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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카고 ㅣ 을유세계문학전집 71
알라 알아스와니 지음, 김능우 옮김 / 을유문화사 / 2014년 11월
평점 :
모든 존재에는 이유가 있기 마련이다. 책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 알려지지 않은 나라, 작가의 책도 국내에 출간된다면 그에 합당한 이유가 있다. 이집트 출신 알라 알아스와니의 책 <시카고>를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에겐 전혀 알려지지 않았지만, 국내에 출간될 정도의 필력 그리고 컨텐츠라면 믿고 한 번 도전해 봐도 좋을 거라는 생각이다. 그리고 나의 예상은 꼭 들어맞았다.
전작 <야쿠비얀 빌딩>으로 워밍업을 해서인지 이번에 <시카고>는 한층 더 흥미진진하게 다가왔다. 심지어 재밌기까지 하다. <야쿠비얀 빌딩>에서 후진성, 군부독재에 대한 비판을 이집트 국내 실정을 들어 알아스와니가 비판했다면, 이번에는 무대를 미국의 인디언 말로 ‘강한 향기’라는 뜻을 가진 시카고로 옮겨 특유의 ‘썰’을 푼다.
이번 소설에서도 다양한 인물군들이 연달아 등장해서 이야기를 다채롭게 만든다. 9∙11 사태 이후, 보수반동화되어 가고 있던 미국 사회를 저격했다고 해야 할까. 1960년대 자유로운 사회적 분위기에서 자란 이들이 미국 사회의 주류를 형성한 지금, 역설적으로 부르주아 특유의 위선으로 가득한 욕망을 억제하는 분위기가 사회를 지배하고 있다. 물론 그런 생각은 상대적이다, 이집트에 비해서. 미국에서 새로운 기회를 찾기 위해 조국을 떠나 유학 혹은 자발적 디아스포라를 선택한 이들의 이야기는 독자의 호기심을 증폭시킨다.
전작 <야쿠비얀 빌딩>에서처럼 <시카고>에서도 다양한 군상들이 등장해서 이야기를 풍요롭게 만들어준다. 우선 이집트 유학생 출신으로 일리노이 대학 의대에서 수학하게 된 네 명의 이집트 청년들이 이야기를 이끌어 나간다. 타리크 하십과 샤이마 무함마디는 곧 연인 관계로 발전하게 되고, 이집트 국가 보안국의 끄나풀이자 이집트 유학생 회장 아흐마드 다나나 그리고 반정부 성향으로 똘똘 뭉친 나지 압둘 사마드가 차례로 등장한다.
샤이마는 뛰어난 재원으로 독실한 이슬람 신자로 결혼 대신 유학을 선택했다. 공부라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 타리크는 유독 연애만큼은 젬병이다. 상대방이 마음에 들면, 애정공세랍시고 공격적인 성향을 보이니 누가 그를 좋아하겠는가. 그런데도 시골처녀 샤이마에게 사랑을 느끼게 되니 인생사 알 도리가 없는 것이다. 너무 연애에 집중하다 결국 성적마저 떨어져 지도교수님에게 경고를 받고, 샤이마는 그에게 임신 소식을 알린다.
다른 상극에 있는 인물들로 다나나와 나지가 존재한다. 다나나는 국가 보안국의 끄나풀로 유학생의 동태를 파악해서 정부에 보고하는 파렴치한 행동을 한다. 오로지 출세에 눈이 먼 다나나는 돈을 보고 부유한 집 규수 마르와와 결혼해서 장인의 돈를 갈취하는데 혈안이 되어 있다. 아내에 대한 성적 착취는 말할 것도 없다. 그가 이집트에서 취득한 박사 학위도 자기 실력으로 얻은 것이 아니라 보안국의 도움이 있어서 가능했다. 그는 국가 보안국이 만든 괴물이었다. 미국 지도교수인 ‘세포 촬영 기사’ 데니스 베이커에게 날조된 슬라이드를 제출했다가 봉변을 당하고 제적당할 위기에 처하게 된다. 이집트 보안국 소장으로 주미 이집트 대사관 참사관으로 복무 중인 사프와트 샤키르 소장에게 달려가 SOS를 친다. 그런데 이 사프와트라는 자가 어떤 자인가 하면, 반정부 시위를 하던 인사들을 잡아다가 혹독한 고문은 물론이고 파렴치한 방법을 고안해 수감자들이 비밀을 누설하게 만드는 기술자였다. 다나나의 아내 마르와에게 눈독을 들인 사프와트는 “은밀한 유혹”을 다나나에게 던진다. 정말 이집트판 막장 드라마라고 해야 할까? 솔직히 그래서 더 재밌었는 지도 모르겠다. 도저히 다 읽지 않고서는 책을 내려 놓을 수가 없을 정도였다.
다음 주자는 나지다. 이미 이집트에서 다나나와 악연으로 얽혔던 나지는 일리노이대 교수들의 호의로 미국 수학의 꿈을 이루게 된다. 문제는 이 청년이 미국에 도착한 날 바로, 매춘부를 학교 기숙사로 들였다는 점이다. 그렇게 짜잔 등장한 흑인 여성 도나는 나지의 상상과는 전혀 다른 여성이었다. 서비스 대가로 약속한 돈 150달러 대신 100달러를 강탈당한시피 뺏긴 나지의 미래가 걱정되기 시작한다. 호색한처럼 보이는 모습과 달리 나지는 조국 이집트를 사랑하는 애국청년이자 시인이다. 미국 유학도 사실 시인이 되고 싶다는 그의 꿈의 일부였다. 조국의 후진성, 무지, 빈곤 그리고 조국의 발전을 가장 저해하는 요소로 군부독재를 꼽는 청년은 자신의 지도교수 존 그레이엄이 마련한 자리에서 만나게 된 콥트교도 카람 도스와 주먹다짐에 가까운 논쟁을 벌인다. 흥미진진한 이야기에 제트엔진을 단 것처럼 소설을 달리기 시작한다.
알라 알아스와니의 자전적 소설 <시카고>의 한 축을 이렇게 네 명의 이집트 유학생들이 차지하고 있다면, 다른 한 축에는 그들을 지도하는 교수님들의 애환을 그린다. 가장 먼저 1960년대 자유로웠던 혁명 시절 투사였던 의사 존 그레이엄 교수는 자본주의 굴레라고 생각하는 결혼도 하지 않은 채 혁명과 연구에 매진했다. 그 결과 60대 교수는 노년에 외로움을 벗으로 삼게 됐다. 우연히 만난 매력적인 싱글맘이자 흑인여성 캐럴 맥킨리와 그녀의 아들 마크와 살게 되면서 새로운 삶의 의미를 구가한다. 문제는 경제적 이유에서 시작되었는데, 흑인이라는 이유로 캐럴은 어느 곳에서도 일자리를 구하지 못한다. 그러니까 그녀는 극심한 인종차별이라는 구조적 모순의 희생자였다. 존의 동료 교수 조지 마이클은 그녀에게 모욕을 서슴지 않는다. 그녀가 친구 에밀리의 도움으로 속옷 모델이 되면서 존과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기 시작한다. 어느 가정에나 문제는 있다는 톨스토이의 말이 왜 이렇게 와 닿는 걸까.
두 명의 이집트 출신 교수들 가운데 한 명인 라으파트 사비트는 미국인으로 성장한 딸 사라 문제로 골머리를 앓는다. 조국 이집트를 잊고 완벽한 친미주의자로 변신한 라으파트는 사라가 왜 제프 같은 남자를 만나지는 알 수가 없다. 그를 따라 시카고의 악명 높은 우범지대 오클랜드로 가서 살겠다는 딸을 라으파트는 도대체 이해할 수가 없다. 사라는 결국 아버지의 충고를 따르지 않고, 제프의 권유로 ‘행복클럽’에 가입했다가 마약중독으로 비참한 죽음을 맞이한다.
무함마드 살라흐 교수의 삶 역시 행복해 보이지 않는다. 미국인 아내 크리스와의 결혼 생활 중 아내를 성적으로 충족시킬 수 없었던 살라흐 박사는 정신과 치료가지 받게 된다. 치료상담 와중에 살라흐는 미국 여권을 얻기 위해 크리스와 결혼했다는 진실을 지적하고 불같은 화를 내뿜는다. 그는 왜 화를 냈을까? 그건 바로 상담의사가 진실을 토로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국 이집트를 떠나 미국 생활을 택한 것을 곧바로 후회하기 시작한다. 아내 크리스와의 별거는 시간문제였다. 아내 크리스는 ‘개량형 산토끼’라는 이름도 야릇한 기구를 이용하기 시작하고, 살라흐는 30년 전 연인이었던 카이로의 자이납에게 연락을 취한다. 카람 도스와 나지에게 설득당한 그는 후스니 무바라크의 미국 방문 중 그의 독재를 규탄하는 성명서를 발표해서 자신의 용기를 만방에 떨치려 했지만 결국 실패하고 오래된 베레타로 자신의 삶을 마감한다.
콥트교도 출신 카람 도스 교수는 역시 자신의 석사 학위 취득을 방해하던 지도교수의 심장수술을 의뢰받는 드라마 같은 상황에 직면한다. 시카고에서 가장 실력이 뛰어난 자신의 손에 원수의 운명이 달린 것이다. 과연 그는 어떤 선택을 할 것인가? 자신의 앞길을 번번이 막아선 남자에게 복수를 할 것인가? 아니면 주님의 자비를 그에게 선사할 것인가. 작가가 마련한 이런 장치야말로 소설을 더욱 더 흥미진진하게 만드는 요소다.
카람 도스 교수와 격돌했던 나지는 그의 진심을 알게 된 후, 그와 협력해서 이집트 정부를 반대하는 투쟁에 나선다. 한편 매력적인 미국 여성 웬디 쇼어 양을 만나 그야말로 불같은 사랑에 빠진다. 문제는 그녀가 바로 유대인이라는 점이었다. 초반의 러브러브 모드는 좋았지만, 나지와 카람 도스 교수의 반정부 시위 계획을 알게 된 사프와트가 나지를 방문하면서 웬디와의 관계는 파국으로 치닫는다. 자신 역시 사프와트의 농간으로 테러리스트 혐의자가 되어 미정보기관에게 잡혀 가는 신세가 된다.
치과 의사 출신 작가의 본업은 과연 의사인가 작가인지 궁금해졌다. 할아버지와 아버지 모두 문인 출신이었다는데, 손자 대에서 가장 화려하게 그 실력이 발휘된 게 아닌가 싶다. 알라 알아스와니는 냉철한 시선으로 현대 이집트가 처한 상황을 비판한다. 이집트가 직면한 후진성, 무지 그리고 빈곤을 끝내기 위해선 무바라크 정권의 장기 독재를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과연 ‘아랍의 봄’ 이후 민주주의가 아랍에서 꽃을 피웠던가? 사우디에서 적극 지원하는 보수적 와하비즘이 사방으로 수출되어 오히려 민주주의가 고사된 건 아닐까? 조국의 도움을 받아 성공을 이룬 지식인들이 이제는 조국에 보답할 때라는 나지의 주장이 남다르게 들리지 않는다. 우리도 한 때 국가에서 인적 자원을 개발하기 위해 비용을 들여 국비유학생들을 만들지 않았던가? 그들이 과연 국가에 얼마나 공헌을 했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다.
미국이라는 공간에 진출한 이집트 사람들이 보통 사람일 수는 없다. 모두가 일단 지식인이라는 계급성을 담보한다. 어떤 이들은 미국 사회를 칭송하면서 아예 조국을 잊고 미국인으로 살아가는 방식을 선택했다. 자이납 같은 인사들은 조국에 남았지만, 달라진 건 아무 것도 없었다. 책의 어디선가 읽은 자본주의가 지닌 자구력이 체제의 몰락을 막아냈다는 지적은 상당히 날카로운 분석이었다. 독재정권에 부역하는 이들은 자신들이야말로 실제적인 이집트의 지배자라며 전횡을 일삼는다. 그것을 참지 못하는 이들은 결연히 행동에 나서지만, 그것은 마치 부처님 손바닥을 그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하는 부역자들에게 사전에 감지되고 이집트의 동맹국 미국 정보기관원에게 잡혀간다. 그렇게 모든 것은 원점으로 회귀한다.
지금까지 알아스와니 작가는 모두 5편의 소설을 발표했다. 2002년에 발표한 <야쿠비얀 빌딩>이 두 번째 그리고 2007년에 나온 <시카고>가 그의 세 번째 소설이었다. 그 후에도 두 권의 소설을 더 발표했는데, 속히 그의 책들이 한국에 소개되길 바란다. 2013년 발표한 <자동차 클럽>을 기대해 본다. 일단 한 번 읽어 보시라, 알아스와니의 매력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을 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