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중국편 1 : 돈황과 하서주랑 - 명사산 명불허전 나의 문화유산답사기
유홍준 지음 / 창비 / 2019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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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생의 답사기는 이제 한국과 일본을 거쳐 중국에까지 도달하게 되었다. 수년 전, 부여답사에 참가하면서 그 소문난 유홍준 선생의 답사를 직접 체험해 보는 기회를 가졌다. 물론 선생의 말에 다 동의하는 바는 아니었지만(특히 박물관 입장 유료 정책에는!), 역시나 고수를 따라하는 진정한 답사는 학창 시설 이래 얼마 만이었던가. 얼치기나마 답사를 기획하기도 해서 그런지 선생의 답사기는 한 때 경전처럼 다루었던 기억이 난다.

 

이번에는 다른 곳도 아니고 오래전 NHK에서 방영했던 실크로드를 걷는 길이라고 하지 않던가. 그러니 도저히 안보고는 배길 재간이 없더라. 당장 주문을 해서 읽기 시작했다. 예전에는 흑백 도판에 평범한 지질이었던 것 같은데 단가가 제법 올라가긴 했다만 칼라 채색에 종이질도 아주 우수해서 더더욱 마음에 든다. 역시 그동안 많은 이들에게 사랑받은 선생의 답사기가 인정받는 것 같아 기분이 좋았다.

 

선생은 중국 답사 일번지로 실크로드의 시발점이라고 할 수 있는 하서회랑과 돈황을 꼽았다. 출발점은 관중평원이었다. 일찍이 초한지의 주인공이었던 유방과 항우가 쟁패를 벌였던 중국 문명의 요람이라고 할 수 있는 관중 지방 말이다. 지금도 수도의 대명사로 사용되는 장안은 중국 역대 왕조의 수도로 군림해 왔다. 당나라 이후, 수도가 된 적은 없지만 지금은 시안이라는 이름으로 여전히 중국 일대일로의 거점 도시가 아닌가 싶다. 선생은 서론에서 광활한 중국 전역을 답사할 수는 없으니, 고도 위주의 답사 프로젝트를 가동할 계획이라고 언급하셨다. 충분히 수긍이 가는 기획이 아닐 수 없다. 답사란 모름지기 발로 해야 제 맛이다, 그런데 그 넓은 땅덩이를 어찌 다 발로 밟고 다닐 수 있단 말인가. 때로는 문명의 이기도 이용해야 하는 법이지.

 

그렇게 예술가 도반들과 함께 나선 하서회랑과 돈황에 대한 선생의 썰들이 중국답사기의 전반을 장식한다. 중국 문명사는 자고로 흉노로 대변되는 유목민족과 한족 정주민족 간의 투쟁의 역사로 봐도 무방할 듯 싶다. 가지지 못한 자들은 가진 자들의 재물을 빼앗기 위해 장성을 넘어야 했다. 중원의 강력한 통일국가가 존재할 적에는 유목민족은 장성을 넘을 생각을 하지 못했지만 분열의 시절만큼 그들에게 좋은 시절은 없었다. 한무제는 우리나라의 한사군을 필두로 해서, 베트남의 한구군 그리고 서역 경영에도 적극적이어서 무위, 장액, 주천 그리고 돈황에 이르는 하서사군을 설치하기에 이른다. 그리고 이 하서사군과 돈황의 막고굴이 바로 이번 유홍준 선생이 다루는 답사기의 핵심이다.

 

그동안 꾸준하게 중국 관계 서적들을 읽어서 선생이 들려주는 중국사에 대한 이야기는 부담이 없었다. 다만 아무래도 미술사학 쪽에는 문외한이다 보니 그저 선생이 이끄는 대로 달려갈 뿐이었다. 선생도 나처럼 최근 얼치기 방식의 복원에 대해 혐오한다는 점에 공감이 갔다. 아무런 미적 의식도 없이 그저 사적지에 테마파크식의 조각상을 만들고, 돌덩이에 붉은 글씨를 써 내리는 게 과연 무슨 의미란 말인가. 그런 점에서 문화재 복원을 할 때는 아무리 당대의 시대정신을 담는다고는 하지만, 신중을 기해 주었으면 하는 바람이다. 물론 그런 복원 작업도 시절이 흘러 새로운 창조가 될 수 있다고 말한다면 또 할 말이 없겠지만 말이다.

 

우리도 동이족이라고 중국으로부터 오랑캐 취급을 받았으면서, 또 다른 오랑캐들인 흉노족을 무시하는 경향에 대해서도 선생은 할 말이 많은 듯하다. 우리 역시 중화민족이 아닌 변방민족이 아니었던가. 중국 역사에 등장하던 수많은 민족들이 한족문화에 동화되었지만 숱한 침략을 당하면서도 근린에서 민족적 정체성을 유지한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 아닐 수 없다. 아울러 문화적으로 자긍심을 가질 만하다고 선생은 새삼 강조한다.

 

인도에서 유래한 불교가 중국으로 전파되면서 시원을 이루는 운강석굴 유적을 필두로 해서 다양한 석굴 유적이 성행한 것에 대해서도, 그 나라의 상황과 조건에 맞춰 문화가 이루어진 것이라는 분석이 눈길을 끈다. 중국에는 사암질의 석굴이 있어 석굴에 감실을 비롯해서, 석태니소(石苔泥塑) 기법으로 제작된 다양한 형태의 불상들을 만들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우리나라에는 우리나라에 맞는 산사가 있지 않은가. 물론 석굴암 같인 인공석굴에서도 발군의 실력을 보여준 바 있다. 서역 간다라 미술에서 영향을 받은 듯한 중국인들의 모습과 달라 보이는 불상도 인상적이었다. 우리나라에도 통일신라시대 괘릉에 우리의 그것과는 얼굴의 조각상이 있지 않은가. 나름 중국 석굴에 대해 알고 있다고 자부했지만, 맥적산석굴은 정말 금시초문이었다. 좀 더 문화적으로 세련되진 성당시대의 육덕진 불상보다 나는 북위 시대 고졸하고 소박해 보이는 불상이 더 마음에 들더라.

 

선생은 단순하게 문화 유적에만 관심을 두는 것이 아니라, 그런 문화가 생성될 수 있는 다양한 조건에 대해서도 치밀한 자료 조사와 인과관계를 연결하려는 시도를 보여준다. 독서인의 올바른 자세가 아닌가. 아마 나라면 이백이나 두보 타령을 하면서 유람선에 올라 술잔을 거침없이 입 안으로 털어 넣었겠지만, 선생은 그 시간에도 벼락치기 공부를 하는 학생의 심정을 자료를 파셨다고 했던가.

 

중화제국에서는 흉노족과 대결하기 위해 마필이 반드시 필요했다. 현재의 전차에 해당하는 흉노족 기병대를 상대하기 위해 한무제는 한혈마를 애타게 원했다. 무위 인근에서 발굴된 뇌대한묘의 청동제 마답비연상의 기상은 정말 웅대했다. 정말 이런 모조품이 있다면 당장에라도 사고 싶을 정도로 말이다.

 

돈황 답사팀은 하서주랑을 따라 북상하면서 하서사군을 섭렵한다. 개인적으로 답사의 묘미는 추가가 아니라 덜어내는 것이다. 여기까지 왔는데 이걸 안보고 가느냐는 말에는 정말 다양한 의미가 내포되어 있는 것이다. 기껏 답사 코스를 짰지만, 막상 가지 못하게 될 적에는 과감하게 패스할 줄 아는 미덕도 있어야 한다. 게다가 답사는 나만 혼자 가는 게 아니지 않은가. 상황이 되지 않는데 억지로 꼭 가야 하는 곳은 없다. 훗날을 도모하면서 미련을 버리는 괴로움은 아마 경험해 보지 않은 사람이라면 모를 것이다. 내게는 영월 수주면의 흥령선원지가 그런 곳이었다.

 

유홍준 선생의 중국답사기 1편은 돈황 막고굴을 목전에 두고 명사산 월아천 오아시스에서 막을 내린다. 당장에라도 2권을 읽고 싶지만 아쉽게도 어제 집에 두고 와서 이따가 집에 가서 읽어야할 것 같다. 이런 기세라면 이달 내에 모두 다 읽지 않을까 싶다. 선생이 소개한 이노우에 야스시의 소설 <돈황>은 9년 전에 읽었는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리뷰를 찾아 봐야할 것 같다. 기록은 이래서 중요하다. 2권을 왜 가방에 넣어 가지고 오지 않았을까 아쉽다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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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살던 곳에 저녁 8시부터 12시까지 줄창 러브송만 들던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었다. 낯설고 물선 곳에서 어느 이방인의 마음을 달래 주던 디제이가 있었으니 그의 이름은 데이빗 앨런 부쉐.

 

어제 라디오로 야구 중계나 들어 볼까 하고 수많은 라디오 앱들을 검색해 보았으나 소기의 목적은 달성하지 못했다. 대신 그 시절 즐겨 듣던 라디오 디제이의 근황을 엿볼 수가 있었다.

 

유튜브가 있어 숱한 정보들을 실시간으로 접할 수가 있게 되었다. 그중에 하나를 보게 되었는데, 이 양반이 자신의 정체를 엄청 숨기는 모양이다. 인터뷰 진행하는 동안, 페도라 모자를 써서 얼굴을 가리고 시청자들에게는 뒤통수만 보여 준다. 아니 그럼 그동안 아무도 이 사람의 정체를 몰랐단 말인가.

 

1982년부터 방송을 베드타임 뮤직을 진행해 오셨다고 하는데, 자그마치 37년이나 진행해 오셨네 그래. 어제 마침 시간이 맞아 데이빗 앨런 부쉐의 목소리를 다시 들어볼 수가 있었다. 그전에는 참 목소리가 쎅시 그 자체였었는데 시간의 흐름을 막을 수가 없었는지 예의 그 목소리가 아니었다. 역시 흐르는 세월, 그 누가 막으리오.

 

그러니까 대부분의 라디오 청취자들은 이 디제이의 진짜 얼굴을 모르는 것이다. 혹시 일상 생활에서 누가 목소리를 듣고 알아 보면 어떻게 대응하느냐는 인터뷰어의 말에, 데이빗 앨런 부쉐는 자기 삼촌이 자기 목소리와 같다며 눙친다고 했다. 역시 고수다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그리고 가장 좋아하는 노래가 뭐냐는 질문에도 인터뷰어가 원하는 대답 대신, 모든 러브송을 좋아하노라고 말하고 피해 나가더라. 대단하구만 그래.

 

라디오시대가 곧 죽을 거라는 지난 세기말의 예언은 정확하게 틀렸다. 라디오는 여전히 우리 곁에서 전파를 타고 있는 현재진행형이다. 아니 이제는 인터넷 시대를 맞아, 그 영역을 전 세계로 확장하기에 이르렀다. 텔레비전은 눈과 귀를 다 필요로 하지만, 라디오는 듣는 귀만 필요하지 않은가. 무언가 들으면서 일도 할 수 있으니, 요즘 같이 멀티플레이가 필요한 시절에 어쩌면 딱 들어맞는 매체가 아닌가 싶다.

 

미지의 디제이 아저씨가 과연 언제까지 방송을 하실 지 궁금해졌다. 모쪼록 건승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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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4-28 15:4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페미니즘 독서모임 멤버가 팟캐스트 방송을 하고 있어요. 방송 프로그램 이름은 ‘페미니스트의 책장’입니다. 방송하고 있는 멤버가 제게 팟캐스트 방송에 출연하라고 제안을 했는데 정중하게 거절했어요. 저의 정체를 숨기고 싶었거든요. 그리고 방송에 출연하면 많이 긴장할 것 같아요. ^^;;

레삭매냐 2019-04-30 10:30   좋아요 0 | URL
데이빗 앨런 부쉐처럼 페도라 모자를
쓰고 출연하시는 건 어떨지요 ㅋㅋ

신비주의 컨셉이네요.

맞습니다, 일단 카메라 앞에 서면 긴장
하지 않을 수 없답니다.
 
푸른 세계 - 너의 혼돈을 사랑하라
알베르트 에스피노사 지음, 변선희 옮김 / 연금술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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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주 오래 전, 어둠컴컴한 어느 시데마떼끄에서 장 자끄 베넥스의 <베티 블루> 무삭제판을 자막도 없이 장장 세 시간에 걸쳐 본 기억이 난다. 주인공 베티의 삶이 화려하고 좋았을 적에는 오렌지색이었다가, 그녀의 광기가 폭발하는 후반으로 갈수록 짙은 푸른색으로 바뀌는 장면이 참 인상적이었다. <노란 세계>로 출발한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푸른 세계>를 읽으면서 그 영화 <베티 블루>의 기억들이 그렇게 소환되었다.

 

어찌 보면 주인공의 이름은 없지만, 편의상 나중에 붙게 되는 이름은 소로야로 부르자. 순전히 얼치기 독자의 편의적 발상이니 이해해 주시길. 어려서 입양된 소로야는 아버지가 죽은 뒤, 얼마 살지 못할 거라는 선고를 받는다. 우리 인간은 모두 죽기 마련이다. 다만 너무나 먼 미래의 일이라고 생각하고, 아니면 애써 외면하면서 살고 있을 뿐. 소멸에 대한 두려움을 잊지 않는다면 일상의 생활이 불가능할 지도 모르겠다.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의미란 말인가. 모두 죽을 텐데하고 말이다.

 

소설의 주인공으로 나오는 소로야만큼이나 저자 에스피노사의 삶도 그랬던 모양이다. 오래 전 그의 다른 작품을 읽었는데, 희미한 기억으로만 남아 있다. 아마 그 소설에서도 죽음이 주제였던 것 같은데 말이다. <푸른 세계>에서는 좀 더 노골적인 방식으로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전개한다. 그러니까 죽음이 사나흘 밖에 남지 않은 소로야는 망자들의 휴식처로 알려진 ‘그랜드호텔’로 향한다.

 

비행기를 타고, 자신을 그랜드호텔로 안내해줄 소년이 모는 자동차를 타고 가다 차가 퍼져서 단봉낙타를 타기도 한다. 작가는 죽음이 어쩌면 그런 경로를 통해 도달하게 된다는 걸 문학적으로 그리고 싶었던 걸까. 우매한 독자는 이게 판타지인지 아니면 리얼리티의 재현인지 도무지 구분할 수가 없다. 그런 점에서 저자가 구상하는 바를 읽지 못한 어쩌면 실패한 독서일 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항상 밝고 즐겁게 살고 싶은데 말이다.

 

낙타몰이는 하나의 신고식이었던 모양이다. 사지가 없는 몸통소년을 비롯해서 소로야와 비슷한 상황, 그러니까 죽음을 기다리는 열 명의 이들이 있는 곳에서 남은 시간을 보내게 된다. 다들 얼마 살지 않은 이들이지만, 그곳에 머무는 동안만큼은 충분히 삶에 대한 의지를 엿보이기도 한다. 하지만 죽음이라는 숙명은 그들을 기다려 주지 않는다. 계속해서 죽고 새로운 멤버가 들어오는 동안, 소로야는 그들의 리더가 된다.

 

임신한 여자와 춤을 추기도 하고, 어쩌면 춤이라는 행위 자체가 삶에 대한 강렬한 욕구의 다른 표현이 아닌가 싶기도 하다. 모두가 추정이다. 에스피노사 작가가 구사하는 서사는 모호하기 그지 없다. 그리고 솔직히 말해서 그렇게 열심히 분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도 없다. 왜냐구? 나 역시 죽음이 두렵기 때문이다. 자꾸만 죽음 그리고 소멸에 대해 생각해서 무엇하리라는 생각만 들 뿐이다.

 

자유로운 사람이 행복하다고 한다. 그렇다면 나는 자유로운 영혼인가? 우리 사회에서 자유로운 영혼이라고 하면 대부분 돌+아이를 떠올린다. 일탈을 배격하는 고도로 발달된 자본주의 시스템은 질서와 안정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생각한다. 그러니 앞으로 자본주의적 생산양식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할 죽음을 기다리는 이들에게 여력을 쏟을 여유가 없겠지. 그런 점에서 그랜드호텔로 모여드는 사람들은 그들에게 잉여일 따름이다. 지금은 그런 대로 유용하겠지만, 어느 순간 나도 잉여가 될 수 있다는 게 아닌가.

 

그리고 혼돈에 대해서도 두려워하지 말라고 했던가. 아니 불과 어제 저녁 그리고 오늘 아침에 읽은 내용들인데도 벌써부터 콘텐츠에 대한 기억들이 휘발해 버리고 있다. 아마 죽음이라는 주제를 다루었기 때문에 내가 의도적으로 이 책에 대한 기억들을 지우고 있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고.

 

그렇게 많은 분량은 아니었지만 훨씬 더 두꺼운 책보다도 많은 사유를 하게 만들어주는 책이 아닌가 싶다. 무지몽매한 독자는 자신과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진중한 접근 대신 다른 방식을 택했지만 말이다. 생존율 3%의 기적을 이겨내고 왕성한 필력을 보여주며 다양한 활동을 하는 알베르트 에스피노사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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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앨리 스미스 계절 4부작 1
앨리 스미스 지음, 김재성 옮김 / 민음사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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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너무 기대를 많이 한 탓일까? 아니면 최근 들어 앨리스 먼로와 토바이어스 울프의 책들을 연달아 읽으면서 문학에 대한 기대치가 높아진 탓일까? 그것도 아니라면 처음으로 만나는 알리 스미스가 소설 <가을>에서 구사하는 내용에 대한 무지 탓일까? 유튜브에서 원어민 리뷰어들이 침이 마르게 칭찬을 해댔지만 위와 같은 이유로 해서 나는 알리 스미스의 사계절 시리즈의 시작에 시작하는 <가을>에 연착륙을 실패한 모양이다.

 

언제 죽어도 이상할 게 없는 많은 비밀을 가진 101세의 대니얼 글럭 할아버지의 죽음으로 소설이 시작되었던가. 광고에서 그렇게 떠들어 댔듯이 소설 <가을>은 3년 국민투표로 결정이 난 브렉시트라는 희대의 사건을 중심으로 전개된다. 아니 이 소설은 브렉시트를 제외하고는 도저히 이야기가 되지 않는다고나 할까.

 

수십년 전부터 야심차게 기획된 유럽연합이라는 이상은 영국의 브렉시트 탈출로 위기국면에 접어들었다. 아직까지도 노딜이니 딜이니, 국민투표를 다시 해야 한다는 등의 이야기들이 진행 중이니 말이다. 개인적으로는 유로 통합이 궁극적으로 독일 경제의 유럽 제패라는 근간이 된게 아닌가 하는 의심을 품고 있다. 또 한편으로는 신구세대 간의 갈등이라는 측면에서도 볼 수 있을 것 같다. 대체적으로 젊은 세대는 EU 잔류를 그리고 노년 세대는 브렉시트를 선택했다고 하던데...

 

대니얼 글럭 씨와 엘리자베스 디맨드 양의 69년이라는 나이 차이를 뛰어 넘은 우정의 발단은 이야기였다. 알리 스미스는 대가다운 실력으로 오노레 드 발자크의 <나귀 가죽> 이야기를 필두로 해서 골디락스 스토리까지 도입해서 세대를 아우르는 통합의 희망을 보여준다. 엘리자베스의 어머니는 물론 그에 대한 강력한 걸림돌으로 작용한다. 그만큼 세상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편견이 무섭다는 걸 말해 주고 싶은 걸까. 왜 동성애자 노인이 자신의 딸에게 그런 친절을 베풀고, 자신에게도 하지 않는 오만 이야기를 다 하는지 그녀는 결코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정작 자신은 방송을 통해 만나게 된 조이와 야릇한 관계로 빠지지 않았던가. 그래서 세상사, 알 수 없다는 거겠지만.

 

알리 스미스는 영국 사람들이라면 모두 알겠지만, 나같은 이방인 독자는 인터넷의 도움을 받지 않으면 당최 알 수 없는 그런 인물들을 무시로 등장시킨다. 나는 당혹스럽다. 이들에 대한 사전 정보를 파악하고 읽기를 해야 하는 건가하고 말이다. 귀찮다, 그냥 읽자로 귀결이 된다. 그런데 1963년 영국 내각을 붕괴시킨 크리스틴 킬러의 재판 이야기를 비롯해서, 미술사학도로 영국 팝 아트의 시조새 같은 여인 폴린 보티에 대한 이야기들을 그냥 넘어갈 수가 있을까. 결국 리뷰를 쓰기 전에 두 사람에 대한 정보를 급하게 찾아보았다.

 

엘리자베스의 꼰대 지도교수는 폴린 보티로 자신의 논문 주제를 변경하겠다는 발칙한 제자의 의견을 극력 저지한다. 사료가 없다는 절대적으로 부족하다는 이유로 말이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뿌리 깊은 편견의 단면을 엿볼 수가 있었다. 브렉시트 이후, 급격하게 달라진 사회 분위기도 한몫 한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이 자신들의 일상을 위협한다고 생각한 보통 사람들이 극우주의자들의 선동에 넘어가 그야말로 혐오와 분노가 넘실거린다. 하긴 우리는 또 그렇지 않은가. 알리 스미스는 브렉시트를 콕 짚어서 말하지 않는 정도의 여유를 보여 주지만, 나는 왠지 많이 불안해졌다. 소수자들에 대한 박해의 모습에서, 1930년대 나치 독일에서 벌어진 일들이 연상되었다.

 



28세의 나이에 암으로 세상을 떠난, 폴린 보티에서도 말하지 않을 수가 없다. 지금 같으면 어림도 없는 이야기겠지만, 그녀가 활동하던 1960년대까지만 해도 대단한 미녀가 똑똑해서는 안 되는 모양이었다. 영국에서 여성 팝 아트의 시조라 불릴 만한 경력의 소유자임에도 불구하고, 비운의 삶을 살다가 갔다. 무시, 소실 그리고 재현을 거듭할 거라는 엘리자베스 엄마의 새로운 친구 조이의 지적이야말로 당대 여성 예술가에 대한 정확한 분석이 아닐 수 없다. 그녀의 작품 중에서 특히 엉덩이를 형상화한 <BUM>의 아우라는 정말 압도적이었다. 예술에 문외한이다 보니 좀 더 분석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긴 했지만, 아쉽게도 여기까지다.

 

영국 보수주의자들이 그야말로 아이돌처럼 떠받드는 마거릿 대처는 영국병을 치료하겠다고 민영화에 나섰다. 과연 정부가 추진한 민영화가 경쟁을 촉진하고, 시민들의 삶에 공언했던가? 대처가 죽었을 때, 국장을 치르면서 경쟁 발주 입찰을 하라는 시민들의 비아냥거림이 난무했던 것을 나는 기억한다. 40년이 지난 지금, 대처가 말하던 영국병은 과연 치유되었을까? 엘리자베스가 만료된 여권을 갱신하기 위해 우체국에서 신속서비스를 신청하는 과정을 보면 그야말로 속이 터질 지경이다.

 

만연한 관료주의는 시민들의 소중한 시간을 마구 잡아먹는다. 나도 예전에 외국에서 여권 갱신을 하면서 사진이 규격에 맞지 않는다는 영사관 직원의 지적을 당한 적이 있어서 그런지 오롯하게 나 자신을 엘리자베스의 상황에 대입해 볼 수가 있었다. 하긴 서구에서 그런 엄격한 관료주의의 적용이 어제 오늘이 일이 아니었으니 할 말이 없긴 하지만 말이다. 서구 사회가 그렇게 자랑하는 법률과 시스템이 시민들에게 봉사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오로지 그들이 만든 기존 질서를 유지하기 위한 것이라는 걸 내가 언제 깨달았던가. 그래서 관료들은 그런 작은 오류 하나도 도저히 용서할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 사소한 것들이 거대한 붕괴로 이어질 수도 있어서라는 걸 수 차례의 혁명을 통해 깨달아서일까 어쩔까.

 

리뷰를 쓰기 전에 알리 스미스의 <가을>이 나랑 맞지 않는 책이라고 판단하고 팔아 버려야겠다는 생각이 잠시 들었다. 그런데 책을 읽으면서 해놓은 메모를 살펴 보니 일단 나머지 다른 계절들을 읽어 보고 나서 실행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니면 다른 알리 스미스의 책을 읽어 보고 나서 하던가. 이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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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22 11: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계절에 대한 시리즈라 사실 읽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을 좀 하던 중이었는데....
음~~~~ 일단 레삭매냐님의 나머지 계절들에 대한 리뷰를 보고서 결정하겠습니다! ^^

레삭매냐 2019-04-22 11:44   좋아요 0 | URL
그냥 단순한 책인 줄 알고 달려 들었다가
낭패를 보았습니다.

제가 리뷰에 담지 못하 이야기들이 더 많
다고 생각하셔도 될 것 같습니다...
그럴 수밖에요 ㅠㅠ 역량 부족과 게으름이 -

집에도 알리 스미스의 다른 책도 두 권인가
더 있는데, 어쩌면 그 책들이 더 나을 지도
모르겠습니다.

사계절 시리즈가 팍팍 나오지 않으면 아마
읽지 않게 될 지도. 나머지는 도서관에서
빌려다 보는 것으로.
 
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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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단편 소설은 없었다. 이것은 단편 소설인가, 아니면 장편 소설인가. 수년 전,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리퍼를 꿰고는 헌책방으로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책을 사러 달려 나갔다. 그 후로도 앨리스 먼로의 책들을 사 모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읽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은 <거지 소녀>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작가의 책이 되겠다.

 

평생 단편 소설만을 썼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 <거지 소녀>에는 10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모든 이야기마다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작가가 나고 자란 어느 캐나다의 시골 마을 출신의 로즈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플로의 슬하에서 자랐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의붓딸과 새어머니의 갈등에서 비롯된 장엄한 매질(royal beating)’을 보라. 아마 로즈도 자신의 도발이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고서 플로의 권위에 도전했던 게 아닐까. 장엄한 매질의 왕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로즈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지만, 플로가 준비한 먹거리에 그녀의 서툰 보이코트는 그만 눈 녹듯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아마 그런 의지박약한 모습에 로즈 자신도 놀랐으리라. 지금이야 가정폭력이 용서받을 수 없었겠지만 한 때는 서구 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로즈가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의 배신이야말로 일상성의 이면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타격하는 일상의 배신에 대한 기술은 남동생 브라이언의 그것과 대비해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꼬마 소년은 미래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누이들은 그렇지 못했노라고 앨리스 먼로는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야만 한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자신만의 공간을 그리고 현대 여성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정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한편, 로즈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면서도 그의 생물학적 유전자가 전달해준 품성이라는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최종적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여행에서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에 대한 로즈의 경험담은 오싹할 지경이다. 그전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새어머니 플로의 경고를 로즈는 한쪽귀로 듣고는 무심코 흘려버린다. 사제복이나 목사 차림새는 악당들의 범죄행위로부터 그들을 가려주는 철저한 카무플라쥬의 코드로 사용된 게 아니었을까. 때로는 꼰대들의 조언이 유효한 것으로 판명이 될 수도 있구나 싶다.

 

그렇게 자란 거지 소녀는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자신의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신발을 구입하고, 아이스트림선디를 사먹는다. 로즈를 동의어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은 그렇게 궁핍했노라고 증언한다. 미래의 남편 패트릭 블래치퍼드는 로즈를 사랑했단다. 그들은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으로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을 영속시킬 수는 없었다. 로즈는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비상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거지소굴 같은 배경과 피를 더 팔아 산 어울리지도 않는 앙고라 스웨터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로즈와 패트릭에게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즈는 이혼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진정한 자아를 지닌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다면 패트릭과의 이별은 로즈에게 축복이었던 것일까.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거지 소녀에게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아니 도대체 앨리스 먼로는 이런 놀라운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앨리스 먼로는 연작 소설집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가 산골 출신 철부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대가다운 스타일로 잡아낸다. 패트릭과 이혼하고 딸 애나까지 거느린 로즈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도로가 봉쇄된 상황에서도 연인 톰과의 밀회를 기대하며 전력투구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연애사업에서 로즈의 거듭된 실패는 하나의 연단의 기회로 작용한다.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 로즈는 어느 파티에서 자신의 텃밭에 관심을 보이는 매력적인 강사 사이먼을 만나기도 한다. 로즈는 주위의 남자사냥꾼이냐는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그와 원나이트스탠드로 직행한다. 사이먼과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로즈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사이먼을 잊기 위해 아예 근거지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나중에 독자가 알게 되는 최종 진실은 결국 비극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 로즈를 기다리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죽음이다. 여장부로 한 세대를 군림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았던 새어머니 플로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아마 치매에 걸려 총기가 떨어진 플로를 카운티 홈, 즉 요양원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은 참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는. 한 때 허영을 삶의 무기로 삼았던 로즈처럼 우리는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곧 플로가 직면하게 될 보이는 것도 재미난 일도 없는 일상을 나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게 될 두려움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간극에 대한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지 소녀>를 읽으면서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하고 빛나는 삶의 진실을 과연 내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것은 아무래도 남의 생의 숙제지 싶다.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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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4-2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두기만 했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