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 달궁 모임에 다녀왔다.

언제나처럼 즐겁고 유익한 시간이었다. 단골 마욤님이 나오시지 않아 쫌 아쉬웠다.

다른 동지들도 나오지 못하신 분들이 있어 아쉬웠고... 선수들이 모여야 모임이 더 재밌다는 건 만고불변의 진리인 것을.

우리 독서 중독자들은 실컷 책 이야기와 주변에서 확성기로 핏발을 세워 대는 모 부대원들에 대한 이야기로 시간 가는 줄 몰랐다네. 여기가 과연 한국인가. 너무나 초현실적인 현실이 인지부조화되어 가는 그런 느낌이었다.

 

어제 우리의 타겟은 존 그레이 교수의 <꼭두각시의 영혼>이었다. 이 양반 영지주의론에 비판적인 것 같다가 어느새 현대는 영지주의의 승리였다는 말로 결론을 내는 바람에 조금 당혹스럽기도 했다. 기독교에서는 절대 이단으로 간주되는 그노시즘에 대해 좀 더 책을 읽어야 하나 뭐 그런 생각이 들었다.

 

전날 읽은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야기도 신나게 했다. 참고 도서가 참으로 많다는 점이... 나는 로힌턴 미스트리의 책을 추천했다가 어마무시한 분량 때문에 스스로 포기했다. 오이겐 루에의 <빛이 사라지는 시간>도 추천했다가 뻰찌... 나부터 읽다만 책을 마무리지어야지 싶다.


 

모임이 끝난 뒤, 피잣집으로 자리를 옮겨 2차전을 이어나갔다. 술과 피자로 배를 채우면서 신랄한 이야기들이 이어졌다. 예전에는 들쑥날쑥하고 책도 안 읽어 오던 색채남의 일취월장한 모습을 보면서 대견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제 그는 우리 달궁의 고정이 되었다.

 

8시가 못되어 조촐하게 모임을 끝내고 나서 나홀로 아름다운가게 종로책방을 찾았다. 집에 가는 길에 책이라도 한 권 사서 가지 않으면 안될 것 같은 기분에. 원래는 알라딘 종로점을 가보려고 했지만 귀찮아서 바로 포기.

 

2만권의 책을 소장하고 있다는데 과연 그 정도가 되는진 모르겠다. 다음은 내가 업어온 책들이다. 책의 회전이 빠른 느낌이 들었다. 알라딘 북플 친구인 폴스태프님이 추천해 주신 오르한 파묵의 <내 이름은 빨강>이 있기에 냉큼 집어 들었다. 각권 3,000원 씩해서 믿을 수 없을 만큼 저렴한 가격으로 데려왔다. 컨디션도 굿.

 

내가 가장 먼저 집어 든 책은 바로 윌리엄 포크너의 <음향과 분노>였다. 며칠 전 인스타에서 중고책으로 층간소음에 관한 책이냐 뭐 그런 문구를 보고 눈여겨 보고 있던 책인데 내 수중에 들어왔다. 물론 문동 버전으로 가지고 있지만 읽어 보려는 시도조차 하지 않았다. 이번에는 드디어 읽어야 할 시간이 왔는가.

 

마지막으로 고른 책은 2018년 교유서가에서 처음으로 나온 <보헤미아의 우편배달부>였다. 이런 장르의 책은 내가 좋아하는 책인데. 그냥 책 제목과 출판사만 보고 사들였다. 집에 와서 검색해 보니 내 취향에 아주 딱 들어맞는 이야기더라. 전쟁과 야만 그리고 반전에 대한 컨텐츠를 담고 있는 책이라고 한다.



, 거페이 작가의 절판된 <복사꽃 피는 날들>은 작년엔가 김용민 씨의 방송을 듣고 교보문고에서 새책으로 샀는데(물론 읽지 못했다) 억울하다 억울해. 이렇게 중고로 만나게 될 줄 알았으면 다른 책을 사는 거였는데 캬오~~~ 칼럼 매캔의 <댄서>도 있더라. 중고서점에서 이런 레어 아이템들을 기대하고 가는 게 아니었나.

 

금요일날 읽은 쥴퓨 리반엘리의 <살모사의 눈부심>의 후광 덕분인지 파묵 선생의 <내 이름은 빨강>도 아주 쑥쑥 읽히는 기분이다. 사마온공의 <자치통감>도 마저 읽어야 하는데. 내 전공파트라고 할 수 있는 중국사에 관한 이야기라 그런지 술술 페이지가 넘어간다. 마치 예전에 학습한 내용을 다시 복습하는 그런 기분이라고나 할까나. 파묵 샘의 첫 책이 마음에 들면 어쩌면 또 책을 일단 사들이고 전작 도전한다고 떠들어 댈 지도 모르겠다. 책이나 더 읽다가 자야겠다. 이만 총총.

 


댓글(8)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카알벨루치 2019-02-24 22: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포크너 한번 도전해보시고 리뷰 기대합니다 ㅎㅎㅎㅎ

레삭매냐 2019-02-24 22:55   좋아요 0 | URL
당장에 읽어야 하는 책들이 정리가
되면 ‘층간 소음‘를 다룬 책에 도전해
볼 생각입니다.

여담이지만,,,
미국 사람들은 포크너를 정말 좋아하
는 것 같습니다.

목나무 2019-02-24 22: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도 좋은 책들만 데려오셨네요! 중고서점에서 만나는 래어 아이템은 그야 말로 최고죠! ㅎㅎ

레삭매냐 2019-02-24 22:57   좋아요 1 | URL
예전처럼 마구잡이로 사들였다면
정말 ㅋㅋㅋ

시간이 가면서 책 보는 눈이 생긴...
다는 건 다 뻥입니다 -

일종의 소확행이라고 해야할까요.

어제도 책 사러 들어왔다가 친구분에게
집 안에 쌓아 놓은 책부터 읽어야 해
이러고 아무 것도 안 사시고 가시는 분
을 목격했습니다. 존경하는 바입니다.

어느 책의 노예는 카드질을 했습니다.

cyrus 2019-02-25 16:1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역시 달궁 뒤풀이 분위기는 여전하네요. 글만 읽어도 뜨거운 분위기가 느껴지네요.. ^^

레삭매냐 2019-02-25 16:13   좋아요 0 | URL
이제 노쇠하야 예전 같이 달리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무척이나 즐겁고
재밌는 시간들이었답니다 하 하 하

옛 멤버들이 그립습니다.

coolcat329 2019-02-26 22:3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종로책방도 중고 서점인가보네요? 조만간 구경가야겠어요. 정말 즐겁고 알찬 하루 부럽습니다.

레삭매냐 2019-02-27 09:04   좋아요 1 | URL
네에이~ 아주 즐거운 시간이었답니다.
8년 동지들과 함께 해서 더더욱 그런
게 아닌가 싶습니다.

아름다운 가게 중에서 중고서점으로 특
화된 곳이 아닌가 싶습니다.

책 외에도 DVD와 CD 도 상당하더군요.

가격이 알00과 달리 착해서 더더욱 마음
에 들었습니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사계절 만화가 열전 13
이창현 지음, 유희 그림 / 사계절 / 2018년 12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어제 오후에 도서관으로부터 희망도서가 도착했다는 문자를 받았다. 퇴근하고 나서 저녁을 먹은 뒤, 재활용 쓰레기와 음식물 쓰레기들을 내다 버린 다음, 부웅 차를 타고 도서관으로 달려갔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빌리러 말이다. 그리고 숨도 쉬지 않고 그렇게 책을 읽었다. 결론은 기대만 못하다였다.

 

사실 다음에 연재된 만화의 시작은 창대하였고 흥미진진하였다. 하지만 너무 B급 갬성을 강조하여서인지 후반으로 갈수록 내용이 산으로 가는 게 아닌가. 그냥 계속해서 책에 대한 썰에 중점을 두었으면 좋았겠지만 MI6CIA가 등장하고 예티가 폭격수로 등장하면서부터 쫌 그랬다.

 

그렇다 나도 독서 모임에 나가는 독서 중독자라고 당당하게 말하고 싶다. 오늘도 종로로 출격할 예정이다. 오늘 우리가 토론할 책은 존 그레이의 <꼭두각시의 영혼>이다. 플라톤의 데미우르고스부터 시작해서 브루노 슐츠를 거쳐 사이보그 시대의 인간 노동 등등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나는 책을 읽었지만 여전히 내가 읽은 것을 제대로 소화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고백한다. 나는 독서 중독자다.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을 읽으면서 내가 소장한 책을 만날 때의 즐거움이란 이루 다 말할 수가 없을 정도였다. 지난달에 읽은 츠바이크의 <에라스무스 평전>도 사실 이 책 때문에 읽었노라고 자랑스럽게 말할 수 있다. 이미 절판된 책이고, 다행히 서가에 얌전히 꽂혀 있었기에 어렵지 않게 읽을 수가 있었다. 모든 종류의 광신을 부정하는 츠바이크가 그린 위대한 인문주의자 에라스무스는 인문주의 정신 아래 우리 모두가 형제라는 의견을 개진하지 않았던가. 읽다만 오이겐 루게의 <빛이 사라지는 시간>을 만나게 되었을 때 얼마나 반가웠는지 모른다.

 

영화 <무간도>에서 따온 것이 분명한 암흑조직을 15년 동안 섭렵한 경찰은 독서모임의 신입으로, 노마드와 함께 등장한다. 다른 독서중독자들처럼 자기개발서를 즐겨 읽는다는 노마드는 그 자리에서 바로 강퇴당한다. 절로 고개가 끄덕여졌다. 자기개발서라니! 독서 중독자로 충분히 이해가 가는 장면이었다. 독서 모임 8년차에 접어들고 있는데 우리는 지금까지 단 한 번도 그 비슷한 책을 주제 토론으로 삼은 적이 없다는 걸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하긴 인문서적도 잘 안하는구나. 우리 달궁에서는 주로 문학을 즐겨 씹는다.

 

그나저나 우리의 신입 노마드는 무언가 대단한 책을 읽고 독서 모임에 가입하기 위해 어마무시한 책들을 완독하고 재도전에 나선다. 항문 아니 아날학파의 거두 페르낭 브로델의 <지중해>를 읽고 또 에드워드 파머 톰슨의 <영국노동계급의 형성>을 읽었다고 한다. 전자는 그나마 들어본 적이라도 후자는 정말 생소한 책이 아닐 수 없다. 역시나 독서 중독자들의 세계는 무궁무진하고 도전정신이 넘치는 선수들의 무대가 아닐 수 없다. 그럴수록 나의 도전정신은 끝 간 데 모르고 부풀어 오르는 느낌이다. 전혀 시집을 읽지 않는데 최승자 시인의 <이 시대의 사랑>은 도서관에서 한 번 빌려다 읽어야지.

 

소설 작가로 등장한 로렌스의 어처구니없는 활약도 주목할 만한다. 결국 독서 중독자들의 마지막 도전은 글쓰기라는 걸 말하고 싶었던 걸까. 하긴 진짜 독서 중독자 중에 소설가로 등단한 사람도 있으니 전혀 틀린 설정은 아닐 것이다. 영화평론가들의 꿈이 궁극적으로 영화 연출이니 만큼 말이다. 독서 중독자들에게 무료로 자비 출판한 책을 뿌리려던 로렌스의 시도는 단박에 박살이 나고, 그나마 달랑 한 권 산 예티는 다른 중독자에게 피해를 주고 싶지 않아 중고서점 대신 다른 방법으로 없앴다지 아마. 어쩌면 그렇게 정확하게 정밀타격을 하는지 작가들이 정녕 독서 모임에 단 한 번도 나간 적이 없는지 의심이 들었다 하 하 하.

 

예전에 읽었던 의천도룡기에서 무당파의 진인 장삼봉 선생에게 태극권을 전수받은 절세무공의 보유자 장무기가 권법의 배움을 모조리 다 잊어버리는 것처럼 불과 어제 읽은 책의 내용이 벌써부터 가물가물해지기 시작한다. 원래 별 다섯 개를 주려고 했으나 아무래도 황당무계한 전개 때문에 하나는 깎아야지 싶다.

 

한 달을 기다린 독서 모임의 시간이다. 벌써부터 염통이 쫄깃해지는 그런 기분이다. 고고씽.

 


댓글(9) 먼댓글(0) 좋아요(3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19-02-23 09: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9-02-23 09:21   좋아요 2 | URL
저희 중독자 클럽에서는
어마무시한 책 때문에 가정불화가 일
정도라는 ㅋㅋㅋ

어느 분은 더 이상 책을 사오면 불싸
지른다는 말도 들으셨다고 합니다.

원없이 책 사는 게 꿈이신 분도 계시구요.
저도 뭐 다를 바가 없지만요 :>

2019-02-23 11: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coolcat329 2019-02-23 10: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런 우연이! 저도 어제 도서관에서 희망도서 왔다는 문자받고 이 책을 받아와서 밤에 다 읽었어요 ㅎ 근데...원래 만화가 이런건가요? 전 적응이 안되서 ㅎ로렌스때문에 중간에 크게 웃었네요 . 욕망의 동토 ㅋ

레삭매냐 2019-02-23 11:41   좋아요 1 | URL
오호라 이렇게 공교로울 수가 ~!~~
신기하네요.

작년 가을에 그래픽 노블 희망도서로
신청했다가 떨어져서 이번에 좀 떠는
심정으로 신청했는데 승인이 나서 기
분이 아주 좋았답니다 -

욕망의 동토 / 로렌스는 짱이었습니다...

아마 웹툰을 단행본으로 만든 거라
그런 게 아닐까요. 비급 갬성 만화라고
생각하고 보시면 즐거우시리라 믿슙니다만.

Falstaff 2019-02-23 10:4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 시대의 사랑>은 책꽂이에 남은 자리가 있으면 꽂아 놓으실 만할 겁니다.
은근히 레삭매냐 님하고 궁합이 맞는 시집일 듯하거든요.

레삭매냐 2019-02-23 11:43   좋아요 1 | URL
제가 원체 시를 읽지 않는데
이 책을 보고 나니 이 시집이 무척 땡기네요.

중고로 데려올까 싶었는데 무려 대학로에
있더라는. 일단 도서관에서 빌려 보고 소장각
이면 구입하는 것으로 -

추천 감사합니다.

cyrus 2019-02-24 16: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벌써부터 염통이 쫄깃해지는 기분... 그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ㅎㅎㅎㅎ 저는 달궁 모임 전날에 잠이 오지 않았어요. ^^

레삭매냐 2019-02-24 18:08   좋아요 0 | URL
그땐 그랬지... 싶네요.

어제도 무척이나 즐거운 시간들
이었답니다. 유쾌 상쾌 통쾌한 ~~~

어제는 피잣집에 갔었는데 피자 맛있더군요.
예전엔 홍대를 떠돌았는데 이제는 무대가
종로가 되었습니다.
 
에델바이스의 파일럿
얀 지음, 박홍진 옮김, 로맹 위고 그림 / 길찾기 / 2015년 2월
평점 :
절판



메이저리그 야구를 좋아한다. 나에게 스포츠는 오로지 야구뿐이다. 사실 다른 스포츠에는 관심이 없다. 지금 은퇴했지만, 예전에 내가 보스턴 레드삭스의 노마 가르시아파라라는 선수가 있었다. 이 선수의 타격 전 세리머니는 정말 독특했다. 아마 야구 선수들처럼 미신 혹은 징크스에 시달리는 직업군의 사람들도 없을 것 같다. 슬럼프에 빠졌을 때는 더더욱. 그런데 이번에 로맹 위고의 그래픽 노블 시리즈를 읽으면서 야구 선수 못지않게 미신을 숭배하는 이들이 있다는 걸 깨닫게 됐다. 바로 비행기 파일럿들이었다.

 

이번에 시간적 배경은 1차 세계대전이다. 앙리와 알퐁스 카스티약 두 쌍둥이 형제가 주인공이다. 발랑틴을 사랑하는 알퐁스는 오래 전 집시 여인 발부르가의 저주에 가까운 예언으로 물을 두려워하게 됐다. 그래서 자신이 그토록 사랑하는 발랑틴의 남동생 프랑스와가 세느 강에 빠졌을 때 구하지 못했다. 대신 형 앙리가 뛰어 들어 프랑소와를 구했다. 아주 오랜 시간이 흘러 그가 전투기 조종사가 되었을 때는 공중에서도 구하지 못했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책을 다 읽은 나의 서술이고, 저자들이 구사하는 내러티브는 뒤죽박죽이다. 어쨌든 여자들을 꾀는데 일가견이 있는 앙리는 공중에서 그리고 역시 같은 전투기 조종사였던 알퐁스는 지상에서 전차병으로 전투에 참가한다. 그가 모는 전차 옆에는 그의 사랑하는 아내 발랑틴의 이름이 적혀 있다.

 

이야기를 좀 복잡하게 꼬아, 여전히 전투기 에이스로 활약하는 앙리에게 에델바이스 문양을 그려 넣은 독일군 조종사 에릭이 도전장을 내민다. 아무래도 자신의 실력이 떨어지는 걸 깨달은 앙리는 첨단 기관포를 조작해서 승리를 거둔다. 다시 도전장을 던진 에델바이스 에릭을 두려워한 앙리는 쌍둥이 동생 알퐁스와 역할 바꾸기에 들어간다. 그러니까 자신이 전차병으로 그리고 알퐁스는 에델바이스를 상대하라는 것이다.

 

운명의 여신은 형제에게 무심했다. 전차를 몰던 앙리가 그만 폭발로 얼굴에 큰 상처를 입게 된 것이다. 자신의 멀쩡한 얼굴을 형처럼 만들 수 없었던 알퐁스는 형의 화실에서 오래 전 사건을 연상케 하는 한 장의 그림을 발견한다. 그건 바로 집시 여인 발부르가의 초상화였다. 살벌하게 해골 위에 올라선 발가벗은 여인의 모습, 그녀가 바로 형제에게 예언을 한 것이었다. 형 앙리는 동생 알퐁스 행세를 하고 그녀를 취했고. 유럽 그래픽 노블, 특히 이번에 만난 로맹 위고의 그림들은 죄다 에로틱한 시퀀스들이 빠지지 않고 등장해서 깜짝 놀랐다. 특히 어제 이발소에서 무심코 책장을 넘기다 그런 장면들이 다수 등장해서 식겁했다네. 암튼 그것도 그들의 스타일이겠지 싶다.

 

뭍 여성들과 염문을 뿌리는 형 앙리는 비행기에서 시도니라는 여성과 관계를 하던 중 독일군의 피습으로 시도니가 죽는 사고를 겪는다. 이에 형 앙리는 알퐁스에게 예전의 빚을 갚으라고 재촉한다. 그게 2년 전인 1916년의 일이었다. 아, 발부르가는 앙리에게 돌심장을 가진 여자에게 죽음을 당할 거라는 예언을 했던가. 모든 불길한 예언은 들어맞는 법이지. 나중에 에릭의 연인으로 등장하는 발부르가는 확실한 팜므 파탈의 이미지를 그대로 드러낸다. 육감적인 몸매의 집시 여인은 앙리에게 성적으로 착취당하고 저주에 가까운 예언을 던진다. 앙리와 알퐁스의 나라 프랑스는 결국 독일에 이기지만, 끝까지 공군이길 원했던 앙리는 지상 퍼레이드 대신 비행기로 객기를 부리다가 그만 예언대로 ‘돌심장’을 지닌 여성과 충돌해 비극적인 최후를 맞게 된다.

 

브라질 출신 “표범” 후아오 가르손 이 소브라도는 황새 비행중대의 일원으로 프랑스군으로 자원한 조종사도 그렇지만 일왕을 추앙하는 일본 출신 시게노 시요타케도 황새 비행중대의 특별한 구성원이다. 실제로 일본 출신 조종사가 연합군의 일원으로 독일과 싸웠는지 궁금해졌다. 그나저나 발부르가는 미국 출신 모델 케이트 업튼의 이미지를 그대로 본뜬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비슷해서 깜짝 놀랐다.

 

어제 읽은 세 편의 로맹 위고가 그림을 맡은 그래픽 노블 중에서 <에델바이스의 파일럿>이 내러티브는 가장 강력했다. 마하의 속도를 주파하는 제트기도 아닌 복엽기 시절에 대한 회상은 마치 중세 시절 결투에 나선 기사들의 모습을 연상시킨다. 그 시절의 말이 비행기로 바뀌었고, 일견 무모해 보이는 도전을 남성들의 전유물로 표현한 다시 말해 폭력의 순화 버전인 기사도 말이다. 백중지세로 실력보다는 운이 결투의 결과를 결정지었다는 점도 크게 다를 게 없었다. 국내에 나온 로맹 위고의 작품은 이제 <엔젤 윙스>를 빼고 모두 읽었다. ‘버마 밴시’라는 일본군을 상대로 한 공중전 이야기인 것 같은데 이건 아쉽게도 못 읽었다. 과연 언제 읽게 될 진 모르겠지만. 언제고 기회가 닿는다면 만나게 되겠지.

 

[뱀다리] 참고로 에델바이스는 2차세계대전 당시 독일 최정예부대인 팔쉬름예거 전사들이 달던 기장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로 치면 공수부대 마크 정도라고나 할까. 독일 파일럿들 중 다수는 귀족 가문의 자제들로 구성되어 있었다고 한다. 1차세계대전은 그나마 남아 있던 기사도가 발휘된 마지막 전쟁이라고 해야 할까. 당시 파일럿 싸나이들은 에델바이스를 몰던 에릭처럼 상대편 기사에게 도전장을 던지고 1:1 대결, 속된 표현으로 하면 맞짱뜨기를 마다하지 않았다. 문득 1차세계대전 당시 최고의 에이스라는 ‘붉은 남작’ 만프레트 폰 리히트호펜에 대한 이야기가 궁금해지기도 했다. 그는 삼엽기를 몰고 전투에 나서 무려 80대나 되는 적기를 격추했단다.

 

 

바로 그 리히트호펜을 주인공으로 삼은 <레드 배런>의 트레일러를 유튜브로 지금 막 봤는데, 로맹 위고가 그래픽 노블로 만들려고 했던 장면들이 그대로 실사영화로 만들어진 게 놀라울 따름이다. chase, fight and hunt 라는 표현으로 그를 집약해서 표현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한 장면에서는 자신들은 도살자가 아니라 '스포츠맨'이라고 하는데 과연 그랬을까 싶다.

 

극중에서 추락한 비행기 부품을 병사들이약탈하는 장면이 등장하는데, 실제로 그런 일이 다수 발생했다고 하니 로맹 위고와 얀의 고증 작업이 얼마나 철저했는지 다시 한 번 알 수가 있었다.

 


댓글(9) 먼댓글(0) 좋아요(2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9-02-21 16:2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ㅋㅋ 전 세인트 루이스 부시 스타디움에서 카디널스의 약쟁이 마크 맥과이어가 비 오는 날 홈런 치는 거 직관했습니다. 걔네들 스타디움에서 파는 맥주가 장난이 아니더군요.

레삭매냐 2019-02-21 16:51   좋아요 1 | URL
아 비루 ! 역시 야구장에서 마시는 비루가
최고라고 생각합미다.

산동네에서는 비어 보이가 있던데 ㅋㅋㅋ
너무 부러워 보였습니다.

두 약쟁이 덕분에 파업 이후 비실대던 믈브
가 다시 활기를 되찾게 되었다는 아이러니
가 참...

전 데릭 로우의 노히트를 직관했답니다 ^^

카스피 2019-02-21 23: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쟁이 참혹하긴 한데 사실 요즘 비행기 전투(F-22같은 경우 레이더에 안집히니 슬며시 다가와 미사일을 쏘면 적기는 영문도 모르게 격추되죠)보다는 그래도 레드바론이 활약하던 1차 대전의 공중전의 좀 낭만적인것 같긴합니다.

레삭매냐 2019-02-22 09:46   좋아요 0 | URL
아무리 전자전의 시대라고는 하지만
점점 인간의 능력이 소멸되어 가는
게 아닌가 싶습니다.

1차 세계대전 당시만 하더라도 거의
인간의 감으로 공중전을 했다는 글
을 읽은 적이 있습니다.

카스피 2019-02-22 10:27   좋아요 1 | URL
1차대전 초기에는 손으로 폭탄을 떨어뜨리고 공중전은 조종사끼리 권총을 쏘았다고 하더군요.그리고 격추될 경우 조종사를 쏘는 것이 아니라(2차대전 당시 일본조종사는 격추된 미군비행사를 기총소사했다고 합니다) 낙하산으로 떨어지는 적 조종사에게 경의를 표했다고 합니다.아무래도 당시에는 조종사들 대부분이 귀족이어서 그랬던 것아 아닌가 싶어요.

카알벨루치 2019-02-22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도 <블루 윙즈>이후로 또 읽어볼 요량입니다 희망도서 주문 넣어놨는데 부디 잘 나오길 기대 고대 ㅎㅎ

레삭매냐 2019-02-22 17:59   좋아요 1 | URL
얏호~ 오늘 드디어 <익명의 독서 중독자들>
이 도서관에 도착했다고 합니다.

바로 집에 달려 가서 빌려야겠습니다.

모쪼록 희망도서 겟하실 기원하겠습니다.

카알벨루치 2019-02-22 18:04   좋아요 1 | URL
<익명의 독서중독자들> 잘 읽으시길 바랍니다 너무 기대는 마시고~만화로 그렇게 독서에 대해 이야기하는게 참 대단타 싶어요 전 레삭매냐님이 더 대단하다고 생각하는 1인! 광독과 탐독의 아우라가 ~주말 잘 보내소서!^^

레삭매냐 2019-02-22 21:55   좋아요 1 | URL
제가 너무 많이 기대를 한 모양입니다 :>
그래도 재밌긴 하네요.

가지고 있는 책들도 등장하고 또 사냥
욕구를 마구 불싸지르는 아이템도 보이
는 것 같구요 -
 
수리부엉이 - 독소전 밤하늘의 사냥꾼
얀 지음, 로맹 위고 그림 / 길찾기 / 2012년 3월
평점 :
품절


 

프랑스 출신 그래픽 노블 작가 얀과 로맹 위고의 <수리부엉이>를 읽었다. 다른 소설이나 그래픽 노블들이 서부전선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면, 로맹 위고는 특이하게도 공산주의 소련과 파시스트 나치 독일이 맞붙은 동부전선을 공간적 배경으로 삼고 있다. 그것도 육전이 아니라 공중전을 하는 전투기 조종사들이 등장한다는 점을 높이 사고 싶다.

 

시간적 배경은 1943년 겨울, 소련에서는 애국전쟁이라고 부르는 독소전쟁이 시작된 지 2년여를 경과하는 시점으로 스탈린그라드 전투를 정점으로 전쟁의 대세가 소련으로 기울기 시작하고 있었다. 주인공 아돌프 불프 중위는 야간전투비행의 달인으로 무수한 소련 전투기 조종사들을 저승으로 보낸 루프트바페의 에이스다. 전설적인 에이스 에리히 하르트만을 모델로 삼은 게 아닐까 싶다. 전쟁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독일군의 야만적인 행태를 분노하는 불프 중위는 그야말로 나치 공군의 특이한 존재가 아닐 수 없다. 심지어 자신의 전투기에 나치 문양을 지우는 패기도 보여준다.

 

그의 맞수로 등장하는 소련군 전투기 조종사는 릴리야 리트바스키 동무다. 자신의 조국을 침략한 모든 파시스트들을 모조리 죽여 없애겠다는 독기로 무장한 릴리야는 구식 복엽기로 여자는 전투기를 조종할 수 없다는 남자 전투기 조종사들의 비웃음을 뒤로 하고 실력으로 그들을 압도한다. 독일군이나 소련군 모두 전투기 조종사들의 목숨은 오래 가지 않았다. 그래서 독일 공군 내에서는 출격 5회 목표를 달성할 때까지 서로 말도 걸지 않았다고 하지 않은가.

 

불프를 감싸주던 슈나이더 단장이 릴리야에게 격추당하고 전사하자, 새로운 단장으로 친나치 성향의 상관이 부임하면서 자신에게 나치식 경례를 하고 불프의 전투기에 나치 문양을 다시 그려 넣으라는 명령을 내린다. 게다가 신출내기 막스라는 신임 전투기 조종사는 진짜 전투기와의 공중전 대신 보급기나 상대적으로 낙후한 비행기들을 상대로 실적을 꾸준하게 쌓는다. 당연히 불프와는 상극으로 치닫는다. 베레나는 홀아비 불프를 끊임없이 유혹하지만 오로지 전투에만 관심을 가진 불프에게 거절당하고 막스에게 돌아선다.

 

짧은 그래픽 노블 <수리부엉이>에서 독일이 동부전선에서 파국을 맞게 되는 과정들이 순차적으로 등장하는 걸 볼 수 있었다. 우선 1944년 6월에 시작된 소련군의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독일 육군은 괴멸적 타격을 입고 후퇴를 거듭하게 되고 결국 독일 영내에까지 몰리게 된다. 이 책을 통해 독일 공군의 마지막 작전이었던 ‘보덴플라테 작전’에 대해서도 알게 됐다. 그리고 불프의 딸 로미는 드레스덴 대공습으로 결국 죽고 말았다. 그 후, 불프는 광적으로 소련기를 격추하는 일에 매달리게 된다. 너무 당연한 귀결이었을까.

 

한편, 릴리야는 두 번이나 독일군에게 격추당하고서도 기지로 돌아갈 수가 있었다. 모두 불프의 도움이 있어 가능했다. 불프 역시 격추되어 적지에 떨어졌지만 구사일생으로 탈출하는데 성공해서 기지로 복귀한다. 불프의 딸 로미가 건네눈 나무로 조각된 부엉이 부적은 미신에 매달리는 최첨단 병기를 작동하는 병사들의 심리 상태에 대한 보고서라고 해야 할까.

 

불프가 독재가 히틀러를 증오하는 것처럼, 릴리야 역시 스탈린 동지를 높이 평가하지 않는다. 실력을 갖춘 에이스들이라면 자고로 그들처럼 조국의 독재자들을 깔아뭉갤 수 있어야 한다는 설정이었을까. 불프와 릴리야 모두 조국을 위해 싸운다는 대의를 가지고 있다. 불프의 딸 로미는 여자들을 죽이냐는 자신의 질문에 머뭇거리는 아빠 불프를 닦달한다. 불프는 과연 히틀러를 위해 싸운 것일까? 아니면 자신의 신념대로 조국을 적으로부터 지키기 위해 전력을 다해 싸웠던 걸까?

 

드라마처럼 사랑에 빠지게 된 불프와 릴리야의 관계는 다소 비현실적이긴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아예 불가능한 것은 또 아니지 않은가. 오히려 야만으로 점철된 전쟁이 더 비현실적으로 다가왔다. 모두가 알다시피 독일의 패배로 전쟁은 끝나고, 포로가 된 불프와 릴리야는 다시 만나게 된다.

 

오늘 도서관으로 달려가 로맹 위고의 그래픽 노블을 3권이나 빌려왔다. 그리고 가장 궁금했던 <수리부엉이>를 읽었다. 그야말로 전장에 핀 한 떨기 로맨스라고 해야 할까. 역사적 사실을 배경으로 쭉 깔고 전개되는 이야기들이 너무나 매력적이었다. 자 다음은 어떤 책을 읽어 볼까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시카고 을유세계문학전집 71
알라 알아스와니 지음, 김능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모든 존재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나라, 작가의 책도 국내에 출간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집트 출신 알라 알아스와니의 책 <시카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에 출간될 정도의 필력 그리고 컨텐츠라면 믿고 한 번 도전해 봐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전작 <야쿠비얀 빌딩>으로 워밍업을 해서인지 이번에 <시카고>는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다. <야쿠비얀 빌딩>에서 후진성,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을 이집트 국내 실정을 들어 알아스와니가 비판했다면, 이번에는 무대를 미국의 인디언 말로 ‘강한 향기’라는 뜻을 가진 시카고로 옮겨 특유의 ‘썰’을 푼다.

 

이번 소설에서도 다양한 인물군들이 연달아 등장해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든다. 9∙11 사태 이후, 보수반동화되어 가고 있던 미국 사회를 저격했다고 해야 할까. 1960년대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란 이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한 지금, 역설적으로 부르주아 특유의 위선으로 가득한 욕망을 억제하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상대적이다, 이집트에 비해서.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나 유학 혹은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전작 <야쿠비얀 빌딩>에서처럼 <시카고>에서도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우선 이집트 유학생 출신으로 일리노이 대학 의대에서 수학하게 된 네 명의 이집트 청년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타리크 하십과 샤이마 무함마디는 곧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이집트 국가 보안국의 끄나풀이자 이집트 유학생 회장 아흐마드 다나나 그리고 반정부 성향으로 똘똘 뭉친 나지 압둘 사마드가 차례로 등장한다.

샤이마는 뛰어난 재원으로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결혼 대신 유학을 선택했다. 공부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타리크는 유독 연애만큼은 젬병이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애정공세랍시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니 누가 그를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시골처녀 샤이마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니 인생사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너무 연애에 집중하다 결국 성적마저 떨어져 지도교수님에게 경고를 받고, 샤이마는 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다.

 

다른 상극에 있는 인물들로 다나나와 나지가 존재한다. 다나나는 국가 보안국의 끄나풀로 유학생의 동태를 파악해서 정부에 보고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 오로지 출세에 눈이 먼 다나나는 돈을 보고 부유한 집 규수 마르와와 결혼해서 장인의 돈를 갈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아내에 대한 성적 착취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이집트에서 취득한 박사 학위도 자기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보안국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국가 보안국이 만든 괴물이었다. 미국 지도교수인 ‘세포 촬영 기사’ 데니스 베이커에게 날조된 슬라이드를 제출했다가 봉변을 당하고 제적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집트 보안국 소장으로 주미 이집트 대사관 참사관으로 복무 중인 사프와트 샤키르 소장에게 달려가 SOS를 친다. 그런데 이 사프와트라는 자가 어떤 자인가 하면, 반정부 시위를 하던 인사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은 물론이고 파렴치한 방법을 고안해 수감자들이 비밀을 누설하게 만드는 기술자였다. 다나나의 아내 마르와에게 눈독을 들인 사프와트는 “은밀한 유혹”을 다나나에게 던진다. 정말 이집트판 막장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래서 더 재밌었는 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다 읽지 않고서는 책을 내려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음 주자는 나지다. 이미 이집트에서 다나나와 악연으로 얽혔던 나지는 일리노이대 교수들의 호의로 미국 수학의 꿈을 이루게 된다. 문제는 이 청년이 미국에 도착한 날 바로, 매춘부를 학교 기숙사로 들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짜잔 등장한 흑인 여성 도나는 나지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었다. 서비스 대가로 약속한 돈 150달러 대신 100달러를 강탈당한시피 뺏긴 나지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호색한처럼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나지는 조국 이집트를 사랑하는 애국청년이자 시인이다. 미국 유학도 사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그의 꿈의 일부였다. 조국의 후진성, 무지, 빈곤 그리고 조국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요소로 군부독재를 꼽는 청년은 자신의 지도교수 존 그레이엄이 마련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콥트교도 카람 도스와 주먹다짐에 가까운 논쟁을 벌인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제트엔진을 단 것처럼 소설을 달리기 시작한다.

 

알라 알아스와니의 자전적 소설 <시카고>의 한 축을 이렇게 네 명의 이집트 유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의 애환을 그린다. 가장 먼저 1960년대 자유로웠던 혁명 시절 투사였던 의사 존 그레이엄 교수는 자본주의 굴레라고 생각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혁명과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60대 교수는 노년에 외로움을 벗으로 삼게 됐다. 우연히 만난 매력적인 싱글맘이자 흑인여성 캐럴 맥킨리와 그녀의 아들 마크와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구가한다. 문제는 경제적 이유에서 시작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캐럴은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극심한 인종차별이라는 구조적 모순의 희생자였다. 존의 동료 교수 조지 마이클은 그녀에게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녀가 친구 에밀리의 도움으로 속옷 모델이 되면서 존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느 가정에나 문제는 있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 걸까.

 

두 명의 이집트 출신 교수들 가운데 한 명인 라으파트 사비트는 미국인으로 성장한 딸 사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조국 이집트를 잊고 완벽한 친미주의자로 변신한 라으파트는 사라가 왜 제프 같은 남자를 만나지는 알 수가 없다. 그를 따라 시카고의 악명 높은 우범지대 오클랜드로 가서 살겠다는 딸을 라으파트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사라는 결국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제프의 권유로 ‘행복클럽’에 가입했다가 마약중독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무함마드 살라흐 교수의 삶 역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인 아내 크리스와의 결혼 생활 중 아내를 성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살라흐 박사는 정신과 치료가지 받게 된다. 치료상담 와중에 살라흐는 미국 여권을 얻기 위해 크리스와 결혼했다는 진실을 지적하고 불같은 화를 내뿜는다. 그는 왜 화를 냈을까? 그건 바로 상담의사가 진실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국 이집트를 떠나 미국 생활을 택한 것을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한다. 아내 크리스와의 별거는 시간문제였다. 아내 크리스는 ‘개량형 산토끼’라는 이름도 야릇한 기구를 이용하기 시작하고, 살라흐는 30년 전 연인이었던 카이로의 자이납에게 연락을 취한다. 카람 도스와 나지에게 설득당한 그는 후스니 무바라크의 미국 방문 중 그의 독재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서 자신의 용기를 만방에 떨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래된 베레타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콥트교도 출신 카람 도스 교수는 역시 자신의 석사 학위 취득을 방해하던 지도교수의 심장수술을 의뢰받는 드라마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시카고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신의 손에 원수의 운명이 달린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신의 앞길을 번번이 막아선 남자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자비를 그에게 선사할 것인가. 작가가 마련한 이런 장치야말로 소설을 더욱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다.

 

카람 도스 교수와 격돌했던 나지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된 후, 그와 협력해서 이집트 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다. 한편 매력적인 미국 여성 웬디 쇼어 양을 만나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그녀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초반의 러브러브 모드는 좋았지만, 나지와 카람 도스 교수의 반정부 시위 계획을 알게 된 사프와트가 나지를 방문하면서 웬디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자신 역시 사프와트의 농간으로 테러리스트 혐의자가 되어 미정보기관에게 잡혀 가는 신세가 된다.

 

치과 의사 출신 작가의 본업은 과연 의사인가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는데, 손자 대에서 가장 화려하게 그 실력이 발휘된 게 아닌가 싶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냉철한 시선으로 현대 이집트가 처한 상황을 비판한다. 이집트가 직면한 후진성, 무지 그리고 빈곤을 끝내기 위해선 무바라크 정권의 장기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가 아랍에서 꽃을 피웠던가? 사우디에서 적극 지원하는 보수적 와하비즘이 사방으로 수출되어 오히려 민주주의가 고사된 건 아닐까? 조국의 도움을 받아 성공을 이룬 지식인들이 이제는 조국에 보답할 때라는 나지의 주장이 남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도 한 때 국가에서 인적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비용을 들여 국비유학생들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들이 과연 국가에 얼마나 공헌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미국이라는 공간에 진출한 이집트 사람들이 보통 사람일 수는 없다. 모두가 일단 지식인이라는 계급성을 담보한다. 어떤 이들은 미국 사회를 칭송하면서 아예 조국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자이납 같은 인사들은 조국에 남았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책의 어디선가 읽은 자본주의가 지닌 자구력이 체제의 몰락을 막아냈다는 지적은 상당히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실제적인 이집트의 지배자라며 전횡을 일삼는다. 그것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결연히 행동에 나서지만, 그것은 마치 부처님 손바닥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부역자들에게 사전에 감지되고 이집트의 동맹국 미국 정보기관원에게 잡혀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원점으로 회귀한다.

 

지금까지 알아스와니 작가는 모두 5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2년에 발표한 <야쿠비얀 빌딩>이 두 번째 그리고 2007년에 나온 <시카고>가 그의 세 번째 소설이었다. 그 후에도 두 권의 소설을 더 발표했는데, 속히 그의 책들이 한국에 소개되길 바란다. 2013년 발표한 <자동차 클럽>을 기대해 본다. 일단 한 번 읽어 보시라, 알아스와니의 매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테니.

 


댓글(4) 먼댓글(0) 좋아요(2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Falstaff 2019-02-19 11:0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알아스와니의 매력에 대한 코멘트에 완전 동의합니다!

레삭매냐 2019-02-19 11:17   좋아요 1 | URL
알아스와니의 다른 책들도 출간
되면 얼매나 좋을까요...

이집트 상황도 80년대 한국과
비슷하지 않았나 싶네요.

coolcat329 2019-02-19 12:2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리스트에 추가 안 할 수가 없네요.

레삭매냐 2019-02-19 13:21   좋아요 1 | URL
후회하시지 않을 거라 믿슙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