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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주론 ㅣ 을유사상고전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복룡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6월
평점 :

진정한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자유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로마사 논고>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키아벨리하면 연상하는 그의 대표작 중에 대표작이라는 <군주론>은 아예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다. 물론 책은 가지고 있었다. 7북표지 챌린지의 제물로 삼기에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었다. 오늘 아침부터 바로 읽기 시작했다.
바로 전에 괴짜 논객 <아레티노 평전>을 읽어서 그런지 격랑이 휘몰아치던 15세기와 16세기 사분오열된 이탈리아가 바로 연상됐다. 물론 그전에 체사레 보르자 등등에 대한 글을 충분히 읽어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와 마키아벨리의 고향 피렌체가 위치한 토스카나를 둘러선 프랑스와 에스파냐 그리고 교황권의 각축의 이해를 위한 충분한 독서 근육이 준비되어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역시 책은 이렇게 다 읽을 때가 있는 법이지.
아, 물론 그전에 르네상스의 또 다른 문제적 인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어 네이버캐스트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 마키아벨리는 공화국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어 고위직 관리로 활약하고 싶었으나, 그 때마다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결국 하위관리 신세로 자신의 웅대한 꿈(?)을 펼쳐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어쩌면 춘추시대 각국을 주유천하했던 공자 같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설파하는 이상은 좋지만, 현실에 도입하기에는 좀 거시기한.
게다가 후대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덕의 상징 같은 인물로 그려져 두고두고 욕을 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가 저술한 희대의 저서 <군주론>을 읽어 본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왜 우리들은 저자의 생각과 주장이 담긴 저술을 읽지 않고, 다른 이들의 평가에만 의존하는가. 어쩌면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지적 수련에 너무 투자를 하지 않아 발생하는 괴리와 오류가 아닐까 싶다.
책의 띠지를 보면 “인간본성과 권력 투쟁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문구를 새겨 놓았다. 책을 읽다 보니 충분히 공감이 간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명백하게 일반인이 아닌 군주에게 헌상된 책이다. 프랑스와 대결하기 위해 외세인 에스파냐를 불러들인 베네치아는 결국 롬바르디아 전역에서 소소한 이익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대해 명철한 분석가인 마키아벨리는 정복과 통치/지배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논증한다.
정복 지역에 대한 영구적 지배를 위한 마키아벨리의 고언은 냉정하지만, 새겨들을 만하다. 우선 철저하게 기존의 지배층을 소멸시켜야 한다. 다시 반란을 도모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군대는 정복에는 필요하지만, 지배에는 이주민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현지인들을 동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가 취했던 정책이 아닌가. 중앙집권화된 투르크나 페르시아의 경우, 집권은 어렵지만 통치는 상대적으로 용이했다고 분석한다. 반대로 봉건제도가 발달한 프랑스의 경우, 집권은 쉬웠지만 수시로 발생하는 반란으로 통치의 지속은 난망했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기득권층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채찍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통치의 마지막 방법은 아예 본거지를 통째로 옮기는 방식이다. 중세를 끝장낸,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뒤에 아예 수도를 비잔틴 제국의 중심으로 옮기지 않았던가. 본거지 이전의 이점으로는 반란의 신속한 진압과 기존 지배계층을 대신한 새로운 권력에 대한 상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분오열된 이탈리아 통일의 대업을 이룰 인재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이야기와 분석도 또한 흥미진진하다. 자수성가해서 군주의 자리에 오른 밀라노 공국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같은 입지전적 인물이 있는가 하면, 체사레 보르자처럼 순전히 아버지의 끗발에 포르투나 덕분에 승승장구한 캐릭터도 존재했다. 알렉산데르 6세 재위 기간, 아버지의 바람대로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로마냐와 우르비노 공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던 냉혈한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 사후 운이 다하면서 결국 풍운아다운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가 선종한 뒤, 체사레 보르자가 충분히 미래에 자신의 적이 될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결국 자신의 몰락을 자초했다고 분석한다.
스스로 창업에 성공한 이의 성공은 그대로 포르투나의 바람을 타고 쉽게 이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순전히 운발로 성공을 거둔 체사레 보르자 같은 경우에는 좀 더 특별한 관리가 필요했다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한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무장한 예언자가 성공을 거둘 확률은 더 높아진다. 단적인 예로 레닌과 마오쩌둥을 들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실력이 온전하게 나의 것인지 아니면, 인맥이나 화려한 웅변술을 이용해서 얻어온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중요성, 다시 말해 무력이 가지는 당위성에 대해 설파한다. 상대방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금전이라는 형태로 환전될 수 있겠지만, 혼란의 시대에서는 역시 무력이 최고라는 말일까.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당대 유행하던 용병의 폐해를 일찍이 깨닫고 근대국가가 마련한 상비군 시스템의 필요성을 먼저 깨달은 선각자일 지도 모르겠다. 국가나 민족에 대한 희생이나 충성심 대신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라이슬로이퍼(스위스 용병들)가 군대의 주력이던 시절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나마 근대국가의 틀을 갖춘 프랑스나 에스파냐 군대를 상대하던 이탈리아 용병집단은 평화 시에도 전주(錢主)인 군주를 약탈하고, 전시에는 전시대로 상대방을 약탈한다는 마키아벨리의 통찰 섞인 유머에 정말 빵 터지고 말았다.
저자는 군주가 민중에게 베푸는 시혜에 대해서도 통 크게 쏠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베푸는 방식을 권한다. 그게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효과가 더 크다나.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리고 후대에 큰 오해를 받게 되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인 군주는 악행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큰 덕을 이루기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악행의 수행에 있어 신속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할 것을 주문한다. 전쟁이 그렇지 않은가. 모름지기 군주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선 그전에 먼저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먹고 먹히는 근세 초 르네상스의 전장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거세게 밀어 붙이는 적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조건 농성전에 돌입하는 게 상책이었을까? 가장 폭력적인 정치 행위인 전쟁에서 오로지 금전적 대가를 바라고 전투에 참가하는 용병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탈리아가 오늘날 이 꼴이 된 것도 상당 부분은 용병들에게 전투를 맡긴 탓이라는 분석도 뒤따른다.
어쨌든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란 민중의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는 그런 존재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어떻게 보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군주론>은 난세에 필요한 처세술로도 읽힐 수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군주론>에서 픽업한 중요한 주제는 바로 균형감각이다. 선을 넘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이야말로 난세의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군주는 필요에 따라 악행을 수행해야 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다. 또 때로는 대중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해야 한다. 그런 모든 임무를 한 몸에 지녀야 하는 게 군주, 아니 어쩌면 권력의 속성일 지도 모르겠다.
로마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레나에 직접 검투사로 출전해서 군주의 품위를 떨어뜨린 콤모두스에 대한 비유부터 시작해서, 지나치게 백성들 대신 군대를 후대하다가 결국 호위군에게 피살당한 어리석고 우매한 로마 황제들의 열거는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니 제발 피렌체의 로렌초 메디치는 중용의 미덕을 지키고, 자국 병사들을 양성해서 통일 이탈리아의 대업을 이루길 바란다는 식의 권고로 <군주론>은 마감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어디선가 분명 충간과 아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덕목에 대해서도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의 모습에서 메디치 가문을 그야말로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할 구세주로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군주에게 유리한 형국이라는 곡학아세의 자세로 달려드는 걸 보니 결국 냉철한 분석가라고 자처하던 마키아벨리 역시 속물적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도대체 무슨 실력으로 피렌체가 발루아 왕조가 이끄는 서방의 대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독일 그리고 세속화된 교황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로마 교황을 상대로 해서 약탈로 쑥대밭이 된 롬바르디아를 수복하고, 토스카나와 나폴리를 되찾겠다는 망상을 마구 퍼트린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술에서 무엇보다 실력을 기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자신이 가진 실력 이상을 요구하는 언어도단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마키아벨리의 진언은 로렌초 메디치에게 채택되지 못했고, 유비를 도와 천하를 제패하려던 웅대한 꿈을 꾸던 제갈공명처럼 마키아벨리 역시 피렌체의 하급 공무원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