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리의 돼지의 낙타
엄우흠 지음 / 자음과모음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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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만나는 엄우흠 작가의 <마리의 돼지의 낙타>를 읽었다. 서사는 강렬했다. 그리고 천명관 작가의 데뷔작 <고래>가 떠올랐다. 판타지와 도시 전설 같은 조금은 황당해 보이는 전개 때문이 아니었을까.

 

수도권 인근의 가상도시 위성시에는 무동(無洞)이라는 이름의 마을이 있었다. 원래 비닐하우스에는 식물이 살아야 하는데, 무동의 검은 비닐하우스에는 사람들이 살았단다. 한문을 전공한 공무원의 발상이긴 했지만. 무동이라... 서사의 중심에는 경수네 가족이 등장한다. 원래 경찰을 하던 경수 아빠는 어떤 이유(이게 킬포다!)에서 경찰을 그만두고 분식집, 문방구, 치킨가게 운영에 나선다.

 

고유의 엠에스지에 중독된 어린이들의 입맛은 좋은 재료를 추구하는 경수 아빠의 경영 철학과 도무지 맞아 떨어지지 않는 모양이다. 게다가 떡볶이에 영혼에 담기지 않았다는 어느 발칙한 여학생들과 말다툼을 벌이고, 경수 아빠가 변태라는 낙서까지 이어지면서 경수네 가족은 나락으로 굴러 떨어지기 시작한다. 아들 경수는 순대를 휘감고 한바탕 난리를 치지 않나. 하긴 곧 이어 등장한 무동 마을의 낙타에 비하면 순대 소동은 애교에 가깝다.

 

10년 전 대한민국을 휩쓸었던 뉴타운타령처럼 재개발과 그에 관련된 재산증식의 욕망을 작가는 정확하게 타격한다. 그놈의 재개발 때문에 결국 무동 마을의 비극이 시작되었고, 경수 아빠가 살해당했으며 마을 사람들이 그렇게 고대해 마지않던 재개발은 물 건너갔으니 말이다. 그렇다고 해서 모두가 손해 보는 게임은 아니었다. 한 때 무동에서 칩거하면서 음악에 정진하던 로큰롤 고(광석 아빠)는 토마토 문 여사를 만나 아들들을 자그마치 12명이나 생산해내지 않았던가. 열 명의 형제가 모두 열사의 땅 중동으로 날아가 토마토 문 여사의 이재에 기반이 된다. 어쩌면 인력이 재산이 되던 시절에 대한 향수가 느껴지기도 한다. 지금은 아이를 한 명도 낳지 않는 초저출산 국가가 된 마당에, 그런 시절이 있나 싶다.

 

다시 판타지 서사로 돌아가 볼까. 집시 출신이라는 민구/마리 패밀리의 낙타는 돼지가 낳았다나. 변호사 찜쪄먹을 만한 구라를 구사하는 민구의 인간 광합성 이야기에 인호와 유미를 비롯한 동네 아이들은 넋을 빼놓을 지경이다. 그나마 좀 영민한 송인호 친구가 민구의 이야기를 반박하지만 마리 누나가 몰고 나타난 낙타의 모습 앞에 입을 다물 수밖에 없다. 아니 도대체 이런 이야기들은 나를 위한 맞춤형 이야기가 아닌가. 기본적으로 소설이 지어낸 이야기라는 점에서 현실성 따위는 무관하다는 건가. 왜 이렇게 이야기가 재밌는 거지. 어차피 소설이라는 걸 잘 알고 읽는 데, 판타지 장르로 퉁치면 불가능할 게 없을 것 같다.

 

마리네 돼지가 낳은 낙타가 판타지를 대변한다면, 경수의 삶은 리얼리티 쇼에 가깝다. 요즘 텔레비전에서는 먹방이 대세라는 데 광석이처럼 가난 체험을 파는 장사는 어떨까 싶다. ㅎ하긴 먹방이 가성비 최고의 방송이라는 점에서 타의 추종을 불러하는 경쟁력을 가지고 있긴 하지만. 대학 진학해서 잘 나갈 것 같았던 인호는 목욕관리사가 되어 미래의 사우나 사장의 꿈을 꾸다가 동종 업계 진출하려는 동갑내기 수지와 만나 사랑에 빠진다. 어디 우리네 삶이 우리의 뜻처럼 진행된 적이 있었던가를 우렁차게 외치는 그의 패기에 감탄했다. 참 경수는 3년 간의 빵살이를 마치고 출소했지 아마. 그 사이의 빈 공간들이 그야말로 신의 한수처럼 다가왔다. 경수 아빠가 죽은 뒤에 그의 삶이 어떻게 흘러 갔는지에 대해 시시콜콜하게 말할 필요는 없다는 거지.

 

자신의 여자친구 유미와 영배의 바람 장면을 목격하고도 분노하지 않는 남자 경수. 후반으로 가면서 엄우흠 작가는 사전에 깔아둔 떡밥들을 하나둘씩 거두기 시작한다. 그러니까 소설 <마리의 돼지의 낙타>에 등장하는 사람들은 나름대로 미션을 가지고 있다. 작가가 초반에 모호하게 설정한 설명과 도대체 누가 경수 아빠 한동환 씨를 그렇게 집요하게 따라 다니면서 괴롭혔는지에 대해서도 친절한 설명을 빼놓지 않는다. 멋지다!

 

제법 두터운 책이라 이주 전에 받았을 때 좀 놀랐는데, 막상 책을 본격적으로 읽기 시작하니 너무 재밌더라. 한 이틀 정도 걸려서 집중적으로 읽었다. 어느 선량한 개인의 비극적 삶의 여정, 무동이라는 공간에서 꿈틀거리는 욕망에 대한 타격 그리고 마리의 낙타로 대변되는 판타지에 이르기까지 그야말로 근사하게 차려진 연회에 배부르게 포식한 느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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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9-05-16 1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멋진 독서를 하신 것 같군요. 두꺼운 책을 그것도 흥미롭게 읽었을 때 느끼는 만족감이 있지요.

레삭매냐 2019-05-16 17:18   좋아요 1 | URL
생각보다 금세 읽을 수가 있어서
말씀해 주신 대로 아주 뿌듯하더라구요 :>

게다가 재밌기까지 하니 더 좋았어요 -
 
치과 의사의 죽음 해미시 맥베스 순경 시리즈 13
M. C. 비턴 지음, 문은실 옮김 / 현대문학 / 201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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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부터 관심을 가져 오던 시리즈인데 이번에 도서관에 책을 반납하러 갔다가 우연히 만나서 빌려다 보게 됐다. 이 책 저 책 읽다 보니 근 일주일이나 걸린 것 같다.

 

1936년에 태어 나신 매리온 채스니(M.C.) 비턴 할머니는 우리 나이로 올해 84세인데도 왕성한 집필 활동 중이다. 내가 이번에 만난 해미시 맥베스 시리즈 중의 하나인 <치과 의사의 죽음>(1997)은 작년에 발표된 <정직한 남자의 죽음>까지 모두 33편 중의 13번째 책이다. 제목에서 알 수 있다시피 스코틀랜드 고지대 그러니까 그 동네 사람들이 하일랜드라고 부르는 곳의 로흐두 마을 순경 해미시 맥베스의 사건에는 항상 죽음이 개입되어 있다는 말인가 보다. 이거 흥미진진하군.

 

매리온 할머니의 경력은 화려하기 그지없다. 처음에 조그만 서점의 판매 직원으로 출발해서 신문사와 잡지사에서 연극비평가, 비서, 패션 에디터 그리고 범죄를 주로 다루는 사회부 기자까지 두루 섭렵하면서 미래의 추리소설 작가로서의 입지를 다진 것으로 추정된다. 해리 스콧 기븐스를 만나 결혼한 뒤에는 미국으로 건너갔는데, 초반에 신랑은 레스토랑에서 접시닦이 그리고 매리온은 웨이트리스로 일하다, 루퍼트 머독의 타블로이드 신문 <스타>에 캐스팅이 되었다나. 그후 다수의 로맨스물과 여름마다 서덜랜드에서 휴가를 보내던 중 피싱스쿨에서 해미시 맥베스 창조에 대한 영감을 받았단다. 뭐 이 정도면 우리의 주인공 해미시 맥베스에 대한 얼개는 완성되었으니 본격적인 이야기에 들어가 보자.

 

문제의 시작은 치통이었다. 군대에 있을 때, 다른 건 몰라도 이가 아프다고 하면 제깍 병원에 보내 주었다. 그 정도로 이 아픈 건 봐줄 수 있다는 말인가. 해미시 맥베스는 치통 때문에 치과를 찾게 된다. 인근에 치과라고는 이가 아프다고 하면 무조건 발치해 버리는 것으로 악명 높은 길크리스트 밖에 없다. 그의 진료실을 찾은 해미시 순경은 니코틴 중독으로 살해당한 뒤, 드릴로 이가 모두 뚫려 있는 치과 의사를 발견한다.

 

참 그전에 스코츠먼 호텔의 금고에 든 25만 파운드의 거액이 도난당하는 사고도 있었지 아마. 호텔 지배인은 비용을 아낀답시고 나무판자로 된 금고에 돈을 두었다나. 서덜랜드에서는 도무지 비밀이라곤 존재하지 않는 모양이다. 거액의 절도사건과 바람둥이 치과 의사의 죽음이 혀에 혀를 타고 불길처럼 번져 나간다. 게다가 항상 사건의 이면을 조사해서 나름의 성과를 거두는 해미시에게 적대적인 블레어 경감은 초동수사 단계에서부터 해미시를 배제하고 강압적인 방식을 고수한다. 본청으로부터 아무런 도움도 받지 못하고 홀로 고군분투하는 해미시가 그렇게 안쓰러울 수가 없네.

 

보통 이런 강력범죄에는 동기가 필요한데, 절대적으로 부족한 수사 정보와 해미시의 탐문수사만으로는 도저히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다. 다만 해미시는 스코츠먼 호텔 도난 사건과 길크리스트 살해사건이 모종의 관계가 있으리라는 점을 직감으로 알아 차린다. 그렇다 우리의 주인공 해미시 순경은 올드 스쿨 스타일의 경찰이다. 어떤 조력도 없을 수 없다고 생각하느 순간, 헤어진 여자친구(?) 프리실라의 지인으로 아름다운 외모의 세라 허드슨이 등장해서 해미시를 지원한다. 솜씨 좋은 해커가 되어 해미시가 접근할 수 없는 블레어 경감의 계정을 해킹해서, 블레어가 해미시에게 보여주지 않는 사건 보고서들을 읽는데 성공한다. 어느 순간, 세라가 이 범죄에 가담한 공모자가 아닌가 싶기도 하지만 얼치기 독자의 너무 앞서 나간 설레발이었다.

 

단순해 보이던 사건은 해미시가 치과 의사의 직접적 원인이었던 니코틴 증류소를 찾던 중, 하일랜드에서는 일상이라는 밀주제조를 해서 대량공급하던 악당 스마일리 형제들에게 납치 감금되어 토탄 숲에서 일생을 마감할 뻔 하기도 하는 우여곡절을 겪기도 한다. 결국 사단의 원인은 바람둥이 치과 의사의 정도를 넘어선 바람이 문제였다. 젊고 아름다운 여자들을 꼬시기 위해 자신의 재정 상태를 넘어서는 소비가 필요했고, 지킬 수 없는 약속들을 남발했다. 그에 대한 대가는 바로 자신의 죽음이었다.

 

해미시는 탐문 수사 중에 하나의 비극을 만나게 된다. 그건 바로 자신의 수사를 돕던 프레드 서덜랜드 씨의 예상하지 못한 죽음이었다. 이 동네에서는 도대체 비밀이라고는 없다. 특히 연세 드신 노인분들에게 살인사건만한 자극적인 뉴스거리도 없지 않은가. 해미시 순경의 짧은 로맨스도 거의 실시간으로 로흐두 사람들에게 중계되는 판이다. 그렇기 때문에 주민들에게 도움을 요청했다가 그만 치과 의사를 죽인 범인이 조여 오는 압박감에 그만 프레드 씨마저 살해한 것이다!

 

양식연어가 아닌 강에서 해미시가 직접 잡은 연어를 원하는 점쟁이 앵거스는 또 어떤가. 그는 자신에게 점을 보러 오는 이들에게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신이 원하는 것을 얻어내는 기가 막힌 재주를 가지고 있다. 점을 본다고 하지만, 앵거스 역시 동네 사람들이 물어다 주는 정보를 바탕으로 가공 조립하는 역할을 할 따름이다. 세라는 앵거스에게 여행용 앙고라 담요를 전달하고, 자신의 자리로 되돌아 간다. 해미시와 보낸 격정의 밤은 그저 하룻밤의 즐거움이었단 말인가! 역설적으로 프리실라와 다시 잘될 수 있다는 여지를 남겨 두었다는 점을 주목해야할 것 같다.

 

어젯밤에 자기 전에 조금만 보고 자야지 하고 섣불리 덤벼들었다가 모조리 다 읽고 나서 새벽 2시에 잠들 수가 있었다. 이럴 수가 있나 그래. 그 정도로 재미는 있었다. 아무래도 M.C. 비턴의 다른 죽음 시리즈들도 하나씩 구해다 읽어봐야 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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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앤드루 포터 지음, 김이선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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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 만에 다시 앤드루 포터의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읽었다. 처음에 출간되었을 적에는 그렇게 열광적인 반응을 이끌어 내지 못했었는데, 아마 어느 방송인지 팟캐에서 소개된 다음에 다시 인기를 끈 모양이다. 내가 8년 전에 읽고 쓴 리뷰가 그렇게 북헌터들의 눈길을 끌었고 그들에게 책을 팔라는 정중한 제안을 이메일로 받기도 했었다. 물론 책은 팔지 않았다. 원래 심리가 그렇지 않은가. 그리고 이번에 새로운 출판사에서 같은 역자로 재출간되었는데 기존의 버전과 어떤 변별력을 가지고 있는지 나는 궁금하다.

 

그 소식을 들은 나는 8년 만에 앤드루 포터의 전설이 되어 버린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을 다시 읽었다. 여기서 킬포는 바로 다시. 그렇게 수도 없이 책을 읽어대는데 8년 전에 읽은 기억이 온전하게 남아 있을까? 전혀 아니올씨다였다. 전혀 새로운 느낌으로 만나는 책이었다고나 할까. 그것은 마치 장삼봉 선생에게 태극권을 전수받던 장무기가 태극권의 초식을 모두 잊어버리는 것과 같은 그럼 느낌이랄까. 언제나 새 출발은 좋은 법이지.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에는 모두 10개의 삶을 관통하는 단편들이 수록되어 있다. 단편들의 화자들은 모두 1인칭의 나이다. 어디선가는 알렉스로, 폴 아저씨로 불리는 내가 그리는 삶의 궤적은 앤드루 포터 작가의 그것을 따른다는 느낌이 들었다. 교외에 사는 중산층 가정의 친구 탈이 구멍에 죽은 사건은 어른으로 성장한 나에게 여전한 트라우마로 남아 있다. 기억은 사실마저 왜곡하게 만드는 힘이 있었던가. 어쩌면 나의 실수로 구멍에 빠져 죽은 친구 대신, 자신이 죽었을 수도 있었다라는 냉혹한 사실로부터 는 과연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언뜻언뜻 비치는 미국 서브컬처에 대한 진정성 넘치는 묘사가 생경하면서도 또 한편으로는 매력적으로 다가온다.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을 꿈꾸던 아버지와 변호사 어머니의 예정된 결별을 목격하는 자식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꿈을 추구하는 이와 현실의 견고한 벽과 맞서 싸워야 하는 이가 한 때는 서로 열렬하게 사랑했다는 사실을 믿을 수 있는가. 그 갈등 속에서 나의 자리는 어디였을까, 어머니를 비난하는 게 과연 옳은 선택이었을까? 그 때는 몰랐지만 시간이 지나고 내가 어른이 되었을 때 이해할 수 있는 일이 있는 법이다. 아니 어른이 되어서도 그동안 형성된 가치관 때문에 그러지 못할 수도 있겠지만.

 

폭풍이 몰아치는 가운데, 전도유망한 미래의 의사이자 피앙세 리처드와 에스파냐 여행 중에 결혼을 앞두고 결별선언으로 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에이미 누나를 바라보는 나의 시선은 또 어떤가. 자신이 어려서 돌아가신 아버지의 부재는 그 무엇으로도 메워질 수 없었다. 유사 아버지 역할을 하겠다고 나선 톰의 모습이 그러니 당연히 어색할 수밖에 없다. 혼전계약서니 투자실패니 하는 것은 그런 부정적 감정의 당위를 위한 설정으로 읽힌다. 진짜 아버지의 빈자리를 채울 수 없는 의붓아버지의 존재는 영원한 이방인으로 귀결될 뿐.

 

다양한 형태로 분화 중인 미국 가정의 형태는 <아술>에서도 잘 드러난다. 이 책이 11년 전에 발표된 책이라는 점을 고려한다면 지금의 모습은 더 다를 수도 있을지 모르겠다. 아이가 없는 우리 부부는 아술이라는 벨리즈 출신 교환 학생을 1년간 집에 들인다. 이 아술이 겉으로 평온해 보이는 가정에 핵폭탄을 터뜨리라는 건 누구나 다 알고 있다. 다만 그 시점이 언제냐는 것 뿐. 녀석은 동성친구 라몬과 기묘한 관계 속으로 빠져 들고, 당시에는 불법이었던 대마초를 피우고(아마 지금은 합법화된 것으로 알고 있다), 음주를 꺼리지 않는다. 부모가 아니면서 동시에 외국인 교환 학생 아술에 대한 책임을 지고 있는 아내 캐런과 나는 어디까지 허용해야 하는 것일까. 모든 가정마다 다 가지고 있는 문제는 극단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머킨>에서도 저자는 평이함 가운데 특별한 무엇을 끄집어낸다. 이웃에 사는 연상녀 린의 가짜 애인 행세를 하는 특수학교 교사 나에게는 호세라는 특별한 학생이 있다. 세상이 알아듣지 못하는 자신만의 언어로 시를 발표하겠다는 호세의 고집만큼이나 린의 아버지를 속이기 위해 가짜 애인 리허설을 하는 장면도 소통이 불가능한 현실을 상징한다. 그러니까 사람들은 누구나 다 자기고 보고 싶은 것만을 원하고, 그걸 아는 이들은 그들에게 그들이 보고 싶은 현실만을 보여 주려는 것이다. 아마 그에 대한 좋은 예로는 <굿바이 레닌>만한 영화가 없을 것 같다.

 

이웃집 벤틀리 부인을 사랑했던 나의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 애인이 있으면서도 빛과 물질에 대한 물리학 강의를 하던 노년의 교수님과 사랑에 빠진 나 헤더의 이야기 등 견고한 일상에 바늘 하나 만큼의 균열을 잡아내는 십년 전 신예 앤드루 포터가 구사하는 서사는 이 방면의 대가 제임스 설터를 자동적으로 떠올리게 한다. 다시 한 번 나는 묻게 된다. 과연 나는 얼마만큼 삶의 진실에 다가가 있는지 그리고 내가 삶의 진실이라고 생각하는 진실은 아니 믿고 싶은 진실은 진짜냐고. 빛과 물질이 교차하는 혼란스러운 이 순간에 그게 무슨 의미일까에 대해서도.

 

앤드루 포터는 지금까지 딱 두 편의 작품만을 세상에 소개했다. 2008<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 그리고 2012<어떤 날들>. 후자는 전자만큼의 아우라를 내지 못하고 입소문도 그만 못한 느낌이다. 정말 오래 전에 사서 아직까지도 읽지 않은 <어떤 날들>을 읽어 보고 싶어졌는데,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다. 언제나 그런 것처럼. 찾으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는데. 앤드루 포터 씨, 신간을 좀 써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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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oolcat329 2019-05-15 20:2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절판됐다가 이번에 새로 나온 숨은 명작이군요. 늦게 독서에 눈 떠 읽고싶은 책은 많은데 이렇게 계속 쌓이니 마음만 급하네요 ㅎㅎ 언제나 좋은 글 감사하고 잘 읽었습니다.

레삭매냐 2019-05-16 17:19   좋아요 1 | URL
입소문이 자자해서 결국 새로운 출판사
에서 나온 모양입니다.

앤드루 포터 작가도 과작하시는 양반이라
책이 많이 없네요.

다시 읽어도 좋더군요.
 
무증거 범죄 추리의 왕
쯔진천 지음, 최정숙 옮김 / 한즈미디어(한스미디어)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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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세상에 완전 범죄란 존재할까? 범죄수사학의 획기적인 기술적 진보로 예전과 달리 미세한 범죄의 흔적이라도 현장에서 채취할 수 있게 되면서 완전범죄의 로망은 이제 거의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그런데 천재 법의학자가 동원이 된다면? 바로 그 지점에서 쯔진천의 <무증거 범죄>는 시작된다.

 

모든 일은 8년 전, 모녀 실종사건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사건의 공간적 배경은 중국의 항저우다. 워낙 인구도 많고, 이러저러한 사람들이 섞여 살다 보니 어지간한 사건쯤은 세간의 주목을 끌 수도 없을 지경이다. 살인사건도 마찬가지. 문제는 비슷한 행적을 그리는 연쇄살인이 5번이나 반복되었다는 점이다. 그렇다면 사건의 해결을 맡은 경찰, 공안의 발등이 불이 떨어지지 않았을까.

 

범행도구는 줄넘기 그리고 피해자의 입에 리췬 담배를 물려 놓고, 자신을 잡아 보라는 글을 대문짝하게 남겨 놓는 범인의 자신감에 경찰을 당황할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게다가 범인인 현장에 아무런 증거도 남겨 두지 않았다. 바로 이 점이 경찰을 대혼란 속으로 몰아넣고, 오로지 대대적인 지문 식별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그런 상황이다. 그리고 이 점이 바로 킬포(killing point). 그러니까 범인은 경찰로 하여금 무언가를 강제한 것이다.

 

여기에 중국 스릴러의 대가라는 쯔진천 작가는 의외의 사건 하나를 추가하고, 두 명의 천재들을 배치한다. 하나는 동네 깡패인 노랑머리 쉬톈딩에게 거의 추행에 가까운 집적거림을 당하는 충칭 국숫집 아가씨 주후이루가 우발적으로 그를 죽인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전직 법의학자 러원과 역시 전직 경찰로 지금은 저장대 교수로 활동 중인 옌량이다.

 

일선 경찰들은 사건의 초동수사 단계에서 주후이루와 궈위의 완벽한 진술에 오히려 의심을 갖는다. 하지만 천재 법의학자 러원의 증거 조작 설계는 경찰의 역량을 훨씬 뛰어넘는다. 상상을 초월하는 고차방정식을 접하게 되는 범죄 논리학자 옌량은 기존의 방식으로는 도저히 이 문제를 해결할 수 없다는 점을 직시한다. 범죄 수사의 일반 방식인 연역이 아닌 귀납적 방식으로, 그리고 특정한 해를 대입해서 무증거 범죄 해결에 도전한다는 설정이다. 그리고 옌량이 고른 해는 바로 러원이었다. 과연 러원이 설계한 완전 범죄는 해피엔딩으로 끝날 것인가? 그리고 러원이 수년 동안 추적해 온 실종된 아내와 딸의 행방은 어떤 식으로 해결될 것인지.

 

<무증거 범죄>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은 모두 천재들이다. 일반인이 범접하기 어려운 아우라를 내뿜으면서 마치 제갈량과 사마의처럼 자웅을 겨룬다. 이에 반발해서 어떤 작가들은 지극히 평범한 경찰을 전면에 내세우기도 하지만 쯔진천 작가의 경우에는 특별한 능력을 지닌 주인공들이 격전장에서 치열한 두뇌싸움을 벌인다는 느낌을 받았다. 소설에서는 옌량이 공격수이고, 러원이 수비수 역이다. 옌량이 예리한 창 혹은 칼로 상대방을 찌르면, 러원은 마치 기다렸다는 듯이 능수능란하게 방어에 나선다. 마지막에 가서는 러원이 옌량이 준비한 함정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피할 수 없는 신의 한수를 제공한다. 전개에 비하면, 엔딩은 조금은 클리셰이라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더라.

 

사건 초반, 해결에 경찰들은 피해자들이 하나 같이 전과자라는 점에서 정의의 사도를 자처하는 자가 범인이 아닐까라는 추론을 펼친다. 과연 어떤 의미에서는 러원의 범죄가 그런 점도 없지 않다. 동기가 어떻든 간에 모든 범죄는 부끄러운 일이라는 평소 러원의 지론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범죄를 통해 문제를 해결하려는 장면이 주는 모순은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중국 추리소설계의 대신(大神)이라는 별명이 무색하지 않게 쯔진천은 <무증거 범죄>에서 자신의 능력을 만개해 보였다. 작년에 출간된 사회파 추리소설이라는 <동트기 힘든 밤>도 한 번 읽어 보고 싶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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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5-12 19:2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레삭매냐님의 리뷰 읽으니 <무중력 범죄>도 괜찮은 것 같은데요.^^
저는 얼마 전에 이 책 찾아보다가 <동트기 힘든 밤>을 샀어요.
그 쪽이 출간일자가 앞서서요.
이 책도 괜찮은 모양이네요. 다음에 저도 읽어봐야겠습니다.
리뷰 잘 읽었어요.
레삭매냐님, 즐거운 휴일 보내세요.^^

레삭매냐 2019-05-13 09:16   좋아요 1 | URL
저는 지난 주에 걸린 감기 몸살로
주말 내내 앓았네요...

그러면서도 손에서 책을 떼지 못했다는...

쯔진천 작가의 책, 호기심이 동하네요.

서니데이님도 기운찬 월요일 되시길
바라겠습니다.
 
프랑스어의 실종 을유세계문학전집 95
아시아 제바르 지음, 장진영 옮김 / 을유문화사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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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책을 빌렸다. 책을 채 펴보지도 못하고 결국 반납했다. 그리고 6개월이라는 시간이 지나 중고책으로 구입해서 읽게 됐다. 그전에 시작한 아시아 제바르의 <사랑, 판타지아>는 절반 정도 읽었나. 그 책도 읽어야 하는데.

 

내가 만난 알제리 출신 프랑스 작가 아시아 제바르의 책 <프랑스어의 실종>은 매력적이면서 동시에 지적 호기심을 자극하는 소설이었다. 그 중심에는 고향 카스바로 귀향한 주인공 베르칸이 있다. 45세 정도라고 추정하면 될까. 망명지 프랑스 파리에서 공무원으로 생활하던 베르칸은 연극 배우 애인 마리즈로부터 이별 통고를 받는다. 그러니까 이별-귀향의 수순을 따르게 된 것이다.

 

마리즈와 사랑을 하면서도 모국어인 아랍어를 구사할 수 없어 고통스러워 하던 남자는 발 밑의 바다와 정적이 필요하다는 이유로 그리고 무엇보다 글을 쓰기 위해 자신이 태어난 땅으로 귀향한다. 귀향이라는 이미지 속에는 자신의 뿌리를 찾고 싶다는 인간의 원초적인 욕망이 들어있는 게 아닐까. 원어민처럼 프랑스어를 구사하면서도, 사랑의 절정에 순간에 내뱉는 말들을 상대방에 전달할 수 없다는 좌절감을 마리즈는 이해할 수 있었을까? 아마도 아닐 것이다. 그렇게 해서 베르칸의 귀향은 합리적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저자는 독자들에게 확실하게 각인시키는데 성공한다.

 

그리고 베르칸은 마리즈에게 붙이지 못할 편지들을 쓰기 시작한다. 프랑스 파리에서는 도무지 쓸 수 없었던 글들이 고향으로 돌아오게 되니 그야말로 술술 풀리기 시작했다는 말일까. 소설 <프랑스어의 실종>은 지극히 사적인 감정과 관계로부터 출발하지만, 곧 지난 시절 알제 전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거대한 역사의 흐름에 대한 언급을 하기 시작한다. 어린 시절 프랑스 식민지배 당시, 프랑스 학교에 다닌 베르칸은 프랑스의 삼색기 대신 알제리를 상징하는 초록빛 깃발을 그렸다가 교장 선생님에게 뺨을 맞는 수모를 당한다. 그리고 2차세계대전 당시 프랑스 군인의 일원으로 전쟁에 참전했던 베테랑 아버지도 소환을 당한다. 프랑스의 알제리인가 아니면, 알제리의 알제리인가.

 

바로 이 지점이야말로 소설에서 다루는 핵심적 주제다. 대다수 피에 누아르들은 프랑스의 알제리를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베르칸을 비롯한 대다수 알제리 민중은 알제리의 알제리를 원했다. 알제 전투가 시작된 1954년 프랑스는 지구 반대편 베트남의 디엔비엔푸에서 궤멸적 패배를 당하지 않았던가. 베트남과는 또 다른 상황이었던가. 지중해 연안의 마그레브 제국과 고대 갈리아는 로마의 속주라는 역사적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알제리는 베트남과는 전혀 다른 형태의 식민지였다. 그 속사정에 대해 좀 더 알고 싶은데, 지금으로서는 무리다. 그나마 베트남에 대해서는 우리나라도 파병한 적이 있고, 다양한 저술들이 소개되었지만 알제 전투에 대해서는 접할 수 있는 자료가 극히 제한적이다.

 

소년 베르칸이 과연 알제 전투에서 무자비한 폭력을 휘두른 프랑스 낙하산 부대원과 그의 맞수 알제리 민족해방전선(FLN)의 대의를 얼마나 알고서 거리로 뛰쳐 나갔을까. 아마 그러지 않았을 것이다. 아버지와 형이 체포되고 가정을 이끌어 나가야 했던 소년 베르칸은 정숙한 집의 여성과 관계하고 어른이 되어 간다. 인쇄소 견습공 베르칸은 결국 프랑스 낙하산 부대원에게 포로가 되어 혹독한 고문을 당하고, 감옥에 갇히는 신세로 전락한다. 동생 드리스는 그런 형을 영웅으로 생각하지만, 실제는 많이 다르지 않았던가.

 

아시아 제바르는 나지아라는 미스터리한 여성을 투입하면서 이야기를 좀 더 복잡하게 만든다. 방문객이었던 나지아는 베르칸과 격렬한 사랑에 빠진다. 베르칸의 옛 애인 마리즈와는전혀 다른 형태의 사랑이었다. 좀 더 원초적이었고, 모국어인 아랍어를 사용하면서 두 개체는 완전한 합일의 경지에 도달한다. 마리즈와의 사랑이 이종교배 같은 성격이었다면, 나지아와의 사랑은 완벽의 현현이었다고나 할까. 여기서 베르칸은 스스로를 늙은 오르페우스라고 불렀던가.

 

어쨌든 조국 알제리의 정치적 현실은 그렇게 녹록하지 않았다. 프랑스로부터 해방이 되었을 지는 몰라도, 그 후에는 해외파와 국내파의 치열한 정쟁이 기다리고 있었고 그 뒤에는 혹독한 방식의 독재가 대기 중이었다. 늙은 오르페우스를 기다리고 있는 건, 현세의 행복이 아니라 이별과 그리운 옛 시절에 대한 향수 정도였다. 그렇게 해서 나지아는 베르칸을 떠나고, 베르칸 역시 실종된다.

 

<프랑스어의 실종>은 어제 감기몸살에 걸려 정신이 몽롱한 가운데 아침부터 저녁까지 다 읽어내렸다. 해설을 보면 이 소설은 페미니즘적 글을 다수 발표한 아시아 제바르의 성향과는 많이 다른 느낌의 글이라고 한다. 아무래도 남자 주인공 베르칸의 시선에서 소설이 전개되다 보니 그럴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마리즈나 나지아 모두 주체적인 모습보다는 외부의 타자로 보이는 것도 어쩔 수가 없다. 마리즈는 알제리과 아랍어를 모르는 어쩔 수 없는 이방인이고, 나지아 역시 두 개의 여권을 가진 이중적인 캐릭터가 아닌가.

 

아시아 제바르의 <프랑스어의 실종>은 나에게 알제 전투에 대해 좀 더 알고 싶다는 지적 욕망을 촉발시켰다는 점에 의미를 두고 싶다. 프란츠 파농의 <검은 피부, 하얀 가면>과 노서경 작가의 <알제리 전투> 그리고 2년 전에 사두고 묵힌 알렉스 제니의 <프랑스식 전쟁술>도 읽어야지 싶다. 나의 꼬리에 꼬리를 무는 독서는 끝이 없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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