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신의 무덤
볼테르 지음, 고선일 옮김 / 바오 / 2019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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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몽주의 철학자이자 위대한 인문주의자였던 볼테르의 신랄한 그리스도교 비판서인 <광신의 무덤>을 읽었다. 내가 보기에 무신론자 볼테르의 주장은 기독교인들이 도저히 받아들일 수 없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볼테르의 비판은 모세오경, 그러니까 구약 시대로부터 출발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유대인들의 신화는 기존에 존재하던 전승과 설화의 영향을 다분히 받았다. 창조적 변형의 과정을 거쳐 유대인들의 경전이 되었다는 것이다. 문득 20년 전에 이미 길가메쉬 신화가 성경 기록 이전에 존재했다는 이야기로 반박을 하던 지인의 논박이 떠올랐다. 유대인들의 숙적인 페니키아인(블레셋 혹은 필리스타인 사람들)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은 선택받은 민족이 여타 민족을 약탈하고, 이집트를 탈출해서 광야에서 도적질을 마다하지 않았다는 이야기들이 차례로 등장한다. 이민족을 잔혹하게 멸족시키는 장면도 종종 등장한다.

 

믿음의 조상이자 위대한 유대왕국의 건설자 다윗이 범한 실수에 대해서도 냉철한 저술을 이어간다(49쪽). 볼테르에 따르면 자신을 환대한 아키스 왕과 동맹을 맺은 부족들을 약탈하고 학살했다. 왕위를 찬탈하고, 사울 왕의 후손들을 죽였다. 우리야의 아내 밧세바와의 사건은 널리 알려져 있으니 언급을 피하자. 그의 아들 솔로몬의 수많은 축첩행위에 대해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어떤 것들은 구약 시대의 유대 풍습도 지금까지 지켜야 한다는 주장을 하는데(가장 대표적인 것이 교회의 십일조다), 또 어떤 것들은 현재와 맞지 않으니 지키지 말아야 한단다. 그렇게 현명했던 솔로몬의 타락으로 결국 유대왕국의 분열과 멸망의 길로 접어들지 않았던가. 솔로몬이 지은 외설스러운 <아가>에 대해 교황파 신학자들이 갖다 붙인 해설은 정말 최고였다.

 

신성모독에 가까운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에 대해서는 거부감이 들 정도였다. 유대교의 한 분파로 시작되어 결국 거대한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그리스도교의 광신성에 대해 볼테르는 비판의 방점을 찍는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황당무계한 주장으로 점철된 전승으로 무장한 그리스도교가 다신교 세계인 로마 제국의 하층부에 서서히 침투하면서 세를 불려 나갔다. 유일신 종교 특유의 불관용은 궁극적으로 다른 종교와의 충돌을 피할 수가 없었다. 한편, 예수 그리스도 사후, 그리스도교의 세계화의 결정적 공헌을 한 바울에 대해서도 횡설수설이라는 표현을 사용한다. 볼테르는 그가 로마 시민권자라는 주장을 반박하는데, 그 어떤 유대인도 로마 시민권을 획득할 수 없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지적한다. 이 사실은 나도 처음 듣는 이야기라 놀라웠다.

 

볼테르는 또한 그리스도교 초기 등장했던 다수의 복음서에 대해서도 의문을 제기한다. 정경(캐논)으로 인정받은 현재의 복음서의 기술도 서로 일치하지 않는 것이 사실이지 않은가. 이에 열성적인 유신론자 파스칼은 그것은 “합의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다”라고 말했다고 한다. 저자는 복음서의 위작설에도 구체적인 실례를 들어가며 무게를 싣는다. 가령 예를 들어 예수 그리스도 시절에 교회란 말은 존재하지 않았는데, 후대 그리스어에서 유래한 ‘에클레시아’라는 표현이 사용되었다는 점이다. 결말에 등장하는 대로 과연 진리가 우리에게 늘 이로운가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그리스도교가 유대 지방을 벗어나 그리스 플라톤의 이원론과 결합하면서 발생한 삼위일체론에 도달해서는 아직까지도 명쾌하게 이해가 되지 않는다. 하나의 본질에 어떻게 세 개의 다른 위격이 존재하는지 상식적으로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래서 수천 년 동안 수많은 교부 철학자들이 매달려서 합리적 논리를 제시하려고 했으나 아직까지도 해결이 된 것으로 보이지 않는다. 그러면서 그저 믿으라는 말만 하니 답답하다. 그전에‘ 트리니티’에 대해 질문하니 도돌이표처럼 맴도는 답변만 돌아오더라. 삼위일체에 대한 학문적 접근이 얼마나 어려운지 다시 한 번 깨달을 수가 있었다.

 

초기 기독교 세계의 중심이었던 아프리카 알렉산드리의 사제 클레멘스와 그의 제자 오리게네스는 호교자로 그리스도의 인성을 부인하고 신성만을 강조하는 영지주의자들과 치열한 논박을 벌였다. <광신의 무덤>을 읽다가 도서관으로 달려가 오리게네스의 <켈수스를 논박함>을 빌려 오기도 했다. 다만 자그마치 8권이나 되는 책의 축약본이라는 점이 좀 아쉬웠지만 말이다. 언제 다 읽게 될 진 모르겠다. 어떻게 보면 그리스도교의 역사는 바로 이런 구원에 이르는 비밀의 지식을 추구하는 영지주의자들과의 싸움의 역사가 아닐까 싶을 정도다. 에세네파, 마니교, 알비파(카타리파) 등이 대표적이다.

 

자신이 믿는 종교가 아닌 이교도에 대한 불관용(볼테르는 이것이 광신의 특성이라고 역설한다)은 필연적으로 기존 종교를 믿는 이들과 불화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스도교 초기 로마 제국의 박해는 어쩌면 피할 수 없는 숙명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수많은 전승이 당시 어마어마한 박해가 있었다고 하는데, 볼테르는 이것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시한다. 기존 질서를 위협하는 세력에 대해 어떤 카이사르가 외면할 수 있단 말인가. 물론 볼테르가 적시한 테오도시우스 황제 시절 박해가 없었다는 주장에 대해 바오 출판사는 친절하게도 각주로 설명을 대신한다. 그건 사실이 아니라고.

 

초대 기독교 황제로 떠받들여지는 콘스탄티누스 황제의 신화에 대해서도 볼테르는 신랄한 비판을 멈추지 않는다. 전혀 기독교 황제답지 않은 행동을 일삼는 포악한 군주였다는 것이다. 그리스도교가 로마 제국의 국교가 된 후, 제국의 영화는 오래 가지 못했고 북방의 야만족에게 멸망당하고 말았다는 역설은 또 어떤가. 그리스도교 내의 분열은 예나 지금이나 다를 바가 없는 모양이다. 당시에도 예수 그리스도의 위격을 두고 도나투스파와 키프리아누스파로 나뉘고, 알렉산드로스와 아리우스, 아타나시우스와 유세비수의 논쟁으로 이어졌다.

 

초기 기독교에 대해서는 상당한 분량을 들여 비판한 볼테르는 중세시기 권력 자체가 된 교황권에 대해서는 비교적 상세한 논박을 피하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물론 종교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이성과 합리적 사고를 억압한 사실에 대해서도 비판하지만 처음의 결기는 느껴지지 않는다고나 할까.

 

어쨌든 볼테르의 비판을 읽으면서 현재 교회의 모습이 과연 예수 그리스도의 가르침대로 세상의 빛과 소금이 되고, 사랑의 메시지를 전하고 있는지 묻게 된다. 스스로 정치세력화된 일단의 목사들은 돈과 권력을 노골적으로 추구하고 있지 않은가. 입으로 초대 교회로 돌아가자는 주장을 하면서도, 거대한 메가처치 성전을 지어야 한다는 주장은 도대체 어디에서 나온 것일까? 세상의 권력을 얻게 되자 초대 교회 시절, 교회라는 건물도 필요없다고 한 주장을 번복한 중세 교부들처럼 예수 그리스도 대신 맘몬을 더 가까이하고 있는 건 아닌지 모르겠다. 진리가 과연 우리를 자유롭게 하는지, 볼테르는 283년 전의 저술로 우리에게 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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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꼭 읽고 싶어서 어제 자기 전에 주문할까...

생각하다가 잠이 들었다.

아침에 바로 일어나자 마자 주문했다.

 

99%의 확률로 오늘 배송이 된다는 말에 현혹이 되어.

만날 속으면서도 또!

 

1%의 확률로 나가리가 되었다.

집에 가야지.

 

당일배송의 신화는 이제 믿지 말아야지. 다시는.

그러면서도 또 속겠지만.

 

[뱀다리] 하도 궁금해서 배송추적을 해보니 어디에 고이 머물러 있구나.

 

블로그 검색을 해보니 해당 택배사는 동아시아 핵폐기물같은 택배사라는 글이 떠억하니 뜬다.

 

전화도 받지 않고, 아주 당당한 구라 당일배송이로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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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스피 2019-03-12 21:2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당일배송한다고 하고서 당일배송을 안하디니 알라딘도 구라가 넘 심하네요^^;;;

레삭매냐 2019-03-13 08:55   좋아요 0 | URL
그런데 반전은 밤 11시 1분에 도착했더라는...

카스피 2019-03-14 08:39   좋아요 1 | URL
헉 한밤중에 배달하네요@.@

moonnight 2019-03-14 21:0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헉 한밤중에@_@;;; 저는 사기만 하고 안 읽어서 너무 빨리 배송되면 뭔가 죄책감이-_- 당일배송은 레삭매냐님같은 분들을 위한 정책 ^^

레삭매냐 2019-03-15 09:36   좋아요 0 | URL
일종의 자발적 압박이라고나 할까요?

그만큼 책이 빨리 왔으니 속히 읽어라는.
 


 

지난주에 김재환 감독이 연출한 <칠곡가시나들> 상영문제에 대해 알게 되었다.

 

영화의 종주국이라고 할 수 있는 미국에서도 이런 문제가 없었을까? 제작과 상영을 한 회사가 하게 되면 벌어지게 되는 작극의 한국 영화판 문제는 일찍이 미국도 경험했었다. 자본주의 산업시스템은 기본적으로 독과점을 추구하게 되어 있다는 사실을 그들은 잘 알고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서 특단의 규제책을 내놓게 된다. 그것은 바로 제작과 상영을 엄격하게 분리하는 방안이었다.

 

한국의 상황을 보라. 씨제이와 롯데시네마가 제작한 영화가 그들이 독과점하고 있는 영화상영관에 걸리는 상황을. 입으로는 관객의 선택을 존중한다는 말을 하고 있지만, 막상 극장에 가서 보면 자신들이 제작한 영화로 상영시간을 오롯하게 채우고 있지 않은가. 그건 관객의 선택을 존중하는 게 아니라 관객의 선택을 강요하는 천박한 시스템적인 발상이다.

 

물론 그렇게 한다고 해서 모든 경우에 장사가 되는 건 아니다. 어마어마한 제작비를 들이고, 스크린까지 몰아 준다고 해서 관객들의 선택을 받는 건 아니니까 말이다. 그런데 진짜 문제는 금방 읽은 신문기사에서 말하고 있듯이, 영화인들조차 자본의 논리에 순치되어 자신들의 정당한 목소리를 내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자본의 위력이 어제 오늘의 이야기인 것은 아니지만, 소위 예술인 흉내를 내는 몇몇 감독들조차 자신들의 올챙이 시절을 잊고 메이저 영화감독이 되어 제작사들의 일순위 캐스팅이 되어 정당하고 올바른 목소리를 내지 못한다는 점을 김재환 감독을 냉정하게 비판한다. 그리고 나는 그의 의견에 공감한다.

 

일전에 문성근 배우가 말했듯이, 만들어진 영화가 상영관에 걸리지 못한다면 그건 필름이 든 깡통에 불과하다. 물론 예전과 달리 제작 시스템에 많이 바뀌긴 했지만 어쨌든 영화가 관객들을 만나기 위해서는 상영관이 필요하다. 수준과 질이 떨어지는 블록버스터 영화 상영으로 그리고 동시에 팝콘과 음료수를 관객들에게 팔아 수익을 내기 위해 정말 관객들이 원하는 영화를 상영하지 않는다는 게 말이 되는가.

 

제국의 이데올로기 첨병들이 등장하는 천편일률적인 히어로물들이나 우리는 봐야 하는가. 좋은 아이디어로 무장한 영화들이 등장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을 위한 상영관 확보가 시급하다고 생각한다. 포식자들로만 구성된 영화 생태계가 과연 지속가능할 것이라고 생각하는지. 한창 잘 나가던 한국영화가 왜 요즘 죽을 쑤는지에 대해 고민이나 해봤는지 모르겠다.

 

그런 점에서 미국의 경우를 참조해야할 것 같다. 하지만 이미 제작과 상영이 분리될 수 없는 상황에 이른 한국에서 과연 어떤 방식으로 이런 문제를 해결할 수 있을지 나는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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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9-03-11 1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영화는 꼭 대구 지역방송국(TBC)에 일 년에 한 번 정도쯤 방영되었으면 좋겠어요. ^^

레삭매냐 2019-03-11 13:08   좋아요 0 | URL
이런 영화는 진짜 극장에 가서
봐야 하는데 상영관이 없으니...

보고 싶어도 볼 수가 없네요.
 


 

자그마치 한 달 만에 쓰는 독서일기다.

요즘에는 인스타그램에 푹 빠져 있다. 그동안 메이저리그 야구나 국내 소설 그리고 웹툰을 집중적으로 검색하고 저장해 두었더니만 둘러보기 할 때도 비슷한 성향의 포스팅을 검색해 주더라. 이걸 인공지능이라고 해야 하나.

 

며칠 전에 영어책을 내는 출판사들을 찾아 팔로우를 했더니만 그야말로 신세계가 펼쳐졌다. 놀랍다! 그러니까 원서 책들에 대한 정보가 우수수 쏟아지더라는 거다. 어차피 국내 출판시장이야 코딱지 만하니 그닥 흥미로운 정보가 없더라. 이미 다 알고 있는 정보다 보니 그렇게 흥미가 돋지 않았는데 펭귄 클래식이니 리버헤드, 크노프, 파버북스, 피카도르 등등 유명출판사에서 쏟아져 나오는 신간 소식에 그야말로 회가 동했다고 해야 할까.

 

부차적으로 엉뚱한 사람들이 팔로우를 하기도 하더라. 난 영어로 글을 올리지도 않는데 말이다. 한글을 영어로 번역해 주기도 하나. 정식으로 쓰는 문장들이 아니라 영어 번역이 어떻게 되어서 그들에게 전달되는 지도 좀 궁금했다.

 

우리나라 출판사처럼 외국에서도 기버웨이라고 해서 도서관련 이벵이 많은 모양이다. 가령 예를 들어 미국에서는 대상 지역이 하와이와 알라스카를 제외한 미국 본토 전역을 커버한다. 나이는 18세 이상이어야 되고. 전세계를 상대로 하는 기버웨이는 드물겠지.

 

지난 주에는 북디파지토리에서 10% 쿠폰이 날아와서 책 세권을 주문했다. 하나는 시배스천 폭스의 <파리 에코>, 다른 두 권은 타리크 알리의 이슬람 5부작이다. 올해 처음 만난 시배스천 폭스의 책을 읽고 나서 완전 팬이 되어 버렸다. 문제는 열린책들에서 아마 판권을 가지고 있는 것 같은데 더 이상 새로운 책을 내지 않는다는 거다. 신간은 아예 감감무소식이다. 그래서 결국 원서로 사게 됐다. 타리크 알리의 책들도 마찬가지다. 절판된 <석류나무 그날 아래><술탄 알라딘>은 구해서 읽었는데 나머지는 아예 출간이 되지 않은 모양이다. 그러니 이 책 또한 원서로 살 수밖에. 물론 언제 다 읽게 될 진 아무도 모르겠지만. 이 참에 원서 읽기에 나서야 하나. 한 십년 정도 읽으면 한글 만큼 읽을 수준이 되려나. 그냥 잠깐 상상해봤다. 시간이 오래 전처럼 널럴했다면 가능했을 지도 모를 텐데. 시간이 많을 적에는 그럴 생각도 못했지 하긴.

 

주초 미세먼지가 극성을 부릴 때까지만 해도 날이 따뜻했었는데 오늘은 날이 춥다.

오후에 <캡틴 마블> 보러 간다. 재밌을라나. 다음 달에 <엔드 게임>이 개봉한다던데. 우린 그렇게 마블의 노예가 되어 가는 모양이다.

[뱀다리] 궁금해서 펭귄 그룹 산하 크노프 출판사 홈피에 들어가 보니 요즘 인스타에서 종종 눈에 띄이는 <로스트 췰드런 아카이브>란 책이 대문에 걸려 있더라. 지난 달에 나온 책으로 출판사에서 미는 모양이다.

 

발레리아 루이셀리는 멕시코 출신 작가로 현재 멕시코 시티에 살고 있다고 하는데 이웃 미국은 물론 한국에서도 잠시 살았던 모양이다. 신기한 인연이로고. 국내에는 현대문학에서 재작년에 <무중력의 사람들>(2011)이라는 제목으로 데뷔 소설이 소개가 되었다. 확실히 인스타그램이 최신 정보를 전달하는 하나의 플랫폼으로 작동하고 있다는 걸 다시 한 번 깨닫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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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과 불 인문 서가에 꽂힌 작가들
체사레 파베세 지음, 김운찬 옮김 / 문학동네 / 2018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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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 이탈리아 문학을 대표하는 작가 체사레 파베세의 유작 <달과 불>을 읽었다. 너무 큰 기대를 해서였을까? 아니면 며칠 전에 읽은 시바타 쇼의 소설처럼 나에게는 늦게 도착한 탓인지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한 느낌이 들었다.

 

소설 <달과 불>의 배경은 작가의 실제 고향인 피에몬테/쿠네오 지방의 산토스테파노벨보다. 그리고 주인공이자 화자는 20년 간 고향을 떠났다가 성모축제에 즈음해서 고향에 돌아온 안귈라(뱀장어)다. 주인공의 이름부터 벌써 오디세우스의 귀향을 의미하지 않던가. 그런데 그의 과거 행적을 돌아볼수록 안귈라가 고향에 어떤 미련을 두었을까 싶다. 사생아로 태어난 안귈라는 어려서는 오 리라를 받으며 가난과 싸우며 이부누이들과 파드리노 밑에서 자랐다. 그러다가 좀 자라서는 모라 농장의 하인이 되어 그저 먹고 자는 것에 만족해야 했다.

 

그랬던 안귈라가 군입대를 시작으로 해서 인근 대도시 제노바를 거쳐 미국의 태평양 바다 끝까지 가게 될 줄 누가 알았겠는가. 게다가 자수성가해서 고향으로 돌아온 안귈라는 자신이 부재한 시간 동안 엄청나게 바뀐 현실을 목도한다. 전쟁을 거치면서 수많은 사람들이 조국을 위해 빨치산 투쟁을 하다가 목숨을 잃었고, 지주들은 몰락했다. 다만 종교계를 대표한 주임신부는 건재해서 파시스트 스파이로 처형된 이들의 죽음을 위로한다. 물론 그가 빨치산 투쟁을 했던 이들에게 똑같은 대우를 하지는 않았다.

 

사실 개인적으로 이 소설에서 시인으로 출발해서 소설가, 문학비평가 그리고 공산주의 반파시스트 혁명가였던 체사레 파세베가 그리는 현대 이탈리아의 역동적인 역사의 흐름을 기대했었다. 하지만 독자의 그런 기대와 달리 <달과 불>은 이탈리아의 시골마을과 미국을 부유하는 한 오디세우스의 유랑에 방점을 찍고 있다는 느낌이 들었다. 토리노, 산토스테파노벨보, 카넬리, 알레산드리아 그리고 제노바 같이 도대체 어디에 붙어 있는 지도 모르는 낯선 지명들이 주는 이물감은 당해낼 재간이 없었다.

 

성공을 구가하며 떠난 미국에서 이방인이었듯이, 고향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와서는 안귈라는 영원한 이방인일 수밖에 없었다. 자신이 부재한 동안 고향을 지켰던 어린 시절 친구이자 유쾌한 음악가 그리고 목수인 누토를 통해 마을에서 일어난 일들의 궤적을 안귈라는 추적한다. 모라 농장의 하인이던 시절, 자신의 갈라테아였던 눈부신 이레네와 실비아에 대한 회상은 그의 발목을 잡는다. 가질 수 없는 것에 대한 갈급한 욕망이라고 해야 할까. 그런데 이레네 자매 역시 백작 부인의 저택에 초대받지 못해 안달하는 장면에서는 욕망의 본질은 결국 다를 게 없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린 시절 안귈라와 누토에게는 가미넬라 언덕이라는 공간이 그들의 전부였지만, 안귈라는 그 너머 카넬리와 제노바를 거쳐 미국이라는 미지의 세계까지 탐험하고 결국 성공해서 지주가 되기 위해 고향으로 돌아오지 않았던가. 이런 금의환향이야말로 그네들의 궁극적 삶의 목적이 아니었을까. 역설적으로 고향에 남아 소작을 부쳐 먹던 발리노 삶은 결국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던가. 발리노의 집안이 쑥대밭이 되는 와중에 살아남은 절름발이 소년 친토가 상징하는 건 어쩌면 세계대전의 전화에서 간신히 살아남은 이탈리아 국가를 상징하는 게 아닐까.

 

호모 폴리티쿠스 독자는 자꾸만 정치 이야기에 관심이 간다. 전후 이탈리아는 유럽에서 가장 공산주의 세력의 활동이 왕성한 나라였다. 파시스트 두체 무솔리니와 독일군에 맞서 조국해방을 위해 싸운 빨치산 그룹은 정치적 정당성을 확보하고 있었다. 당장 총선을 치르면 공산당이 승리할 판이었다. 당시만 하더라도 빅 브라더 역할을 하던 미국이 이것을 용인할 리가 없다. 그리스에서는 치열한 내전이 벌어졌고, 이탈리아를 철의 장막에 내줄 수 없었던 미국이 기존의 기득권 세력과 가톨릭을 포섭해 우익 정부의 탄생을 도왔다. 그 결과, 산토스테파노벨보에 살던 사람들의 운명은 전쟁 전과 달라진 게 아무 것도 없었다.

 

모라 농장의 막내 산티나의 운명적 삶이야말로 이런 혼란이 정점에 달한 시절을 묵직하게 타격하는 결말에 딱 들어맞는 것 같다. 산티나는 이상한 놈팡이들과 꼬여 비참한 삶을 살아야 했던 언니들과는 달리 자주적인 신여성의 모습에 도전한다. 그녀는 파시스트 본부에 일하는 동시에 빨치산에도 협력하는 이중적인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그리는 동시에, 전후 이탈리아의 정치적 혼란상을 대표하는 인물이다. 산티나는 과연 부역자였을까? 아니면 명예로운 빨치산 전사였을까?

 

내가 과연 체사레 파베세의 <달과 불>을 세세하게 이해했을까? 아마 그건 아닐 것 같다. 나에게는 그런 능력도 의지도 없었으니 말이다. 그냥 글가는 대로 읽고 싶었는데 역시나 나의 기대에 충족하지 못한다는 이유를 대고 있구나. 이 소설을 읽고 나니 그의 문학적 시원을 이룬다는 시집 <피곤한 노동>이 읽고 싶어졌다. 아쉽게도 우리 동네 도서관에는 그의 시집이 없더라. 그만큼 인기가 없다는 방증이겠지. 언제고 헌책방에서라도 다시 만나게 되길 기원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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