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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범 - 어떻게 두꺼비를 삼킬 것인가 ㅣ 동안 더 빅 북 The Big Book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 지음, 최명희 옮김 / 동안 / 2015년 4월
평점 :
품절

이탈리아에서 가장 많이 팔린 소설이자 가디언에서 선정한 세계 10대 역사소설이라는 광고가 허명이 아니었다. 그 외에도 이런저런 책에서 이탈리아 출신 작가 주세페 토마시 디 람페두사의 <표범> 혹은 <레오파드>에 대한 이야기를 들어서 원작 소설이 궁금했다. 그리고 마침 수년 전에 수배해둔 <표범>이 가까이에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바로 책을 펴들었다. 그렇게 잘 읽다가 잠시 휴지기를 거쳐 마침내 다 읽었다.
람페두사가 고른 시기는 1860년 5월 그리고 공간은 부르봉 왕조의 지배를 받고 있던 두 개의 시칠리아 왕국 중에 하나였던 시칠리아였다. 우리의 주인공은 50세의 멋쟁이, 살리나 공작 돈 파브리치오다. 북부 피에몬테의 사르디니아 왕국을 중심으로 한 리조르지멘토(Risorgimento:이탈리아 통일운동)가 한창이었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서, 귀족들이 세상을 지배하던 시절은 끝장이 났다는 것이다.
사회경제적으로 성공한 부르주아 계급이 기존의 지배계급이었던 귀족들을 대신해서 새로운 질서의 주인공으로 부상했다. 수백년 동안, 민중 위에 군림해온 귀족들은 이러저러한 이유로 자신들의 영지를 지키지 못하고 몰락해 가고 있었다. 수대에 걸쳐 교양과 예의범절 그리고 특유의 신중함으로 무장한 돈 파브리치오를 필두로 한 귀족들은 새로운 혁명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했다. 다가오는 불온한 혁명의 움직임에 귀족들의 반응은 엉성했다.

돈 파브리치오의 젊은 조카 탄크레디 팔코네리 공작 같은 경우, 혁명군의 대열에 서서 부르옹 왕조의 대항에 나선다. 책을 다 읽고 나서, 루키노 비스콘티가 1963년에 만든 동명의 영화도 보게 됐다. 영화는 상당히 소설에 충실한 편이다. 종교와 가정에 충실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난봉꾼 역할을 무난하게 해내는 돈 파브리치오 역의 버트 랭카스터는 안성맞춤의 캐스팅이었다. 시대의 미남자 알랭 들롱이 맡은 탄크레디는 또 어떤가. 팜므 파탈 같은 매력을 발산하는 앙겔리 역의 클라우디아 카르디날레도 대단했다.
소설에서는 밋밋하게 전개된 팔레르모 시가전이 영화에서는 기대 이상의 규모로 스펙터클하게 재연되었다. 리조르지멘토의 국민 영웅 주세페 가리발디가 이끄는 천인대(붉은 셔츠부대)가 목숨을 내걸고 부르봉 왕군과 싸우는 장면은 대단했다. 총탄과 포탄이 난무하는 가운데, 부르봉 왕군은 포로로 잡은 천인대원들을 현장에서 즉결처분한다. 총살당한 병사들의 가족들은 눈앞에서 벌어진 비극에 울부짖는다. 부르주아로 보이는 왕당파 스파이를 매달라는 시민들의 함성이 거리를 가득 메운다. 이 때, 눈에 들어온 인물이 하나 있으니 내게는 <돌아온 튜니티>로 얼굴이 익은 이탈리아 출신 테렌스 힐이었다. 놀랍군 그래. 마카로니 웨스턴 배우로만 알았던 튜니티가 이런 역사물에도 출연을 했었군.
소설 <표범>에 리조르지멘토라는 커다란 역사의 축이 있다면, 또다른 한편에는 젊은 청춘들의 로맨스가 자리 잡고 있다. 무언가 이루어질 것 같았던 사촌지간인 탄크레디와 돈 파브리치오의 영양 콘쳇타의 사이에, 촌장 카로제로의 아름다운 딸 앙겔리가 등장하면서 파문이 인다. 돈 카로제로는 혁명군에게 적극적으로 협력하면서 신흥 부르주아 계급으로 성장하기 시작한다. 그는 자신의 주인이었던 영주들에게서 토지를 사들이고, 자산을 늘리는 방식으로 사회경제적 부를 축적한다. 매력적인 앙겔리의 외모에 반한 탄크레디에게 몰락해가는 살리나 공작의 영양인 콘쳇타 보다 앙겔리와의 결합이 미래의 성공을 보장해 줄 것이라고 냉정한 돈 파브리치오는 판단한다.
기존의 귀족계급을 대신할 부르주아 계급의 대두라는 도도한 역사의 흐름 앞에 돈 파브리치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었다. 그로서는 전란의 혼란기에 가족들의 생명을 지키고, 얼마 남지 않은 영지를 수호하는 게 고작이었다. 파도처럼 몰려오는 혁명의 물결 앞에 무기력한 돈 파브리치오였지만, 마지막 남은 표범 혹은 사자답게 세파에 대처하는 모습도 보여 주었다. 새로운 통일국가 이탈리아에서 상원의원을 맡아 달라는 부탁에 대해서도 정중하게 거절하고, 아내와 후계자인 장남을 먼저 보내고 임종을 맞는 순간까지 존엄과 자부심을 지키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예수회 출신 피로네 신부도 주목할 만한 캐릭터다. 살리나 공작 가문에 봉사하면서, 그네들의 특성을 꿰뚫은 혜안을 기른 파드레는 너무 빠르게 변하는 시대의 흐름이 마땅치 않은 농민들에게 의전 같은 스타일에 집착하는 귀족들의 속성에 대해 설파하기도 한다. 법적으로 해결하기 까다로운 문제에 있어서는 파드레라는 신분을 빌어 양측의 화해를 도모하기도 한다. 혼전임신을 한 조카 운칠리나를 위해 해결사로 나선 피로네 신부는 자신의 백부 투리가 신부의 여동생 사리나 몫인 아몬드 밭을 탐하는 장면을 통해 귀족이나 농민이나 다를 게 없다는 점을 확인하기도 한다. 혁명군이 가톨릭 교회가 소유하고 있던 토지들을 몰수하자, 그동안 교회가 해오던 빈민구제 같은 사업을 누가 대신할 것인가를 두고 의견을 나누는 장면도 기억에 남는다.

폰테레오네 집안에서 벌어진 사교모임의 꽃이라고 할 수 있는 무도회 시퀀스는 압권이었다. 영화에서는 자그마치 45분에 달한다고 하던데, 종언을 앞둔 귀족사회의 마지막 불꽃놀이였다고나 할까. 시칠리아의 한다하는 선남선녀들이 모여, 먹고 마시고 즐기는 그들만의 세상을 연출했다. 좌중의 시선을 한데 모은 인물은 바로 돈 카로제로의 딸이자 미래의 공작부인인 앙겔리였다. 그동안 갈고 닦은 사교계의 기술을 선보일 수 있는 절호의 찬스였고, 돈나 앙겔리를 위한 완벽한 사교무대 데뷔전이었다. 앙겔리는 탄크레디의 외삼촌 돈 파브리치오에게 마주르카를 추자는 제안을 던지고, 노쇠한 자신의 스텝을 고려한 살리나 공작은 왈츠를 추는게 어떠냐고 응대한다. 진짜 고수들의 대결이 아닌가. 저녁을 같이 하자는 앙겔리의 제안에 대해서도, 자신의 경험을 유추해서 정중하게 사양하는 절제의 미덕을 선보이기도 한다. 바로 이런 게 귀족 스타일이라는 점을 람페두사 작가는 예리하게 짚어낸다. 고수답지 않은가.
가리발디의 마르살라 상륙 후, 반세기가 지난 시점의 엔딩에서는 미혼으로 인생의 황혼을 맞은 콘쳇타가 다시 한 번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자신이 아닌 앙겔리를 선택한 탄크레디에 대한 비밀이 드러나고, 공작가의 영양들이 애지중지하던 초상화와 성물들이 교구 사제의 부적격 판정을 받는 것으로 소설 <표범>은 마무리된다.
속세의 인간들이 가장 탐할 만한 주제인 정치, 종교 그리고 사랑을 전면에 내세운 람페두사 작가의 전략은 탁월했다. 소설의 주인공들은 다양한 방식으로 자신들이 바라는 욕망을 추구했다. 그리고 필멸의 존재들은 시간 속에서 사위어 갔다. 결국 역사의 수레바퀴를 굴리는 주체는 우리 인간이라는 점을 그는 <표범>을 통해 보여준다.
[뱀다리] 소설은 정말 훌륭하나, 번역은 너무 심했다. 감수를 하지 않은 걸까. 같은 페이지에서도 한 인물의 이름을 오기하다니... 해도 너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책의 본질을 생각한다면, 출간된 것만으로도 감사해야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