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두치킨 - 까칠한 아티스트의 황당 자살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2월
평점 :
절판


 

얼마 전 읽은 <바느질 수다>를 읽고 나서 존재를 알게 된 <자두치킨>을 읽었다. 아마 영화로도 나와 있다고 하던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1958년 11월. 이란의 전통 악기 타르 연주자 나세르 알리 칸이 죽었다. 그는 왜 죽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사트라피가 그린 <그래픽 노블>의 주제다. 문제의 발단은 무엇이었나부터 짚어 보자. 나세르 알리의 아내 나히드의 어떤 행동 때문이었다. 아티스트 나세르 알리가 애지중지하는 스승이 물려준 귀중한 타르를 박살낸 것이다. 그로부터 나세르 알리는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뒤, 저승사자 아즈라엘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래픽 노블의 처음은 나세르 알리가 평생 사랑 이란느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이란느를 나세르 알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그녀는 모르는 척 했다. 동생에 비해 어려서부터 말썽쟁이였던 나세르 알리. 그런데 범생이 동생 아브디의 삶은 어떠했던가. 공산주의 운동을 한답시고 가족들의 속을 태우지 않았나 말이다. 1953년 미국 CIA의 빛나는 공작으로 석유국유화를 단행한 민족주의자 모사데크의 실각에 대해서도 사트라피는 다룬다. 한 때 아랍세계에서 자랑 자유로웠던 이란, 페르시아가 지금은 원리주의자들의 지배를 받는 신정국가가 되지 않았던가. 세상 일은 그렇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자발적 죽음을 앞둔 나세르 알리는 가족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15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던 나세르 알리를 자신의 목숨에서 몇 년 띠어 어머니에게 주어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는 아들 나세르 알리를 불러 이제 그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아들의 기도가 어머니가 이승에서 떠나는 걸 막고 있다고 말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원 없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말에 나세르 알리는 당장 서른 갑의 담배를 대령한다.

 

자신과 가장 닮지 않은 수다쟁이 아들의 기도 때문에 나세르 알리는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을 수도 없다. 아티스트의 감수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장사를 하겠다는 아들은 이란 혁명이 터지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모자파르의 아이들이 모두 비만인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가장 말썽쟁이 아들이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도 놀랍다.

 

영화 자두치킨으로 검색해 보니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영화가 검색창에 떴다. 마르잔 사트라피가 직접 연출한 영화라고 하는데, 이란의 전통악기 타르를 바이올린으로 대체되었고 배우들은 불어로 대사를 치는 것 같다. 짧은 영화 트레일러를 보니 예술은 삶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고, 예술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했던가. 아마 영화에서는 나히드의 예술적인 바가지 액션 그리고 환상적인 이란느와의 사랑이 그야말로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저승사자 아즈라엘도 한몫 하는 것 같던데 궁금하다.

 

아, 참고로 자두치킨은 나세르 알리의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요리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실의에 빠진 나세르 알리를 유혹하려고 아내 나히드가 만들어서 유혹했지만, 나세르 알리는 음식을 그만 뱉어 버렸다.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저승사자의 방문을 의미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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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펜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평점 :
절판


 

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 래빗>을 읽고 나서 좀 아쉬운 마음에 머리맡에 있던 로베르토 볼라뇨의 <안트베르펜>을 집어 들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지나 한밤중으로 치닫고 있었다. 책이 더 읽고 싶었다. 볼라뇨의 팬을 자처하는데 나는 왜 이 책을 사두고 읽지 않았을까. 하긴 어디 그런 책들이 한둘이던가. 읽다만 책들도 참 많지. 그래 볼라뇨 전작 읽기 중이니 당연히 이 책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내가 얼마 전에 시집도 읽었는데 뭘하는 하는 마음으로.

 

 

칠레에서 태어나 메히코에서 교육 받은 세계인이자 반항아 볼라뇨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문청 생활을 한 모양이다. 생활고를 다스리기 위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도 책과 글쓰기를 부단히 갈고 닦은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소설이라기 보다 산문시에 혹은 어느 문청의 습작에 가까운 <안트베르펜>에는 훗날 볼라뇨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밑바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지하고 불초한 독자는 하나의 통일된 플롯이나 캐릭터를 기대했지만, 27세의 문청은 독자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다. 끝없이 분절되고 글을 쓸 당시의 본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해석불가한 이야기들을 주절주절대고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리따운 어린 소녀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콜란 야르에게 너도 쫓기냐는 조금은 황당한 질문이 등장하지 않던가. 소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경찰에 대한 묘사는 왜 그렇게 리얼한지. 자신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카탈루냐 캠핑장에 대한 이야기들, 밤바다가 당연히 검은 색인지 몰라서 그런 글들을 남긴 걸까. 아, 등대도 검다고 썼지 아마.

 

피씨통신 시절 유행하던 스키조프레닉(정신분열증)이라는 단어가 볼라뇨의 끝없이 분절되는 글 속에서 연상이 되었다. 볼라뇨의 글 덕분에 자마이카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몬티 알렉산더의 연주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피아노의 리드로 시작해서, 베이스 주자의 리듬 그리고 드럼 삼위일체의 <Isn't she lovely> 라이브 연주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털이 부숭부숭난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대며 자신의 흥에 도취된 몬티 알렉산더의 연주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책 리뷰를 하다가 또 삼천포로 빠졌구만 그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십대의 볼라뇨는 체류 허가증을 가진 이방인이었다. 확실히 젊은 시절 볼라뇨의 글에는 문청 특유의 오만과 분노 그리고 폭력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정확하게 인생의 좌표를 정하지 못한 불확실성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문학도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들은 글쓰기의 소재다. 제목부터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사고에서 유래한 게 아니던가. 소설의 제목은 카탈루냐 혹은 바르셀로나 그것도 아니라면 람블라스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런 임의성이야말로 이후 사반세기에 달하는 볼라뇨 문학여정의 시발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누워서 책을 보던 사람도 벌떡 일어날 만한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 수많은 불면의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작가는 글렀다는 체념도 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좌절과 체념의 시간들이 굳건하게 뭉쳐서 로베르토 볼라뇨라는 작가를 만들었겠지. 그러나 <안트베르펜>은 여전히 나에게는 모호하고 분절된 이야기들의 연속일 따름이다. 큰 줄기를 이루는 내러티브의 부재 덕분에 강제된 의미찾기는 어느 순간 실종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다. 도대체 ‘파란 꼽추’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소유하지 못한 것은 파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독자는 이미 읽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따름이다. 나의 유한한 삶이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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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2-06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월 계획대로 착착 읽고 계시네요.^^

레삭매냐 2018-12-06 13:36   좋아요 0 | URL
넵... 이제 앞으로 6권 남았습니다 !!!

얇다란 책으루다가 ~
 
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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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일기를 자주 썼었다. 물론 나도 서민 교수님의 말쌈대로 어릴 적에는 그렇게 일기 쓰기가 싫었다. 특히나 단골 방학 숙제인 그림일기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그 당시에는 일기 쓸 꺼리가, 껀덕지가 전혀 없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아니 으응?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특히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날씨 쓰기였다. 지금이야 인터넷에서 오만가지 정보를 다 제공하지만 그 시절에는 절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신문의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신문까지 찾아 가면서 그림일기를 그릴 틈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으므로.

 

그러다 어떤 일로 회심해서인지는 몰라도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아마도. 하지만 엄마가 내 일기를 몰래 훔쳐보신다는 걸 알고서는 다 모아다가 불 질러 버렸다. 아쉬운 기록들이긴 하지만 어쩌랴 이미 다 불타 없어진 것을.

 

서민 교수님의 글을 좋아한다. 암울했던 시절 경향신문 칼럼으로 사이다 같은 시니시즘의 정수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의 흑역사라는 <마태우스>란 책도 한 번 구해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이다. 얼마나 허접하길래 절대 감추고 싶어하시는지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 처음부터 글을 지금처럼 잘 쓰신 건 아니란다. 그렇지, 모름지기 글쓰기의 기본은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전율할 만큼의 글을 선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글쓰기 연습을 해야 한다. 선생이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일기 쓰기란다. 반성과 성찰 이런 진부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지. 인간의 기억이란 유한한 법이다. 뭐 요즘 유행하는 태블릿 피씨에 전자 펜으로 쓰는 것도 좋지만, 선생은 그런 디지털 글쓰기보다 노트와 펜으로 무장한 아날로그 방식의 글쓰기를 추천한다.

 

참 그리고 역시나 시간이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핑계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리라. 한국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소비하는 시간이 평균 2시간은 된다고 하니 말이다. 하긴 나도 이런 말 자격이 있기는 한가 싶다. 며칠 전에 인스타 구경하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 시간에 책을 읽었으면 하는 후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마구잡이로 글을 쓴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고 심지어 팔리는 글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글을 좀 쓰려면 일기쓰기라는 자기객관화의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고유의 글을 방식을 선생은 친절하게도 예문을 들어가며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그러니까 일종의 빨간펜 선생님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나는 워낙 악필이어서 디지털 글쓰기가 너무나 편하다. 게다가 어지간한 맞춤법도 알아서 척척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물론 컴퓨터를 절대 맹신하면 안된다는 조언도 해주고 싶다. 일상에서 소재 픽업과 단상들이 떠오를 때마다 얼개를 구상하고, 노트에 잽싸게 메모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나도 책 읽기를 할 때, 메모를 해두면 리뷰의 질이 그나마 나아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휘발되어 버리기가 부지기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의 독후감의 질이 획기적으로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블로그에 쓴 글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건 사이월드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배우지 않았던가. 그렇게 사이월드의 조회수와 댓글에 목매달았지만 모든 건 한 때 뿐이다. 최근에 다시 사이월드가 부활하긴 했지만 예전의 영화는 되찾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최근 선수들은 모두 얼굴책과 인스타로 갈아탔으니 말이다. 사실 이제 블로그도 한물 간 미디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전적으로 나의 독서일기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채 10념 남짓 도토리 장사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사이월드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수천년 전 로제타 스톤은 아직도 영원한 아우라를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같이 날림으로 글을 쓰는 아마추어들이 과연 글쓰기를 통한 표현력의 확장을 추구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할 문제겠지만, 일기쓰기가 표현력을 발달시키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근데 우리는 도대체 왜 일기를 써야 하는 거지? 한 마디로 말해 글쓰기가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다는 것이다. 카톡을 보내는 것도 일종의 글쓰기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도 자기소설을 써야 하고, 취업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누군가 대신 써줄 수도 있고, 비용을 내고 자기소설을 살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자기만의 고유한 아우라를 가진 글이 필요한 순간을 인생에서 반드시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언이다. 그런데 왜 공부는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사는 건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었던가... 책을 읽다 보니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시 사유의 힘이던가.

 

선생은 술일기도 쓰셨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이 양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술을 마신 와중에도 일기를 쓸 정도의 자제력이라면 존경해 마지 않을 수가 없을 듯 싶다. 냉면을 안주 삼아 쏘주를 마신 이야기와 후원금 삥땅을 빙자해서 방문한 학생들과 3차까지 내달리는 모습은 정말 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우리 독서모임 달궁의 삽하나님도 기레기 시절에 서민 교수님에게 밥을 얻어 드신 적이 있단다. 멋진 양반 재인증!

 

<밥보다 일기>를 읽는 동안, 그렇다면 나도 독서일기라도 매일 같이 써볼까 우짤까 하는 망상에 젖어 보았다. 특유의 귀차니즘과 게으르니즘 때문에 그게 잘될 턱이 있나 그래. 그냥 내 페이스대로 살아야지.

 

200권 채우기 나의 얍삽 프로젝트 첫 번째인 <밥보다 일기>는 수월하게 마무리지었다. 두 번째인 로베르토 볼라뇨의 <낭만적인 개들>도 읽었다. 다음 주자는 9개의 단편 중에서 한 편만을 남겨 두고 있는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 별장, 그 후>다. 오늘도 도서관에 가서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와 <블라드>를 빌려야겠다. 앞으로 8권만 더 읽으면 대망의 200권 읽기 프로젝트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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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2-04 10:48   좋아요 1 | URL
써주신 글을 읽어 보니 정말 그렇네요...

선생님들이 마냥 일기를 써 오라 그랬지
어떻게 어떻게 써라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강압적 숙제만
아니라면 좀 더 일기쓰기에 취미를 붙였
을 지도 모르겠네요 -

구구절절히 옳으신 말씀이라 격하게 공
감합니다.

목나무 2018-12-04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초창기때 쓴 리뷰를 간혹 읽어보면 정말 내가 이렇게 글을 못 썼단 말이야! 하고 놀라곤 해요. ㅎㅎㅎㅎ;;;;;
뭐든 꾸준히 쓰다보니 생각도 좀더 깊게 하게 되고 요약도 좀더 깔끔해지고....... 역시 시간의 노오력은 글쓰기를 배신하지 않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18-12-04 10:49   좋아요 0 | URL
저랑은 좀 반대신 것 같아요 ㅋㅋㅋ

책 리뷰 말고, 영화 리뷰요. 그 땐 정말
열심으로 글을 썼는지 아니 신이시여
이 글을 정말 제가 썼단 말입니까 할
정도라니깐요. 지금은 너무 허접해요.
게을러져서일까요?

책 리뷰도 딱히 개선된 것 같지 않구요.
편차가 너무 심하다고나 할까요.

차라리 힘 빼고 쓴 글이 더 낫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뒷북소녀 2018-12-04 12:59   좋아요 2 | URL
ㅋㅋㅋ매냐님도 인스타 하세용?ㅋㅋㅋ
요즘에도 매일 매일 일기 쓰시잖아요. 독서 일기요.

저도 예전 글들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 (기분탓일까요?)
지금 다시 읽어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은데...
지금은 영...

목나무 2018-12-04 14:10   좋아요 2 | URL
뒷북소녀 : 매냐님도 인스타 하시는 것 같더라구.. 하지만 못찾겠음...ㅋㅋㅋ
지금도 뒷북소녀 글 좋기만 하구만.... 시간에 따라 글에도 내가 묻어나는 것 같아. :)

레삭매냐님 : 정말 영화 리뷰 잘 쓰고 싶어서 책도 몇 권 읽고 그랬는데..... 이게 또 책리뷰와는 다른 것 같아요. 뭔가 지식도 좀 있어야 하는 것 같구요. 이쯤에서 레삭매냐님 올해의 영화 선정도 급 궁금해집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12-04 14:21   좋아요 0 | URL
뒷북소녀님 : 매일매일은요 무얼... 가끔 쓰는 걸요 -
서민 교수님이 일기를 쓰라 하셔서 ㅋㅋㅋ
분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인스타도 합니다. 그냥 저냥 ~

설해목님 : 올해 영화를 본 게 거의 없어서리...
책만 읽다 보니 영화 볼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고
싶네요.
예전의 영화보기 기운을 되찾고 싶습니다.

cyrus 2018-12-04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는 꼭 ‘매일‘ 기록해야 하는 건 아닌데 어린 시절에는 반드시 그렇게 써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일기를 검사했는데, 며칠 안 쓰면 게으른 아이로 취급했어요. ^^;;

레삭매냐 2018-12-04 16:32   좋아요 0 | URL
즐거운 일기쓰기가 되어야 하는데
검사와 강제가 결합되다 보니 반항심
에 더더욱 쓰기가 싫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아이가 아니다
보니 글쓰기 훈련을 위한 일기쓰기도
아니었고요. 이래서 배움이 중요한가
봅니다 :>
 
낭만적인 개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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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시집을 읽었다. 나는 시집을 읽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읽는다. 이번의 경우에도 내가 애정하는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알아 보겠다는 의도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다. 다른 유작 소설집은 사서 읽었다. 나의 예상 대로, 시집을 다 읽고 나니 내가 뭘 읽었나 싶다. 사실 졸려서 비몽사몽 간에 읽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모두 43편의 시들이 실려 있는 <낭만적인 개들>에는 희한하게도 볼라뇨의 모국어인 스페인 어 시 원문이 좌측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영어는 그나마 어려서부터 접해서 대충 맞춰서나 볼 수 있지, 그런데 스페인 어는 도통 좌와 우를 맞추어 보려고 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한국에 출간된 책 중에 스페인 어 원문을 게재한 시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량 때문에 출판사에서 스페인 어를 실은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감출 수가 없다.

 

칠레 출신으로 표제작 <낭만적인 개들>에 등장하는 시구처럼 “나라를 잃은” 청년은 멕시코로 망명을 떠나 국제적 유랑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어쩌면 멕시코 아니 메히코는 볼라뇨에게 제2의 조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나라는 다르지만 스페인 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라틴 아메리카 공동체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말만 통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교육도 받을 수 있고, 일자리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가라면 스페인 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각광받는 문학 작품을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부럽게 다가왔다.

 

볼라뇨의 시에 등장하는 하얀 굼벵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도대체 무슨 의미에서 하얀 굼벵이라는 녀석을 등장시킬 걸까? 난 아마 살면서 한 번도 하얀 굼벵이를 본 적이 없는데. 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군의 마지막 격전지 중의 하나인 헝가리 벌라톤 호수라는 지명이 뜬금 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연 볼라뇨는 벌러톤에 가보았을 걸까? 아니면 그냥 문학적 상상력일지 궁금하다.

 

도발적인 청년 시인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님에게 공산주의 천국에도 동성애자들과 각종 성적 유희를 일삼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냐고 묻는다. 내가 보기에도 시인은 유물론자 같은데, 여전히 자신의 정신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적 색채를 떨칠 수가 없었나. 아니면 이것 역시 하나의 상징계로서 작동하는 문학적 시도 혹은 도발이려나.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작고한 시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나의 답답증은 더해만 가는구나.

 

시를 읽다가 흥미롭게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자신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이나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등장하는 루페, 에드나 리베르만/에디트 오스테르 그리고 자신을 페르소나화한 아르투로 벨라노 같은 이름들 말이다. 자신의 창작물을 울궈먹는 고전적 기법인지 아니면 서로 상호보완하는 보속적인 참신한 시도인지 시의 문외한으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방법이 없다.

 

또한 이 시집을 통해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195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루벤 다리오의 시집도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전히 나는 도대체 누가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의 시를 읽을지 궁금하다. 그런 책들을 꾸준하게 출판사들의 패기도 대단하고.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달리는 검은 오토바이를 당나귀에 비유한 장면도 기억에 남을 듯 싶다.

 

리뷰용으로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산문에 가까운 볼라뇨의 시들은 난해하기만 하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으리라. 나의 시독해 능력은 소설의 그것에 비해 절대적으로 함량부족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읽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만족하다고 자평한다. 나의 볼라뇨 읽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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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케스 - 가보의 마법 같은 삶과 백년 동안의 고독 푸른지식 그래픽 평전 6
오스카르 판토하 지음, 유 아가다 옮김, 미겔 부스토스 외 그림 / 푸른지식 / 2015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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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달에만 가비토 마르케스의 책을 5권 읽었다. 이제 작가의 역작 <백년 동안의 고독>과 <콜레라 시대의 사랑>만을 남겨 두고 있다. 그런 시점에서 만난 오스카르 판토하의 가비토에 대한 그래픽 노블 평전 <마르케스>는 작가의 작품을 관통하는 핵심 요소들을 만나볼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스페인 어로 쓰인 작품 중에 세르반테스의 <돈키호테>와 버금가는 영예를 누린 <백년 동안의 고독>을 만나기 위한 사전 작업이라고 해도 무방할 듯 싶다.

 

마르케스 사후, 망명지였던 멕시코와 조국 콜롬비아 사이에서 그의 유해 안치를 두고 줄다리기를 벌였다는 이야기를 들었던 것 같은데 좌파 지식인 마르케스를 거의 쫓아내듯 조국에서 몰아낸 콜롬비아보다는 그에게 안식처를 제공해준 멕시코의 손을 들어 주고 싶은 것이 솔직한 나의 심정이었다. 그래픽 노블은 아카풀코 해변으로 가는 1965년 마르케스 가족 여행으로부터 시작한다.

 

마르케스는 어려서부터 이별과 고독에 익숙한 존재가 아니었을까. 아버지 돈 가브리엘 엘리히오를 탐탁지 않게 생각했던 할아버지 마르케스 대령의 휘하에서 자라나면서, 콜롬비아 역사의 한 획을 장식한 천일전쟁에 대해 조숙한 가비토는 익숙해졌다. 훗날 자신의 소설의 배경이 되는 마콘도는 고향 아라카타카의 다른 모습이었다. 오랜 시골집에 출몰하는 유령과 여자 가족들에 둘러 싸여 자란 가비토에게 <백년 동안의 고독>을 위한 모든 준비는 이미 되어 있었던 게 아닐까. 다만 실마리를 풀어내는 것은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어느 소설이든 첫 출발이 가장 어렵다고 하지 않았던가. 바로 1965년의 아카풀코에서 가비토는 위대한 출발을 시작했는 지도 모르겠다.

 

그의 곁에는 작가로서 자신만의 글을 쓰고 싶은 위대한 작가를 보필하는 평생의 사랑 메체(메르세데스)가 있었다. 작가를 남편으로 둔 아내는 모든 것을 희생해 가면서 남편의 글쓰기를 응원한다. 아카풀코에서의 가족여행도 남편의 역작 구성을 위해 이만 충분하다며 돌아가자고 먼저 제안하지 않았던가. 약간의 윤색도 없진 않겠지만, 언제나 위대한 스토리에는 MSG도 필요한 법이니까.

 

시간과 공간을 넘나들며 좌충우돌하는 이야기 방식이 과연 마르케스 평전을 다룬 그래픽 노블답다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아버지 엘리히오는 장남 가비토가 대학을 졸업하기를 바랐지만, 전업작가이자 저널리스트로 나선 가비토의 꿈은 달랐다. 수많은 문인들과 교류를 통해 가비토는 주술적 리얼리즘으로 훗날 알려지게 될 붐 문학을 영도한 문학적 영감을 얻었던 것 같다. 멕시코 작가 후안 룰포의 작품을 통해 도저히 현상을 타파할 수 없을 것 같은 현실을 주술적 리얼리즘의 세계로 포용하는 기법도 이 시기에 마련된 게 아닐까.

 

마침 가비토의 초기작들을 연달아 읽어서 그런지 데뷔작 <썩은 잎>과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를 비롯해서 최근에 재출간된 <아무도 대령에게 편지하지 않다>에 관한 내용이 그래픽 노블에 등장할 때는 무척이나 반가운 마음이 들기도 했다. 이미 일가를 이룬 작가면서도 이야기가 어떻게 만들어지는 것에 대한 작가적 고민은 인상적이었다. 쿠바혁명을 성공시킨 카스트로 정권을 열렬하게 지지한 좌파 지식인으로 부평초 같은 망명자로서의 삶을 살아야 했다는 점도 그리고 세계적 작가의 반열에 오르기 전까지 생활고로 시달려야 했던 생생한 삶의 리포트가 이어진다. 망명길에 시나리오 작업을 하다 만난 카를로스 푸엔테스와의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듣다 보니, 푸엔테스의 작품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역시나 나의 독서는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지는 연쇄반응인가 보다.

 

그래픽 노블의 대미는 스웨덴에서 새벽녘에 걸려온 전화로 마무리된다. 모든 작가들이 꿈꾸는 세계에서 가장 권위 있는 노벨문학상 수상자로 1982년에 가비토가 선정된 것이다. 다만 아쉬운 점 중의 하나는 가비토 마르케스의 노벨문학상 이후의 행적이 없다는 점이다. <백년 동안의 고독>의 집필을 위한 기나긴 여정과 걸작에 담긴 다양한 요소들을 추적했다는 점에서 그래픽 노블 <마르케스>를 높이 평가하고 싶다. 위키피디아에서 그의 비블리오그래피를 추적해 보니, 확실히 노벨문학상을 받은 이후에 작품 활동이 뜸해지긴 했다. 아무래도 노벨문학상이라는 하나의 성취가 작가로 하여금 전혀 새로운 무언가를 쓰도록 추동하는 건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 점에서 가즈오 이시구로의 분발을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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