역사의 끝까지
루이스 세풀베다 지음, 엄지영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6월
평점 :
절판



우리의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된 작가가 우리에게 남긴 마지막 소설을 읽었다. 모든 마지막은 언제나 슬픈가 보다.

 

4년 전 발표된 루이스 세풀베다의 <역사의 끝까지>1994년 발표된 <귀향>의 시퀄이다. 전작에 등장한 후안 벨몬테가 다시 침묵 속에서 소환되어 나온다. 그렇지 않아도 이번 세풀베다 작가를 추모하는 재독 프로젝트를 가동하면서 가장 읽어 보고 싶던 책이었는데 결국 어디에 두었는지 몰라 못 읽었다. 결국 어제 예전에 써둔 리뷰로 대강의 줄거리를 갈무리했다.

 

이번 <역사의 끝까지>에서 빌런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바로 역사의 곳곳에서 반동의 주역이었던 크라스노프 집안의 아타만들이다. 우선 볼셰비키 혁명에 반대하는 백군 지도자였던 카자흐 아타만 표트르 니콜라예비치 크라스노프가 등장한다. 세상에, 그는 레프 트로츠키가 적군을 이끌던 시절의 악당이 아니었던가. 두 번째 세계대전 와중에는 카자흐 독립국가를 약속한 히틀러의 제3제국에 속아 카자흐 기병단을 이끌고 참전하기도 했었다. 그들을 조국의 배신자로 규정한 스탈린에게 카자흐 사람들은 참혹한 보복을 당했다.

 

세풀베다는 북위와 남위의 여러 곳을 넘나들며 시공을 뛰어넘는 대서사시를 구축한다. 볼가강으로 차리친에서 모스크바, 뮌헨 같은 북반구 도시들은 물론이고 남반구에서는 칠레의 산티아고를 중심으로 느와르 스타일의 박진감 넘치는 내러티브가 전개된다. 슈타지 출신 스위스인 오스카 크라머는 66세의 은퇴한 게릴라 전사 후안 벨몬테가 거절할 수 없는 부탁으로 최근 칠레에 잠입한 5인조 악당들의 거처를 파악하라는 지령을 내린다.

 

동지 페드로와 자신의 목숨까지도 아낌없이 내줄 수 있는 연인 베로니카를 안전하게 피신시킨 벨몬테는 영문도 모른 채 위험한 사내들을 쫓는 추격전에 나선다. 아마 전작 <귀향>에서도 이 게릴라 전사의 파란만장한 인생역정이 소개되었겠지만, 세풀베다의 마지막 소설에서도 볼리비아 정글에서 신화가 된 체 게바라와 함께 민족해방 전선의 일원으로, 조국 칠레에 돌아와서는 박사님 아옌데와 함께 위대한 투쟁에 나섰던 화려한 전력들이 담담하게 그려진다.

 

피노체트의 쿠데타로 참담한 실패를 경험한 벨몬테는 비야 가리발디의 인간백정 미겔 크라스노프(맞다 그는 처음에 소개된 표트르의 손자였다)의 희생자였던 연인 베로니카의 생사여부도 모른 채 조국을 떠나야만 했다. 소련으로 건너간 그는 로디온 말리놉스키 군사 학교에서 뛰어난 저격수 훈련을 받기도 했다. 그 뒤에는 1979년 니카라과의 소모사 정권에 대항하는 산디니스타 운동에 시몬 볼리바르 국제 여단의 일원으로 참전해서 마나과 해방전에서 영웅적인 활약을 펼치기도 했었다. 뭐 이 정도면, 라틴아메리카 혁명운동에 있어 레전드급 활약을 한 투쟁가라는 타이틀이 부끄럽지 않을 것 같다.

 

비록 은퇴한 게릴라 전사이긴 하지만 그의 실력을 잘 아는 노회한 크라머는 그를 이용해서 베를린 장벽이 붕괴된 후, 사회주의 국가에서 자본이 모든 것을 움직이는 평범한 자본주의 국가로 변신한 러시아와 칠레간의 통상에 저해가 되는 요소들을 제거하고자 한다. 무려 20개에 달하는 반인륜적 범죄로 144년에 달하는 징역형을 선고받은 인간백정 미겔 크라스노프를 자신들의 마지막 아타만(대장)으로 인정한 카자흐 과격주의자들이 그를 코로디예나 교도소에서 탈출시키려는 무모한 계획을 세운 것이다. 카자흐 3인조들의 조력자로는 벨몬테의 소련 시절 옛 동지였던 에스피노사와 살라멘디(이고르)가 참전했다.

 

사실 세풀베다는 처음부터 <역사는 끝까지>가 추구하는 명확한 서사의 방향성을 보여주지 않는다. 미겔 크라스노프라는 악당이 저지른 추악한 범죄가 네 명의 칠레 동지들을 한 자리에 모아 놓는 지점에 가서야 비로소 저자가 그린 원대한 계획을 볼 수가 있었다. 결말은 다소 기대에 미치지 못하지만, 수십 년 동안 사랑하는 조국을 떠나 망명자였던 세풀베다식 엔딩이라고 해야 할까.

 

<역사의 끝까지><귀향>과 더불어 <우리였던 그림자>까지 포함한 삼부작이다. 자신들의 신념을 지키기 위해서라면 목숨이나 자신의 안위 따위는 조금도 걱정하지 않았던 일단의 열혈 청년들이 반세기가 지나 돌아보는 조국의 현실에 대한 고찰은 과연 어떠했을까. 그들은 더 이상 사르트르나 프란츠 파농의 저작들을 읽지 않고, 손 안의 휴대폰을 조작하느라 정신이 없지 않았을까. 무심한 자본주의의 가면은 모든 것을 돈이 대신하는 그런 사회로 만들어 버렸다.

 

개인적으로는 어설픈 타협 대신 노장 벨몬테의 화끈한 복수를 원했지만, 작가가 구상한 결말은 나의 기대를 충족시켜 주지 못했다. 어쩌면 이런 식의 타협이 최선이지 않을까 싶기도 하고.

 

이제는 더 이상 루이스 세풀베다의 신작을 만나볼 수 없게 되었다는 사실이 슬프다.


[뱀다리] 소설 도중에 오데사 프로젝트에 대한 언급도 등장하는데, 하도 성급하게 리뷰를 쓰다 보니 그 부분에 대해선 아예 언급도 하지 못해 아쉽다. 다시 쓰려기 귀찮아서 패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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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끝까지> 루이스 세풀베다


언제나 마지막이라는 말은 슬프다.

더 이상 새로운 작품을 만날 수 없는 작고한 작가의 마지막은 더더욱.


두 달 전 우리의 곁을 떠나 하늘의 별이 된 루이스 세풀베다의 마지막 소설이 출간됐다.

그를 추모하며 그의 책들을 허겁지겁 읽던 게 벌써 두 달 전의 일이란 말인가.


아직 도끼 선생의 <죄와 벌>을 마저 읽지 못했는데.

하지만 나에게 그 어느 누구의 책보다도 지금은 세풀베다의 책이 더 중요하다.

모든 읽기를 중지하고 세풀베다의 마지막 소설을 만난다.


내용은 그가 예전에 발표했던 <귀향>과 비슷한 궤적이지 않나 싶다. 지난 세기의 역사적 사건을 모든 경험한 은퇴한 게릴라 전사 후안 벨몬테의 마지막 여정은 작가의 그것을 떠올리게 한다.


이것은 내가 애정해 마지않는 작가에게 보내는 작은 경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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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와같다면 2020-06-13 21: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좋아하는 분의 마지막 책을 받아보면 마음이 참 아리죠..
저는 신영복 선생님. 황현산 선생님의 마지막 책을 받았을 때 그런 마음이였어요

레삭매냐 2020-06-14 08:50   좋아요 1 | URL
애정하며 오랫동안 즐겨 읽던 저자
의 부고를 들으니 너무 허망하고
그랬습니다.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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죄와 벌 1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88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이문영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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긴 말 하지 않겠다. 고전 중의 고전, 도끼 선생의 <죄와 벌>은 읽지 않은 이들은 많아도 이 책에 대해 들어 보지 않은 이들은 없을 것이다. 항상 고전에 대해 말할 때마다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 이탈로 칼비노의 고전은 다시 읽는 법이지에 대해서도 더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그렇다 고전은 모름지기 다시 읽는 법이다. 한 번 읽고 말 책이라면 고전이라 불릴 자격이 없을 테니까.

 

나이가 들은 모양이다. 처음으로 <죄와 벌>을 읽을 적에는 그렇게 지겹고 책장이 넘어가지 않았었는데, 이번 도전은 정말 수월했다. 그동안 독서의 내공이 쌓인 걸까? 에이 그럴 리가. 그냥 이번에는 새로운 번역으로 자간도 넉넉하고 뭐 그랬다는 이유를 듣고 싶어라. 좀 더 현대적인 번역, 그래서 반역인지 번역인지 모르겠다는 말도 나왔던가.

 

책을 다 읽고 나서 이 불후의 고전에 대한 리서치를 좀 해보았다. 물론 읽기 전에는 안된다. 나의 책에 대한 감상을 해칠 수 있으니. 유용한 정보들을 많이 얻을 수가 있었다. 실화를 바탕으로 한 비교적 간단한 줄거리다. 전도유망한 법학도였던 이십대 청년 라스콜니코프(혹은 로디온, 로쟈로도 불린다)7월의 무더운 여름날, 공기 중에 떠다니던 불온한 사상인지 열에 들떠 악질(순전히 주관적인 표현이다) 전당포 주인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살해한다. 그리고 그녀의 불쌍한 여동생 리자베타도 함께.

 

본격적인 소설에 대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에, 먼저 사건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제정 러시아의 수도 페테르부르크에 대해 알아보자. 표트르 대제 시설 급격한 서구화를 추진하던 절대군주의 명령을 건설된 인공도시는 위대한 시간(농노제 해방, 1861)이 도래하면서 급격한 팽창을 맞이한다. 지주계급의 착취로부터 벗어난 무산자 계급(프롤레타리아트)들은 일자리와 먹거리를 찾아 도시로 줄지어 이주하기에 이르렀다. 더불어 서유럽에서 시작된 산업혁명은 러시아에도 영향을 미쳤다. 빈부의 격차는 해소의 기미를 보이지 않았고, 도시 빈민들은 생존이 위협받을 정도로 비참했다.

 

이상이 1860년대 계급적 모순이 비등점을 향해 달리고, 서구에서 들어온 공기 중에 부유하던 불온한 사회주의가 지식인 계급에서 힘을 얻어가던 페테르부르크에 대한 단상이었다.

 

다시 라스콜니코프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그는 남루한 행색에 이틀 정도 굶었고, 한 때 사위가 될 뻔하기도 한 집주인 파셴카에게 몇 달째 방세조차 밀린 신세다. 귀족 집안 출신이면 뭘 하나, 아버지는 돌아 가셨고 얼마 되지 않는 연금으로 수도에서 법학을 전공하는 아들을 지원하기는 역부족이었다. 개뿔도 없지만 자존심 하나로 버티는 로쟈의 어머니 플헤리야 알렉산드로브나 라스콜니코바와 동생 두네치카를 부양해야 할 의무가 있는 라스콜니코프의 속이 얼마나 썩어 갔을지 상상이 간다.

 

고향에서 과외선생을 하던 동생 두네치카는 과외 가정의 가장 스비드리가일로프의 비열한 책동으로 스캔들의 주인공이 되어 모욕을 당하기도 했다. 몰락한 집안의 희생양을 자처한 두네치카는 또다른 비열한 인간이자 45세의 중년 변호사 표트르 페트로비치 루진의 약혼녀가 되었다. 우리의 도끼 선생은 페미니즘을 전혀 고려하시지 않았던지, 소설에 등장하는 모든 희생자 역할을 여성들에게 맡긴다. 두네치카와 소냐 그리고 라스콜니코프가 죽인 알료나 이바노브나와 리자베타 모두 여성들이 아니었던가. 어쩌면 19세기 러시아의 시대적 한계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오빠의 성공을 위해 자신과 어머니를 페테르부르크로 초대하고서도 비용을 아끼기 위해 거지 같은 숙소에 묵게 한 루진, 두네치카를 포기하지 않은 채 의문사한 부인을 뒤로 하고 그녀를 쫓아 페테르부르크까지 달려온 스비드리가일로프 그리고 마지막으로 모든 문제의 근원인 라스콜니코프에 이르기까지 악역은 죄다 남자들이다. 루진과 스비드리가일로프가 돈이나 연애 따위의 감정에 휘둘린 좀스러운 차원의 악당이라면 라스콜니코프는 그들과는 좀 다른 궤도에 올라선 자신만의 논리를 지닌 빌런이다. 아니 어쩌면 그들보다 상대적으로 더 위험한 인물이 아닐까. 게다가 그는 자신의 머릿속에서 소용돌이치던 생각들을 실천에 옮기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모두 6개의 챕터로 구성된 도끼 선생의 <죄와 벌>1부에서 치밀한 범죄자 라스콜니코프의 죄를 묘사한다. 나머지 다섯 개의 챕터에서는 모두 어느 누구도 그에게 부여하지 않은 죄에 대한 처벌권을 행사한 라스콜니코프가 감당해야 했던 벌에 대한 이야기들이다. 아무리 전당포 주인 알료나 이바노브나가 고리대금업으로 악행을 했다고 하지만, 현존하는 사법 시스템 아래에서의 합법적인 사업이었다. 21세기에도 고리의 대부업이 CM송의 흥겨운 리듬을 타고 방송에 횡행하는 것처럼 말이다. 라스콜니코프는 섬망증에 시달리기도 하지만, 치밀한 계획을 세워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살해했다.

 


자신과 같이 불운한 처지에 빠진 청년을 돈을 매개로 해서 착취하는 전당포 노파에 대한 사적 응징에 대해 어느 정도 수긍이 안 가는 것은 아니지만, 리자베타까지 포함한 이중살인이라면 문제가 달라진다. 리자베타 역시 자신과 같이 불우한 처지의 빈민이 아니었던가. 단지 그녀가 라스콜니코프의 살인을 목격했다는 이유로 죽어야 하는 당위는 존재하지 않았다. 로쟈는 자신의 의도와 반대로 비뚤어진 정의의 사도에서 파렴치한 살인범으로 추락해 버린 것이다. 그 다음부터 라스콜니코프가 아무리 자신의 행위를 포장하는 미사여구를 동원해도, 그의 행위는 동정을 받을 수가 없게 되어 버렸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라스콜니코프의 독자적인 위험한 생각이다. 그는 스스로를 비범한 사람으로 분류하고, 자신이 하는 행동에 정당성을 부여했다. 역사에서 나폴레옹과 마호메트와 같은 이들은 수십만 명에 달하는 사람들을 죽이고서도 어떤 처벌을 받았는지에 대해 논쟁을 벌인다. 니체의 위버멘쉬[overman]의 그것을 연상시키는 이런 모든 것을 초월하는 생각을 바탕으로 해서 그는 알료나 이바노브나를 도끼로 살해한 것이다. 자신의 범행 목적이 극빈한 자신의 삶으로부터 탈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는 점을 그는 강조한다. 하지만 그는 알료나 이바노브나의 금품을 탈취하지 않았던가.

 

청년 시절, 공상적 사회주의에 경도되어 사형 직전에까지 갔다가 황제의 특별사면으로 감형되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십년을 보낸 도끼 선생은 혁명가의 삶 대신에 고단한 민중의 삶에 눈길을 돌렸다. 그가 그렇다고 해서 민중의 삶을 바꾸기 위해 실천적인 모습을 보여준 것은 아닌 것으로 보인다. 그는 구제불능의 노름꾼이었으며, 돈을 벌기 위해 매문하는 작가였다. 속기사를 고용해 소설을 쓸 정도였다고 하니 말이다. 시베리아에서 독실한 신자로 거듭난 도끼 선생은 인간의 힘으로 사회를 바꾸는 대신, 신에게 귀의했던 것 같다.

 

<죄와 벌>에서도 라스콜니코프의 실제적인 범죄인 살해보다도, 무신론과 유신론 사이에서 오락가락하며 거의 모든 면에서 일관된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는 그의 오만함이야말로 진짜 죄라는 점에 방점을 찍는다. 고작 이십 몇 년을 산 청년이 세상만사를 모두 알고, 자신이야말로 보통 사람들 가운데 비범한 사람이자 정의의 사도인 체하는 모습이 얼마나 거슬리는가. 도끼 선생 자신도 청년 시절 과격한 혁명가 벨린스키의 영향을 받은 탓이었는지 아니면 그 시절의 자신을 투영한 것처럼 보이는 오만하고 자유로운 청년 라스콜니코프가 보여 주는 천상천하 유아독존이라는 이미지가 지향하는 지점이 어디인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아니 역설적으로 이런 캐릭터를 동정하는 게 가당키나 하냐고 묻는 것 같다는 느낌이 들 정도다.

 

그런 점에서 그를 물심양면으로 돕는 친구를 자처하는 라주미힌이 불쌍해 보인다. 과연 외톨이 라스콜니코프가 그를 친구라고 생각했을까? 자신의 밥그릇까지 덜어 가면서 독일어 번역물을 친구에게 양보하는 라주미힌과 그를 거추장스러워 하는 로쟈의 모습은 상충적이지 않은가. 아무래도 친구 간의 건강한 교제의 모습이 아니다.

 

비범한 사람 로쟈의 씀씀이도 또한 문제다. 당장에 먹을 게 없어서 굶주리면서도 돈이 생기면 앞뒤 재지 않고 펑펑 써댄다. 어머니가 어렵게 구한 35루블을 보내오자, 라주미힌이 그의 입성을 챙기기 위해 10루블을 쓴 건 그렇다 치자. 하지만 교통사고로 죽은 주정뱅이 소냐의 아버지 마르멜라도프의 장례식에 쓰라고 나머지 돈을 희사한 건 어떻게 해석을 해야 한단 말인가. 소설 <죄와 벌>을 읽다 보면 도대체 당대 페테르부르크에는 과연 정상적인 사람이 있나 싶을 정도다. 로쟈에게 돈을 받은 카테리나 이바노브나도 한심하긴 마찬가지다. 아무리 고인을 추모하는 추모연도 중요하지만, 당장 먹고 살 걱정이 눈앞인데 또다른 비렁뱅이 로쟈의 선의에 기대어 성대한 추모연을 치르는 장면도 이해가 안되는 건 마찬가지다.

 

어쨌든 합리적인 이성주의를 대변하는 예심 판사 포르피리와의 한판 대결과 지고지순한 천사 소냐의 희생을 통한 구원이라는 극적인 터닝포인트가 기다리는 나머지 이야기를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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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6-10 13: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열린책들 판으로 읽었는데 첨에는 이름도 너무 길고 복잡한데다 무슨 애칭은 또 그리 많은지@_@; 머리가 뱅글뱅글 돌았었는데 말씀처럼 어느 고비를 넘기고 나니 책장이 정신없이 넘어갔던 기억이에요. 고전의 힘을 느꼈지만.. 언제쯤 다시 읽을 수 있을지는 ㅎㅎ^^; 레삭매냐님 존경합니다^^

레삭매냐 2020-06-10 13:36   좋아요 0 | URL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다른 분들 다 읽은 책을 이제
다시 읽게 되었으니 말이죠.

점심시간에 카페에 가서 밑줄
도 좍좍 긋도 메모도 하면서
읽다 보니 복귀할 시간이 되었
더라구요.

아, 다 때려 치우고 책만 읽고
싶습니다 증맬루.

2권은 6년 전에 산 열린책들 판
으로 읽고 있습니다.

페크pek0501 2020-06-10 15: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래전에 읽은 책의 제목을 보니 반갑네요. 이걸 읽고 도스토~가 천재라고 생각했었죠.
얼마나 흡인력이 있던지 두꺼운 책을 줄창 읽었었죠. 뻔한 이야기가 아니라 신선했던 경험이었어요.

레삭매냐 2020-06-10 17:57   좋아요 0 | URL
격렬하게 공감하는 바입니다.
처음에 읽을 적에는 참으로 지루하다
뭐 이런 생각이었었는데...

지금은 너무나 재밌네요.
다 읽고 나면 쟁여둔 도끼 선생
의 다른 책들을 만나 볼까 합니다.

페넬로페 2020-06-10 22: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문학동네판으로 꼭 다시 읽어보고 싶어요^^

레삭매냐 2020-06-11 08:04   좋아요 1 | URL
전 1권은 문동 그리고 2권은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고 있는데
비교하는 재미가 쏠쏠하네요.

열린책들 버전에서는 예심판사
포르피리가 왠지 좀 가볍게 묘
사된 느낌이라고 할까요.

가독성은 확실히 문동이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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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의 역사를 읽기 시작했다.

 

예전부터 중고서점에 갈 때마다 만난 책이 하나 있다.

그건 바로 니콜 크라우스의 <사랑의 역사>. 하지만 왠지 책이 마음에 들지 않아 안사고 버텼다.

 

그런데 이번에 새로 나온 사랑의 역사는 냉큼 사버렸다.

이유는 모르겠다. 엽서나 패브릭 포스터(아직 펴 보지도 않았다)에 혹했을 지도.

 

어쨌든 책이 왔으니 펼쳐 보기라도 해야지 하는 마음으로 읽기는 시작했다.

 

요즘 도끼 챌린지가 한창이라 우선 순위가 어찌 될런진 모르겠지만. 일단 <카라마조프>는다 끝내서, <죄와 벌>을 한창 읽다 말고 <사랑의 역사>를 읽게 됐다.

 

그런데 책의 서두에 쓴 내 삶의 전부라는 또다른 분더킨트 조너선과 갈라 섰다고.

그냥 나는 태클이 걸고 싶어졌다. 글로 쓴 건 이래서 지울 수가 없구나 싶기도 하고.

아니 내 삶의 전부라매. 결혼이라는 삶의 과정에서 전부는 어느 순간엔가에는 정리할 수도 있는 거구나 하는 생각이 들기도 하고.

 

어쩌면 내가 이 한 문장 때문에 책에 몰입하지 못하고 둥둥 떠다녔는 지도 모르겠다.

작가는 왜 내가 이런 문장으로 책을 시작했을까 하고 후회는 하지 않았는지 궁금하다.

 

처음부터 왠지 사랑의 역사에 오점이 되는 그런 느낌이랄까.

그냥 뭐 그렇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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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6-07 07: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영화로 먼저 만났는데.. 책을 읽게 될지 모르겠네요-_-;;; 레삭매냐님의 리뷰를 기다리겠습니다^^ 카조형 끝내셨다니 일단 존경@_@;;;

레삭매냐 2020-06-07 13:08   좋아요 0 | URL
카조 브라더스는 수년 간
노려보기만 하다가 이번에야
말로... 허허 감사합니다.

영화가 있는 지 처음 알았네요.
일단 저는 책부터 보고 나서리.

유부만두 2020-06-07 13:41   좋아요 1 | URL
영화가 있어요????

moonnight 2020-06-07 14:39   좋아요 1 | URL
영화가 개봉은 안 한 모양인데 저는 캐치온에서 방영하는 걸 우연히 봤네요^^;;;

초딩 2020-06-07 12: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민음사 사랑의 역사를 읽었는데이 판도 손이 가네요 :-)

레삭매냐 2020-06-07 13:08   좋아요 0 | URL
왠지 민음사 판의 버전보다
이번 버전의 책 표지가 더 마음
에 들더라는.

유부만두 2020-06-07 13: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예전 표지 책으로 읽었어요.

조너선이 바람 피워서 헤어진 걸로 (아주 단순하게) 알고 있었어요. 그나저나 사랑은 변하기도 하니까요. 새 표지로 다시 읽고 싶어집니다.

레삭매냐 2020-06-07 21:44   좋아요 0 | URL
미국 작가판 부세였나 보네요...

니콜 크라우스의 고백이 무색하네요
증맬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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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 세트 - 전3권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표도르 도스토예프스키 지음, 김희숙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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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동안 러시아 소설의 주인공들의 이름이 길다는 핑계로 톨스토이나 도끼 선생의 책들을 멀리해왔다. 오래전 톨스토이의 <안나 카레리나>를 읽으면서 그리고 도끼 선생의 <죄와 벌>을 읽으면서 얼마나 고전했던가. 내 생에 더 이상의 러시아 소설은 없다고 생각한 것도 무리는 아니었다. 하지만, 이 바닥에서 얼마나 러시아 소설을 읽지 않고 버틸 것인가. 말도 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 뒤로 열린책들에서 나온 도끼 선생의 전설의 전집을 모으기 시작했다. 도끼 전집의 실체는 열림원 출판사 2층에서 만나보고 폭풍 감동했던 기억이 난다. 모으긴 했지만, 읽지는 않았다. 그렇게 시간이 흘러갔고 새로운 밀레니엄도 20년이나 지난 다음에 드디어 도끼 선생의 문제작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읽었다.

 

아마 이 책도 이번 문동 도끼 챌린지가 아니었다면, 도중에 엎어졌을 지도 모르겠다. 이미 5년 전에 한 번 실패한 적이 있지 않았던가. 소설 곳곳에 등장하는 변화무쌍한 작가의 심오한 사변적 대화들을 돌파할 수가 없었다. 하나하나 다 읽으면서 내 것으로 소화시키기엔 나의 내공이 너무나 역부족이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양심상 나의 책읽기 신공이 5년 전보다 나아졌다고는 절대 말하지 못하겠다. 그냥 소처럼 그렇게 꾸역꾸역 읽는 것이다. 한 번 읽은 책이라고 다시 읽지 않는 건 아니니 다음에 다시 읽으면서 깨달아 보자는 주의로 매순간 찾아오는 고비들을 그렇게 타고 넘었다.

 

<카라마조프가의 형제들>1861219일 러시아 짜르 알렉산드르 2세의 주도로 절대다수 러시아 인민들을 옥죄던 농노해방이 이루어진 뒤의 시절을 시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 서구 유럽에서는 산업혁명이 이루어지던 시절에 러시아는 전근대적 시스템에서 가까스로 탈피하고 있었던 것이다. 청년 시절 도끼 선생은 혁명적 사회주의자였다고 하는데 짜르에게 체포되어 처형 쇼를 경험한 다음, 국수주의자로 서서히 변모해갔다고 한다. <카라마조프>에서도 서구 계몽주의에 대한 경계를 보이는 장면들에서 작가의 그런 경향이 엿보이는 듯싶다.

 

처음부터 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촌마을 스코토프리고니옙스크의 이름은 절대 알려주지 않는다. 알려 주었다 하더라도, 워낙 이름이 길어서 제대로 기억하지도 못했으리라. 이 마을에 사는 호색한이자 어릿광대 표도르 파블로비치 카라마조프 노인이 비참하게 살해당한 참극이 어떻게 벌어졌는가에 대한 다각도적인 접근으로 소설은 시작한다.

 

이 늙은 악당은 그야말로 카라마조프적인 그런 캐릭터다. 세습 귀족인 카라마조프네는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필두로 해서 전혀 성격이 다른 미챠, 이반 그리고 알료샤 삼형제가 포진해 있다. 퇴역 중위 출신 미챠는 아버지 뺨치는 그야말로 문제적 인간의 전형이다. 나머지 형제들과는 배다른 장남인 드미트리는 돌아가신 어머니의 유산을 착복한 아버지와 재산 싸움에 나선다. 동시에 마을의 매력적인 처녀 그루셴카를 사이에 두고 아버지와 연적 관계를 형성한다. 아니 이 무슨 막장 드라마식 전개란 말인가. 공식 약혼녀인 카챠가 모스크바의 지인에게 보내라고 부탁한 3천 루블을 가지고 그루셴카와 함께 허랑방탕하게 탕진함으로써 훗날 친부 살해자라는 악명을 쌓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당시 3천 루블이라는 돈이 지금에는 얼마나 되는 가치를 가지고 있는지 몰라 답답했다. 가령 예를 들어 3천 루블로 만 개의 빅맥을 살 수 있다 뭐 이런 정보가 있다면 미챠가 탕진한 금액의 실체에 좀 더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나의 리뷰는 언제나처럼 뒤죽박죽이 될 것임을 미리 예고한다. 다음 순서로는 지식인 이반이나 수습 수도사 알료샤에 대한 소개가 나올 것이라고 예단했다면 그것은 오산이다. 나는 바로 조시마 장로가 주관하는 카라마조프 집안의 가족회의에 대한 이야기를 할 것이니까 말이다. 개인적으로 마을 사람들에게 성자 취급을 받는 조시마 장로가 등장하는 이 부분이 5년 전 내가 완독에 실패했던 첫 번째 지점이었다. 질려 버린 나는 아예 그 다음을 읽을 생각도 하지 않았으니 말이다.

바로 이 부분에서 카라마조프 집안의 어릿광대 아버지와 아들들은 자신들의 캐릭터와 집안의 갈등을 가감 없이 드러내 보인다. 모든 갈등의 출발점은 바로 질투와 돈이었다. 미챠가 사업가 출신 그루셴카와 새 출발을 하려면 무엇보다 돈이 필요했다. 이 비열한 놈팽이는 고향으로 돌아와 자신의 몫이라는 주장하는 어머니의 유산을 가로챈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필연적 갈등 관계에 돌입한다. 여기서 또 하나의 막장 포인트가 등장하는데, 표도르 파블로비치 역시 그루셴카의 매력에 흠뻑 빠져 3천 루블로 그녀를 유혹한다.

 

여기서 3천 루블은 미챠에게도 절대적으로 필요한 금액인데, 이유는 약혼녀 카챠에게 돌려주어야 하는 금액이기도 했기 때문이다. 부자간의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 갈등은 결국 가족회의 뒤, 아버지 표도르 파블로비치를 찾아간 미챠가 아버지를 구타하면서 절정으로 치닫는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독자들과 마을 사람들 사고뭉치 미챠가 실제로 아버지를 죽이고 돈을 강탈했다고 하더라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을 그런 정황이 만들어진다. 나중에 재판에서 미챠에게 불리하게 될 증인과 증거들이 그야말로 산처럼 쌓이게 된 것이다.

 

이런 분석은 어디까지나 책을 다 읽은 뒤의 내 감상이고, 우리의 대가께서는 그렇게 쉽게 사건의 본질로 진입하게 만들지는 않으신다네. 이 시대의 성자 같은 조시마 장로 앞에서 어릿광대 놀음으로 본질을 흐리는데 성공한 카라마조프들에게, 장로는 거짓을 말하지 말라는 계시 같은 말씀을 들려주고, 오래지 않아 선종한다. 성자의 죽음은 무언가 달라야 한다는 세속적 신비주의에 물든 이들은 조시마 장로가 선종한 뒤, 악취가 나기 시작하자 그의 삶에 대한 의문점을 던지지 시작한다. 그렇다, 그들은 적어도 회의하는 인간들이었다. 나중에 일류샤의 죽음과 비교해 보는 것도 의미가 있지 않을까.

 

드디어 천오백년 만에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대하는 대심문관의 에피소드를 누구보다 선량한 알료샤에게 들려주는 무신론자 지식인 바네치카가 등장할 차례인가. 바네치카는 어쩌면 자신의 형수가 될 지도 모를 드미트리의 약혼녀 카체리나 이바노브나 베르호프체바를 사랑하는 막장극을 연출하기도 한다. 한편, 카첸카는 드미트리의 약혼녀 역할을 하면서도 동시에 그를 파멸의 구렁텅이에 몰아넣는 팜므 파탈적인 모습을 연출하기도 한다. 그러니까 소설 <카라마조프>에 등장하는 거의 모든 등장인물들이 고전 소설에나 등장할 법한 단선적이고 평면적인 성격의 소유자는 아니라는 말씀이다. 선과 악의 경계선에서 줄타기를 하는 듯한 그네들의 모습은 현대를 사는 우리들의 그것과 상당히 유사하다는 점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미챠만 하더라도, 자신을 키워준 그리고리에게 놋쇠 공이를 휘둘러 죽일 뻔하지 않았던가. 누군가에게 현장을 들켰다면, 바로 자신이 친부 살해범으로 몰릴 판이었지만 놀라울 정도의 도덕률과 양심이 작동해서 그의 용태를 살피지 않았던가.

 

대심문관 이야기를 하다가 또 삼천포로 새버린 느낌이다. 세상 모든 이들에게 구원을 약속한 예수 그리스도가 재림한다고 하더라도, 대심문관으로 대변되는 세속 종교인들은 숱한 이적과 기사에도 불구하고 그의 존재를 부인할 것이라고 도끼 선생은 바네치카의 입을 빌어 자신의 사유를 밀어 붙인다. 그러니까 한 마디로 말해,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수세기 동안 다져진 기존의 질서를 흔드는 건, 진짜 구세주가 온다고 하더라도 용인할 수 없다는 것이 바로 대심문관의 기본 입장이다. 허무주의에 빠진 무신론자 바네치카는 자신의 이런 생각을 또 다른 문제적 인간 스메르쟈코프에게 불어 넣는다. 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든 가능하다. 어쩌면 도끼 선생은 이 지점에서 서유럽에서 전파된 자유주의와 계몽주의의 부작용을 말하고 싶었던 게 아니었을까.

 

도끼 선생이 구사하는 변화무쌍한 서사를 완벽하게 이해하기란 솔직히 역부족이었다. 희망찬 미래로 전진하는 조국 러시아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가진 도끼 선생의 시대에 대한 단편적인 이해만으로는 아무래도 당시 사람들이 가지고 있던 일반적 생각들에 내가 접속할 수 있을까라는 회의가 들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도끼 선생의 다른 저작들부터 풍부하게 읽고 또 다른 당대 작가들의 러시아 소설들을 만나야 하는데, <카라마조프>만으로도 나는 헐떡대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그러니 내가 받아들일 수 있는 부분이 단편적이라도 할지라도 그대로 소화하는 게 그나마 가장 낫지 않나 싶었다.

 

결국 일어날 사건은 일어나 버렸고, 피투성이가 된 미챠는 옛 애인을 잊지 못해 모스크예로 달아난 그루셴카를 추격해 그곳에서 어디에서 난지 모를 그럴 돈으로 흥청망청 술을 마시고 방탕한 시간을 즐긴다. 다시 한 번, 모든 정황은 친부 살해라는 끔찍한 범죄를 저지른 피의자의 부도덕한 행위에 방점을 찍는다.

 

원래 소설의 시작에 <카라마조프>는 알렉세이의 전기라고 공언했던 도끼 선생의 말이 무색할 정도로 막내아들 알렉세이보다는 드미트리와 실제적으로 그 누구보다 아버지를 닮았던 바네치카가 실질적인 주인공이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개인적으로 최고의 악당이라고 생각하는 스메르쟈코프는 어쩌면 자신의 아버지일 수도 있는 표도르 파블로비치와 형님 드미트리에 끼어서 고달픈 처지에 처한다. 마지막 <오심>에서 검사는 그를 백치라고 불렀지만, 사실 스메르쟈코프는 소설에 등장하는 그 누구보다도 냉철한 이성의 소유자였고 치밀한 계획을 실행한 도박사였다. 모스크바에서 소환된 위대한 마법사페츄코비치가 법정에서 세운 가설 그대로, 행운의 여신까지도 그에게 미소를 보냈다고나 할까.

 

사실 표도르 파블로비치의 죽음은 21세기 현대적 포렌식 수사기법이 동원됐다면, 단박에 미챠의 무죄를 입증할 수 있었을 것이다. 우선 망자의 사망 시각부터 시작해서, 동원된 흉기가 무엇이었는지 그리고 미챠의 옷에 묻은 혈흔이 망자의 것이 아니라는 점만 밝히면 끝이 아니었을까. 하지만 소설의 시대적 배경은 20세기도 아닌 19세기였다는 점을 기억하라. 동시에 뇌전증 환자 스메르쟈코프가 준비한 완벽한 알리바이 그리고 카체리나가 재판에서 공개한 미챠의 자필 편지는 위대한 마법사의 눈부신 활약에도 불구하고 판결을 뒤엎는데 실패하고 말았다.

 

소설의 대단원은 독자들을 법정 드라마의 무대로 인도한다. 근대 사회의 영향으로 배심원과 검사가 등장해서 위대한 마법사 페츄코비치가 창과 방패의 대결을 예고한다. 소설의 마지막 장 제목이 오심이라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바네치카에 대한 스메르쟈코프의 고백으로 독자는 이제 누가 진범이라는 점을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법정에서 이 사실을 알린 바네치카의 증언은 그의 정신상태가 정상이 아니고 열섬망증을 앓는다는 이유로 배척이 된다. 최근에도 우리는 현실세계에서 목격하고 있지만, 일단 유죄라는 설정 아래 진행된 재판이 얼마나 편파적이고 진실과 거리가 있는지 현재진행형으로 보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인간이 가진 판단의 기준으로 타인의 죄를 심판한다는 게 과연 가능할까? 검사 역의 입폴리트 키릴로비치는 사실 선입견에 의거한 가설로 진실의 근처에도 가지 못하지 않았던가. 한 사람의 무고한 죄인도 없어야 한다는 황제의 규정은 산더미처럼 쌓인 정황 증거 앞에서 그리고 촌사람들의 편견 앞에서 위력을 발휘하지 못했다. 애당초 죄에 대한 판정부터 잘못되었는데 구원이 존재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심판자는 과연 아무런 죄도 없는 사람이었을까.

 

그들이 위대한 러시아의 공명정대한 관리라고 칭송해 마지않는 재판정의 판사와 검사는 진실의 규명보다는 그들만의 정의를 원할 따름이다. 인간은 누구나 순간의 판단착오로 실수를 저지를 수 있다. 의도하지 않은 실수를 한 사람들에게 갱생의 기회가 주어져야 한다는 사회적 정의는 친부 살해라는 끔찍한 스캔들 앞에서 제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 그러니 구원은 더욱 요원해 보일 뿐이다.

 

검사 키릴로비치는 카라마조프 집안에서 발생한 문제의 근원을 질투로 분석한다. 일견 타당해 보이는 주장이다. 키릴로비치 같이 지방의 고지식한 관리에게 방탕한 미챠는 끝없이 갈등하던 아버지를 죽이고, 애인 그루셴카와 도주하기 위해 3천 루블을 강탈한 파렴치한 범인이어야만 했다. 천년 넘게 이어져온 기존의 질서를 지키기 위해 역설적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을 부인해야만 했던 대심문관처럼 키릴로비치에게는 다른가능성이 존재해서는 안됐다. 하지만, 법정에서의 현란한 키릴로비치의 주장처럼 우리 인간의 삶이 그렇게 간단할까. 절대 그렇지 않다. 보통 인간 삶의 스펙트럼도 성자의 그것에서 비열한 군상에 이르기까지 얼마나 다양하던가.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성격의 미챠에게 과연 갱생을 기대할 수 있을까? 그는 결국 시베리아로 20년 유배형을 선고받았다. 카라마조프 형제들은 작당해서 집안의 장자를 멀리 아메리카로 탈출시키는 프로젝트를 가동한다. 어쩌면 이 지점이야말로 처음에 이 소설의 주인공으로 점지한 알료샤의 변신이 시작되는 지점이 아니었을까. 바네치카와 달리 처음부터 큰형의 무죄를 믿은 전직 수습 수도사 청년은 평소의 그라면 하지 않았을 탈출을 도모한다. 하지만 그들이 신대륙 아메리카로 간다고 해서, 그들이 평생 안고 살아야할 여러 문제들이 해결되고 영혼의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아마 그건 도끼 선생이 생전에 구상한 다른 이야기에서 다룰 그런 이야기가 아니었을까 추정해 본다. 그랬다면 대륙과 세대를 넘나드는 대서사시로 거듭나게 되지 않았나 싶기도 하고.

 

나는 잘 안다. 급하게 써내려간 내 부족한 감상으로 카라마조프네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가 마무리되지 않을 거라는 것을. 원래 쓰려고 했던 이야기의 반도 하지 못한 것 같아 아쉬울 따름이다. 그만큼 마스터가 구사한 이야기들이 품은 내공은 대단하다는 점을 꼭 말하고 싶다. 더 하고 싶은 이야기들은 나중에라도 생각나는 대로 채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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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04 19: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렇게.... 혼자 완독하시는 건가요? 레삭메냐님? ㅠㅠ
저 아직 1권인데요 ㅠㅠ 엉엉.
챌리지 기간을 무색케 하는 초스피드 완독 엄청 축하드립니다.
저는 이 페이퍼 아껴두고 얼른 1권 읽으러 가렵니다. 휘잉!

레삭매냐 2020-06-04 19:22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대심문관>은 다시 한 번
읽어야지 싶습니다.

집에 와서는 <죄와 벌>을 다시 읽기
시작했답니다. 도끼 선생 너무 좋네요.

저의 첫번째 챌린지는 일단 완료되었네요 헷 ~

단발머리님의 도끼 챌린지 응원합니다!!!

stella.K 2020-06-04 19:4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와우, 완독하셨군요!
축하합니다.
맞아요. 이런 책은 챌린지 같은 게 있어줘야 합니다.
저도 사 놓은 책이 있었다면 참가 했을지 모르겠습니다.
안 그래도 조금 아쉽긴하네요. 그 마음 먹기가 뭐라고
주저하는 건지.ㅠ
완독하면 뭐 있지 않나요? 받으시면 자랑질하셔야죠.ㅋ

<죄와벌>은 정말 다시 읽고 싶네요.
출판사별로 가지고 있는 것도 좋을 텐데 열린책을 괜히
주민센터에 넘겼다 싶네요.ㅠ

레삭매냐 2020-06-04 20:04   좋아요 1 | URL
제가 5년 전에 도전했다가 망한 책이
바로 열린책들 버전이었습니다.
다 못 닐근 책이라 처분도 못하고
끌어 안고 있었죠.

두껍기도 하거니와, 빽빽한 자간...
이번에는 수월하게 넘어갔네요.

이번 도전책은 2년 전에 사서 고이
쟁여 두었는데 이런 날이 다 오네요.

공감하는 바입니다. 문동에서 챌린지
공지가 떴을 때, 바로 이거다 싶었답
니다. 이거슨 나를 위한 챌린지다 -
뭐 이런 착각 비스무레한 것.

6주 동안 챌린지 미션이 있는데 이
를 완수하면 선물도 준다고 하네요.
선물 받으면 자랑질 하도록 하겠습니다.

곰곰생각하는발 2020-06-04 20: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까라형제는 읽고 나면 뿌듯하죠..ㅎㅎㅎ

레삭매냐 2020-06-04 21:59   좋아요 0 | URL
적어 주신 그대로입니다. 아주 뿌듯하네요.

coolcat329 2020-06-05 17: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단 좋아요 누르고 읽는건 집에 가서 차분히 읽으렵니다! 멋지고 부럽습니다.

레삭매냐 2020-06-05 19:26   좋아요 0 | URL
지금 <죄와 벌>을 다시 읽고 있는데
왜 이리 재밌는지요.

문제는 1권만 있어서, 두번째 권은
그냥 기존에 가지고 있던 열린책들
버전으로 읽어야 하나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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