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고야 1 - 에스파냐 - 빛과 그림자 ㅣ 한길그레이트북스 109
홋타 요시에 지음, 김석희 옮김 / 한길사 / 2010년 10월
평점 :
절판

나중에야 그 가치를 알게 되는 책들이 있다. 그리고 그 때가 되면 책은 더 이상 시중에서 구할 수가 없게 된다. 그럴 경우, 도서관에서 빌리거나 중고책으로 데려와야 한다. 나의 경우에 어제부터 읽기 시작한 홋타 요시에의 <고야> 시리즈가 그랬다. 물론 중고로도 구할 수가 있겠으나, 시간이 없어서 그냥 도서관을 이용했다. 무려 4권이니 대충 300쪽만 잡아도 1,200쪽 되시겠다. 하지만 걱정 마시라, 우리의 저자 홋타 요시에 선생의 글은 이런 대작 쯤은 금세 읽을 수 있게 흥미진진한 이야기들로 가득하니 말이다.
3년 전에 사둔 고야를 그린 독일계 유대인 리온 포이히트방거의 <고야, 혹은 인식의 혹독한 길>도 있었구나. 사서 첫 몇 페이지를 읽긴 했었는데 홋타 요시에 작가의 책만큼 흡입력을 느끼지 못했던 것 같다. 아무래도 요시에 상의 책을 읽고 나서 포이히트방거의 책도 만나봐야지 싶다.
일본에서 1974년부터 1977년까지 장장 4년간 신문 연재로 발표된 <고야> 시리즈는 이방인으로 에스파냐 현지답사까지 마다하지 않은 저자의 노고가 담뿍 담긴 그런 책이다. 로마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대장정으로 우리에게는 그저 열정과 플라멩코의 나라로 알려진 에스파냐의 실체를 알려 준다. 카스티야 고원에 자리 잡은 에스파냐의 수도 마드리드가 북위 40도 정도(우리나라로 치면 신의주 정도에 해당한다)로 굉장히 추운 날씨의 나라라는 사실부터 찍고 들어가자. 에스파냐를 대표하는 춤이라는 플라멩코 역시 주류가 아닌 집시의 춤이라는 사실도 격파하자.
로마의 식민지로 출발해서 이슬람 세력에게 장장 800년간의 통치를 받은 뒤, 레콩키스타라는 국토회복운동으로 북부로 쫓겨난 기독교 왕국들이 무슬림 세력을 쫓아내고 카스티야 아라곤 연합으로 마침내 이베리아 반도의 통일을 이루는데 성공한다. 정치는 에스파냐 귀족들이 담당하고 기술은 이슬람 세력이 그리고 상업과 유통은 유대인들이 맡는 분업으로 에스파냐 국가는 굴러갔다.
홋타 요시에 작가는 에스파냐를 에스파냐답가 만드는 요소로 에스파냐어와 가톨릭을 꼽는다. 전자에는 800년 무슬림 통치의 영향으로 10%에 달하는 말들이 아랍어에서 온 말이라고 했던가. 가톨릭 왕국 에스파냐에서 종교는 국가적 단일성을 상징하는 동시에, 보수적 종교재판으로서의 부정적 이미지를 동시에 지니고 있다. 일단의 에스파냐 출신 모험가들이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해서 식민지를 개척하고 신대륙의 부가 모국 에스파냐로 흘러 들면서 제국은 그야말로 황금시대를 구가하기에 이른다.
좋았던 시절은 짧게 끝나고, 종교재판소가 사회 모든 차원에서 발목을 잡는 보수반동의 시대가 도래한다. 신대륙에서 흘러들어온 막대한 재화가 국가 재정을 파탄시키는 역효과의 원인이었다는 걸 사실을 처음 알게 되었다. 게다가 그런 노력 없이 획득한 재화 때문에 에스파냐 사람들을 힘든 일, 다시 말해 노동을 경멸하는 풍조마저 생기게 되었다. 여튼 홋타 요시에 작가는 우리의 주인공 프란시스코 고야가 에스파냐 북부 아라곤 지방의 사라고사 부근의 푸엔데토도스에서 1746년 3월 30일 태어나기 전까지 상당한 지면을 할애해서 18세기 에스파냐가 처한 현실을 개진한다.
불과 지금으로부터 275년 전에 태어난 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풍문과 전설로 포장되어 있다는 점도 요시에 작가의 저작을 흥미롭게 만드는 점 중의 하나다. 가난한 집안 출신이라는 속설과 달리 그는 도금 기술자인 아버지와 하급 귀족 딸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다른 저명한 천재 예술가와 달리 그는 어려서 그렇게 빛나는 실력을 보여주지는 못한 것 같다. 사실 그의 재능은 삼십대가 지나서야 비로소 만개했다고 하니, 대기만성형 예술가의 전형이라고나 할까.
17세기만 하더라도 디에고 벨라스케스라는 걸출한 화가의 존재로 에스파냐 회화는 전성기를 구가했다. 사실 당시만 하더라도, 화가들은 벨라스케스가 그린 <시녀들>에 나오는 난쟁이나 광대 같은 존재로 그림쟁이나 화공에 불과했노라고 저자는 묘사한다. 화가들은 귀족이나 사제들의 주문에 따라 인물화를 그리는데 주력했다. 벨라스케스만 하더라도 맞선용 그림을 그리는 그림쟁이였다고 할 정도니 말 다했다. 이 당시만 하더라도 작품과 작가의 주관 따위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그런 회화가 제작되었다. 오로지, 발주자의 주문에 의한 그림만이 존재할 뿐이었다. 벨라스케스의 그림에 영혼이 없다는 지적도 일견 타당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싶다.
그나마 그리스 출신 엘 그레코의 시대까지는 에스파냐 회화가 명맥을 유지했으나, 18세기 접어들면서 기존의 합스부르크 왕가를 대신한 부르봉 왕가가 에스파냐 왕위를 차지하면서 에스파냐는 그야말로 이웃 프랑스와 이탈리아의 예술적 식민지 같은 위치가 되었다나. 종교재판소의 엄숙주의는 당시 각국에서 유행하던 나체화 따위는 감히 상상도 할 수 없게 만들었다. 그러니까 억압적 분위기 속에서 자체 검열이 진행되던 그런 시기였던 것이다.
철저하게 현실순응주의자였던 젊은 날의 소년 고야는 사라고사에서 엄격한 도제식 예술교육의 진수를 전수받는다. 고전 예술의 창조 뒤에 이런 고된 과정이 있었을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저 자신이 그리고 싶은 주제들을 골라 그렸을 거라는 생각은 나의 철저한 오산이었다. 그림 그리는 법을 배우기 위해서는 숱한 고난의 시간들을 보내야 했다. 그런 과정을 거쳐 지금까지도 칭송을 받는 걸작들이 탄생했다는 걸 미처 몰랐다. 십대 소년이 된 고야는 마드리드를 거쳐, 이십대에는 예술세계의 중심이라는 로마도 경험했다.
그러는 동안 고야는 지금으로 치면, 그림쟁이들을 위한 오디션 프로그램에도 도전했다. 아직 자신의 재능이 꽃을 피우기 전이라 두 번 모두 떨어졌다. 오버그라운드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필요한 통과의례의 과정이 아니었을까. 경연대회와는 운이 닿지 않았는지 고야는 족족 탈락의 고배를 마셔야했다. 세 번의 경연도전 실패였다.
1766년에 발생한 민중폭동은 한 세대 뒤, 나폴레옹 군대에 유린된 에스파냐 민중봉기와 조응하는 전초전이었다. 예수회 탄압과 챙모자와 망토 금지령에서 촉발된 민중봉기는 그 어느 곳보다도 아라곤의 사라고사에서 격렬했다. 그 결과 250명에 달하는 이들이 즉결 처분되었다고 하던가. 젊은 청년 고야를 충격으로 몰아넣은 것은 그것보다도 쇠사슬을 찬 채 끌려가는 사제들의 모습이었다. 결국 그동안 에스파냐 사회를 지배해온 종교권력에 대한 세속권력에 대한 승리라고 분석해야 할까.
거의 전설이 되어 버린 고야가 가는 곳마다 발생하는 폭력사건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진진하다. 전설과 풍문이야말로 자신 같은 글쟁이들이 활약할 수 있는 공간을 만들어주는 게 아니냐는 홋타 요시에의 유머감각에 그야말로 두 손 두 발 다 들 수밖에. 이백 수십 년 전에 생존했던 실존 인물의 빈 공간을 마구 파고 들어가 자신의 상상력으로 채우는 장면은 그야말로 압도적이었다. 그렇지 이 맛에 바로 역사소설을 읽는 게 아닐까 싶다.
25세의 고야는 다시 고향 사라고사로 돌아온다. 그리고 미래의 매형 바예우의 조언으로 사라고사 엘 필라르 대성당의 천장화 수주를 맡는다. 사전에 경쟁자 곤살레스 벨라스케스의 낙찰가를 알고, 상대적으로 적은 금액으로 발주를 따내는데 성공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저자는 고야가 자신이 원하는 바를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인물이었다는 점을 꼬집는다.

홋타 요시에 선생은 고야가 처음으로 그린 초상화에 대한 분석을 하면서 아주 의미심장한 시도도 등장한다. 그의 귀가 보이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것은 중년에 귀머거리가 된 실제 상황에 대한 예언처럼 들린다. 사실 청각 상실의 진짜 이유는 천둥 번개 때문이 아니라 젊은 시절 로마와 마드리드의 유곽에서 방탕한 생활을 했기 때문이라고 저자는 밝힌다.
출세를 위해 바예우의 동생과 정략결혼해서 자그마치 스무 명에 달하는 자식들을 생산한 고야의 가부장적 태도에 대해서도 저자는 신랄한 비판을 감추지 않는다. 고야는 훗날 궁정화가로 활동하면서 숱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는데, 그것은 당시 대외적으로 엄숙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실제로는 타락할 대로 타락한 귀족사회의 그것과 견주어 비판한다.
일단은 여기까지... to be continued...
어쨌든 신분세탁을 위해 하급 귀족 출신이었던 어머니 집안의 데(de)라는 귀족 칭호까지 날조하고 가문의 인장까지 만드는데 열중했던 고야는 이십대 후반에 드디어 성공 가도를 달리기 시작한다. 대세순응주의자였던 고야는 스승님인 루산이나 처남 파코까지 제치고 사라고사에서 명실상부하게 제일 잘 나가는 그림쟁이의 반열에 올랐다. 그리고 전체를 중시하고 세부는 전체를 위해 봉사해야 한다는 고야의 이데올로기가 등장한 것도 엘 필라드 대성당의 프레스코 천장화에 이어 아울라 데이 수도원의 벽화를 정복하면서 자신감을 얻은데 힘입었다. 그의 다음 목표는 에스파냐 세게의 중심 마드리드 정복이었다.
한편 세계제국 에스파냐의 현실은 그야말로 빛 좋은 개살구였다. 왕실에서는 모직물이나 태피스트리 공장 같은 생산시설에 투자했지만, 그것은 민중을 위한 기초제품 생산이 아니라 어디까지나 왕실의 사치를 위한 것이었다. 세기의 라이벌 영국이 훗날 모직을 대체할 면직물 생산에 전력투구하면서 에스파냐가 영국을 따라잡을 기회는 영영 사라져 버렸다. 기사 계급 이상에선는 육체노동을 경멸하는 사회풍조가 대세였다. 홋타 요시에 선생은 이런 17세기 에스파냐의 사회경제적 요소들까지 아우르는 방대한 작업을 시전한다. 대단하지 않은가. 단순하게 어느 한 예술가의 삶만 추적하는 것이 아니라, 그 예술가가 살던 시대에 대한 조망까지 한다는 게 얼마나 지난한 작업이었을까. 이방인 예술가의 삶을 추적하는데 시간과 노력을 투자한 요시에 선생의 노고에 감탄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이렇다 할 산업시설이 부재한 왕실과 귀족들의 사치품 구매를 위한 자금은 어디에서 왔을까? 구매 대금은 아메리카와 필리핀의 식민지에서 왔다고 한다. 특히 멕시코에서 유입된 대량의 은은 에스파냐 사회를 유지하는 근간이었다. 식민지에서 유입된 자금이 아니었자면, 에스파냐 경제는 단박에 붕괴되었으리라. 저자는 정확하게 에스파냐가 해외 식민지를 잃는 순간, 국가는 바로 알거지가 될 판이었다고 증언한다.

(결국 절판된 책 1-2권을 구하는데 성공했다. 책도 구했으니 진도를 쑥쑥 빼야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