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소송 민음사 모던 클래식 65
율리 체 지음, 장수미 옮김 / 민음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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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여름에도 마스크를 쓰는 모습이 뉴노멀이 되어 버렸다. 코로나 팬데믹 시절에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의 건강과 위생이 중요시되고 있다. 코로나 덕분에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위생에 철저하다. 수시로 손을 씻고, 마스크로 무장해서 어지간한 감기는 걸리지 않게 되었다. 물론 반대급부도 막심하다. 개인적으로는 우리 달궁 독서모임이 열리지 않는다는 게 가장 큰 불만이다.

 

요즘 흠뻑 빠진 법학박사님 율리 체가 드디어 자신의 장기라고 할 수 있는 법학을 전면에 내세운 작품이 바로 2009년에 발표된 5번째 소설 <어떤 소송>이다. 아예 제목에서부터 어떤 소설이라는 점을 숨기지 않고 도발한다. 우리의 주인공은 34세의 생물학자이자 허무주의자인 미아 홀. 그녀는 최근 사랑하는 동생 모리츠(27)를 잃고, 상실감에 시달린다. 그리고 방법적대적인 책동을 자행했고, 독성 물질을 남용했다는 혐의로 기소된다. 가볍게 끝낼 만한 사건이 변호사 루츠 로젠트레터의 부추김으로 판이 커진다.

 

, 그전에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빼먹었다. 21세기 어느 시절로, 당대 최고의 가치는 바로 건강이다. 살아 숨 쉬는 모든 존재들은 고통을 피하고, 생존에 적합한 상태를 원한다. 이 명제를 인간에 대입해 보자면, 인간은 살아 있는 동안 어떠한 종류의 고통도 원하지 않는다. 바로 이런 미래사회에서 최고의 덕목은 바로 건강이다. 미아와 그녀의 동료들 혹은 적들이 공존하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건강을 지키기 위해, 경찰국가 비슷한 시스템을 가동시킨다. 그것을 방법주의라고 했던가. 뭐라고 불러도 상관없다.

 

자연주의자 미아를 옥죄는 사회는 그녀의 건강을 지나치게 염려한다. 숨이 막힐 정도로 압박한다고 해야 할까. 모든 사회 활동은 모니터링되고, 일체의 독성 물질 남용은 법에 저촉되는 행위로 간주된다. 미아는 독성 물질을 흡입하는 방식으로 사익을 추구하다가 경찰에 체포된다. 아니 이미 그전에 미아는 병날권(병날 권리)’을 주창하는 잠재적 테러리스트의 일원 혹은 동조자로 요주의 인물이었다.

 

당대의 기준으로 본다면 우리의 현실세계에서 술이나 담배 같은 중독성 강한 기호식품(?)들이 시중에서 아무런 규제 없이 팔린다는 점을 이해할 수 없을 것 같다. 향정신성 약물들은 엄격하게 규제하면서 그에 못지않은 강력한 중독성을 지닌 상품들이 즐비한 마트의 매대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쨌든 무엇보다 건강을 최우선시하는 방법주의 사회는 개인에게 최선의 건강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운동을 강제한다. 그들은 개인 복리와 보편적 복리를 위한다는 슬로건으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심지어 원하지 않는 행동을 강제한다. 어쩌면 이런 설정 자체부터가 넌센스인 지도 모르겠다.

 

동시다발적으로 떠오르는 소설에서 다루는 여러 가지 주제들을 담으려다 보니 나 자신도 헷갈릴 판이다. 자유 의지를 억압하는 감시사회에 대한 이슈부터 시작해서, 사회의 모든 갈등을 법으로 심판하려는 법치 만능주의 그리고 진실을 전달하는 언론의 순기능보다 선동을 일삼는 캐릭터로 등장하는 문제적 인간이자 이야기 사냥꾼인 하인리히 크라머에 대한 캐릭터 분석에 이르기까지 정말 입맛 당기는 주제들이 수두룩하게 등장한다. 언제고 기회가 된다면 달궁 독서모임책으로 다룰 만하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누가 미아 못지않은 자연주의자이자 젊은 쾌락주의자였던 청년 모리츠는 소개팅으로 만나려고 했던 지뷜레의 살인혐의 누명을 쓰고, 구치소에서 자살한다. 주술적 리얼리즘을 연상시키는 장면으로 이상적 애인이 미아의 삶 속에 침투하는 장면도 나온다. 모리츠의 자살 도구였던 투명한 낚싯줄은 미아가 몰래 제공했다는 점도 놀랍다.

 

미아는 명백하게 경계선에 선 중간자 같은 존재다. 중세였다면 그녀는 마녀라고 비판받았으리라. 자연과학자로 건강을 최우선시하는 방법이 지배하는 사회의 대의에 동의하면서도 동시에 인간의 자유 의지를 상징하는 인물이기도 하다. 방법안기부에서 엄격하게 금지한 독성 물질을 즐긴다. 그런 점에서 병날권의 신봉자일 수도 있지 않을까.

 

변호사 루츠 로젠트레터의 활약으로 모리츠가 어려서 가졌던 병력을 바탕으로 그의 무죄를 밝혀내는데 성공하면서, 미아는 모두의 지탄을 받는 마녀에서 방법의 허점을 만천하에 드러낸 영웅으로 등극한다. 하지만, 하인리히 크라머로 대변되는 기득권 세력의 반격은 상상을 초월했다. 그들은 진실을 앞에 내세우고 공공의 복리라는 대의를 위해, 개인의 복리나 안위 따위는 가볍게 무시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정말 역설적이지 않은가.

 

무엇보다 크라머가 이야기 사냥꾼이자 언론인으로 플레이어가 되어 선동가로 직접 판에 참가했다는 사실이다. 노련한 플레이어는 사실의 주작도 마다하지 않는다. 아니 어쩌면 오늘날의 기레기라는 악명을 뒤집어 쓴 언론의 모습과 일치하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율리 체는 마땅히 선각자이자 예언가라고 불러도 무방할 것 같다.

 

크라머가 주도면밀하게 준비한 덫에 걸린 미아는 결국 법정 최고형인 무지 동결형에 처해진다. 다시 사태는 반전되어, 감방 밖에서 그녀의 무죄를 주장하던 이들은 그녀에게 기꺼이 돌팔매를 하겠다고 신속하게 태세전환에 나선다. 방법에 도전한 위대한 순교자의 반열을 들려는 마지막 순간까지 반전이 거듭된다. 대단하다는 생각 밖에 들지 않았다.

 

아니 벌써 율리 체의 마지막 책이라니 그저 아쉬울 따름이다. 출판사들은 속히 그녀의 소설들을 내주기 바란다. 지난 20년 동안 12권의 책을 발표했는데, 지금까지 나온 책은 4권이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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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20-10-14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고, 감시하는 사회라는 글을 읽으니 조지 오웰의 소설 <1984년>의 분위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사회에서도 몰래 연애를 하는데 그것도 들통이 나서 처벌을 받게 됩니다. 꼭 북한을 보는 것 같았었죠.

레삭매냐 2020-10-14 20:09   좋아요 1 | URL
개인의 복리를 위한다는 이유로
개인의 자유를 억압하는 사회의 역설
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되더라구요.

키스 같은 행위에 대해서도 소설의
배경이 되는 사회에서 최고의 가치인
건강을 위협할 수 있다는 논리로 배척
하는 풍조가 색다르지 않았나 싶습니다.

술과 담배를 독성 물질로 규정하고
남용하는 이들을 처벌하는 시스템도
참신했습니다.

han22598 2020-10-15 12: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번역가님들 좀더 힘을 내주셨으면 좋겠네요 ^^나머지 8권도 빨리 번역해랏! 번역해랏!

레삭매냐 2020-10-17 22:59   좋아요 0 | URL
아마 율리 체 작가의 이름이 주기적
으로 노출이 되어야 출판사에서
그나마 움직이지 않으려나 싶습니다 :>
 
새해
율리 체 지음, 이기숙 옮김 / 그러나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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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한 번 꽂히면 무조건 모두 다 읽는다주의다. 그래서 일단 <새해>로 출발한 율리 체 작가의 여정은 그의 책사재기부터 시작했다. 일단 살 수 있는 책들인 <어떤 소송><잠수 한계 시간> 그리고 절판책인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을 차례로 사들였다. 일단 사들이고 책 읽는 건 뒷전이다. 지난 주말을 끼고 세 권의 책들을 다 읽었다. 법학 박사님이 구사하는 서사가 아주 마음에 들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네 인생을 모두 규정하게 된 법학의 세계에까지 아우르는 그런 서사가 말이다.

 

소설 <새해>의 주인공은 독일 괴팅겐에 사는 헤닝과 테레자다. 그들은 요나스와 비비를 데리고 연말 연휴를 보내기 위해 아프리카 해안 근처의 카나리아 군도의 란사로테 섬을 찾는다. 프리랜스 출판사 편집자로 일하는 헤닝은 아내 테레자를 대신해서 전업주부를 자처한다. 아이도 보고, 시장에서 장을 봐다가 식사 준비도 했던가. 자고로 집에서 경제권이 있는 사람이 가사노동을 덜 하는가 보다. 부부간의 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란사로테 여행을 왔다고 해서 육아로부터 해방된 건 절대 아니다. 예나 지금이나 아이들은 손이 많이 가는 법이다. 그나마 출근이라도 하면, 일 핑계를 대고 짬짬이 휴식의 시간을 갖기라도 하지. 아직 어린 아이들과 함께 하는 휴가는 육아의 연장일 수밖에 없다. 율리 체 작가는 예리하게 그 점을 짚어낸다. 너무나 사실적이어서 깜짝 놀랐다. 이 작가 대단한데. 이 정도의 리얼리티가 아니라면 내가 꽂히기도 않았을래나.

 

헤닝에게는 아픈 손가락이 하나 있다. 그것은 바로 손아래 동생인 루나다. 제법 나이가 들었음에도 변변한 직장이나 거주지도 없이 이곳저곳을 정처 없이 떠도는 집시 스타일의 캐릭터다. 헤닝 남매에게는 트라우마가 하나 있는데, 그것은 아버지 베르너가 루나가 두 살 때 그들의 곁을 떠났다는 사실이다. 엄마 울라는 싱글맘으로 남매를 키우느라 갖은 고생을 다하셨다. 이제 자신이 가장이 된 헤닝은 엄마에게 그런 짐을 지우지 않겠다고 맹세한다.

 

헤닝이 가진 고민 중의 하나는 그것이다. 언제부터인가 아무 때나 제멋대로 그를 수시로 습격해 오는 그것이라는 이름의 발작증세. 아내 테레자는 처음에는 그런 그의 증상을 이해래 주려고 했지만, 언제부터인가 짜증을 내기 시작한다. 란사로테 휴가 중에 헤닝이 그것과 마주하게 되자, 테레자는 남편에게 남자답게 굴고 자신이 사랑할 만한 사람이 되라고 꾸짖는다. 이런 압박이 헤닝의 노이로제를 더 심각하게 만든 건 아니었을까. 라스 올라스 호텔에서 아내 테레자와 춤춘 프랑스 놈팽이도 심히 거슬린다.

 

아무런 준비 없이 자전거 하나만 타고 하이킹에 나선 헤닝은 섬을 도는 짧은 자전거 여행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한다. 그의 건장한 육신은 쉴 새 없이 자전거 페달을 밟고 사방에서 들이대는 자동차를 피해야 하는 미션을 수행했고, 머릿속에서는 또 다른 전쟁을 치러야했다. 수분부족과 에너지 고갈 때문에 탈수와 저혈당 증세로 쓰러질 뻔한 헤닝은 페메스 마을의 한 집에 사는 친절한 독일 여성 리자에게서 구원을 얻는다. 그리고 곧바로 그의 의식세계에 잠자고 있던 트라우마의 원형이 되는 과거의 사건이 플래시백으로 이어진다.

 

소설의 전반부가 주인공 헤닝의 현재 삶에 대한 이야기라면, 후반부는 수시 때때로 그것의 습격에 시달리는 과거의 트라우마에 대한 플래시백이다. 그런데 헤닝과 루나 가족의 스토리가 진행될수록 나는 마음이 불편해졌다. 란사로테에 휴가를 즐기러 왔던 헤닝 가족이 왜 풍비박산이 나는지에 대한 과정을 다룬 디테일 때문이었다. 아니면 견고해 보이던 가정이 외부에서 날아온 작은충격으로 파국에 이를 수 있다는 점 때문이었을까.

 

그것의 습격에 시달리던 헤닝이 테레자로부터 오지도 않은 결별 선언을 알리는 문자 메시지 때문에 패닉 상황에 빠지는 이유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자신의 완벽해 보이는 삶을 압박해오는 그것의 습격은 자신이 어려서 경험한 유기에 관한 악몽 때문이었다. 물론 율리 체 작가는 사전에 두툼한 떡밥을 투척해둔다. 리자는 오래전에 초주검이 된 어린 남매 사건을 슬쩍 흘린다. 헤닝 주연의 모노드라마 같은 상황극이라고 해야 할까.

 

독자는 왜 그렇게 헤닝이 작가의 삶을 동경하며 떠돌이 생활을 하는 루나와 강력한 유대감을 느끼는지 그 이유를 소설 후반의 서사로부터 알게 된다. 어떤 경험들은 강력하게 평생을 가는 법이다. 테레자와 요나스 그리고 비비로 구성된 완벽해 보이는 헤닝의 가정에 루나의 존재는 에일리언 같은 불청객이자 이방인일 뿐이다. 동시에 나이를 먹었지만 여전히 철부지 같은 여동생에 대한 헤닝이 지닌 책임감은 그것을 구성하는 요소 중의 하나다. 그것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 헤닝은 루나와의 관계를 보다 명징하게 규정해야 할 필요가 있다. 테레자가 헤닝에게 외친 남자다워지라는 말은 어쩌면 동생 앞에만 서면 우유부단해지는 남편의 각성을 촉구하는 말이 아니었을까.

 

우리가 살면서 대면하게 되는 고민과 갈등의 상당 부분에 대해 우리는 이미 정답을 알고 있다. 다만 백만 가지 이유들 때문에 뭘 해야 하는지 알면서도 액션을 취하지 못할 뿐이다. 실천에 앞선 어떤 계기가 필요할 뿐. 그렇게 개인적 트라우마를 딛고, 인생의 다음 단계로 가기 위한 일종의 성장통을 극복한 헤닝의 훈훈한 모습으로 소설은 마무리된다. 사는 게 다 그렇지 뭐, 그렇지 않은가.


[뱀다리] 리뷰를 날림으로 다 쓰고 나서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혹시 율리 체 작가는 시간의 마법사가 아닐까 하는 그런 생각 말이다. 처음에 만난 <형사 실프>에서도 평행 우주는 중요한 소재로 사용되었는데, 시간이란 요소는 율리 체 작가의 소설에서 아주 중요한 구성요소다.

 

<새해>에서도 과거로 계속해서 바뀌는 현재와 가까운 과거로부터 출발해서 아주 오래전 과거의 시간으로 양분되는 내러티브로 독자의 사유를 흡입한다. 현재의 시간을 구성하는 고통과 불안의 원인과 그것의 습격 그리고 헤닝이 느끼는 노이로제들은 모두가 과거로부터 온 청구서다. 어쩌면 헤닝은 모든 것을 이미 알고 있으면서도 방어기제를 가동해서 과거의 트라우마로부터 자신을 보호하려고 했던 것인 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제약 없이 현재에서 출발해서 과거를 무시로 오가는 설정이야말로 문학이 가진 특권 중의 하나가 아닐까. 그리고 율리 체 작가는 그런 불연속적인 시간을 자유자재로 다루는 마법사이고.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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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an22598 2020-10-12 23: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 저랑 비슷한 스타일이네요 ㅋㅋ 한놈만 팬다 ㅎㅎㅎ 덕분에 알지 알게된 율리님의 책들 바구니에 넣어둘게요 ㅋㅋ

레삭매냐 2020-10-13 09:01   좋아요 0 | URL
율리 체 작가의 국내 번역서 네번 째
책에 도전하고 있습니다.

<어떤 소송>... 법학 박사님의 전문
가다운 풍모가 풍기는 책으로 일단
율리 체의 여정은 잠시 쉬게 될 것
같네요. 한놈패기가 더 이어져야
하는데 아쉽네요.

구름물고기 2020-10-13 02:1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글도 잘 참았는데 휴~아..사버렸다~읽고 싶어지는 글!!감사해요

레삭매냐 2020-10-13 09:20   좋아요 0 | URL
리뷰어에게는 최고의 상찬입니다.

제가 쓴 글을 보고서 책을 (사서)
읽으신다면 그보다 더 한 영광이
어딨겠습니까, 감사합니다.
 
잠수 한계 시간 민음사 모던 클래식 68
율리 체 지음, 남정애 옮김 / 민음사 / 2014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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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학이라는 학문의 존재 이유는 무엇일까? 법에 대해 문외한인 일개 독서가가 생각하는 법학의 존재 이유는 아마도 죄에 대한 규정과 그에 대한 처벌을 정하는 아카데믹한 여정이 아닐까 싶다. 그리고 우리의 법학 박사님이자 법조인인 독일의 율리 체 작가께서는 <잠수 한계 시간>에서 자신의 전문 분야인 법학에 대한 썰을 유감 없이 펼쳐 보여주신다. 그리고 아울러 내가 실패했던 잠수의 세계에 대해서도. 그러니 감사할 따름이다.

 

<새해>로 율리 체 작가의 책을 읽기 시작했는데, 희한하게도 <형사 실프><잠수 한계 시간>의 순서로 읽게 되었다. 어떻게든 읽기만 하면 된다고 생각하는 인간이니 무엇이 문제가 될 것인가. 다만, <새해>에도 공간적 배경이 되었던 카나리아 섬의 란사로테가 다시 등장해서 독일 사람들에게 카나리아 제도가 얼마나 선호하는 관광지인지 알 수 있게 되었다는 게 하나의 수확이었다고나 할까.

 

제목에도 잠수가 나오듯이 소설 <잠수 한계 시간>은 잠수 강사 스벤 피들러의 관점에서 돌아가는 이야기다. 또 삼천포지만, 뤽 베송 감독의 <그랑 부르>에 나오는 한없이 푸르른 바닷속이 그리고 경쟁에 나섰다가 스러진 엔조의 모습이 바로 떠올랐다. 영화 <그랑 부르>가 바다, 잠수, 우정, 경쟁과 사랑에 대한 이야기라면 소설 <잠수 한계 시간>은 다른 궤적으로 내달린다.

 

출발은 베를린에서 날아온 두 커플이 독일을 떠나 14년 째 라호라 섬에서 다이버로 활동하는 스벤에게 거절할 수 없는 제안을 하는 지점에서 시작된다. 아버지의 후광으로 배우가 되는데 성공했지만, 연타석 히트를 날리지 못해 배우 생활의 위기를 맞은 금발의 매력녀 욜라 그리고 그의 띠동갑내기 남자친구 테오. 그 둘은 스벤에게 2주간 24시간 자신들에게 잠수를 도와주고, 돌봐 주는 조건으로 14,000유로라는 거금을 제시한다. 호모 컨슈머티쿠스인 현대인에게 돈은 반드시 필요한 물질이다. 스벤도 예외는 아니었다. 잠수는 돈이 많이 드는 사업이었다.

 

이쯤에서 스벤의 과거를 되짚어 보는 것도 좋을 듯 싶다. 그는 한 때 촉망받는 법학도였으나, 결국 그놈의 몽테스키외라는 프랑스 출신의 기묘한 철자법을 가진 철학자 때문에 우리 법학 박사님과는 달리 법학도의 궤도에서 이탈해 버렸다. 대신 공병대 잠수부로 갈고 닦은 실력을 바탕으로 전쟁터를 방불케 하는 독일을 떠나 아프리카 해변의 카나리아 군도의 어느 작은 섬에 연착륙했다. 그리고 그에게는 안톄라는 나이 어린 연인이 있다. 물론 이 둘의 관계는 매력녀 욜라의 등장으로 파국으로 치닫게 된다. 언제나 그렇듯이.

 

소설은 스벤의 이야기와 챕터 말미마다 등장하는 욜라의 일기로 구성되어 있다. 그런데 이 둘의 진술이 아주 상이하다. 처음부터 왠지 스벤과 욜라의 관계가 심상치 않다. 어느 순간 그 둘이 바로 사랑에 빠져 버려도 이상할 게 하나 없는 전개라고나 할까. 욜라의 남자친구 테오(42)는 그녀가 무언가 자신이 모르는 계획을 꾸미고 있다는 사실을 감 잡았지만 그것이 뭔지는 아직 모른다. 욜라와 테오의 도착적으로 보이는 관계는 우리의 스벤을 온통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다. 테오는 스벤을 한심한 놈이라고 부르며, 노골적으로 자신의 애인을 유혹하라고 했던가. 자신이 잠수하기 싫다고 한 날, 스벤은 욜라의 은밀한 유혹에 빠져 선을 넘을 뻔한 위기에 봉착한다.

 

그런데 바로 이 지점에서부터 서사는 분열하기 시작한다. 스벤은 자신이 욜라의 유혹을 패스했다고 진술하지만, 욜라의 일기에는 다른 기록이 적혀 있다. 이번에는 영화 <라쇼몽>이 떠오른다. 과거에 발생한 진실은 하나지만, 그것을 해석하는 이들의 입장과 시선의 차이에 따라 달라진다는 것이다.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를 겨냥한 서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로 탁월한 내러티브가 일품이다.

 

그런데 왜 스벤은 물 속의 세상을 좋아하는 걸까? 그것은 아마도 우주인이 되고자 하는 이들의 욕망과 부합하지 싶다. 우주에 공기가 없듯이, 물속에도 공기가 없다. 그런 결핍된 요소들로 구성된 세계에 도전하는 이들만의 욕망에 율리 체 작가는 방점을 찍는다. 그걸 결핍의 유혹이라고 해야 할까? 물속에서는 육지와 같은 정상적인 대화가 불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테오와 욜라의 안전을 전적으로 책임진 스벤은 하나의 절대자 같은 존재다. 그리고 그들은 물속에서 서로 상호간에 준비된 신호 체계로 의사소통에 나선다. 작은 실수가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할 수 있기 때문에, 상대방이 보내는 신호에 집중해야 한다. 육지에 사는 우리들은 대부분 언어라는 시스템으로 치환된 청각 신호에 무신경하다. 말 한 마디 잘못 들었다고 해서 당장 위험에 빠지는 건 아니니 말이다. 물론 상황에 따라 다르겠지만.

 

테오와 욜라는 빈번하게 스벤이 잠수에 앞서 엄격하게 세운 게임의 규칙을 무시한다. 그들에게 스벤이라는 존재는 돈을 주고 산 피고용인일 뿐이다. 그들은 스벤과 안톄가 절실하게 필요한 자본의 힘으로 그들을 구속한다. 하긴 그렇게 따지자면, 자본의 노예가 된 건 스벤들 뿐만이 아니지. 시간이 갈수록 테오와 욜라들은 안톄의 신경을 거슬리게 만든다. 동시에 스벤도 위기의 남자가 된다. 자신의 꿈을 이루기 위해 필요한 자본의 결핍은 스벤이 고객들에게 강력하게 나가지 못하게 만드는 원동력이다.

 

이제 독자가 기다리던 파국의 도래는 시간문제일 뿐이다. 종결 지점에 가서 되짚어 보니, 스벤이 초반에 태국으로 전 재산을 팔고 떠난다는 글귀가 생각난다. 독일에서 실패한 법학도에게 라호라는 세상의 끝이자, 도피처였다. 그에게 독일이라는 현재진행형의 전쟁을 끌고 온 이들은 바로 테오와 욜라였다. 일단 그들의 스벤의 세계에 침투하자, 스벤이 꿈꾸던 일상은 차례로 파괴되기 시작한다. 스벤의 관심사는 지상이 아니라 오직 바닷속의 일일 뿐이었다.

 

지상에서 스벤은 아무 짝에도 쓸모없는 인간이다. 잠수한 뒤의 정리나 카사 라야의 정리는 엄두도 내지 못한다. 그것도 그동안 모두 안톄의 도움으로 유지해 왔으나, 그녀가 리카르도와의 관계를 이유로 스벤의 곁을 떠나면서 모두 스벤의 몫이 되었다. 물속에서는 그 누구보다 침착하고 유능한 남자가 다른 세계에서는 맥을 못추는 기이한 현상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나. 자신이 물속에 만든 질서 속에서는 그렇게 편안하고 여유 넘치며, 어떤 문제라도 해결해낼 자신이 있는 사람이 스벤이 아니었던가.

 

어쨌든 욜라가 치밀하게 계획한 파국은 막판에 순전히 스벤의 이타적 선의로 방향전환을 하면서 모두를 구원한다. 익사할 뻔한 테오도, 모든 계획의 주모자였던 욜라도 그리고 마지막으로 살인죄로 기소될 뻔한 스벤까지도. 오래전 알랭 들롱 주연의 <태양은 가득히>에 버금가는 파국을 기대했던 건 무리였을까.

 

모든 잠수부들에게 해당된다는 정언명령인 올바르게 행동하라는 메시지가 고루하기는 하지만, 설계된 파국을 막고 연루된 이들에게 나름대로의 해피엔딩을 제공하는 하나의 예언처럼 작동한다는 점이 마음에 들었다.

 

이제 율리 체 작가의 두 번째 만남을 통과했다. 책이 나온 지 6년 만에 읽게 된 점이 아쉬울 다름이다. 아니 이제라도 알게 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는 게 맞는지도. 바로 <어떤 소송>에 도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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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alstaff 2020-10-11 2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예 체를 거덜내시는군요. ㅋㅋㅋㅋ
저도 체의 광팬입니다. 매냐님처럼 훑지는 않지만 눈에 띄었다하면 이름만 가지고도 주저없이 선택하는 작가 가운데 한 명입니다.

레삭매냐 2020-10-11 21:32   좋아요 0 | URL
그저 폴스태프님처럼 먼저 가신
분들의 길을 뒤쫓는 것 뿐이지요.

저도 믿고 읽는 작가 중의 하나로
꼽아야지 싶습니다.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 민음사 모던 클래식 38
율리 체 지음, 이재금.이준서 옮김 / 민음사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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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지난 추석 연휴 때, 율리 체의 <새해>를 지인에게 추천해 주었다. 나도 읽지 않은 책이기에 추천하고 나서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아니 그런데 이 작가가 완전 내 스타일의 그런 작가가 아니던가. 독일 사람들은 모두 스페인령의 카나리아 제도 란사로테 섬으로 휴가를 가는 모양이지를 <새해>를 읽다 말고 만난 <잠수 한계 시간>에서도 느낄 수가 있었다. 그리고 나는 율리 체 작가의 책 수집에 나섰다. 물론 그 순간까지도 다 읽은 책은 하나도 없었다. 나는 항상 어느 작가에 빠지게 되면 일단 그 작가의 책들부터 모으는 요상한 습성이 있다.

 

비교적 신간인 <새해> 말고는 모두 모클 시리즈로 나왔는데, 이제 수명을 다한 모클의 운명처럼 그동안 나온 책들 역시 품절과 절판의 운명으로 치닫고 있었다. 두 번 생각할 것 없이 율리 체의 책들을 모았다. 그리고 나의 마지막 컬렉션은 3일 전, 도토리 책방에서 득템한 <형사 실프와 평행 우주의 인생들>도 대단원의 막을 내렸다. 이제 새로운 율리 체 작가의 책이 나오지 않는 이상 그녀의 책을 더 이상 만날 수가 없을 것 같다.

 

<새해>에서는 왠지 나의 비밀스러운 내적인 감상들과 만나는 그런 추체험을 하기도 했다. 뭐랄까 나의 약점을 잡힌 듯한 그런 느낌? <잠수 한계 시간>은 매혹적이고 오래전에 실패한 패다이 자격증 실패의 쓰라린 추억을 되살리는 통에 잠시 접어 두었다. 그리고 나서 제바스티안과 오스카 두 천재 물리학자들의 치열한 삶의 배틀을 다룬 <형사 실프>에 도달했다. 이 책은 지난 3일에 걸쳐 집중적으로 시간을 투자한 끝에 다 읽는데 성공했다. 내가 처음으로 다 읽은 율리 체 작가의 책으로 기록될 지어다.

 

예나 지금이나 시간의 본질을 다룬다는 그리고 우리네 삶의 본질을 추구한다는 양자 물리학의 세계에 대해서는 알고 싶지도 그리고 이해가 가능하지도 않는다는 생각하는 그런 인간이기에 내가 이 책에서 법학 박사님이 다루는 썰들을 과연 이해할 수 있을까 싶은 생각부터 들었다. 그런 점에서 소설을 1/3 정도나 읽어야 비로소 등장하게 되는 주인공 형사 실프 아저씨의 미친 존재감에 그저 격한 동질감을 느낄 수밖에 없었노라고 이 자리를 빌어 공감한다. 실프 아저씨는 자신의 아들 리암의 실종 신고를 했으나, 곧바로 아들에게 아무런 위해가 없었다는 제바스티안을 찾아가 사건의 본질이 아닌 시간의 본질에 대한 심오한 질문을 내던진다. 그리고 그는 어쩌면 살인범일 수도 있는 유력한 용의자에게 깊은 존경심을 표하기 시작한다.

 

소설에 등장하는 인물들 간의 설명에 따르면 우리에게 현재란 존재하지 않는다. 이것 하나 만큼은 확실하게 말할 수 있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해 우리가 현재라고 생각하는 순간들은 곧바로 과거로 치환된다. 바로 지금 이 순간이 과거의 1초가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모두 이미 지나간 과거를 현재로 퉁치는 그런 오류의 신봉자라고 해야 할까.

 

나 같은 범인(凡人)은 도저히 바젤의 천재 물리학자 오스카 씨가 구사하는 양자 물리학의 이론적인 세계에는 접근하지 못할 것이다. 그저 오스카가 자신의 연인인지 친구인지 헷갈리는 천재-엘리트의 자리에서 지상으로 강림해서 갤러리를 운영하는 아내 마이케와 아들 리암과 보통 사람으로서 살아가는 제바스티안을 어떻게 해서든 자신의 평행 우주로 되돌리려고 하는 노력이 문제라는 점 정도는 알 수 있을 것 같다.

 

율리 체 작가가 구사하는 내러티브 구조는 어느 순간 나에게 중요한 요소가 아니었다. 도대체 우리가 궁금해 하는 시간의 본질이 무엇인가라는 존재론적 질문이 모든 것을 삼켜 버렸다고나 할까. 나머지들은 그저 소설의 외양을 갖추기 위한 부수적인 요소들일 뿐이라는 생강이 들었다. 하나의 구색 맞추기라고나 할까. 그러다 보니 유괴된 아들을 되찾기 위한 스릴러물로서 <형사 실프>에 던지는 질문들이 하나같이 실종되어 버렸다. 도대체 누가 실종된 것으로 추정되는 제바스티안과 마이케의 아들 리암을 캠프에 데려다 주었는가.

 

작가가 교묘하게 배치한 의료계 스캔들 역시 큰 의미를 지니지 않는다는 걸 우리는 후반에 가서야 알게 된다. 한 마디로 말해, 우리의 주의를 분산시키기 위한 율리 체 작가의성공한 교란작전이라고 평가하고 싶다. 프라이부크르에서 벌어진 의료계 스캔들과 관련된 것으로 보이는 다벨링의 살해 사건은 그저 우연이 일치된 것일 뿐이다. 그리고 보면 유물론적 관점에서 볼 때, 우리 인류의 존재부터 몇 번이나 되는 자승의 우연이 반복되어야 실존이 가능하다고 말하지 않았던가.

 

우리가 범접할 수 없는 천재들의 세계에서 보통 사람의 층위로 내려오길 원하는 제바스티안이 지닌 창조에 대한 생각에 수긍이 간다. 도서관에서 그의 논문을 읽고, 요즘으로 치면 너튜브에서 동영상으로 제바스티안의 생각에 동조하게 된 실프 형사(독일어로 그의 이름은 갈대를 의미한다고 한다)의 좌충우돌하는 모습도 아주 마음에 들었다. 하나의 밸런스라고 해야 할까? 두 명의 물리학자들이 세상의 비밀을 품은 공간과 시간의 본질에 대해 치열한 정신세계의 배틀을 벌인다면, 누군가는 피지컬한 허드렛일도 담당해야 하지 않을까. 스승 격인 실프 형사와 오로지 수사만 들입다 파는 제자 리타 스쿠라의 티격태격하는 장면이 후자를 갈음한다.

 

실프 형사가 양자 물리학 그리고 시간의 본질에 대해 설명과 나름의 리서치를 했음에도 완벽한 이해에 도달하지 못했던 것처럼, 나 역시 <형사 실프>에서 잘난 율리 체 작가가 구사하는 내가 모르는 미지의 영역에 대한 서술을 다 이해했노라고 말하진 못하겠다. 서사도 마찬가지. 다만, 현재라는 시간이 원칙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는 아이디어 하나는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데 성공했다. 두고두고 써먹어야지. 그리고 소설의 곳곳에서 영롱하게 빛나는 법학 박사님이 창조해낸 문장들의 광휘에 그만 반해 버렸다. 법조인으로 활동하면서도 이렇게 멋진 글을 쓸 수 있다는 사실에서 두 잘난 인간들의 자의식이 강렬하게 맞부딪혔던 예의 여러 차원의 평행 우주의 존재가 가능하다는 걸 입증하는 게 아닐까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제 남은 율리 체 작가의 세 권의 책들 <어떤 소송>, <새해> 그리고 <잠수 한계 시간>을 마저 읽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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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딩 2020-10-10 21: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잠수 한계 시간 잼있게 봤었어요 :-)

레삭매냐 2020-10-10 21:59   좋아요 1 | URL
요 책 보기 전에 제법 읽었는데 정말
재밌더군요...

조금씩 아껴 보고 싶은 마음이라고나
할까요.

율리 체 작가의 다른 책들도 계속해서
나왔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서니데이 2020-10-11 00: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목이 좋은데 내용도 재미있다니 읽어보고 싶어집니다.
레삭매냐님 좋은 주말 보내세요.^^

레삭매냐 2020-10-11 07:36   좋아요 1 | URL
법학 박사님이 쓴 양자 물리학을
다룬 스릴러라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매력적인 소설이라고 생각
합니다. 감사합니다.

moonnight 2020-10-11 09: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책 읽었을 때 충격받았던 기억 있어요. 너무 재미있어서^^ 지인들에게 선물도 많이 했는데 별로 안 좋아하더군요.ㅎㅎ;;;;;; 어제 책장 둘러보다가 아, 다시 읽어야겠다 생각했는데 레삭매냐님 글에서 딱 마주하니 너무나 반갑네요. 율리 체 작가의 다른 책은 못 읽었는데 덕분에 찾을 생각했습니다. 감사드립니다^^

레삭매냐 2020-10-11 09:55   좋아요 1 | URL
책에 대한 취향이 사람마다 모두
다르기 때문에, 누군가에게 책
추천하기가 정말 쉽지 않은 것
같습니다.

내가 좋다고 해서 다른 이들도
좋아한다는 보장이 없거든요 :>

지금 율리 체 작가의 다른 책인
<잠수 한계 시간> 만나고 있는데
너무 재밌네요 ~

coolcat329 2020-10-11 13: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른 분이 <새해> 리뷰 쓰신거 읽고 적어뒀는데 레삭님 글 읽고 <잠수...>도 관심이 가네요. 근데 평행우주는 제목부터 부담이 가네요.😰

레삭매냐 2020-10-11 13:23   좋아요 1 | URL
지난 추석 때 <새해> 읽는답시고 도전
했다가 그 책 역시 너무 재밌어서, 잠시
미루어 두고 율리 체 작가의 다른 책들
수집에 나섰답니다.

일단 어느 작가에 꽂히면 일단 책부터
사고 보자, 이 주의거든요.

일단 가지고 있던 <새해> 말고 3권을
더 구했는데, 다 만족스럽네요.

평행 우주에 대해서는 적당하게 퉁치
시면 될 듯 합니다, 저처럼요 ㅋㅋ

coolcat329 2020-10-11 14: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님은 맘에 드시면 전작 읽기하시는거 알아요 😆
저는 전작은 커녕 안 읽은 책들이 너무 많네요.~~ 글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20-10-11 18:12   좋아요 1 | URL
지극히 주관적인 생각입니다만,
어느 작가를 알기 위해서는 최소한
그 작가의 책은 3권 정도는 읽어야
비로소 그 작가의 스타일이나 기법
이 보이지 않나 싶습니다만.

감사합니다. <잠수 한계 시간> 주파
했네요.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90
오라시오 키로가 지음, 엄지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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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라시오 키로가 작가의 <사랑 광기 그리고 죽음의 이야기>에서 다루고 있는 세 가지 주제들을 아우르는 그런 제목을 만들어 보고 싶었다. 언젠가 해피 엔딩이라는 짧은 에세이를 쓴 적이 있었는데 영어 단어 'end'에는 죽음이라는 뜻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 내가 에두아르도 갈레아노 그리고 후안 카를로스 오네티에 이어 세 번째로 만난 우루과이 작가 오라시오 키로가는 자신의 소설집에서 사랑과 죽음이 빚어내는 광기에 대한 초현실적 르포로 전달해 준다.

 

키로가 집안 삼대에 걸친 죽음의 연대기에 대해서는 후기에서 잘 다루고 있으니 굳이 이야기할 필요는 없을 것 같다. 우리네 인생이 그러하듯, 소설의 주인공들 역시 삶의 종착역인 죽음을 피해갈 수는 없다. 라틴 아메리카의 녹색 지옥이 제공하는 타나토스적인 유혹은 소설 곳곳에 포진해 있다. 날것 그대로인 대자연이자 매혹적인 공간으로서 녹색 지옥을 소재로 삼은 마리오 바르가스 요사와 루이스 세풀베다 이전에 그들의 선배격인 오라시오 키로가가 존재했다는 점도 내게는 대단히 흥미롭다. 우리가 모르는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새로운 지경을 만난 느낌이라고나 할까.

 

키로가 작가가 소설집에서 그리는 사랑이라는 감정은 왠지 광기의 동의어라는 느낌이 들었다. 사랑이 필연적으로 지닐 수밖에 없는 비이성적인 요소들은 광기로 연결되고, 예의 광기가 카이로스(특별한 시간)와 연쇄반응을 일으키게 되면 결국 크로노스(죽음 혹은 소멸)에 이르게 된다는 그런 설정이라고나 할까.

 

레콩키스타 이래, 신대륙 정복에 나선 에스파냐 이달고들의 후예인 이민자들은 원주민들과 달리 녹색 지옥의 두려움을 알지 못했다. 아기레나 코르테스 같은 무법자들이 그랬다면 이해하겠지만, 수세기가 지나서도 무모한 도전이 계속되는 건 또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결혼을 앞두고 색다른 경험을 해보겠다고 나섰던 객기 넘치던 청년은 어이없게도 코렉시온 개미떼의 습격을 받아 백골이 되었다. 훗날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하나의 특질이 된 주술적 리얼리즘의 원형을 엿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동시에 정글 전설의 문학적 재현이 아닐까 싶기도 했다.

 

녹색 지옥의 특징 중의 하나인 벌목장의 현실을 겨냥한 <멘수들>도 수작으로 꼽고 싶다.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허파라는 아마존 밀림이 경작지 확장과 개발이라는 미명 아래 지난 수십 년간 파괴되어 온 것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지난 세기 초반까지만 해도 현재 우리가 직면한 심각한 기후 위기의 도래를 누가 예상이나 했을까. 녹색 지옥에 침투한 서구 자본주의의 추종자들은 자신들의 눈앞에 펼쳐진 무진장한 산림자원을 그저 돈벌이의 수단으로만 생각했다. 지금처럼 고도의 기계문명이 발전하지 않은 상태에서 목재를 베고 실어 나르기 위해서는 인간의 노동력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바로 이 지점에서 등장하는 직종이 바로 멘수, 나무를 베고 임가공하는 계약직 노동자들이었다. 자본가들은 솜씨 좋은 멘수들에게 처음에 목돈을 안겨 주었다. 그러면, 미래에 대한 계획이 없던 멘수들은 그 돈으로 흥청망청하며 유흥에 그 돈을 탕진했다. 그런 방식으로 멘수들은 관리인들에게 종속되어 갔다. 빚쟁이가 되어 더 이상 견딜 수 없게 된 멘수들이 관리인들의 감시에서 벗어나 목숨을 걸고 탈출이라도 하게 되면, 윈체스터 소총으로 무장한 현장 감독들은 인부들을 동원해서 바로 인간 사냥에 나섰다. 녹색 지옥을 소중한 현금으로 바꿔줄 귀중한 자산이 도망치는 걸 그들은 용서할 수가 없었던 것이다. 천신만고 끝에 동료를 정글에서 말라리아로 잃고 탈출했지만 결국 다시 벌목장으로 돌아가게 되는 멘수의 모습에서는 키로가 작가가 라틴 아메리카 스타일의 리얼리즘에도 비범한 안목을 가졌구나 싶었다.

 

니퍼 더 도그(Nipper the dog)가 그려진 축음기를 얻기 위해 강에서 나무를 건져 올리는 이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파라나 강변의 베테랑 칸디유는 서구 문명의 이기라고 할 수 있는 축음기에서 흘러나오는 노랫가락에 홀렸다. 축음기를 손에 넣기 위해 칸디유는 그야말로 목숨을 걸고 홍수에 떠내려 오는 나무들을 건져 올린다. 이것은 사랑이 유발한 광기와는 다른 차원의 광기다. 칸디유와 거래에 나선 영국인은 고급 목재인 자단나무를 요구한다. 물욕에 대해 칸디유가 보이는 광기는 소중한 자단 원목을 지키겠다고 홍수에 도전했다가 목숨을 잃은 이의 그것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는다.

 

서구에서 이식된 폭스테리어가 라틴 아메리카의 야구아이(강아지)가 되어 가는 과정도 흥미롭다. 일단 대지를 달구는 타는 듯한 더위와 가뭄은 그 땅에 사는 사람들과 짐승들에 대한 심각한 위협이다. 이놈의 야구아이는 다른 사냥개들처럼 뛰어난 사냥 솜씨도 발휘하지 않고 그저 취미로 도마뱀붙이 정도나 잡는다. 한 마디로 말해서 인간에게는 유익한 존재가 아닌 것이다. 극심한 가뭄으로 만디오카며 옥수수마저 모두 말라 죽게 되자, 비굴하게 야구아이로서의 자존심을 버리고 생존에 올인한다. 야구아이는 설익은 옥수수를 훑고, 이웃의 닭장을 기웃거리며 빠르게 살아남는 법을 습득한다. 이 지점은 왠지 우루과이 민중의 비참한 현실에 대한 지식인 키로가 스타일의 헌정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물론 자신의 소중한 암탉을 털린 주인들은 소총으로 응징에 나서고, 야구아이라는 존재의 소멸로 귀결된다.

 

소설집의 여기저기서 보이는 사랑이라는 감정에 대한 기술은 결국 모두가 덧없는 환영이 아닌가 싶다. 그리고 시간이 갖는 소멸성은 한때 사랑이라고 생각했던 감정까지 모두 휘발시켜 버리는 무시무시한 위력을 보여준다. 녹색 지옥의 대자연이 빚어내는 형용할 수 없는 광기의 실체는 낯선 유혹인 동시에, 파멸의 전주곡처럼 그렇게 다가왔다. 때로는 쉽게 이해할 수 없는 그런 설정도 등장해서 서사를 곱씹게도 만든다. 처음 만난 작가가 차린 성찬에 감탄할 밖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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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10-09 0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처음 들어보는 작가-_- 레삭매냐님 덕분에 알게 됩니다. 감사합니다^^

레삭매냐 2020-10-09 21:17   좋아요 0 | URL
저도 이번에 처음으로 알게 된 작가
인데, 정말 세상은 넓고 우리가 모르
는 작가들은 천지삐까리인가 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