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을 수 없는 가우초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이경민 옮김 / 열린책들 / 2013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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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래 전에 <참을 수 없는 가우초>를 사서 허겁지겁 <두 편의 가톨릭 이야기>만 쏙 골라 읽었다. 어느 소년이 눈밭을 맨발로 고행하는 프란체스코회 수도사를 존경하는 이야기가 떠올랐다. 그런데 그 수도사는 방금 수도사와 아이를 살해한 흉악범이었다. 누군가 자신을 따라 붙은 것을 눈치채고는 그마저도 클린할 생각이었지 아마. 볼라뇨는 이렇게 하나의 이야기에 담긴 서로 교차되는 성속의 내러티브를 즐기는 모양이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다.

 

내가 볼라뇨를 읽는 이유는 많다. 그 중의 하나는 아마도 니힐리즘의 정수가 아닐까. 내가 절대 가볼 수 없는 팜파스의 광활한 대지를 누비는 전직 판사 아저씨의 이야기는 또 어떤가. 팜파스에 더 이상 말을 볼 수가 없다. 소 대신 팜파스의 주인이 된 토끼를 덫으로 잡는 이야기는 생경하게 다가온다. 경제난과 인플레이션으로 그동안 애써 모은 자산이 종잇조각이 되자 판사는 쇠락한 시골 농장을 찾아 가우초의 삶을 살려고 노력한다. 우리 식으로 하면 귀촌 정도 되려나. 아니 변호사로 활동할 수 있는 왜 그런 결정을 내리셨을까 싶지만, 삶의 단면은 언제나 이해할 수도 그리고 설명도 불가할 순간이 있지 않은가 말이다. 도회지 부에노스 아이레스에서 일부러 찾아온 문인 아들과 지인들에게 육즙이 풍성한 소고기 대신 토끼 고기를 대접하는 늙수그레한 가우초들의 이미지가 너무나 마음에 들었다. 가우초의 삶을 사는 주인공의 꿈은 인디오 여자와의 합방으로 확정지어진다.

 

<경찰 쥐> 페페는 자꾸만 메가 픽션 <2666>을 연상시켰다. 쥐들은 동족을 죽이지 않는다고 했던가. 하수도에 거주하는 유능한 형사 쥐 페페는 연달아 벌어지는 연쇄살인 사건 해결에 나선다. 페페의 목적은 정의를 구현하기 위해서라고 한다. 첫 번째 희생자는 재갈에 물린 채 아사되었다고 했던가. 그 다음에도 쥐들의 삶을 위협하는 포식자에게 날카로운 자상을 입고 연달아 죽은 일련의 시체들이 발견된다. 페페 경찰 쥐는 범죄의 패턴을 연구하면서 아무래도 같은 쥐의 소행이라는 심증을 굳혀 간다. 그리고 결국 범인으로 지목된 녀석과 대결하게 되었을 때, 자신이 추구하는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자신 역시 동족 살해라는 끔찍한 범죄의 당사자가 된다. 이런 역설이 있을 수가 있나 그래. 어쨌든 페페 형사는 족제비라는 강력한 포식자의 위협에 직면한 동족의 S.O.S. 요청을 무시하지 않고 구조하기 위해 달려간다.

 

자신의 작품을 한 없이 베껴 새로운 창작물을 만들어 내는 프랑스 감독 모리니에 대한 깊은 애정을 품고 있는 알바로 루셀로트의 기묘한 이야기는 또 어떤가. 원작자에게 아무런 양해도 구하지 않은 표절행위를 문학을 사랑하는 당신이라면 용서할 수 있냐고 볼라뇨는 독자들에게 묻는 것 같다. 게다가 요즘처럼 원전의 영화화로 막대한 금전적 이득을 취할 수 있다면 아마 그러지 못할 것이다. 하지만 우리의 아르헨티나 출신 작가 루셀로트는 표절감독이야말로 자신의 진정한 팬이라는 사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다. 같은 상황이 소설가 볼라뇨 씨에게도 벌어진다면 그는 통 크게 자신의 팬의 행동을 ‘뭐, 그럴 수도 있지’하고 넘길 수 있을까. 나라면 아마 그러지 못하고 나의 재산을 지키기 위해 전투에 분연하게 나서지 않을까 싶다만.

 

나머지 두 편은 간부전으로 죽어가던 볼라뇨의 묘비명 같은 글이라고나 할까. 세상에 더 이상 읽을 책이 없다면 무슨 낙이 있겠는가? 작가 본인의 과도한 섹스에 대한 직접 체험도 궁극의 깨달음에 대해 한몫 한 게 아닐까 하는 합리적 추론도 해보게 된다. 죽음을 앞둔 사형수가 섹스에 집착하는 장면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나도 본 션 펜 주연의 <데드맨 워킹>에 그런 장면이 나오는지 미처 몰랐다.

 

프랑스 시인 말라르메의 시를 인용해서 그리하여 마지막 단계로 작가는 여행을 추천했지 아마도. 하지만 여행 역시 쁘띠 부르주아에게나 해당한 일이 아닐까? 여행을 하기 위한 금전적 여유와 시간은 어디에서 찾을 수 있단 말인가? 어려서 여행할 적에는 돈이 없었고, 지금은 돈도 시간도 없다는 말이 왜 이렇게 실감이 나는지 모르겠다. 심연에 도달해서 ‘해독제’를 찾기 위해 우리는 ‘섹스와 책과 여행을 탐험’해야 한다는 볼라뇨의 말을 오래도록 기억하게 될 것 같다.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계를 겨냥한 신랄한 비판인 <크툴루 신화>는 작가 스스로 지독한 문학 소비자였던 시절을 바탕으로 해서 재구성된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라틴 아메리카와 스페인 문화권의 한다하는 작가들을 총망라한다. 노벨상 수상자로 공통분모를 형성한 만델라와 가비토 그리고 바르가스 요사에 대한 저격은 붐 세대를 끝장내려는 인프라레알리스모의 일원다운 패기를 보여준다. 볼라뇨는 현존하는 최고의 라틴 아메리카 작가로 알란 파울스를 꼽고 있는데, 아쉽게도 국내에는 소개된 그의 작품이 하나도 없구나.

 

내가 볼라뇨를 꾸준하게 읽는 이유 중의 하나는 현대 라틴 아메리카 문학에 대한 정보를 취합하는 하나의 창구이기 때문이다. 그를 통해 로드리고 프레산과 지금 한창 빠져 있는 호르헤 볼피(<클링조르를 찾아서>는 당연 올해의 발견이다!!!)를 알게 되지 않았던가. 그 외에도 국내에 알려지지 않은 숱한 작가들의 흔적을 엿볼 수가 있다는 것만으로도 나는 만족한다.

 

대중에게 소비되지 않는 책을 쓰기 위해 문학가는 모름지기 산더미 같은 책과 씨름하는 숙명을 지니고 태어난 게 아닐까. 그렇다, 책은 소장하는 게 아니라 읽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다. 그것은 책의 창조자인 문학가도 예외는 아니라는 것이다. 존경 받는 작가가 되기 위해서는 엄청난 노력이 필요하다는 게 볼라뇨의 주장인데, 그럴려면 정신적 창녀가 되는 것도 마다해서는 안된다는 걸까? 죽음을 앞둔 두려움을 전혀 모르는 진격의 작가지만 볼라뇨도 그 선까지는 넘지 않은 것 같다. 베스트셀러를 경멸하면서도 독자들에게 베스트셀러라도 읽으라는 권면은 정말 가슴 찡하게 다가왔다.

 

볼라뇨가 부린 주술대로 한국의 어느 독자는 좀비처럼 널리 알려지지 않은 라틴 아메리카 작가들의 글을 찾아 읽게 되었다. 책쟁이라면 호르헤 볼피의 <클링조르를 찾아서>는 반드시 읽을 지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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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두치킨 - 까칠한 아티스트의 황당 자살기
마르잔 사트라피 지음, 박언주 옮김 / 휴머니스트 / 2012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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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읽은 <바느질 수다>를 읽고 나서 존재를 알게 된 <자두치킨>을 읽었다. 아마 영화로도 나와 있다고 하던데, 기회가 되면 한 번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때는 1958년 11월. 이란의 전통 악기 타르 연주자 나세르 알리 칸이 죽었다. 그는 왜 죽게 되었는가를 밝히는 것이 사트라피가 그린 <그래픽 노블>의 주제다. 문제의 발단은 무엇이었나부터 짚어 보자. 나세르 알리의 아내 나히드의 어떤 행동 때문이었다. 아티스트 나세르 알리가 애지중지하는 스승이 물려준 귀중한 타르를 박살낸 것이다. 그로부터 나세르 알리는 존재의 이유를 잃게 된 것이다. 그리고 일주일이 지난 뒤, 저승사자 아즈라엘의 방문을 받게 된다.

 

그래픽 노블의 처음은 나세르 알리가 평생 사랑 이란느를 만나는 장면으로 시작한다. 오랜 시간이 지나서인지 이란느를 나세르 알리를 알아보지 못한다. 아니 그녀는 모르는 척 했다. 동생에 비해 어려서부터 말썽쟁이였던 나세르 알리. 그런데 범생이 동생 아브디의 삶은 어떠했던가. 공산주의 운동을 한답시고 가족들의 속을 태우지 않았나 말이다. 1953년 미국 CIA의 빛나는 공작으로 석유국유화를 단행한 민족주의자 모사데크의 실각에 대해서도 사트라피는 다룬다. 한 때 아랍세계에서 자랑 자유로웠던 이란, 페르시아가 지금은 원리주의자들의 지배를 받는 신정국가가 되지 않았던가. 세상 일은 그렇게 알 수가 없는 것이다.

 

일주일 앞으로 다가온 자발적 죽음을 앞둔 나세르 알리는 가족들에 대해서도 생각해 본다. 15년 전, 어머니의 죽음을 원하지 않았던 나세르 알리를 자신의 목숨에서 몇 년 띠어 어머니에게 주어도 무방하다고 할 정도로 간절하게 신에게 기도를 드렸다. 어머니는 아들 나세르 알리를 불러 이제 그만 죽음을 맞이하고 싶다는 말을 한다. 아들의 기도가 어머니가 이승에서 떠나는 걸 막고 있다고 말하시면서 말이다. 그리고 원 없이 담배를 피우고 싶다는 말에 나세르 알리는 당장 서른 갑의 담배를 대령한다.

 

자신과 가장 닮지 않은 수다쟁이 아들의 기도 때문에 나세르 알리는 자신이 원하는 죽음을 맞을 수도 없다. 아티스트의 감수성이라고는 전혀 없고 장사를 하겠다는 아들은 이란 혁명이 터지고 바로 미국으로 건너가 나름 성공한 삶을 살았다고 한다. 모자파르의 아이들이 모두 비만인 것은 비밀도 아니었다. 가장 말썽쟁이 아들이 기도를 드렸다는 사실도 놀랍다.

 

영화 자두치킨으로 검색해 보니 <어느 예술가의 마지막 일주일>이라는 영화가 검색창에 떴다. 마르잔 사트라피가 직접 연출한 영화라고 하는데, 이란의 전통악기 타르를 바이올린으로 대체되었고 배우들은 불어로 대사를 치는 것 같다. 짧은 영화 트레일러를 보니 예술은 삶을 이해하게 만들어 주고, 예술의 완성은 사랑이라고 했던가. 아마 영화에서는 나히드의 예술적인 바가지 액션 그리고 환상적인 이란느와의 사랑이 그야말로 대조적으로 등장하는 장면이 인상적이었다. 그리고 저승사자 아즈라엘도 한몫 하는 것 같던데 궁금하다.

 

아, 참고로 자두치킨은 나세르 알리의 어머니가 만들어 주시던 요리로 그가 가장 좋아하는 음식이었다. 실의에 빠진 나세르 알리를 유혹하려고 아내 나히드가 만들어서 유혹했지만, 나세르 알리는 음식을 그만 뱉어 버렸다. 더 말할 필요가 없겠지. 음식을 거부한다는 것은 저승사자의 방문을 의미하는 것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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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트베르펜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4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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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사카 고타로의 <화이트 래빗>을 읽고 나서 좀 아쉬운 마음에 머리맡에 있던 로베르토 볼라뇨의 <안트베르펜>을 집어 들었다. 이미 시간은 자정을 지나 한밤중으로 치닫고 있었다. 책이 더 읽고 싶었다. 볼라뇨의 팬을 자처하는데 나는 왜 이 책을 사두고 읽지 않았을까. 하긴 어디 그런 책들이 한둘이던가. 읽다만 책들도 참 많지. 그래 볼라뇨 전작 읽기 중이니 당연히 이 책도 읽어야지 하는 마음으로 집어 들었다. 내가 얼마 전에 시집도 읽었는데 뭘하는 하는 마음으로.

 

 

칠레에서 태어나 메히코에서 교육 받은 세계인이자 반항아 볼라뇨는 스페인으로 건너가 문청 생활을 한 모양이다. 생활고를 다스리기 위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면서도 책과 글쓰기를 부단히 갈고 닦은 게 아닌가 싶다. 사실 짤막짤막한 이야기들로 구성된 소설이라기 보다 산문시에 혹은 어느 문청의 습작에 가까운 <안트베르펜>에는 훗날 볼라뇨의 방대한 작품 세계를 창조하기 위한 밑바탕이 아닌가 싶은 생각이 들었다.

 

무지하고 불초한 독자는 하나의 통일된 플롯이나 캐릭터를 기대했지만, 27세의 문청은 독자의 기대에 전혀 부응하지 않는다. 끝없이 분절되고 글을 쓸 당시의 본인이 아니라면 도대체 해석불가한 이야기들을 주절주절대고 있었다. 이걸 도대체 어떻게 해석해야 하지. 나는 알 수가 없었다. 아리따운 어린 소녀와의 사랑에 대한 이야기가 등장하기도 하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콜란 야르에게 너도 쫓기냐는 조금은 황당한 질문이 등장하지 않던가. 소녀를 성적으로 착취하는 경찰에 대한 묘사는 왜 그렇게 리얼한지. 자신이 야간 경비원으로 일하던 카탈루냐 캠핑장에 대한 이야기들, 밤바다가 당연히 검은 색인지 몰라서 그런 글들을 남긴 걸까. 아, 등대도 검다고 썼지 아마.

 

피씨통신 시절 유행하던 스키조프레닉(정신분열증)이라는 단어가 볼라뇨의 끝없이 분절되는 글 속에서 연상이 되었다. 볼라뇨의 글 덕분에 자마이카 출신 재즈 피아니스트 몬티 알렉산더의 연주도 유튜브에서 찾아볼 수가 있었다. 피아노의 리드로 시작해서, 베이스 주자의 리듬 그리고 드럼 삼위일체의 <Isn't she lovely> 라이브 연주는 그야말로 황홀했다. 털이 부숭부숭난 손으로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 대며 자신의 흥에 도취된 몬티 알렉산더의 연주에 나는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책 리뷰를 하다가 또 삼천포로 빠졌구만 그래.

 

서문에서도 밝히고 있듯이 이십대의 볼라뇨는 체류 허가증을 가진 이방인이었다. 확실히 젊은 시절 볼라뇨의 글에는 문청 특유의 오만과 분노 그리고 폭력의 이미지가 가득하다. 정확하게 인생의 좌표를 정하지 못한 불확실성의 표현이라고 해야 할까. 문학도가 보고 듣는 모든 정보들은 글쓰기의 소재다. 제목부터 안트베르펜으로 가는 길에 발생한 사고에서 유래한 게 아니던가. 소설의 제목은 카탈루냐 혹은 바르셀로나 그것도 아니라면 람블라스가 될 수도 있었겠지. 그런 임의성이야말로 이후 사반세기에 달하는 볼라뇨 문학여정의 시발점이었을 지도 모르겠다.

 

누워서 책을 보던 사람도 벌떡 일어날 만한 그런 이야기를 쓰고 싶어 수많은 불면의 시간을 보내지만, 결국 작가는 글렀다는 체념도 하지 않았던가. 바로 그런 좌절과 체념의 시간들이 굳건하게 뭉쳐서 로베르토 볼라뇨라는 작가를 만들었겠지. 그러나 <안트베르펜>은 여전히 나에게는 모호하고 분절된 이야기들의 연속일 따름이다. 큰 줄기를 이루는 내러티브의 부재 덕분에 강제된 의미찾기는 어느 순간 실종되어 버린 그런 느낌이다. 도대체 ‘파란 꼽추’는 무엇을 상징하는 걸까? 소유하지 못한 것은 파괴할 수 없다고 하는데, 어리석은 독자는 이미 읽은 것도 제대로 이해하지 못할 따름이다. 나의 유한한 삶이 뭐 그렇게 가는 거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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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2-06 12: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12월 계획대로 착착 읽고 계시네요.^^

레삭매냐 2018-12-06 13:36   좋아요 0 | URL
넵... 이제 앞으로 6권 남았습니다 !!!

얇다란 책으루다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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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보다 일기 - 서민 교수의 매일 30분, 글 쓰는 힘 밥보다
서민 지음 / 책밥상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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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전에 일기를 자주 썼었다. 물론 나도 서민 교수님의 말쌈대로 어릴 적에는 그렇게 일기 쓰기가 싫었다. 특히나 단골 방학 숙제인 그림일기는 정말 미칠 지경이었다. 지금 돌아봐도 그 당시에는 일기 쓸 꺼리가, 껀덕지가 전혀 없었다. 어제가 오늘 같고, 오늘이 내일 같은. 아니 으응? 그건 요즘도 마찬가지가 아니었던가. 특히 그 시절 나를 괴롭혔던 것은 바로 날씨 쓰기였다. 지금이야 인터넷에서 오만가지 정보를 다 제공하지만 그 시절에는 절대 알 수가 없었다. 물론 신문의 일기예보가 있었지만, 신문까지 찾아 가면서 그림일기를 그릴 틈이 없었다. 하루하루가 친구들과 어울려 놀기 바빴으므로.

 

그러다 어떤 일로 회심해서인지는 몰라도 본격적으로 일기를 쓰기 시작한 건 고등학교 때였던 것 같다 아마도. 하지만 엄마가 내 일기를 몰래 훔쳐보신다는 걸 알고서는 다 모아다가 불 질러 버렸다. 아쉬운 기록들이긴 하지만 어쩌랴 이미 다 불타 없어진 것을.

 

서민 교수님의 글을 좋아한다. 암울했던 시절 경향신문 칼럼으로 사이다 같은 시니시즘의 정수를 보여주지 않았던가. 그의 흑역사라는 <마태우스>란 책도 한 번 구해 보고 싶은 마음도 굴뚝이다. 얼마나 허접하길래 절대 감추고 싶어하시는지 말이다. 그런데 이 양반, 처음부터 글을 지금처럼 잘 쓰신 건 아니란다. 그렇지, 모름지기 글쓰기의 기본은 다독 다작 다상량이라고 하지 않았던가.

 

누군가 전율할 만큼의 글을 선보이기 위해서 우리는 글쓰기 연습을 해야 한다. 선생이 추천하는 가장 좋은 방법은 바로 일기 쓰기란다. 반성과 성찰 이런 진부한 이야기는 할 필요가 없겠지. 인간의 기억이란 유한한 법이다. 뭐 요즘 유행하는 태블릿 피씨에 전자 펜으로 쓰는 것도 좋지만, 선생은 그런 디지털 글쓰기보다 노트와 펜으로 무장한 아날로그 방식의 글쓰기를 추천한다.

 

참 그리고 역시나 시간이 없어서 글을 쓰지 못한다는 핑계 따위는 안드로메다로 날려 버리라. 한국 사람들이 스마트폰에 소비하는 시간이 평균 2시간은 된다고 하니 말이다. 하긴 나도 이런 말 자격이 있기는 한가 싶다. 며칠 전에 인스타 구경하다가 새벽에 잠이 들었으니 말이다. 그 시간에 책을 읽었으면 하는 후회는 말할 필요도 없을 것 같다.

 

물론 마구잡이로 글을 쓴다고 해서 누구에게나 호평을 받고 심지어 팔리는 글이 되는 건 아닐 것이다. 그래서 글을 좀 쓰려면 일기쓰기라는 자기객관화의 과정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리고 자기 고유의 글을 방식을 선생은 친절하게도 예문을 들어가며 우리에게 전달해 주신다. 그러니까 일종의 빨간펜 선생님 같은 역할이라고나 할까. 그나저나 나는 워낙 악필이어서 디지털 글쓰기가 너무나 편하다. 게다가 어지간한 맞춤법도 알아서 척척 해주니 얼마나 고마운가 말이다. 물론 컴퓨터를 절대 맹신하면 안된다는 조언도 해주고 싶다. 일상에서 소재 픽업과 단상들이 떠오를 때마다 얼개를 구상하고, 노트에 잽싸게 메모하는 습관도 중요하다. 나도 책 읽기를 할 때, 메모를 해두면 리뷰의 질이 그나마 나아지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에는 휘발되어 버리기가 부지기수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나의 독후감의 질이 획기적으로 나아지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말이다.

 

블로그에 쓴 글이 영원하지 않으리라는 건 사이월드의 경우를 통해 우리는 배우지 않았던가. 그렇게 사이월드의 조회수와 댓글에 목매달았지만 모든 건 한 때 뿐이다. 최근에 다시 사이월드가 부활하긴 했지만 예전의 영화는 되찾을 수 없다는 걸 모르는 걸까. 최근 선수들은 모두 얼굴책과 인스타로 갈아탔으니 말이다. 사실 이제 블로그도 한물 간 미디엄이라는 생각이 든다. 나 같은 경우에는 전적으로 나의 독서일기용으로 사용하고 있지만 말이다. 채 10념 남짓 도토리 장사로 전성기를 구가하던 사이월드의 흔적은 사라졌지만, 수천년 전 로제타 스톤은 아직도 영원한 아우라를 자랑하고 있지 않은가 말이다.

 

나같이 날림으로 글을 쓰는 아마추어들이 과연 글쓰기를 통한 표현력의 확장을 추구하는지에 대해서는 좀 더 생각해 봐야할 문제겠지만, 일기쓰기가 표현력을 발달시키는 것에도 도움이 된다는 의견에는 전적으로 공감하는 바이다. 근데 우리는 도대체 왜 일기를 써야 하는 거지? 한 마디로 말해 글쓰기가 우리 삶에 반드시 필요한다는 것이다. 카톡을 보내는 것도 일종의 글쓰기다. 대학을 가기 위해서도 자기소설을 써야 하고, 취업을 할 때에도 마찬가지다. 물론 누군가 대신 써줄 수도 있고, 비용을 내고 자기소설을 살 수도 있겠지만 역시나 자기만의 고유한 아우라를 가진 글이 필요한 순간을 인생에서 반드시 맞게 될 것이다. 이것은 하나의 예언이다. 그런데 왜 공부는 해야 하는가? 우리는 왜 살아야 하는가. 사는 건 능동이 아니라 수동이었던가... 책을 읽다 보니 이런 질문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고 이어진다. 역시 사유의 힘이던가.

 

선생은 술일기도 쓰셨다고 했던가? 아무래도 이 양반 사람들과 어울리기를 좋아하시는 모양이다. 술을 마신 와중에도 일기를 쓸 정도의 자제력이라면 존경해 마지 않을 수가 없을 듯 싶다. 냉면을 안주 삼아 쏘주를 마신 이야기와 후원금 삥땅을 빙자해서 방문한 학생들과 3차까지 내달리는 모습은 정말 쿨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다면 나도 기회가 된다면 언젠가... 우리 독서모임 달궁의 삽하나님도 기레기 시절에 서민 교수님에게 밥을 얻어 드신 적이 있단다. 멋진 양반 재인증!

 

<밥보다 일기>를 읽는 동안, 그렇다면 나도 독서일기라도 매일 같이 써볼까 우짤까 하는 망상에 젖어 보았다. 특유의 귀차니즘과 게으르니즘 때문에 그게 잘될 턱이 있나 그래. 그냥 내 페이스대로 살아야지.

 

200권 채우기 나의 얍삽 프로젝트 첫 번째인 <밥보다 일기>는 수월하게 마무리지었다. 두 번째인 로베르토 볼라뇨의 <낭만적인 개들>도 읽었다. 다음 주자는 9개의 단편 중에서 한 편만을 남겨 두고 있는 유디트 헤르만의 <여름 별장, 그 후>다. 오늘도 도서관에 가서 카를로스 푸엔테스의 <아우라>와 <블라드>를 빌려야겠다. 앞으로 8권만 더 읽으면 대망의 200권 읽기 프로젝트가 완성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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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12-04 10:22   URL
비밀 댓글입니다.

레삭매냐 2018-12-04 10:48   좋아요 1 | URL
써주신 글을 읽어 보니 정말 그렇네요...

선생님들이 마냥 일기를 써 오라 그랬지
어떻게 어떻게 써라에 대해서는 알려
주지 않았던 것 같아요. 강압적 숙제만
아니라면 좀 더 일기쓰기에 취미를 붙였
을 지도 모르겠네요 -

구구절절히 옳으신 말씀이라 격하게 공
감합니다.

목나무 2018-12-04 10:3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로그 초창기때 쓴 리뷰를 간혹 읽어보면 정말 내가 이렇게 글을 못 썼단 말이야! 하고 놀라곤 해요. ㅎㅎㅎㅎ;;;;;
뭐든 꾸준히 쓰다보니 생각도 좀더 깊게 하게 되고 요약도 좀더 깔끔해지고....... 역시 시간의 노오력은 글쓰기를 배신하지 않는 것 같아요!

레삭매냐 2018-12-04 10:49   좋아요 0 | URL
저랑은 좀 반대신 것 같아요 ㅋㅋㅋ

책 리뷰 말고, 영화 리뷰요. 그 땐 정말
열심으로 글을 썼는지 아니 신이시여
이 글을 정말 제가 썼단 말입니까 할
정도라니깐요. 지금은 너무 허접해요.
게을러져서일까요?

책 리뷰도 딱히 개선된 것 같지 않구요.
편차가 너무 심하다고나 할까요.

차라리 힘 빼고 쓴 글이 더 낫지 않나
뭐 그런 생각이 드네요.

뒷북소녀 2018-12-04 12:59   좋아요 2 | URL
ㅋㅋㅋ매냐님도 인스타 하세용?ㅋㅋㅋ
요즘에도 매일 매일 일기 쓰시잖아요. 독서 일기요.

저도 예전 글들이 훨씬 더 좋은 것 같아요. (기분탓일까요?)
지금 다시 읽어보면 어떻게 이런 생각을 했지 싶은데...
지금은 영...

목나무 2018-12-04 14:10   좋아요 2 | URL
뒷북소녀 : 매냐님도 인스타 하시는 것 같더라구.. 하지만 못찾겠음...ㅋㅋㅋ
지금도 뒷북소녀 글 좋기만 하구만.... 시간에 따라 글에도 내가 묻어나는 것 같아. :)

레삭매냐님 : 정말 영화 리뷰 잘 쓰고 싶어서 책도 몇 권 읽고 그랬는데..... 이게 또 책리뷰와는 다른 것 같아요. 뭔가 지식도 좀 있어야 하는 것 같구요. 이쯤에서 레삭매냐님 올해의 영화 선정도 급 궁금해집니다! ㅎㅎ

레삭매냐 2018-12-04 14:21   좋아요 0 | URL
뒷북소녀님 : 매일매일은요 무얼... 가끔 쓰는 걸요 -
서민 교수님이 일기를 쓰라 하셔서 ㅋㅋㅋ
분발해야겠습니다.
그리고 인스타도 합니다. 그냥 저냥 ~

설해목님 : 올해 영화를 본 게 거의 없어서리...
책만 읽다 보니 영화 볼 시간이 없다고 핑계대고
싶네요.
예전의 영화보기 기운을 되찾고 싶습니다.

cyrus 2018-12-04 14: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일기는 꼭 ‘매일‘ 기록해야 하는 건 아닌데 어린 시절에는 반드시 그렇게 써야 한다고 배웠던 것 같아요. 선생님이 일기를 검사했는데, 며칠 안 쓰면 게으른 아이로 취급했어요. ^^;;

레삭매냐 2018-12-04 16:32   좋아요 0 | URL
즐거운 일기쓰기가 되어야 하는데
검사와 강제가 결합되다 보니 반항심
에 더더욱 쓰기가 싫었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목적의식이 뚜렷한 아이가 아니다
보니 글쓰기 훈련을 위한 일기쓰기도
아니었고요. 이래서 배움이 중요한가
봅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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낭만적인 개들
로베르토 볼라뇨 지음, 김현균 옮김 / 열린책들 / 2018년 10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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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정하는 작가 로베르토 볼라뇨의 시집을 읽었다. 나는 시집을 읽지 않는다. 아주 가끔씩 읽는다. 이번의 경우에도 내가 애정하는 작가의 문학적 시원을 알아 보겠다는 의도로 도서관에 희망도서로 신청해서 읽었다. 다른 유작 소설집은 사서 읽었다. 나의 예상 대로, 시집을 다 읽고 나니 내가 뭘 읽었나 싶다. 사실 졸려서 비몽사몽 간에 읽어서 그럴 수도 있겠다.

 

모두 43편의 시들이 실려 있는 <낭만적인 개들>에는 희한하게도 볼라뇨의 모국어인 스페인 어 시 원문이 좌측에 떡 하니 자리잡고 있다. 영어는 그나마 어려서부터 접해서 대충 맞춰서나 볼 수 있지, 그런데 스페인 어는 도통 좌와 우를 맞추어 보려고 해도 답이 나오질 않는다. 한국에 출간된 책 중에 스페인 어 원문을 게재한 시가 있었던가. 아무리 생각해 봐도 분량 때문에 출판사에서 스페인 어를 실은 게 아닌가 하는 합리적 의심을 감출 수가 없다.

 

칠레 출신으로 표제작 <낭만적인 개들>에 등장하는 시구처럼 “나라를 잃은” 청년은 멕시코로 망명을 떠나 국제적 유랑인의 삶을 살기 시작했다. 어쩌면 멕시코 아니 메히코는 볼라뇨에게 제2의 조국이었는지도 모르겠다. 다시 한 번 나라는 다르지만 스페인 어라는 공통점으로 묶인 라틴 아메리카 공동체의 순기능에 대해 생각해 보게 된다. 말만 통한다면 비슷한 수준의 교육도 받을 수 있고, 일자리도 구할 수 있지 않을까. 문학가라면 스페인 어를 사용하는 문화권에서 각광받는 문학 작품을 발표할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런 상황이 부럽게 다가왔다.

 

볼라뇨의 시에 등장하는 하얀 굼벵이라는 단어가 눈길을 사로 잡는다. 도대체 무슨 의미에서 하얀 굼벵이라는 녀석을 등장시킬 걸까? 난 아마 살면서 한 번도 하얀 굼벵이를 본 적이 없는데. 2차 세계대전 말기, 나치 독일군의 마지막 격전지 중의 하나인 헝가리 벌라톤 호수라는 지명이 뜬금 없이 등장하기도 한다. 과연 볼라뇨는 벌러톤에 가보았을 걸까? 아니면 그냥 문학적 상상력일지 궁금하다.

 

도발적인 청년 시인은 에르네스토 카르데날 신부님에게 공산주의 천국에도 동성애자들과 각종 성적 유희를 일삼는 이들을 위한 자리가 있냐고 묻는다. 내가 보기에도 시인은 유물론자 같은데, 여전히 자신의 정신 세계의 근간을 이루는 종교적 색채를 떨칠 수가 없었나. 아니면 이것 역시 하나의 상징계로서 작동하는 문학적 시도 혹은 도발이려나. 이제 이 세상 사람이 아니니 작고한 시인에게 물어볼 수도 없고, 나의 답답증은 더해만 가는구나.

 

시를 읽다가 흥미롭게 느낀 점 중의 하나는 자신의 다른 소설들에 등장하는 캐릭터들이 빈번하게 등장한다는 점이었다. 두 번이나 읽기에 도전했다가 실패한 <야만스러운 탐정들>에 등장하는 루페, 에드나 리베르만/에디트 오스테르 그리고 자신을 페르소나화한 아르투로 벨라노 같은 이름들 말이다. 자신의 창작물을 울궈먹는 고전적 기법인지 아니면 서로 상호보완하는 보속적인 참신한 시도인지 시의 문외한으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방법이 없다.

 

또한 이 시집을 통해 후안 라몬 히메네스가 1956년 노벨문학상을 받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어느 정도 라틴 아메리카 문학을 읽었다고 생각했는데 나의 생각은 보기 좋게 빗나가 버렸다. 루벤 다리오의 시집도 국내에 소개되었다는 것도 알게 됐다. 여전히 나는 도대체 누가 라틴 아메리카 시인들의 시를 읽을지 궁금하다. 그런 책들을 꾸준하게 출판사들의 패기도 대단하고. 라틴 아메리카 대륙을 달리는 검은 오토바이를 당나귀에 비유한 장면도 기억에 남을 듯 싶다.

 

리뷰용으로 주저리 주저리 떠들어 보았지만 여전히 산문에 가까운 볼라뇨의 시들은 난해하기만 하다. 아마 내가 좋아하는 작가가 아니었다면 절대 읽지 않았으리라. 나의 시독해 능력은 소설의 그것에 비해 절대적으로 함량부족이기 때문이다. 어쨌든 읽었다는 점 하나만으로 만족하다고 자평한다. 나의 볼라뇨 읽기는 계속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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