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해가 고인의 20주기로구나. 그런데도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이 발표되니 뭐랄까, 같은 시대를 살고 있다는 그런 느낌이랄까.

 

제발트 작가의 새로운 책이 나왔다는 소식에 아무런 생각 없이 무조건적으로 구매 버튼을 누른다. 그리고 오늘 오후에 받았다.

이건 하나의 즐거움이다.

 

제발트 작가가 귀한 작가들에게 바친 헌사라고 하는데...

한 번 휘리릭 펼쳐 보니 컬러 도색의 그림도 있고 뭐 그렇다. 익숙하지만 읽다만 로베르트 발저의 <산책자> 이야기도 나오는가 본데... 그렇다면 이 책을 읽기 전에 먼저 선결 조건으로 발저부터 읽어야 한다는 말일까. 소책자 스타일의 책을 사들고 중세 스위스의 어느 전투에 대해 읽었나 어쨌나.

 

아침부터 두꺼비 알과 도룡뇽 관찰하느라 돌아 다녔더니만 벌써부터 피곤하다.

이럴 때 한숨 때리면 얼마나 좋을까. 파스칼 로즈의 읽다만 책부터 읽어야 하나 아니면 바로 제발트의 책을 읽기 시작해야 하나. 그것이 문제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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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발트의 새 책 역시 알고 보니 위험한 책이었다.

자신을 파괴해 가면서까지 글쓰기라는 악덕에 전염된 고트프리트 켈러니 로베르트 발저 같은 작가들에 대한 빈프리트 게오르크 제발트의 찬사라는 표현이 아니었다.

 

그래서 결국 나는 해당 작가의 책부터 먼저 읽어야 하는 게 아닌가 하는 고민에 빠지게 되었다. 타자의 시선으로 본 감상 혹은 리뷰보다 내가 원전을 먼저 만난 뒤에 읽어야 한다는 그런 일종의 강박관념이라고나 할까.

 

고트프리트 켈러의 <초록의 하인리히>는 예전에도 어디선가 한 번 주워 들은 적이 있었는데 이번에 나온 제발트의 책에서도 다시 만나게 되었다. 결국 그 책를 구해서 읽어야 한다는 운명일까나.

 

그나마 로베르트 발저의 책 <산책자><벤야멘타 하인학교>는 보유하고 있어서 냉큼 찾아서 후자부터 읽기 시작했다. 이유는 순전히 책이 짧다는 이유로 말이다. 요즘 너튜브 동영상에 흠뻑 빠져서 책읽기보다 그놈의 동영상 보기에 시간을 더 투자하고 있는 느낌이다. 그동안 미처 몰랐던 몽골 제국의 호라즘 정벌이라든가, 금나라와의 전쟁, 2차 세계대전 비사, 히총통의 소방수 혹은 방어전의 사자라 불리던 발터 모델 원수 등에 대한 에피소드들을 보고 있노라면 새벽을 훌쩍 넘기기가 일쑤다.

 

너튜브에 그렇게 많은 동영상들이 있지만 상대적으로 책에 대한 컨텐츠는 많이 없다는 느낌이다. 우리 책쟁이들이 리뷰에는 나름 공을 들이지만 또 컨텐츠 제작에는 관심이 없나 어쩌나. 물론 선제적으로 대응해서 나름대로의 성과를 올리고 있는 것 같기도 한데. 결국 컨텐츠 제작은 꾸준함과 얼마나 많은 컨텐츠들을 업로드했나가 아닌가 싶다.

 

파스칼 로즈의 책부터 마저 읽어야 하는데 좀 스텝이 꼬인 그런 느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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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7 22:0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두꺼비알과 도룡농 관찰이라뇽~ 호기심 발동합니다~ㅎㅎ

레삭매냐 2021-04-18 08:44   좋아요 2 | URL
덤으로 참가한 숲체험에서 많이
배웠습니다.

그동안 두꺼비들이 알을 낳지 않
다가 공원 조성하면서 만들어진
인공 호수에 알을 낳기 시작했다
고 하더라구요. 두꺼비 올챙이들이
바글바글했답니다.

coolcat329 2021-04-18 08:1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도롱뇽, 두꺼비알...?ㅋ 취미신가요?

레삭매냐 2021-04-18 08:45   좋아요 2 | URL
취미는 아니고 우연히 얻어 걸리게
되었네요 ㅋㅋ 다만 날이 좀 추워서리.

어제는 아기 도룡뇽이도 관찰했답니다.
도룡뇽 올챙이는 개구리와 달리 앞다리
부터 나온다고 하네요 : 신기했습니다.
 



분단이라는 비극에 대한 하나의 르포르타주


미치게 읽고 싶은 책들이 있다.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가 그랬고, 이번에 만난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가 그랬다. 어떻게 영문 파일을 구해서 떡제본으로 책을 만들었다. 그런데 영어책이라 읽지 않고 쓰담쓰담만 하고 있었다. 그러다 어느 순간, 전국의 모든 도서관을 연결하는 상호대차 서비스인 책바다가 생각났고 <뜨거운 달><타니오스의 바위>에 이어 드디어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를 만나게 되었다. 참고로 도서관에서 내가 사는 부근의 도서관으로 책이 오는 비용은 1,700원이었다. 물론 그 이상이라도 내가 원하는 책과 만날 수 있다면 얼마든지 낼 용의가 있었다. 책을 소유하는 것도 좋지만, 그것보다 더 중요한 건 컨텐츠를 읽는것이니까.

 

언제나 그렇지만 이번에도 서론이 좀 길었다. 소설 <파키스탄 행 열차>는 뜨거웠던 1947년 여름의 이야기를 그리고 있다. 참고로 이 책은 1956년에 발표된 책이다. 국내에 몇 번 나온 적이 있는데 물론 절판됐다. 내가 책바다 서비스를 이용할 수밖에 없는 이유였다. 다시 이야기로 돌아가, 1947년 여름에 무슨 일이 있었냐고? 그 해 인도가 식민종주국 영국의 오랜 압제로부터 해방되어 독립했다. 그렇다면 좋은 일이 아닌가? 문제가 그렇게 간단하지는 않았다.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전통적으로 분할 통치(divide and rule) 정책을 고수해왔다. 광활한 인도 대륙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인구가 4억이나 되는 광대한 식민지를 현지인들의 협력 없이 통치하기간 미션 임파서블이었다. 거기에 종교라는 문제까지 살짝 얹었다. 힌두교도와 회교도 그리고 시크 교도가 평화롭게 어울려 살던 인도는 영국이 떠나면서 유혈 폭동의 공간으로 변했다. 힌두교도들이 압도적 다수를 차지하는 인도 본토에서 상대적으로 소수파였던 무슬림들이 공격받기 시작했다. 간디 선생의 비폭력 노선은 분리 독립에 눈이 먼 이들에게는 전혀 먹히지 않는 공허함 그 자체였다.

 

포커스를 좀 더 좁게 만들어서 인도와 파키스탄 국경, 펀잡 지방의 마노 마즈라라는 마을로 가보자. 마노 마즈라에는 라호르와 수도 델리는 잇는 기차가 선다. 기차는 이제는 적대적으로 변한 두 개의 공간을 잇는 연결점이다. 평화롭던 시절에는 물자와 사람을 수송하던, 연착이 기본인 열차가 이제는 비극의 메신저가 되었다. 사건은 총과 칼로 무장한 강도 말리 5인조가 마노 마즈라 마을에 사는 힌두교도 고리대금업자 랄라 람 랄의 집을 습격하면서 시작된다. 끝까지 그들이 요구하는 금고 열쇠를 내놓지 않은 람 랄은 결국 그들에게 살해당한다. 하긴, 금고 열쇠를 줬다고 해서 그가 살아날 수 있었는지는 모르겠다.

 

그 무렵 온갖 비행으로 집행유예 중이던 시크교도 청년 주거트 싱(주가)은 무슬림 이맘 바크시의 딸 누란과 밀회를 즐기고 있었다. 그는 절도와 살인죄로 교수형당한 도둑 알람 싱의 아들이다. 거대한 체격을 자랑하는 주가는 말리 패거리도 두려하는 그런 싸나이다. 시크교도 주가와 다른 사람도 아닌 이맘의 딸 누가의 만남이 비극으로 이어지리라는 건 누가 봐도 뻔한 설정이 아니었을까.

 

그리고 중년의 뻔뻔하고 탐욕스러운 치안판사 후컴 찬드가 등장한다. 민중의 공복이라는 고위 관료가 역설적으로 그들 위에 군림하는 장면에서는 며칠간의 선거 운동기간에만 굽신거리고 당선된 후에는 공복이 아닌 주인행세를 하는 무한루프의 반복이 떠올랐다. 인도가 세계 최대의 민주주의 국가라는 선전은 떠올랐다. 내가 소설을 통해 만난 인도식 민주주의는 정말 민주주의와는 거리가 멀었던 것 같은데. 어쨌든 치안을 맡은 후컴 찬드는 날이 갈수록 폭력적으로 변하는 마노 마즈라 일대에 사는 이들의 안녕과 안전에는 관심이 1도 없고, 오로지 술과 푸짐한 식사, 낮잠 같은 향락에만 집중한다. 어린 무슬림 가수 소녀(하씨나 베감)를 금전으로 착취하는 건 남세스러운 비밀도 아니었다.

 

랄라 람 랄이 살해당한 다음 날, 마노 마즈라에 영국에서 최상위 교육을 마치고 조국에서 사회사업을 하겠다고 하방한 인도인민당 출신의 이크발 싱이 도착한다. 시크교도에게는 어려움에 처한 이들을 돕는 친절이 선택이 아닌 의무였던 모양이다. 부제 미트 싱은 청년 이크발에게 음식과 잠자리를 제공한다. 선량한 미트 싱이 보여주는 비위생적인 모습에 진저리치는 이크발의 모습은 문명의 충돌이랄까. 지식인 이크발 주변에 모여든 마노 아즈라 마을 사람들은 그로부터 세상이 도대체 어떻게 변하고 있는지 묻는다. 인도의 앞날에 대한 민중들의 걱정과 우려가 드러나는 결정적 장면이다.

 

병행해서 만나고 있는 에드거 모건 포스터의 <인도로 가는 길>에도 나오는 것처럼 영국 제국주의자들은 자신들이 인도 사람들이 원하지도 않았는데 나타나서 현지인들을 위한 치안과 질서를 유지한다고 떠들어댄다. 그들의 교묘한 선전은 정확하게 들어맞아, 영국인들이 떠나고 걷잡을 수 없는 폭력과 혼란이 이어지자 민중들은 그래도 영국이 지배하던 시절이 좋았다는 착각에 빠진다. 언제나 그렇듯 희미한 과거의 기억들은 기묘한 방식으로 탈색과 변색의 과정을 거쳐 현실을 왜곡하기 마련이다.

 

경찰 당국에서는 이크발 싱이 명백한 알리바이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람 랄 살해용의자로 체포해서, 집행유예를 위반한 주가와 같이 구금한다. 치안판사 후컴 찬드로 대표되는 기존 질서의 수호자들에게 진범 검거가 중요한 게 아니라, 오직 정치적 판단만이 중요할 따름이다. 진범들인 말리 패거리를 잡고서도 다른 이유로 이크발과 주가를 계속해서 잡아두고, 말리 일당은 풀어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풀려난 말리 일당이 아무런 죄가 없기 때문에 치안판사가 놔준 거라고 생각하기에 이른다. 교활한 후컴 찬드의 일승이다.

 

한편 사람과 물자를 실어 나르던 기차에 시크교도들의 시신들이 실려 오기 시작하면서 마노 마즈라 마을 역시 눈먼 분노와 차별이 들끓기 시작한다. 제발 이성적 판단을 하라는 족장 반트 싱이나 부제 미트 싱의 고언은 설 자리가 없다. 오로지 시크교도들의 복수를 위해 회교도들에게 눈에는 눈, 이에는 이로 복수해야 한다는 주장이 넘실거린다. 설상가상으로 진실 이상의 가짜 뉴스들이 횡행하면서 그야말로 불난 집에 가스통을 던지는 격이 아닐 수 없다. 조상 대대로 마노 마즈라에서 살아온 회교도들은 눈물을 머금고 마을을 떠날 결심을 한다. 이에 대응해서, 일단의 자경단 무리들이 나서서 떠나는 회교도들에게 잔혹한 복수를 다짐한다.

 

힌두교도와 회교도 그리고 시크교도들의 정치적 갈등에 초점을 맞추다 보니, 상대적으로 다른 인도 소설과 달리 카스트제도에 대한 비판이 비집고 들어설 틈이 없었다는 점을 말하고 싶다. 개인적으로 인도 독립 당시, 비등하던 종교적 갈등에 대해 궁금했었는데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를 통해 그런 지식의 갈증이 조금은 해소된 그런 느낌이다.

 


분리 독립이라는 정치인들만의 대의를 위해 종교 갈등을 극단적으로 조장한 결과, 1946년부터 인도 각지에서는 피로 피를 씻는 폭력이 난무했다. 천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원하지 않는 민족대이동을 강제 당했다. 그런 강제이주 와중에 몬순 때문에 또 수많은 이들이 목숨을 잃었다. 소설에서처럼 신생국가 인도와 파키스탄을 오가는 기차는 희생된 엄청난 시신들을 실어 날랐다. 수트레즈강도 학살되어 죽은 수많은 시신들로 가득했다. 이것은 소설이라기보다 시대의 참상에 대한 르포르타주처럼 다가온다.

 

저널리스트, 변호사, 외교관 그리고 직업 정치인이었던 쿠쉬완트 싱은 격동의 1세기(99세에 사망)를 살면서 인도에서 영국의 식민지배와 분단의 비극을 직접 경험하고 그것을 <파키스탄 행 열차>를 통해 문학적으로 승화시키는데 성공했다. 30년 전의 번역이라 그런지 표기는 조악하고, 오탈자는 난무했다. 그럼에도 쿠쉬완트 싱이 다루고 있는 비극의 재현이 갖는 성취는 기대이상이었다. 한 세기를 산만큼 소설과 단편, 에세이 등 다양한 저술이 존재하는데 국내에는 많이 소개되지 않은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다음엔 그의 대표작이라는 <델리>(미리 수배해 두었다)를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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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21-04-17 08:3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구하라 주실거이요, 찾으라 얻을것이니...이런 성경구절 있죠? ㅋ 딱 이런 경우네요~~대단하세요~

레삭매냐 2021-04-17 15:00   좋아요 2 | URL
평생 원하는 책만 읽으면서
살았으면 좋겠습니다.

뭐 지금도 어느 정도는 그러
고 있지만요 ㅋㅋ

바람돌이 2021-04-18 01: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책바다 서비스 진짜 대단해요. 저도 검색해보니까 읽고 싶은 책 전국 도서관 목록이 주르륵.... 제가 항상 도서관 갈때 제일 세금 내는 보람을 느낀다고 얘기하는데 책바다 서비스는 그 최고봉인듯 합니다.

20세기 아시아 아프리카 국가들의 분쟁 대부분은 제국주의 국가들이 뿌려놓고 간 것인데 그 분쟁의 씨앗들이 아직도 여전히 확대재생산 되는걸 보는건 항상 너무 힘들어요.

레삭매냐 2021-04-18 08:43   좋아요 1 | URL
어디에서 보았는데 도서관 말고는 우리가
비용을 내지 않고 그렇게 수 시간씩 자유
롭게 머물 수 있는 공간 자체가 없다고
하네요. 저도 바람돌이님의 말씀처럼 도서
관 관련 세금납부에 대해서는 대찬성입니다!

또한 현재 예전 식민지였던 아시아-아프리카
각지 분쟁의 원인을 제공한 서구 열강의 책임
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됩니다.

킹우니 2023-08-12 22: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제가 과제를 하게돼서 이 책을 꼭 읽어야하는데 책바다서비스를 처음이용하는데 승인절차가 꽤 걸리네요,, 급하게 구해야하는데 책배달을 시켜야하는상황이네요 흙ㄱ 혹시 영어파일을 구하셨다했는데, 어디서 구했는지알 수있을까요? 영문으로라도 빨리 읽고싶어서요ㅜ
 



오랫동안 만나고 싶었던 책을 드디어 책바다 서비스로 구해서 읽고 있다.

어제 충주에서 보내온 책이 도서관에 도착했다고 해서 저녁 먹고 나서 부랴부랴 달려 갔다. 그리고 그전에 빌린 아민 말루프의 <타니오스의 바위>는 반납했다.


그리고 집에 돌아와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어찌나 재밌던지. 새벽까지 절반 가량 읽었나. 잠깐 알라딘을 검색해 보니 작고하신 제발트 작가의 에세이집이 나왔지 뭐냐 그래. 그것도 적립금으로 주문하고. 어제 할 걸, 새벽에 했더니만 내일 도착 예정이라고 한다. 일단 오늘 <파키스탄> 다 읽고 내일부터 도전해야지 싶다. 4월 독서는 진도가 쭉쭉 나가는구나.


시간적 배경은 19478월이고, 인도 대륙이 종교 분쟁으로 두 개의 다른 나라로 탄생하기 직전 펀잡 지방의 국경 마을인 마노 마즈라가 공간적 배경이다.

라호르와 수도 델리를 잇는 기차가 오가는 작은 마을이다. 그동안 힌두교도와 무슬림 그리고 시크 교도들이 사이좋게 살았는데 영국의 분할 식민통치 덕분에 갈갈이 찢겨 나가는 시절을 그 배경으로 한다.


며칠 전에 만난 아룬다티 로이의 <작은 것들의 신>에서도 그랬듯, 인도에서는 모든 게 폭력적인 방식으로 해결된다. 마음의 여유만 있다면 바로 다 읽고 리뷰를 쓰고 싶은데 족쇄(?) 때문에 그러지 못하고 있다. 안타깝구나. 암튼 오늘 다 읽어야지.


쿠쉬완트 싱의 <델리>는 집에 수배해 두었다. 다른 책인 <몬순>을 책바다로 해서 받아볼까 어쩔까 고민 중이다. 도대체 아무런 정보가 없어서 선뜻 빌리기가 그렇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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붕붕툐툐 2021-04-16 22:3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4월 진도 쭉쭉 나가심을 축하드립니다! 책바다 서비스? 이건 전국 도서관 상호대차 같은 건가요? 궁금해라~ 검색해 봐야겠어요! 책 재미질 거 같아요!!

레삭매냐 2021-04-17 08:44   좋아요 1 | URL
넵, 나름 결산 때문에 몸과 마음이
분주했던 3월의 독서 슬럼프를 가뿐
하게 넘어섰답니다 ~

책바다 서비스는 말씀해 주신 대로
전국의 도서관들을 잇는 상호대차
네트워크 시스템이랍니다. 오래된
책들은 신도시 도서관에는 없어서
요 서비스를 이용하게 되었답니다.

책은 끝내 주면서도, 또 슬프고
그랬습니다.

단발머리 2021-04-17 08:3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책 빌리는데는 진심인데 읽는 속도가 영 따라가질 못해서요. 레삭매냐님 리뷰 먼저 만나는걸로 하겠습니다^^

레삭매냐 2021-04-17 08:45   좋아요 1 | URL
너무 오래 전에 나온 책들은
동네 도서관이나 중고 서점에서도
구할 수가 없더라구요.

책에 대한 정보가 전무하니... 선뜻
책바다에 요청하기도 그렇더군요.

저도 도서관에서 책 빌리고 못읽고
반납하기의 연속이랍니다 ㅋㅋㅋ
 
작은 것들의 신 (무선)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35
아룬다티 로이 지음, 박찬원 옮김 / 문학동네 / 2016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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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ppetite for Destruction, 소설을 다 읽고 나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록밴드 건즈 앤 로지즈의 위대한 데뷔 앨범 타이틀 제목이 떠올랐다. 24년 전에 발표되고, 무려 5년 전에 사둔 책을 이제야 읽었다. 그러게 사둔 책은 언제고 반드시 읽는다. 이번이 세 번째 시도였던 것 같다. 우리 달궁의 헤르메스 브로가 언젠가 이 책의 저자 아룬다티 로이에 대해 절찬을 해서 읽지 않고 배길 재간이 없었다. 그 때 이미 절판된 책이어서(나중에 문동 버전이 나왔다)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다가 반납했던가. 그리고 문이당 책도 구했지만 못 읽었다. 다시 문동 버전으로 나왔다. 수차례 초반부만 열심히 읽다 보니 이제는 익숙하더라.

 

이번에도 일 년 전부터 읽다 만 책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바로 어제 저녁부터. 그전에 정확하게 135쪽을 읽었는데 하루 만에 나머지를 다 읽어 버렸다. 이 소설의 초고를 본 에이전트가 돈다발을 싸들고 인도의 로이 여사를 찾아갔다고 하는 전설 같은 이야기가 전해져 내려온다. 로이 여사는 첫 소설로 단박에 부커상 대박을 냈다.

 

이 책을 읽고 나니, 내가 사는 세상은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의 조화로 이루어져 있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어차피 큰 것들은 내가 선택하거나 바꿀 수 있는 그런 부분들이 아니다. 소설에서는 인도의 고질적 카스트제도가 규정하는 사랑의 법칙(Love Laws)라던가, 관습이라는 미명 아래 행해지는 폭력적 해결 방식 등이 아마 큰 것들이리라. 대신 작은 것들은 충분히 취사선택이 가능하고, 당장에라도 이룰 수 있는 그런 것들이다. 오늘 점심 메뉴로 두꺼비 부대찌개를 먹을 것인가, 아니면 천인감자탕을 먹을 것인가. 그리고 오늘은 읽다만 파스칼 로즈의 <제로 전투기>를 마저 읽을 것인가 아니면 책바다 서비스로 도착할 예정인 쿠쉬완트 싱의 <파키스탄 행 열차>를 먼저 읽을 것인가, 이런 것들이 아마 작은 것들이리라. 하지만 이런 작은 것들이 하나둘씩 모여 나의 어설픈 구성하는 게 아닐까.

 

소설 <작은 것들의 신>1969년 인도 남부 케랄라 주의 아예메넴에서부터 이야기를 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23년 뒤인 1993, 암무가 낳은 쌍둥이 에스타()과 라헬의 재회를 오가며 시간과 공간의 경계들을 무시로 허물어 버린다. 쌍둥이들은 태어날 때도 남달랐던 모양이다. 하마터면 버스 안에서 태어날 뻔 했다지. 소설 속 캐릭터들의 궤적은 저자인 아룬다티 로이의 삶의 그것과 비슷한 항해를 선보인다. 결국 작가는 자신의 스토리텔링을 풀어낼 수밖에 없는 그런 존재가 아닐까 싶다는 생각도 조금 들었다. 오로지 자신의 머릿속에서 벌어지는 상상만으로 그런 방대한 이야기들을 풀어낼 수 있다고 생각할 수가 없다 나는.

 

이란성 쌍둥이인 에스타와 라헬은 서로 떨어져 살 수 없는 그런 존재였지만, 영국 사촌 소피 몰의 죽음으로 그럴 수밖에 없는 운명에 처하게 된다. 아이들이 소피 몰을 마중하는 연극에 나서기 전에 보러 간 <사운드 오브 뮤직> 관람은 확실히 작은 것들 중의 하나였다. 반면, 시리아 정교도 성당에 안치된 어린이용 관에 누운 소피 몰의 장례식은 큰 것들이었다. 사랑의 규칙에 대범하게 도전한 암무와 달리트 파라간 출신 벨루타의 사랑은 엄격한 카스트제도가 규정한 소위 <사랑의 법칙>에 도전장을 낸 큰 것들의 일부였다.

 

벨루타는 암무의 엄마 맘마치가 실제적으로 운영하는 <파라다이스 피클>의 실질적인 운영자였지만, 부르주아 지주 계급인 맘마치는 벨루타에게 정당한 임금을 지불하지 않는다. 단지 그가 불가촉천민이라는 이유 때문에 말이다. 이런 유동적인공화국에서 벨루타가 급진적인 공산주의자 그룹에 합류하지 않는다면 그게 더 이상한 일이 아니었을까. 암무와 벨루타의 사랑을 파국으로 몰고 간 주범 대고모 베이비 코참마의 악행에 대해서는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자신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의 주인공이었으면서도, 타인의 작은 사랑은 받아들이지 못했다. 아니 자신이 사랑한 신부가 힌두교도로 개종한 게 더 큰 충격이 아니었을까. 만신의 나라 인도에서는 정말 불가능한 게 없을 것 같다는 그런 생각이 들 정도였다.

 

소설 속 주인공들은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이 쉴 새 없이 충돌하고 무언가 결론을 도출해내는 그런 혼돈의 세상을 살아간다. 큰 것들은 폭력적인 방식을 동원해서 예방접종이라는 허울 좋은 미명으로 작은 것들을 제압한다. 아무런 위협이 되지 않는 작은 것들의 연합에 두려움을 느껴서였을까? 가촉민 경찰들은 그들만의 엉터리 구호로 무장하고 베이비 코참마의 무고에 의해 성폭행 미수범이자 아이들 유괴범으로 지목된 벨루타를 습격해서 그야말로 무자비한 폭력의 끝판왕적인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암무와 에스타펜 그리고 라헬이 사랑했던 목수 벨루타는 감옥에 갇혀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베이비 코참마는 왜 그런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을까? 결국 그녀의 무고는 벨루타를 죽음으로 인도하고, 암무 역시 31살의 나이에 죽게 만들지 않았던가. 베이비 코참마로 대표되는 기득권 계급은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달리트들이 자신들이 유지하고 있던 기존 질서를 허무는 것을 원하지 않는다. 프랑스혁명 이래, 비폭력적인 방식으로 기존 질서를 타파한 적이 있었던가. 분노의 주술사였던 베이비 코참마는 우선 국가 폭력의 위임자인 경찰을 이용해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고 했고 자신의 기획이 암무의 진술로 실패하자, 그 다음에는 소피 몰을 잃은 자신의 조카 차코를 조종해서 암무 일가를 풍비박산으로 만들어 버린다. 인도 사회가 수천 년된 카스트제도를 개선할 수 없어 보이는 것처럼, 큰 것들과 작은 것들의 조화와 평화로운 공존은 그런 점에서 요원해 보인다.

 

폭력은 인도 사회에 기본 구성 요소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자주 등장한다. 전통을 고수하는 극우 힌두이즘을 신봉하는 이들이 자행하는 폭력은 어제 오늘의 일이 아니다. 1947815, 인도 국가 자체가 파키스탄과 분리 독립하는 순간부터 유혈 속에서 탄생하지 않았던가. 맘마치는 영국 제국의 나방을 연구하는 고상한 곤충학자 파파치에게 지속적으로 두들겨 맞았다. 딸인 암무도 예외는 아니었다. 승마 채찍으로 파파치는 딸을 때렸다. 암무 역시 벵골 출신 알코올 중독 남편에게 가정폭력을 당했다. 이런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낼 방법은 존재하지 않는단 말인가. 그들이 끝없이 구사하는 이런 폭력의 근원에는 무언가를 상실할 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존재한다.

 

한편 아룬다티 로이가 구사하는 후각 이미지가 소설 내내 흥미로웠다. 기득권 세력자의 수호자라고 할 수 있는 베이비 코참마는 파라간 벨루타로부터 나는 냄새를 역겨워한다. 아니 그게 실제로 존재하는 지도 모르겠다. 식민 종주국에서 날아온 소피 몰은 인도가 풍기는 후진국 냄새에 질색한다. 포스트콜로니얼 시대에 식민 종주국이 후각이라는 민감한 접점으로 형상화한 혐오와 차별은 기존의 카스트제도와 화학적 결합을 시도하면서 강력한 내러티브의 힘을 독자에게 시전한다. 하루가 다르게 강 부근에 섭생하는 식물들의 크기가 줄어들고, 오염되는 모습들을 냄새의 변화에 담아 저자는 설득력 있게 전달한다.

 

소설 속에는 숱한 모순들이 피고 지는데, 내가 가장 주목한 모순은 바로 공산당 지도자 필라이 동지의 그것이었다. 계급타파의 선봉에 서야할 노동자 계급의 공산주의자 필라이 동지 역시 위기에 빠진 당원 벨루타를 돕는 대신 조직의 이익을 우선시한다. 암묵적 사랑의 법칙을 위반한 벨루타를 보호하는데 앞장서지 않는다면, 도대체 누굴 돕고 무엇을 개혁하겠단 말인가. 이 위선자는 심지어 공산주의자 행세를 하면서도 카스트제도로부터 자유롭지 못하다. 하긴 영국 옥스퍼드 로즈 장학생 출신의 차코도 필라이 동지와 다를 게 없다.

 

인도 지배계급으로 최상위 교육의 시혜자인 차코는 유사 막시스트 같은 모습을 보여준다. 하지만 그의 모습은 인도주의적 지배를 하고 싶었지만, 결국 저항하는 식민지 인도의 지식인들을 폭력적인 방식으로 다뤘던 식민종주국 영국의 제국주의자들과 다를 게 없었다. 어머니인 맘마치와 달리 가업인 <파라다이스 피클>을 그야말로 나락의 구렁텅이로 몰아넣는다. 물론 경영의 모든 책임이 차코만이 질 것은 아니지만.

 

두 개의 시간대를 오가는 소설만큼이나 나의 리뷰도 정제되지 않고, 그야말로 마음 가는 대로 써 내린 게 아닌가 싶다. 작은 것들로 대박난 저자는 그동안 인도 사회의 변혁과 여러 가지 큰 것들에 정진해 왔다. 그리고 두 번째 소설 <지복의 성자>로 다시 돌아왔다. 그런데 성과는 데뷔작만 못하다는 게 중론인 것 같다. 그 책도 사두기는 했지만 아직 읽을 생각조차 못하고 있다. 당장에 읽어야 할 책들이 너무 많다는 이유로 말이다. 세 번이나 도전해서 다 읽을 수 있어서 기뻤다. 사랑, 광기, 희망 그리고 무한한 기쁨 중에 마지막에 해당하려나.


[뱀다리] 아주 그냥 오래 전 Poison 이 부른

팝송의 가사 생각이 났다.


Every rose has its thorn

Just like every night has its dawn

Just like every cowboy sings his sad, sad song

Every rose has its thor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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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아 2021-04-15 12:4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처럼 리뷰 쓰고 싶어요! 몇 년 더 책을 많이 읽으면 가능하긴 할까요?^^;; 공식적으로는 1947년 폐지됐다는데 카스트제도의 흔적은 인도에서 언제쯤 사라질지. 의식적인 문화가 더 무섭다는 생각이 듭니다.
아 오늘 또 이 책 저 책 담아갑니다.

레삭매냐 2021-04-15 17:19   좋아요 3 | URL
원래 제대로 한 번 리뷰를 써 보려고
메모도 열심히 하고 그랬는데 막상
본 리뷰에 들어가서는 제대로 써 먹지
도 못하고 감으로 적어 버렸네요 ㅠㅠ

인도와 카스트제도는 뗄래야 뗄 수 없
는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작가들
에게는 정말 좋은 소재가 아닐까요.

새파랑 2021-04-15 16:3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건즈 앤 로지스가 떠오르는 책이라니~! 완전 정글같은 책인가 보군요 ㅎㅎ ‘작은 것들의 신‘ 이란 문장은 많이 들어봤는데 읽어보고 싶어요^^

Falstaff 2021-04-15 16:44   좋아요 5 | URL
메냐 님의 별점이 좀 짰습니다. ㅋㅋㅋㅋ
이 책의 독자 평가가 왔다 갔다 하는데요, 로이하고 맞기만 하면 정말 왔다입니다.
전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톱텐에 이 작품을 넣고 싶을 정도로 좋았습니다.
이거 딱 한 권으로 그만 아룬다티 로이를 숭배하게 됐잖아요 글쎄.

레삭매냐 2021-04-15 17:21   좋아요 3 | URL
모든 갈등을 폭력적으로 해결한다는
점에서 예의 정글 같은 ˝파괴욕망˝
이 연상됐습니다.

scott 2021-04-15 16:5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읽고 보니 매냐님 별 하나 뺴쉼 ㅎㅎ 별넷 냉정한 평가,동감 합니다!

레삭매냐 2021-04-17 15:03   좋아요 1 | URL
왠지 시류에 편승해서 아니면
어떤 시류를 만들고자 오리엔탈리즘
적인 요소를 가미하지 않았나 하는
그런 (비)합리적인 의심의 발로가
아닐까 합니다.

coolcat329 2021-04-16 11: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정말 너무너무 좋아합니다. 그냥 좋아요 🥲

레삭매냐 2021-04-17 15:04   좋아요 1 | URL
이 책의 팬들이신 분들이 참 많은
것 같습니다 :>

작가의 소설과 다른 책들은 결이
많이 달라서 선뜻 평가 내리기가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맞습니다, 좋아하시는데 뭔 이유가
필요하겠습니까.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 -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지운 나의 뿌리를 찾아서
잉그리드 폰 울하펜.팀 테이트 지음, 강경이 옮김 / 휴머니스트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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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치 독일에는 두 가지 핵심정책이 있었다. 하나는 대학살의 원인이 되었던 반유대주의 그리고 다른 하나는 레벤스라움이라고 불리는 생존권 정책이었다. 후자는 독일 제3제국의 총통 아돌프 히틀러가 2차세계대전을 일으켜 전 세계를 전쟁의 참화 속으로 밀어 넣은 원인이었다. 그리고 새롭게 레벤스보른(Lebensvborn), 독일어로 생명의 샘이라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제국의 실질적인 2인자 하인리히 힘러의 지휘 아래 실시된 비밀 프로젝트의 존재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것은 얼토당토 않은 유사 과학인 우생학에 근거해서 순수한 아리안족이 지배하는 세상을 만들겠다는 나치 광신도들의 맹신이 빚어낸 비극이었다.

 

먼저 우리는 <나는 히틀러의 아이였습니다>의 증언자 잉그리트 폰 욀하펜을 만난다. 그녀의 본명은 에리카 마트코, 구 유고슬라비아 지금은 슬로베니아의 첼예라는 곳에서 납치되어 독일 가정에 위탁아동으로 양육되었다. 어릴 적의 기억들은 모두 제거되고, 독일인으로 자라게 되었다. 함부르크 출신 그녀의 어머니인 기젤라는 물론이고 안스바흐 출신의 독일 행정장교 출신의 아버지 역시 그녀에게 진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린 시절부터 잉그리트는 왠지 가족들이 자신을 대하는 태도가 다르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그리고 같이 살던 동생 디트마어가 떠났다. 어머니 기젤라는 전후에 소련군 점령지역에서 서방 연합군 점령지역으로 탈출에 성공한다. 물리치료사가 된 기젤라는 점점 더 독일 어린이로 성장해 가던 잉그리트에게 그녀가 슬로베니아 저항투사의 딸이었다는 사실을 알려주지 않았다.

 

어렴풋이나마 자신이 욀하펜 집안의 혈육이 아니라는 점을 알고 있던 잉그리트는 거의 반세기가 지나서야 비로소 자신의 뿌리를 찾게 된다. 근원은 1930년대 나치가 집권하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생학에 경도되어 있던 나치 지도부는 금발의 푸른 눈, 건장한 체격의 미래 아리안 전사들을 그들이 정복할 세계의 지배자로 만들겠다는 야심찬 프로젝트를 진행하기에 이른다. 20세기 초반 독일의 인구증가율은 꾸준하게 하향선을 그리고 있었다. 나치는 정책적으로 순수한 아리안족의 혈통을 강조하면서, 전쟁을 위한 전사이자 지배자로서 많은 젊은이들이 필요하리라는 점을 인식했다.

 

특히 나치 조직의 핵심을 이루는 친위대 같은 경우, 자그마치 17세기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혈통의 순수성을 입증해야 했다. 독일 특유의 관료주의와 서류작업이 그야말로 빛을 발하는 순간이 아니었을까. 다산을 장려하기 위해, 나치는 갖가지 출산장려정책들을 구사했다. 세금면제를 시작으로 해서, 가정을 꾸리면서 진 빚을 아이 넷을 낳으면 모두 탕감해 주는 파격적인 정책도 실시됐다. 다산한 독일의 어머니에게는 훈장도 수여됐다. 상점에서 VIP 대접을 해주라는 명령도 있었다. 그래도 독일의 출산율은 획기적으로 늘어나지 않았다.

 


힘러가 이끄는 친위대를 중심으로 해서 혼외정사로 태어난 아이들을 양육하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가 가동되기 시작했다. 당시까지만 해도 독일 사회는 굉장히 보수적이어서, 미혼모들이 아이들을 기르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나치 친위대의 종축장이라고도 불렸다고도 한다. 당대에도 해당 프로젝트는 그다지 인기를 끈 정책이 아니었던 것 같다.

 

미치광이 총통에게 600개 연대를 선사하기 위해서는 적어도 해마다 30만 명의 아이들이 태어나야했다. 전쟁 전에도 그것은 불가능했지만, 젊은이들이 한 주에도 수천 명씩 죽어나가는 전쟁 중에는 더더욱 불가능했다. 해괴한 짓거리를 하는 데 있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나치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가속화를 위해 점령지에서 자신들의 인종 기준에 적합한 아이들을 납치하기에 이른다. 아마 이 때부터 비극이 시작된 게 아닐까.

 

에리카 마트코, 그러니까 잉그리트 역시 이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납치되어 독일 가정에 입양된 것이다. 그녀는 성장해 가면서 불완전한 자신의 신분 때문에 갖은 고초를 겪는다. 일단 출생증명서가 없기 때문에 온전한 독일인으로서 시민권을 인정 받지 못했다. 유일한 공적 서류인 예방접종증명서에는 잉그리트 폰 욀하펜이 아닌 에리카 마트코라는 이름이 적혀 있었다. 자신의 출생에 무언가 문제점이 있다는 걸 알게 되었지만, 냉전으로 철의 장막이 드리워져 있었기에 진실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더 오랜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도 나중에 고백하지만, 진짜 자신을 찾는 과정에 잉그리트는 수도 없이 실마리를 찾은 기쁨과 곧 이어 찾아오는 좌절 때문에 번민해야했다. 주변의 도움으로 간신히 자신의 이름이 에리카 마트코라는 사실을 확신하고 새로 유고에서 독립한 슬로베니아 정부에 문의해 보니, 로가슈카슬라티나에 자신의 이름과 똑같은 에리카 마트코가 살고 있다고 하지 않던가. 그렇다면 도대체 자신은 누구란 말인가? 어머니 기젤라와 아버지 모두 비밀을 밝히지 않고 세상을 떠났다. 의붓동생은 AIDS로 사망했다. 그런 잉그리트는 결혼하고 평범한 가정을 꾸릴 수가 없었다.

 

장애 아동을 도우면서 물리 치료사로 살던 그녀가 자신의 진짜 정체성을 찾는 데는 더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자신과 같은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아이들과 만나는 장면에서 자신은 아무 것도 모른다며 우는 장면은 정말 오래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책을 다 보고 나서 잉그리트가 출연하는 짧은 다큐멘터리를 봤는데, 담담하게 이야기를 이어가는 그녀의 모습이 참 인상적이었다.

 


레벤스보른 프로젝트는 독일 국가가 세상에 알리고 싶지 않은 그런 수치였다. 말도 안되는 인종주의에 입각해서 이런 프로젝트가 존재했다는 사실만으로도 부끄럽지 않은가. 훗날 잉그리트가 자신의 뿌리를 찾기 위해 동분서주할 적에, 독일 관료들이 얼마나 비협조적이었던가. 연합군에 의해 히틀러 독재로부터 해방이 된 뒤에도, 욀하펜 집안에 편입되길 희망하던 잉그리트에게 그 집안의 피가 섞이지 않았으니 이름 앞에 마트코를 붙이라는 행정 편의주의적 아이디어를 낸 장면에서는 기가 막힐 노릇이었다. 이것을 여전한 인종주의의 잔재로 봐도 되지 않을까 싶었다.

 

책의 도중에 보헤미아 총독으로 금발의 짐승이라는 별명으로 불리던 힘러에 버금가는 빌런 라인하르트 프리드리히 암살로 처벌받게 된 체코 리디체 마을의 비극이 등장해서 깜짝 놀라기도 했다. 비극은 그렇게 연결되는구나 싶었다.

 

일찍이 괴테의 말처럼 당신이 소망하는 것을 조심하라는 격언은 잉그리트의 자기 뿌리찾기에도 그대로 적용되었다. 자신을 대체한 에리카 마트코와 만나고 싶었으나, 에리카는 그녀와의 만남을 거부했다. 처음에는 에리카의 태도에 잉그리트는 분노했지만, 시간이 지나고 생각해 보니 에리카 역시 해괴하기 짝이 없는 레벤스보른 프로젝트의 또 다른 희생자였다는 사실을 이해하게 되었다. 진실이 드러나게 되었을 때, 과연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있을까.

 

또 다른 질문 하나가 머릿속에서 떠나지 않고 맴돈다. 잉그리트, 그러니까 진짜 에리카 마트코가 슬로베니아의 부모에게로 돌아갔다면 독일에서보다 행복하게 살 수 있었을까? 알 수 없는 일이다. 다큐멘터리 말미에서 인터뷰어가 그녀에게 묻는다. 자신을 슬로베니아 사람 아니면 독일 사람으로 생각하는지. 그녀는 대답한다. “I feel German.”


[뱀다리] 이 책은 공동저자 팀 테이트 덕분인지 구성이나 전개 그리고 역사 서술에 있어 대단히 잘 쓰인 책이다. 마치 한 편의 다큐멘터리를 보는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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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1-04-13 12:5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레벤스보른은 <소피의 선택>의 가장 중요한 주제가 되기도 했더란 말입죠.

레삭매냐 2021-04-13 21:56   좋아요 0 | URL
으아, 소피의 선택도 도전해 봐야 하나요...

역시나 세상은 무지 넓고, 읽을 책들은
넘쳐 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