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쿠가와 이에야스 4 - 제1부 대망 4 첫 출전
야마오카 소하치 지음, 이길진 옮김 / 솔출판사 / 2015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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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장 13년에 걸친 오와리 아츠타 그리고 슨푸에서의 인질 생활을 경험한 마츠다이라 모토야스가 장수로서 역사의 무대에 등장할 차례가 되었다.

 

우선 모토야스의 기구한 성장기는 신화에 등장하는 전형이다. 훗날 신군으로 추앙받는 천하를 평정한 천하인이 되기 위해서는 어려서 간난신고의 고통을 겪어야 한다는 것이 전 세대 작가의 고정된 사고로 추정된다. 그만한 인물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만한 캐릭터가 없을 것이다. 할아버지 키요야스는 오다 가문과의 전쟁에서 25살의 나이로 전사했고, 아버지 히로타다는 가신에게 시해당했다. 미즈노 가문 출신의 현명한 어머니 오다이는 미카와를 실질적으로 지배하고 있던 이마가와 가의 압박으로 타케치요를 낳고 이혼당했다. 한 마디로 고아 신세가 된 소년 타케치요는 천지사방에 의지할 데가 아무 데도 없었다.

 

게다가 그의 영지인 오카자키는 오다 가와 이마가와 가 사이에 낀 요충지였다. 교토로 상경을 꿈꾸는 이마가와 요시모토에게 오다 가를 상대하는 최전방에 위치한 곳으로 절대 포기할 수 없는 그런 곳이었다. 관례도 올리고 츠루히메와 결혼하면서 요시모토의 조카 사위가 된 모토야스에게 드디어 기회가 주어진다. 오와리 전선에 최전방에 위치한 오타카 성에 군량보급 작전의 명령이 떨어진 것이다.

 

오카자키의 이웃 오와리에는 오다 노부히데의 사망 이후 일족의 통일과 이코잇키의 반란을 평정하던 오다 노부다가라는 호랑이가 꿈틀거리고 있었다. 난세였던 센코쿠 시대에 천하인이 되기 위해서 교토로 진출하려던 구름 속의 용 요시모토에게 노부나가는 반드시 굴종시키거나 아니면 전쟁으로 이겨야할 그런 상대였다. 당시 최강의 전력을 자랑하던 백만석 다이묘 이마가와 요시모토는 25,000명의 병력과 유력한 가신단 및 휘하 장수들을 총동원해서 1560512일 대군을 이끌고 오와리 정벌에 나서게 된다.

 

이 때, 이마가와 군의 선봉에 서게 된 것이 바로 오카자키의 마츠다이라 일족이었다. 교토가 목표였던 요시모토에게 오와리만 적이었던 것은 아니었다. 그래서 자신의 부대가 아닌 일종의 용병 부대로 오카자키의 사나운 호랑이 같은 전사들을 화살받이로 내세운 것이다. 이런 요시모토의 대부대에 대항해서 노부다가가 동원할 수 있었던 병력은 고작 5,000명 정도였다. 북쪽의 미노를 비롯해서 사방에 적으로 둘러싸인 노부다가의 형세를 절망적이었다.

 

오다 가문의 가신들은 자신들의 주군이 가문의 멸망을 앞두고 정신이 나갔다며 절망하지만, 희대의 영웅 노부나가는 나름대로 치밀한 계산으로 아군과 적을 모두 속이고 있었다. 우선 정찰 부대를 조직해서, 오다군이 주성인 키요스에서 농성작전을 기획하고 있다는 허위 정보를 퍼뜨린다. 이마가와의 초전 선전도 냉정하고 치밀한 전략가 요시모토를 방심하게 만든 원인 중의 하나였다.

 

게다가 상당히 비만이었던 요시모토는 말 대신 가마를 타고 전장으로 이동했다. 잇따른 오와리 영지 백성들의 이마가와에 대한 충성 맹세와 공물 헌납도 총대장의 주의를 흐트러뜨리는데 성공했다. 한편, 계속된 정찰대의 보고를 통해 전선의 상황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있었던 오다 노부가와는 오케하자마 부근에서 요시모토의 본대가 숙영 중이라는 정보를 얻고는 동원할 수 있는 모든 부대와 나미타로 도령의 노부시들까지 독려해서 건곤일척의 승부에 나선다.

 

키요스 내전의 주인으로 아들에게 살해당한 사이토 도산의 딸이자 노부나가의 정실 노히메는 풍전등화 같은 운명을 뒤로 하고, 출진한 남편이 전사할 경우를 대비해서 여러 가지 준비에 나선다. 노부나가의 소실들이 낳은 아이들을 미노로 도피시키거나 혹은 농성전으로 일족 최후를 준비하는 비장한 결기를 선보인다. 훗날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부인으로 문제를 일으키는 세나/츠키야마 마님과는 정말 다른 행보이지 않은가.

 

결국 키노시타 토키치로(훗날 토요토미 히데요시)의 조력과 전광석화 같은 판단력으로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본진을 습격하는데 성공한 오다 노부나가는 수하의 핫토리 고헤이타와 모리 신스케의 활약으로 적장 요시모토의 수급을 베고, 총대장의 사망으로 혼돈에 빠진 이마가와 군을 섬멸한다. 센코쿠 3대 야전 중의 하나로 손꼽히는 오케하마자 전투에서 절대 열세의 병력으로 우세한 상대에 승리를 거둔 오다 노부나가는 단박에 전국적 명성을 얻게 된다.

 

자 그렇다면 우리의 주인공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운명은 과연 어땠을까. 우선 오케하자마의 승리로 사기가 충천한 오와리 군을 상대할 실력이 모토야스에게는 전무했다. 그렇다고 해서 세나와 카메히메 그리고 장남 타케치요가 있는 슨푸로 돌아갈 수도 없는 진퇴양난의 상황이었다. 하지만 여기서 난세를 다스리던 행운의 여신은 다시 한 번, 모토야스에게 미소를 지었다. 오카자키 성을 마츠다이라 가문을 대신해서 다스리던 이마가와 부대가 자발적으로 병력을 빼서 슨푸로 퇴각한 것이다. 이마가와 패잔부대의 일원이었던 마츠다이라 부대는 자신들의 본거지에 무혈입성할 수 있는 천재일우의 기회를 맞이한 것이다.

 

결과적으로 이마가와 군이 대패한 오케하자마 전투의 최대 수혜자는 오와리의 호랑이가 아닌 너구리모토야스였던 것이다. 9대 오카자키의 성주 모토야스는 재빨리 자신의 거성을 접수하고, 충성스러운 가신단을 동원해서 백성들을 위무하고 이웃 오와리의 지배자 큰형님을 흉내내서 선정을 베푼다. 물론 토리이 영감이 이때를 위해 대비한 대량의 무기와 군자금이 성을 개축하고 미래의 전쟁을 대비하는데 유효하게 쓰인 것은 물론이다. 이 모습은 마치 뜨내기 장수로 전장을 누비던 유비가 형주에 자리를 잡고 웅비하던 시절과 비슷하게 다가왔다.

 

사슴뿔 투구로 전장에서 용맹을 떨쳤다는 십대 소년 혼다 헤이하치로 타다카츠는 마츠다이라 가문을 위해 전장에서 목숨을 바친 할아버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모토야스의 말고삐를 잡고 전장을 누비기 시작한다. 패기 넘치는 혼다 미망인의 활약도 대단했다. 자신의 목숨을 사리지 않는 마츠다이라 가신단의 충성이야말로 다른 가문의 일족과는 다른 오카자키의 자랑이었던 모양이다. 개인의 성공과 안위를 위해서라면 주군을 시해하고, 아버지를 죽이며, 비굴한 정략결혼도 마다하지 않고, 인질을 비참하게 죽이던 난세에 피어난 현대식 사고로 보자면 도대체 이해할 수 없는 무사도에 대한 야마오카 소하치 작가의 칭송이 마냥 편치는 않았다.

 

이후에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가문을 배신하고, 상승일로의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동맹을 맺는다. 마츠다이라 일족의 번영과 미래의 천하인이 되기 위해 도쿠가와 이에야스로 변신을 거듭하는 마츠다이라 모토야스의 팔색조 같은 기회주의적 변신이 이어질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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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8-04 13:0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마가와 요시모토의 상경이 ‘오와리의 바보‘ 노부나가에게 그처럼 어이없게 좌절될 줄 누가 예상했겠습니까? 반면, 이마가와의 선봉대로 소진될 것으로 생각되었던 모토야스와 가신들의 운명도 급격히 바뀐 것을 보면 세상일은 참 모를 일입니다... 동시에, 이마가와 가문의 급격한 몰락이 가정 내의 불화를 가져오고, 이로 인해 훗날 장남 노뷰야스의 할복으로까지 이어지는 것을 보면 반드시 좋은 일로만 여길 수는 없어 보입니다... 커다란 행운은 그만한 크기의 그림자도 함께 가져온다는 사실을 새삼 느낍니다.

레삭매냐 2020-08-04 11:46   좋아요 1 | URL
바로 그 지점이 야마오카 소하치가
노린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인간사, 아무도 알 수가 없다 !

새옹지마라는 말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만큼 적용되는 게 있을까요.

자신의 보호자였던 이마가와의 몰락이
전화위복으로 작용되어 독립의 계기와
기반을 갖추게 되었으니 말이죠.

5권에서는 츠루야마 마님과의 불화가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하더라구요.
드라마 뺨치는 이야깃거리의 보고가
아닐 수 없네요.
댓글저장
 


어떤 책과 만나게 되는 수백 가지 이유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작가의 책이라는 이유로.

또 표지가 마음에 들어서.

도서관에 갔다가 제목이 마음에 들어서.

헌책방에 갔다가 우연히 만나게 되어.

중고책 주문을 하기 위해 무료배송 금액을 채우려고.

 

제임스 볼드윈이라는 작가를 처음 알게 됐다.

그리고 아직 그의 책은 읽어본 게 없다.

지금 도서관에 희망도서 신청을 해두고 기다리고 있는 중이다.

물론 희망도서 신청을 했다고 해서 모든 책들을 다 만나게 되는 건

아니더라.

얼마 전에 빌린 <마스 룸>도 채 못다 읽고 어제 반납했다.

 

비슷한 시기에 제임스 볼드윈의 에세이집이 나온 모양이다.

이럴 줄 알았다면 오늘 중고책 주문할 적에 주문했어야 하는데. 항상 이런 식이지.


<단지 흑인이라서다른 이유는 없다>

이 책은 순전히 인터넷 서핑을 하다 만난 사람 좋아 보이는 이 사진 때문에

읽게 될 것이다다른 이유는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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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8-03 23:3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8-04 08: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moonnight 2020-08-04 10:5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레삭매냐님께서 읽게 될 것이라 하셔서 따라 읽을 예정입니다. 다른 이유는 (필요) 없고 ^^;;;

레삭매냐 2020-08-04 11:38   좋아요 1 | URL
저는 일단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했습니다.

분량이 그닥 많지 않아서 금세
읽을 수 있지 않나 생각해 봅니다.

도서관에서 수급이 좀 늦어서
느긋하게 읽어 보려고 합니다.

젤소민아 2020-08-09 0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요즘같은 시국에 읽으면 적절한 책같습니다!

레삭매냐 2020-08-09 07:31   좋아요 1 | URL
처음 들어보는 작가인데
어제부터 <빌 스트리트>를 읽기 시작했답니다.

흡입력이 대단하네요. BLM의 시조새 같은
작가로 보이네요.
댓글저장
 














지난달부터 야마오카 소하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읽기 시작했다.

시작은 중고서점에서 우연히 사게 된 1권 때문이었다. 이건 마치 오래 전, 김용 선생의 무협지를 읽는 그런 느낌이었다고나 할까.

 

그전에 앞서 자그마치 17년이라는 오랜 시간을 들여 쓴 저자 야마오카 소하치에 대해 할 말이 있다. 아주 어려서 전사에 관심이 있어서 종군기자 출신이라는 어느 저자의 <태평양전쟁> 5권을 읽은 적이 있었다. 그 작가가 바로 야마오카 소하치였다. 아무리 좋게 이야기해도 그는 일본의 극우정치에 동조하는 그런 인물이었다. 태평양전쟁은 미국의 강압적인 태도로 개전할 수밖에 없었다는 일본 군국주의자들의 주장을 그대로 인용했고, 전쟁 당시 일본군이 아시아 각처에서 저지른 전쟁범죄에 대해서는 한 마디의 사과도 없었다. 그놈의 황군 타령은 정말 지긋지긋했다. 그가 찬양해 마지않았던 일본 제국의 황군은 우리에게는 원수같은 존재였다.

 

그런 작가가 전후 변신해서 평화의 시대에 대한 염원이 담긴 <도쿠가와 이에야스>라는 사실을 유념에 두고 책읽기에 나섰다. 역시 씁쓰름한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우리가 아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센고쿠 시대라는 100여년에 걸친 난세를 평정하고 에도 바쿠후를 연 천하인바로 그 사람이다. 소하치 작가는 그의 탄생에 앞서 오와리의 오다 가문과 스가루의 이마가와 가문 사이에 껴서 생존을 도모하던 비참한 운명의 마츠다이라 가문에 대한 이야기로부터 32권에 달하는 대작을 시작한다.

 

훗날 이에야스가 되는 타케치요의 조부 기요야스는 센고쿠 시대를 주름잡은 오다 가문과 전쟁을 벌이던 중, 20대의 포로가 되어 죽음을 맞는다. 어린 나이에 마츠다이라 가문의 가독을 상속받은 이에야스의 아버지 히로타다는 난세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그런 그릇이었다. 형제들끼리 분쟁은 물론이고, 누가 아군이고 적군인지 도대체 분별이 가지 않는 그야말로 약육강식의 시절이었다. 조부 기요야스는 카리야성의 미즈노로부터 아이를 다섯이나 낳은 케요인을 자신의 아내로 맞는 기행도 서슴지 않았다.

 

그리고 히로타다의 아내가 되는 오다이(이에야스의 생모)는 바로 그런 케요인과 미즈노 사이에서 낳은 딸이었다. 현대식으로 말하자면 막장 드라마 쯤 되지 않을까 싶다. 이웃의 오와리와 스루가 사이에 낀 미카와국의 오카자키의 운명은 두 강대국 사이에서 어느 편에 서지 않으면 일족의 운명을 담보할 수 없는 그런 상황이었다. 마츠다이라 가문은 이마가와 편에 섰는데, 그렇기 때문에 오와리 침공의 최선봉에 서야 하는 그런 운명이었다. 동시에 떠오르는 태양 같은 오다 가문의 침공을 온 몸으로 막아내야 했다.

 

히로타다는 성주로서 부족한 자질 때문에 가신들의 기대에 부응하지 못한 그런 심약한 인물이었다. 차라이 아버지 기요야스 같은 기개라도 있어야 했는데 그조차도 부족했다. 처음에는 원수의 딸이라는 이유로 어쩔 수 없이 맞이한 정실 오다이와 이혼을 압박하는 이마가와의 명령을 거부하지 못하고 자신의 적자 다케치요를 낳은 오다이와 결국 이혼한다.

 


그동안 훗날 전국 통일의 기반을 마련한 영걸 오다 가문의 적장자 킷포시(훗날 노부나가)도 등장해서 오다이와 다케치요와의 기묘한 인연도 등장하고, 오다 가에 빼앗긴 오카자키의 거성 안죠 성 공격에 나선 히로타다를 대신해서 전장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혼다 헤이하치로의 스토리도 비장하게 명멸한다. 나고야의 멍청이라 불렸던 킷포시는 어려서부터 일절의 관습이나 전통 따위는 거부하고 오로지 실질과 전광석화 같은 판단력 그리고 도무지 어린 아이라고 생각되지 않는 어린 호랑이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드러낸다. 물론 주인공이 다케치요기에 킷포시에 대한 이야기들은 맛보기 양념 정도로만 등장한다. 아마 작가가 오다 노부나가를 다룬 다른 작품에서는 좀 더 심도 있게 그리고 있지 않을까 싶다.

 

어쨌든 다케치요가 3살이 되던 해, 어머니 오다이가 아버지 히로타다와 이혼하게 되고 또 6살이 되던 해에는 슨푸의 인질로 가게 되는 결정이 내려지면서 미래의 천하인의 운명은 그야말로 바람 앞의 등잔불 신세가 된다. 이미 오다이의 오카자키행에서 이미 기습의 실력을 보여 주었던 오다 가가 미래의 오카자키 영주 다케치요의 슨푸 행을 막기 위해 납치해서 오와리의 인질이 되기도 한다. 적군의 인질로 언제 죽을지 모를 운명의 다케치요를 지키기 위해 이제 다른 남자의 부인이 된 오다이와 할머니 케요인이 나서서 구명에 나서는 장면들은 아마도 작가의 상상이 아닐까 싶은 생각이 들 정도로 훌륭하게 짜인 구성이었다.

 

다케치요 호송에 나선 오카자키의 가신(이름이 기억나지 않는다)은 주군의 놀이친구이자 시종으로 나선 가신들의 자제들에게 다케치요의 신변에 이상이 생기면 살아서 오카자키 땅을 밟을 생각을 하지 말라고 경고한다. 그리고 주군의 호송에 실패한 그는 현장에서 장렬하게 자결하면서 오카자키 사나이의 기백을 적에게 보여준다. 소설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곳곳에서 계속해서 반복되듯이 마츠다이라 일족의 힘은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일족의 철석같은 단결이라는 점을 저자는 고집스럽게 기술한다.

 

혼다 헤이하치로의 경우처럼, 할아버지는 주군을 대신해서 전장에서 전사했고, 아버지 혼다 역시 안죠 성 공격에 나섰다가 고슴도치처럼 화살을 맞고 전사했다. 오카자키의 수많은 무사들이 남편과 형제 그리고 자식들을 전장이 이슬로 잃어 가면서도 언젠가 가문을 부흥할 수 있을 거라는 신념으로 히로타다 사후, 이마가와 가문의 성주 대리가 오카자키를 실제로 지배하는 동안의 수모를 견뎌냈다.

 

결국 안죠 성 공략에 성공한 오카자키-이마가와 연합군은 오다 노부히데의 서장자를 포로로 잡아 다케치요와 인질 교환하는데 성공한다. 다케치요 12년 인질 생활의 두 번째 서막은 이마가와 요시모토가 지배하는 슨푸 성으로 무대를 이동한다.

 

킷포시가 오다 노부히데의 뒤를 이어 오와리의 가독이 되어 가는 과정, 다케치요가 이마가와의 조카 사위가 되어 가는 과정 등 정치 군사 뿐만 아니라, 센고쿠 시대를 주름 잡은 인물들의 애정 문제에 대해서도 소하치 작가는 자신의 상상력을 유감없이 발휘한다.

 

오다에게 히라테 마사히데라는 훌륭한 스승이 있었다면, 다케치요에게는 역설적으로 자신을 인질로 잡은 이마가와 가문의 총대장 타이겐 셋사이 선사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소하치 작가는 도쿠가와 이에야스를 전란의 시대를 끝내고, 평화의 시대를 연 인물로 그리고 싶지 않았나 싶다. 그러기 위해서는 훗날 신군으로 추앙되는 영웅의 유년 시절을 전형적인 온갖 환난을 극복하고 난세를 이겨낸 영웅으로 만들고 싶었던 것 같다. 내가 보기에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시대가 만들어낸 전형적인 기회주의자일 뿐인데 말이다. 나의 라이벌이 강할 때에는 그를 방심하게 만들기 위해, 고개를 숙인다. 자신과 상대가 되지 않는 무력을 가진 오다 노부나가나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강성할 때는 그에게 고개를 숙이고 신종을 맹세하지 않았던가. 그러다 권력에 미세한 균열이 보이기 시작하면, 배신도 서슴지 않는다.

 

자신을 주군으로 믿고 따르는 오카자키 백성들을 위한다는 이유로 셋사이 선사가 임종하면서 내린 숙제에 대해서도 단호하게 처자를 버릴 수 있다고 강변하지 않았던가. 실제로 오다가 훗날 자신의 맏아들 부부에게 자결을 명했을 때도 인내와 굴종을 대망을 위한다는 이유로 감내하지 않았던가. 소설에서 내내 강조되던 신의나 무사도 같은 허망한 이데올로기를 가장 신랄하게 짓밟은 주인공이 어쩌면 도쿠가와 이에야스였다는 점도 소설이 짚어내는 역설일 지도 모르겠다.

 

십대 소년에 불과한 다케치요의 애정 전선 이야기도 신박하게 다가온다. 아무리 훗날 천하인으로 모두가 혀를 내두를 만한 배포를 자랑하는 오카자키의 어린 성주라고 하더라도 당시 절대 권력을 지닌 이마가와 요시모토 앞에서 방약한 태도를 보이는 건 이해할 수가 없었다. 도대체 그의 가신들이나 스승들은 그에게 무엇을 가르쳤단 말인가. 어쩌면 이런 에피소드 모두가 영웅은 어려서부터 비범했다는 말을 하고 싶었던 것일까.

 

느닷없이 어느날 갑자기 자신이 사랑한다고 고백한 카메히메 그리고 츠루히메(훗날 자신의 아내가 되는 세나히메)와 차례로 애정을 나누질 않나. 어려서부터 천하를 집어 삼킬 만한 배포를 가진 그런 인물이었단 말인가. 천하인이라면 보통 사람이 감당하지 못할 그런 큰 짐을 질 수 있어야 한다는 주장처럼, 어머니 오다이와 할머니 케요인의 기원 그리고 오카자키의 모든 사람의 희생을 담보한 미래의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밑그림이 보이기 시작했다.

 

어쨌든 소하치 작가는 문단의 축복이니 어쩌구 하는 찬사를 받은 작가처럼, 독자의 감성을 말랑말랑하게 만들고 흥미진진하게 이야기를 이끌어 가는 기술 하나는 끝내준다. 아무래도 여러 신문에 연재된 소설이라 그런진 몰라도 다음 회를 기대하는 만드는 그런 재주가 있다고나 할까. 센고쿠 시대라는 생존을 위해 모든 것이 허용되는 그런 시대적 상황, 가문의 영속이라는 그들이 말하는 대의를 위해 배신과 음모, 충성, 헛된 애정 관계 그야말로 인간사에 적용되는 모든 것들을 품은 이야기가 어찌 흥미진진하지 않을 수 있을까.

 

3권의 말미에 등장한 바늘장수 코자루 하시바(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오다와 만나게 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비범한 인물은 역시 자신 만큼이나 비범한 인물을 바로 알아 보는 모양이다. 드디어 오다 가문과 이마가와 가문의 흥망이 걸린 오케하자마 전투 격돌을 그린 4권에 진입했다. 앞으로도 28권이 남았다니 믿을 수가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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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20-08-02 14: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대망>으로 번역된 판본으로 읽었던 기억이 납니다. 섬세한 인물 묘사와 무사도가 인상적인 작품이었지만, 개인적으로는 수시로 이름을 바꾸는, 심지어는 성(姓)까지도 바꾸는 통에 인물 관계를 파악하는 것이 제일 어렸웠던 것 같아요, 레삭매냐님 즐거운 독서 되세요! ^^:)

레삭매냐 2020-08-02 13:47   좋아요 2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주인공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경우만
해도,

마츠다이라 다케치요,
마츠다이라 모토노부,
마츠다이라 모토야스

3권 읽었는데 이름이 세번 바뀌었네요.

아명으로부터 출발해서 이름이 서너
차례 바뀌는 건 기본이더군요.
뭐 책은 재미있으니...

stella.K 2020-08-02 14: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대단하십니다. 저도 초등학교 땐가 아버지가 대망 세트 들여놓으셨던 기억 납니다.
한 20권 됐던 것 같은데...
저는 감히 못 읽을 것 같아 쳐다보지도 않았고 후에 <후대망>인가?
그건 이 대망과는 상관없는 기업 기업 소설이었던 것 같은데
그거 2권까지 읽은 기억 나네요.
그냥 대망이든 후대망이든 있을 때 못 읽은 게 아쉽네요.
이사 올 때 버리고 온지라...
그렇게 이름을 많이 바꾸다니 저 같으면 빡쳤을 것 같습니다.ㅋㅋ

레삭매냐 2020-08-02 22:00   좋아요 1 | URL
예의 20권은 말도 많고 탈도 많은
어느 출판사의 불법출판물이 아닌가
조심스레 추정해 봅니다.

저작권법이 다 무어냐는 식의 배짱
에 기가 찰 지경이지요.
왜 아직도 도서관에 불법출판물을
소장하고 있는지 이해가 되지 않더
군요.

개인적으로 소하치 작가가 자신이
하고 싶은 이야기를 구성하고 고사
를 끼워 맞추는 게 아닌가 뭐 그런
생각이 살짝 들었습니다.

coolcat329 2020-08-02 1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희 아버지도 대망을 들여놓으셨던 기억이 나네요. 저는 물론 전혀 관심이 없었지만요. ☺

레삭매냐 2020-08-02 22:10   좋아요 0 | URL
저도 아주 오랫 동안 무관심하다가
영어의 몸이 되신 분께서 일독하신
말에 불끈하야 도전하게 되었습니다.

책은 댑따 재밌네요.

그냥 2020-08-08 23: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뭐 이렇게 일목요연하게 정리를 잘하셨나 싶어 혼자 감탄하고 있습니다.
옛날에 읽었던 사람으로 한동안 읽다보면,
어느싯점에서 나가 떨어지는 구간이 나오지 않을까 싶네요.
저도 그랬거던요. ㅎ ㅎ 앞으로도 읽으신 부분 정리 좀 해주세요.

레삭매냐 2020-08-09 07:36   좋아요 0 | URL
말씀해 주신 대로 아무래도 원체
방대한 분량이다 보니 내쳐 달릴
수는 없을 것 같습니다.

그리고 그 동안에 다른 책들도
계속 만나고 있어서요.

일단 9권 1부까지 목표로 삼고
그 다음에는 되는 대로 가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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윈스턴 처칠, 나의 청춘 - 가장 위대한 영국인, 청년 처칠의 자서전
윈스턴 처칠 지음, 임종원 옮김 / 행북 / 2020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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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려서 처칠의 전기를 읽었다. 귀족 집안의 자제로 태어나, 어려서는 공부를 하지 못한 문제아였었는데 어느 순간 전쟁 영웅으로 거듭난 인물. 그 뒤에 정치계에 뛰어 들어서는 결국 입지전적인 노력으로 대영제국의 전시 총리가 되어 풍전등화의 조국을 히틀러의 손아귀에서 구해낸다는 그야말로 한 편의 드라마 같은 전설의 주인공이 바로 처칠이었다.

 

그러니까 위인으로 꼽히기에 조금도 손색이 없는 그런 인물이라는 게 종전의 생각이었다. 하지만 나이가 들고 여러 가지 자료들을 본격적으로 접하면서 윈스턴 처칠의 본질을 알게 되었는데, 그는 영국이 세계를 주름잡던 시절의 향수를 짙게 가진 빅토리아 시대에 집착하는 라떼꼰대였던 것이다. 영국 중심의 세계질서를 유지하기 위해서라면 자신의 라이벌이었던 히틀러와 거래도 마다하지 않았을 것이다. 기존 질서를 수고하려는 지독한 제국주의자였고, 심지어 인종차별주의자이기도 했다. 나같은 퍼슨 오브 컬러(person of color:유색인종의 고상한 표현이다)가 이런 사람을 곱게 보아줄 필요가 있을까 싶다.

 

스펜서-처칠 가문 출신의 윈스턴 처칠은 아버지 랜돌프와 미국인 어머니 제니 제롬 사에서 빅토리아 시대가 절정으로 치닫던 18741130일 태어났다. 영국 귀족 자제들에게 필수였던 라틴 어와 그리스 어에 젬병이었던 미래에 나라를 구할 영웅은 소년 시절 문제아일 수밖에 없는 그런 운명이었다. 아들이 법률가로 성공할 것을 원하던 아버지는 일찌감치 아들에 대한 기대를 접어야 했던 모양이다.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입학하기 위해 삼수 하는 동안 죽은 언어 대신 자신의 모국어인 영어를 갈고 닦은 처칠의 목표는 군인이었다. 이 시절에 갈고 닦은 언어의 힘이 그에게 훗날 노벨문학상을 받는 위업을 이루는 원동력이 되지 않았나 하는 추정을 해본다. 결국 어린 시절에는 하나라도 배우는 게 미래의 도움이 된다는 게 아닐까. 사관학교에서도 그놈의 성적 때문에 보병이 아닌 기병을 선택해야만 했다.

 

처칠이 샌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를 150명 중에 8등으로 졸업하고(놀라운 변신이 아닌가!) 초임 장교로 부임하던 18951, 그의 아버지가 돌아가셨다. 그는 이제 오롯하게 자신의 운명의 주인이 된 것이다. 자유당과 민주주의 정권 아래 지속된 장기간의 평화로 장교들은 실전 체험을 원했다. 고작해야 식민지 인도나 수단의 소규모 반란진압에 투입되던 장교들이 가지고 있던 참전욕구는 곧 이어 벌어질 보어전쟁과 대전쟁(1차 세계대전)으로 충분히 채워질 전망이었지만, 당시 그들이 알 리가 없었다. 청년 처칠의 선택지는 쿠바였다.

 

자신과 아무런 상관도 없는 쿠바에 순전히 실전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스페인 점령을 거부하고 독립전쟁에 나선 쿠바 독립군 토벌에 나선 것이다. 비유를 들자면, 조선독립군을 탄압하는 일본 군대에 실전을 체험해 보고 싶다는 이유로 제국주의 국가의 청년 장교가 자원해 나선 꼴이 아닌가. 중년의 나이에 들어선 처칠이 청년 시절 자신의 치기 어린 행동에 부끄러움을 느꼈다면 자신의 전기에 이런 글을 남기지 않았겠지라는 생각이 자꾸만 머리에 떠오른다.

 

한편 1895년 말 수단과 트란스발(남아프리카)에서 터져 나온 위기는 기존의 자유당 글래드스톤 내각의 유화론으로 식민지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보수당 솔즈베리 내각에 힘을 실어 주었다. 대화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으면 무력으로 해결할 수밖에 없다는 것이 19세기식 사고가 아니었던가. 보어전쟁으로 이어지는 분쟁은 일단 뒤로 하고, 처칠은 동양의 인도로 향한다. 그리고 국경에서 사납기로 유명한 파슈툰 족의 반란진압에 투입되었다. 너무 오래 전의 그의 전기를 읽은 탓인지, 이 부분은 조금 생소하게 다가왔다.

 

인도 시절부터 그는 종군기자이면서 동시에 군인이라는 다소 기이한 스타일의 주인공이었다. 수단 투입을 앞두고 그에게 관심종자훈장사냥꾼이니 하는 세간의 평이 따라 붙었다는 점도 흥미로웠다. 더군다나 원정군 총사령관인 허버트 키치너 장군의 반대로 처칠의 종군이 난관에 부딪히지 않았던가. 처칠은 특유의 돌파력으로 정원 외 장교 신분으로 그토록 원하던 수단 전선에 출정에 나서게 됐다. 우여곡절 끝에 옴두르만 전투의 대미를 장식한 데르비시군을 상대로 한 기병돌격은 그야말로 영국 육군사의 전설이 될 만했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온 처칠은 <강의 전쟁>을 집필하면서 정치 활동을 시작했다. 보수적인 토리 민주주의자라는 타이틀로 올덤 선거에 나섰지만, 근소한 차이로 자유당 후보에게 패배한다. 그러나 군인으로서 처칠의 경력을 정점을 찍을 다음 무대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보어전쟁이었다. 사실 이 책의 40% 가량이 투입된 보어전쟁 스토리는 정치인 처칠의 성공 기반이 되었다. 사골 곰탕이 될 정도로 널리 알려진 이야기니 패스하도록 하자.

 

일전에 만난 제바스티안 하프너의 처칠 평전에서 독일 출신 저자는 그를 기회주의적 독재자라는 박한 평가를 내린다. 소설에 등장하는 19세기 인물 처칠은 세계주의자라기보다 조국에 충성하는 애국자의 면모를 가진 청년이었다. 군인 경력을 마치고 정계에 입신한 처칠은 훗날 전시내각 총리로 빈사의 상태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해 물불 가리지 않는 리더십으로 최대 맞수 히틀러를 상대로 승리를 이끌어냈다. 전쟁 말미에는 루즈벨트와 스탈린이라는 거두와 함께 우리가 지금 살고 있는 시대를 설계하기도 했다. 그에게 일종의 부채의식을 가지고 있지만, 또 한편으로는 그가 죽을 때가지 고수한 제국주의적 면모에 대해서는 도저히 동의할 수 없기도 하다. 이런 문제적 인간이 남긴 청년기의 기록은 그가 그토록 자랑스러워했던 제국의 마지막 광휘를 엿볼 수 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가지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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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리는 과연 존재하는가

 

무더운 여름의 어느 날, 나는 <장미의 이름>을 만나보고 싶어졌다. 그래서 엉망으로 쌓인 책탑을 헐어 <장미의 이름>을 상권을 찾아냈다. 하권은 바로 옆에 있었는데 도대체 상권은 어디에 있었는지.

 

이 무더운 날씨에 나의 지적 허영과 독서의 재미까지 모조리 잡아준 그런 책이라고나 할까. 그런데 아쉽게도 책은 아직 다 읽지 못했고, 대신 작년에 나온 8부작 미니시리즈는 이틀 동안 다 봤다. 1986년에 나온 영화도 봤는데 영화가 책의 풍부한 설정을 잡아내지 못해 개인적으로 졸작으로 평가한다. 역시 원전만한 게 없더라.

 

하지만 이번 미니시리즈는 일단 시간 제약이 없기 때문에 아주 방대한 스케일로 소설의 디테일을 잘 잡아냈다. 다만 원작에는 없는 각색된 부분들이 상당 부분 추가된 점이 원작과 다른 점이라고나 할까.

 

일단 소설 <장미의 이름>은 정체를 알 수 없는 누군가가 멜크 수도원 출신의 아드소라는 수도사가 남긴 수기를 발견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미겔 세르반테스 이래 작가들이 애용하는 고전적인 수법이다. 이건 내가 만든 이야기가 아니라, 누군가 남긴 이야기를 여러분에게 다시 들려주는 거랍니다. 클래식한 시작이다.

 

때는 132711월말, 북부 이탈리아 모처에 있는 베네딕트 수도원이 공간적 배경이다. 이 수도원의 자랑은 방대한 양의 책들을 품은 장서관이다. 원래 요새였다고 했던가. 그리고 우리의 주인공인 영국사람 배스커빌의 윌리엄 그리고 멜크 수도원 수련사 아드소가 등장한다. 윌리엄은 당시 아비뇽에 유수된 교황 요한 22세와 치열한 세속권 투쟁을 벌이던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의 밀사로 수도원에 파견된다.

 

루터의 종교개혁을 한 세기 앞둔 당시, 교권의 타락상은 이루다 말할 수가 없을 지경이었다. 드라마에서는 프란체스코 수도회 출신 수도사가 논쟁 가운데 교황이 만든 입에 담을 수 없는 죄들에 대한 속죄비용으로 그들의 일탈과 타락상을 짐작해 볼 수 있다. 당대의 사제들이 얼마나 망가졌는지 한 번 드라마를 보면 알 수 있다.

 

교황과 교황의 대리인으로 나오는 희대의 악당 베르나르 기(실존인물이다)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 그리스도가 돈주머니를 차고 있다는 장면으로 프란체스코 수도회 소속 수도사들이 그리스도의 청빈 사상을 내세우는 것을 비웃는다. 당대 최고의 기호학자 움베르토 에코 선생은 어쩌면 중세 기독교가 지배하던 시절에도 물질주의가 만연해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었던 걸까. 현대 자본주의 사회에서 물질만큼 중요한 게 또 없다는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비판이 연상된다. 자본 중심주의라는 도그마만 유지한다면, 현대극으로 옮겨도 전혀 이상할 게 없는 그런 설정이다.

 

수도원에서 전권을 행사하는 수도원장 아보 역시 타락한 사제의 전형이다. 그는 지하묘지에서 발견한 성모 마리아상에 자신이 몰래 취득한 온갖 보석으로 치장하며 자신만의 법열에 빠져든다. 나중에 밝혀지는 이야기지만, 원래 귀부인이었던 그의 어머니가 프란체스코 수도회의 주장에 빠져 모든 재산을 가난뱅이들에게 나누어 주었다고 했던가. 그렇게 부유한 어머니와 재산을 모두 잃은 아보는 자신만의 방식(어쩌면 물질주의 페티시즘일 지도 모르겠다)으로 욕정을 채운다.

 

이제 곧 황제가 지지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들(순전히 교황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의도다)과 교황파 사제들이 격돌한 대논쟁을 앞두고, 수도원에서 일단의 살인사건들이 잇달아 발생하기 시작한다. 종교적 갈등에 살인사건까지. 하지만 아보 수도원장은 문제의 근원인 장서관의 출입은 엄격하게 금지한 채, 윌리엄에게 사건해결을 의뢰한다. 아니 손발 다 묶어 두고 무슨 사건을 해결하란 말인가.

 

뛰어난 재능의 소유자였던 채식사 아델모는 투신한 것으로 보이고, 문서 사자실의 동료 베난티오 역시 돼지피를 젓던 항아리에 익사한 채 발견된다. 정신 나간 것처럼 보이는 알리나르모인가 하는 이탈리아 수도사는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나팔 소리의 계시대로 수도사들이 죽어나간다는 요사스러운 계시를 주절댄다. 그러니까 윌리엄과 아드소는 온갖 요설과 음모 그리고 비밀들이 어지럽게 난무하는 가운데 중차대한 사건을 해결해야 하는 것이다.

 


소설과 드라마가 결정적인 차이를 보이는 장면은 20여 년 전에 피렌체에서 이단으로 몰려 화형당한 돌치노와 마르게리타의 딸 안나가 부모의 복수를 위해 잔혹한 이단 심판관 베르나르 기를 추적하는 것과 소설에서는 그렇게 비중 다뤄지지 않은 아드소가 사랑에 빠진 처녀의 역할이다.

 

소설에서 중요하게 다뤄지는 식료계 담당 수도사 레미지오와 그의 수하 살바토레 역시 돌치노파로 신분을 감춘 채, 수도원에서 조용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중 윌리엄과 그의 라이벌 베르나르 기의 등장으로 정체가 발각된다. 다른 사람도 아닌 이단전문가 베르나르 기가 현장에 있었으니 그들의 운명은 이미 결정난 게 아니었을까.

 

흥미진진한 이야기만큼이나 캐릭터들 사이에서의 갈등 구조도 에코 선생은 역시나 대가다운 솜씨로 풀어나간다. 한 때 뛰어난 조사관으로 명성을 날린 로저 베이컨을 스승으로 모신 배스커빌 사람 윌리엄은 자연과학을 마술로 여기던 당대의 참 지식인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그는 셜록 홈즈 뺨치는 지식과 추리력으로 미궁에 빠진 연쇄살인의 단서들을 추적한다. 그의 조수로 등장하는 십대소년 아드소는 왓슨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가끔 그가 무심결에 던진 말들이 자신의 마스터에게 도움이 되기도 하지만.

 

이단을 깊숙하게 연구하다 보니 어느새 이단이 아닌가 할 정도로 박식한 지식을 자랑하는 프란체스코 수도사 윌리엄은 13세기를 대표하는 지식인으로 상징된다. 게다가 소설은 우리 책쟁이들이 환장하는 책에 대한 이야기로 우리를 유혹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결국 어떤 물체에 집착하는 수도사들 간에 벌어지는 애욕과 질시 그리고 살인까지도 마다하지 않게 만드는 그 무엇인가 <아프리카의 끝(Finis Africae)>라는 장서관의 비밀 공간에 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히 흥분되지 않는가 말이다.

 

어둠의 시기라는 중세 시대 지식의 보고이자 지식 전수의 장이었던 수도원의 모습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해 보게 된다. 윌리엄은 수도원의 장서관이야말로 기독교 세계의 보물 같은 그런 장소라고 격찬해 마지않는다. 평생을 신에게 서원한 수도사들은 문서 사자실에서 자신의 능력을 최대치로 발휘한다. 아델모 같은 채식사들은 한껏 능력을 뽐내면서 글이 필사된 양피지를 아름답게 채식한다. 베난티오 같은 그리스어 번역가들은 아랍 세계를 거쳐 유럽으로 전수된 고전 그리스 문헌들을 다시 당시 공용어였던 라틴어로 번역한다. 도서관 사서인 말라키아는 물론이고 그의 조수인 베렝가리오 그리고 베노 같은 수도사들 모두 금지된 책, 그러니까 금서의 존재를 아는 순간 모두 달려들어 책에 대한 자신의 욕정을 채우려고 시도한다. 어쩌면 수도원장과 수도원의 진짜 실력자였던 눈먼 호르헤 수도사는 그런 금지의 유혹으로 수하의 수도사들을 통제하려고 했는지도 모르겠다.

 

그러한 그들의 시도는 당시 교황을 필두로 한 교권 기득권 세력이 사랑, 정의 그리고 평화라는 이름으로 민중을 지배하려고 했던 것과 병치된다. 그들은 프란체스코 수도회가 주장하는 초기 기독교 시절 그리스도의 청빈에 대한 주장을 두려워했다. 도대체 교회가 왜 물질이 필요하단 말인가? 그리스도가 금화 한 닢이라도 수중에 가지고 있었던가? 자신들의 세속적 욕망을 채우고 민중을 지배하기 위해 그들은 정통 교리마저도 자신들의 입맛에 맞게 해석했다. 그리고 돌치노파처럼 위험한 주장을 하는 이들을 모두 이단으로 몰아 화형대의 말뚝에 세웠다. 그들이 보인 광기는 현대에도 반대파를 정치적으로 탄압하기 위해 씌우는 프레임 전쟁과 닮아 있다. 항상 그렇지만 역사는 희극으로 한 번 그리고 다시 비극으로 한 번 반복된다고 하지 않았던가.

 

상황이 이러니 아비뇽의 교황 요한 22세에게 프란체스코 수도회야말로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고, 신성로마제국 황제 루트비히 4세는 적의 적은 나의 편이라는 속설대로 프란체스코 수도회를 지원한다. 그래서 그들은 전장에서 철검으로 맞부딪히는 것도 마다하지 않았다. 드라마의 첫 장면이 바로 그런 전투 씬이 아니었던가. 소설에서는 에코 선생이 진입장벽을 높이기 위해 당대 시대적 배경에 대한 설명을 의도적으로 빼먹으신 것 같은데, 드라마에서는 상대적으로 그런 부분들을 잘 짚어준 것 같다. 물론 원작에서 너무 멀리 나간 것 같은 설정도 다수 있었긴 했지만 개인적으로 영화보다는 훨씬 낫다는 느낌이다. 주인공 윌리엄 역할은 존 터투로 보다는 션 커네리가 낫지 않나 싶다. 아드소 배역은 크리스천 슬레이터보다는 다미안 하둥이 더 멋지더라.

 

수도원에 물자를 공급하는 대다수 농민들이 하루 벌어먹고 사는 가난함이라는 적과 맞서 싸웠다면, 문서 사자실의 수도사들은 그들이 추구하는 진리, 다시 말하자면 장미의 이름이나 장미의 향기를 흠향하기 위해 대중의 고통을 외면하고 자신들의 임무에 전념했다. 베르나르 기 같은 기득권층의 수호자들은 그들이 만들어낸 정통 교리에서 벗어난 일절의 다른 해석도 용인하지 않았고, 검과 고문 그리고 화형대의 횃불로 생각이 다른 이들을 정죄했다. 같은 신을 믿으면서도 이렇게 서로 다른 층위의 사람들이 복닥거리며 사는 세상에 과연 하나님이 편하게 임재하실 공간이 있는가에 대한 윌리엄의 질문은 그야말로 화두처럼 다가왔다.

 



소설에 비해 이번에 새로 만들어진 드라마는 <장미의 이름>의 확장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소설에서 다뤄지긴 했지만, 시각적으로나 내러티브상 좀 더 흥미를 줄만한 소재들을 찾아 극대화하는데 주력한 느낌이다. 돌치노와 마르게리타의 딸 안나의 등장, 바라지네 사람 레미지오가 돌치노파에 합류해서 활동하는 장면, 귀족의 개 노릇을 하던 살바토레(<바르톨로메는 개가 아니다>가 연상됐다) 등이 특히 인상적이었다.

 

신에게 서원한 수도사들이 모여 지내는 수도원에서 벌어지는 연쇄살인사건이란 소재는 대단한 픽이 아닐 수 없다. 처음 아델모와 베난티오가 죽었을 때만 해도 일대 충격적인 사건이었지만, 욕망의 구덩이였던 수도원의 비밀과 비리들이 하나둘씩 밝혀지면서 다음 차례는 누구인가하는 호기심으로 전이되는 과정을 드라마에서는 잘 잡아냈던 것 같다. 신의 섭리가 담긴 책들을 필사해서 후대에 보존하는 성스러운 장소에서 지상의 그 어떤 곳보다도 속되고 타락한 곳으로 드러나게 되는 설정 그리고 그 중심에는 욕망의 대상이 된 책이 존재하고 있다는 전개에 그만 압도된 느낌이라고나 할까.

 

처음에는 책 읽는 속도가 빨랐으나, 결국 드라마가 주는 시각적 유혹을 견디지 못하고 드라마부터 먼저 보게 되었다. 책은 처음의 속도에 비해 느린 속도로 읽고 있다. 뭐에 쫓기는 것도 아니니 천천히 읽는 것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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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7-22 11: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2 13:0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7-22 13: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treehyun 2020-07-22 1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드라마가 좋았다는데 저는 놓쳤네요. 영화를 보고 책을 읽었어요. 지식을 독차지 하려는 기득권의 욕망이 끔찍했지요. 말의 왜곡이 이렇게 생겨난 것인가 했지요.
여름에 읽기 좋겠네요.

레삭매냐 2020-07-22 13:09   좋아요 0 | URL
제가 책과 드라마를 병행해서 보다 보니
드라마가 원전을 좀 비틀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더군요.

쥐꼬리만한 기득권을 고집하다가 결국
에는 모두 다 놓치게 된다는 역사의 교
훈을 배우지 못하니, 안타까울 따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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