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지 소녀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176
앨리스 먼로 지음, 민은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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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이런 단편 소설은 없었다. 이것은 단편 소설인가, 아니면 장편 소설인가. 수년 전, 앨리스 먼로가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소식을 듣고는 슬리퍼를 꿰고는 헌책방으로 듣도 보도 못한 작가의 책을 사러 달려 나갔다. 그 후로도 앨리스 먼로의 책들을 사 모았다. 하지만 이런저런 핑계를 대면서 읽지는 않았다. 그리하여 이번에 읽은 <거지 소녀>는 내가 처음으로 읽은 작가의 책이 되겠다.

 

평생 단편 소설만을 썼다는 작가, 앨리스 먼로의 작품 <거지 소녀>에는 10개의 단편이 들어 있다. 굳이 공통점을 꼽자면 모든 이야기마다 주인공 로즈가 등장한다. 작가가 나고 자란 어느 캐나다의 시골 마을 출신의 로즈는 어려서 어머니를 잃고 새어머니 플로의 슬하에서 자랐다.

 

전형적이긴 하지만, 사춘기에 접어드는 의붓딸과 새어머니의 갈등에서 비롯된 장엄한 매질(royal beating)’을 보라. 아마 로즈도 자신의 도발이 어떤 후과를 가져올지 모르고서 플로의 권위에 도전했던 게 아닐까. 장엄한 매질의 왕 아버지의 무자비한 폭행으로 로즈는 형용할 수 없을 정도의 모멸감을 느끼지만, 플로가 준비한 먹거리에 그녀의 서툰 보이코트는 그만 눈 녹듯이 무너져 버리고 만다. 아마 그런 의지박약한 모습에 로즈 자신도 놀랐으리라. 지금이야 가정폭력이 용서받을 수 없었겠지만 한 때는 서구 사회에서도 그런 모습이 있었다는 걸 목격할 수 있었다. 로즈가 느낀 혼란스러운 감정의 배신이야말로 일상성의 이면이라는 표현으로 집약된다. 대가다운 솜씨가 아닐 수 없다.

 

저자가 타격하는 일상의 배신에 대한 기술은 남동생 브라이언의 그것과 대비해서 보다 극적인 효과를 연출한다. 꼬마 소년은 미래에 원하는 것은 무엇이든 될 수 있는 가능성을 지니고 있지만, 그의 누이들은 그렇지 못했노라고 앨리스 먼로는 조용하지만 강단 있는 목소리로 주장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홀로 서야만 한다. 일찍이 버지니아 울프가 말했듯이 자신만의 공간을 그리고 현대 여성으로 생존하기 위해 고정 수입이 보장되는 일자리가 필요했다. 한편, 로즈는 아버지의 그늘로부터 벗어나길 원하면서도 그의 생물학적 유전자가 전달해준 품성이라는 DNA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는 최종적 진실을 받아들이라는 양가적 감정 사이에서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

 

기차여행에서 자신을 목사라고 소개한 남자에게 당한 성추행에 대한 로즈의 경험담은 오싹할 지경이다. 그전에 사제복을 입은 사람을 조심하라는 새어머니 플로의 경고를 로즈는 한쪽귀로 듣고는 무심코 흘려버린다. 사제복이나 목사 차림새는 악당들의 범죄행위로부터 그들을 가려주는 철저한 카무플라쥬의 코드로 사용된 게 아니었을까. 때로는 꼰대들의 조언이 유효한 것으로 판명이 될 수도 있구나 싶다.

 

그렇게 자란 거지 소녀는 어찌어찌해서 대학에 진학했고, 자신의 피를 팔아 번 돈으로 신발을 구입하고, 아이스트림선디를 사먹는다. 로즈를 동의어처럼 따라다니는 가난은 그렇게 궁핍했노라고 증언한다. 미래의 남편 패트릭 블래치퍼드는 로즈를 사랑했단다. 그들은 계급 차이에도 불구하고 사랑의 힘으로 결혼은 했지만, 결혼생활을 영속시킬 수는 없었다. 로즈는 우리가 흔히 텔레비전에서 보는 막장 드라마의 주인공처럼 비상할 수 있었지만, 그녀의 거지소굴 같은 배경과 피를 더 팔아 산 어울리지도 않는 앙고라 스웨터로는 역부족이었다. 그러니 로즈와 패트릭에게 이혼은 불가피한 선택일 수밖에 없었다.

 

그런데 역설적으로 로즈는 이혼을 기점으로 해서 자신의 정체성을 완벽하게 이해한 진정한 자아를 지닌 여성으로 거듭나게 된다. 그렇다면 패트릭과의 이별은 로즈에게 축복이었던 것일까. 일견 위태로워 보이는 모험도 마다하지 않는 투사로서의 이미지가 거지 소녀에게서 솟아나기 시작한다. 아니 도대체 앨리스 먼로는 이런 놀라운 캐릭터를 어떻게 만들었을까?

 

앨리스 먼로는 연작 소설집 <거지 소녀>의 주인공 로즈가 산골 출신 철부지 소녀에서 성숙한 여인으로 성장해 가는 과정을 대가다운 스타일로 잡아낸다. 패트릭과 이혼하고 딸 애나까지 거느린 로즈는 갑자기 내린 폭설로 도로가 봉쇄된 상황에서도 연인 톰과의 밀회를 기대하며 전력투구한다. 아쉽게도 그녀의 시도는 번번이 무산된다. 연애사업에서 로즈의 거듭된 실패는 하나의 연단의 기회로 작용한다. 대학에서 연기를 가르치는 교수가 된 로즈는 어느 파티에서 자신의 텃밭에 관심을 보이는 매력적인 강사 사이먼을 만나기도 한다. 로즈는 주위의 남자사냥꾼이냐는 비아냥거림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범하게 그와 원나이트스탠드로 직행한다. 사이먼과의 재회를 애타게 기다리던 로즈는 아무런 연락도 없이 나타나지 않은 사이먼을 잊기 위해 아예 근거지를 떠나는 모험을 감행한다. 나중에 독자가 알게 되는 최종 진실은 결국 비극이다.

 

자 그렇다면 다음에 로즈를 기다리고 있는 주제는 무엇일까. 그건 바로 죽음이다. 여장부로 한 세대를 군림하면서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고 살았던 새어머니 플로에게도 어김없이 죽음의 그림자가 찾아왔다. 아마 치매에 걸려 총기가 떨어진 플로를 카운티 홈, 즉 요양원에 보내는 일련의 과정은 참 슬픈 이야기가 아닐 수 없었다. 나는 여기서 다시 한 번 메멘토 모리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인간이라면 누구나 죽는 다는 걸 알면서도, 애써 외면하고 꾸역꾸역 살아가는 게 아닐까 우리는. 한 때 허영을 삶의 무기로 삼았던 로즈처럼 우리는 행복에 대한 환상 같은 것을 품고 살아가는 게 아닐까. 곧 플로가 직면하게 될 보이는 것도 재미난 일도 없는 일상을 나라면 과연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가끔 생각해 보면, 존재하지 않게 될 두려움보다 존재하지 않았던 것에 대한 두려움의 간극에 대한 삶의 무게가 견딜 수 없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거지 소녀>를 읽으면서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하고 빛나는 삶의 진실을 과연 내가 완전하게 이해할 수 있는지에 대해 고민하게 됐다. 그것은 아무래도 남의 생의 숙제지 싶다. Life Goes 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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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9-04-28 12: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사두기만 했는데 빨리 읽어보고 싶네요.
 
올드 스쿨
토바이어스 울프 지음, 강동혁 옮김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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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디어 토바이어스 울프의 책이 출간됐고, 열흘이나 기다린 끝에 받아서 다 읽었다. 아니 영국에 주문한 책도 8-9일이면 도착하는데 이게 웬 일이니 그래. 아마 출판사에서 저자 약력에 대한 치명적인 오류(출생지 표기)를 수정 스티커로 붙이느라 출고를 늦추는 바람에 시간이 걸린 모양이다.

 

내가 어떻게 토바이어스 울프를 알게 되었느냐고? 그건 달궁 독서모임의 옵저버라고 할 수 있는 브랜던 친구를 통해 알게 되었지. 1995년에 발표된 울프의 <Bullet In The Brain>을 가장 좋아하는 단편으로 꼽아서, 원문으로 구해서 읽어 보았다. 원어민이 아니다 보니 이해가 되지 않아 마지막 부분은 나중에 다시 만났을 때 물어 보기도 했다. 그런 다음에 토바이어스 울프 교수님의 팬이 되어 그의 책 수집에 나섰다. 아마 이번에 나온 <올드 스쿨>을 필두로 해서, 단편집 그리고 <디스 보이즈 라이프>도 사 모았지. 물론 미처 다 읽진 못했지만. 어쨌든 토바이어스 울프의 <올드 스쿨>을 필두로 해서 그의 다른 책들도 국내에 소개되길 바란다.

 

항상 그렇지만 서설이 길었다. 자 이제 본론으로 들어가 볼까. 시간적 배경은 1960년 가을 공화당 출신 꼰대 닉슨을 민주당 투사 케네디가 대선에서 격파한 시절이다. 그런데 영어로 꼰대가 어떤 단어일지 문득 궁금해졌다. 나중에 찾아봐야겠다. 소설의 화자는 앞으로 미국의 미래를 짊어지고 나갈 명문 기숙사 학교의 6학년 졸업반 친구다. 나중에 밝혀지겠지만, 빼어난 문재로 컬럼비아 대학 4년 전액 장학생으로 선발된 경력의 보유자이기도 하다. 이 학교에서는 다른 건 몰라도 글쓰기를 최고로 치부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리고 다들 잘난 집 자제들이건만 자신의 힘으로 이룬 것만 인정한다는 암묵적인 동의가 경쟁력 넘치는 수컷들 사이에 존재했다. 자신들이 다니는 학교 자체가 자신들의 능력으로 이룬 것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화자가 처음에 지적한 그네들의 ‘속물근성’의 본질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토바이어스 울프의 소설 <올드 스쿨>을 특별하게 만들어 주는 설정은 바로 이 학교에서 초빙작가를 학교로 초대해서 시나 소설 경연에서 뽑힌 미래의 작가와 개인면담을 할 수 있는 시간을 준다는 점이다. 고도로 발달된 미국 자본주의 시스템에서 타인의 도움을 받지 않은 자신만의 노력으로 이룬 성취야말로 가장 칭송받을 대상이라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래서 로버트 프로스트, 아인 랜드 그리고 어니스트 헤밍웨이 같이 기라성 같은 작가들이 줄지어 등장한다. 아니 어느 누가 이런 작가들과의 개인 면담을 마다할 수 있단 말인가.

 

성공 아니 성취를 위한 극도의 긴장감과 아드레날린이 무한대로 분출하는 가운데 십대 소년들은 그들만의 글쓰기에 나선다. 내가 즐기는 문학의 본질이 원래 이랬었던가? 그냥 하나의 즐길 거리가 아니었나. 나는 혼란스럽다.

 

화자가 오스트리아 출신 주방장 하르트무트 씨에게 배운 휘파람을 홀로코스트 생존자 게르손 아저씨 앞에서 불었다가 봉변을 당하는 장면도 인상적이었다. 그게 나치의 행진곡일 줄 누가 알았겠는가. 어떤 의도를 가지고 한 행동이 아니었기에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그런데 문제는 화자도 역시 유대인이었다는 점이다. 자신의 민족적 정체성을 알면서도 그럴 수 있었을까? 다이아스포라 이후 수천 년을 팔레스타인 외의 모든 곳에서 이방인으로 지내면서 배제된 그들의 유전자는 화자의 몸속에 남아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함구하고 조용한 가톨릭교도로 사는 선택을 한 모양이다.

 

로버트 프로스트 경연은 화자의 라이벌이자 문학잡지 <트루바두르> 편집장 조지 켈로그가 우승했다. 참고로 화자의 직책은 출판국장이었다. 시의 제목은 노골적 아첨에 가까운 ‘첫 서리(First Frost)’였다나. 다음 주자는 아인 랜드였다. 개인적으로 그녀의 책을 읽어 보지 못해 지금 리뷰를 쓰면서 인터넷으로 그녀에 대한 검색을 해보았다. 소설가이자 경제철학자로 현대 자본주의 비판서라고 할 수 있는 <파운틴헤드>와 <아틀라스>를 썼다고 했던가. 화자는 크리스마스 휴가를 받아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사시는 볼티모어로 떠나는 길에 기차역에서 산 <파운틴헤드>에 빠지는 장면을 보자. 그녀의 인기를 시기하면서 못돼 먹은 인간이라는 점을 비웃어 주겠노라는 화자의 시도는 <파운틴헤드>를 펼치는 순간 사라져 버렸다. 그런 다음 거의 숭배에 가까운 모습으로 전향하게 되는 과정은 개심한 이교도의 모습과 동일하다. 썸을 타는 소녀 레인이 책을 빌려달라는 말도 무시하고 빠져들 정도로 말이다.

 

아인 랜드를 숭배하던 소년은 그녀의 강연에서 아인 랜드가 소설 속에서 창조한 인물이 현실 세계에는 존재하지 않는 그저 허구의 인물에 지나지 않는다는 점을 깨닫게 되고는 다시 배교의 길을 걷게 된다. 강연장을 떠나는 아인 랜드에게 누군가 절규하듯 도대체 “존 골트”가 누구냐고 묻는 장면은 정말 오래도록 기억에 남을 것 같다. 소년들은 저자가 쓴 소설도 읽지 않은 채 그곳에 있었던 것이다.

 

자자, 이제 다음 초빙연사로 등장한 헤밍웨이 이벤트에 비하면 그동안 등장한 이야기들은 그저 몸풀기용 가벼운 워밍업 정도로 보면 될 것 같다. 독자들은 그동안 글 쓰는 기숙학교 소년들의 위선과 허영 그리고 속물근성의 본질을 충분히 파악했을 것이다. 화자가 본격적으로 등판할 순서가 되었다. 무도회마저 마다하고, 글쓰기에 전념하던 가운데 <여름 무도회>라는 타학교 여학생 수전 프리드먼이 5년 전 발표한 글을 읽고 전율한 화자는 동명의 제목을 써서 제출하고, 헤밍웨이 경연의 우승자로 선정되는 영예를 얻게 된다. 꿈이 현실이 된 것이다. 바로 이 지점에서 독자는 어 왜 두 소설의 제목이 같을까라는 당연한 질문을 던진다.

 

그 지점에서 파국의 시작되었다. 타인이 쓴 걸작 소설에 몰입된 소년은 자신의 무슨 행동을 하는 지도 모른 채, 표절을 한 것이다. 그동안 소년이 이룬 모든 것들은 단 한 번의 실수로 물거품이 되었다. 퇴학 조치는 물론이고, 컬럼비아 대학 입학도 물 건너갔다. 소년은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마성의 도시 뉴욕으로 가서 허랑방탕한 탕자의 생활을 이어간다. 그 다음에는 베트남이었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DC 인근에 사는 수전 프리드먼과 만나기도 했다.

 

모교에서 꾸준하게 보내 주는 소식지로 한 때 경쟁자였던 친구들의 소식을 듣던 중, 초빙연사로 모교 강단에 서 달라는 요청도 받게 된다. 자신의 학교에 크나큰 모욕을 안겨준 그에게 그게 과연 가당키나 한 일이었을까. 아마 그는 이제 작가로 어느 정도 명성을 얻게 된 모양이다. 그런 연단의 시간이야말로 작가에게 꼭 필요한 요소가 아니었을까 싶기도 하다. 토바이어스 울프 작가는 말미에 화자와 비슷한 시기에 모교를 떠난 또 다른 탕자 학생주임 메이크피스(Makepeace; 이름 한 번 기가 막히지 않는가, 우리는 모두 평화를 원한다) 선생님의 비사를 준비한다. 누구에게나 비밀은 있는 법이지.

 

항상 듣는 말이지만, 작가와 작품은 꼭 분리하라지. 하지만 <올드 스쿨>을 읽으면서도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여기저기서 주워들은 한 때 탕자였던 토바이어스 울프 작가의 그림자가 도처에서 보이니 말이다. 그게 과연 가능할 지에 대해서도 나는 의문이다. 이러니 우리 책쟁이들이 신성시하는 문학의 본질을 밑바닥까지 꿰뚫은 울프 쌤의 <올드 스쿨>을 어찌 사랑하지 않을 수가 있을까. 내가 처음 만난 울프 쌤의 <올드 스쿨>은 ‘old school’다운 저저자의 문학에 대한 고해성사다.

 

[뱀다리] 울프 쌤이 하도 헤밍웨이에 대해 절절하게 분석해 주셔서 도저히 그의 책을 다시 읽지 않을 수가 없었다. 어제 다 읽기도 전에 예전에 어디선가 받아서 고이 모셔 두었던 <킬리만자로의 눈>을 찾아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어쩔 수가 없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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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16 11:4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레삭매냐님의 이런 리뷰를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ㅎㅎㅎ
존 가드너의 소설창작 책에서 이 작가에 대한 이야기를 하도 들어서 느므 궁금했었거든요.
저는 작가의 단편집을 기다리고 있긴 한데....
이 책도 문학에 대한 소설이라 넘길 수가 없겠네요.

레삭매냐 2019-04-16 13:28   좋아요 1 | URL
아하~ 설해목님은 다른 루트로 울프 쌤
에 대해 알게 되셨군요.

<파라오의 군대> 그리고 <디스 보이즈
라이프>, 단편소설집 등의 출간을 기다
려 BoA요.

이렇게 출간되어 너무나 좋네요...

뒷북소녀 2019-04-28 12: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스티커 어떻게 붙여져 있는지 궁금하네요.ㅋ 그걸 깨알같이 발견하시다니요.

레삭매냐 2019-05-10 13:52   좋아요 0 | URL
워낙 티가 나서 책을 보면 바로 알 수가
있답니다 ㅋㅋㅋ

앞의 하나 그리고 뒤에 하나씩 있더라구요.
 
이중톈 중국사 10 : 삼국시대 이중톈 중국사 10
이중텐 지음, 김택규 옮김 / 글항아리 / 2018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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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인티드 드럼>을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 한 권만 달랑 빌리는 게 좀 아쉬워서 서가를 거닐다가 이중톈 선생의 <삼국시대>를 발견했다. 내가 또 삼국지라면 또 사족을 못 쓰지. 자그마치 36권 중에 1/3 지점 정도를 달린 모양이다. 분량도 적고 해서 하루 만에 다 읽었다.

 

저자는 우리가 삼국시대에 대한 상당 부분이 나관중이 저술한 삼국연의에 기반하고 있다는 점을 처음부터 주지시킨다. 삼국연의에서 다루는 가장 핵심 코드는 바로 충의다. 중국 민중은 예로부터 성군과 청관을 꿈꾸어왔다. 그런데 그 두 가지는 정말 이루어지기 힘들었다. 그래서 협객의 이미지가 더해지면서 대중의 판타지에 편승했다. 현실이 괴롭다면, 그런 환상이라도 품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그런 점에서 중국사를 대변하는 삼국연의가 동아시아 세계 더 나아가서는 전 세계에서 아직까지도 대중적 인기를 끌고 있다는 비결을 엿볼 수 있었다.

 

이중톈 작가는 계급주의적 시선에서 시대의 흐름을 조망한다. 진한시대의 귀족지주의 시대가 저물고, 바야흐로 사족지주의 시대가 도래했다는 주장이다. 평민계급 중에서 전문 관료 집단으로 상징되는 사족지주 계급은 동한 말, 외척과 환관의 발호로 시작된 천하대란 시절을 맞이한다. 사세삼공 명문가문 출신의 본초 원소는 환관과 외척 세력을 주살했지만, 서량의 동탁이라는 늑대를 도성으로 불러들이는 치명적 실수를 범했다. 어린 황제 유변을 폐위시키고, 진류왕 협을 헌제로 옹립한 동탁은 자신에게 비판적이긴 했지만, 사족계급을 경계하면서 전횡을 휘둘렀다. 이런 동탁과 달리 처음부터 사족계급을 경멸한 난세의 간웅 조조는 처음부터 부상하는 새로운 사족계급과 같은 배를 탈 수가 없는 운명이었던 모양이다.

 

조조는 위공 그리고 위왕을 거치면서 한나라 황제를 능가하는 권력을 추구했지만, 끝까지 찬탈자의 오명은 쓰지 않았다. 다만 후계자 조비가 선양이라는 방식으로 헌제를 폐위시키고 천자의 자리에 올랐다. 동탁에 반대하는 관동 기의의 선봉으로 역사의 무대에 나선 조조는 둔전제라는 당시로서는 혁신적인 방식으로 군사와 농사를 병행하는 제도로 경쟁자들을 압도했다. 전란의 시대, 병사들을 먹이는 문제는 무엇보다 중요한 문제였다. 조조보다 앞서 북방을 제압한 조조와 원소의 경쟁은 관도대전으로 결판이 났다.

 

조조는 한황실을 대신하는 새로운 제국의 건설 대신 법가적 서족정권이라는 웅대한 이상을 가지고 있었다. 다만 시대정신에 비해 너무 이른 시도가 문제였을 따름이었다. 서족정권의 시대는 수당 시대에나 나올 법한 이야기였다. 원소는 조조 같은 이상 대신 시류에 따른 이익을 추구하는 집단이었다. 이런 집단이 압도적인 무력에도 불구하고, 조조에게 패하는 건 시간문제였을 따름이다.

 

중원에서 조조와 원소가 그렇게 자웅을 겨루었다면, 남방에는 강동의 손권이 있었다. 그리고 나이 오십줄이 되도록 근거지 하나 마련하지 못하고 떠돌아 다니던 유비가 형주자사 유표의 그늘에서 버티고 있었다. 훗날 중원의 위나라, 강동의 오나라 그리고 서촉의 촉나라로 구성되는 삼국시대 정권은 모두 비사족정권이라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고 저자는 분석한다. 위나라와 촉나라와 달리 오나라는 외래정권임에도 불구하고, 기존 강동의 사족집단을 포용하면서 역설적으로 삼국 중에 가장 오래 정권을 유지할 수가 있었다. 이와는 달리 촉나라는 끝까지 세 개의 집단으로 이루어진 지배계급을 공평하게 대우하지 않으면서 결국 망국의 길을 걷게 된다. 위나라의 침공보다 내부의 기존 익주집단의 분탕질이 망국의 가장 주된 요인이라는 점을 저자는 냉철하게 꼬집는다. 위나라의 침공 앞에서 후주 유선에게 오나라에 나라를 바칠 게 아니라, 대국 위나라에 나라를 넘겨야 한다는 주장을 펼친 초주의 경우를 보라. 나라 따위야 상관없고 오로지 자신들의 계급 유지에 연연한 모습에 기가 막힐 노릇이 아닌가 말이다.

 

촉한 선주 유비와 제갈량의 관계도 삼국연의에서 다루는 것과 상당 부분이 다르다는 점도 이중톈 저자의 주장이다. 적벽대전으로 조조의 남하를 막아내고, 공명이 유비에게 설파한 융중대를 실현한 유비 집단은 형주의 수비를 관우에게 맡기고 파촉정벌에 나선다. 이후 유비의 왼팔과 오른팔은 방통과 법정이었다. 유비가 관우의 무모했던 양번전쟁으로 형주를 상실하고, 복수전인 이릉대전에 나설 때가지 공명의 모습은 역사에서 보이지 않는다. 자신의 후계 문제와 나라까지 통째로 공명에게 맡긴 유비의 선택이야말로 무수한 실책이 난무했던 선주 유비의 인생 최고의 선택이었노라고 저자는 강조한다.

 

조자룡의 유비에 대한 충절과 신기에 가까운 전장에서의 활약에도 불구하고, 관우-장비-마초-황충과 같은 일등급 예우를 해우지 않았다는 점도 의문이다. 연의에 나오는 오호장군 중에 조운의 자리는 없었다. 촉한은 처음부터 위기의 정권이었기 때문에 내환을 다스리기 위해 공명은 이릉대전 패전 이후, 오나라와 동맹을 맺고 위나라만을 상대로 북벌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고 저자는 기술한다. 중원에 비해 절대적으로 떨어지는 국력을 가지고, 다섯 차례나 되는 북벌을 시도한 것이 불필요하게 국력을 소모하는 것이 아니라, 국가 단합을 위한 어쩔 수 없는 도전이었다는 것이다.

 

망국의 군주 후주 아두 유선이 우리의 생각과 달리 멍청한 군주가 아니라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공명의 사후, 장완과 비위를 중용해서 국가경영을 한 점을 보라. 비록 나라는 망했어도, 항복해서 낙양으로 간 뒤 위나라의 뒤를 이은 진나라 시절까지 살해당하지 않고 천수를 누린 점만으로도 한 때 천자였던 후주의 처세술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중톈 작가는 삼국시대의 전반부는 노선 투쟁이었다면, 후반부는 삼국간의 치열한 권력투쟁이었다는 주장을 전개한다. 사실 시대적으로 보면 별 볼 일 없는 시대일 수도 있었지만, 나관중의 연의라는 문학적 첨가제가 듬뿍 뿌려지면서 실제 이상으로 대중에게 읽히게 되었다는 점을 예리하게 짚어냈다. 흥미로운 접근 방식이 아닐 수 없다.

 

도서관에 다음 순서인 11권 위진풍도가 없던데,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어야 하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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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4-15 14: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가끔 케이블에서 이중텐작가의 삼국지 강의를 듣는데 새로운 시각으로 삼국지를 조명해서 무척 재미있게 본 기억이 나는데 책이 나왔는지는 몰랐네요.한번 읽어봐야 되겠네요^^

레삭매냐 2019-04-15 17:34   좋아요 0 | URL
이중톈의 <삼국지 강의>가 진짜 강의로도
있는 모양입니다.

한 번 보고 싶군요. 지금 막 유튜브로 찾아
보니 있네요 :> 책하고는 또 다른 느낌이
겠죠.

카스피 2019-04-16 08:01   좋아요 1 | URL
아무래도 TV강의 형식이다보니 책으로 읽는 것보다는 눈과 귀로 보고 듣다보니 머리에 쏙쏙 강의가 들어오는것 같아요^^

겨울호랑이 2019-04-15 15:3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반적으로 알려진 삼국지연의의 관점이 아닌 삼국지의 경제적, 정치적 해석이 새롭게 느껴집니다^^:)

레삭매냐 2019-04-15 17:36   좋아요 1 | URL
오함 선생의 <주원장전>처럼 마르크스
주의에 입각해서 원명 교체기를 민족
해방전쟁의 시각으로 보는 그런 느낌
일까요?

말씀해 주신 대로, 색다른 시선에서
접근 방식이 마음에 들었습니다.
 
어느 정치적 인간의 초상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 리브로 / 1998년 7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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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기적 전환기에 한 기회주의자가 살았다. 중국 역사에 풍도가 있었다면, 프랑스 대혁명 시절에는 그에 비견할 만한 인물인 조제프 푸셰가 있었다. 선원집안 혹은 슈테판 츠바이크에 따르면 잡상인 집안 출신의 푸셰는 십여 년간 오라토리오회 소속의 사제교사였다. 비열한 기회주의자는 변신에 변신을 거듭하면서 격변의 시절을 뛰어넘은 변절과 배신의 귀재였다. 모름지기 역사는 영웅들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츠바이크가 쓴 푸셰의 평전을 읽으면서 깨닫게 되었다. 프랑스 대혁명 같은 난세야말로 푸셰 같이 파렴치한 철면피 같은 인물들에겐 다시 오지 않을 기회의 순간들이 아니었겠는가. 그런 그에게 츠바이크는 고도의 심리전이라는 방식으로 접근을 시도한다.

 

모든 일에는 원인이 있는 법이다. 부르봉 왕가를 정점으로 하는 프랑스 사회는 철저한 신분제 사회로 계급간의 원활한 통로가 원천 봉쇄되어 있었다. 당연히 사회적 사다리에 오르지 못한 유능한 다수 평민들의 분노가 치솟았고, 둑이 무너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역시 평민 출신이었던 조제프 푸셰는 유일하게 평민들에게 열려 있던 성공의 기회였던 교회 조직, 오라토리오회 소속의 교사로 수학과 물리학 그리고 라틴어를 아이들에게 가르치며 평생 그의 운명을 좌우하게 될 근면과 엄격한 자제력을 습득하게 된다. 그는 진정한 절제의 화신이었다. 바로 이런 덕목이야말로 세기적 전환기에 꼭 필요한 것들이 아니었을까.

 

본능적 직감으로 다음 직업으로 정치인을 선택한 푸셰는 고향 낭트를 대표하는 국민의회 의원으로 프랑스 역사에 첫발을 내딛는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공화주의 신념이 아니었다. 오로지 승자 혹은 다수의 편에 서서 자기생존을 도모하는 것이었다. 정치활동 초반에는 자신의 지역구인 낭트 사람들의 성향을 대변하는 온건 지롱드파의 일원이었지만, 루이 16세의 처형 표결에서 찬성으로 돌아서면서 ‘국왕 시해자’라는 오명과 함께 기회주의적 일신을 드러내기 시작한다.

 

푸셰의 이런 성향은 당시 최고 권력자였던 아라스 출신 변호사 막시밀리앵 드 로베스피에르의 엄격한 도덕주의 그리고 청렴거사로서의 면모와 전혀 맞지가 않았다. 로베스피에르와 한 때 의형제 사이기도 했고, 누이동생 샤를로트와 약혼을 했다는 설도 있지만 그 둘은 태생적으로 화합할 수 없는 캐릭터였다. 푸셰의 악명을 프랑스 혁명 전국에 널리 알리게 된 계기는 이전 교회 약탈자로서의 면모와 더불어, 혁명 초기 가장 위급했던 리옹 반란을 진압한 뒤 보복임무를 띠고 파견의원의 신분으로 리옹에서 그가 했던 일이었다. 산탄 난사라는 기발한 방식으로 자그마치 2,000명에 달하는 반혁명분자들을 처형하면서 “리옹의 대량학살자”라는 원치 않는 별명을 얻게 되었지만, 반혁명 기도를 성공적으로 분쇄한 점은 당시 공포정치를 선도하던 공안위원회에게 인정을 받았다.

 

자 이제 푸셰가 세계사의 무대에 본격적으로 오를 워밍업이 끝난 셈이다. 당대 최고 권력자 로베스피에르와의 대결에 앞서 무신론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변신한 그가 발표한 급진적인 공산주의 훈령(1793년)은 혁명의 반동세력과 유산계급을 공포에 몰아넣기에 충분했다. 훗날 프랑스에서 막대한 재산을 이룬 자본가이자 수많은 밀정을 부리는 경무대신으로 변신하게 될 푸셰가 과연 아무리 목숨을 구하기 위해 못할 짓이 없었다는 혁명 시기에 이런 공산주의적 신념을 가지고 있었다고 한다면 누가 믿을 수 있을까 싶을 정도였다.

 

공화국 혁명수호를 위해 모든 것을 바쳤던 로베스피스에르, 당통 그리고 마라 같은 혁명가들과는 달리 푸셰는 언제나 자신의 안위만을 염려했기에 이번에는 급진적 자코뱅당원으로 변신하는데 성공한다. 모사꾼다운 특유의 권모술수를 동원해서 로베스피에르에게 밀려나게 되지만, 자코뱅 클럽 총재로 선출되는 저력을 보여주기도 한다. 푸셰의 다음 타깃은 바로 혁명의 아이콘 같은 존재였던 로베스피에르였다. 오만불손한 독재자이자 청렴거사였던 로베스피에르의 언행은 많은 이들을 그의 적으로 만들었다. 혁명에 참여한 모든 이들이 로베스피에르나 당통 혹은 마라 같은 혁명에 대한 순수한 열정으로 무장하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니 공화국의 대의를 위해 자신처럼 살라는 로베스피에르와 그의 제자 생쥐스트와 쿠통 같은 이들이 얼마나 마음에 들지 않았을까. 다만 공포의 단두대 칼날이 번뜩이는 동안, 반대파들은 숨을 죽이고 있었을 뿐이다. 바로 이런 공간 속에 음모의 괴수 푸셰의 감언이설이 침투해 들어왔고, 푸셰는 한껏 자신의 실력을 발휘해서 훗날 테르미도르의 반동으로 불리게 되는 탈리앵, 바라스 그리고 부르동의 탄핵의 무대감독으로 맹활약을 펼친다.

 

바로 이 지점에서 츠바이크의 상상력이 빛을 발한다. 사실 역사에는 총무대감독 푸셰가 구체적으로 어떤 역할을 했다는 점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지만, 역사에 드러나지 않는 푸셰가 연출한 반역의 연대기를 논리적 추론으로 재구성한다. 어이없게 진행된 로베스피에르에 대한 탄핵과 그의 죽음으로 영웅적 혁명의 시대는 종언을 고했다. 폭군의 죽음에 파리 시민들은 예전에 피렌체에서 사보나롤라의 경우처럼 환호했고, 반동 세력이 전면에 등장해서 수많은 피를 흘리고 진행된 혁명의 과실은 간상배와 모리배들에게 돌아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누구를 위한 혁명이었단 말인가?

 

한편, 푸셰는 자신의 정치적 변신을 거듭할 때마다 항상 희생양을 만들어냈다. 쇼메트와 콜로 데르부아, 바뵈프 그리고 훗날에는 탈레랑에 이르기까지 자신의 정치적 책임을 타인에게 돌리는 신공을 보여주었다. 하지만 테르미도르의 반동 이후, 수년 간 정치에서 배제되어 원하지 않던 유배생활을 경험하게 된다. 그리고 그 시절은 푸셰에게 혹독한 가난과 빈곤으로 점철된 기억하고 싶지 않은 시간들이었다. 그러던 중, 5인집정관 대표선수였던 바라스에게 픽업되어 이번에는 그의 밀정/사설탐정으로 활동을 개시하게 되는데 이게 바로 푸셰에는 정치적 재기를 위한 신의 한수였다.

 

음모의 괴수이자 변절의 달인, 철면피 같은 기회주의자였던 푸셰는 정보가 권력의 원천이라는 점을 바로 깨닫게 되었다. 아울러 권력이 돈을 창출하고, 다시 돈이 권력을 만들 수 있다는 마키아벨리의 수제자답게 비로소 권력의 속성을 깨달았다. 그의 배신이 어디 한두 번으로 끝났던가? 바라스의 밀정으로 최고 권력을 향해 달리기 시작한 코르시카 출신 포병중위 보나파르트에게 이번에는 줄을 대기 시작했다. 혁명기의 혼란을 일축할 수 있는 무력을 보유한 강력한 군대 그리고 카리스마 있는 지도자에 대한 대중의 갈망을 푸셰의 정치적 오성이 감지해냈다. 보나파르트의 쿠데타 기도를 모를 리가 없었던 경무대신 푸셰가 오히려 미래의 황제의 음모를 묵인하고 조장했다. 푸셰의 우군 중에는 미래의 황후 조세핀이라는 거물도 있었다.

 

푸셰의 보이지 않는 조력으로 프랑스 최고 권력을 얻는데 성공한 나폴레옹은 자신에게 절대 충성을 맹세하지 않는 푸셰를 신뢰하지 않았다. 과연 천재는 인물을 알아본 모양이다. 그리고 아니 천하의 푸셰가 코르시카 촌뜨기에게 무슨 이유로 충성한단 말인가? 아무리 나폴레옹이라고 하더라도 너무 많은 것을 알고 있는 푸셰를 함부로 대할 수가 없었던 모양이다. 독재자는 푸셰에게 막대한 자금을 주는 것으로 그를 현직에서 조용히 은퇴시킨다. 막대한 자금과 봉토를 하사받은 푸셰는 자신의 영지에 조용하게 은거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그가 당시 정계에 복귀하는 건 단지 시간문제일 따름이었다. 결국 제위에 오르고 싶어 하던 나폴레옹에게 꼭 필요했던 인재인 푸셰는 경무대신으로 복귀하는데 성공한다.

 

자 항상 대세에 편승해왔던 기회주의자가 이번에는 전 유럽을 호령하는 황제에게 진정한 충성을 맹세했을까? 천만의 말씀이다. 이 기묘한 주군과 신하 사이에는 전혀 신뢰가 존재하지 않았다. 어디까지나 상호간의 필요에 의한 관계였기 때문이다. 다만 전쟁 천재 황제는 장기판의 또 다른 말인 귀족출신 외무대신 탈레랑을 이용해서, 개와 원숭이 사이 같은 두 대신으로 하여금 서로를 견제하도록 하면서 정국을 이끌어 나갔다. 다만 견원지간의 두 대신이 자신을 적으로 삼는다는 가정은 없이 말이다. 자신이 스스로 별이 되고 싶어 하는, 아니 전설이 되고자 했던 나폴레옹은 이미 혁명의 계승자였던 시절을 끝장내 버렸다. 자신만의 끝없는 전쟁에 수많은 프랑스 청년들을 동원하면서 그에게 환호하던 대중들은 등을 돌리기 시작했다. 자신의 일족에게 왕관을 주기 시작한 가장 의미 없었던 1808년 스페인전쟁의 책임을 탈레랑에게 돌리는 나폴레옹의 모습에서 몰락의 전조가 보였다. 그리고 예리한 촉의 보유자 푸셰가 이것을 몰랐을 리가 없겠지. 다시 한 번 배신의 계절이 예고된다.

 

나폴레옹이 제위에 올라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충성하는 척하면서, 언제 끝날지 모르는 영국과의 전쟁을 끝내기 위해 천재황제에게 보고도 없이 단독강화를 했다가 다시 직위에서 해임되는 불운을 맞기도 한다. 독재자 나폴레옹 역시 러시아 원정에서 전 유럽을 호령했던 60만 대군 가운데 정예병사를 날카로운 얼음의 칼날 앞에 잃어버리고 마침내 몰락의 길을 걷기 시작한다. 푸셰가 가만 있을 리가 없지 않은가. 자신의 정보망을 동원해서 나폴레옹의 몰락을 예견하고 루이 18세에게 권력을 넘기려는 공작을 시도한다. 도대체 이 남자의 변신의 끝이 어디인지 알 수가 없을 지경이다. 오로지 권력만을 향하는 해바라기 같은 스타일이 바로 푸셰의 종착점이 아니었을까.

 

제정과 부르봉 왕가의 복귀라는 도박판에서 타고난 도박꾼 푸셰는 루이 18세에 줄을 서면서 다시 한 번 자신의 능력을 만천하에 알린다. 엘바 섬에서 600명의 수하를 데리고 본토에 상륙하면서 다시 한 번 재기를 도모하는 과정에서 천재황제의 운명이 3개월 안에 결판날 거라는 것을 귀납적 방식으로 예언하기도 했다고 전해진다. 이번에는 동맹군 편에 서서 카르노를 배신하고 대권을 루이 18세에게 넘기고, 경무대신 자리를 보전하는 신기에 가까운 변절 실력을 다시 한 번 만방에 과시하는 푸셰. 과연 역사의 시간은 평생 변신을 거듭한 모략가의 편이었단 말인가.

 

모든 악당들의 말로가 그렇듯, 푸셰의 그것도 비운의 굴레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이번에는 ‘국왕 시해자’라는 오명을 안은 푸셰의 과거를 절대 잊을 수 없는 한 사람의 격렬한 반대가 부르봉 왕가와 루이 18세의 결정에 주효했던 모양이다. 그 인물은 바로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딸이었던 앙굴렘 공작부인이었다. 결국 정적이었던 탈레랑에 의해 고상한 방식으로 권좌에서 끌어져 내린 푸셰는 가족들과 함께 드레스덴과 프라하, 린츠 그리고 트리에스테로 이어지는 실각한 대머리의 초라한 모습의 망명자로 전락하게 된다.

 

사제교사에서 급진적 공화주의자, 무신론자, 리옹 훈령이라는 공산주의 선언을 했던 공산주의자, 밀정의 우두머리, 경무대신 그리고 오트란토 공작에 이르기까지 무수한 변신을 거듭했던 조제프 푸셰는 모두의 무관심 가운데 망명지 트리에스테에서 파란만장한 삶을 마감했다. 슈테판 츠바이크가 냉정한 목소리로 저술한 푸셰의 평전을 통해 나는 그 어떤 역사도 영웅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되었다. 과연 승자의 편에 서지 않고, 초기 자코뱅 당원으로서 가졌던 혁명의 신념대로 살았다면 정당한 역사의 평가를 받았을 지 궁금해졌다. 아마 그러지 않았으리라. 로베스피에르와 나폴레옹처럼 한 시대를 주름 잡은 걸출한 영웅들과 맞장뜬 기회주의자 조제프 푸셰의 파란만장한 스토리는 확실히 흥미진진했다. 이 책을 읽으면서 어쩌면 나는 이제 에릭 홉스봄의 삼부작 시리즈에 다시 도전할 때가 된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물론 그 전에 읽다만 슈테판 츠바이크의 <마리 앙투아네트> 전기부터 읽어야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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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니데이 2019-04-11 23: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책은 없지만, 츠바이크가 쓴 마리앙투아네트를 가지고 있어요.
나중에 그 책을 다시 읽어야겠어요.
레삭매냐님, 오늘도 좋은하루 보내셨나요. 날씨는 점점 따뜻해지고 있습니다.
편안한 하루 되세요.^^

레삭매냐 2019-04-12 09:52   좋아요 1 | URL
전 <마리 앙투아네트> 가지고 있는 지도 모르고
헌책방에서 다시 샀지 뭡니까... 아유 참 -

그래서 읽다가 다른 책들이 우수수 쏟아지는 바람
에 잠시 멈춰 있답니다. 주변 정리가 되는 대로
다시 도전해 보려구요 :> 감사합니다.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
도리스 되리, 김라합 / 문학동네 / 2019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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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려 24년 전에 본 영화가 다시 한 번 내 삶 속으로 들어왔다. 그 시절에는 영화로, 그리고 지금은 책으로. 공통점은 연출자와 작가가 같다는 점, 그리고 파니 핑크. 너무 오래 전에 본 영화라 기억이 다 가물가물하다. 책을 다 읽고 나면 영화도 찾아서 봐야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나에게는 어떤 주술 같은 단어였던 <Keiner Liebt Mich>를 입 속에서 다시 한 번 되뇌어 본다. 소설집 <아무도 날 사랑하지 않아>에는 18개의 단편이 실려 있다. 각각의 소설에는 파니와 클라우스, 파울 그리고 샤를로테가 다양한 모습으로 겹치기 출연의 방식으로 변주를 거듭한다. 얼결에 자신도 모르게 어른으로 성장해 가는 소녀의 모습으로, 때로는 여동생의 결혼식을 앞둔 신경질적인 모습을 지닌 언니의 모습으로. 도리스 되리 작가는 자존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주인공들의 심리를 그야말로 후벼 판다. 영화 속의 파니가 그랬던 것처럼.

 

영화에서 너무 매력적인 캐릭터였던 오르페오와 만나는 순간은 정말 짜릿했다. 영화와 소설 어떤 게 먼저일지 모르겠지만, 우주에서 온 외계인 같은 영혼의 소유자 오르페오의 현란한 말솜씨와 외로운 파니를 위로하는 스킬에 나는 감탄해 마지않았다. 그가 설사 파니를 속인 사기꾼이라고 해도, 나는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이렇게 해서 도저히 이해가 가지 않는 사기를 당하게 되는 건가하는 생각이 다 들 정도였다. 오르페오가 파는 싸구려 장신구에 엄청난 돈을 지불하는 그녀의 모습에서 자기위로의 일면을 보았다고나 할까. 또 한편으로는 부서질 것 같은 니힐리즘의 여운이 그윽한 유디트 헤르만의 글들이 연상되기도 했다.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또 때로는 <바그다드 카페><Calling You>도 생각났고. 감성이 때로는 이성을 압도하는 기현상에 매료되기도 했다.

 

<핸드백>에 등장하는 린다 그라임스는 두 개의 소설에 연달아 등장한다. 절도죄로 보호감찰 중인 린다 그라임스는 천사가 살지 않는천사의 도시를 떠나서는 안되는데, 아랑곳하지 않고 라스베이거스를 누빈다. 여행 중인 남자는 벙어리 린다에게 10달러인 줄 알고, 50달러를 건네고 횡재한 여인은 생면부지의 남자 밥의 차에 올라타고 솔트레이크 시티로 향한다. 그 남자는 사막에서 린다의 핸드백을 발견했다지 아마. 어느 여자가 자신의 핸드백을 그렇게 버릴 수 있을까. 무솔리니의 애인은 마지막 처형의 순간까지 핸드백을 포기하지 않았다지 아마. 금사빠처럼 사랑에 쉽게 빠지는 여인 린다는 밥이 자신을 살짝 드러내자 곧바로 사랑 모드로 돌입한다. 독자에게 한껏 기묘한 로맨스를 기대하게 만들고, 린다가 밥에게 던진 거짓말 때문에 사막의 모래성처럼 관계가 무너지는 장면이 이어진다. 마치 한 편의 연작 단편영화를 보는 느낌이라고나 할까? 도리스 되리의 영화 연출에 대한 상상이 개입되는 느낌이다.

 

샤론이라는 인디언 소녀는 관광객들을 상대로 알록달록한 인디언 전통의상을 입고 같이 사진을 찍어주는 대가로 15달러를 받는다. 주차장에서 영업을 하던 소녀는 결혼반지를 애써 감추지 않는 남자와 도주를 감행한다. 한밤중에 드라이브 웨이를 달리는 영화 <멀홀랜드 드라이브>의 몽환적 이미지처럼. 반지를 숨기는 것보다 차라리 낫다는 샤론의 아리송한 표현이 독자를 혼돈에 빠지게 만든다.

 

개인적으로 가장 강렬한 인상을 심어준 단편은 <투바 양탄자 전용 세제>. 아내를 집을 비운 사이, 불륜 상대 예시카를 집으로 끌어 들인 는 전혀 예상하지 못한 하나의 사태를 체험하게 된다. 그건 바로 예시카가 욕실에서 자살 시도를 했다는 점이다. 면도칼로 자살을 시도한 그녀를 구하는 일보다 자살의 흔적을 지우는 일에 더 신경을 쓰는 주인공의 모습에서 뒤틀린 일상의 단조로움이 엿볼 수 있었다. 애초에 어떤 일탈을 위해 예시카를 만나지 않았던가? 그런데 그 일상이 흐트러지는 것은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다는 표현일까? 아내 에바가 돌아오기 전에 나는 피로 물든 투바 양탄자를 전용 세제로 말끔하게 닦아내야 한단다. 위선이라는 층위에 덧대어진 왠지 모를 비가의 느낌이 생소하게 다가오는 순간이었다.

 

사랑이라고 명명된 감정의 색깔은 무슨 색일까. 완벽해 보이는 사람들의 관계에도 어디에나 균열은 있는 법이다. 오랜 시간을 같이 해왔다고 생각해도, 어느 순간 자신이 사랑했다고 믿은 사람에게 건널 수 없을 정도의 거리감을 느낄 수도 있겠지. 바로 그런 기가 막힌 순간들을 절묘한 타이밍에 도리스 되리 감독은 포착한다. 동정심 혹은 자기 연민으로도 포장할 수 없는, 타자가 나를 향해 쏜 배제적 감정이야말로 우리 현대인이 도저히 참을 수 없는 그 무엇이 아닐까. 솔직히 말해서 나는 모르겠다.

 

<Nothing Compares 2 U>를 부른 젊은 여가수는 시네이드 오코너다. 1992SNL의 뮤지컬 게스트로 등장해서 교황의 사진을 찢은 바로 그 가수. 감정의 극한으로 달려가는 주인공 파니들의 감정을 드러내는데 이만한 노래도 없겠지. 그렇게 언제나 다시 파니다.



[뱀다리] 제인 버킨과 세르주 갱스부르가 부른 예의 문제적 샹송은 정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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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9-04-04 18:1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영화 파니 핑크는 여러 번 봤어요. 첫 장면에서 흐르던 파니의 독백과 마지막 엔딩에서 다같이 떼창하던 Edith Piaf의 Non, Je Ne Regrette Rien가 제일 먼저 떠오르네요.
소설도 궁금하지만 저도 간만에 다시 영화가 보고싶네요. ^^

레삭매냐 2019-04-04 22:29   좋아요 0 | URL
덧글 보고 나서 후닥닥 <파니 핑크>를 확인해
보았답니다. 떼창 ~!

˝나 자신 조차도 날 사랑하는 건
힘들 것 같아요...˝

크하 -

명작은 세월이 지나도 고유의 아우라를 잃지
않더라는. 그 때 쟁여둔 영화 전단이 엄청
아쉽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