물어야 할 것 같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오스만 터키가 이주정착법이라는 명목 하에, 아르메니아인들을 학살한 책임으로부터 자유로울 수는 없다. 다만 상상을 초월하는 오스만 터키인들의 만행이 어떻게 유래되었는지에 대해 파올로 코시 작가의 기술만으로는 알 수가 없었다는 점을 나는 지적하고 싶다. 오스만 터키인들이 무슬림인데 반해 아르메니아인들이 기독교도라는 점도 비극의 한 가지 원인이었다. 민족갈등에 종교분쟁까지 겹치니 강제이주 과정이 잔혹해지는 것은 시간문제였으리라.

 

오스만 터키의 위정자들은 아르메니아인들이 조국에 충성스러운 신민이기를 바랬으나, 서구 열강의 사주로 민족자결주의가 고조되어 가고 오스만 제국의 예전의 영화를 잃어 가고 있던 마당에 적국에 협력한 아르메니아인들은 조국의 배신자가 아니었을까. 이런 부분을 알고 나면, 오스만 터키가 저지른 잔학행위가 어떻게 형성되었는지에 대해 이해할 수가 있게 됐다.

 


발칸전쟁으로 500년 이상 지배해온 세르비아-루마니아-불가리아 그리고 몬테네그로를 상실한 오스만 터키 제국은 1차 세계대전에서 치명적 판단착오를 하게 된다. 철저하게 중립을 유지했어야 했는데, 동맹국인 독일 편에 선 것이다. 국방 장관이었던 이스마일 엔베르가 가장 열렬하게 독일 편에 설 것으로 주장했다고 한다. 카프카즈 전선에서 러시아를 상대하게 된 오스만 터키 3명의 실력자들은 1915424일 아르메니아인들에 대한 집단이주를 명령했다. 그것이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의 출발점이었다.

 

청년 투르크당 소속의 국방 장관 엔베르 파샤, 내무장관 메흐메트 탈라프 파탸 그리고 해군성 장관 아흐메드 제말 파샤들은 철저한 투르크족 우월주의자들로 대학살을 주도한 슈퍼빌런으로 등장한다. 그래픽 노블에서는 오스만 터키 부대에 소속된 아르메니아 병사들의 무기를 빼앗고, 무장이 해제된 그들에게 총알세례를 퍼붓는다. 물론 아르메니아인들에게 우호적인 사람들도 있었지만, 대개의 오스만 터키 제국의 신민들은 그들을 약탈하고 살해하는데 가담했다. 그리고 상상이 가능한 모든 죽음의 방식들이 뒤따랐다. 흑백의 그래픽으로도 비극은 가늠할 수가 없을 정도다.

 

이전까지만 해도 오스만 터키 제국이 아무런 죄가 없는 아르메니아 사람들을 학살한 것으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를 인식해 왔는데, 이번에 다시 책을 읽고 나서 다른 이야기들을 접하게 되면서 좀 더 다른 시각을 갖게 됐다. 이탈리아 작가인 파올로 코시가 좀 더 균형 잡힌 시각으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 이전의 상황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면 어땠을까라는 점이 좀 아쉽게 다가왔다.

 

다시 한 번, 지나간 역사를 대하는 자세에 대해 진지한 고민을 하게 됐다. 처음에는 터키인들의 치졸하고 비겁한 변명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의 주장도 새겨들을 만한 포인트들이 있었다. 물론 여전히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가 허구라는 주장을 하는 이들도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고의적으로 억압, 은폐, 상대화 그리고 역사적 의미의 변화를 통해 실재했던 사건을 희석화하는데 정진하고 있다. 첨예하게 대립하는 역사적 사건에 대해, 진정한 사과와 그에 따른 화해가 절실하게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물론 어느 것도 하나 쉽지는 않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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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모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를 통해 바실리 그로스만이라는 작가를 알게 됐다. 그의 대표작이라는 <삶과 운명>은 아직 번역이 되지 않아 정말 30년 전에 나온 그의 책인 <코미짜르>라는 책부터 먼저 만나 보게 됐다. 1990년대에 이미 바실리 그로스만의 책이 나왔다는 사실이 그저 놀라웠다. 번역은 예상했던 대로 발번역이었고, 오탈자의 수준은 심각했다. 그래도 그게 어디랴, 존재한다는 것만으로도 그리고 한글 번역으로 바실리 그로스만의 책을 만났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나는 대만족했다.

 

1967년에 그로스만의 이 단편소설을 바탕으로 동명의 영화도 제작되었다고 한다. 너튜브에서 검색해 보니 흑백영화로 1918-1922년 사이에 벌어진 러시아 적백내전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너튜브로 러시아어를 이해할 수 있다면 감상이 가능하다. 이제 너튜브는 거의 전지전능한 어떤 것이 되어 가고 있다는 사실을 다시 한 번 깨달았다.

 

우리의 주인공은 85KG의 냉철한 코미짜르, 그러니까 볼셰비키 인민위원 바빌로바다. 공간적 배경은 우크라이나다. 볼셰비키의 붉은 군대에 대항해서 일어난 백러시아 반군과의 격렬한 전투가 벌어진 곳이기도 하다. 블러드랜드에서도 나치 독일과 사회주의 소련이 가장 치열하게 다툰 전장이기도 했다. 우크라이나의 비옥한 흑토와 지하자원 그리고 인민들이 지닌 생산력은 이데올로기 전쟁의 각축장인 셈이다.

 

가장 먼저 바빌로바가 한 일은 동네 생과부와 눈이 맞아 탈영한 혁명 영웅 예펠린을 추호의 주저함도 없이 즉결 처형한 것이다. 코미짜르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온갖 속박으로부터 인민들을 해방시키는 혁명이었다. 그런데, 다음에 이어지는 서사부터 바빌로바는 역설적 상황에 봉착하게 된다. 그것은 바로 그녀가 이제 곧 출산이 임박한 임산부라는 사실이다. 처음에 아이의 아버지가 누군지에 대해 작가는 알려주지 않는다. 물론 코미짜르 동무는 아이를 지우기 위해 별 짓을 다해 봤지만, 성공하지 못했고 이제 아이를 낳을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되어 버렸다.

 

바빌로바의 상관들은 그녀의 이런 딱한 사정을 알고, 그녀를 베르디비치(그로스만의 고향이기도 하다) 마을에 사는 유대인 예핌 가정에 보내 몸을 풀게 한다. 문제는 양철공 예핌네 집에 방이 달랑 하나 있고, 또 아이들이 무려 6명이나 된다는 점이다. 하지만 무시무시한 코미짜르는 아무런 양심의 가책 없이 가난한 유대인 가정에서 방을 징발해서 코미짜르가 머물게 한다. 물론 보다 부유하고 여유 있는 집에 바빌로바를 머물게 할 수도 있었지만, 보안유지가 중요했기 때문에 사람들의 관심이 덜 가는 예핌네 집이 선택된 것이다. 물론 그들에게 코미짜르와의 동거는 재앙이었다.

 

나머지 서사는 피도 눈물도 없던 코미짜르가 아이를 출산하는 과정을 거치면서 생명의 존중함을 깨닫고, 혁명 대의 아래 모든 것을 희생해야 했던 밑바닥 인민들의 삶에 대해 깨닫게 된다는 설정으로 구성된다. 사실 이 부분은 좀 신파조의 구성이 아닐 수 없다.

 

치열한 적백내전과 볼셰비키 혁명을 막기 위해 간섭에 나선 제국주의 세력에 대한 소련 사람들의 치열한 투쟁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바실리 그로스만은 스탈린 집권 시기에 의식해서인지 레닌과 스탈린 못지않게 볼셰비키 혁명 와중에서 큰 공을 세운 트로츠키에 대해 악평을 서슴지 않는다. 개인적으로 러시아 혁명사에 대해 아는 바가 일천한 지라, 자세히는 모르겠지만 무장한 예언자라는 별명으로 불린 레온 트로츠키가 내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한 것으로 알고 있는데, 체제 친화적 작가에게 이렇게 폄하를 당해도 되는 건지 궁금해졌다. 역시 러시아 혁명사에 대한 공부를 좀 해야 하는 걸까. 아무래도 너튜브의 도움을 좀 받아야지 싶다.

 

훗날 소련을 침공했던 나치 독일에 대한 증오 때문에 적백내전 당시에는 아직 일렀던 히틀러가 이끄는 파시스트들에 대한 이야기도 등장하는데, 이 부분은 역사적으로 맞지 않는 것 같다. 내전 초기에 코사크 부르주아지를 중심으로 한 백러시아군의 반격이 매서웠던 모양이다. 아이의 아버지인 키릴도 결국 그들과의 전투 중에 매복에 걸려 전사했다. 신무기에 풍족한 자원을 바탕으로 한 백러시아군은 볼셰비키 붉은 군대를 궁지에 몰아넣었다. 소설에서도 패배를 거듭한 바빌로바 부대는 결국 베르디비치를 백군에게 내주고 전술상 퇴각을 해야만 했다.

 

바빌로바는 결국 갓난쟁이를 예핌과 마리아 가족에게 맡기도 절망적 전투에 나서야했다. 바빌로바가 느끼던 내적 갈등은 귀대명령을 받고 떠나야 하는 시점에서 정점을 찍는다. 투철한 혁명전사로서의 아우라는 어디로 사라져 버리고, 이제는 아들을 지켜야 하는 어머니로서의 모성애가 그야말로 폭발한다. 물론 이 모든 것들이 바실리 그로스만이 치밀하게 설계한 설정이라는 것을 알고 있다. 이게 바로 소비에트 문학의 정수가 아닐는지 모르겠다.

 

소설의 곁가지를 장식하는 프리스토냐와 나탈리아의 로맨스 역시 덧없게 느껴진다. 프리스토나야와 새로운 삶을 계획하던 나탈리아는 주체할 수 없는 정욕의 포로가 되어 세간의 비난을 받게 된다. 자신에게 신세계를 약속한 프리스토냐는 징병되어 어디론가 떠나 버리고, 홀로 남은 나탈리아에게 주어진 선택지는 지극히 협소했다. 결국 비장하게 자결하는 나탈리아. 그녀 또한 혁명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그렇다면 전장에서 전사한 바빌로바의 아들은 예핌과 마리아의 자식으로 유대인으로 성장했을 것이다. 코미짜르에게 혁명의 한계를 지적하며 대든 유대인 예핌은 혁명이 러시아의 유대인들에게도 새로운 삶을 약속할 거라고 생각했지만 그들에 대한 차별과 천시 그리고 푸대접은 사라지지 않았노라고 강변한다. 전장으로 출발을 앞둔 코미짜르는 진실이야말로 가장 중요하다고 예핌과 논쟁에 나서지만, 그다지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 모두 죽고 난 다음에, 혁명의 과실이 다른 이들에게 돌아간다면 지금의 투쟁이 무슨 소용이냐는 말에 바빌로바는 할 말이 없었다. 그런 점에서 바실리 그로스만은 위험한 줄타기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소설 <코미짜르>의 엔딩은 다가올 비극의 전조처럼 각인되면서 끝을 맺는다. 전장에서 생의 마지막 순간을 맞이하는 바빌로바의 눈에 가스실로 향하는 유대인들의 모습이 보인다. 그렇다면 아마 그 즈음에 성인이 된 바빌로바의 아들 역시 다른 유대인들의 운명과 다르지 않았다는 암시일까.

 

편역되어 소개된 <코미짜르>는 마치 연극 무대에 올릴 한편의 희곡을 보는 듯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앞뒤 표지에 실린 각각의 사진 역시 1967년 작에서 따온 것으로 보인다. 소품 스타일의 <코미짜르>만으로는 아무래도 바실리 그로스만의 역작 <삶과 운명>을 가늠할 수 없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진짜의 등장을 기대해 본다.

 

[뱀다리1] 노토전쟁이 무언가 싶어서 검색해 보니 러시아-오스만터키 전쟁의 한자식 표기였다.

[뱀다리2] 소설의 말미에 오스만터키에 의한 아르메니아 제노사이드에 대한 언급도 등장한다.


[뱀다리3] 원래 이 리뷰는 북리뷰에 실으려고 했으나, 알라딘에서 팔지 않는 책이라고 해서 그러니까 검색이 되지 않는다는 이유로 등록이 되지 않아 부득이하게 페이퍼로 옮기게 되었다. 알라딘은 모든 책을 커버한다, 단 자신들이 파는 책들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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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4-27 11:4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어떻게 구하셨나요? 헌책방?

레삭매냐 2021-04-27 13:03   좋아요 3 | URL
넵 맞삽니다. 서울책보고 공씨책방에서 주문
해서 읽었습니다.

30년 전 번역이라 아주. ‘허지만‘이 웬 말입
니까 그래.

청아 2021-04-27 13: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리뷰를 알라딘 관계자가 보고 또 출판사 관계자와 솰라솰라 하게되어 재출간 되길 바랍니다!! <삶과 운명>번역도요! 제발! <러시아의 역사>사놓고 방치?중인데 서둘러야겠어요.ㅠㅇㅠ너무모름🤔🧐

레삭매냐 2021-04-27 13:04   좋아요 1 | URL
이거이 편역이라 과연 제대로 번역
이 되었는 지도 궁금하더라구요.

바실리 그로스만이 헷갈렸는지 적백
내전기에 히틀러의 파시스트 타령도
나오고...

여튼 바실리 그로스만의 저작들이
하루빨리 번역되길 비나이다 비나이다.
 


원래는 이번 주에는 열심히 티모시 스나이더의 <블러드랜드>를 읽고 나서 나도 리뷰 대회에 참전하고자 했으나... 다 틀려 버렸다.

 

지난주에 인천에 갔다 오면서 데불고 온 책들에 그전에 도서관에서 <블러드랜드>와 같이 빌린 책들 그리고 <블러드랜드>를 통해 알게 된 바실리 그로스만의 편역책 <코미짜르> 마지막으로 앤터니 비버의 <아르덴 대공세 1944>에 빠져 <블러드랜드>는 결국 못 읽을 것 같다. 절망적이군 그래. 호기롭게 시작은 하였으나... 그렇게 되었다고 한다.

 

아르메니아 대학살을 그린 이태리 작가 파올로 코시의 <메즈 예게른>을 근 10년 만에 다시 읽었다. 책을 읽었으니 리뷰도 써야 하는데... 어제 <사피엔스> 그래픽 노블 리뷰를 쓰고 진이 빠져서 일단 보류 중. 빨리 쓰지 않으면 결국 못 쓰게 될 것이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써둬야겠다 나의 기록을 위해서.

 

내가 애정하는 작가 마누엘 푸익의 몇 권 되지 않는 국내 출간도서 중의 하나인 <천사의 음부>는 을유문화사 세계문학 첫 10권 중에 하나로 나온 책이다. 아마 그 시절에 사둔 것 같은데 여적 안 읽고 버티고 있었다, 놀랍군. 책이 다 바래졌더라. <부에노스아이레스>는 절판이 되었다고. 그 책을 산 것 같은데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역시 나의 기대작은 바로 히틀러의 마지막 발악이었다는 <아르덴 대공세 1944>. 밀덕들의 추앙을 받는 앤터니 비버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니 사지 않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이 책들은 비싸고, 그래서 바로 절판되는 수가 있기 때문에 살 수 있을 적에 사두어야 한다. 냉큼 주문장을 날렸다.

 

소련이 혼자서 다 싸운 2차세계대전이 종반으로 치달을 즈음, 영국과 미국은 결국 스탈린이 그렇게 목 놓아 외치던 제2전선을 열기로 결정했다. 그리고 노르망디 상륙작전으로 서부 유럽 해방에 나섰다. 일단 상륙작전은 성공했지만, 연합군의 진격을 지지부진했다. 아마 스탈린이 동부전선에서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의 중부집단군을 궤멸시키지 않았다면, 연합군은 더 큰 위기에 봉착했을 지도 모르겠다.

 

어쨌든 말썽쟁이 조지 패튼이 이끄는 미 3군의 노도와 같은 진격이 시작되고, 팔레즈 포위전으로 서부 전선의 독일군들이 궤멸적인 패배를 당하면서 마침내 독일의 심장부로 향하는 길이 열리게 되었다. 예나 지금이나 전쟁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보급이다. 파리를 필두로 해서 독일군의 점령 하에 있던 각지를 해방시키는데 성공했지만, 진격에 꼭 필요한 연료와 방대한 양의 물자 부족은 연합군 진격에 큰 문제를 유발했다.

 

패튼의 전차부대와 몽고메리의 영국군 앞을 가로 막는 장애물은 라인 강 정도였다. 저자가 정치군인이라고 매도에 가까운 비난을 퍼부은 드와이트 아이젠하워는 전쟁의 승리보다는 그동안 유럽대륙에서 나치 독일에 홀로 맞서 싸운 영국군과의 원만한 관계 유지에 관심을 가진 것으로 묘사된다. 그것은 아마 전후 유럽의 새로운 질서 개편에 있어 영국의 협력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정치적 고려가 작동한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후방의 든든한 보급과 물자수송을 위해 보다 안전한 항구 확보보다 오로지 진격 레이스에서 라이벌 패튼을 이기겠다는 오만에 가득했던 영국 육군 원수 몽고메리는 대담한 도박에 나서는데 그게 바로 노르망디 상륙 이래 놀고만 있던 연합군 1공수전단을 좀 써먹어야겠다는 발상에서 출발한 <마켓가든 작전>이었다. 영국의 붉은악마 1공수, 미국의 82공수 101공수사단을 동원해서 네덜란드로 향하는 일련의 다리들을 점령하고 영국 전차부대를 투입해서 전쟁을 1944년 크리스마스 이전에 끝내겠다는 몽고메리의 야심찬 계획을 정치군인 아이젠하워는 승인한다.

 

가장 큰 문제는 연합군 공정부대들이 목표로 한 다리들이 너무 멀었다는 점이다. 영국군 전차부대가 중요 목표인 아른험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무려 104KM를 돌진해야했다. 게다가 연합군 정보부는 작전 목표 부근에서 휴식과 재정비하고 있던 독일 두 개의 SS기갑사단의 존재를 무시했다. 영국의 붉은 악마들은 악전고투 끝에 아른험 대교의 일부를 장악하는데 성공하긴 했지만, 재정비를 마친 독일군 기갑사단들이 출동하면서 결국 전멸하기에 이르렀다. 결국 몽고메리의 도박이었던 마켓가든 작전은 엄청난 사상자 수만 남기고 실패했다.

 

독일군은 비록 팔레즈 포위전에서 엄청난 수의 피해를 입긴 했지만, 연합군의 상륙예정지롳 예상했던 파드칼레를 지키던 15군이 성공적인 철수를 해서 네덜란드 방어에 나서고, 마켓가든 작전을 저지하면서 전선을 교착상태로 접어들었다. 한편, 연합군은 벨기에의 중요한 항구인 앤트워프를 장악하고, 독일군들이 항구를 쓰지 못하게 만들어 놓은 기뢰나 갖가지 장애물들을 제거하면서 비로소 물자보급에 숨통이 트이기 시작했다.

 

다음 전투의 무대는 아헨이었다. 아헨이 갖는 정치적 중요성은 대단했다. 그 이유는 바로 아헨이 독일 본토의 도시라는 이유에서였다. 히틀러 총통의 절대 사수라는 명령에도 불구하고, 나치 정예사단이라는 친위대 부대들이 앞 다투어 미군의 공세를 앞두고 동쪽으로 철수하는 장면은 베어마흐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모습이었다. 여기까지 내가 읽은 것들을 정리해봤다.

 

앤터니 비버 작가는 노르망디 상륙작전과 팔레즈 포위전, 마켓가든 작전 그리고 아헨 전투와 휘트르겐 숲 전투까지 다룬 다음에 본격적인 아르덴 대공세 썰을 풀 모양이다. 서두가 길기도 하구나. 하긴 그런 전반적 상황들을 이해해야 어떻게 해서 히틀러가 마지막 도박에 나서게 되었는지 알 수 있을 테니. 그나저나 앤터니 비버의 최신작이라는 <아른험>(2018)도 출간해 주었으면 좋겠다. 우리 충성스러운 밀덕들을 위해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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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넬로페 2021-04-26 10: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매번 느끼는건데 어쩜 이리 레삭매냐님의 책에 대한 열정은 대단하신지~~
책에 대한 내용보다 오늘은 호모 북럽쿠스(제가 붙여봤어요 ㅎㅎ)에 대한 칭송입니다👍👍

레삭매냐 2021-04-26 11:11   좋아요 4 | URL
감사합니다 호모 북럽쿠스 !!!

아마 요즘 낙을 붙일 곳이 책 밖에
없어서 더더욱 덕후로 가고 있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mini74 2021-04-26 18: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앗 예전에 다큐 본 기억이 나요. 레샥매냐님 글이 더 재미있어요 소련이 혼자서 다 싸운 ㅎㅎㅎ책이 많이 비싸보입니다 ㅠㅠ

레삭매냐 2021-04-26 19:02   좋아요 3 | URL
2차세계대전 미군 사망자가 405,399명
인데 소련군 사망자 수는 적게 잡아도
8백 만명 정도 된다고 합니다. 말이 필요
없습니다.

밀리터리 관련 책들은 하나 같이 비싸더
라구요... 아마 소수의 밀덕들을 타겟으로
해서 그런 게 아닐까 싶네요.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Vol.1 - 인류의 탄생 사피엔스 : 그래픽 히스토리 1
다니엘 카사나브 그림, 김명주 옮김, 유발 하라리 원작, 다비드 반데르묄렝 각색 / 김영사 / 2020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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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년 전 유발 노아 하라리의 <사피엔스>가 베스트셀러라는 사실을 알면서고 굳이 그의 책을 읽어 보려고 하지 않았다. 그냥 베스트셀러를 외면하는 나의 독서 습성이라고 해두자. 그런데 이번에 그의 책이 그래픽 노블로 나왔다고 하니 보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더라. 그의 생각이 무엇인지 알기 위해 가장 좋은 방법은 원전을 읽는 것이지만 나의 게으름이 그걸 허용하지 않더라. 대신, 그래픽 노블로 만족하기로 했다.

 

지난주에 도서관에 가서 빌려왔다. 인류의 출현을 추적하는 역사학자 유발 하라리의 탐구 방식은 기존의 학자들과는 그 결을 달리 하는 느낌이 들었다. 이 부분은 아무래도 원전보다는 자신의 조카 조이도 이해할 만한 내용으로 책을 다시 쓴 느낌이 아닐까 싶었다. 아무리 원래 아이디어가 좋다고 하더라도, 독자나 청자들에게 이해가 되지 않는 난해한 생각들이라면 그 존재에 대해 묻게 되니 말이다. 일단 이 점에서 나같이 무지한 독자에게 아주 딱 들어맞는 그런 책이라는 생각이 퍼뜩 들었다.

 


현재 지구상에 가장 강력한 종은 바로 인간, 호모 사피엔스다. 그런데 이 호모 사피엔스가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등장한 것은 아니고 무신론자 유대인 학자에 의하면 기존에 있던 6종 정도의 호모 종들이 경쟁을 하며 현세에 이른 것이라고 한다. 호모 에렉투스와 현세 인류의 가장 강력한 라이벌이었던 네안데르탈인 등은 들어 보았지만, 나머지는 좀 생소했다. 어쨌든 이름도 낯선 나머지 네 개의 종들은 5만 년 정도 전에 모두 멸종되었고, 호모 사피엔스와 혼종 교배(?)된 네안데르탈인의 DNA2% 가량 우리들의 몸속에 흐르고 있다고 한다. 이 또한 놀라운 사실이 아닌가.

 

네안데르탈인은 사피엔스보다 월등한 신체적 능력을 가졌고, 심지어 두뇌의 용량도 더 많았다고 한다. 그런데 왜 그런 우월한 종이 전멸하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물음표가 찍혀 있는 느낌이다.

 

그리고 이 이단적인 주장을 일삼는 역사학자는 단순하게 역사적 증거들만으로 고대의 역사를 재구성할 게 아니라, 물리학 화학 그리고 생물학까지 총동원한 방법을 사용해야 한다는 주장을 설파하다. 아울러 과학적인 입증방식에 대해서도 신중하게 취사선택할 것을 주문한다. 현재처럼 너튜브를 위시로 한 동영상이나 CNN의 사실에 가까운 보도 같은 게 아니라면, 몇 만 년 전을 거슬러 올라가는 자료들은 너무나 희귀하고 또 전체적으로 적용시키기에는 어렵다는 것이 역사학자로 역사적 사실에 접근하는 그의 방식이 아닐까 싶다.

 

그냥 개인적으로 궁금한 것은, 그런 어느 실낱같은 단서들을 매개로 이단적인 주장을 개진하는 게 요즘 같이 페이크 뉴스가 난무하고 확증편향주의가 넘실거리는 세상에는 오히려 더 팔리는 그런 생각들이 아닌가 싶다.

 


어쨌든 동아프리카와 아시아 대륙에 걸쳐 살던 호모 사피엔스가 다른 대륙의 동물들을 제압하고, 생존에 적합하지 않는 곳까지 널리 퍼지게 된 특징 중의 하나는 바로 협력이라고 저자는 강력하게 주장한다. 그리고 내가 받아들인 바에 의하면,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협력은 다른 동물들로서는 상상도 할 수 없는 그런 능력이었다. 사피엔스들은 협력과 사유를 기반으로 해서 지구별을 정복해 나가기 시작했다. 직립보행을 하면서 사방에서 자신을 위협하는 다른 동물들의 공격에 대비할 수 있게 되었다고 했던가. 다만, 여자들은 임신과 출산 과정에서 상대적으로 더 어려움을 겪게 되었다는 점도 흥미롭게 다가왔다.

 

어쨌든 사피엔스들은 이런 상호간의 협력을 바탕으로 해서 살기 어려운 조건들도 극복하게 되었고, 매머드나 검치호랑이 같은 대형동물들도 사냥하는데 성공하게 되었다. 사피엔스들은 호주 대륙에도 진출하게 되었고, 얼어붙어 있던 베링해를 건너 아메리카 대륙에도 건너갔다. 문제는 이런 사피엔스들의 세계 진출이 다른 대륙에서 평화롭게 살던 다른 종들에게는 그야말로 대재앙의 시작이었다는 점이다. 사피엔스들이 활발하게 살고 있는 현재에도 지구별에서는 숱하게 많은 동물들이 하루가 다르게 멸종되어가고 있다.

 

역설적으로 이번 코로나 사태를 거치면서 예전처럼 사피엔스들이 비행기를 타지 않고, 이동의 제한이 되면서 자연 생태계가 복원되고 있다는 점은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편리를 위해 개발과 발전은 필요하지만, 때로는 적당한 불편이 지구별에 사는 동물들과의 공존을 위해 꼭 필요한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이 책을 보면서 절실하게 들었다.

 

더 놀라운 사실은 과거에 사피엔스들이 오늘날의 사피엔스들보다 더 적게 노동하고, 건강하게 살았다는 점이다. 물론 영유아 시절의 위험한 고비들을 잘만 넘기면 평균 수명이나 삶의 질에서 어쩌면 지금보다 더 나은 삶을 살았다니 정말 놀랄 노자가 아닌가 말이다. 그러니까 오늘날의 사피엔스들은 그들의 조상들보다 더 긴 노동을 하면서도, 유희를 즐길 시간들은 상대적으로 줄어들었다. 집에 와서도 청소나 빨래 등등 가사는 더 늘었다고 저자는 슬쩍 우리가 알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들려준다.

 


그리고 그 이면에는 사피엔스만이 해낼 수 있었던 허구, 그러니까 신화의 창조가 존재하고 있더라는 점이 그래픽 노블 볼륨 원의 핵심이 아닐까 싶다. 나는 열혈책쟁이로 누구보다 픽션, 허구의 세계에 열광하고 있다. 그런 점에서 현대판 주술사인 법인(회사)과 변호사가 빚어내는 허구의 세계에 빠져 있다는 저자의 지적에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이다. 실체가 없는 회사에 인격을 부인해서 법인(corporation)을 만들고 그 픽션의 주인공인 법인이 생산해 내는 물질의 노예가 된 오늘날의 사피엔스의 모습에 되돌아보게 된다.

 

책에 대한 나의 감상은 뒤죽박죽이지만, 어쨌든 <사피엔스>에 대한 유발 하라리의 이단적 고찰과 주장이 가진 참신성에 대해서는 인정할 수밖에 없을 것 같다. 이 정도의 베스트셀러가 되려면, 마냥 칭찬일색의 호평에 필적한 비판도 필수적인 게 아닐까 싶다. 어쨌든 앞으로 더 나올 예정이라는 나머지 볼륨 세 권에 대해서도 기대해 본다. 나는 무엇보다 이 책의 방점을 쉽고 재밌다에 찍고 싶다, 아 참, 저자인 유발 하라리는 <사피엔스>의 그래픽 노블 작업에서 사피엔스 특유의 협력의 진수를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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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pio99 2021-04-25 17:5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그래픽 노블이지만 원작 자체가 벽돌책이어서 쉽지 않았을 텐데, 완독 축하드립니다^^

레삭매냐 2021-04-26 09:14   좋아요 0 | URL
원작은 아예 생각도 안하고 있었는데
생각보다 투덥더라구요.

감사합니다.

얄라알라 2021-04-25 19: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나머지 책들도 그래픽 노블화 하는 건가요? 지금 서가에 꽂혀 있는데, 오늘 레샥매냐님 따라 <사피엔스> 그래픽 노블이나 끝까지 읽을까 싶네요.

유발 하라리의 온갖 소소한 토크까지 다 뒤져보는 편인데, 최근 적어도 2021년 이분 표정이 굉장히 밝아지시고 뭔가 대화할 때 태도에서 경쾌함까지 느껴져서 독자로서 궁금해하는 중이랍니다^^ 이 책 읽어보면서 원작이랑 어떤 지점에서 차이가 나는지 좀 찾아봐야겠어요^^

레삭매냐 2021-04-26 09:16   좋아요 1 | URL
나머지 책이라기 보다는... 원작이 워낙
방대하다 보니 <사피엔스> 나머지 부분
을 그래픽 노블로 제작 중이라고 하네요.

아마 다른 책들도 곧 그래픽 노블로 만들
어지지 않을까 싶습니다.

원작과의 비교, 역시 대단하십니다.

2021-04-26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붕붕툐툐 2021-04-25 2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저는 사피엔스를 읽어버려서 그래픽노블을 굳이 읽진 않을 거 같지만, 사피엔스 특유의 ‘협력‘의 진수는 느껴보고 싶네요!ㅎㅎ

레삭매냐 2021-04-26 09:18   좋아요 0 | URL
아 선빵으로 먼저 읽으셨군요 :>

전 책은 안 보고 그래픽 노블로 만나는
지라 헷, 약간의 치트키 느낌이랄까요.

유발 노아 하라리 작가의 말에 따르면
자신은 글을 쓰고, 누군가는 그림을
그리고 불어와 영어 번역을 맡고 또
책을 만드는데 필요한 종이와 출판 인쇄
등등이 모두 사피엔스 특유의 협업이
아니겠냐는 주장이더라구요. 아주 제대
로 콕 집어서 이해박게 해주더군요.

바람돌이 2021-04-26 00:0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사피엔스와 네안데르탈인은 비슷한 시기를 살았는데 체격도 더 컸고, 두뇌용량도 비슷했던 이 두 인종의 운명의 갈림에 대해 이 책에서는 말씀하신대로 공동체의 형성과 협업 여부로 이야기하더군요. 근데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란 책에서는 사피엔스가 살아남은 이유를 유물을 가지고 얘기해요. 빙하기의 추위에 네안데르탈인은 결국 쓰러졌지만, 사피엔스는 바늘을 만들어 쓸줄 알아 옷을 제대로 지어입고 빙하기의 추위를 견뎌냈다는 쪽으로 설명하더라구요. 사실 어느쪽이 진실인지는 알 수 없고, 둘 다 진실이 아닐 수도 두가지가 다 섞여 있을 수도 있는게 고고학의 영역이긴 하지만 솔직히 저는 <사피엔스>라는 책은 전체적으로 꽤 좋았지만, 유발 하라리의 사피엔스에 대한 이 견해는 지나치게 현대인의 관점에서 생각한게 아닌가 싶었어요.
저도 그래픽 노블의 협력의 진수는 느껴보고 싶네요.
그리고 혹시 안 읽으셧다면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남았을까> 강력 추천하고 갑니다. 완전 재밌어요. ^^

레삭매냐 2021-04-26 09:25   좋아요 0 | URL
추천해 주신 <왜 호모 사피엔스만 살아
남았을까> 접수했습니다, 감사합니다.

고고학의 분야는 남은 자료들만으로
추정하기에는 빈 공간이 너무 많아 보입
니다. 그만큼 주관적 해석의 여지가 많
기도 하구요.

중세사 전문가인 유발 하라리가 그런
이유로 사피엔스라는 치열한 논쟁을 촉
발시킬 수 있는 그런 주제를 고르지 않
았나 싶기도 하네요.

역사를 현대의 관점으로만 해석하면 안
된다는 게 기본 중의 기본인데, 유발 하라리
는 그 점을 간과하지 않았나 싶기도 하네요.
물론 호모 사피엔스를 세계 동물 학살범으로
현대 법정에 세운 아이디어는 기발하긴 했지
만요.

얄라알라 2021-04-26 0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 레샥매냐님 리뷰 덕분에, 꽂아만 두었던 그래픽 노블 <사피엔스> 새벽에 다 읽고 잤네요^^ 2,3,4부도 넘 기대되요

레삭매냐 2021-04-26 09:26   좋아요 1 | URL
바로 그겁니다.
모름지기 책은 빌리거나 사서 보는
게 아니라, 집에 쟁여둔 책을 보는
거죠 ㅋㅋㅋ

전 어제부터 정말 오래 전에 사둔
마누엘 푸익의 <천사의 음부>와
최근에 나온 앤터니 비버의 <아르덴
대공세 1944>를 읽기 시작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