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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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의 주인공 21세 닉 게스트는 옥스퍼드 우스터 칼리지 출신 수재다. 노샘프턴셔 바윅 출신으로 골동품상을 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니컬러스는 전형적은 중산층 자녀다. 그는 순전히 옥스퍼드라는 학연을 바탕으로 상류층 언저리에 기생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점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불편했다. 돈이 없다면, 공부라도 잘해서 사립학교 출신 귀족 자제들과 연분을 타고 신분상승을 해야 하는 신분의 불안정성. 한국 드라마의 질리게 등장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닉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동성애 기질을 리오 찰스라는 자마이카 출신 흑인 청년과 만나면서 자각하고 개발하게 된다. 노팅힐에 위치한 페든 가 켄징턴파크 가든스의 안주인 레이철에게 한 달에 20파운드를 주고 기생하면서, 닉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인 상류사회 속 ‘가상’의 일원이 될 수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작가가 책에서 구사하는 런던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모두 위선의 태양에 가린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닉은 자신의 연애 상대로 누구보다 더 페든 가의 장남 토비를 꿈꾸지만, 완벽한 이성애자인 토비에게 그건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깜둥이’ 리오는 그저 닉이 추구하는 헛된 욕망의 대체재였을 뿐이란 말인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은 대처가 몰고온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던 1980년대 대학(UCL)에서 헨리 제임스의 문체를 연구하던 약관의 청년이 경험한 폭풍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와 돈으로 환산되는 세속의 욕망을 파헤친 신랄한 보고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과 다른 차원의 노골적 묘사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동안 앨런 홀링허스트의 소설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 닉은 켄징턴파크 가든스라는 주위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는 이상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결코 페든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이방인 닉 게스트는 그야말로 ‘게스트’ 같은 존재였다. 오만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페든 집안이지만, 아무래도 하숙인이 사귀는 흑인 남성애인을 초대를 환영할 만한 배짱은 없었으리라. 2018년이라면 몰라도, 1983년은 아무래도 너무 이르지 않았을까. 이 닉이라는 녀석은 리오와의 첫 만남에서 억누를 수 없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노상에서 첫 경험을 하게 이른다. 그 뒤에 따르는 무수한 감정들, 시기 질투 욕망 실망 같은 자잘한 것들의 연쇄행진이 이어진다. 작가의 성적 취향이 그대로 소설에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이성애자라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미세한 점들까지도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성적 소수자들이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원동력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닉이 자신의 성적 자아를 확립해 가는 동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닉이 추구하는 욕망의 대상은 리오에서 레바논 출신 영화사업가 앙투안(와니) 우라디로 대체가 되었다. 왜 항상 닉은 그렇게 자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상류사회 근처에서 배회하는 걸까? 젊은 지식인은 이번에는 와니가 건네주는 파운드화 수표의 매혹과 코카인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하긴 닉의 애인 와니 역시 가부장 시스템의 화신이자 성공한 이민자 아버지 베르트랑에게 영혼을 팔고 언젠가 그의 후계자가 되는 조건으로 이성애자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말하는 상류계급 사회에서 위선과 가식은 불가피한 생존 요소라는 것을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청년들이 추구해야 하는 ‘순수의 시대’는 이미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린 그들의 성적 방종과 약물 남용(약물도 돈이 없으면 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계급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실종된 지 오래다.

 

그들이 향유하는 회화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적 대화는 오로지 과시를 위한 것이다. 예술적 감성이 부재한 졸부들은 키치 스타일의 그림들로 거실을 장식하고, 지인들을 부른 파티에서는 누가 더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동원할 수 있는지를 두고 경쟁한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어야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을 부르고, 키리 테 카나와를 초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바로 그 틈새를 예술비평가 닉 게스트가 파고드는 것이다. 닉에게 그들과 어울리면서 성취한 문화적 소양과 탁월한 안목 같은 비정형의 물적 토대야말로 그가 상류계급 사회에 안착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였던 것이다.

 

앨런 홀링허스트가 시전하는 켄징턴파크 가든스를 비롯한 여러 곳의 파티 장면 묘사는 소설의 백미였다. 가식과 위선으로 치장한 선수들이 등장해서 평소에는 에이랍(Arab) 사람이라고 경멸조를 부르는 이들과 동석해서 정치 현안과 후원금에 대해 논하고, 마약에 취한 젊은치들은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알량한 지식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지 않는가 말이다. 와니의 아버지 베르트랑을 "레반트의 채소장수"라고 부르는 장면은 최고였다. 지배계급의 위선적인 가식과 인종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이었다.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있겠지만, 심정적으로 동화될 수는 없다는 태초부터 상류계급이었던 이들의 의지의 강력한 표명으로 다가왔다. 홀링허스트는 마치 독자의 눈앞에서 화려한 조명 불빛 아래 돌아가는 장면들을 실황중계 하듯 전개시킨다.

 

상대적으로 나른하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후반으로 넘어 가면서 내달리기 시작한다. 페든가의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던 닉은 사업가이자 정치인 제럴드가 비서 페니와 불륜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캐서린의 대부이자 동성애자인 팻 그레이슨 삼촌이 에이즈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프랑스의 휴가지에 전해 듣는다.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국경 없는 자본의 천국 자유주의가 도래한 순간, 빅뱅(규제완화)과 신의 형벌로 알려진 역병이 쾌락주의자들을 습격한 것이다. 은혼식을 맞은 제럴드와 레이철 부부의 켄징턴파크에 마침내 고대하던 수상이 방문한다. 수상이 온다고 해서 청년들의 쾌락 추구가 멈추는 법은 없다. 코카인 흡입과 섹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리고 닉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부유하는 시대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까.

 

닉이 기생하던 쾌락의 제국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에이즈(AIDS)라는 역병이 도래한 것이다. 캐서린의 대부 팻을 필두로 해서 리오 그리고 와니가 희생자가 되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제럴드는 1987년 총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상처 뿐인 승리였다. 비서 페니와의 스캔들이 터지고,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면서 페든 집안은 그야말로 콩가루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하숙생 닉의 성적 정체성과 백만장자 와니가 걸린 병의 정체가 대중에 공개되면서 사태는 수습 불능 상태로 접어든다. 사실 그 중심에는 아버지 제럴드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캐서린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 야옹이는 페든 가 사람이었지만 닉은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집사이자 다루기 쉬운 예술비평가 같은 허깨비 같은 존재였던 닉은 믿었던 친구 토비와 레이철에게 차례로 퇴출 통보를 받는다. 물론 결정타는 추락한 가장 제럴드가 날리긴 했지만 말이다. 닉 자신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HIV 양성반응자인지 걱정할 처지가 아닌가.

 

사실 소설의 초반에는 다소 장황해 보이는 닉의 켄징턴파크 체류기와 연이어지는 파티 주유기가 지루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장 앨런 홀링허스트는 천의무봉 같은 결말을 위해 그런 사전 준비를 해둔 것이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승리로 고무된 영국 상류계급의 타락한 도덕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이 만든 부자들을 위한 규제완화 정책이 다수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에 대해 옥스퍼드 출신 엘리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현재 누리는 부귀와 쾌락이 지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블랙 먼데이라는 정글 자본주의 병폐가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파고가 몰아 닥쳐도 그들에겐 언젠가 다시 원상회복하리라는 경험에 의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에도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라며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이들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한다.

 

아무리 위선과 가식으로 분장해도, 언젠가 냉혹한 현실은 엄정한 청구서를 날리는 법이다. 닉과 리오 그리고 와니 같은 쾌락주의자들에게 에이즈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전대미문의 스캔들 속에 침몰하는 가운데, 닉이야말로 페든 가 사람들의 제단에 주어진 최상품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가족의 “일부”로 때로는 집사처럼, 때로는 모두가 꺼려하는 야옹이 캐서린를 보살피는 역할로 봉사해온 닉에게 토비와 레이철 그리고 제럴드가 난생 처음 보는 타인처럼 대하는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닉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하고,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자신들의 부정한 행위는 소거하고 닉의 동성애 스캔들이야말로 페든 가 몰락의 주역이라도 되는 듯 대하는 장면은 정말 역겨웠다.

 

앨런 홀링허스트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고른 닉 게스트의 캐릭터는 정말 대단했다. 최고 학부 출신으로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의 문체를 연구하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류층 대저택에 거주한다는 특권의식으로 무장된 성적 소수자의 입장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직접 목격한다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다소 주변과 거리를 둔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의 득세와 에이즈 발병으로 인한 죽음의 연대기에 대한 묘사도 탁월했다. 역병에 대한 심판자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시대의 불안과 고뇌를 감싸 안은 주역으로서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670쪽이나 되는 거대한 분량 때문에 독서 중에 버거웠던 적도 있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독서를 마치고 났을 때의 성취감과 보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앨런 홀링허스트에 대만족한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당연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리고 속히 홀링허스트 선생의 다른 작품도 출간해 주시길 바란다. 어서 빨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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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30 16: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출간된지 얼마 안 되었던 것 같은데 아니 벌써 완독하고 이렇게 리뷰까지...
레삭매냐님 같은 애정 독자가 있으면 홀링허스트 선생의 다른 작품도 곧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

레삭매냐 2018-11-30 16:13   좋아요 0 | URL
작년에 홀링허스트 샘의 <스파숄트 어페어>
출간되고 나서, 제발 출간해 달라고 했는데
1년이 걸렸네요 :>

앞으로 나올 책은 좀 더 출간 일정이 단축
되지 않을까 하고 기대해 보렵니다.

책은 정말 대단합니다, 올해 최고의 책입니다.

페크pek0501 2018-12-02 11:4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670쪽을 완독하신 것을 축하드립니다. 두껍겠군요.

레삭매냐 2018-12-03 09:10   좋아요 0 | URL
다 읽고 나면, 성취감이 대단하게 다가온답니다.

격려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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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들이 노래한다 - 숀 탠과 함께 보는 낯설고 잔혹한 <그림 동화> 에프 그래픽 컬렉션
숀 탠 지음, 황윤영 옮김 / F(에프)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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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들이 열광해 마지않는 디즈니 제작 애니메이션의 상당수가 저작권을 지불할 필요가 없는 야코프와 빌헬름 그림 형제의 <그림 동화>에서 비롯되었다는 걸 뒤늦게 깨닫게 되었다. 호주 서부의 시골 아저씨 숀 탠은 저자들 생전에 리뉴얼이 자그마치 7번이나 이루어진 <그림 동화>에 나오는 이야기들을 석조 조각과 토우 느낌이 나게 종이 반죽과 공기 건조 점토 그리고 아크릴 물감을 이용해서 재창조해냈다. 사실 나도 하나 가지고 싶은 생각이 살짝 들 정도로. 저자의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자신이 만든 작품(!)은 팔지 않는다고 한다. 그렇지 아티스트라면 이 정도 패기는 있어야겠지.

 

그림 형제가 1807년부터 수집하기 시작해서 1812년에 처음으로 펴낸 <어린이와 가정을 위한 이야기>에는 86편의 수집된 민화 혹은 민담이 실려 있었다고 한다. 우리가 알고 있는 신데렐라 그리고 백설공주 등의 이야기의 원래 서사는 정말 잔혹했다. 그러니까 우리가 알고 있는 이야기들은 디즈니나 다른 편집자들이 아이들 용으로 순화한 이미지라고나 할까. 반면 숀 탠 작가는 아무래도 원작에 가깝게 다시 창조해냈다는 느낌이 들었다.

 

나야 어른이니까 괜찮지만, 백설공주의 계모가 사실은 친모고 사냥꾼에게 자기 딸을 죽이고 허파와 간을 가져 오라는 명령을 내렸다면 믿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게다가 위기 서사를 겪은 공주는 자신의 결혼식날 어머니를 초대해서 공개처형에 준바하는 처벌을 내렸다. 디즈니식 해피엔딩으로 끝나는 신데렐라 역시 살벌하기는 마찬가지다. 하긴 그림 형제들도 어린이와 가정에 맞지 않다고 생각했는지 처음에 실렸던 이야기들 가운데 선별해서 18개 정도는 빼는 편집능력을 선보여 주기도 했다.

 

다시 <뼈들이 노래한다>로 돌아가 보자. 숀 탠은 그림 동화 중에서 가장 중요한 컷을 선택해서 입체화시킨다. 이미지를 우측에 배열하고, 좌측에는 축약된 이야기를 배치한다. 사실 나도 200개에 달하는 원작 그림 동화에 대해 정통하지 못하다 보니 인터넷으로 도움을 받기도 했다. 어느 신문사에서 잔혹동화 시리즈를 다루고 있어서 몇 편 읽어 보기도 했다.

 

그런데 어떤 이야기들은 우리 동양 사회에서도 들어본 것 같은 유사성이 보인다. 가령 예를 들어 나이가 들어 음식물을 흘리는 할아버지에게 나무로 만든 그릇을 주고, 부모가 구박하자 아이가 나중에 자기가 어른이 되면 부모에게 여물통을 준다는 말은 우리네 어느 동화랑 상당히 비슷하지 않은가 말이다.

 


<거위치는 소녀>의 이야기는 원래 자신이 누려야 할 것이 아닌 것을 사악한 방법으로 차지한 시녀에 대한 처벌 서사가 등장한다. 작가가 만든 대문에 걸린 말하는 말 ‘팔라다’ 밑에 떨어진 핏자국을 보지 못했다면 그리고 더 많은 이야기를 찾아보지 않았다면 아마 그냥 무심하게 넘어갔을 지도 모르겠다.

 


64번째 <새하얀 새>는 샤를 페로의 동화 <푸른 수염>과 그 맥을 같이 하는 게 아닌가 싶다. 신화, 전설 그리고 민화에 등장하는 터부(taboo)는 반드시 깨져야 한다는 진리를 담고 있다. 경고가 주어진다, 무엇무엇은 반드시 하면 안된다고. 그런데 그 이야기를 들은 이들에게 그것은 하지 말라는 것은 반드시 해봐야 한다는 메시지로 탈바꿈되어 전달된다. 보지 말라는 것은 보고 싶고, 하지 말라는 행동은 반드시 해야 한다. 그래야 뒤 따르는 그에 응징을 가하는 처벌 서사가 완성되니 말이다. 동서양을 막론한 서사의 법칙이라고나 할까.

 

Spirit Shakers : https://www.youtube.com/watch?v=So109Xuzv28

 

아무런 재주가 없는 곰손이지만, 문득 숀 탠 작가의 작업 내용을 보다 보니 나도 종이반죽과 공기 건조 점토만 있다면 작가처럼 만들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착각에 잠시 빠져 보았다. 작가가 달래 작가더냐 하고, 어설픈 창조에 나서려는 자신을 말린다. 아, 그리고 보니 집 어딘가에 오래 전에 사둔 스피릿 셰이커가 네 개 있을 텐데. 매스 아트 칼리지 출신 존 베어링굴드란 아티스트가 13년 전부터 만든 거였구나. 유튜브의 세상, 참 흥미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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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리스 민음사 모던 클래식 46
유디트 헤르만 지음, 이용숙 옮김 / 민음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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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신문기사를 통해 유디트 헤르만이라는 독일 출신 작가에 대해 알게 되었다. 그리고 부지런히 중고서점에서 그의 책을 찾을 수 있는지 알아보았다. 아쉽게도 민음사에서 모클 시리즈로 나온 작가 책 세 권 중에 두 권이 절판되었다. 오늘부터 패밀리 세일 들어간다고 하는데 혹시나 하는 마음으로 목록을 검색해 보았으나 역시나 없다. 일단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단지 유령일 뿐>은 주문했다. 대한통운이 파업 중이라던데, 당일배송이 가능할까부터 걱정이 되었다. 파업에 나선 노동자들 걱정이 아니라. 그렇게 난 이기적인 인간이었다.

 

냉큼 도서관으로 달려가 절판된 책 <알리스>와 <여름 별장, 그 후>를 빌려서 허겁지겁 읽기 시작했다. 마르케스의 <예고된 죽음의 연대기>처럼 죽음의, 사신의 그림자가 소설 시작에서부터 등장한다. 주인공은 베를린에서 죽어가는 옛 연인 미햐를 간호하기 위해, 아니 그의 임종을 지키기 위해 츠바이브뤼켄으로 달려온 알리스다. 그런데 미햐에게는 아내 마야도 아이도 있다. 굳이 알리스가 이곳까지 올 필요가 있었을까. 사실 암으로 죽어가는 옛 사랑 앞에서 알리스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아이를 데리고, 마야와 알리스가 잠시 묵을 집을 찾아다니는 장면도 처량하기 그지없다. 기묘한 것은 미햐와 알리스의 관계가 종언을 고했을 때, 바로 마야와의 새로운 관계가 시작되었다는 사실을 뒤늦게 알게 되었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해서 현재가 달라질 건 없겠지만. 결국 미햐는 죽었고, 마야와 아이 그리고 알리스는 베를린으로 되돌아간다. 모든 것이 무너져 버리고 나니 모든 일이 가능했다(42P).

 

두 번째 <콘라트> 편에서는 루마니아 남자 그리고 안나와 함께 이탈리아 몬테발도 산이 보이는 가르다 호수 부근에 사는 지인 콘라트와 로테 부부를 찾은 알리스의 이야기다. 사람 좋아 보이는 콘라트 씨는 고열로 곧 병원신세를 지게 되었다. 70세의 콘라트 부부에 비하면 젊은이인 45세의 알리스는 친구들과 누오보 폰테에서 즐거운 시간을 보낸다. 살인적 비용을 감수하면서. 그런데 알리스와 콘라트는 도대체 무슨 사이지? 어떤 사이길래 다른 친구들까지 자신의 집으로 초대한 걸까? 그 질문에 대해 알기도 전에 콘라트에게는 죽음의 그늘이 드리워지기 시작한다. 실컷 술파티를 벌인 알리스 일행이 콘라트가 입원한 병원으로 로테를 데리고 차를 몰고 갔다가 그 유명한 가르다 호수에서 수영을 즐긴다.

 

누군가는 죽어가지만 또 다른 누군가는 삶의 축복을 한껏 즐기는 모양이다. 그것이 삶의 피할 수 없는 모습일까. 일행이 집에 돌아오는 길에 주유소에 들러 차에 기름을 넣고, 돌로미티 아이스크림을 먹는 동안 콘라트는 영면에 든다. 정원사가 이탈리아 말로 그들에게 콘라트 씨의 죽음을 알린다. 비타 브루다, 그렇지 인생은 끔찍한 거지. 콘라트는 관에 실려 알프스를 넘어 독일로 갔다. 남은 이들은 타인의 죽음에 아랑곳하지 않고 여전히 삶의 순간들을 영위한다.

 

다음 주자는 리하르트다. 어느 토요일 오후, 마르가레테가 전화해서 알리스가 담배와 물이 필요하다고 한다. 곁에서 죽어가고 있는 리하르트를 간호해야 하기 때문에 잠시라도 틈을 낼 수가 없었던 걸까. 알리스는 두말 하지 않고, 독서삼매에 빠진 라이몬트에게 알리고 집을 나선다. 리하르트와 마르가레테에게 가는 길에 가게에 들러 담배 두 갑과 생수 두 병을 사서 주황색 봉투에 담아 배달한다. 그런데 또 알리스는 리하르트 부부와 어떤 관계지? 전편에서 콘라트 씨는 전염성 질환으로 돌아가신 것 같은데, 리하르트의 병명은 등장하지도 않는다. 왜 그가 자리에서 죽어 가고 있는지. 집으로 돌아온 알리스는 라이몬트는 얼음처럼 차고 달콤한 맥주를 마시고, 다음날인 일요일에는 호수를 찾아 수영을 한다. 그전 이야기들에서 부겐빌레아와 협죽도가 등장했었는데 이번에는 이름 모를 푸른 꽃이 등장한다(네번째 말테 삼촌 이야기에서는 11월 개나리다). 물론 꽃 이름은 모르겠고. 마르가레테는 리하르트가 죽기도 전에 햄버거 스테이크와 맥주를 제공하는 장례식 준비에 대해 담담하게 이야기한다. 죽지도 않은 사람의 장례식 타령이라니, 아무래도 우리네 문화와는 달라서인지 좀 이해가 되지 않았다. 좀 그렇지 않은가. 리하르트가 죽었다는 소식은 결국 듣지 못했다.

 

그런데 한 사람의 삶에서 죽음이 이렇게 가까울 수가 있는 걸까? 알리스는 사신인가? 그녀가 가는 곳마다 죽은 사람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는 것인가. 아니면, 알리스가 앞으로 임종을 맞을 이들과의 관계의 연장선에 서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내가 그동안 너무 죽음과 담을 쌓고 살아와서 죽음에 대해 아는 게 없는 것인 지도 모르겠다. 유디트 헤르만는 기묘하게도 죽음의 원인이 무엇인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을 해주지 않는다. 게이 삼촌 말테의 연인으로 추정되는 프리드리히 씨의 만남도 좀 이해하기 힘들다. 자신이 얼굴도 모르는 삼촌의 죽음에 대해 아는 프리드리히 씨와 만나 무엇을 하겠다는 거지? 사실 자신도 잘 모른다.

 

마지막 망자 라이몬트의 경우는 예전의 경우와 상당히 다르다. 자신과 함께 살던 남자가 아니었던가. 살아남은 자는 살아야 한다. 그래서 알리스는 주변 정리에 나선다. 망자가 남긴 물건을 정리하는 일은 정말 쉽지 않을 것 같다. 온갖 사연이 담긴 물건들을 정리한다는 건, 어쩌면 그 사람과의 인연도 같이 정리한다는 뜻이 아닐까. 그전 이야기에 등장했던 신원 불명의 루마니아 남자도 등장해서 사실 좀 반가웠다. 알리스 말고는 다른 등장인물에 대한 이야기가 없어서 좀 아쉬웠는데 유디트 헤르만은 그런 사실을 알기라도 하듯이, 그런 캐릭터들에 대한 전언을 남긴다. 그런데 라이몬트는 왜 죽었지, 궁금한데 작가는 알려 주지 않는다. 그것도 명백한 하나의 전략이겠지만.

 

처음으로 만난 유디트 헤르만의 소설의 곳곳에서는 창백한 고독이라는 이미지가 떠올랐다. 세상 무심한 듯 살아가는 현대인의 모습이 이런가 싶기도 하고. 삶과 죽음이라는 경계선에 위태롭게 매달린 어느 실존의 모습을 엿본 것 같은 느낌도 들었다. 기대했던 강렬한 서사는 존재하지 않지만, 어쩌면 누구나 회피하고 싶어 하는 죽음이라는 주제로 우리네 삶의 단면을 관조하고 변주했다는 점만으로도 충분한 가치가 있지 않나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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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나무 2018-11-23 15:2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앗... 저 <여름 별장, 그 후> 있어요!!! 근데 저걸 언제 왜 샀는지는 도통 기억에 없어요! ㅋㅋ
<알리스>는 중고서점에서 구해봐야겠어요! ^^
왠지 이 겨울에 어울리는 작가가 아닌가 싶네요~

레삭매냐 2018-11-23 15:38   좋아요 0 | URL
<여름 별장, 그 후>는 어제 <알리스>랑
같이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기 시작했답니다.

어째 책 좀 사서 볼라치면 죄다 품절/절판인지.

<단지 유령일 뿐>은 영화로도 있다고 하더라구요.

서가를 찾다 보면 정말 벼라별 인연으로 만나게
되는 책들이 다 있더군요. 우수수한 계절에 딱
맞는 작가라는 의견에 격렬하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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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이 남긴 증오
앤지 토머스 지음, 공민희 옮김 / 걷는나무 / 2018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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품절


 

열여섯 살짜리 흑인 남자애가 백인 경찰의 손에 죽었다. 그런데 그 친구가 만약 내 친구라면? 그리고 내가 그 현장에 있었다면? 나는 과연 그 트라우마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생전 경험해 보지도 그리고 상상도 해보지 않은 일이라 과연 어떨까 싶다. 앤지 토머스의 <당신이 남긴 증오>는 바로 그 지점에서부터 이야기를 풀어 나가기 시작한다.

 

인종주의 문제는 미국의 뿌리 깊은 문제고, 여전히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는 문제다. 소설의 주인공 스타 아마라 카터는 백인 친구들이 빈민가라고 생각하는 가든 하이츠 출신이다. 아버지는 교도소에서 3년형을 살고 출소해서 가게를 운영 중이다. 어머니 리사는 간호사로 18세에 스타를 낳았다. 어쩌면 스타의 가정은 흑인 가족들이 가지고 있는 문제의 축소판일 지도 모르겠다. 스타의 오빠 세븐은 이복형제다. 스타의 부모는 스타는 어떻게는 가난의 대물림으로부터 벗어나게 해주고 싶어, 자식들을 백인들이 다니는 윌리엄슨 고등학교에 진학시켰다.

 

그렇게 한다고 해서 흑인이라는 카터 가족의 정체성이 없어지는 걸까? 크리스 브라이언트라는 백인 남자애와 사귀고, 헤일리와 마야 같은 백인 친구들과 어울린다고 해서 백인 경찰 I-15의 총에 맞은 죽은 어린 시절 절친 칼릴 해리스가 돌아올 것 같지는 않다. 설상가상으로 스타는 더 어렸을 때, 삼총사 중의 하나였던 나타샤가 총에 맞아 죽는 걸 목격하기도 했다. 백인 경찰의 과잉진압도 문제지만, 총기규제도 좀 더 쎄게 해야 하는 게 아닌가? 아니 어쩌면 <당신이 남긴 증오>에는 인종주의와 총기규제 등 미국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모든 문제의 도가니탕일 지도 모르겠다.

 

경찰로 주류 백인사회에 편입된 스타의 삼촌 카를로스는 스타를 설득해서 경찰서에 와서 진술을 하라고 종용한다. 스타가 어려움을 이겨 가며 진술을 하는데 성공했지만, 그런다고 해서 백인 경찰 I-15의 유죄가 입증된 것은 아니었다. 당연히 비무장한 흑인 소년에게 세 방이나 총탄을 쏜 백인 경찰을 처벌하라는 흑인들의 요구가 폭동에 준하는 폭력을 수반하고 거세게 발생한다. 이렇게 되리라고 예상을 했지만, 그 예상이 적확하게 들어맞았다는 사실에 실망할 수밖에 없다. 헤일리와 마야가 스타에게 경찰 총에 맞아 죽은 칼릴을 아느냐고 묻는 말에 스타는 모른다고 거짓말한다. 거짓은 언제나 더 큰 파국을 몰고 오는 걸 스타가 과연 몰랐을까. 텀블러 친구맺기가 끊어질 걸 걱정할 게 아니라, 스타는 진실을 친구들에게 사전에 털어 놓아서 우정의 미세한 균열을 막았어야 했다.

 

마약 중독자 브렌다의 아들인 칼릴이 어떻게 해서 마약 거래상이 되었는지 스타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거리에 나온 흑인 아이들은 너무나 쉽게 범죄 조직의 손쉬운 먹이가 되었다. 가난으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휴대폰이나 농구화 같이 아이들이 너무나 가지고 싶은 물건들을 사기 위해 가장 손쉬운 방법이 바로 흑인 갱단에 가입하는 것이었다. 그런 칼릴을 마약 거래상으로 몰아 당연히 백인 경찰의 총에 맞아 죽어도 아무런 문제가 없고, 아무도 처벌받지 않는 현실이 너무나 초현실적으로 다가왔다. 자유와 정의가 넘쳐흐른다는 민주주의의 본 고장 미국의 진짜 모습이 고작 이런 것이었나. 정말 거지 같구나.

 

T.H.U.G. LIFE

 

스타의 엄마 리사가 자신의 사랑하는 딸에게 들려준 미국 흑인 사회가 직면하고 있는 문제야말로 이 책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저자 앤지 토머스가 전달하고 싶은 메시지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우리가 아무리 올바른 일을 하더라도, 일은 어디에선가 꼬일 수도 있는 법이다. 그렇다고 해서 옳은 일을 하지 않을 것인가? 그것은 아닐 것이다. 그리고 마약과 갱단이라는 일상적이고 구조적 폭력에서 벗어나기 위해서는 반드시 양질의 교육이 필요하다. 스타의 아빠 빅 마브도 고등학교 졸업장이 없어서 그 고생을 하지 않았던가. 이 세상의 어느 부모가 자신의 자식들이 거리에서 경찰이 쏜 총에 맞아 죽는 비극을 원하겠는가. 또 하나의 역설은 스타의 엄마 리사가 주장하는 것처럼, 모두가 가든 하이츠 같은 빈민가의 삶이 싫다고 해서 떠나 버린다면 남은 사람들은 어쩌란 말인가? 우직하게 빅 마브처럼 마을 공동체를 위해 활동하는 음지의 활동가도 필요한 것이다. 그리고 투팍이 한 말을 인용해서 거듭해서 주장하듯이, 분노와 증오로는 어떤 것도 해결될 수 없다.

 

사실 우리는 이미 칼릴 해리스를 쏜 경관 I-15 브라이언 크루즈 주니어가 대배심에서 풀려날 것을 예상하지 않았던가. 과연 미국 사회에 정의는 살아 있는가? 16살짜리 꼬마 흑인 소년의 목숨보다, 어이 없는 이유로 총을 쏜 백인 경관의 목소리가 더 가치있게 들리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 들여야 하는가 말이다. 더군다나 트럼프가 대통령이 된 이후, 미국 사회에서 증오 범죄가 기승을 부리고 있는 것도 사실이다. 저자 앤지 토머스는 분노와 증오 같은 감정적 대응 대신 이성적인 판단에 방점을 찍는다. 하지만 과연 내가 만약 칼릴의 형제였다면 아무 것도 하지 않고 가만 있을 수 있을까 싶은 마음이 들기도 한다.

 

앤지 토머스는 소설 <당신이 남긴 증오>에서 다양한 방식으로 미국사회에 만연한 인종주의와 폭력에 대한 서사를 구축해 나간다. 가든 하이츠 출신 스타는 주로 백인들이 다니는 윌이엄슨 고등학교에서 백인 친구들과도 무리 없이 지내야 하고, 또 집에 돌아와서는 빅 마브와 리사의 딸로 흑인이라는 정체성에 맞게 지내야 한다. 하지만 중요한 결정의 기로에 섰을 때, 빅 마브의 딸 스타는 “우리의 목소리가 무기”다라는 주장에 동조해서 경찰서에 출두하고 진술을 하고 대배심에 나가는 용감한 결정을 내린다. 결국 자신이 해야 할 일을 인식하면서 성인으로 성장하는 과정도 멋졌다.

 

Do the right thing! 더 이상 무슨 말이 필요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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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열린책들 세계문학 158
하인리히 뵐 지음, 홍성광 옮김 / 열린책들 / 2011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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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도 참 웃긴다. 이 책을 2011년에 샀는데(무려 7년 전에!) 도대체 어디에 두었는지 찾을 수가 없었다. 그래서 지난번에 읽은 <천사는 말이 없었다>를 빌리러 도서관에 갔다가 이 책도 빌려서 같이 읽었다. 분량이 적어서 부담이 없었다.

 

1952년 가을의 어느날 서독의 대도시 쾰른에서 시작된 프레드 보그너 씨의 이야기는 48시간에 걸쳐 진행된다. <천사는 말이 없었다>에서 바로 종전 당시의 풍경을 하인리히 뵐이 묘사했다면,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에서는 종전 뒤, 제법 시간이 흐른 뒤 폐허된 독일에 대한 살풍경한 모습을 다루고 있다. 소설의 주인공은 어느 성당 산하 관청의 전화 교환수로 일하는 프레드 보그너다. 자신의 월급 320마르크를 모두 아내 캐테(카타리나)에게 가져다 주고 자신은 지인들에게 돈을 빌려 호텔방을 전전긍긍한다.

 

주택관리 위원회 회장으로 힘깨나 쓰는 프랑케 부인 때문에 아내와 아이들과 함께 지내지 못하고 부랑자 같은 거리생활을 하는 중이다. 전쟁이 끝나고 별별 일들이 벌어진다고 하는데, 노동자가 안식할 곳이 없어 거리를 방황하는 게 확실히 정상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었다. 무엇보다 보그너 씨의 그런 행동이 지속가능하지 않다는 점에서 더더욱 그랬다. 자신이 한 달 동안 벌 수 있는 수입이 뻔한데, 그렇게 지인들에게 빚을 지다가는 언젠가 결국 모두에게 외면당하는 상황이 오지 않겠는가 말이다. 이미 다수의 지인들이 그의 방문을 두려워하지 않았던가. 하긴 오죽 했으면 자신이 과외를 맡은 집에서 일하는 하녀에게 돈을 빌릴 생각을 다 했을까.

 

하인리히 뵐은 이 소설을 1953년에 발표했다.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국 독일이 라인 강의 기적을 이룰 것이라고 누가 예견했을까. 지금은 사실상 유럽 대륙의 패자로 프랑스와 더불어 통합유럽을 이끌어 가는 쌍두마차가 되었지만 당시만 하더라도, 패전으로 인한 민족의 자존감 상실 그리고 빛이 보이지 않는 미래에 대한 암담함이 소설의 곳곳에 산재해 있다. 어쩌면 독일의 민족의 미래와 주인공 프레드 보그너의 그것은 동일시해도 괜찮을 정도로 말이다.

 

소설의 또 다른 시선의 보그너의 아내 캐테의 것이다. 보그너 아저씨가 어쨌든 빚을 내서 거리에서 슈납스와 굴라시 수프를 먹고, 핀볼 게임을 한다면 온전하게 세 아이의 육아를 맡은 캐테의 시간들은 더욱 갑갑하게만 느껴진다. 남의 더부살이를 하는 신세에, 이미 쌍둥이를 잃은 경험 그리고 설상가상으로 임신했을 가능성이 대두되면서 캐테의 고민은 더욱 깊어간다. 전쟁 중에 통신병이었던 보그너 씨는 비니차와 세바스토폴 같이 한때 무적의 독일군이 석권했던 러시아 평원의 격전지에서 독일 본토로 연락을 했었다고 했던가. 그런 과거의 영광이 지금의 폐허 같이 신산한 삶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건 주지의 사실이다. 캐테에게 지금 중요한 것은 일용한 양식과 지옥 같은 시간들을 버텨낼 현금뿐이다. 그렇기 때문에 여전히 사랑하는 보그너 씨와의 이별을 상상한다.

 

그런데 여전히 가부장적 시스템이 작동하는 독일 사회에서 애가 셋이나 딸린 여성이 남편의 경제적 부양 없이 가정을 유지하는 게 과연 가능했을까? 게다가 막둥이는 갓난쟁이가 아니었나. 물론 캐테의 그런 결정을 내리게 된 배경에는 무력감에 빠진 보그너 씨가 행사하는 가정폭력을 하나의 원인으로 꼽을 수 있을 것이다. 도저히 벗어날 수 없을 것 같은 가난이 횡행하는 가운데서도, 하나 같이 살찐 가톨릭 사제들과 드로기스트(일종의 쁘띠 부르주아)들의 구호가 난무하는 쾰른이라는 대도시의 삶은 사회적 양극화가 심각한 사회문제로 대두되고 있는 지금의 그것과 다를 게 없다는 느낌이 불쑥 들었다.

 

제발트 선생 덕분에 독일 폐허문학에 대해 많은 관심을 갖게 되었는데, 현장에서 패전 이후 독일의 비참한 현실을 직접 경험한 하인리히 뵐의 글을 통해 폐허문학의 실체와 마주하게 되었다. 며칠 전에 7년 전에 산 책을 드디어 서가의 귀퉁이에서 발견했다. 집에 멀쩡하게 있는 책을 두고 도서관에서 빌려다 읽었다니. 리뷰도 어떻게 대강 쓴 그런 기분이다. 리뷰가 나의 기록을 위한 것이라는 걸 생각한다면 썩 나쁘지 않은 것 같기도 하고. 그래서 책은 빨랑 읽고 나서 바로 기억이 휘발되기 전에 써야 한다니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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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북소녀 2018-11-21 12: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덕분에 웃어요^^ 저도 이런 웃긴 사례가 있어서요.ㅋ

레삭매냐 2018-11-21 13:24   좋아요 1 | URL
정말 당황스러운 장면 중의 하나는...
중고서점에 책 살 때, 이 책은 손님이
그전에 구매하신 책입니라 - 라는
멘트를 들을 때가 아닌가 싶습니다만.

뒷북소녀 2018-11-21 13:3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매창에 팝업 뜰 때도 당황스러운데 직접 그 멘트를 날려주다뇨. ㅋㅋㅋ

레삭매냐 2018-11-21 14:22   좋아요 1 | URL
가끔 내가 이 책을 샀나 안 샀나 헷갈릴
때가 있더라구요...

그런데 도대체 책은 찾아볼 수가 없고...
읽고는 싶고. 분열하는 나의 자아

카알벨루치 2018-11-21 14:0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달과 6펜스>2권 다른출판사꺼 샀다가 하나는 선물줬다는...근데 진짜 웃깁니다 다 읽고 난 후 발견한 책 ㅎ

레삭매냐 2018-11-21 14:24   좋아요 1 | URL
아 책 선물 ~~~

요즘엔 책 선물 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워낙 선수들 말고는 책을 읽지 않으니
말입니다...

저만 그런 게 아닌 것 같아 위로를 받
습니다.

카스피 2018-11-22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ㅎㅎ 떄로는 책정리를 해야되요.저도 있는 책을 또 사는 경우가 종종 있는데 그 사실을 확인하면 제 자산이 종 황당해지더군요^^;;;

레삭매냐 2018-11-22 14:13   좋아요 0 | URL
이사 핑계 대고 책정리한다고 하면서도...
선뜻 책장에서 책을 발라 내기가 너무
힘드네요.

이런 판에도 꾸준하게 책을 사대고 있으니
답답한 노릇입니다 ㅠㅠ 격하게 공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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