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치 - 전민식 장편소설
전민식 지음 / 마시멜로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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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 대법원의 강제징용 판결에 대한 아베 일본 정부의 경제보복으로 일본과 경제전쟁으로 기해년 여름은 그 어느 때보다도 뜨겁다. 민간의 자발적인 일본 제품 불매운동, 안사고 안가기 운동이 전개되고 있다. 반성과 사과가 없는 전범국가 일본과의 평화공존은 과연 불가능한 것일까. 326년 전, 임진왜란이 끝나고 한 세기가 흐른 뒤 조종의 강토인 울릉도와 독도 지킴이에 나선 상인이자 어부 안용복의 이야기를 그린 <강치>를 읽으면서 문득 든 생각이었다.


예나 지금이나 조국을 위해 목숨을 바친 건 위정자들이 아니었다. 고종이나 순종이 국권이 침탈될 때, 백성을 위해 목숨을 버렸던가. 아니다. 동학운동으로 일본군에 맞서 싸운 건 농민들이었다. 임진왜란 때는 또 어떠했는가. 임금이 조정을 버리고 몽진을 가자, 의병이 나서서 왜군에 맞서 싸웠다. 위민이야말로 성리학을 주창하는 선비 사대부들의 가장 근본이 되어야 하는데 우리 역사에서 그런 모습은 거의 볼 수가 없었다. 평화 시에 양반 행세를 하며 반상의 도 타령하는 게 그네들의 모습이었다.

 

팩션인 <강치>의 역사성을 알아보기 위해 국역 조선왕조실록을 검색해 보는 수고도 마다하지 않았다. 숙종 연간에 등장하는 소설 <강치>의 주인공 안용복은 모두 11번 숙종실록에 등장한다. 1693년 계유년 봄에 울산에서 도해금지령을 어기고 울릉도에서 고기잡이를 하던 어부 박어둔과 안용복 2인을 꾀어 납치했다는 기록으로부터 이야기는 출발한다.

 

당시 39세의 외거노비 출신 상인이자 어부 안용복은 울릉도와 독도를 마음대로 출입하면서 등잔에 쓸 기름과 고기 그리고 가죽을 얻기 위해 독도에 사는 강치를 마구잡이로 살육하는 왜인들의 잔악한 행동에 경악을 금치 못한다. 조국의 자원은 물론이고 조종의 강토까지 자기네 땅이라고 우기는 왜인들에게 택견으로 저항해 보기도 하지만, 동료들을 구하고자 무력행사를 포기하고 순순히 납치되기에 이른다.

 

이어 오키섬, 요나고와 돗토리 그리고 나가사키와 쓰시마를 반년 동안 아우르는 간난신고를 겪게 된다. 그 와중에 쇼군에게 정식으로 항의를 하고 일본인들의 울릉도와 독도 출입을 금지하는 서계를 발급하는 쾌거를 이루기도 한다. 문제는 귀국길에 일본 본토를 지배하는 쇼군과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던 쓰시마 도주의 농간으로 서계를 강탈당하고 안용복과 박어둔은 본국 초량으로 귀환한다.

 

조국의 기개를 왜국에 가서 드높인 안용복이었지만, 지역을 담당하는 동래부사에게 안용복은 도해금지령이라는 지엄한 국법을 어긴 범죄자일 뿐이었다. 어디서 많이 본 장면이 아닌가. 충무공 이순신이 간신의 모함에 걸려 백의종군하게 되고, 임진왜란이라는 국난에 맞서 모든 것을 희생한 의병장들의 최후가 연상되지 않는가. 아무리 도해금지령이 조선의 백성을 지키기 위한 고육책이라고 하더라도 이건 아니다. 곤장 100대에 유배형까지 당하게 된 안용복의 심정이 과연 어땠을까.

 

사실 팩션 <강치>의 정점은 여기까지가 아니었을까. 쓰시마 도주의 악행에 대한 소송과 쇼군의 서계를 되찾겠다는 의지에서 실행된 두 번째 일본행은 무리에 가까웠다. 그리고 소설적 밀도도 현저하게 격감되는 느낌이 들었다. 저자는 기존의 시나리오를 바탕으로 해서 <강치>를 썼다고 하는데 조선 대표선수로 위장하기 위해 공직을 사칭하고, 두 번째로 도해금지령을 어기는 장면에서는 좀 납득이 되지 않았다.

 

귀국 후, 한양으로 압송되어 천민 출신으로 국법을 어기고 외교 문제를 초래한 안용복에 대한 처벌 문제로 조정은 두 파로 나뉘어 격론을 벌이는 장면은 대미를 장식할 만했다. 안용복의 사단을 일죄(사형)로 다스려야 한다는 영돈녕 윤지완의 주장도 일리가 있었다. 다른 나라도 아니고, 성리학적 질서를 최우선으로 하는 조선에서 국가 질서를 어지럽힌 안용복을 용서한다면 추후에 벌어질 기강문한을 어떻게 처리할 거냐는 주장도 아주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반대파로 등장한 영부사 남구만은 안용복을 처형할 경우 일본의 주장을 받아들이는 꼴 밖에 되지 않는다면서, 쇼군이 내린 왜인들의 울릉도 독도 해금령이라는 쾌사라는 주장을 전개한다. 결국 주상이 두 개의 공과 실을 가감해서 안용복을 유배형에 처하는 것으로 소설은 마무리를 짓는다.

 

첫 번째로 안용복이 일본에 납치되었을 때, 숱한 왜인들의 그의 정체를 의심한다. 우선 일본인 뺨치는 일본어 실력이다. 무역을 하는 상인으로 자신들과 별다를 게 없을 정도의 언어 능력을 가진 안용복이 스파이일지도 모른다는 상상은 어떨까. 탁월한 택결 실력과 사무라이들도 감탄할 만한 정상급 무술 실력을 갖춘 이가 나는 어부요라고 말하는 걸 그대로 믿는 게 더 우습지 않을까. 2차 도일에서는 사맹들과 일단의 용병들을 지휘해서 폭풍 속에서 세키부네를 맹렬하게 추격하는 리더십도 보여주지 않았던가. 이 정도라면 조선 슈퍼히어로급 선수가 아닐까 싶다.

 

내가 주목한 것 중의 하나는 이상룡이라는 초량 바닥에서 한다하는 행수급 토착왜구의 존재다. 왜인들의 잔악한 행동과 횡포는 그렇다 치고, 그들에게 협력해서 동래 지역 밀무역은 물론이고 살인교사와 안용복의 의붓동생 선화 납치에 가담하는 등 왜인 못지않은 악행을 일삼는다. 거상 오다에게 부역해서 돈을 벌고, 한양의 두둑한 뒷배를 둔 악당은 조정의 법망을 비웃으며 자객을 고용해서 안용복에게 보복을 실행한다. 가상의 인물 설정이었지만 어쩌면 그렇게 작금의 현실세계에서 벌어지고 있는 기가 막힌 상황들에 딱 맞아 떨어지는 모를 정도였다. 학자로서 말도 되지 않는 연구로 역사를 왜곡하고 부정하는 매국적인 선동도 문제지만, 그런 선동에 아무런 비판 없이 부화뇌동하는 일단의 무리들이 더 걱정이다.

 

마지막으로 작가가 소설의 제목으로 뽑은, 그렇게 일본인의 손에 멸종된 독도 강치들의 운명은 조국이 지켜줄 수 없었던 조선 민초들에 대한 비유가 아니었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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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19-08-28 1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레삭메냐님 제목이 더 좋아요. 또 다르게 읽을 수도 있으니까요. 에휴.... ㅠㅠ

레삭매냐 2019-08-28 13:05   좋아요 0 | URL
하하 ~ 제 속 마음을 읽으셨나요.

역시나 단발머리님이십니다.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
황교익 지음 / 지식너머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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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책을 받고 나서 그야말로 걸신들린 책을 씹어 먹... 아니 책을 읽었다. 평소 뉴스공장에 출연해서 걸출한 입담으로 속을 시원하게 풀어주시던 황교익 선생이 책을 냈다고 하니 아니 볼 수가 없었다. 결과는 대만족이다.

 

요즘 한풀 꺾이긴 했어도 먹방 쿡방의 시절이 있지 않았던가. 유행이 언제나 그렇듯 먹방의 호시절도 지나고 있다. 어디선가 들은 바에 의하면, 제작비 대비 가성비가 뛰어났기 때문에 방송에서 대유행했다는 썰도 들은 듯 싶다. 그리고 어느 맛집이라는 데 가보면 텔레비전에 나온 집, 아니 심지어 곧 텔레비전에 나올 집이라는 광고까지 있을 정도로 어지간한 음식점이면 맛집 타이틀을 달지 않은 곳이 없더라. 내가 직접 경험한 바에 따르면, 회사에서 밥을 먹으러 갔는데 피디가 와서 맛있게 먹어 달라며 한 마디 해달라고 하는데 어느 동료는 화를 버럭 내며 내 돈 주고 밥 먹는데 왜 이래라 저래라 하냐며 피디를 꾸짖던 패기가 문득 떠올랐다. 나도 한 때 인터뷰 따느라 고생한 적이 있어서, 피디의 말대로 온순한 양처럼 하긴 했었는데. 문득 그 생각이 났다.

 

항상 그렇지만 시작부터 삼천포다. 시작부터 삼천포로 가야 제대로 이야기가 되는가. 암튼 대한민국 맛 칼럼니스트 1호라 부를 수 있는 황교익 선생의 썰은 까칠하다. 아니 이런 양반이 썰전에 나가셨어야 하는 게 아닌가. 그의 주장은 단순하다. 우리의 입맛은 우리가 주로 먹는 음식에서 비롯되었다. 삼겹살 신화는 수출장려운동이 벌어지던 시절, 등심과 안심을 죄다 외국으로 수출하고 남은 찌끄래기를 먹을 방법을 고안하다 생겨났다지. 그래서 족발 삼겹살 순대 기타 등등 요리들이 한국인의 식탁을 점령하게 된 것이다. 게다가 80년대 LPG 가스의 도입으로 지글지글 타는 불판에 삼겹살을 올려 놓고 쐬주를 기울이게 되었다는 전설 같은 이야기도 등장한다.

 

음식에 대한 입맛은 지극히 정치 경제 사회 문화적일 수밖에 없다는 것이 황선생의 주장이다. 한국인은 왜 밥을 먹어야 하나? 빵을 먹고 살면 안 되나. 다른 먹거리들이 지천인데도 밥을 먹어야 한다는 교조주의적 발상은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나는 알 수가 없다. 우리 어머니도 사람이 밥을 먹어야 힘을 쓰지라는 말씀을 입에 달고 사셨다. 아니 빵이나 고기를 먹고도 힘을 잘 쓸 수 있는데, 아니 더 잘 쓸 수 있지 않을까라는 의심을 해본다. 그리고 우리가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맛있을 수밖에 없다는 주장에도 공감하다. 이러다 황선생 교도가 되는 거나 아닌지 모르겠다. 아니 다른 걸 먹어 봤어야 그게 맛있는지 알 수 있지.

 

내가 어릴 적에는 프라이드 치킨이나 양념치킨 이런 건 없었다. 오로지 시장에서 파는 통닭이 있었다. 그리고 시장 닭집에서 튀긴 통닭은 거대했다. 어쩌면 시중에서 우리가 먹는 육계는 산업상 필요하기 때문에 덜 키워서 육향도 나지 않고 그런다는 황선생의 지적이 정확할 지도 모르겠다. 닭이 너무 작다는 거다. 뉴스공장에서도 선생이 주장했듯이, 다른 고기들은 보통 근수로 파는데 왜 닭은 마리 기준으로 파는 걸까? 그만큼 닭고기가 대중에게 접근성이 강하다는 반증이 아닐까 뭐 그런 생각도 해봤다. 여전히 한우 소고기는 비싸고 아무 때나 먹을 수 있는 고기가 아니니 말이다. 물론 돈만 있다면 삼시 세끼 흡입할 수 있지만 아직 나의 소비 수준은 그 정도는 아닌가 보다.

 

모든 건 산업의 논리에 따르게 되어 있다는 선생의 말에 수긍이 간다. 대량구매, 대량생산 시스템의 유통재벌이 서민들을 위해 내놓은 통큰 시리즈를 구입하는 사는 우파 논리를 그리고 조금 까다롭고 비용이 들더라도 원산지와 생산자를 확인하는 공정구매를 선택하는 이들은 좌파 논리를 따른다는 말도 그렇다. 어쩌면 우리의 식탁이야말로 가장 정치적인 장소가 아닐까 싶기도 하다. 물론 그것도 시간과 경제적 여유가 되는 이들에게나 가능한 이야기겠지만 말이다. 패스트푸드 프랜차이즈의 도래는 어쩌면 농업국가에서 30년이라는 짧은 시간에 압축 성장을 이룬 대한민국 노동자들을 위한 자본의 필연적 개입이 아니었을까. 어느 책에서는 짜장면이야말로 한국 산업화에 투신한 다수 노동자들의 전투식량이라는 표현도 썼다. 어릴 적 나에게 짜장면은 한 달에 딱 한 번 아버지 어머니 월급날 먹을 수 있는 별미기도 했지만.

 

황교익 선생이 도전하는 음식 신화는 무궁무진하다. 생각만 해도 벌써부터 입맛이 다셔지는 떡볶이가 사실은 떡탕이나 떡고추장조림이라고 불려야 한다는 생각, 일제가 만들어낸 천일염 신화, 공감할 수는 없지만 김밥의 원조가 일본의 후토마키라는 썰 등 <음식은 어떻게 진화가 되는가>에는 그동안 아무 생각 없이 소비해 오던 음식에 대한 다양한 서사가 독자를 유혹한다. 아 그리고 추석 상에 오르는 음식들이 사실은 절기상 가장 맛이 없으며, 전통적이지도 않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격렬하게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전통을 따르는 사람들이라면 음식 준비도 남자가 해야 한다는 주장 앞에서는 환호작약했다. 뭐 우리는 제사를 지내지 않으니 잘 모르겠지만, 생전에 고인이 좋아하시던 바나나나 파인애플 그리고 맥주 같은 음식을 올리면 왜 안 되는지 나는 궁금했는데 선생의 글을 읽으면서 억압된 집단 기억으로부터의 해방감마저 드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음식은 어떻게 신화가 되는가>를 읽는 동안, 유쾌하고 즐거웠으며 덤으로 집단기억의 속박으로부터 해방까지 얻을 수가 있어 좋았다. 타자화된 관성적 미각의 판타지로부터 해방이야말로 내가 이 책을 읽으면서 거둔 가장 큰 수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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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맨틱 상실사
청얼 지음, 허유영 옮김 / 현대문학 / 2019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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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국 26, 민국 30년 그리고 민국 34년이라는 연호가 정말 낯설게 느껴졌다. 하지만 일본 사람들에게 쇼와니 헤이세이니 하는 연호가 익숙하듯이 중국 사람들에게도 그런 게 아닐까. 그리고 저런 시기는 중국사에서 중요한 사건들이 발생한 해니 더더욱 그럴 것이다. 나 같은 이방인이라면 좀 이해가 되지 않는군 하고 넘어가겠지만.

 

중국 출신 천재 영화감독 청얼이 자신의 영화에서 못다 한 이야기들을 단편집으로 풀어낸 게 바로 <로맨틱 상실사>라고 한다. 감독의 영화를 본 적이 없으니 영화에 대해 알 길은 없고, 소설을 통해서나마 그의 작품 세계를 가늠해 보련다.

 

모두 7편의 단편이 실린 <로맨틱 상실사>에는 현대와 과거를 오가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개인적으로 민국 20년대 상하이를 배경으로 한 과거가 더 마음에 들었다. 이야기들은 서로 얽히고 설키는 구조를 띠고 있는데 역사적으로 실존했던 인물인 다이 선생, 그러니까 중화민국 장제스 정부에서 특무조직을 이끌었던 수장 다이리라는 인물이 가장 인상적이었다고 말하고 싶다. 전쟁이 끝난 다음 해에 1946년 다이리가 죽었는데, 그가 죽지 않았다면 국공내전이 벌어지지 않았을 거라는 설도 있을 정도로 활약이 대단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그렇지만, 1930년대 상하이는 개항장으로 국제도시였다. 동시에 중일전쟁으로 기세등등하던 일본군이 베이징, 난징과 더불어 전략 목표로 삼은 도시기도 했다. 일제의 패망을 일찍이 예상한 인사들은 일본에게 무조건적인 항복과 전범 처벌을 요구한다. 지금으로서는 너무나 당연한 이야기지만, 당시로서는 말도 되지 않는 일이었겠지만. 국민당 정부가 일본군의 파죽지세에 놀라 충칭으로 옮겨 항전을 이어가고 있지 않았던가.

 

정치적 상황이 그랬다면, 민중들의 삶은 어땠을까. 시골 마을에서 올라온 청년들은 오로지 성공을 하겠다는 일념에 범죄조직에 가입해서 그들이 시키는 일을 마다하지 않고 저지른다. 누군가에게 경고를 하기 위해 팔뚝을 자르질 않나, 삽으로 살인도 한다. 그러다 자신도 총에 맞아 사경을 헤매는 가운데 에게 도움을 받아 구사일생으로 살아난다. 물론 영계는 자신이 받은 구원에 대해 보답하지 않는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기회와 권력이 있었지만 말이다. 이 장면에서 나는 이 세상에 구원은 존재하지 않는다라는 작가 청얼의 메시지를 잡아냈다고 생각한다. 첫 번째 단편, <인어>도 마찬가지다. 수족관에서 인어 연기를 하는 어느 여성에 대한 안타까운 마음에 두 남자를 그녀를 돕겠다고 결심하지만 말 뿐이다. 술자리에서의 한담 같다고나 할까.

 

다이리의 실화를 배경으로 한 <여배우>도 인상적이었다. 외세의 침략이 이어지고 있던 시절은 수상했고, 우리가 현실에서 목격하고 있던 각자도생의 시대였다. 그나마 그 시절에는 풍류와 낭만이 있었고 의리 같은 이제는 사라져 버린 감성이 전설의 중심에 있었다. 한 시대를 풍미한 여배우는 얼결에 결혼해 버리고, 바람을 피다가 납치된 남편을 건사하기 위해 암흑계의 거물 두 선생에게 청탁을 넣는다. 그 다음에 이야기가 어떻게 됐더라. 사실 그건 중요하지 않다. 여배우의 남편이 그대로 죽었어도, 아니면 정상에서 추락한 여배우가 신산한 삶을 살았다고 해도 말이다. 청얼 감독은 지나간 시절에 대한 향수에 방점을 찍는다. 그땐 그랬지 하고 말이다. 사회주의의 탈을 과감하게 벗어 던지고, 자본주의 물질사회를 이룩해 나가고 있는 현대 중국의 모습은 인간이 원하는 구원의 그것과 너무 괴리가 있지 않은가. 물질적으로도 말이다.

 

장삼봉 선생이 장무기에게 태극권을 전수해 줄 때처럼, <로맨틱 상실사>를 읽을수록 이전의 이야기들을 기억할 수가 없더라. 현재 진행되는 내러티브에 너무 몰입해서? 아니면 현재와 과거를 오가는 스토리에 그만 길을 잃어서일 지도 모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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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했고 미워했다 에프 영 어덜트 컬렉션
캐서린 패터슨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9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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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사랑했고 미워했다>의 원제목은 <야곱, 내가 사랑했던가> 정도가 될 것 같다. 1940년 초반, 미국 체사피크 만에 있는 라스섬이라는 가공의 무대를 배경으로 미국 출신 작가 캐서린 패터슨이 1980년에 발표한 작품이다.

 

소설을 이끌어가는 화자는 십대 소녀 사라 루이스 브래드쇼다. 그녀는 태어나면서부터 사람들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자신보다 훨씬 나약하고 잘난 쌍둥이 여동생 캐롤라인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그녀 유년의 기억들을 죄다 동생에 대한 트라우마로 점철되어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가족들과 모든 사람들이 큰 병을 앓은 캐롤라인을 우대했고, 성장해서는 뛰어난 목소리로 아버지의 굴 채취선 포셔수호를 타고 나가 집게로 굴을 채취하고, 탈피 과정에 있는 게를 잡는 루이스(휘즈)와는 다른 삶을 살았으니까. 어째 우리나라 콩쥐팥쥐 설화가 생각나는구만 그래. 물론 상황은 좀 다르지만.

 

그리고 일본 해군기가 진주만을 공격하면서 전쟁의 막이 올랐다. 반공 구호가 난무하던 우리나라의 예전이 그랬던 것처럼, 전시에 오랫동안 모습을 보이지 않던 사람이 나타나면 의심을 사기 마련이다. 꼬마 루이스는 정말 오랜만에 등장한 월리스 선장 할아버지가 잠수함을 타고 온 나치 스파이라는 의심을 거두지 않는다. 그건 아마 라스섬의 다른 사람들도 마찬가지였으리라.

 

어려운 가정형편의 콜과 우정을 쌓고, 월리스 선장을 도와 즐거운 시간이 시작되려는 순간, 라스섬을 덮친 엄청난 폭풍으로 월리스 선장은 자신의 집을 잃게 된다. 그리고 발작으로 쓰러진 트루디 할머니와 결혼하는 장면을 보고 월리스 선장에게 마음을 두고 있던 십대 소녀 휘즈의 마음은 요동치기 시작한다. 전형적인 사춘기 증상이라고 해야 할까. 집에서는 자신의 동생 캐롤라인에게 가족의 관심이 온통 가 있질 않나. 굴과 게를 잡아 판 돈으로 언젠가 라스섬을 떠날 계획을 세우는 휘즈의 마음이 이해가 되기도 했다.

 

월리스 선장이 트루디 할머니가 남긴 유산으로 캐롤라인을 볼티모어로 유학 보내겠다는 말에 휘즈는 충격을 먹는다. 믿었던 월리스 할아버지마저 자신을 배신한 것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휘즈가 그런 자신의 문제를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가족의 지나친 편애에 대해서도 속 시원하게 터놓고 이야기했다면 문제가 그렇게까지 되지 않았을 텐데. 엄격한 감리교도 가정에서 성장한 탓인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성경에 나오는 쌍둥이 형제 야곱과 에서의 이야기에서 마침내 제목에 대한 실마리가 풀렸다. 도대체 원제에 나오는 제이컵(야곱)이 누군가 싶었다. 소설에는 제이컵이란 이름은 보이지 않으니까 말이다.

 

한편, 캐롤라인이 성악가로서 꿈을 이루기 위해 볼티모어로 떠나고 콜마저 해군에 입대하면서 휘즈의 외로움은 깊이를 더해간다. 전시경제 속에서 학교마저 때려치우고 아버지의 일을 돕는 휘즈의 모습은 야곱이 아니라 에서에 가까웠던 게 아닐까. 전쟁이 계속되면서 휘발유 배급이 엄격하게 통제되었기 때문에, 휘즈와 아빠는 체서피크 만 멀리 나가 어로행위를 할 수도 없었다. 가계를 돕기 위해, 포셔수호를 타고 망망대해에 나가 굴과 게 그리고 게의 미끼로 사용할 청어를 잡는 휘즈의 모습이 왜 그렇게 안타까웠는지 모르겠다. 그리고 더 이상 교회는 물론이고 학교 나가기까지 거부한 휘즈는 어머니와 집에서 홈스쿨링을 시작한다. 이런 점에서 교사였던 어머니의 역할이 빛을 발한다고 해야 할까.

 

, 그렇다면 과연 사라 루이스 브래드쇼의 미래는 어떤 결말을 맞게 될까. 라스섬을 떠나 메릴랜드 대학에 진학한 사라는 의사가 되고 싶지만, 당시 분위기에서 여자 의사의 탄생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결국 간호사가 되어 산골 마을로 가 돈을 모아 의사의 꿈을 이어가겠다고 결정한 사라는 평소에 가고 싶던 산에서 지내게 된다. 그리고 자신의 엄마 수잔이 걸었던 길과 비슷한 인생의 행로를 걷게 된다.

 

그렇다면 과연 사라는 에서였을까? 저자가 선교사였고, 남편이 목사라는 사실에서 보듯 <사랑했고 미워했다>에는 성경에 나오는 코드들이 다수 등장한다. 가장 밉상 캐릭터인 사라의 할머니는 모두를 증오하면서 곧잘 성경을 인용하지 않던가. 어쩌면 그녀는 다른 라스섬의 소녀들처럼 하이럼 월리스 할아버지를 사랑했을 지도 모르겠다. 그래서 그가 50년 만에 돌아와, 트루디 할머니와 결혼했을 그렇게 저주를 퍼부었을 지도. 사랑에서 증오로 바뀐 뒤틀린 감정은 반세기라는 세월도 무디게 할 수 없었던가.

 

예상대로 사라 루이스 브래드쇼의 삶은 결국 라스섬과 가족을 떠나서야 비로소 완성된다. 독자들은 이미 그것을 알고 있지 않았을까. 다만 어떤 수순을 거쳐 그것이 이루어지는지가 궁금했을 뿐.

 

탈피하는 게 잡이와 굴 채취가 사라 루이스에게는 고역이자 노동이었겠지만, 문득 나도 그녀처럼 그런 단순한 노동에 몸을 맡겨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주의, 가족에 대한 의무 그리고 나만의 삶을 살아야 하는 당위성에 대한 발견 등 캐서린 패터슨의 사랑과 미움의 파노라마 <사랑했고 미워했다>를 읽으면서 내 마음을 스쳐간 주제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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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 2019-08-24 09:5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레삭매냐님처럼 ˝저도 OOO을 읽었는데....˝랄지 ˝XXX은 사 놓고 아직이네요˝랄지 그런 댓글을 달아보고 싶은데, 레삭매냐님이 소개하시는 책은 작가조차 초면일 때가 많아서 맨날 망해요...... 이것이 바로 클라스의 차이인가.

레삭매냐 2019-08-26 09:46   좋아요 0 | URL
책의 세계는 참말로 넓고
깊은 것 같습니다.

읽어도 읽어도 끝이 없네요.
새로운 작가들과 그들이 펴내는
책들의 행렬은 끝이 없구요.

기존 작가들은 물론이고 새로운
작가들에 대해서도 호기심이
많아서인지 계속 도전해 보게
되네요.

물론 망할 때도 많지만요 ㅋㅋㅋ
클라쓰는 무신... 무식하게 책읽는
인간의 모습이지요.

목나무 2019-08-24 16:3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syo님의 이 댓글에 심하게 공감합니다. ㅋㅋㅋ

레삭매냐 2019-08-26 09:47   좋아요 1 | URL
아니 이게 무신...

허접 클라쓰랍니다.

psyche 2019-08-25 02:1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레삭메냐님의 클라스가 다르다는 syo 님과 설해목님의 말씀에 공감!
근데 두 분 역시 클라스가 다르신 분들!! 이 책의 작가 캐서린 패터슨을 모르시는 이유는 아동 청소년 책 작가이기 때문일 거에요. 이 책 Jacob Have I Loved를 비롯하여 뉴베리 상을 세번이나 받은 유명작가이지만 아동문학에 관심이 없으시면 당연히 모를 수 밖에요.

레삭매냐 2019-08-26 09:49   좋아요 0 | URL
아하 그랬었군요...
한 수 배웠습니다.

책 읽으면서 흠 어른이를 위한 책
은 아닌 것 같더라니, 그랬었군요.

야곱과 에서 변주곡, 나름 즐겁게
읽었네요.
 
식스웨이크
무르 래퍼티 지음, 신해경 옮김 / 아작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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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달의 달궁 독서 책이라 읽게 됐다. 원래 에스엡 소설은 잘 읽지 않거든. 지난번에 한동안 에스엡 소설에 꽂혀서 죽어라 읽은 적이 있지. 그 다음에는 좀 시들해져서 멀리 했고. 그 때도 아마 달궁책으로 읽게 되었는데 정작 독서모임에는 가지 못했다. 이번에는 완독도 했고, 영생-클론 복제-기억 이식 등 정말 한 가지 주제만 가지고서도 수 시간 동안 토론할 만한 내용이 많아 주제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듯싶다.

 

서기 2493년 그러니까 25세기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진행된다. 자그마치 400년이 걸리는 항성 이주 계획의 일환으로 도르미레호는 2,500명을 냉동수면 상태의 인간들과 6명의 승무원 그리고 인공지능 이안의 인도로 우주여행에 나선다. 그리고 바로 비극의 문을 열어 제친다. 승무원 모두가 죽은 것이다! 짜잔 그리고 6명의 승무원 가운데 가장 하급 인원인 마리아 아레나부터 복제 상태에서 깨어난다.

 

인류는 마인드맵이라는 시스템을 개발해서 새로운 복제 인간에 기억을 이식해서, 영생을 추구한다. 이거 놀랍지 않은가. DNA가 복제돼도 기억은 그럴 수 없다는 복제기술 시대의 맹점을 기억 이식이라는 방식으로 돌파해낸 것이다. 이 장면은 바로 영화 <블레이드 러너>에서 이식된 기억을 감별해내는 보이트캄프 조사를 연상시켰다. 유사 이래 새로운 것은 없었지.

 

우주를 부유하고 있는 도르미레호라는 우주선에서 벌어진 살인사건. 도대체 누가 범인이랑 말인가. 전형적인 장르 소설의 밀실트릭이다. 그러니까 6명의 승무원 중에 범인이 있다는 거지. 마리아는 요리와 청소를 맡은 잡역부다. 모두 지구나 루나에서 중죄를 짓고, 사면을 조건으로 해서 400년이나 걸리는 우주 여행길에 나선 것이다. 무한으로 반복되는 클론 복제로 더 이상 죽음에 대한 두려움이 없어진 인류, 아니 그런 상태의 클론을 인간이라 부를 수 있을지 모르겠다. 바로 윤리적 문제가 튀어나오는구만 그래.

 

팟캐스터 활동을 하던 무르 래퍼티 작가는 전형적인 밀실트릭 구조에 각각의 승무원들이 가지고 있는 화려한 범죄경력을 양파 까듯 하나하나 까면서 모두가 범인일 수 있다는 가능성을 증폭시키는 기술을 시전한다. 먼저 전직 군인으로 전쟁영웅이었던 카트리나 들라크루즈 선장은 누군가에게 폭행당해 혼수상태에 빠져 있다. 절대 두 개의 클론이 동시에 존재할 수 없다는 보충법안에 따라 혼수상태의 카트리나 선장은 재순환처리 되어야 하지만, 의사 조애나 글래스 박사는 선장의 명령을 자신의 권한으로 무마한다.

 

그리고 밝혀지는 사실 가운데 중요한 점 하나는 승무원 모두가 이러저러한 사정으로 해서 클론 출신 백만장자 샐리 미뇽과 이러저러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점이다. 어쩌면 모두가 그녀의 협박 혹은 제안에 따라 도르미레호에 탑승했는지 모르겠다.

 

전과에 대한 한 겹의 의혹만으로는 소설을 흥미롭게 만들기는 역부족이었으리라. 그래서 무르 래퍼티 작가는 몇 겹의 기억을 중첩시키면서 내러티브 후크를 시도한다. 일단 누가 범인인가? 범인은 무엇 때문에 살인을 저지르고, 인공지능 이안의 능력마저 초기화시키고 모든 기억을 삭제했나. 배후에는 온갖 감정들이 춤을 춘다. 배신의 드라마, 클론폭동에 대한 분노, 끝까지 인간성을 유지하고자 했던 사제의 스토리, 마인드맵 해킹이라는 범죄, 그야말로 인간 복제에 관한 모든 이슈들이 총동원된 스페이스 오딧세이가 아닐 수 없다.

 

소설을 읽는 동안, 소설의 컨텐츠와는 무관한 나의 상념들이 우주의 공간을 누비기 시작한다. 더 이상 죽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 인간/클론들에게 시간이란 아무런 의미가 없는 개념이 되었다. 예비 신체에 마인드앱을 깔기만 하면, 영생이 가능하다는 설정은 또 어떤가. 생애 가운데 가장 최고의 컨디션의 피지컬로 새 출발을 할 수 있다면 그걸 거부할 수 있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 물론 군터 오르만 신부처럼 철저한 반클론주의자처럼 영생이 아닌 일생을 원하는 이들도 있을 것이다.

 

나중에 진짜 자신의 정체가 밝혀지는 마리아 아레나 박사처럼 내가 가진 천재적 기술이 기업이나 사악한 야심가에게 휘둘리게 되어 자신의 양심과 달리 악용된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내 안에 하나가 아닌 세 개의 다른 정신이 서로 주도권을 잡기 위해 투쟁하고, 통제받지 않는 범죄를 저지르려고 한다면 어쩌지? 내 의지와는 아무 상관없이 육신이 제거되어 인공지능 신세가 되어 반기계적으로 생존해야 한다면? 무르 래퍼티의 <식스 웨이크>가 던지는 질문들은 끝이 없다. 어쩌면 오래된 미래의 이런 질문들이야말로 에스엡 장르를 통해서만 가능한 것들이 아닌가 하는 생각을 해본다.

 

책을 다 읽은 뒤, 나의 마지막 질문은 이렇다.

우리 인간에게 영생은 축복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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