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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름다움의 선
앨런 홀링허스트 지음, 전승희 옮김 / 창비 / 2018년 11월
평점 :

소설의 주인공 21세 닉 게스트는 옥스퍼드 우스터 칼리지 출신 수재다. 노샘프턴셔 바윅 출신으로 골동품상을 하는 아버지 슬하에서 자란 니컬러스는 전형적은 중산층 자녀다. 그는 순전히 옥스퍼드라는 학연을 바탕으로 상류층 언저리에 기생하게 되었다. 사실 나는 그 점이 소설을 읽는 동안 내내 불편했다. 돈이 없다면, 공부라도 잘해서 사립학교 출신 귀족 자제들과 연분을 타고 신분상승을 해야 하는 신분의 불안정성. 한국 드라마의 질리게 등장하는 신데렐라 스토리와 다를 게 뭐란 말인가.
게다가 닉은 아직 깨어나지 않은 동성애 기질을 리오 찰스라는 자마이카 출신 흑인 청년과 만나면서 자각하고 개발하게 된다. 노팅힐에 위치한 페든 가 켄징턴파크 가든스의 안주인 레이철에게 한 달에 20파운드를 주고 기생하면서, 닉은 보통 사람들이라면 도저히 이룰 수 없는 꿈인 상류사회 속 ‘가상’의 일원이 될 수가 있었다. 내가 보기에 작가가 책에서 구사하는 런던 상류사회에서 벌어지는 온갖 일들은 모두 위선의 태양에 가린 그림자처럼 다가왔다. 닉은 자신의 연애 상대로 누구보다 더 페든 가의 장남 토비를 꿈꾸지만, 완벽한 이성애자인 토비에게 그건 언감생심일 뿐이었다. 그렇다면 ‘깜둥이’ 리오는 그저 닉이 추구하는 헛된 욕망의 대체재였을 뿐이란 말인가.
앨런 홀링허스트의 <아름다움의 선>은 대처가 몰고온 신자유주의 광풍이 몰아치던 1980년대 대학(UCL)에서 헨리 제임스의 문체를 연구하던 약관의 청년이 경험한 폭풍 같은 감정의 소용돌이와 돈으로 환산되는 세속의 욕망을 파헤친 신랄한 보고서다. 크리스 아이셔우드의 <싱글맨>과 다른 차원의 노골적 묘사도 적잖은 충격이었다. 어쩌면 그래서 그동안 앨런 홀링허스트의 소설들이 국내에 소개되지 않았던 것인지도 모르겠다.
소설의 주인공 닉은 켄징턴파크 가든스라는 주위로부터 완벽하게 보호받는 이상향을 출발점으로 삼는다. 결코 페든 가족의 일원이 될 수 이방인 닉 게스트는 그야말로 ‘게스트’ 같은 존재였다. 오만 가지 문제를 안고 있는 페든 집안이지만, 아무래도 하숙인이 사귀는 흑인 남성애인을 초대를 환영할 만한 배짱은 없었으리라. 2018년이라면 몰라도, 1983년은 아무래도 너무 이르지 않았을까. 이 닉이라는 녀석은 리오와의 첫 만남에서 억누를 수 없는 성적 욕망에 사로잡혀 결국 노상에서 첫 경험을 하게 이른다. 그 뒤에 따르는 무수한 감정들, 시기 질투 욕망 실망 같은 자잘한 것들의 연쇄행진이 이어진다. 작가의 성적 취향이 그대로 소설에 드러난다고 해야 할까. 이성애자라면 결코 알 수 없는 그런 미세한 점들까지도 하나 놓치지 않는 섬세함에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어쩌면 성적 소수자들이 예술 분야에서 탁월한 역량을 발휘하는 원동력으로 설명할 수 있을 지도 모르겠다.
한편, 닉이 자신의 성적 자아를 확립해 가는 동안 3년이라는 시간이 흘렀다. 그동안 닉이 추구하는 욕망의 대상은 리오에서 레바논 출신 영화사업가 앙투안(와니) 우라디로 대체가 되었다. 왜 항상 닉은 그렇게 자신이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이룰 수 없는 젖과 꿀이 흐르는 상류사회 근처에서 배회하는 걸까? 젊은 지식인은 이번에는 와니가 건네주는 파운드화 수표의 매혹과 코카인에 빠져 허우적거린다. 하긴 닉의 애인 와니 역시 가부장 시스템의 화신이자 성공한 이민자 아버지 베르트랑에게 영혼을 팔고 언젠가 그의 후계자가 되는 조건으로 이성애자 행세를 하며 살아간다. 그들이 말하는 상류계급 사회에서 위선과 가식은 불가피한 생존 요소라는 것을 저자는 지적하고 싶었던 것일까. 어쩌면 청년들이 추구해야 하는 ‘순수의 시대’는 이미 세상을 너무 일찍 알아 버린 그들의 성적 방종과 약물 남용(약물도 돈이 없으면 구할 수 없다는 점에서 상당히 계급적인 문제라고 생각한다) 덕분에 실종된 지 오래다.
그들이 향유하는 회화와 클래식 음악에 대한 지적 대화는 오로지 과시를 위한 것이다. 예술적 감성이 부재한 졸부들은 키치 스타일의 그림들로 거실을 장식하고, 지인들을 부른 파티에서는 누가 더 유명한 오케스트라를 동원할 수 있는지를 두고 경쟁한다. 도대체 돈이 얼마나 있어야 콘세르트헤보우 관현악단을 부르고, 키리 테 카나와를 초빙할 수 있단 말인가. 그리고 바로 그 틈새를 예술비평가 닉 게스트가 파고드는 것이다. 닉에게 그들과 어울리면서 성취한 문화적 소양과 탁월한 안목 같은 비정형의 물적 토대야말로 그가 상류계급 사회에 안착할 수 있는 유용한 무기였던 것이다.
앨런 홀링허스트가 시전하는 켄징턴파크 가든스를 비롯한 여러 곳의 파티 장면 묘사는 소설의 백미였다. 가식과 위선으로 치장한 선수들이 등장해서 평소에는 에이랍(Arab) 사람이라고 경멸조를 부르는 이들과 동석해서 정치 현안과 후원금에 대해 논하고, 마약에 취한 젊은치들은 자신들이 대학에서 배운 알량한 지식들을 끝도 없이 늘어놓지 않는가 말이다. 와니의 아버지 베르트랑을 "레반트의 채소장수"라고 부르는 장면은 최고였다. 지배계급의 위선적인 가식과 인종주의에 대한 날카로운 일침이었다. 같이 어울려 살 수는 있겠지만, 심정적으로 동화될 수는 없다는 태초부터 상류계급이었던 이들의 의지의 강력한 표명으로 다가왔다. 홀링허스트는 마치 독자의 눈앞에서 화려한 조명 불빛 아래 돌아가는 장면들을 실황중계 하듯 전개시킨다.
상대적으로 나른하게 전개되던 이야기는 중후반으로 넘어 가면서 내달리기 시작한다. 페든가의 투명인간 같은 존재였던 닉은 사업가이자 정치인 제럴드가 비서 페니와 불륜에 빠졌다는 사실을 알게 되고, 캐서린의 대부이자 동성애자인 팻 그레이슨 삼촌이 에이즈로 죽었다는 충격적인 소식을 프랑스의 휴가지에 전해 듣는다. 대처리즘으로 대표되는 국경 없는 자본의 천국 자유주의가 도래한 순간, 빅뱅(규제완화)과 신의 형벌로 알려진 역병이 쾌락주의자들을 습격한 것이다. 은혼식을 맞은 제럴드와 레이철 부부의 켄징턴파크에 마침내 고대하던 수상이 방문한다. 수상이 온다고 해서 청년들의 쾌락 추구가 멈추는 법은 없다. 코카인 흡입과 섹스가 끊이지 않고 이어진다. 그리고 닉은 그 모든 것의 중심에 서 있다. 어디로 흘러갈지 모르는 부유하는 시대의 상징이라고 해야 할까.
닉이 기생하던 쾌락의 제국은 순식간에 붕괴했다. 에이즈(AIDS)라는 역병이 도래한 것이다. 캐서린의 대부 팻을 필두로 해서 리오 그리고 와니가 희생자가 되었다. 호사다마라고 했던가? 제럴드는 1987년 총선에서 가까스로 승리하기는 했지만 상처 뿐인 승리였다. 비서 페니와의 스캔들이 터지고, 부정부패 사건에 연루되면서 페든 집안은 그야말로 콩가루가 된다. 설상가상으로 하숙생 닉의 성적 정체성과 백만장자 와니가 걸린 병의 정체가 대중에 공개되면서 사태는 수습 불능 상태로 접어든다. 사실 그 중심에는 아버지 제럴드에 대한 증오에 가까운 감정을 가지고 있는 캐서린이 있었지만, 문제는 그 야옹이는 페든 가 사람이었지만 닉은 처음부터 그럴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다는 점이다. 집사이자 다루기 쉬운 예술비평가 같은 허깨비 같은 존재였던 닉은 믿었던 친구 토비와 레이철에게 차례로 퇴출 통보를 받는다. 물론 결정타는 추락한 가장 제럴드가 날리긴 했지만 말이다. 닉 자신부터 다른 사람이 아니라 자신이 HIV 양성반응자인지 걱정할 처지가 아닌가.
사실 소설의 초반에는 다소 장황해 보이는 닉의 켄징턴파크 체류기와 연이어지는 파티 주유기가 지루하게 느껴진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거장 앨런 홀링허스트는 천의무봉 같은 결말을 위해 그런 사전 준비를 해둔 것이었다. 세계화와 신자유주의의 정치적 승리로 고무된 영국 상류계급의 타락한 도덕상은 상상을 초월했다. 자신이 만든 부자들을 위한 규제완화 정책이 다수 민중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치게 될 지에 대해 옥스퍼드 출신 엘리트들은 전혀 관심이 없다. 그저 자신들이 현재 누리는 부귀와 쾌락이 지속되길 바랄 뿐이었다. 블랙 먼데이라는 정글 자본주의 병폐가 만들어낸 전대미문의 파고가 몰아 닥쳐도 그들에겐 언젠가 다시 원상회복하리라는 경험에 의한 자신감이 있었던 것이다. 국가부도의 날에도 나와 상관 없는 이야기라며 ‘지금 이대로’를 외치며 샴페인을 터뜨리던 이들이 있었다는 걸 우리는 기억한다.
아무리 위선과 가식으로 분장해도, 언젠가 냉혹한 현실은 엄정한 청구서를 날리는 법이다. 닉과 리오 그리고 와니 같은 쾌락주의자들에게 에이즈가 그런 것이 아니었을까. 전대미문의 스캔들 속에 침몰하는 가운데, 닉이야말로 페든 가 사람들의 제단에 주어진 최상품의 희생양이 아니었을까. 가족의 “일부”로 때로는 집사처럼, 때로는 모두가 꺼려하는 야옹이 캐서린를 보살피는 역할로 봉사해온 닉에게 토비와 레이철 그리고 제럴드가 난생 처음 보는 타인처럼 대하는 장면은 잊지 못할 것 같다. 그럴 거였으면 처음부터 닉에 대해 냉정한 판단을 하고, 집에 들이지 말았어야 하는 게 아닌가. 자신들의 부정한 행위는 소거하고 닉의 동성애 스캔들이야말로 페든 가 몰락의 주역이라도 되는 듯 대하는 장면은 정말 역겨웠다.
앨런 홀링허스트가 자신의 페르소나로 고른 닉 게스트의 캐릭터는 정말 대단했다. 최고 학부 출신으로 대학원에서 헨리 제임스의 문체를 연구하면서, 누구나 부러워하는 상류층 대저택에 거주한다는 특권의식으로 무장된 성적 소수자의 입장에서 시대를 관통하는 흐름을 직접 목격한다는 게 누구나 할 수 있는 경험은 아닐 테니까 말이다. 다소 주변과 거리를 둔 상태에서 신자유주의 정권의 득세와 에이즈 발병으로 인한 죽음의 연대기에 대한 묘사도 탁월했다. 역병에 대한 심판자가 아니라, 어쩌면 자신도 희생자가 될 수 있다는 시대의 불안과 고뇌를 감싸 안은 주역으로서의 모습도 나쁘지 않았다.
670쪽이나 되는 거대한 분량 때문에 독서 중에 버거웠던 적도 있었다고 고백해야 할 것 같다. 하지만 이런 독서를 마치고 났을 때의 성취감과 보상은 기대 이상이었다. 내가 처음으로 읽은 앨런 홀링허스트에 대만족한다. 올해 읽은 책 중에 당연 다섯 손가락에 꼽을 정도다. 그리고 속히 홀링허스트 선생의 다른 작품도 출간해 주시길 바란다. 어서 빨리.