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해, 여름 손님 (양장) 콜 미 바이 유어 네임
안드레 애치먼 지음, 정지현 옮김 / 잔(도서출판)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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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국내에 소개된 안드레 애시먼의 첫 번째 책이다. 이미 읽기도 전에 여기저기서 하도 평을 많이 들은지라 읽으면서도 영 낯설지가 않았다. 영화로도 나왔는데 주인공 엘리오와 울리바(올리버)가 보르디게라에서 만나는 장면이 기억에 남는다. 아직 영화는 보지 않았다. 이 책은 표지갈이를 하면서 계속해서 출간되고 있는데, 처음 나온 책의 표지는 영 마음에 들지 않았다. 그래서 양장본으로 나온 책을 샀다. 이미지가 이렇게 다를 수가 있나 그래. 그렇다고 해서 다른 표지가 마음에 드는 것도 아니지만. 결국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이라는 원작대로 새로 단장해서 나오기까지 했다. 이럴 거면 처음부터 그냥 원제로 갈 것이지.

 

소설의 내용은 비교적 간단하다. 매해 여름마다 B(보르디게라)에서 지낼 하숙생이 엘리오 아버지의 집을 찾는다. 소설은 세 개의 공간으로 나뉘어져 있다. 교수인 아버지 덕분인지 감수성과 지성이 풍부한 17세 소년 엘리오가 7세 연상의 울리바와 사랑에 빠지게 되는 보르디게라, 그 둘이 영원히 잊지 못할 시간들을 보낸 로마 그리고 재회를 갖게 되는 미국의 뉴잉글랜드. 나는 각각의 공간들을 침잠, 열정 그리고 회한으로 표현하고 싶다.

 

과연 엘리오는 울리바에게 첫눈에 반했을까? 울리바의 냉랭한 감정선은 어쩌면 민감한 소년 엘리오에게 보내는 하나의 경고였을 지도 모르겠다. 감당할 수 없는 선을 넘는다면 너는 과연 감당할 수 있겠니라는. 이야기의 전개를 따라 가다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는 코드가 아닐 수 없다.

 

아름다운 보르디게라 모네의 언덕에서 지루한 게임을 끝내고 둘은 첫 키스를 했던가. 궁금한 마음에 보르디게라를 찾아 봤다. 내가 오래 전에 갔던 모나코를 조금 더 지나면 보르디게라가 나오더라. 이탈리아 리비에라 정도일까. 소설의 어디선가 본 망통(구글 지도에서는 멍똥으로 표시되어 있더라)을 지나면 바로 나오는 곳이 바로 보르디게라였다. 그 때 소설 <향수>의 도시 그라스를 찾았던 것처럼, 이 소설을 읽었더라면 보르디게라도 가지 않았을까. 이 책에 앞서 애시먼의 <알리바이>를 먼저 읽었는데, <그해, 여름 손님>을 읽는데 많은 도움이 되었다.

 

울리바는 소년이 느끼는 갈망의 지향점이다. 둘은 모두 보르디게라의 빛나는 여름이 끝나면, 모두 각자의 자리로 돌아가야 한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전도유망한 청년 울리바는 뉴잉글랜드의 하버드로 그리고 어쩌면 엘리오도 사랑하는 이에 대한 갈망을 안고 유학길에 오를 지도 모르겠다. 미래를 걱정하기에 그들은 너무 어리거나 젊었고, 이탈리아 리비에라 해변에 쏟아지는 햇살은 너무 강렬했다. 그들의 감정들이 시기 혹은 질투로 마구 뒤엉키는 선선한 오후의 나름함이 얼마나 매혹적이던지.

 

그렇게 둘은 서로의 감정을 확인하고 영원한 도시로 이별여행길에 나선다. 시인 문인들과의 만남에서 곤드레만드레 취한 엘리오와 울리바가 로마의 어느 광장에서 키스를 나눈다. 앨리오는 평생의 기억으로 그 순간을 기억한다. 물론 그런 둘을 바라보는 노인들의 시선은 곱지 않다. 아니 그전에 울리바가 주변을 둘러보았다고 했던가.

 

불길이 사그라지고 보르디게라로 돌아온 엘리오가 아버지와 나누는 대화는 정말 놀랍다. 어쩌면 안드레 애시먼은 바로 이 장면을 쓰기 위해 찬란한 태양으로 빛나는 이탈리아 리비에라라는 무대에 엘리오와 울리바를 올린 게 아닐까 싶을 정도다. 그러니까 아버지는 모든 것을 알고 있었던 것이다. 어머니는? 모르실 거라고 생각했지만 어쩌면 알면서도 인정하고 싶지 않아 모른 척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훗날 울리바와 재회한 엘리오는 그 사실을 울리바에게 말한다. 아마 울리바의 아버지라면 당장에 교화 시설에 보냈을 거라고 했던가. 사실을 알면서도 아들을 격려하는 아버지... 아들은 과연 그가 자신이 아는 아버지인가라는 생각을 한다. 아무리 식구라고 하지만, 누군가를 전적으로 아는 게 과연 가능할지에 대한 하나의 질문이다.

 

소설 <그해, 여름 손님>에서 나는 이 장면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그냥 이렇게 끝내도 소설의 완성도는 전혀 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뒤에 이어지는 울리바와의 재회는 그냥 사족 같은 느낌이랄까. 오랜 시간이 지나 그해 여름의 기억들이 임의대로 왜곡되고 어느 아름달움의 잔향만이 남은 상태에서 다시 만난다는 게 무슨 의미일까 싶다. 게다가 울리바는 이미 결혼해서 두 명의 아들들까지 둔 상태가 아니던가. 아름다운 추억은 추억 그대로 간직하는 게 낫다고 생각한다. 나머지는 모두 미련일 뿐.

 

나는 아마 이 소설의 후속편이라는 <파인드 미>는 읽지 않을 것 같다. <그해, 여름 손님>을 읽다 보면 나도 보르디게라의 여름 손님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내가 두 번 만난 지중해의 여름은 참 즐거웠었다. , 지난에 주문한 안드레 애시먼의 <하버드 스퀘어>가 발송되었다고 한다. 다음 주에나 도착하게 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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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바이 - 상실의 글쓰기에 대하여
안드레 애치먼 지음, 오현아 옮김 / 마음산책 / 2019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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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달 전, 달궁 책모임에 갔다가 의례처럼 종로책방을 찾았다. 무언가 득템하리라는 기대를 걸고서. 보통 그런 경우가 거의 없는데, 그 날은 원하던 책을 구할 수가 있었다. 바로 안드레 애시먼의 <알리바이>였다. 아니 출간된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벌써 헌책방에 이럴 수가. 가격이고 뭐고 볼 필요가 없었다. 사야 하는 그런 책이었으니까.

 

집에 오는 긴 여정 길에 바로 책을 집어 들었다. 그리고 마음껏 독서의 즐거움을 누렸다. 그러다가 잠시 접어 두었더랬다. 평소라면 바로 다 읽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았지만, 사실 <알리바이>는 이집트의 알렉산드리아에서 태어나 로마에서의 난민 그리고 결국 미국 할렘에 정착한 세계인의 넋두리 같은 글들이 담긴 에세이였으니까. 아마 소설이라면 맥이 끊길지 몰랐지만 적어도 <알리바이>만큼은 그럴 일이 없다고 판단한 모양이다.

 

사실 그전에 하도 좋다는 말을 듣고 작가의 다른 책인 <콜 미 바이 유어 네님>을 샀더랬다. 하지만 잘 읽히지가 않아 읽다 말았었다. 그런데 뭐랄까 어쩔 수 없이 어느 곳에서고 뿌리를 내릴 수 없는 그런 이방인일 수밖에 없는 안드레 애시먼의 시원을 알고 나니 <콜 미 바이 유어 네임>에 대한 관심이 일어 두 책을 병행해 가며 읽기 시작했다. 아니 이럴 수가! 작가가 직접 방문한 소설의 배경이 되는 이탈리아 보르디게라가 바로 눈앞에 그려지는 것 같은 그런 느낌이 드는 게 아닌가.

 

소설의 말미에서 만난 문구대로 우리는 모두 왔다가 가는그런 존재가 아니던가. 우리는 왜 무엇엔가 집착하지 못해 그렇게 애를 쓰는 걸까. 터키에서 박해를 피해 이집트로 건너온 유대계 애시먼의 부모님들은 다시 한 번 점프를 시도한다. 이번에는 이탈리아의 로마였다. 그리하여 애시먼은 두 개의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 그런데 더 멀리 애시먼 집안의 조상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5백 년 전 에스파냐까지 가야 한다고 한다.

 

그래서 결국 애시먼은 조상 중의 잔존자를 찾아 바르셀로나와 헤로나를 찾는다. 믿어지는가? 헤로나가 잘 꾸며진, 유대인들을 위한 테마 파크라는 표현에서는 정말 빵 터졌다. 바로셀로나 거리에서 다양한 군상을 한 인간 조각상들을 보며 기술한 장면에는, 결국 인간의 모방품을 모방할 수밖에 없는 인간 존재의 유한함을 느끼기도 했다.

 

모든 기억은 왜곡되는 법이라고 했던가. 자신의 회고록 <이집트를 떠나며>에 등장하는 부분들이 사실과 다르다는 고백은 정말 마음에 들더라. 기억의 불완전성을 탓하는 게 아니라, 우리 인간의 기억이란 그런 법이라며 자신의 왜곡된 감정들을 담담하게 고백하는 장면에서는 참... 어쩌면 부제로 따라 붙은 상실의 글쓰기에 딱 맞아 떨어지는 그 무엇이 아닐까 싶다.

 

하바드 대학에서 석사와 박사 학위를 받은 시절의 이야기도 등장한다. 아마 이 때의 경험을 바탕으로 그의 자전적 소설 <하바드 스퀘어>가 탄생하지 않았나 싶다. 기이하게도 그 동네 택시 기사들은 모두 아이티 출신이었지 아마. 멀티플렉스 시네마에서는 상영하지 않는 독립 혹은 예술영화들을 상영하던 브래틀 시어터를 작가도 자주 찾은 모양이다. 브래틀 시어터에서 본 <베를린 천사의 시>(아마 보다가 잠이 들었던 것 같다)와 리처드 링클레이터의 <비포어 선셋>의 추억이 아른거린다. 그래서 더 그의 글에 애착이 가는 걸까. 여전히 그 동네에 살았다면, 그가 고급 향수를 샀다는 브래틀가의 그 약국 순례길에 나서지 않았을까. 그의 발자취를 찾아 어쩌면 지금은 문 닫았다는 카페 알제에도 가봤을 지도.

 

한 때 마틴 스코시즈와 더불어 내가 가장 좋아하는 감독이었던 우디 앨런이 사랑하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도 흥미롭다. 어느 춥디 추운 겨울 날, ‘브루클린으로 가는 마지막 비상구타령을 하며 브루클린 브리지를 코를 질질 흘리며 걸었었지. 구경이고 뭐고 너무 추웠던 기억 뿐이다.

 

<알리바이>에서 가장 좋아하는 애시먼 선생의 글은 <자기 충전>이다. 아무리 사랑하는 사람들과 함께 있어도 오롯한 나만의 시간이 그리고 나만의 우주가 필요한 건 당신 뿐이 아니랍니다. 나도 그래! 어쩔 때는 무심히 흘러가는 하늘의 구름을 보며 멍 때리는 일도 필요하다. 대학 시절, 나의 두다리 선배는 가끔은 하늘을 보라고 했었는데 예나 지금이나 살이에 분주해서 그런 짬이 도무지 않는구려. 나를 추스르는 시간이라, 기가 막힌 표현이 아닐 수 없다. 무엇과 바꿀 수 없는 나의 그런 귀중한 시간에, 영영 오지 않을 영광을 누리고 찬사를 갈구하며 도무지 정리되지 않는 생각들 마구잡이로 타이핑하는 지도.

 

이런 광휘를 영롱하게 빛나는 글들을 지어내는 분산된 정체성의 작가를 내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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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20-03-07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독서모임 장소에 가기 전에 서점이나 책방에 방문하는 일, 정말 즐거운 일이에요. 대학생 때 서울에 가면 일찍 출발해서 헌책방이나 알라딘 서점에 갔어요. 달궁 독서모임에 참석하는 분들(삽하나님, 마욤님, 헤르메스님)은 잘 지내고 계시죠?

2011년 5월 21일에 제가 펭귄클래식 <제인 에어> 독서모임에 참석했는데, 그 때 레삭매냐님도 참석하셨나요? 그 날 어느 분을 만났는지 하나도 기억나지 않네요. 기억나는 분은 영화 제작과 관련된 일을 한 무당광대님 뿐이네요. 다행히 <제인 에어> 독서모임에 대한 기록이 제 블로그에 있네요. https://blog.aladin.co.kr/haesung/4805557

레삭매냐 2020-03-07 13:07   좋아요 0 | URL
저는 만날 지각이라 보통 끝나고
가게 되더라구요.

램프의 요정하고는 또 다른 구성
인지라 책을 찾는 재미가~ 무엇보
다도 램프의 요정보다 단가가 싸
다는.

모두들 잘 지내고 있답니다.
그놈의 코로나 때문에 지난 달에는
패스하게 되었네요 증말 -

9년 전 모임! 기억이 잘 나지 않네요.
안 빠지고 거의 나가곤 했던 것 같긴
한데 말이죠 ㅋㅋㅋ

scott 2020-03-07 22: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 완독 축하 합니다. 콜미 바이 한국어 번역판 비추!이책을 시작으로 이분에 작품을 차례차례 읽어나가시길 바랍니다 ^.^

레삭매냐 2020-03-07 23:25   좋아요 1 | URL
감사합니다 :>

아마 판권이 두 출판사로 나뉜 것 같은데
전 개인적으로 영 표지가 마음에 들지
않더라구요.

소장용으로 <하버드 스퀘어> 원서는 주문
했답니다 ㅋㅋ
 
슬픔은 날개 달린 것
맥스 포터 지음, 황유원 옮김 / 문학동네 / 202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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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군가를 상실한다는 느낌은 어떤 느낌일까. 실연과는 아마 또 다른 느낌이겠지. 궁금해하던 영국 작가 맥스 포터의 데뷔 소설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을 읽었다.

 

작년에 부커상 후보작에 선정된 <래니>로 그의 존재를 알게 되었다. 사실 국내에 소개가 된다면 <래니>가 먼저 소개될 줄 알았는데, 데뷔작부터 나왔다. 그렇다면 <래니>도 곧 출간된다는 말일까. 기대가 된다.

 

작가 맥스 포터는 서점 직원으로 출발해서 편집자 그리고 작가가 된 인생 유전을 그리고 있다. 다른 작가들의 글을 편집하다가, 어느 순간 나도 글을 써야겠구나 싶었던 게 아닐까. 그리고 보니 요즘 한창 전작주의에 빠져 있는 작고하신 토니 모리슨 여사도 편집자 출신이라지.

 

항상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소설에 대해 이야기해 보자. 화자의 아내가 죽었다. 남편과 사내 아이 둘을 남겨 두고. 아내가 정확하게 어떻게 죽었는지에 대해서는 나오지 않는다. 갑자기 쓰러져서 죽었다고 했던가. 사실 그것도 소설에서 중요한 테제는 아니더라. 소설은 어디까지나 남은 이들의 슬픔과 절망 그 사이 어딘가를 가르키고 있다는 느낌이다.

 

, 그리고 삼위일체를 이루는 결정적인 요소로 까마귀가 등장한다. 남편이 잠시 현기증으로 쓰러졌을 때 나타난 게 아마 까마귀였지. 실비아 플라스의 전 남편 테드 휴스의 시에서 모티브를 따왔다고 하던데, 나는 시에는 문외한이고(요즘 페소아의 시가집을 읽으려고 노력 중이다) 실비아 플라스는 물론이고 테드 휴스에 대해서도 아는 게 하나도 없다.

 

이 지점에서 번역을 맡은 황유원 시인을 칭찬하고 싶다. 연초 데이빗 설로이 방한 때, 번역을 맡아 만남의 자리에도 참석하셨더라. 진행도 유려하게 해주셨다. 시인 출신 번역가라 그런지 왠지 소설보다는 산문시에 가까운 맥스 포터의 소설을 매끈하게(원서를 보지 않아 잘은 모르겠지만) 번역하는데 한몫 하시지 않았나 싶다.

 

사실 소설을 읽는 내내 이게 소설인가 산문시인가 헷갈릴 정도였다. 소설은 내가 경험해 보지 못한 상실과 절망의 시대를 형상화한다. 어떤 경험들은 해보지 않으면 체화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 아마 사랑하는 이들의 죽음이 그런 게 아닐까. 좀 더 솔직하게 말하자면, 전혀 예상하지 못한 이들의 죽음이 그러하리라. 예상 수명을 다 채우지 못하고 급하게 떠난 아내의 죽음 앞에 망연자실한 모습을 애써 상상해 본다. 쉽지 않은 임무다.

 

까마귀는 주인공의 상실감이 최고조에 달했을 순간에 소리 없이 찾아와 극복의 징후가 보이자 곧 떠난다. 자신과 아이들을 위로하기 위한 이웃 친지의 방문도 별 도움이 되지 않는다. 아니 그들은 어쩌면 진정한 위로가 아니라 이웃이나 친지로서 자신의 도리를 다한 것이라는 자위를 위한 게 아니었을까. 소중한 사람을 잃은 감정이 어떻게 위로가 된단 말인가. 결국 우리 인간의 본성은 타인을 위하기보다 자신을 위해, 자신을 지키기 위해 그런 선행을 수행하는 게 아닌가.

 

슬픔은 어떤 누군가를 흥미롭게만들어 준다. - 수잔 손택 (은유로서의 질병, 52)

 

아내의 죽음이라는 상실감에서 비롯된 슬픔은 소설의 시작부터 독자의 호기심을 흡입한다. 누가 죽었다고? 존재의 소멸을 의미하는 죽음이라는 주제만큼 대중의 관심을 끄는 소재도 없을 것이다. 유명인의 죽음에 대한 소식이 실검 1위에 오르는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다만 타자의 죽음만이 그럴 뿐, 자신의 경우는 아마 생각하고 싶지 않으리라. 유년 시절에 아버지의 죽음을 경험한 맥스 포터는 그런 죽음을 너무 무겁지 않으면서도 충분히 상실감을 공감할 수 있는 수준으로 균형을 맞춰 가면서 소설을 진행시켜 나간다.

 

맥스 포터의 <슬픔은 날개 달린 것>이라는 제목은 슬픔과 절망은 어느 순간에는 그렇게 날개를 달아 훨훨 떠나보내 주어야 한다는 것을 은유한다고 믿고 싶다.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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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03-05 15: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5 21: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군주론 을유사상고전
니콜로 마키아벨리 지음, 신복룡 옮김 / 을유문화사 / 2019년 6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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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정한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자유인 니콜로 마키아벨리의 대표작 중의 하나인 <로마사 논고>를 아주 오래 전에 읽었다. 그런데 사람들이 마키아벨리하면 연상하는 그의 대표작 중에 대표작이라는 <군주론>은 아예 읽어볼 생각도 하지 않고 살았다. 물론 책은 가지고 있었다. 7북표지 챌린지의 제물로 삼기에 이만한 책이 있을까 싶었다. 오늘 아침부터 바로 읽기 시작했다.

 

바로 전에 괴짜 논객 <아레티노 평전>을 읽어서 그런지 격랑이 휘몰아치던 15세기와 16세기 사분오열된 이탈리아가 바로 연상됐다. 물론 그전에 체사레 보르자 등등에 대한 글을 충분히 읽어서 이탈리아 북부 롬바르디아와 마키아벨리의 고향 피렌체가 위치한 토스카나를 둘러선 프랑스와 에스파냐 그리고 교황권의 각축의 이해를 위한 충분한 독서 근육이 준비되어 책장이 술술 넘어갔다. 역시 책은 이렇게 다 읽을 때가 있는 법이지.

 

, 물론 그전에 르네상스의 또 다른 문제적 인간 니콜로 마키아벨리에 대해서도 알 필요가 있어 네이버캐스트의 도움을 받았다. 내가 보기에 마키아벨리는 공화국 피렌체의 실질적 지배자였던 메디치 가문의 눈에 들어 고위직 관리로 활약하고 싶었으나, 그 때마다 줄을 잘못 서는 바람에 결국 하위관리 신세로 자신의 웅대한 꿈(?)을 펼쳐 보지 못하고 세상을 떴다. 어쩌면 춘추시대 각국을 주유천하했던 공자 같은 인물이라고 해야 할까. 설파하는 이상은 좋지만, 현실에 도입하기에는 좀 거시기한.

 

게다가 후대에는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악덕의 상징 같은 인물로 그려져 두고두고 욕을 먹지 않았던가. 하지만 그가 저술한 희대의 저서 <군주론>을 읽어 본다면 그에 대한 평가가 달라지지 않을까 싶다. 왜 우리들은 저자의 생각과 주장이 담긴 저술을 읽지 않고, 다른 이들의 평가에만 의존하는가. 어쩌면 시간과 공력이 필요한 지적 수련에 너무 투자를 하지 않아 발생하는 괴리와 오류가 아닐까 싶다.

 

책의 띠지를 보면 인간본성과 권력 투쟁에 대한 심오한 통찰이라는 아주 그럴싸한 문구를 새겨 놓았다. 책을 읽다 보니 충분히 공감이 간다. 마키아벨리의 <군주론>은 명백하게 일반인이 아닌 군주에게 헌상된 책이다. 프랑스와 대결하기 위해 외세인 에스파냐를 불러들인 베네치아는 결국 롬바르디아 전역에서 소소한 이익을 거둘 수밖에 없었던 한계에 대해 명철한 분석가인 마키아벨리는 정복과 통치/지배는 전혀 다른 문제라는 점을 명확하게 논증한다.

 

정복 지역에 대한 영구적 지배를 위한 마키아벨리의 고언은 냉정하지만, 새겨들을 만하다. 우선 철저하게 기존의 지배층을 소멸시켜야 한다. 다시 반란을 도모할 수 없게 만들어야 한다는 주장이다. 군대는 정복에는 필요하지만, 지배에는 이주민들을 이용해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현지인들을 동화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페르시아를 정복한 알렉산드로스가 취했던 정책이 아닌가. 중앙집권화된 투르크나 페르시아의 경우, 집권은 어렵지만 통치는 상대적으로 용이했다고 분석한다. 반대로 봉건제도가 발달한 프랑스의 경우, 집권은 쉬웠지만 수시로 발생하는 반란으로 통치의 지속은 난망했다는 것이다. 현대에도 적용이 가능한 이야기가 아닌가. 기득권층을 포섭하기 위해서는 채찍만으로 가능하지 않다는 말이다. 물론 이상적인 이야기지만, 실천에 있어서는 거의 불가능하지 않나 싶다.

 

마키아벨리가 제시하는 통치의 마지막 방법은 아예 본거지를 통째로 옮기는 방식이다. 중세를 끝장낸, 오스만투르크가 콘스탄티노플을 정복한 뒤에 아예 수도를 비잔틴 제국의 중심으로 옮기지 않았던가. 본거지 이전의 이점으로는 반란의 신속한 진압과 기존 지배계층을 대신한 새로운 권력에 대한 상징을 들 수 있을 것이다.

 

사분오열된 이탈리아 통일의 대업을 이룰 인재로, 마키아벨리가 <군주론>의 모델로 삼았다는 교황 알렉산데르 6세의 서자 체사레 보르자에 대한 이야기와 분석도 또한 흥미진진하다. 자수성가해서 군주의 자리에 오른 밀라노 공국의 프란체스코 스포르차 같은 입지전적 인물이 있는가 하면, 체사레 보르자처럼 순전히 아버지의 끗발에 포르투나 덕분에 승승장구한 캐릭터도 존재했다. 알렉산데르 6세 재위 기간, 아버지의 바람대로 프랑스의 지원을 얻어 로마냐와 우르비노 공국을 장악하는데 성공했던 냉혈한 체사레 보르자는 아버지 사후 운이 다하면서 결국 풍운아다운 인생을 마감하고 만다. 마키아벨리는 체사레 보르자의 아버지 알렉산데르 6세가 선종한 뒤, 체사레 보르자가 충분히 미래에 자신의 적이 될 교황 율리우스 2세가 콘클라베에서 선출되지 못하게 할 수 있는 힘이 있었지만 그러지 않았기에 결국 자신의 몰락을 자초했다고 분석한다.

 

스스로 창업에 성공한 이의 성공은 그대로 포르투나의 바람을 타고 쉽게 이어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고 순전히 운발로 성공을 거둔 체사레 보르자 같은 경우에는 좀 더 특별한 관리가 필요했다고 마키아벨리는 주장한다. 대부분의 예언자들은 성공을 거둔다. 하지만 무장한 예언자가 성공을 거둘 확률은 더 높아진다. 단적인 예로 레닌과 마오쩌둥을 들 수 있지 않을까. 나의 실력이 온전하게 나의 것인지 아니면, 인맥이나 화려한 웅변술을 이용해서 얻어온 것인지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런 점에서 마키아벨리는 군대의 중요성, 다시 말해 무력이 가지는 당위성에 대해 설파한다. 상대방을 강제할 수 있는 힘의 원천을 나는 가지고 있는가라고 묻는다. 현대 사회에서는 금전이라는 형태로 환전될 수 있겠지만, 혼란의 시대에서는 역시 무력이 최고라는 말일까.

 

어쩌면 마키아벨리는 당대 유행하던 용병의 폐해를 일찍이 깨닫고 근대국가가 마련한 상비군 시스템의 필요성을 먼저 깨달은 선각자일 지도 모르겠다. 국가나 민족에 대한 희생이나 충성심 대신 오직 돈으로 움직이는 라이슬로이퍼(스위스 용병들)가 군대의 주력이던 시절이 바로 르네상스 시대였다. 그나마 근대국가의 틀을 갖춘 프랑스나 에스파냐 군대를 상대하던 이탈리아 용병집단은 평화 시에도 전주(錢主)인 군주를 약탈하고, 전시에는 전시대로 상대방을 약탈한다는 마키아벨리의 통찰 섞인 유머에 정말 빵 터지고 말았다.

 

저자는 군주가 민중에게 베푸는 시혜에 대해서도 통 크게 쏠 것이 아니라, 찔끔찔끔 베푸는 방식을 권한다. 그게 베푸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에게 효과가 더 크다나. 알쏭달쏭한 말이다. 그리고 후대에 큰 오해를 받게 되는 마키아벨리의 주장인 군주는 악행을 서슴지 말아야 한다는 주장에서는, 큰 덕을 이루기 위해 불가피하게 치러야 하는 악행의 수행에 있어 신속하고 최소한의 비용으로 할 것을 주문한다. 전쟁이 그렇지 않은가. 모름지기 군주는 전쟁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우선 그전에 먼저 자신의 실력을 파악하는 것이 중요하지 않을까. 먹고 먹히는 근세 초 르네상스의 전장에서 압도적인 병력으로 거세게 밀어 붙이는 적을 상대하면서, 자신의 영토를 지키기 위해 무조건 농성전에 돌입하는 게 상책이었을까? 가장 폭력적인 정치 행위인 전쟁에서 오로지 금전적 대가를 바라고 전투에 참가하는 용병들을 얼마나 믿을 수 있단 말인가. 이탈리아가 오늘날 이 꼴이 된 것도 상당 부분은 용병들에게 전투를 맡긴 탓이라는 분석도 뒤따른다.

 

어쨌든 마키아벨리에게 군주란 민중의 사랑과 두려움을 동시에 갖는 그런 존재일 필요가 있다고 역설한다. 어떻게 보면 그가 심혈을 기울여 저술한 <군주론>은 난세에 필요한 처세술로도 읽힐 수가 있겠다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군주론>에서 픽업한 중요한 주제는 바로 균형감각이다. 선을 넘지 않는 냉정한 판단력이야말로 난세의 군주에게 가장 필요한 덕목이다. 군주는 필요에 따라 악행을 수행해야 하는 임무도 가지고 있다. 또 때로는 대중에게 혐오의 대상이 되기도 해야 한다. 그런 모든 임무를 한 몸에 지녀야 하는 게 군주, 아니 어쩌면 권력의 속성일 지도 모르겠다.

 

로마시대에까지 거슬러 올라가면서 아레나에 직접 검투사로 출전해서 군주의 품위를 떨어뜨린 콤모두스에 대한 비유부터 시작해서, 지나치게 백성들 대신 군대를 후대하다가 결국 호위군에게 피살당한 어리석고 우매한 로마 황제들의 열거는 어지러울 정도다. 그러니 제발 피렌체의 로렌초 메디치는 중용의 미덕을 지키고, 자국 병사들을 양성해서 통일 이탈리아의 대업을 이루길 바란다는 식의 권고로 <군주론>은 마감이 된다.

 

마키아벨리는 어디선가 분명 충간과 아첨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는 덕목에 대해서도 일장 연설을 늘어놓았던 것 같은데, 어느 순간 그의 모습에서 메디치 가문을 그야말로 분열된 이탈리아를 통일할 구세주로 묘사하고 있는 게 아닌가. 게다가 지금이야말로 새로운 군주에게 유리한 형국이라는 곡학아세의 자세로 달려드는 걸 보니 결국 냉철한 분석가라고 자처하던 마키아벨리 역시 속물적 인간에 지나지 않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준다.

 

도대체 무슨 실력으로 피렌체가 발루아 왕조가 이끄는 서방의 대국 프랑스와 신성로마제국 황제의 독일 그리고 세속화된 교황권을 전가의 보도처럼 휘두르는 로마 교황을 상대로 해서 약탈로 쑥대밭이 된 롬바르디아를 수복하고, 토스카나와 나폴리를 되찾겠다는 망상을 마구 퍼트린단 말인가. 마키아벨리는 자신의 저술에서 무엇보다 실력을 기르라고 그렇게 강조했는데, 자신이 가진 실력 이상을 요구하는 언어도단의 주인공이 되어 버리고 말았다.

 

결국 마키아벨리의 진언은 로렌초 메디치에게 채택되지 못했고, 유비를 도와 천하를 제패하려던 웅대한 꿈을 꾸던 제갈공명처럼 마키아벨리 역시 피렌체의 하급 공무원으로 생을 마감하고 말았다. 뭐 그렇게 가는 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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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0-03-05 11: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의 티치아노 그림이랑 군주론이랑 어울려요~ 아. ㅠ 이 책 갖고싶네요 ㅠㅠ과거를 통해서 현재를 신중하게 처신한다. 미래의 행동이 추하지 않기위해

레삭매냐 2020-03-05 11:47   좋아요 1 | URL
아마 이 책을 절판되고 신판으로 나온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티치아노의 그림이었군요 표지가.

그전에 읽은 아레티노의 그림도 티치
아노가 그렸다고 하던데.

전 아주 오래 전에 서울국제도서전
인가에서 을유문화사 부스에서 데려온
것으로 기억합니다.

도서 할인행사를 하지 않아 그 다음부
터는 안가게 되네요 ㅋㅋㅋ
 
아레티노 평전 - 르네상스기 한 괴짜 논객의 삶 역사도서관 교양 12
곽차섭 지음 / 길(도서출판) / 2013년 7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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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일 동안의 7표지 챌린지로 읽기 시작한 토스카나 아레초 출신의 16세기 베스트셀러 작가 피에르토 아레티노의 평전을 읽었다. 그런데 왜 내가 이 책을 샀는지 모르겠다. 마침 서가에서 읽지 않은 책이 눈에 띄었고, 바로 잡아서 챌린지를 시작했고 책도 마저 읽었으니 일거양득이 아닌가.

 

콜럼버스가 아메리카 대륙에 상륙하던 해인 1492년 이탈리아 토스카나 지방의 아레초에서 태어난 피에트로 아레티노는 태생부터 르네상스인 다운 출생의 비밀로 점철되어 있었다. 그는 평민 출신 구두장이의 아들일 수도 그리고 유력 가문의 서자일 수도 있다고 한다. 하긴 500년 전의 인물에 대한 전기다 보니 정확성보다는 추정으로 갈 수밖에 없지 않을까. 그런 점이 역사 평전의 재미를 더하는 게 아닌가. 저자의 입장에서 본다면 명확한 기록이 없다는 게 두통을 유발할 수도 있지만, 또 그만큼 자신의 주관적 아이디어를 집어넣을 수 있는 빈 공간이 생긴다는 것이니 운신의 폭을 넓힐 수도 있지 않나 싶다.

 

미래의 속어를 구사하는 통속작가로 필명을 날리게 되는 아레티노는 평민 출신답게 당대 식자들의 언어인 라틴어나 그리스어를 배우지 못했다. 아마 아레티노 같은 필력을 가진 이가 그런 고급 언어까지 익혔다면 아마 단테에 버금가는 작가의 반열에 오르게 되지 않았을까. 사실 나도 이 책을 읽기 전까지만 해도 아레티노가 도대체 무얼 하는 작자인지 전혀 알 도리가 없었다. 우연한 독서는 이렇게 새로운 지식의 길로 독자를 인도하는 법이다. 그런 게 바로 책읽는 즐거움이 아니겠는가.

 

뛰어난 현실감각을 지닌 아레티노는 페루자를 거쳐 로마로 향하면서, 태양을 쫓는 해바라기처럼 권력 지향적이고 무엇이 자신에게 도움이 되는가를 본능적으로 깨달은 르네상스 전성기를 살아낸 인물이었다. 아마도 유력자의 후원을 받아 페루자에서 시집을 발표한 아레티노는 독자적 경험과 독서를 바탕으로 풍속작가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아레티노가 빛을 보기 시작하는 장면은 아고스티노 키지의 가신으로 활약하기 시작하면서다. 뛰어난 문재와 누구와도 지낼 수 있는 천성적 친화력을 바탕으로 아레티노는 인맥을 쌓고, 그 인맥을 통해 얻은 정보를 바탕으로 군주를 벌하는 채찍으로 거듭나게 되는 과정이 흥미롭게 진행된다.

 

아레티노가 정력적으로 활동하던 16세기 초반은 중세 교회의 속박으로 해방된 인문주의 정신이 뜨겁게 타오르던 시기다. 아레티노 자신은 가톨릭 신앙의 기반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지만, 스스로 갈고 닦은 문재를 바탕으로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군주들(카를 5, 프랑수아 1세 그리고 헨리 8)을 비롯해서 율리우스 2세나 클레멘스 7세 같은 교황들에 이르기까지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았다.

 

문제 뿐 아니라 이재에 밝았던 모두까기 신공의 대가 아레티노는 이미 당대 문인들이 추앙해 마지않는 시대의 아이콘으로 권력자들을 협박해서 후원금을 뜯어내는데도 일가견이 있었다. 완벽한 인간은 존재하지 않는다. 자신이 가진 정보력을 동원해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가지고 있는 단점을 가지고 정계와 교계 지도자들을 들었다 놨다하는 필력을 자랑한 게 바로 아레티노였다. 아레티노의 성공 뒷면에는 구텐베르크가 개발한 활자인쇄술의 발전과 루터가 독일에서 시작한 종교개혁이라는 역사적 사건들이 존재했기에 가능했다.

 

평전의 앞에 소개되는 <체위><음란한 소네트>로 근대판 포르노그래피의 신호탄을 쏘아 올리기도 했다. 그랬던 그가 로마에서 교황과 그들의 측근들과의 불화(심지어 암살위협)로 베네치아로 망명한 뒤에는 <예수의 수난> 같은 그야말로 신심 넘치는 작품들을 발표하기도 했다. 동서양의 무역을 독점하면서 상업으로 부흥한 자유도시 베네치아는 르네상스의 자유인 아레티노에게 그야말로 딱 맞는 공간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서민 출신 아레티노는 자신의 저술활동으로 막대한 돈을 긁어모아, 관대하게도 자신보다 못한 처지의 평민들을 도왔다. 평전의 어디선가 등장하는 자신의 집이 여관인 줄 알았더니만 병원이더라는 말은 압권이었다. 그의 고용인이었던 키지 같은 거부들은 자신들의 부를 과시하는데 급급했지 피고용인인 아레티노처럼 베푸는 데 인색하지 않았던가. 왜 귀족들은 아레티노의 그런 관대함을 미덕이라고 칭송하지 않았을까. 자신이 부리는 하인들에게 너무 관대해서 자신의 초상화를 그린 티치아노 같은 이들이 눈살을 찌푸렸다고 했던가. 군주들을 기묘하게 이용해 먹으면서도, 절대로 그들의 가신이나 정신 같은 종노릇은 하지 않겠다는 아레티노의 기백이 돋보였다.

 

곽차섭 교수의 아레티노 평전에서 가장 백미는 바로 르네상스 예술의 총아라고 할 수 있는 미켈란젤로의 걸작 <최후의 심판>에 대한 예술비평가로서 아레티노와 벌인 설전이다. 1541년 공개된 시스티나 성당의 <최후의 심판>에서 인벤티오네와 테코룸의 격돌을 마주한다. 이전까지 모든 학문과 예술은 기독교의 시녀 같은 존재였다. 르네상스 인문주의 정신의 도래로 아름다움에 대한 강조가 전면에 나서게 되었지만, 여전히 종교적 적절성과 신심의 고양이라는 종교가 보는 입장에서의 예술의 위치는 고정불변이었다.

 

그런 마당에 미켈란젤로 부오나로티가 그린 수많은 나신들이 등장하고, 수염 없는 젊은 예수가 등장하는 <최후의 심판>은 종교적 보수주의자들의 가슴에 불을 질렀다. 그 비난의 최전선에 선 이들 중의 하나가 당대 최고의 논객이자 예술비평가로 자처한 피에트로 아레티노였다. 어쩌면 미켈란젤로는 자신의 최고 걸작에서 시대정신을 앞서는 인벤티오네를 구사한 것인지도 모르겠다.

 

가톨릭의 부패와 위선을 공격하던 루터를 필두로 한 개신교의 종교개혁을 방어하며 점차 보수적으로 변하는 시대의 흐름을 아레티노는 그 누구보다도 앞서 캐치해낸 것일 지도 모르겠다. 흥미로운 지점 중의 하나는 아레티노 역시 <체위><음란한 소네트>처럼 그야말로 당시로서는 받아들일 수 없는 그런 주제를 다루면서도 자신은 정당한 언어로 구사했기에 괜찮다며 스스로에게 면죄부를 발부하는 장면이었다. 정말 흥미롭지 않은가. 결국 1563년 트렌토 공의회의 결정으로 <최후의 심판>에 덧칠하는 결정이 내려졌다.

 

아레티노의 삶은 그야말로 질풍노도 같은 시대를 그린 한 편의 초상화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한 시대를 풍미했던 가치들은 더 이상 유효하지 않게 되었고, 영원한 도시 로마는 프랑스와 독일의 이탈리아 전쟁의 와중에서 독일 개신교 용병들에게 훗날 로마 약탈이라는 알려진 비극적 사건의 무대가 되었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르네상스 자유인 아레티노는 군주들과 교황의 비호 아래, 무시로 진영을 바꿔가며 주제를 가리지 않는 비판으로 권력자들에게 날카로운 채찍을 휘둘러댔다. 매문(賣文)이라는 기술로 돈을 번 선구자라는 점도 잊어서는 안 될 것이다. 이상은 혼돈의 시대를 냉철한 현실주의 감각으로 돌파해낸 문제적 인물 피에트로 아레티노 평전에 대한 감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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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tella.K 2020-03-03 15: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 저도 모르는 작가임다. 포르노그래피의 신호탄이라니!
그도 그렇지만 이재에 밝았다고 하니 부럽네요.
작가가 부자가 되기가 쉽지 않을텐데 말임다.
잘 사 놓으셨네요.

근데 7일 동안 7표지 챌린지가 뭔가요?

레삭매냐 2020-03-03 16:53   좋아요 1 | URL
당최 제가 이 책을 왜 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 하지만 성공이었네요.

국내 연구자가 쓰신 글이라 번역서와
달리 술술 읽혔습니다. 어떤 번역은 정
말 읽지를 못하겠더라구요.

7일 7표지 챌린지는 지금 제가 인스타
에서 인친 분의 추천으로 진행하고 있
는 프로그램이랍니다.

아무런 설명 없이 좋아하는 책의 표지
를 포스팅하는 거랍니다. 재밌더라구요.
독서의 의욕도 생기고, 이렇게 쟁여둔
책도 읽고 말입니다.

2020-03-03 15: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3-03 16:54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20-03-03 18: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르노그래피나 에로티시즘 문학의 역사를 논할 때 반드시 언급되는 사람이 아레티노예요. 이 책이 나온 사실을 오늘 처음 알았어요.

페이스북에도 ‘7일 7표지 챌린지’를 하는 사람들이 있어요. 우연히 페이스북에 접속했는데 지인이 이 챌린지를 하고 있었어요. ^^

레삭매냐 2020-03-03 19:42   좋아요 0 | URL
아레티노 평전이 어찌하여 고수님의
레이더망을 피해 갔는지 도무지 알
도리가 없네요 :>

저는 오늘로 4일차랍니다. 이제 삼일
남았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