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니클의 소년들
콜슨 화이트헤드 지음, 김승욱 옮김 / 은행나무 / 2020년 12월
평점 :

고대해 마지 않던 콜슨 화이트헤드의 <니클의 소년들>이 드디어 출간됐다.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로 알게 된 화이트헤드의 <니클의 소년들>은 나의 2020년 독서를 마무리하기에 조금의 부족함이 없었다. 기대는 충족되었다. 윌라 캐더 여사의 <대주교에게 죽음이 오다>와 더불어 올해의 책으로 꼽을 것이다.
남부 플로리다에서 예전에 감화원으로 사용되던 니클 아카데미의 부트 힐에서 43구의 시신이 발굴된다. 그 중 7명의 시신은 끝내 신원이 확인되지 않았다. 소설 <니클의 소년들>은 부트 힐의 비밀묘지를 파헤친 사우스 플로리다 대학생들처럼 미국 역사의 어두운 부분을 지상으로 끌어 올린다.
소설의 화자는 엘우드 커티스. 플로리다 탤러해시 출신의 십대 소년은 할머니 해리엇의 엄한 교육 아래, 자식을 버리고 캘리포니아로 도망친 부모의 부재에도 불구하고 올바른 가치관을 가지고 성장한다. 그리고 당시만 해도 꿈도 꿀 수 없었던 대학에 진학헤서 고등교육을 받을 꿈을 키운다. 그것은 아마도 할머니가 1962년에 사준 MLK의 선동이 들어 있는 레코드판을 들은 덕분이 아닐까.
세상은 조금씩 바뀌고 있었다. 1954년 브라운 재판으로 흑인들의 인권운동의 막이 올랐다. 하지만 짐 크로의 유령은 여전히 ‘검둥이’들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었다. 불의의 사고로 아버지와 남편을 잃은 해리엇 할머니는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은 손자에게 제발 분수에 맞지 않는 행동을 하라고 신신당부한다.
호텔 주방에서 짝퉁 백과사전을 걸고 덤빈 설거지 내기에서 호되게 뒷통수를 맞은 엘두드는 열세 살의 나이에 마르코니 씨가 운영하는 담배가게에서 일하게 된다. 아마 선량하고 성실한 엘우드의 평판이 그것을 가능하게 하지 않았을까. 링컨 하이스쿨에서 뛰어난 성적을 거두던 엘우드는 힐 선생님의 도움으로 대학 수업도 받게 된다. 장차 대학에 진학해서 영국 문학을 전공해 보겠다는 엘우드의 꿈은 공짜 차를 한 번 잘못 탔다가 수렁에 빠져 버린다.
그가 얻어 탄 플리머스는 장물이었고, 아직 청소년이었던 엘우드는 교도소 대신 악명 높은 감화원 니클 아카데미로 가게 된다. 니클 아카데미는 이름만 ‘아카데미’였지, 입소한 소년들에게는 그야말로 지옥 같은 장소였다. 모욕과 폭력은 일상이었고, 특히 교정이라는 이름 아래 블랙뷰티를 동원해서 진행되는 화이트하우스에서의 구타의 종착지는 종종 부트 힐, 비밀묘지로까지 이어지기도 했다.
아무 것도 모른 채, 니클에 도착한 엘우드는 얼마 지나지 않아 그리프 삼총사의 학대에 시달리는 소년을 위해 나섰다가 미친개 소리를 듣는 학생주임 스펜서에게 호되게 매질을 당한다. 그것은 과거 노예제도가 횡행하던 시절의 폭력과 다름없을 정도로 혹독했다. 살갗이 찢어지는 매질을 견디지 못한 엘우드는 기절하고 만다. 그리고 보통의 ‘검둥이들’처럼 현실을 받아 들이게 된다. 다시 한 번, 무자비한 폭력이 정의와 진실을 가리게 된다는 현실이 등장하는 비극적인 순간이 아닐 수 없었다.
소설의 1/3 지점을 지나가는 시점까지만 하더라도 그런 비극의 전조는 보이지 않았다. 한창 미국 남부를 달궈져 가던 흑인 인권운동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할머니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동료 청년들과 인종차별과 인종분리정책을 반대하는 시위현장에 나서는 ‘자유세계’의 체험을 했던 소년 엘우드에게 니클은 가장 나쁜 의미에서 신세계일 수밖에 없었다. 엘우드의 눈에 그들은 사악한 용과 싸우는 거리의 기사들이었다. 아니 이런 문학적 표현은 도대체 어디에서 오는 것일까.
세계대전 이후, 고결한 개혁의 물결이 사방에서 넘실거렸지만 그 때 뿐이었다. 여전히 간이식당에서 흑인들은 식사를 할 수가 없었고, 백인들에게 거리에서 길을 비켜 주어야 했다. 해리엇 할머니가 일하던 탤러해시의 리치몬드 호텔에 일하는 검둥이들은 있었지만, 손님으로서 검둥이들은 존재할 수가 없는 그런 시절이었다.
그렇다면 그로부터 반세기가 지난 현재 미국의 현실은 달라졌을까? 지난여름, 미국 각지에서 벌어진 Black Lives Matter(BLM)운동을 보라. 눈에 보이는 인종차별과 법적 평등은 요원하다는 걸 알 수 있었다. 짐 크로의 망령은 여전히 미국 사회를 활보한다. 옳은 일을 일러주는 것과 그것을 내 것으로 체화해서, 사유를 조종하고 행동으로 옮기는 것은 별개의 문제라는 점을 해리엣 할머니는 노인의 체험으로 후세에게 전달한다. 당시 현실도 그랬는데, 소년 감화원 니클 아카데미의 경우는 어땠을까.
명목상으로는 플로리다 주정부의 감시 아래 있었지만, 니클을 실제적으로 운영하던 하디 교장과 스펜서 일당은 그야말로 무소불위 권력을 행사했다. 니클은 그들에게 하나의 작은 왕국이었다. 인쇄소를 돌리면서 플로리다 주정부의 인쇄 업무를 독식하면서 25만 달러라는 거금을 챙겼고, 니클 소년들의 노동을 착취해서 만든 벽돌은 잭슨 카운티 곳곳의 크고 작은 건물들을 짓는데 이용됐다. 그들의 부정은 그 정도로 그치지 않고, 소년들에게 지원된 금품과 식품까지도 파렴치하게 횡령했다. 그들이 사방에서 저지르는 악덕과 부정은 그야말로 상상을 초월했다. 게다가 그들은 KKK단의 후예로 가혹한 인종차별을 거리낌없이 저질렀다.
한편, 클리블랜드 캠퍼스의 깡패 그리프는 백인 캠퍼스를 상대로 한 권투시합에 나설 대항마로 흑인 소년들의 우상으로 부상한다. 니클의 권투시합은 지역사회에서 초미를 관심사로, 흑인 소년들에게 유일하게 허용된 인종대결의 장이었다. 그렇기 때문에 평소에 그렇게 그리프란 녀석이 악행을 저질렀어도, 이번만큼은 모두가 일심단결해서 그리프를 응원했다. 백인 맞상대의 코를 납작하게 만들어 달라는 주문이었다. 바로 여기에 스펜서가 개입해서 승부조작에 나선다. 한 마디로 적당히 하고서는, 져주라는 주문이었다. 내기 도박에서 이기기 위한 백인들의 꼼수였다. 예상대로 결과는 비극으로 귀결된다.
니클의 상황에 절망한 엘우드는 마지막 시도에 나선다. 자신이 그동안 기록한 것들을 기습감사(물론 사전에 니클에 통보되었다)에 나선 감사원들에게 진실을 알리기 위해 그동안 자신이 치밀하게 준비한 자료들을 넘긴다는 계획이었다. 이 계획은 너무 위험하다며 절친 터너가 적극 말린다. 백인들의 선의에 기대하는 게 얼마나 위험하다는 걸 소년은 몰랐던 걸까? 그걸 알면서도 자신의 양심과 격렬하게 갈등하면 장면은 소설의 백미였다. 엔딩에 포진한 반전은 왜 화이트헤드의 <니클의 소년들>이 왜 퓰리처상을 받았는지 깨닫게 해준다. 이건 뭐 거의 소름이 돋을 지경이었다. 과연 이런 게 문학의 힘이란 말인가.
전작 <언더그라운드 레일로드>에서 미국사회에서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인종주의 문제의 기원을 저격했다면, 이번 <니클의 소년들>는 중간점검 정도에 해당되는 문제가 아닐까 싶다. 도저히 용서할 수 없는 원수들을 사랑하라는 MLK의 메시지가 얼마나 허망한 것인지에 대해서도 심도 깊은 질문을 던진다. MLK가 투옥되지 않고 검둥이로서 순응의 삶을 살았더라면, 과연 그가 저항에 나서라는 말이 동족에게 먹혔을 지도 궁금했다. 니클의 최고 악당들인 스펜서나 얼이 천수를 누리며 전혀 반성 없는 삶을 살았다는 지적도 뼈를 때린다.
<니클의 소년들>로 올해 목표 독서 150권을 채웠다. 이제 남은 시간은 그야말로 자유 독서시간이다. 비교할 수가 없겠지만, 나의 엘우드 친구가 그리던 자유도 이런 것이었을까. 진짜 올해가 가기 전에 꼭 한 번 읽어봐야 할 책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