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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평점 :

씁쓰름하다. 점심도 먹지 않고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는데, 물리치료만 받고 정작 침은 맞지 못하고 그냥 왔다. 이럴 거면 예약은 왜 했나 싶다. 원장의 시간만 중요하고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의 시간은 소중하지 않다는 건가. 내일 일단 예약을 다시 잡긴 했는데, 신뢰가 떨어져서 여길 계속 가야 하나 어쩌나 싶다. 종아리가 조금 아픈 것도 이런데, 전쟁터에서 총상을 두 번이나 맞아 쇼크사할 뻔한 이의 감정은 어땠을까.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지만 책의 컨디션이 너무 후져서 중고를 사려고 기다리던 차에 새로운 번역으로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 재출간됐다. 이 장편소설에는 모두 22개의 미네소타 오스틴 출신 작가 팀 오브라이언이 직접 보병으로 참전한 베트남의 정글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청년 티미는 부당한 전쟁에 참전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 진학을 기다리던 1968년 6월, 소집영장이 나왔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전쟁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고, 전쟁광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적에게 총질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캐나다로 도망가는 방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인공 티미는 부모님에게 짧은 쪽지를 남겨두고 월경을 도모하기 위해 무작정 차를 몰고 떠난다. 그 여정에서 팁 톱 오두막이라는 낚시 리조트를 찾고, 훗날 자기 인생의 영웅인 엘로이 버달을 만난다.
엘로이는 곤경에 처한 청년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는 요즘 어쭙잖은 세상살이로 라떼꼰대라 불리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포용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니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티미를 작은 보트에 태워 레이니강 너머 캐나다 땅으로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아, 나도 엘로이 버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나이가 드니 이것저것 따지는 게 너무 많아진 모양이다. 오히려 청년 시절에 더 관대한 게 아니었을까.
우리의 티미는 작은 마을에서 자신에게 쏟아질 병역기피자 내지 반역자라는 꼬리표가 너무 쪽팔려서 전쟁터로 향한다. 바로 그런 솔직함이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다른 전쟁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는 책들과 변별점을 만든다. 누군가에게 전쟁은 국가 재건을 위한 용병수출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고, 수세기 동안 이어진 식민침략자들에 대항해서 분연히 일어난 민족해방 투쟁일 수도, 티미 같은 땅개들에겐 억지로 끌려온 그 무엇이었으리라.
저자는 기본적으로 전쟁은 지옥이라는 기본 컨셉트를 부인하지 않는다. 소설의 곳곳에서 그런 점이 보인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음에 태어난 딸이 그에게 전쟁에서 누군가를 죽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전비와 병력을 투입한 미국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중년이 된 저자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소설에 순서대로 등장하는 테드 라벤더와 커트 레몬 그리고 카이오와 같은 전우들이 바로 곁에서 어이 없이 죽어가는 장면은 초현실적이다. 방금 전까지 전장의 긴장을 달래기 위해 농담하고 장난치던 전우가 포탄으로 만든 부비트랩에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그저 단순하게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이분법적 구조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용감했던 인디언 전사 카이오와는 지미 크로스 중위의 오판으로 오물 속에서 박격포탄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전우들이 똥물을 뒤지는 동안, 지휘관은 전사한 대원의 부모님에게 보낼 문구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다. 시신낭이나 판초에 또래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은 슬픔 그 자체였다.
한편, 생전 처음으로 내가 아닌 타인을 죽였을 때의 감정에 대해 저자는 여러 꼭지로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 정치적으로 리버럴인 저자의 양심선언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전쟁이라는 무거운 짐을 군장처럼 등에 짊어진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 난 청년들이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에서 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들은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부터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면서 비틀린 어른으로 성장한다.
클리블랜드 하이츠에서 날아와 정글의 애인과 합류한 메리 앤 벨의 이야기는 전설 그 자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본국의 십대소녀가 애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태평양 바다를 건너, 수송헬기에 숨어 작전 지역에 침투한다고? 나는 도저히 못 믿겠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최전선에서 메리 앤은 위생병으로 그리고 소총수로 심지어 그리니들과 함께 매복에도 참가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령 군인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 진 사람이 없다? 전쟁 자체가 워낙 광기로 물들다 보니 별의별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 싶다.
내가 보기에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미국이 빠졌던 수렁 같은 베트남 전쟁의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담고 있다. 살기 위해 병역기피를 할 뻔한 순간의 티미로부터 시작해서, 총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결국 본부중대로 재배치된 전사가 아닌 존재의 티미, 본국으로 귀환해서 작가가 된 티미 그리고 어린 딸과 카이오와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전사한 장소로 돌아가 모카신을 논바닥에 심은 티미.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여행 에세이집에서 언급한 “추구의 플롯”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시행한 케이스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생생한 비극의 재현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미디어를 사용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팀 오브라이언이 지적하는 대로 정확하지 않은 기억과 나중의 기억들이 뒤죽박죽된 초현실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주인공 티미는 엉덩이에 총을 맞고 피를 쏟고 있는 자신의 구조 요청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위생병 보이 조겐슨에게 치졸한 복수를 계획한다. 어느 순간 멈춰야 했지만, 이왕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동료 아자의 주장에 이끌려 아무런 의미 없는 복수극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마치 찰리 콩들의 테트 공세 이후, 베트남에서 승리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미국 전쟁지도부가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실시하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오래 기다림만큼 만족할 만한 그런 독서였다. 그런데 나는 팀 오브라이언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피아 구분이 확실한 전쟁터에서 전투병 사이에서의 살상이야 그렇다 치고, 과연 한 번도 무고한 민간인은 죽인 적은 없느냐고. 그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뱀다리1] 책이 지닌 가치에 사소한 오탈자 정도는 패스하도록 하자.
[뱀다리2] 책의 뒷면을 보면 <카차토를 쫓아서>가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는데, 실질적 주인공 폴 벌린이 탈영병(AWOL) 카차토를 추적하는 소설인 모양이다. 그런데 카차토가 파리까지 도망갔다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