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중톈 중국사 5 : 춘추에서 전국까지 이중톈 중국사 5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5년 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이달에는 이 책까지 해서 모두 12권으로 나의 독서편력을 마무리할 것 같다. 주말에 도서관에 빌려서 못다 읽은 책들을 반납하러 갔다가 빌려 왔다. 존 톨런드의 한국전쟁을 먼저 시작했는데, 가독성이 좋은 이중톈 선생의 중국사 춘추전국편을 먼저 읽었다.

 

장장 500여년에 걸친 파란만장한 시절을 250쪽 남짓한 책에 담으려는 저자의 노고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때로는 길게 늘여 쓰는 것보다, 축약해서 간략하게 쓰는 게 더 어렵다는 걸 리뷰를 쓰다 보니 절실하게 느끼겠더라. 취사선택이 그래서 무엇보다 중요하지 싶다.

 

선생은 춘추시대와 전국시대에 가장 영향력이 있었던 사건으로 전자는 제환공의 패주 등극과 후자는 진나라 효공시절 상앙의 변법을 꼽는다. 서주의 동천 이래, 정나라 장공이 패주 행세를 했다. 자그마치 22년 동안 동생과 생모의 반역을 기다린 정장공이야말로 희대의 군주가 아닐까 싶다. 견융족의 침입으로 호경(함양)에서 낙양으로 수도를 옮긴 주식회사 시스템의 주나라의 위세는 이제 더 이상 찾아볼 수가 없었다. 여전히 존왕양이 시스템을 방국제도의 근간으로 삼고 있었지만 시절은 이제 더 이상 도의정치가 먹혀들지 않는 약육강식의 시대로 변모해 가는 중이었다.

 

어쩌면 제환공을 보필해서 패주에 자리에 오르게 만든 관중이야말로 오늘날의 중국을 설계한 명재상이 아닐까 싶다. 근본적으로 재상 관중이 만든 나라는 훗날 군국주의 국가 모델로 봐도 무방하지 싶다. 군대야말로 도시국가에서 영토국가로 나아가는 첩경이라는 사실을 깨달은 관중은 3만의 정예병을 양성해서 천하제패에 나서게 된다. 제나라를 필두로 한 주나라가 책봉한 제후들은 각자도생의 길을 추구하면서 소국들과 연합해서 회맹을 갖고 패주의 자리에 오르는 것으로 유명무실해진 주나라를 대신해서 천하의 도를 행하게 되었다.

 

이중톈 선생은 중원에 자리잡은 진(晋)나라야말로 화하(華夏), 그러니까 중국의 실제를 있게 만든 나라였다고 강조한다. 수십 년간 망명생활을 마치고, 이웃 진목공의 도움으로 귀국해서 나라의 군주가 된 공자 중이 그러니까 진문공은 남방의 초나라를 한 번의 전쟁으로 제압하고 명실상부한 천하맹주의 자리에 오른다. 남방의 강자 초나라는 처음부터 제왕을 칭하면서 만이라는 사실을 애써 감추지 않는다.

 

저자는 어쩌면 초나라-오나라-월나라로 이어지는 패권국가가 중원의 예악을 따르지 않는 실리적인 방식으로 패권을 차지했다고 주장한다. 제나라의 전진 일가가 주왕실로부터 제후로 인정되고 삼진의 분리로 전국시대가 시작되면서 이러한 시대의 흐름은 가속화되기 시작한다. 그것은 마치 서양 중세시대 기사도 정신이 후퇴하고, 근대화된 보병이 출현하면서 전쟁의 방식이 달라진 것 같다고 해야 할까.

 

한편 중원의 패자 진나라와 남방의 강국 초나라 사이에 낀 소국들인 정나라, 송나라 그리고 노나라의 운명은 그야말로 풍전등화 같은 신세였다. 진나라가 강성할 때는 진나라 편에 붙고, 또 초나라가 국운이 하늘을 찌를 적에는 초나라 편에 붙은 이 세 개의 소국들을 현대의 시점으로 비난할 수 있을까. 초나라에 포위된 송나라를 구할 의향도 없으면서 사지에 파견된 진나라 장군 해양과 조국을 구하기 위해 스스로 포로를 자처한 대부 화원의 고사는 정말 눈물겨울 정도다.

 

한편 주나라의 동천 이후, 제후로 임명되어 서방의 견융족을 제압하는데 성공한 진(秦)나라는 전국시대 위나라에서 등용되지 못한 상앙을 받아 들여 훗날 전국통일의 기초를 닦는데 성공한다. 춘추대의라는 표현이 있듯이 도의와 예악을 중시했던 춘추시대와 달리 전국시대는 오로지 실력이 말해주는 시대였다. 전국의 수많은 사인들은 자신들의 재주를 사주는 이가 있다면 나라와 거리를 마다하지 않고 달려갔다. 기존의 춘추시대가 귀족 중심의 기존 질서유지를 목적으로 한 시대였다면, 전국시대는 실력이 모든 걸 증명하는 시대였다. 전쟁에서도 패하고 복종을 맹세하면 국가로 삼아 남을 수 있었지만, 오나라와 월나라의 전쟁에서 보듯이 상대방을 최종적으로 섬멸하는 것이 전쟁의 유일한 목적이었다. 전쟁에 패한 병사들과 성에 거주하는 주민들에 대한 학살극도 등장하기 시작했다.

 

다시 상앙의 변법으로 돌아가 진나라의 상황을 살펴보면, 상당한 실력을 갖추고 있었지만 진나라는 중원의 제후국으로부터 제대로 된 나라로 인정받지 못했다. 그래서 진목공을 저자는 준패주로 간주했던 것일까. 진나라 고유의 장례 풍습인 순장 때 수많은 사람들을 제후와 같이 묻었다는 이유로 패주의 자리에 올리지 않은 점도 주목할 만하다. 이방인 상앙은 군주의 총애를 받으면서 엄격한 법가주의에 기초한 개혁을 실시하기 시작했다. 기존 세습귀족들의 특권을 모두 폐지하고, 전자에서 능력을 발휘한 신귀족들을 등용하면서 모든 권한을 군주에게로 돌리는 군현제로 나라를 개조하기 시작했다. 법치주의의 기본인 엄격한 처벌 정책은 말할 필요도 없었다. 진효공과 상앙은 아예 나라를 통째로 미래의 통일전쟁에 적합한 군국주의 국가로 개조하는데 성공한 것이다. 문제는 상앙의 최후가 수많은 개혁가들의 그것처럼 불운했다는 점이다. 국가의 미래는 예측했지만, 진효공 사후 자신의 운명이 어떻게 될 거라는 예측은 왜 하지 못했을까.

 

맹상군의 식객으로 등장하는 풍환의 고사도 흥미진진하다. 제왕의 권위를 능가할 정도의 명성을 지닌 공족 맹상군 휘하에는 자그마치 3,000명의 식객이 있었다고 한다. 자신들의 주군인 맹상군의 식사와 같다는 걸 보여주기 위해 식객들에게 자신의 밥상을 보여주었다니 놀랍기만 하다. 야사도 첨가되긴 했겠지만, 그만큼 다양한 재주를 지닌 사인들이 맹상군의 휘하에서 활동했다는 점이 흥미롭게 다가왔다.

 

조나라에 볼모로 잡혀와 있던 공자 이인의 미래에 거금을 투자한 상인 여불위의 이야기는 또 어떠한가. 시절인연처럼 의기투합한 여불위와 공자 이인의 운명은 던지는 족족 맞아 떨어졌지만, 결국 문신후 여불위는 편안한 노후를 맞지 못하고 진왕 정, 훗날 진시황에 의해 자결 명령을 받지 않았던가.

 

춘추전국시대를 읽으면서 아쉬웠던 점 중의 하나는 전국시대 초기 가장 융성했던 국력을 자랑했던 위나라가 초반의 기세를 이어가지 못하고 결국 서방의 진나라에게 복속당했다는 점이다. 그것은 마치 춘추시대 초반의 정나라의 그것과 유사하다. 결국 후발주자에게 잡혀 먹힌 셈이 아닌가. 상앙을 등용하지 않으려면 죽이라는 공손좌의 충언을 듣지 않은 위혜왕은 결국 통한의 패전을 겪게 된다. 결국 진나라의 공격 앞에 하서지역의 영토를 할양하고 수도마저 안읍에서 대량으로 옮기는 수모를 경험한다. 군주의 잘못된 선택이 나라를 거의 망국에까지 몰아넣은 것이다.

 

저자는 합종연횡으로 한 시절을 호령했던 소진과 장의에 대해서도 도박꾼과 사기꾼이라는 표현으로 일갈한다. 자객에게 암살당한 소진은 사후 자신의 복수를 위해 군주에게 범인을 잡을 묘책을 알려준다. 도둑으로 몰려 엄청나게 두들겨 맞은 장의는 자신의 혀가 온존하지 않느냐는 말로 미래의 성공에 대한 자신감을 드러내기도 한다. 이런 도박꾼과 사기꾼에게 올바른 국가관이나 주군에 대한 충성 따위는 아무 것도 아니었다. 오로지 자신들의 안위와 명성 그리고 치부에만 관심을 가졌다. 그러니 그들에 대한 후세의 평가가 박할 수밖에.

 

이중톈 선생의 중국사는 읽을수록 재밌다. 그냥 설렁설렁 읽기 시작했는데 이러다가 팬이 될 기세다. 다른 책들도 한 번 읽어봐야지 싶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또 백씨다. 이번에도 독자를 위한다며 구체적인 실례를 대지 못하고 독자를 위한 정가제타령을 한다.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면 뭐가 구체적으로 독자들에게 유익한 것인지 칼럼에서 아무런 말도 없다. 입으로만 독자를 위한다는 것이다. 정말 지긋지긋하구나.

 

그러면서 총선 전에 법 개정을 요구한다. 사실 지금 그따위 도서정가제보다 훨씬 더 중요한 선거법 개혁, 공수처 설치 그리고 검경조정안 같은 사안들도 해결이 안되는 마당에, 도서정가제에 대한 개정안 타령을 하는 것도 우습다.

 

현재 인터넷 서점에서 주는 10% 할인과 5% 포인트가 독자들에게 실질적인 이익이 아니라고 하는데 이건 또 무슨 말인가. 내 생각이지만 백씨는 항상 출판사와 중소서점 편이다. 독자는 안중에도 없다. 그러면서 독자를 위한다고 한다. 할인을 적용받는 독자에게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면 독자들에게 어떤 이익이 주어지는지 그는 칼럼에서 밝혀야 한다.

 

그리고 책이 공공재라는 신박한 주장은 또 어떤가. 아니 내가 내 돈 주고 산 책이 공공재라고? 거시적 차원에서는 일면 그럴 수도 있겠지만, 개인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말이다. 어떻게 해서 내가 산 책이 공공재라는 것인가. 공공이 함께 쓰는 물건을 개인의 돈을 주고 사는 경우가 있나. 내가 산 책은 나에게는 소비재다.

 

도서정가제를 시행하면 1980년대처럼 전국에 서점이 많아질 거라는 주장에 전혀 동의하지 않는다. 사람들이 , 이제 도서정가제가 시행되었으니 동네서점으로 달려가 책을 사서 읽자이럴 거라고? 넌센스도 이런 넌센스가 없다. 40년 전에 모바일폰이 없었고, 지금처럼 다양한 채널이 있었던가. 어떤 이들에게는 책보다 재밌는 것들이 널려 있는데 왜 책을 읽어야 한단 말인가. 그의 논리대로라면 책의 경쟁자는 도서정가제다. 왜 사람들이 책을 읽지 않는 지에 대한 분석이 먼저가 아닌가. 지금도 책값이 비싸다도 책을 읽지 않는 사람들이 부지기수인데, 도서정가제를 실시하면 전국의 책읽는 인구들이 불길처럼 늘어날 것이다? 이런 해괴한 논리는 도대체 어디서 온 걸까.

 

이런 허튼 소리보다 차라리 전국민 책읽기 캠페인을 벌이는 것이 나을 것 같다. 도서정가제가 시행되던 안되던 책읽는 훈련이 안된, 독서의 즐거움을 모르는 이들은 여전히 일 년에 단 한 권의 책도 읽지 않을 것이다. 앞으로도. 도서정가제는 그런 책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 아니라, 오늘도 조금이라도 싼 책을 사기 위해 온라인 서점에서 발행하는 할인쿠폰, 출석체크, 카드포인트, 카드할인 등 강구할 수 있는 모든 방법을 모색하는 기존 독서인들에게나 해당되는 말이다.

 

100% 완전한 도서정가제 시행이 아니라면, 도서정가제 타령은 이제 그만하면 좋겠다. 책사는 사람들이 오랫동안 할인에 익숙해진 우리 현실에서 100% 완전한 도서정가제 시행은 불가능하다. 그리고 제발 독자들을 위한다는 핑계는 대지 않았으면 좋겠다. 독서정가제는 업자들을 위한 시스템이 아닌가.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찐새 2019-04-27 14:1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정말 독서율이나 확 끌어올리고 가격 따졌으면 좋겠습니다ㅜㅜ 1년에 책이 4~5만 권 찍혀도 제자리걸음인데. 책과사회연구소가 아니라 책‘값‘사회연구소인가봐요...

레삭매냐 2019-04-27 21:48   좋아요 2 | URL
제 말이 바로 그 말이랍니다...

독서율 향상을 위한 제언 같은 의견
대시 오로지 법률 제정으로 무언가
를 해보겠다는 발상 자체가 시대착오
적이라고 생각합니다.

아무래도 업자 편이라서 씁쓰름하네요.

AgalmA 2019-04-28 01: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온지 몇 년 안 된 책이 절판되는 상황인데, 도서정가제도 굵직한 출판사에게나 도움되지 소규모 출판사에게 얼마나 도움이 되겠어요. 게다가 굿즈로 돌아가는 온라인 서점 판도를 생각하면 영세한 출판사는 더 사면초가죠. 저도 굿즈쟁이이긴 합니다만; 사람들이 잘 안 찾아보는 책들 골라 보는 노력이라도 하는데, 책 취향이 별로 없고 가끔 기분 내키면 책 사는 사람들은 눈에 띄는 책만 겨우 살피겠죠.
에효.

레삭매냐 2019-04-29 11:14   좋아요 2 | URL
예전에는 초판 5,000부가 기본이었는데
이제는 2,500부 정도 찍는 모양입니다...

언급해 주신 대로 메이저 출판사 외에는
도서정가제 시행이 그다지 의미 없어
보입니다.

굿즈 개발은 인터넷 서점의 불황 탈출
방법이 아닐까 싶습니다.

2019-04-28 12:4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9 11: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8 12:44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9-04-29 11:1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스카니오 2019-05-01 22:30   좋아요 1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벌써 백씨 아녀도 장은수 같은 사람들도 벼르고 있는 중이던데요
여기저기 완전도서정가제로 동네 서점을 살려보자 이런 학생기자단 뉴스 나오는 것 보면 뭐..ㅎㅎ
한가지 더 재미난건
저 분들
누가 감히 도서정가제 반대하는 글을 쓰는지 아이디도 꼼꼼히 체크하시는것 같더군요
매번 똑 같은 아이디가 도서정가제 반대하는 글 쓴다면서 예의주시하시는 듯.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선생의 답사기는 이제 한국과 일본을 거쳐 중국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수년 전, 부여답사에 참가하면서 그 소문난 유홍준 선생의 답사를 직접 체험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선생의 말에 다 동의하는 바는 아니었지만(특히 박물관 입장 유료 정책에는!), 역시나 고수를 따라하는 진정한 답사는 학창 시설 이래 얼마 만이었던가. 얼치기나마 답사를 기획하기도 해서 그런지 선생의 답사기는 한 때 경전처럼 다루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다른 곳도 아니고 오래전 NHK에서 방영했던 실크로드를 걷는 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도저히 안보고는 배길 재간이 없더라. 당장 주문을 해서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흑백 도판에 평범한 지질이었던 것 같은데 단가가 제법 올라가긴 했다만 칼라 채색에 종이질도 아주 우수해서 더더욱 마음에 든다. 역시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선생의 답사기가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선생은 중국 답사 일번지로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하서회랑과 돈황을 꼽았다. 출발점은 관중평원이었다. 일찍이 초한지의 주인공이었던 유방과 항우가 쟁패를 벌였던 중국 문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관중 지방 말이다. 지금도 수도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장안은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로 군림해 왔다. 당나라 이후, 수도가 된 적은 없지만 지금은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중국 일대일로의 거점 도시가 아닌가 싶다. 선생은 서론에서 광활한 중국 전역을 답사할 수는 없으니, 고도 위주의 답사 프로젝트를 가동할 계획이라고 언급하셨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답사란 모름지기 발로 해야 제 맛이다, 그런데 그 넓은 땅덩이를 어찌 다 발로 밟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때로는 문명의 이기도 이용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예술가 도반들과 함께 나선 하서회랑과 돈황에 대한 선생의 썰들이 중국답사기의 전반을 장식한다. 중국 문명사는 자고로 흉노로 대변되는 유목민족과 한족 정주민족 간의 투쟁의 역사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장성을 넘어야 했다. 중원의 강력한 통일국가가 존재할 적에는 유목민족은 장성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분열의 시절만큼 그들에게 좋은 시절은 없었다. 한무제는 우리나라의 한사군을 필두로 해서, 베트남의 한구군 그리고 서역 경영에도 적극적이어서 무위, 장액, 주천 그리고 돈황에 이르는 하서사군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하서사군과 돈황의 막고굴이 바로 이번 유홍준 선생이 다루는 답사기의 핵심이다.

 

그동안 꾸준하게 중국 관계 서적들을 읽어서 선생이 들려주는 중국사에 대한 이야기는 부담이 없었다. 다만 아무래도 미술사학 쪽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그저 선생이 이끄는 대로 달려갈 뿐이었다. 선생도 나처럼 최근 얼치기 방식의 복원에 대해 혐오한다는 점에 공감이 갔다. 아무런 미적 의식도 없이 그저 사적지에 테마파크식의 조각상을 만들고, 돌덩이에 붉은 글씨를 써 내리는 게 과연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런 점에서 문화재 복원을 할 때는 아무리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는다고는 하지만, 신중을 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런 복원 작업도 시절이 흘러 새로운 창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도 동이족이라고 중국으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으면서, 또 다른 오랑캐들인 흉노족을 무시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선생은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우리 역시 중화민족이 아닌 변방민족이 아니었던가. 중국 역사에 등장하던 수많은 민족들이 한족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숱한 침략을 당하면서도 근린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문화적으로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고 선생은 새삼 강조한다.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시원을 이루는 운강석굴 유적을 필두로 해서 다양한 석굴 유적이 성행한 것에 대해서도, 그 나라의 상황과 조건에 맞춰 문화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눈길을 끈다. 중국에는 사암질의 석굴이 있어 석굴에 감실을 비롯해서, 석태니소(石苔泥塑) 기법으로 제작된 다양한 형태의 불상들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에 맞는 산사가 있지 않은가. 물론 석굴암 같인 인공석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서역 간다라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중국인들의 모습과 달라 보이는 불상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도 통일신라시대 괘릉에 우리의 그것과는 얼굴의 조각상이 있지 않은가. 나름 중국 석굴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맥적산석굴은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좀 더 문화적으로 세련되진 성당시대의 육덕진 불상보다 나는 북위 시대 고졸하고 소박해 보이는 불상이 더 마음에 들더라.

 

선생은 단순하게 문화 유적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가 생성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에 대해서도 치밀한 자료 조사와 인과관계를 연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독서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아마 나라면 이백이나 두보 타령을 하면서 유람선에 올라 술잔을 거침없이 입 안으로 털어 넣었겠지만, 선생은 그 시간에도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학생의 심정을 자료를 파셨다고 했던가.

 

중화제국에서는 흉노족과 대결하기 위해 마필이 반드시 필요했다. 현재의 전차에 해당하는 흉노족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한무제는 한혈마를 애타게 원했다. 무위 인근에서 발굴된 뇌대한묘의 청동제 마답비연상의 기상은 정말 웅대했다. 정말 이런 모조품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돈황 답사팀은 하서주랑을 따라 북상하면서 하서사군을 섭렵한다. 개인적으로 답사의 묘미는 추가가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안보고 가느냐는 말에는 정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기껏 답사 코스를 짰지만, 막상 가지 못하게 될 적에는 과감하게 패스할 줄 아는 미덕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답사는 나만 혼자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상황이 되지 않는데 억지로 꼭 가야 하는 곳은 없다. 훗날을 도모하면서 미련을 버리는 괴로움은 아마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내게는 영월 수주면의 흥령선원지가 그런 곳이었다.

 

유홍준 선생의 중국답사기 1편은 돈황 막고굴을 목전에 두고 명사산 월아천 오아시스에서 막을 내린다. 당장에라도 2권을 읽고 싶지만 아쉽게도 어제 집에 두고 와서 이따가 집에 가서 읽어야할 것 같다. 이런 기세라면 이달 내에 모두 다 읽지 않을까 싶다. 선생이 소개한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돈황>은 9년 전에 읽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리뷰를 찾아 봐야할 것 같다. 기록은 이래서 중요하다. 2권을 왜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아쉽다 정말.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래 전에 살던 곳에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 줄창 러브송만 들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어느 이방인의 마음을 달래 주던 디제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데이빗 앨런 부쉐.

 

어제 라디오로 야구 중계나 들어 볼까 하고 수많은 라디오 앱들을 검색해 보았으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그 시절 즐겨 듣던 라디오 디제이의 근황을 엿볼 수가 있었다.

 

유튜브가 있어 숱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자신의 정체를 엄청 숨기는 모양이다. 인터뷰 진행하는 동안, 페도라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시청자들에게는 뒤통수만 보여 준다. 아니 그럼 그동안 아무도 이 사람의 정체를 몰랐단 말인가.

 

1982년부터 방송을 베드타임 뮤직을 진행해 오셨다고 하는데, 자그마치 37년이나 진행해 오셨네 그래. 어제 마침 시간이 맞아 데이빗 앨런 부쉐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볼 수가 있었다. 그전에는 참 목소리가 쎅시 그 자체였었는데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는지 예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역시 흐르는 세월, 그 누가 막으리오.

 

그러니까 대부분의 라디오 청취자들은 이 디제이의 진짜 얼굴을 모르는 것이다. 혹시 일상 생활에서 누가 목소리를 듣고 알아 보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인터뷰어의 말에, 데이빗 앨런 부쉐는 자기 삼촌이 자기 목소리와 같다며 눙친다고 했다. 역시 고수다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는 질문에도 인터뷰어가 원하는 대답 대신, 모든 러브송을 좋아하노라고 말하고 피해 나가더라. 대단하구만 그래.

 

라디오시대가 곧 죽을 거라는 지난 세기말의 예언은 정확하게 틀렸다. 라디오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전파를 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니 이제는 인터넷 시대를 맞아, 그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은 눈과 귀를 다 필요로 하지만, 라디오는 듣는 귀만 필요하지 않은가. 무언가 들으면서 일도 할 수 있으니, 요즘 같이 멀티플레이가 필요한 시절에 어쩌면 딱 들어맞는 매체가 아닌가 싶다.

 

미지의 디제이 아저씨가 과연 언제까지 방송을 하실 지 궁금해졌다. 모쪼록 건승하시길.

 


댓글(2)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cyrus 2019-04-28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모임 멤버가 팟캐스트 방송을 하고 있어요. 방송 프로그램 이름은 ‘페미니스트의 책장’입니다. 방송하고 있는 멤버가 제게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하라고 제안을 했는데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저의 정체를 숨기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방송에 출연하면 많이 긴장할 것 같아요. ^^;;

레삭매냐 2019-04-30 10:30   좋아요 0 | URL
데이빗 앨런 부쉐처럼 페도라 모자를
쓰고 출연하시는 건 어떨지요 ㅋㅋ

신비주의 컨셉이네요.

맞습니다, 일단 카메라 앞에 서면 긴장
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푸른 세계 -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3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주 오래 전, 어둠컴컴한 어느 시데마떼끄에서 장 자끄 베넥스의 <베티 블루> 무삭제판을 자막도 없이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본 기억이 난다. 주인공 베티의 삶이 화려하고 좋았을 적에는 오렌지색이었다가, 그녀의 광기가 폭발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짙은 푸른색으로 바뀌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노란 세계>로 출발한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푸른 세계>를 읽으면서 그 영화 <베티 블루>의 기억들이 그렇게 소환되었다.

 

어찌 보면 주인공의 이름은 없지만, 편의상 나중에 붙게 되는 이름은 소로야로 부르자. 순전히 얼치기 독자의 편의적 발상이니 이해해 주시길. 어려서 입양된 소로야는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는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다만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니면 애써 외면하면서 살고 있을 뿐.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잊지 않는다면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모두 죽을 텐데하고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로야만큼이나 저자 에스피노사의 삶도 그랬던 모양이다. 오래 전 그의 다른 작품을 읽었는데,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아마 그 소설에서도 죽음이 주제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푸른 세계>에서는 좀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죽음이 사나흘 밖에 남지 않은 소로야는 망자들의 휴식처로 알려진 ‘그랜드호텔’로 향한다.

 

비행기를 타고, 자신을 그랜드호텔로 안내해줄 소년이 모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 차가 퍼져서 단봉낙타를 타기도 한다. 작가는 죽음이 어쩌면 그런 경로를 통해 도달하게 된다는 걸 문학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걸까. 우매한 독자는 이게 판타지인지 아니면 리얼리티의 재현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구상하는 바를 읽지 못한 어쩌면 실패한 독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밝고 즐겁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낙타몰이는 하나의 신고식이었던 모양이다. 사지가 없는 몸통소년을 비롯해서 소로야와 비슷한 상황, 그러니까 죽음을 기다리는 열 명의 이들이 있는 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들 얼마 살지 않은 이들이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충분히 삶에 대한 의지를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숙명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죽고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는 동안, 소로야는 그들의 리더가 된다.

 

임신한 여자와 춤을 추기도 하고, 어쩌면 춤이라는 행위 자체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두가 추정이다. 에스피노사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는 모호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열심히 분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왜냐구? 나 역시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꾸만 죽음 그리고 소멸에 대해 생각해서 무엇하리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인가? 우리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면 대부분 돌+아이를 떠올린다. 일탈을 배격하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질서와 안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여력을 쏟을 여유가 없겠지. 그런 점에서 그랜드호텔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잉여일 따름이다. 지금은 그런 대로 유용하겠지만, 어느 순간 나도 잉여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혼돈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니 불과 어제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은 내용들인데도 벌써부터 콘텐츠에 대한 기억들이 휘발해 버리고 있다. 아마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내가 의도적으로 이 책에 대한 기억들을 지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두꺼운 책보다도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무지몽매한 독자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중한 접근 대신 다른 방식을 택했지만 말이다. 생존율 3%의 기적을 이겨내고 왕성한 필력을 보여주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