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미룰 수가 없어 1,752쪽 짜리 대장정을 시작했다. 그전에도 이미 1권과 2권을 읽고 3권에서 멈춘 적이 있어 더 조심스럽다. 바로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이단아, 시한폭탄이라는 별명의 로베르토 볼라뇨의 역작 <2666>에 대한 이야기다.
책을 읽다가 과연 그전에 한 번 읽어서 그런지 기시감도 들고 수월하게 책장이 넘어간다. 하지만 방심하지 말지니. 이제 겨우 초반전일 뿐이다. 후반으로 갈수록 이야기는 배배 꼬이고 더 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면서 나의 혼을 빼놓을 것이다.
내러티브의 중심에는 1920년대 프로이센 출신의 독일 출신 소설가 베노 폰 아르킴볼디가 있다. 아니 그의 정체는 여전히 안개 속에 가리워져 있다. 경제적으로 하나가 되었던 유럽의 중추를 이루는 프랑스, 스페인, 이탈리아 그리고 영국 출신 학자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그들을 하나로 이어주는 매개체는 바로 미지의 작가 아르킴볼디다. 바로 이 지점에서 볼라뇨는 문학의 정체성에 대한 정밀한 타격을 가한다. 우리는 잘 알려지지 않은 미지의 작가에 대한 태생적 호기심을 지니고 있다. 그 작가가 잘 알려지지 않았다면 그럴수록 그에 대한 호기심을 증폭될 것이다. 볼라뇨처럼 요절한 작가라면 더더욱 그럴 것이다.
도대체 볼라뇨는 생전에 얼마나 많은 작품들을 써놓았기에 사후에도 계속해서 미발표된 책들이 쏟아져 나온단 말인가. 어떤 점에서 본다면 자신이 바로 방대한 메타픽션 <2666>의 샘플일 지도 모르겠다. 각각 국적을 달리하지만 아르킴볼디를 사랑하는 장클로드 펠티에, 피에르 모리니, 마누엘 에스피노사 그리고 리즈 노턴이 빚어내는 서사는 진정한 의미에서 문학의 세계사란 무엇인가란 질문을 독자에게 던진다.

그들에게 언어 따위는 전혀 장벽이 아니다. 독자는 아르킴볼디의 문학 세계에 대해 네 명의 비평가들이 나누는 대화와 사유를 바탕으로 짐작할 따름이다. 도대체 무엇이 그가 작품들이 유니크한 무언가를 유지하면서 연구자들을 꼬이게 하는지 나는 궁금하다. 그 또한 볼라뇨가 정밀하게 설계한 소설적 장치라고 한다면 또 할 말이 없을 것 같다.
중심에 미지의 아르킴볼디라는 기둥이 서 있다면, 서브텍스트로는 예상한 대로 영국 출신 리즈 노턴을 두고 세 명의 지식인들이 벌이는 연애 경쟁이 존재한다. 그들은 지식인들답게 거리의 사나이들처럼 거칠게 애인을 쟁취하기 위해 주먹질을 하지는 않는다. 리즈 노턴을 존중하면서 충분한 거리와 시간을 두고 나름의 전략을 구사한다. 그리고 보니 다발성 경화 증세로 휠체어를 탄 모리니는 육체적인 이유 때문에 초반 경쟁에서 탈락한 것으로 보인다.
다수의 학회에서 아르킴볼디에 대한 연구와 수많은 대화가 진행되는 동안, 독자는 과연 그의 정체가 무엇인지에 대해 궁금해 하기 시작한다. 그렇다면 독자는 볼라뇨의 설계에 제대로 걸려든 것이다. 펠티에와 에스피노사는 함께 런던을 찾았다가 자신들의 유사 애인이자 동료, 친구를 모욕하는 파키스탄 택시 운전사를 흠씬 두들겨 패기도 한다. 모두에게 숨어 있는 야성과 폭력성이 드러나는 순간이라고 해야 할까. 에드윈 존스라는 이름의 자신의 오른손을 스스로 자른 행위예술가에 대한 이야기도 빈번하게 등장하는데, 지금까지 진도로는 알 도리가 없다. 아무 이유 없이 등장했을 리가 없을 텐데 말이다.
어디선가 아르킴볼디가 멕시코 소노라 인근에 있다는 정보를 입수한 펠티에와 에스피노사 그리고 리즈는 산타테레사를 찾게 된다. EU 출신 네 명의 지식인들이 문학의 세계사를 대표한다면, 산타테레사라는 공간은 NAFTA라는 조건 아래 멀지만 가까운 이웃이 되어 버린 미국과 애증의 관계를 유지하는 자본과 노동을 유추하게 만든다. 수십 수백명의 여성을 상대로 한 연쇄살인이 벌어지는 곳이 바로 산타테레사였다. 미국 애리조나 주의 국경 부근의 오지에서 아르킴볼디가 출현했다고? 너무 부족한 단서와 정보 때문에 비평사 삼총사들은 자신들이 어쩌면 헛수고를 하고 있는 게 아닌가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하지만 우리의 위대한 볼라뇨 작가는 감으로 그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는 아르킴볼디가 그곳에 분명 있었노라는 확신을 그들에게 심어준다. 물론 그래야 이야기가 진행되니 말이다. 어쨌든 볼라뇨가 악의 본질을 구체적으로 탐구하게 되는 공간인 산타테레사를 찾은 비평가들은 제각각의 시간을 보낸다. 리즈는 아무리 생각해봐도 의미 없어 보이는 산타테레사를 떠나 모리니를 찾아가고, 펠티에는 계속해서 아르킴볼디의 책들을 읽어댄다. 그리고 유일하게 스페인어를 할 줄 아는 에스피노사는 거리에서 카펫과 잡동사니를 파는 레베카라는 이름의 소녀를 만나 사랑에 빠진다. 그리고 아무도 예상하지 못했던 현지의 칠레 출신 아르킴볼디 전문가 오스카르 아말피타노 교수가 다음 이야기의 주자로 등장한다.
어떤 점에서 본다면 볼라뇨의 메타픽션 <2666>의 첫 번째 이야기는 문학의 세계화에 대한 판타지일 지도 모르겠다. 네 명의 비평가들은 실존이 계속해서 의심되는 프로이센 출신 작가의 환영을 쫓는다. 그들은 미지의 작가에 대한 책사냥꾼들인 동시에, 판타지를 자신들만의 사유로 풀어내는 몽상가들이다. 게다가 절대 선을 넘지 않은 러브 라인까지 끌어 들이면서 이야기를 복잡하게 만들어낸다.
베노 폰 아르킴볼디의 책을 읽기 위해서 그들은 우선 독일어로 된 문장을 독해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을 갖추고 있어야 한다. 세계 공용어가 된 영어가 아닌 독일어라니! 지금도 세계 어디선가는 영문학 관련 학회가 열리겠지만 지역어일 수밖에 없는 독일어 문학에 자신의 시간과 정열을 쏟는 이들을 쉽게 만나거나 이해할 수 있을 것인가. 어쩌면 문학 자체가 그런 것일 지도 모르겠다. 아무도 사는 사람이 없지만 꾸준하게 자신만의 방망이를 깎던 노인의 마음이 그럴까.
문학이 가져다 줄 상업적 성공을 예견하는 사람이라면 노벨상 후보로까지 언급되는 아르킴볼디처럼 철저하게 자신의 흔적을 지우고, 대중 앞에 나서지 않을 위인이 얼마나 될지도 궁금하다. 어쩌면 세속의 맘몬에게 포로가 된 문인들에 대한 볼라뇨식 저격일 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볼라뇨는 슬며시 소설의 본격적인 무대가 펼쳐질 멕시코 소노라 산타테레사로 비평가들이 아르킴볼디를 추적한다는 핑계를 대고 독자를 유인한다. 다음 장의 화자/이야기꾼은 칠레 출신 철학 교수 오스카르 아말피타노다. 두 번째 인스톨도 거의 다 읽었다. 이제 막 첫 번째 시도를 넘어설 태세다. 나의 <2666> 읽기는 여전히 순항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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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권] 인생은 하잘 것 없다네

예전에 볼라뇨의 메타픽션 <2666>을 2권까지 모두 읽었지만 결국 세 번째 권에서 완독에서 실패한 이유를 곰곰이 복기해봤다. 우선 왜 출판사는 각권의 페이지수를 연달아 붙인 걸까. 단권으로 차근차근 공략했다면 난 이 책을 수년 전에 읽었으리라. 갈수록 페이지 수가 늘어나는 걸 보며 어느 순간 질려 버린 게 아닐까. 핑계일지도 모르겠지만. 다른 하나는 읽을 때마다 리뷰를 작성하지 않은 점도 짚어할 것이다. 그래서 이번에는 읽는 대로 족족 리뷰를 남기기로 했다. 아니 책을 읽는 중에도 쓰리라.
그렇다 모든 목적지는 멕시코 소노라의 산타테레사로 귀결된다. 그리고 두 번째 권의 주인공은 1권 말미에 등장했던 산타테레사 대학에서 철학을 가르치는 칠레 출신 오스카르 아말피타노 교수다. 하지만 그건 의미가 없다. 화자의 시점을 계속해서 바뀌고, 누구의 목소리를 따라 가야 하는지 종종 잊어버릴 때가 많다.
우리의 아르킴볼디 삼총사는 1권에서 그가 우울한 성향을 지닌 동성애자일 지도 모른다는 우려를 아마 했었지. 홀로 딸 로사를 키우며 지내는 아말피타노 교수의 불행한 결혼생활에 대한 스케치가 등장한다. 그런데 문학의 세계화 혹은 악의 본질을 파헤치기 위한 볼라뇨의 대장정에서 갓난쟁이 딸을 버리고 자유연애를 찾아 유사애인 임마와 떠난 롤라가 그리는 삶의 궤적을 그리는데 작가는 왜 그렇게 많은 부분을 할애하는지 나는 솔직히 말해서 이해가 가지 않았다.
롤라가 몬드라곤 정신병원에 갇힌 시인을 찾아 떠나는 여정은 정말 기이했다. 그 와중에 만난 남자들은 하나 같이 롤라를 탐한다. 대학교수 남편과 보장된 평안한 삶의 터전이었던 바르셀로나를 떠나 도로에서 히치하이킹을 하던 롤라는 정신병원 부근에서 만난 운전사 라라사발과의 풋사랑을 뒤로 하고 배가본드의 삶을 계속한다. 그 와중에도 남편 아말피타노에게 편지를 하는 이유는 도대체 무엇인가. 생채기에 덧나라고 소금을 뿌리는 격이다.
거주와 노동의 자유가 보장된 하나의 연합체 EU는 방랑자 롤라에게 무한한 자유를 보장해 준다. 프랑스 국경을 넘은 롤라가 자신보다 못한 이들을 돕는 이타적인 모습에 나는 놀랐다. 빛의 도시 파리에 자리잡고 브누아라는 아들을 낳은 롤라는 결국 딸 로사와 남편 아말피타노를 보기 위해 바르셀로나를 찾는다. 그리고 그 이유는 예상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말피타노는 페레스 교수의 가족과 함께 로사를 데리고 짧은 여행길에 나선다. 불타는 석양을 보면서 새빨간 고추가 끓고 있는 가마솥 같다고 했던가. 아말피타노를 밤마다 찾아오는 아버지의 영혼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이제 슬슬 본격적으로 산타테레사에서 희생되는 수많은 여성들에 대한 이야기가 언제라도 등장할 것 같은 그런 분위기다.
멕시코 오지의 지식인 사회는 산타테레사 대학 교수들 사이에 모습에서도 슬쩍 내비친다. 여자들이 계속해서 실종되고 시체로 발견되는 와중에서도 지식인들은 자신들의 사회적 책무는 외면하고 야회를 즐긴다. 어쩌면 아말피타노도 예외는 아니리라. 디에스테의 기묘한 책을 뒤샹 스타일로 카피해서 빨랫줄에 늘어놓는 장면, 아라우코 인디오의 기묘한 텔레파시에 대한 소개 그리고 멕시코에서 가장 좋은 메스칼(로스 수이시다스)을 소개해 주겠다는 총장 아들 마르코 안토니오 게라의 등장까지 도대체 서로 무슨 연관성을 가졌는지 좀처럼 실마리를 제공해 주지 않는 볼라뇨가 나는 그저 원망스러울 따름이다. 아, 이래서 수년 전에도 완독을 못하고 실패했던가.
날건달 같아 보이는 게라가 게이 행세를 하며 시야말로 오염되지 않은 무엇이라고 항변하고, 최후의 공산주의 철학자로 보리스 옐친이 등장하는 엔딩은 정말 압권이었다.
이제 앞으로 세 권이 남았다. 부디 모두 다 읽게 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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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권] 진실을 마주할 준비가 되었는가
비평가와 철학 교수들이 차례로 등장해서 비극의 현장인 멕시코 소노라의 산타테레사로 독자를 인도한다. 뭐가 좀 빠진 것 같지 않나? 그렇다 우리는 사건의 실체를 추적할 저널리스트가 필요하다. 구원은 미국 뉴욕의 할렘에서 온다.
어머니가 죽었다. 그리고 한 줌의 재가 되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미국 출신 저널리스트의 이름은 오스카 페이트다. 뉴욕의 흑인들을 위한 잡지사에서 편집 기자로 일하던 페이트는 자신의 이름(Fate)답게 볼라뇨가 소설의 주 무대로 삼은 산타테레사로 향할 운명이다. 멕시코 국내를 떠들썩하게 한 권투 경기 중계를 위해, 갑자기 사망한 잡지사 동료를 대신해서 애리조나 투산을 거쳐 산타테레사에 투입된다.
조금 장황하게 진행되는 배리 시먼의 다섯 가지 주제를 다룬 연설까지 읽었던가. 나머지는 이제부터 이전에 만나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그전에 아마 그 부분까지 읽었던가. 기억 저 너머에서 희미하게 되살아나는 기억을 더듬으며 거침없이 읽어나가기 시작한다. 블랙 팬서 단원이자, 감옥에서 다양한 돼지 갈비 레시피를 소개하는 요리 비법을 개발했다고 했던가. 흑인 형제들을 상대로 한 연설과 강연으로 밥벌이를 하며 생계를 잇는 남자 배리 시먼의 이야기가 소설 <2666>에서 과연 무슨 의미를 가지는지 나는 묻지 않을 수 없다. 좀 위험하다, 묻지도 말고 따지지도 말고 그냥 읽어라. 잘못하면 또 중간에서 중단하는 수가 있으니.
어쨌든 결론에 가서는 책을 읽어야 한다는 강력한 유용성에 대한 강의를 마무리지었던가. 그가 옥중에서 볼테르를 읽었다는 사실 앞에서는 정말 빵 터지지 않을 수가 없다. 이것 또한 볼라뇨가 독자를 위해 세심하게 준비한 블랙 유머의 한 단락이란 말인가. 독자들이여, 감옥에서 유용한 시간을 보내고 싶다면 부디 책을 읽으시라. 물론 숙련된 책쟁이로서 공감하는 바이다.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몽환적인 그런 드라이브 끝에 페이트는 카운트 피케트의 라이트 헤비급 경기를 취재하기 위해 산타테레사에 도착한다. 그리고 페이트는 자신에게 주어진 임무인 카운트 피케트의 경기 취재보다 산타테레사 마킬라도라에서 일하는 여자들이 연쇄살인당하고 있다는 비극적 뉴스를 접하게 되고, 해당 사건을 르포르타주 형식의 기사로 써보겠다고 뉴욕의 부장에게 연락하지만 보기 좋게 거절당한다. 동시에 예전에 그가 취재했던 브롱크스에 남은 마지막 미치광이 공산주의자에 대한 기사처럼 말이다. 뉴욕의 부장은 오로지 인종적 차원에서 사건이 잡지에 게재할 만한 지에 대해서만 관심이 있을 뿐이다.
뉴욕의 부장에게 거는 전화를 우연히 듣게 된 현지 기자 과달루페 론칼은 페이트에게 자신의 해당 사건의 담당 기자로 배치되었으며, 자신이 그의 취재를 도울 수 있다는 말을 흘린다. 동시에 유력한 용의자가 산타테레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그는 그링고(미국 놈)이라나. 그전에 만난 영화광 찰리 크루스와 대화에 등장하는 로베르트 로드리게스 이야기에서는 무려 할리우드 키드를 꿈꾸던 시절이 떠올랐다. 영화 제작비가 없어서 자신의 피를 팔아 전설의 <엘 마리아치>를 만들었다는 썰이 있었지 아마. 한 때 좋아하던 우디 앨런의 영화에는 기이하게도 흑인이 거의 등장하지 않는다는 사실로 새롭게 깨닫게 됐다. 유대인 KKK 음모론은 항간에 떠도는 이야기의 채록이 아닐까 싶지만 말이다.
자 그리고 드디어 2부와의 연결점이 이루어질 시간이 되었다. 카운트 피케트의 권투 시합에서 페이트는 역시나 운명적으로 지상에 현현한 여신 로사 아말피타노와 만나게 된다. 이 시점에서 권투 경기에서 누가 이겼는가는 중요하지 않다. 철저하게 준비한 선수가 그러지 못한 선수를 링 위에서 싱겁게 때려 눕혔노라고 페이트는 기술한다.
아름다운 로사에 대한 페이트의 감정이 뒤섞인 매우 폭력적인 밤이 지나간다. 유사 애인 추초 플로레스의 손아귀에서 로사를 구해낸 페이트는 아말피타노 교수의 조력을 받아 로사를 데리고 미국 국경을 향해 출발한다. 도중에 과달루페 론칼을 다시 만나 산타테레사 감옥에 수감되어 있는 연쇄살인 용의자이자 미지의 인물을 만나게 된다.
볼라뇨는 미국 출신 흑인 저널리스트를 등장시켜 독자에게 과연 산타테레사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에 대한 자신만의 문학적 르포르타주를 시도한다. 한 때, 세계화는 인류에게 새로운 복음이자 소비의 신천지를 제공해 줄 거라는 신화가 존재했다. 하지만 신자유주의자들이 설계한 세계화는 자본에게는 국경 없는 무한한 자유를 선사했지만, 정작 상품을 생산하고 소비할 주역인 노동자들에게는 저임금과 장시간에 걸친 노동을 강요했다. 특히 멕시코같이 약탈적 자본주의가 횡행하고 스스로가 권력이 되어버린 제3세계 시민들의 경우에는 세계화의 과정에서 발생하는 부수적 피해들을 고스란히 감당해야 하는 처지로 내몰렸다.
NAFTA의 도입으로 활성화된 마킬라도라(보세임가공) 산업이 미래의 신성장 산업이라는 일부 주장들은 공허한 선전에 지나지 않았다. NAFTA의 과실은 미국의 다국적기업들에게 모조리 돌아갔고, 멕시코는 사회적 양극화와 공공 서비스의 붕괴라는 참혹한 사회적 대가를 치러야했다. 멕시코 농민들이 희생양이었는데, 볼라뇨는 그 중에서도 소설에서 묘사되는 것처럼 현재의 지옥 산타테레사에서 연쇄적으로 살해당한 여성들에 대한 르포르타주를 본격적인 무대에 올린다.
디킨즈 스타일의 수많은 캐릭터들이 등장하는 고난의 첫 세 토막의 이야기들을 읽고 나니 드디어 젖과 꿀이 흐르는 고지에 도달하게 되었다. 라틴 아메리카 문학의 이단아는 어쩌면 자신이 진짜 하고 싶은 이야기를 하기까지 철조망으로 둘러친 드높은 진입장벽을 그렇게 세워놓은 게 아닐까 싶다. ‘그래, 뭐 이 정도의 끈기라면 나의 이야기를 들을 자격이 있지’라고 말이다. 자랑스러운 마음이 들지 않을 수 없다. 문제는 지금까지 읽은 이야기들의 두 배 정도 되는 4권과 5권이 기다리고 있다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