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한당들의 세계사 보르헤스 전집 1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 지음, 황병하 옮김 / 민음사 / 1994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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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대체 언제 샀는지도 모를 그런 보르헤스 전집 시리즈 첫 번째를 읽기 시작했다.

 

그는 새로운 이야기를 만들어낸 게 아니다. 기존에 있던 이야기들을 자신만의 방식으로 재창조해냈다. 제목에 등장한 불한당이란, 땀을 흘리지 않는 건달을 말한다. 그 중에서 가장 인상적인 캐릭터들은 바로 서부 개척시대를 장식했던 빌리 더 키드 그리고 일본에서 지난 삼백년 간 줄창 우려먹었다는 <주신구라> 스토리를 제공한 기라 고즈케노스케다. , 한센병에 걸린 무슬림 이단자도 있었는데 원체 잘 알려지지 않은 캐릭터라 보르헤스의 저술만으로는 평가하기가 좀 그렇더라.

 

십대 시절부터 살인 저지르기를 밥 먹듯이 했다고 하는 전설의 총잡이 빌리 더 키드. 뉴욕 출신으로 모두가 꿈꾸던 서부로 갔던 모양이다. 미국 건국 후, 모두가 자리를 잡고 자본가 계급이 귀족층이 되어 가던 시절 서부 개척은 가지지 않고 없는 자들에게 새로운 기회를 제공하는 그런 엘도라도였다. 게다가 캘리포니아와 네바다에서 금이 난다고 하지 않았던가. 그렇다면 나도 그런 기회를 놓칠 수 없지 하고 서부로 달려간 것이다. 문제는 그 서부에는 인디언들이 살고 있었고 그들과의 분쟁은 시간문제였다.

 

마침 어제 에리크 뷔야르의 <대지의 슬픔>을 읽어서 그런 진 몰라도 희대의 불한당 빌리 더 키드, 혹은 빌리 해리건의 이야기가 귀에 쏙쏙 들어오는 그런 느낌이랄까. 14살 때부터 살인을 시작한 카우보이는 멕시코인들은 제외하고 공식적으로 21명이나 죽였다던가. 아무리 무법천지의 서부라고 하지만 빌리 더 키드의 운명 역시 교수대행이었으리라. 결국 보안관 팻 개릿에게 체포되어 교수형을 선고 받았지만, 탈출에 성공했다. 그의 행운은 거기까지였다. 뉴멕시코의 포트 섬너에서 매복 중이던 팻 개릿의 총에 한 시대를 주름잡은 불한당은 고작 21세의 나이에 저승길에 올랐으니 말이다.

 

빌리 더 키드의 경우에는 그나마 서구 문명권이라 그렇지만, <주신구라>의 경우에는 좀 엉망인 게 사실이다. 1701년부터 3년에 걸쳐 겐로쿠 아코 사건으로 알려진 아코번의 젊은 다이묘 아사노 다쿠미노카미의 할복 사건과 그를 따르던 가신들이 사건의 원흉이자 보르헤스가 불한당으로 꼽은 기라 고즈케노스케를 살해한 사건을 철저하게 이방인의 시선으로 해석해낸다. 게다가 보르헤스가 원전으로 삼은 텍스트도 미트포드라는 영국 출신 작가의 저술이었다. 정말 포스트모더니즘다운 설정이 아닌가.

 

역자는 일부러 원서(?)에 나온 대로 표기를 한 것인지 사쓰마를 사수마로, 고즈케노스케를 고수께 노 수께로 표기하는 패기를 보여준다. 복수극의 중심인물인 아사노의 가로 오이시 구라노스케의 이름에 통일을 기하지 않는 건 차라리 애교에 가까울 지경이다. 개인적으로 <주신구라>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문치주의를 표방하면서도 여전히 무를 숭상하는 사무라이들이 사회의 지배계급이었던 에도 막부의 이중성이 배후에 자리하고 있었다는 점을 지적하고 싶다. 그놈의 기리[義理]를 지키기 위해 자신과 다른 사무라이들의 모든 것을 판돈으로 건 오이시 구라노스케가 구상한 주군에 대한 복수극이 아사노를 죽음으로 이끈 막부에 대한 외통수였다는 설이 가장 흥미로웠다. 아무래도 <주신구라>에 대한 책을 한 번 구해서 읽거나 드라마를 보거나 해야지 싶다. 직접 봐야 실체를 알 수 있을 테니 말이다.

 

자기 동네에서는 한다하는 칼잡이로 소문난 로센도를 찾은 일명 새장수에피소드도 흥미롭다. 그들의 세계에서 그런 허명은 때려잡아야 한다는 걸까. 새장수는 로센도가 활약하는 동네에 들러 한판 대결을 신청한다. 그런데 로센도는 비겁하게도 대결을 피하고, 칼잡이로서 명예와 자신의 여자까지도 빼앗긴다. 그리고 조용히 사라져 버린다. 그런데 의기양양하게 자신의 전리품을 챙겨 떠난 새장수는 누군가의 칼에 맞아 비명횡사한다. 위세 등등하던 시절에는 끽소리 못하던 이들이 죽은 새장수를 약탈하는 장면이다. 난 왜 이 장면에서 역발산기개세를 자랑하던 초패왕 항우의 마지막이 생각났는지 모르겠다.

 

<기타 등등>에 나오는 멜란히톤은 아마도 루터와 비슷한 시기에 활동하던 신학자로 보이는데 독자가 과문한 탓에 감흥이 별로 오지 않더라. 톰 카스트로 같은 캐릭터도 마찬가지였다. 자꾸만 마틴 스코시즈의 <갱스 오브 뉴욕> 생각이 나던데,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인지도 모르겠다. 예전 같은 열정이라면 리서치도 해보고 그럴 텐데 이제는 다 귀찮다. 아마 그럴 수도 아닐 수도 있겠지.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작가가 30대에 쓴 책이라는 점을 고려해 본다면 아직 작가적 원숙미에 오르지 않은 시절의 작품이 아닐까 싶다. 보르헤스가 다루고 있는 이야기들이 전혀 새로운 게 아니다. 예전에 어디선가 한 번 쯤은 들어본 혹은 기존에 있었던 일들을 자신만의 스타일로 다시 쓴 것이다. 하긴 언제 세상 아래 새로운 것들이 있었던가.

 

오랫동안 보관만 하다가 결국 읽게 된 보르헤스의 책이었는데 기대를 많이 해서 그런지 어쩐지 좀 실망스러웠다. 최근에 다시 나오고 있는 새로운 책들을 읽어야 하나 어쩌나 싶기도 하고. 번역도 그렇고, 오탈자가 어찌나 많은지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 다들 대가라고 칭송하는데, 한 번에 실망해서 읽지 않거나 그런 것도 좀 그런데... 어째야 하나 고민 중이다. 어쨌든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로, 도서관에서 <주신구라>나 빌려다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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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5-18 11:0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보르헤스는 두번 도전 두 번 실패의... ㅠㅠ 그 책은 아마 <픽션들>이었죠. 레삭매냐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 기대됩니다. 제목에서부터 왠지 흥미로운 ㅋㅋㅋㅋ <주신구라>

레삭매냐 2020-05-18 10:59   좋아요 0 | URL
저는 이 책 이전에 시집 <창조자>를
읽었는데 당최... 모르겠더라구요.

이러니 섣불리 도전을 못하겠네요~

<주신구라>는 민음사 판이 있던데
절판돼서 천상 도서관에서 빌려다
봐야할 것 같습니다.
 
대지의 슬픔
에리크 뷔야르 지음, 이재룡 옮김 / 열린책들 / 202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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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 쇼 비즈니스의 신세계를 창출했던 보드빌 스타 버펄로 빌코디의 일대기를 그린 <대지의 슬픔>을 읽으면서 나는 일제에 협력했던 안중근 의사의 아들 생각이 났다. 리틀 빅혼 전투의 영웅 시팅 불(타탕가 이요탕가)이 쇼단의 일원으로 역사적 재건을 재현한 얼치기 쇼에 출연했다는 점에서 정확하게 일치하지 않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역사에서 재현이란 존재할 수 없다. 어떤 형식의 텍스트로도 반복될 수 없는 것이 바로 역사의 재현이라는 걸 잘 알고 있다. 하지만 대중은 선과 악으로 구분된 지지난 세기말부터 원했다. 그리고 정확하게 시대의 흐름을 짚어낸 버펄로 빌은 미국 기병대로 상징되는 선이 백인들의 머리 가죽을 벗기는 악의 무리 인디언들을 전투에서 물리치는 리얼리티 쇼를 창조해내는데 성공했다. 그리고 그는 달러를 삽으로 퍼낼 정도의 부를 쌓는데 성공했다. 물론 그의 그런 성공도 오래 가진 않았지만.

 

솔직히 말해서 프랑스 작가가 오욕과 거짓 선전으로 점철된 미국의 서부개척사를 후벼 파낸다는 점이 역설이 아닐까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에리크 뷔야르는 미국보다 훨씬 더 오랜 제국주의 역사를 가진 조국의 알제리나 베트남 전쟁의 진실을 먼저 다뤘어야 하지 않을까. 그의 다른 작품들인 콩고, 레콩키스타 그리고 종교개혁을 기대하고 있지만 왜 곁다리만 훑고 있냐는 그런 비판을 하고 싶어졌다.

 

다시 누구보다 먼저 대중이 원하는 스펙터클을 만들어낸 버펄로 빌의 이야기로 돌아가 보자. 영화 시대에 앞서 버펄로 빌은 대중이 원하는 환상적 욕구를 재현할 수 있는 가능성을 포착해냈다. 그렇다면 대중이 원하는 스펙터클은 어떻게 만들어지는 걸까? 또다른 쇼비즈 사업가 존 버크는 캐스팅에 주목했다. 리틀 빅혼 전투에서 미국 기병대를 몰살시킨 위대한 시팅 불 추장을 캐스팅해서 자신의 <와일드 웨스트 쇼>에 출연시키는데 성공했다. 지금도 은판에 기록되어 남아 있는 시팅 불과 존 버크의 사진을 보라.

 

<와일드 웨스트 쇼>에 캐스팅된 시팅 불과 인디언 전사들은 전 미국은 물론이고, 유럽 대륙에도 건너가 대중들에게 쇼의 진수를 선보였다. 다시 한 번 자존심은 물론이고, 부족의 영혼마저도 삼켜 버리는 무서운 자본의 속성을 엿볼 수 있었다. 어찌어찌해서 쇼를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온 시팅 불 추장은 평화로운 말년을 기대했지만, 그를 기다리고 있던 운명은 너무나 가혹했다. 훗날 <운디드니> 사건으로 알려진 미 기병대의 공격으로 문자 그대로 위대한 영웅과 부족은 비참하게 학살당했다.

 

아메리카 대륙의 인디언들에게는 지울 수 없는 비극이었던 <운디드니> 사건 역시 쇼로 만들어져 무대에 오르게 된다. 역사는 반복된다고 했던가? 미국의 엔터테인먼트 산업은 상상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상업적으로 이용하기에 이르렀다. 미국이 건국된 이래, 처음으로 패배한 전쟁이었던 베트남 전쟁마저 진 전쟁이 아니고, 아무런 명분도 없이 참가한 전쟁에서 활약한 영웅들의 이야기를 픽업하면서 과연 미국이 전쟁에서 진 걸까라는 생각이 들 정도가 되었다. 인디언 전쟁과는 아무런 상관도 없이 버펄로 빌이 무대에서 연기를 거듭하면서 자신이 진짜 현장에 있었다고 착각하게 되는 것처럼 말이다. 가짜가 진짜를 대신하게 되는 그런 기묘한 과정에 대한 설명은 시뮬라크르 정도로 퉁칠 수 있는 지도 모르겠다.

 

버펄로 빌의 흥행 신화는 그렇게 오래 가지 못했다. 세상의 모든 쇼들이 그렇듯, 버펄로 빌의 <와일드 웨스트 쇼> 역시 영화의 등장으로 역사의 뒷길로 밀려나게 되었다. 그렇다고 해서 우리의 버펄로 빌이 순순히 왕좌를 내주진 않았지만, 새로운 시대의 총아 영화 산업에서 버펄로 빌은 재미를 보지 못했다. 자신의 이름을 딴 도시 코디도 만들었지만 서부 개척시대를 그리워하는 이들에게는 성지가 되었을지 모르겠지만, 도시로서의 순기능이 없었기에 쇠락의 길을 걷게 됐다. 쓸데없이 나이 어린 여성에게 당시로서는 천문학적인 돈을 들여 연극무대에 데뷔시키기 위해 투자에 나섰다가 낭패를 당하기도 했다고 한다.

 

솔직히 말해서 말미에 실린 눈송이 이야기는 왜 들어가 있는지 잘 모르겠다. 그거와 버펄로 빌의 스펙터클 쇼가 무슨 상관이란 말이지.

 

이전에 소개된 <그날의 비밀>에서도 그랬지만, 저자 에리크 뷔야르는 상당히 흥미로운 소재를 잘 다루고 있다. 짧고 강렬한 서사는 마음에 들지만, 아무래도 분량 때문인지 깊이 면에서 떨어진다는 느낌이 들었다. 아니면 더 할 말이 없던가. 어쨌든 콩고, 종교개혁 그리고 레콩키스타 이야기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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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의 연쇄 독서 - 꼬리에 꼬리를 무는 책들의 연쇄
김이경 지음 / 후마니타스 / 2012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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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8년 전에 책을 받아 읽기 시작하면서도 위험하다는 생각을 했다. 왜냐구? 내가 모르는 미지의 책들이 우수수 소개될 것임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그리고 연쇄 독서의 위험을 잘 알고 있으니 더더욱 그랬겠지. 그 시절에는 지금보다 훨씬 더 시간이나 금전적으로 여유가 있었으니 오죽했을까. 지금도 그 시절에 산 책들을 야금야금 읽고 있는 중이다. 사거나 받은 책은 아무리 시간이 오래 걸려도 언젠가는 읽는다는 신념으로.

 

그 때 본 책은 다 읽지도 못했으면서도 <마녀의 연쇄 독서>에 소개된 책은 하나 산 기억이 난다. 토니 주니퍼의 <스픽스의 앵무새>. 이미 그 때도 절판된 책이었다. 신기하게도 페미니즘, 환경을 주제로 한 책들의 수명은 너무 짧은 것 같다. 거의 초판만 나오고 그 후에는 다시 찍지 않는 모양이다. 남아메리카 열대 우림에 서식한다는 스픽스금강앵무에 대한 이야기는 하루가 다르게 멸종되어 가는 지구별의 생물들이 처해 있는 비참한 상황을 다시 한 번 환기시켜 준다. 밀거래 시장에서 한 마리에 자그마치 4만 달러나 하는 금강앵무 잡이에 혈안이 된 밀렵꾼 그리고 그들의 밀렵을 사주하는 부유한 희귀새 수집가들의 악랄함에 그저 치를 떨 뿐이다. 아름다운 금강앵무들이 그냥 원래 살던 곳에 살게 해주면 안 되는 걸까.

 

우리가 사는 지구별의 모든 것은 순환이라는 카테고리에 들어가 있다. 오로지 생산과 이윤만 추구하는 자본주의 시스템은 환경파괴를 사주하고, 은폐하는데 전력투구한다. 보다 나은 생산성이라는 이름으로 환경이 파괴되니 금강앵무들이 살 터전이 사라지는 것이다. 더 나아가 우리의 식탁에 오르는 먹거리에 대한 이야기도 마찬가지다.

 

생명공학이 언제부터인가 미래의 먹거리 산업으로 등장하면서 다국적 기업들이 세계의 종자시장에 침투해서 돈벌이에 나섰다. 그 결과 농부들이 수천 년 동안 애써 지켜온 종자의 다양성들은 사라져 버리고, 오로지 이익을 내는 효율적 단일경작만이 살 길이라는 모토가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다. 하지만 그런 단일경작의 폐해는 정말 심각했다. 병충해나 기근이나 이제는 일상이 되어 버린 물 부족으로 실험실에서 만들어진 종자들은 극심한 기후변화에 전혀 대처하지 못하는 모습을 보여주었다. 지금도 우리 지구별의 수많은 이들이 기아에 시달리고 있다는 현실이 무엇을 말해 주는가. 또 한편으로 영양과잉으로 비만이나 당뇨 같은 선진국형 병으로 고생하는 이들도 수두룩하지 않은가.

 

반세기도 전에 독일군이 포위한 레닌그라드에서 미래의 인류를 가난과 기아에서 해방시키기 위해 전 세계를 돌며 수집한 씨종자를 나치의 폭탄과 극심한 기아와 싸우다 죽은 영웅들의 이야기에서는 정말 진한 감동을 먹기도 했다. 내가 <마녀의 연쇄 독서>에서 꼽은 최고의 이야기가 아닐 수 없다. 니콜라이 바빌로프, 결국 그의 일대기를 다루고, 식물종 다양성이 우리 인류에게 얼마나 중요한지 다시 한 번 일깨워 주는 책인 <지상의 모든 음식은 어디에서 오는가>를 읽기 시작했다. 마침 그놈의 코로나 사태로 휴관 중이던 도서관이 문을 열어서 두 달이나 대출했던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냉큼 빌려다 바로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런 책은 사야 하는 게 아닐까? 걱정하시지 마라. 언제고 살 테니.

 

내가 처음에 이 책이 상당히 위험한 책이라고 말했던가? 아 제목으로 뽑았구나. 출판사 편집자이자 <스픽스의 앵무새>를 국내에 소개하기도 한 눈 밝은 독자이기도 한 저자처럼 어떤 카테고리를 정해서 달려가는 그런 연쇄 독서가라기보다 아무렇게나 내키는 대로 닥치는 대로 읽어제끼는 연쇄독서마에 가까운 나는 당분한 이 책의 영향으로 연쇄 독서에 시달릴 경향이 농후하다. 벌써 나의 장바구니를 채운 책들이 몇 권이던가.

 

여담으로 우리가 즐겨 먹는 청양고추도 해외 식물기업이 특허권을 가지고 있어서 우리가 즐겨 먹을 때마다 그 기업에 돈을 내야 한다는 사실을 최근에 알고는 좀 충격을 먹었었다. 별 게 다 돈으로 환산되는 세상이구나 하고 말이다.

 

토크빌이 민주주의 사회의 모델로 삼았던 미국의 현재 모습을 보았다면 과연 프랑스 출신 정치학자는 어떤 생각을 했을지 궁금했다. 최고 정치지도자가 확인도 되지 않은 사실을 국민들에게 무차별 살포하고, 오로지 자신의 재선이라는 잿밥에만 관심을 가지고 있다. 전대미문의 코로나 사태로 베트남전에서 죽은 미군 수보다 더 많은 국민들이 질병으로 죽어 나가도 하나 깜짝하지 않는 사회를 과연 건강한 사회라고 부를 수 있을까? 어쩌면 미국식 민주주의의 조종이 울리고 있는 게 아닌가 싶기도 하다. -반민주의자 베르나르 앙리 레비의 <아메리칸 버티고>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바로 이게 문제다, 끝없이 연쇄 작동하는 독서와 책에 욕심이 결국 화근이 될 판이다.

 

책을 읽을 적에는 참 할 말이 많았는데 막상 리뷰로 담아내려니 한계가 느껴진다. 기운도 없고... 결국 저자가 인도하는 연쇄 독서는 어디까지나 독서인에게 참고 사항일 뿐이고, 진짜는 자신이 직접 원전을 읽어 보는 것이다. 그리고 한 때, 이런 종류의 책들이 유행을 했던 적도 있었던 것 같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사람들이 더더욱 책을 읽지 않게 된 시절에 타인의 독서를 읽는다는 건 더 의미가 없어진 게 아닌가 싶다.

 

<마녀의 연쇄 독서>를 읽으면서 절판된 많은 책들을 만나게 되었는데, 다행히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책들도 있더라. 그런 책들은 다시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고 그렇지 않은 책들에 대해서는 예의 소유욕이 발동했다. 이제 다시 책사냥에 나설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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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국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지음, 배수아 옮김 / 문학과지성사 / 2013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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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공간적 배경이 되는 독일령 뉴기니의 카바콘 섬이 뉴기니 본토 근처에 있는 줄 알았다. 구글 맵으로 카바콘 섬을 검색해 보니 카바콘 섬은 뉴기니보다 뉴브리튼 그리고 라바울 근처의 섬이었다. 놀랍군. 헤르베르트쇠헤(현지명은 코코포) 역시 뉴브리튼 부근이었다. 이래서 지도에서 위치를 파악하는 게 중요하구나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오랫동안 서가에서 잠자고 있던 크리스티안 크라흐트의 <제국>을 꺼내든 유일한 이유는 작가 양반이 내가 인스타에 올린 두 개의 포스팅(무려 한글이다!)에 좋아요를 누른 덕분이었다. 나는 널리 알려지지 않은 작가의 책에 도전하는 걸 마다하지 않는다. 이번에 새로 나온 <망자들>을 흥미진진하게 읽은 여운이 가시지 않은 상태에서 <제국>에 도전했다.

 

20세기에 태어난 독일 프랑켄 출신 기인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가 소설 <제국>의 주인공이다. 그를 다음의 표현들로 규정할 수 있을 것 같다. 나체주의자, 극단적 채식주의자 그리고 코코야자주의자 또라이. 독일에서 <근심 없는 미래>라는 해괴한 서적을 쓴 엥겔하르트는 자본주의 생태계에 회의를 느끼고, 최근에 개척된 남태평양의 독일 식민지 노이포메른의 코코야자에 매혹되어 모든 것을 뒤로 하고 19027월 미지의 세계로 가는 배에 오른다.

 

소설은 마냥 실존 인물인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가 그리는 삶의 궤적만을 그리지 않는다. 아니 어떻게 보면 또라이 같은 삶은 산 엥겔하르트라는 인물이 남긴 빈 공간을 작가의 상상력이 마구 침범한다. 독일령 뉴기니로 가는 도중에 들른 실론(오늘의 스리랑카)에서 희대의 사기를 당해 가진 돈을 거의 다 털리기도 한다. 현지에서는 모든 무역을 독점한 에마 포사이스 여사에게 농락당해 거의 거저나 다름없는 카바콘 섬의 코코야자 농장을 사들인다.

 

이미 그 당시에도 산업화에 지친 인민들이 많았던 모양이다. 카바콘이 지상낙원이라는 선전하는 엥겔하르트의 감언이설에 넘어가 독일 각지의 청년들이 헤르베르트쇠헤에 몰려들어 각종 문제를 일으키기 시작했다. 이미 그전에 엥겔하르트와 비슷한 성향의 또라이 하나가 섬을 찾았다가 살해당하기도 했다(이건 어디까지나 소설적 구성이다). 베를린 출신의 유명한 피아노 연주자 막스 뤼트초프가 카누에 헤르베르트쇠헤에서 수배한 고물 피아노를 싣고 카바콘 섬에 상륙하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심각한 영양 불균형으로 오로지 코코야자만 먹고 살겠다는 태양교주 엥겔하르트의 건강은 하루가 다르게 나빠진다. 게다가 독단적인 성향까지 내비치면서 자신과 합류하기 위해 찾아온 청년 노숙자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내는 결정을 내린다. 물론 뤼트초프는 그에 반대하지만.

 

독일령 뉴기니에서 벌어지는 일들이 현재형이라면 마치 한 편의 영화처럼 플래시백처럼 중간에 삽입된 그의 행적들을 알려주는 사건들은 과거형이다. 뉴기니로 오는 도중에 실론에서 발생한 거액 송금환 절도사건은 애교에 가깝다. 소설을 더 흥미롭게 만드는 요소 가운데 하나는 당대를 주름잡던 저명한 인물들의 카메오 출연이다. 헤르만 헤세를 필두로 해서, 동프로이센 메멜의 바닷가에서 자신의 신념대로 나체로 있던 엥겔하르트를 경찰에 신고해서 치도곤을 먹인 당사자는 토마스 만으로 추정된다. 그 외에도 베른의 특허청에서 일하던 시간의 재해석자 아인슈타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뤼트초프가 사소한 히스테리로 정신 상담을 받은 빈의 프로이트 등 마치 크라흐트 작가가 곳곳에 마련한 기대하지 않았던 에피소드들과 만나는 재미도 쏠쏠하다.

 

소설 <제국>에는 기본적으로 독일식 엄숙주의 덕분인지 요절복통의 서사보다는 점잖은 스타일의 유머가 넘실거린다. , 정말 좋아할 수밖에 없는 그런 작가다. 엥겔하르트의 동지였다가 독재자 교주와 사이가 틀어져서 섬을 탈출한 막스 뤼트초프가 남태평양의 여왕 에마와 선상 결혼식을 마치고 흥에 넘쳐 샴페인 잔을 쥐고 다른 배로 건너가려다가 미끄러진 뒤, 두 배 사이에 끼어서 으스러져 버리는 장면은 정말 압권이었다. 소설 <제국>의 핵심 주제로 뽑을 수 있는 한 시절을 풍미했던 제국의 몰락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봐도 무방하지 않을까. 생의 정점에서 무너져 버린 한 사나이의 기괴한 운명으로 도치된 몰락한 식민제국의 운명 말이다.

 

독일 보호령인 뉴기니에 터를 잡은 프로이센 출신 작물 재배인 혹은 부르주아들은 하나같이 본국에서 밀려난 신세다. 새로운 시대의 주역으로 떠오른 독일 제국의 잘 나가는 인사들이 어디에 있는지도 모를 그런 깡촌에 와 있을 이유가 없지 않은가 말이다. 제국 수도 출신으로 그게 건강염려증으로 무언가 새로운 활력을 찾아 나선 뤼트초프가 베를린과 다를 게 없는 헤르베르트쇠헤의 분위기에 지친 이유다. 물론 코코야자주의자를 천명하며 카바콘에 둥지를 튼 엥겔하르트도 크게 다를 게 없지만 말이다. 위대해지고 싶지만 그러지 못한 인간의 처절한 자신의 본모습에서 그를 코코넛섬의 돈키호테로 부르고 싶다.

 

독일의 식민주의자들에게 남태평양의 뉴기니는 그저 착취의 대상일 뿐이다. 알베르트 할 총독으로 대표되는 지배계급의 뇌리에는 오로지 작물 재배, 노동, 이주, 개발, 그리고 소득 창출이라는 생각만 가득하니 말이다. 예전 수업시간에 배운 생시몽과 푸리에 그리고 프루동 같은 공상적 사회주의자들의 이름을 만나니 어찌나 반가웠는지 모르겠다. 독일 사회민주당(SPD)이 제국의 식민지 정책에 반대했다는 사실도 하나의 지적 획득이었다.

 

소설의 결말은 포스트트루스(post-truth) 시대에 걸맞는 그런 엔딩이 아니었나 싶다. 진실이 더 이상 사실로 받아들여지지 않는 시대에, 아우구스트 엥겔하르트의 삶은 소설 속에서 굴절되어 반영된다.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가 내린 그런 결정에 고개가 끄덕여진다.

 

개인적으로 <제국>은 지금까지 만난 네 편의 크리스티안 크라흐트 작가의 작품들 중에 최고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음에는 이슬람 혁명 시절의 이란과 문화혁명기의 중국을 다뤘다는 <1979> 그리고 김정일 시대의 북한 여행을 다룬 사진집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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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9 00:01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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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5-09 09:45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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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
팀 오브라이언 지음, 이승학 옮김 / 섬과달 / 2020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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씁쓰름하다. 점심도 먹지 않고 한의원에 침을 맞으러 갔는데, 물리치료만 받고 정작 침은 맞지 못하고 그냥 왔다. 이럴 거면 예약은 왜 했나 싶다. 원장의 시간만 중요하고 치료를 기다리는 환자의 시간은 소중하지 않다는 건가. 내일 일단 예약을 다시 잡긴 했는데, 신뢰가 떨어져서 여길 계속 가야 하나 어쩌나 싶다. 종아리가 조금 아픈 것도 이런데, 전쟁터에서 총상을 두 번이나 맞아 쇼크사할 뻔한 이의 감정은 어땠을까.

 

절판되어 도서관에서 책을 빌렸지만 책의 컨디션이 너무 후져서 중고를 사려고 기다리던 차에 새로운 번역으로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이 재출간됐다. 이 장편소설에는 모두 22개의 미네소타 오스틴 출신 작가 팀 오브라이언이 직접 보병으로 참전한 베트남의 정글에서 보고 듣고 체험한 이야기들이 담겨 있다.

 

청년 티미는 부당한 전쟁에 참전하고 싶지 않았다. 대학원 진학을 기다리던 19686, 소집영장이 나왔다. 스물한 살의 청년은 전쟁에도 나가고 싶지 않았고, 전쟁광들의 꼭두각시가 되어 적에게 총질을 하고 싶지도 않았다. 그에게 다른 대안이 있었을까? 캐나다로 도망가는 방법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주인공 티미는 부모님에게 짧은 쪽지를 남겨두고 월경을 도모하기 위해 무작정 차를 몰고 떠난다. 그 여정에서 팁 톱 오두막이라는 낚시 리조트를 찾고, 훗날 자기 인생의 영웅인 엘로이 버달을 만난다.

 

엘로이는 곤경에 처한 청년에게 아무 것도 묻지 않는다. 그는 요즘 어쭙잖은 세상살이로 라떼꼰대라 불리는 이들과는 차원이 다른 그런 포용의 진수를 보여준다. 아니 전쟁으로부터 도망치려는 티미를 작은 보트에 태워 레이니강 너머 캐나다 땅으로까지 인도하는 모습을 보여준다. , 나도 엘로이 버달 같은 사람이 되어야 하는데. 나이가 드니 이것저것 따지는 게 너무 많아진 모양이다. 오히려 청년 시절에 더 관대한 게 아니었을까.

 

우리의 티미는 작은 마을에서 자신에게 쏟아질 병역기피자 내지 반역자라는 꼬리표가 너무 쪽팔려서 전쟁터로 향한다. 바로 그런 솔직함이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을 다른 전쟁에 대한 경험을 이야기는 책들과 변별점을 만든다. 누군가에게 전쟁은 국가 재건을 위한 용병수출로 외화를 획득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였을 것이고, 수세기 동안 이어진 식민침략자들에 대항해서 분연히 일어난 민족해방 투쟁일 수도, 티미 같은 땅개들에겐 억지로 끌려온 그 무엇이었으리라.

 

저자는 기본적으로 전쟁은 지옥이라는 기본 컨셉트를 부인하지 않는다. 소설의 곳곳에서 그런 점이 보인다. 전쟁에서 돌아온 다음에 태어난 딸이 그에게 전쟁에서 누군가를 죽였느냐고 물었을 때, 그는 아니라고 거짓말을 한다. 전쟁은 어마어마한 전비와 병력을 투입한 미국의 패전으로 끝났지만, 중년이 된 저자의 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소설에 순서대로 등장하는 테드 라벤더와 커트 레몬 그리고 카이오와 같은 전우들이 바로 곁에서 어이 없이 죽어가는 장면은 초현실적이다. 방금 전까지 전장의 긴장을 달래기 위해 농담하고 장난치던 전우가 포탄으로 만든 부비트랩에 산산조각이 나는 장면을 상상해 볼 수 있을까. 그저 단순하게 그는 죽고 나는 살아남았다는 이분법적 구조로는 도저히 설명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누구보다 용감했던 인디언 전사 카이오와는 지미 크로스 중위의 오판으로 오물 속에서 박격포탄의 공격을 받고 전사했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전우들이 똥물을 뒤지는 동안, 지휘관은 전사한 대원의 부모님에게 보낼 문구를 생각하느라 정신이 없다. 시신낭이나 판초에 또래 전우들의 시신을 수습하는 장면은 슬픔 그 자체였다.

 

한편, 생전 처음으로 내가 아닌 타인을 죽였을 때의 감정에 대해 저자는 여러 꼭지로 당시 상황을 묘사한다. 정치적으로 리버럴인 저자의 양심선언이라고 해야 할까. 아무런 목적의식도 없이 전쟁이라는 무거운 짐을 군장처럼 등에 짊어진 열아홉 살에서 스무 살 난 청년들이 공산당과 싸우기 위해 조국에서 멀리 떨어진 낯선 나라에서 왜 자신의 목숨을 걸고 싸워야 하는지에 대한 설명은 아예 나오지 않는다. 아무 것도 모르는 소년들은 이국땅에서 이방인으로부터 자신의 조국을 지키기 위해 싸우는 보이지 않는 적들과 싸우면서 비틀린 어른으로 성장한다.

 

클리블랜드 하이츠에서 날아와 정글의 애인과 합류한 메리 앤 벨의 이야기는 전설 그 자체다. 과연 그게 가능할까? 본국의 십대소녀가 애인을 만나겠다는 일념으로 태평양 바다를 건너, 수송헬기에 숨어 작전 지역에 침투한다고? 나는 도저히 못 믿겠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게 장편소설이라는 타이틀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최전선에서 메리 앤은 위생병으로 그리고 소총수로 심지어 그리니들과 함께 매복에도 참가한다. 그리고 어느 순간 유령 군인처럼 사라져 버린다. 그리고 아무도 책임 진 사람이 없다? 전쟁 자체가 워낙 광기로 물들다 보니 별의별 일들이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들여질 수도 있겠지 싶다.

 

내가 보기에 팀 오브라이언의 <그들이 가지고 다닌 것들>은 미국이 빠졌던 수렁 같은 베트남 전쟁의 알파와 오메가를 모두 담고 있다. 살기 위해 병역기피를 할 뻔한 순간의 티미로부터 시작해서, 총상을 두 번이나 당하고 결국 본부중대로 재배치된 전사가 아닌 존재의 티미, 본국으로 귀환해서 작가가 된 티미 그리고 어린 딸과 카이오와를 추모하기 위해 그가 전사한 장소로 돌아가 모카신을 논바닥에 심은 티미. 김영하 작가가 자신의 여행 에세이집에서 언급한 추구의 플롯을 이보다 더 완벽하게 시행한 케이스가 또 있을까 싶을 정도다.

 

생생한 비극의 재현은 원칙적으로 불가능하다. 그것은 어떤 미디어를 사용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팀 오브라이언이 지적하는 대로 정확하지 않은 기억과 나중의 기억들이 뒤죽박죽된 초현실적인 그 무엇이 아니었을까? 우리의 주인공 티미는 엉덩이에 총을 맞고 피를 쏟고 있는 자신의 구조 요청을 무시했다는 이유로 위생병 보이 조겐슨에게 치졸한 복수를 계획한다. 어느 순간 멈춰야 했지만, 이왕 시작했으면 끝장을 봐야 한다는 동료 아자의 주장에 이끌려 아무런 의미 없는 복수극을 실행에 옮긴다. 그것은 마치 찰리 콩들의 테트 공세 이후, 베트남에서 승리할 기회가 사라졌다는 걸 인정할 수 없었던 미국 전쟁지도부가 출구전략(exit strategy)을 실시하지 못한 것과 같은 상황이라고나 할까.

 

오래 기다림만큼 만족할 만한 그런 독서였다. 그런데 나는 팀 오브라이언에게 한 가지 묻고 싶은 게 있었다. 피아 구분이 확실한 전쟁터에서 전투병 사이에서의 살상이야 그렇다 치고, 과연 한 번도 무고한 민간인은 죽인 적은 없느냐고. 그는 과연 어떤 대답을 할까.

 

[뱀다리1] 책이 지닌 가치에 사소한 오탈자 정도는 패스하도록 하자.

[뱀다리2] 책의 뒷면을 보면 <카차토를 쫓아서>가 출간 예정으로 되어 있는데, 실질적 주인공 폴 벌린이 탈영병(AWOL) 카차토를 추적하는 소설인 모양이다. 그런데 카차토가 파리까지 도망갔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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